대공장에서 현장권력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 소모임의 역사
장희수
<사회주의노동자신문>창간호, 2005.09.
노동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현장권력’이란 단어가 실종된 지 오래다. 90년대 초중반부터 바닷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그러나 빈틈없이 현장 구석구석을 밀고 들어오기 시작한 자본의 신경영전략 앞에서 당시 노조집행부와 현장 활동가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작업장 내 미세한 힘의 변화를 현장의 노동자들은 피부로 느꼈지만 ‘잃어버린 현장권력을 되찾아야한다’는 절박함과 위기의식으로부터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선 것은 이미 소모임, 대의원 등 노조의 현장기반 상당부분이 사측에게 먹혀버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이 글에서는 87년 대투쟁의 진원지였던 대공장을 급격한 침체로 몰아넣은 새로운 자본공세의 핵심이 바로 ‘조합원들의 일상의식과 현장 내 인간관계의 포섭’에 있었음을 밝힐 것이다. 그를 통해 전투적인 과거 남한 노동운동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오늘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현장권력’이란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대중에 대한 활동가들의 ‘일상적 장악력’에 다름 아님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최근 몇 년간 뼈아프게 실감하고 있는 운동의 급속한 후퇴는 10여년에 걸쳐 현장에 관철된 신경영전략의 후과이자 그 성과들이 공고하게 축적된 결과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대중적 지반을 현장 내에 다시 구축하기 위한 활동가들의 치밀한 계획과 준비, 자본에 잠식당한 대중의 의식과 정서를 복원하려는 줄기찬 노력 없는 ‘현장권력 쟁취’란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
87년 여름까지 독점자본의 폭압적 노동관리에 억눌려있던 대공장에서는 현장소모임이 비공개·비합법적으로 존재했다. 그것은 7,80년대처럼 지식인 집단, 정치세력과의 직접적 연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용노조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강경파들과 민주노조 건설을 열망하는 현장 내 극소수 선진노동자들이 모이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경험이 축적되지 않은 대공장에서 이러한 소모임이 비조직적인 형태로 공장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극히 제약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대중적 진출이 이루어지는 87년 대투쟁을 분기점으로 계급지형이 역전되면서 이전까지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었던 현장소모임은 공개적·대중적인 형태로 광범위하게 결성된다. 짓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관리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자생적 전투성을 과감하게 표출하였던 87~90년 동안 대규모 파업과 가두시위, 공장점거의 물결이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별·반별모임, 파업동지회, 문예패, 학습써클 등 공식·비공식적인 노동자모임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연일 지속되는 위력적인 파업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높은 단결력, 동지적 연대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소모임 참여비율은 상당히 높은 수치였는데 이는 87년 7~9월 대중투쟁이 가져다 준 사회적 파급력으로 인해 현저하게 고조된 대중들의 자신감과 집단적 의식의 성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각종 친목회에서부터 활동가 조직, 민주노조의 골간체계인 선봉대와 대소위원회까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던 현장소모임은 뛰어난 조직성과 규율성을 자랑하며 장기간의 전투를 유지시키는 기간부대를 단련, 결속시켜내고 노동자들 사이에 동지애와 공동체적 감수성을 키워내는 공간이었다.
어용집행부를 쫒아내고 민주노조가 들어선 이후에 이들 소모임은 이합을 거듭하면서도 목적의식성을 분명하게 띠고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주된 동력 중 하나는 지도부의 배신을 넘어서 노조를 민주적으로 강화시키려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이었다. 정치적으로 허약한 1기 민주집행부가 합법주의와 개량의 유혹에 젖어 들어갈 때, 불신임을 주도하고 기꺼이 총대를 메고자 하는 선진노동자들이 노민추와 현장조직으로 뭉치기 시작했으며 이는 거의 모든 대공장에서 동일하게 나타났다. 87~92년까지 자본가 권력에 대항한 투쟁전선을 주도하며 수많은 소모임의 건설과 해체, 재결성 과정을 겪었던 현대중공업의 경우, 비공개 모임으로 존재하던 ‘선봉’그룹이 직권조인하고 도망한 위원장을 대신해 88년 128일 파업투쟁에서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와 추인을 받으며 투쟁지도부로 올라선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현장권력의 기초이자 반영으로서의 현장소모임
87년 대투쟁을 거치며 급격히 상승한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권리의식은 관리자들을 주축으로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통제가 이루어졌던 기존 현장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노조와 대의원들이 제한적인 수준에서나마 작업조건에 관한 통제권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민주적이고 자발적인 노동규율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가 노동자들의 문화와 작업장 분위기를 규정하게 된다. 당시 투쟁과정에서 형성된 노동자들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현장소모임의 활성화 정도와 그것의 계급적 성격은 노동자 대중에 대한 주도권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는 세력이 어디인지-노동조합인지 사측인지-에 의해 좌우되었다. 현대정공·현대중공업의 ‘부서동지회’는 직장민주화와 작업조건 개선 등 현장사안을 요구로 내걸고 투쟁에 나섰으며 특히 선진역량이 모여 있었던 ‘노민추’는 노조지도력의 강력한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즉 현장소모임은 노조 및 활동가와 조합원 대중 사이를 잇고 그들에게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연결고리이자 현장권력의 기초였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력을 길들여 생산의 안정성을 높이려는 사측에게 이는 힘으로 눌러 무력화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89년 대우조선 임투의 열기를 꺽으려는 사측의 노민추를 겨냥한 악선동과 탄압, 작업조건에 대한 규제력을 둘러싼 사측과 노조 간 대립이 관리자-대의원과 현장활동가 사이의 각축전으로 끊임없이 현상되었던 것, 뒤에서 구체적으로 서술하겠지만 중간 관리자층에 도전하는 대의원들의 막강한 파워로부터 조합원들을 탈취하려는 자본의 소모임 조직화 시도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노조의 현장권력을 굳건하게 지탱하던 현장소모임이 90년대 초부터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단사와 작업장 차원에서의 사소한 힘의 균형이 노자 간 대립전선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과 그것의 역동성에 먼저 주목하고 행동에 돌입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자본이었다. 남한 노동계급이 거대한 첫걸음을 떼고 90년대를 향해 힘차게 진군해야 할 시기에 대중투쟁의 파고가 급격하게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 결정적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90년대 초부터 대공장 독점 자본가들의 시선은 아래, 즉 현장 밑바닥을 향했다. 87년 이후 노사관계의 지형변화가 그들에게 준 깨달음은 ‘노조가 쥐고 있는 진지를 공략하지 않고서는 현장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또 이전까지 절멸의 대상이었던 민주노조를 효율적 생산을 위한 협조자, 노동자들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의 수단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는 공통된 인식 아래 이들은 연구소를 동원하여 새로운 통제의 방식과 내용을 개발하는데 혈안이 된다. 이때부터 공장 내에서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점진적으로 개조하여 자발적 동의를 유도하기 위한 기업문화와 사상교육이 실시되고 사측은 중간 관리자들을 이용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동시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신경영 전략의 내용과 성격은 무엇이었는가?
현장 기초질서의 파괴와 재편을 위한 소모임의 활용
91년부터 대공장 자본의 노동통제는 기존에 노조가 쥐고 있던 현장의 기초질서를 파괴하고 조합원들 사이의 인간관계를 재편함으로써 밑에서부터 지배력을 다시 세워내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87년 대투쟁 당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자본가들은 가장 전투적이고 선진적인 역량의 집결지로서 대공장 노조의 지위를 떠받치는 기틀이 소수의 선도성과 헌신성 뿐 아니라 노동자들 사이에 유대감을 강화시키는 광범위한 현장소모임과 기층 조직화 활동에 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자본은 주로 노조집행부를 겨냥한 이전까지의 강압적인 관리방식에서 생산현장을 중심으로, 전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부드럽고 점진적인’ 통제방식으로 선회할 필요성을 느꼈다. 동시에 작업장 내 규율을 엄격하게 재확립하기 위하여 소모임(소그룹) 활동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공장과 작업장 내 노동자들을 연결하는 노조의 비공식 망으로서 현장에 투쟁의 활력을 불어넣던 노조 주도의 소모임 활동이 자본의 지배수단이자 노동자 관리기구로 역이용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사측의 주도하에 향우회, 팀·반장 모임, 부녀자 모임 등이 만들어졌고 다른 대공장의 경우에도 조합원의 가족, 주거지역으로까지 그 대상과 범위를 넓혀 여가활동클럽이나 주부대학, 문화활동모임 등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현장투쟁을 통해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자발적 소모임이 계급정체성과 동질감을 형성하는 수평적 연대의 기반이었다면, 사측이 만든 소모임은 이러한 조직된 힘을 갈가리 찢어 분산시켜 놓는 것이었다. 자본은 여기서 나아가 ‘경영혁신’을 내세우며 생산성 극대화를 위해 작업과정에 이러한 소모임 방식을 도입하면서 노동통제의 효과를 동시에 노렸다. 이의 대표적 사례는 경영위기를 배경으로 ‘산업평화와 건전한 노사관계’를 내세우며 89년 신경영전략의 첫 테이프를 끊은 대우조선의 ‘반생산회의’, 이를 모방한 대우자동차의 ‘한마음생산회의’이다. 생산단위에 기반한 이 전략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자 현대중공업은 ‘두레활동’을 1995년부터 현장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한마음생산회의’는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회사에 대한 노동자들의 거부감과 적대감을 희석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기업문화부를 신설하여 조합원에게 정서적·문화적으로 다가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한편 팀워크를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직장단위로 작업자모임을 구성해 사측의 이념과 정책으로 모임을 운영하고 의식화 작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작업장에서의 소집단 활동이 가장 고도로 발전된 형태는 ‘두레활동’인데 이 경우도 현장 내 인간관계를 현장 감독자가 중심이 된 반 조직을 축으로 묶어내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과거 대소위원을 중심으로 또는 현장 소모임으로 묶여진 인간관계망을 회사의 직제를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현장관리자들이 반 회식, 부서체육대회는 물론 각종 취미서클을 지원하고 경조사까지 챙기면서 조합원들의 생활이 펼쳐지는 생산현장과 주거지를 오가는 집요함과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이것들은 각기 따로따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대공장 특유의 반 단위-부서 단위-공장 단위-전 공장 단위로 중층화 된 공장 내 체계에서 전 노동자들에 대한 전일적인 지배를 의미했다. 게다가 자본주도의 소모임 활동이 자본의 강력한 기업문화운동과 결합되어 기업공동체 이데올로기, 생산성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주입시키는 통로로 기능함으로써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의식이 약화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또 강화되는 노동강도 등 작업조건에 대한 불만이 관리자들에 대한 인간적 친분관계와 반간 경쟁심리로 완화되면서 노동자들의 집단적 정체감 또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상조회나 대의원 후원회, 현장동지회는 깨져나갔다.
이 시기 자본의 현장통제력 회복은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이 패배한 직후 투쟁의 일시적 소강상태를 노리고 본격화된 현장관리자들의 세력화와 맞물려 있다. 그것은 노조와 대의원에 대한 조합원들의 지지를 찬탈하여 기존의 관행을 뒤엎는 것을 목적했다. 자본은 노조활동에 대당하는 현장관리활동을 강화시켜 조합원의 고충처리를 반장과 팀장이 전담하게 만들었으며 작업과정에서 관리자들이 베푸는 인간적 배려와 온정주의적 태도는 적극적인 조합원과 현장활동가들에 대한 배제와 교묘하게 결합되었다. 또한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조합원들의 경제적 지위 상승욕구를 이용하여 승진에 관한 인사고과권을 과장급이 아니라 반장이 쥐게 함으로써 이들에게 일종의 권능을 부여하는 방식을 취했다. 뿐 만 아니라 관리자들은 자신의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노조활동가와 경쟁하기 시작했고 “하나의 집단적 세력과 이해집단으로 현장에 자리잡아가고 있는 추세”에 이르렀으며 87년 이전 군대식 작업장 질서를 유지하는 중간고리였던 직·반장의 추락한 권위는 팀, 반별로 분열된 조합원들과의 우호적인 관계형성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복구되었다.
전투적 세력과 활동가로부터 대중의 체계적 분리
앞서 언급했듯이 자본의 이러한 전략이 제대로 먹힌 배경에는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의 패배, 91~92년 현대자동차 상여금 투쟁의 후퇴가 놓여있다. 대규모 투쟁이 공권력의 탄압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이것이 노조의 자발적인 철수로 이어지자 노동자들은 투쟁역량의 소모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87년 국가권력과 독점자본의 폭력적인 노동관리를 딛고 떨쳐 일어남으로써 대중들의 자신감은 현저하게 고조되었지만 투쟁의 패배와 무노동무임금 이데올로기가 주는 피해의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91년 한 해 동안의 파업건수가 처음으로 87년 이전보다 낮은 수치를 기록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때부터 자본은 현장관리자의 입을 통해 ‘파업은 해서 뭐 하냐’는 논리를 퍼뜨려 조합원들의 동요를 부추기고 민주집행부와 투쟁세력의 입지를 축소시키기 시작했는데 현대중공업의 경우는 90년 골리앗 전사들이 크레인에서 내려오고 많은 활동가들이 구속·수배·해고 된 이후 실리주의를 표방하는 노사협조주의 경향의 현장조직이 최초로 등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활동가들의 주요활동 근거지인 노조에 개입하여 간부들 성향과 내부사정, 현장의 제 문제와 정보를 먼저 간파하여 현장 대응력을 높여, 현장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현장을 반 단위 공간으로 구획한 것은 조합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려는 의도였지만, 이들을 분리시켜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의 일상적인 만남과 접촉을 차단시키려는 목적도 컸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의 애사심을 강조하기 위해 현장에는 회사정책이 담긴 홍보물이 대량으로 배포되고, 신입사원과 초선대의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사측의 끈질긴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전투적 활동가들이 그들과 다른 집단이라는 선입견과 분리의식을 갖게 하는 일종의 의식개조 과정이었다. 지당한 원칙을 부르짖는 활동가들은 의식적으로 단련되지 못한 대다수 조합원들에게 의리상 외면하기는 어렵고 필요는 하지만 부담스러운 이질적인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민주집행부가 개량적 행보를 거듭하면서 87년 대투쟁이 가져다 준 도덕적 우월감과 투쟁의 감성적 효과는 떨어졌다. 현장활동이 침체에 빠진 90년대 중반에 와서는 기존 대의원들의 활동영역을 현장관리자들이 대부분 차지하면서 더 이상 조합원들에게 “대의원의 끗발이 먹히지 않는” 기막힌 광경이 연출된다.
활동가들은 왜 대응에 실패했는가?
결과적으로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대우조선의 91~94년, 현대중공업 95년~현재까지의 무쟁의가 말해주듯, 상당한 노조조직력의 약화와 현장동력의 하락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자본이 이렇게 입체적이고 치밀한 방식으로 밑으로 치고 들어와 다시 작업장에서의 지배권을 되찾는 동안 노조집행부와 현장활동가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87년 이후 현장통제권을 둘러싸고 자본과 끊임없는 쟁탈전을 벌이는 가운데 노조가 무기력하게 손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제대로 된 상황진단과 올바른 대응’이었는가 이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현장에 밀려온 미세한 변화를 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듯이 당시 노조집행부와 현장활동가들에게는 그것이 ‘급격한 반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신경영전략의 도입 초기, 자본의 현상적인 탄압에만 주목한 당시 대다수 노조는 즉자적 반발을 조직하는 데 머물렀으며 언제라도 대중은 분노로 떨쳐 일어설 것이라는 주관적인 판단과 근거없는 확신에 빠져있었다. 자본은 힘의 균형을 둘러싼 사활적인 ‘권력싸움’으로 규정하고 현장의 기초질서를 파괴하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반면, 노조는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 상황적 요구에 따라 움직였던 것이다. 노조집행부 뿐 아니라 노민추를 비롯한 현장의 선진적 활동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 또한 자본의 변화된 전략을 읽어내고 대중운동의 상태에 맞는 장기적 대응방향을 잡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전투적인 활동가들은 과거의 방식에 의존하는 활동경향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에 대한 역편향으로 당시 노동운동 내부의 이데올로기적 분화를 반영하여 일부 대공장에서는 소위 ‘신노선’이 등장했다. 신노선은 노조활동방식이 ‘조합원들의 생활양식의 변화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을 기초로 신경영전략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의 일환으로서 제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점과 방식에 있어 계급적으로 대단히 불철저한 것이었다. 신노선의 소재지인 대우조선 노조의 경우, 노동과정에 대한 노조 개입의 필요성이 집행부의 타협주의 노선과 맞물려 노조상층부의 ‘자본경영(생산)에의 정책적 참가’라는 개량적 처방으로 나타났다. 대우조선 자본의 철저한 반노조 공세와 노조의 취약한 조직력으로 인해 당시에는 노조의 ‘구상’으로 그쳤지만 이후 노동운동 내에서 ‘사회적 조합주의 경향’의 한 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렇게 신경영전략에 대한 대응의 양상과 실패의 원인은 90년대 초중반까지 대공장 현장조직을 중심으로 진행된 전투적 흐름과 대공장 노조의 노선이 ‘투쟁’에서 ‘참여’로 전환한 95년을 기점으로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노조집행부에서 등장한 개량적 흐름 두 가지로 구분해서 지적할 수 있다.
대중운동의 상태와 괴리된 전투적 활동가들의 관성적 활동방식
신경영전략이 들어오던 초기,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소모임의 장악과 기존 현장질서의 해체를 노리는 자본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중이 겪고 있는 혼란과 상태변화에 촉각을 세우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어찌보면 당시 활동가들의 의식과 실천을 규정지었던 대중활동 및 일상투쟁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필연적인 것이었다. 당시 민주노조의 건설주체로서 노민추의 핵심을 이뤘던 선진적인 활동가들은 87년부터 2~3년간 고양된 운동정세 속에서 어용타도 투쟁과 공권력과의 첨예한 충돌을 겪으며 배출된 전투적 노동자들로 소모임과 현장 대·소위원, 노조간부 활동을 통해 단련되어 왔다. 이들은 그러한 경험으로 터득한 투쟁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주노조 사수’를 중심에 놓고 거침없이 싸워왔다. 그러나 그들의 활동에서 대중에 대한 고려, 즉 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합원들의 요구사항과 관심, 계급적대감이 어떻게 좌우되는지, 그에 맞는 조직화 방법과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일상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은 결여되어 있었다.
폭발적인 대격변기를 거치면서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은 상승했지만, 역사가 비교적 짧은 대공장에서 한 시기의 투쟁이 모든 노동자를 단련시킨 것은 아니었으며 사측의 관리방식이 변화하고 파업무용론이 확산되는 시점에 이르러 동요하는 노동자층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했다. 자본의 전략은 바로 이러한 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또한 노조가 배제된 기업의 각종 문화행사와 교육, 공식·비공식적 인간관계를 통한 반동세력의 조직화, 금전적 보상과 후생복지제도의 확대를 통한 포섭은 현장의 이데올로기적 분화를 촉진시켰다. 87년-90년 대중적 투쟁열기 속에서 파괴력을 발휘했던 대규모 전면전과 가두시위, 선도적 투쟁은 정권의 강경한 탄압공세에 의한 주요투쟁의 패배와 지배체제의 변동이 낳은 조합원들의 의식변화 앞에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 게다가 일정한 포섭과 개량화 전술을 동반하며 자본의 공격은 새로운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조합원들의 자생적 분노와 가두선동에 의존한 노조집행부의 투쟁기조와 방식은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도, 대중을 다시 불러 모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다시 현장대중과 활동가들을 잇는 매개고리와 접촉의 수단을 찾아 노조에 대한 대중들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조합원들의 피해의식과 패배감을 씻어내는 작업, 수평적 연대질서를 복원함으로써 노동자들 간 결속력을 다지며 다음 투쟁을 대비하고 준비시키는 작업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이것은 말처럼 간단하지도, 짧은 시간에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없이 ‘현장재탈환’이란 꿈조차 꾸기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전투적인 활동가들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난국을 공세적으로 돌파하기 위한 결정적 전 술”을 짜내고 기존의 투쟁패턴에 따라 대중동력을 움직여내는데 있었다. 사측의 기만적 책략을 ‘폭로와 실력행사’로 분쇄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는 자본의 용의주도한 현장밀착 관리에 대당하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87년 이후 거의 모든 대공장에서는 세련되고 합리적인 냄새를 풍기는 노사공동체 의식을 맨투맨 관리방식과 교육, 각종 문화적 수단을 통해 조합원들에게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껴지게끔 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측에 대한 적대감이 서서히 수그러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활동가들이 꼽은 활동상의 가장 큰 어려움은 조합원들과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조합원들과 만나는 통로가 현장관리자들의 감독강화와 사측 주도의 팀 활동으로 인해 끊겨 있었다. 따라서 현장소모임에 대한 일상적 관리를 강화하고 작업장 환경의 변화와 관리자들과의 사소한 충돌로 발생한 산발적인 저항의 흐름을 하나로 모아내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관리자와의 충돌을 감수하면서 조합원을 끌어당기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은 다만 일부 부서에 한정되어 진행되거나 아예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활동가들끼리 술 먹는 모임은 있었지만 활동력은 없었다”. 이는 당시 활동가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현장대중으로부터 활동가의 격리는 자본이 의도한 바였다. 그러나 이를 저지하고 분쇄하기는커녕 조합원대중과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놓아 버리면서, 활동가 스스로 섬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신경영전략을 초기에 막아내지 못하면서 민주대의원들의 숫자는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조합원들의 현실안주와 개인주의 경향이 눈에 띠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무능력을 조합원들이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는 사측의 현장장악에 대응할 새로운 무기를 갖추지 못한 활동가들의 무력감, 자신들의 주관적인 기대에 ‘꿈쩍도 하지 않는’ 조합원들에 대한 실망감이 굴절되어 나타난 것이다.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자판기 취급하며 노조와 사측 사이에서 제3자인 듯 관망자적 태도를 취한다는 논리가 퍼져나갔다. 심지어 “계기만 주어지면 일어설 것이다”라는 대기적 자세와 대중의 상태에 대한 몰이해, “조합원들 맛이 갔다” 또는 “한번 당해봐야 안다”는 삐뚤어진 심리와 활동의 포기로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90년대 중후반, 현장 활동가들이 신경영전략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조합원들과의 결합, 일상활동의 복원을 선언하고 나섰을 때는 이미 기존에 노조 권한이 거의 사측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민주파 대의원이 과반수를 넘지 못하고 있는 곳이 허다했으며 활동가모임의 회원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활동을 재전환해야 할 필요성을 활동가들은 누구나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현장조직들이 보여준 주요활동은 학습, 홍보물 배포, 선거활동, 단·임투와 같은 노조싸이클에 개입하는 수준이었으며 여전히 노조의 민주화를 주요과제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현장권력을 복원해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에 걸맞게 조합원을 참여시키고 주체화시키는 ‘일상 활동체계’는 기존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선언적 방식의 활동, 노조지침에 의존하는 소극적 실천 속에서 공문구가 되버렸고 조합원들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못했다.
조합원들의 개인주의 정서에 영합하는 관료적 대안, ‘신노선’
또 다른 대응은 자본의 새로운 지배수단인 신경영전략의 두각이 완연히 드러난 90년대 중반 이후 노조의 전략변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소부르주아 노동학자들과 영남노동연구소 같은 노동단체 일각에서 신경영전략에 대한 긍정적인 대응사례로 손꼽는 95년 대우조선노조의 ‘신노선’으로 당시 6대 백순환 집행부 주도아래 추진되었다. 신노선은 명백히 ‘우회로’를 취했다. 이는 자본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했고, 또한 신노선의 핵심이 생산계획회의, 인사고과 등에 대한 노조의 참가권 및 발언권 확보 등으로 현재 노동운동 내 우익적 이데올로기인 ‘참여적 노사관계’의 시초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신노선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반생산회의를 자율적 팀 제도로 변화시키는 제안’, ‘노사협의회 등 참여공간의 활성화’, ‘사용자와의 신뢰관계 조성을 위한 현장질서지키기 운동’ 등 “자율과 책임의 노사관계”를 기치로 한 방안들이다. 또한 그 속에는 지역주민과의 연대사업 등 다분히 탈공장적 요소도 끼어 있다.
이러한 ‘신노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두 가지다. 하나는 89년 이전까지 노사관계에서 부각되었던 국가의 존재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등장과 함께 뒤안길로 밀려나고 개별자본이 노사관계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서 노사협의기구 등을 통해 노조가 경영에 개입할 여지가 생겨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 내 노선분화가 급속하게 진척되었다. 다른 하나는 조합원들의 분위기와 의식의 변화이다. 이는 당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의 임투 집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조합원들의 저조한 참석률, 쟁의결의안의 부결, 잠정합의안에 대한 담담한 반응 등이 대변해주고 있다. 자본의 신경영 전략이 어느 정도 정착된 90년 중반에 이르면 87년 투쟁 당시 청년층이던 대부분의 대공장 노동자는 생활상태의 개선과 상당한 임금인상으로 인해 경제적 상태, 생활양식, 사고방식의 변화를 겪게 된다. 다양한 삶의 문제에 대한 조합원들의 관심과 욕구는 정부의 국가경쟁력강화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노자간의 대립지점을 희석시켰고 이러한 조합원들의 상태는 언제부터인가 활동가들 사이에서 ‘실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조합원들의 이러한 실리적 태도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것을 끊어낼 방법은 무엇인지; 계급적 관점에 선 철저한 대응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전투적 활동가들의 경우 임기응변식 대응이나 대중의 상태에 대한 현상적인 진단으로부터 짙은 패배감에 빠져있었다면, 대우조선을 비롯한 일부 노조집행부의 경우 조합원들의 현실적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과 개인주의 정서에 영합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당시 집행부가 “과거처럼 파업과 쟁의를 중심으로 한 대립구도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대변할 유연하고 구체적 정책이 필요하다”며 정책기획실을 대폭강화 한 것의 주요근거는 바로 ‘조합원들이 투쟁을 꺼려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노동조합의 경영(생산)참여’라는 관료적, 대리적 발상으로 연결되었다. 노동자의 실제적 권리와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자발성·능동성을 고양시키는 작업과 그로부터 대중적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노조 상층부 중심의 생산참가는 노동자들의 단결력을 확보 하기는 커녕, (아무리 말로는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외친다 할지라도)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자동맹 논리에 노조가 굴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결국 신노선은 ‘과격성’을 버리고 신경영전략에 대당하여 ‘부드럽고 유연하게 조합원들의 일상을 파고드는’ 활동방식을 취했으나 여기서 일상적 투쟁기관으로서의 노조, 노자 간 불평등과 모순에 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끌어올리는 정치적 투쟁가이자 조직가로서의 활동가는 없었다. 그들은 조합원들의 실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리자로 전락했으며 현장조직력을 단순히 ‘노조에 대한 지지율’로 대체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현장권력은 무엇이며 어떻게 획득 가능한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의 신경영전략은 한편으로는 단기적이고 즉자적인 대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우익적이고 개량적인 대응으로 양분되면서 실천적으로 극복되지 못하고 현장 내에 그대로 관철되어졌다. 이것은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현장권력’에 대해 추상적 이해에 머무르거나 아니면 그것을 지극히 우익적으로 해석했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획득한 현장통제권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있지 않으며-설사 보장되어 있다하더라도-매시기 세력관계와 힘의 균형에 따라 변화·유지되는 역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작업장에서 이루어지는 관리자 및 감독직들과 벌이는 활동가들 및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저항과 투쟁”이 “대규모 파업이라는 한시적 성격을 띤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라면 자본과의 대적전선은 전국적인 대규모 투쟁에서의 성패 뿐 아니라 현장에서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힘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며 이것이 현장권력의 기초일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동시에 현장권력은 노자간의 소위 ‘사람 뺏기 경쟁’에서부터 첨예한 현안투쟁까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갈등요소를 포함하는 한편 생산의 영역, 즉 노동과정에 대한 규제력을 의미한다. 작업조건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싸고 노자 간 힘이 팽팽하게 맞부딪히는 상황에서는 사측이 결코 강제적이고 일방적으로 통제를 행사하기 어려우며 작업장, 공장 차원에서의 끊임없는 대결을 통한 대중경험의 축적에 의해 작업장에서의 권력관계는 재구성되는 것이다.
활동가들에게 ‘현장권력’은 대중의 지지와 공감을 끌어내는 일상적 실천, 그의 산물인 이데올로기적, 도덕적 권위와 실제로 발휘되는 힘의 우위 속에서 유지 가능한 실체라기보다 87년 투쟁의 전리품이자 ‘고정된’ 어떤 것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노동운동을 일정정도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자본의 유연화 전략과 궤를 같이 하면서 민주노조가 제도적 영역 안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자본에 의해 계급분열 과정이 진행되면서부터 87년 당시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동질감, 자본에의 적대감은 희미해졌다. 따라서 ‘현장권력’ 복원의 상과 경로는 변화된 현실의 조건과 대중의 준비정도 속에서 새로이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계급세력과 힘의 균형에 따라 변화하는 조합원들의 상태와 정서·요구에 대한 민감한 고려는 활동에 반영되지 못했다. 이것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과 자세, 의식적 실천 모두를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생산참가’를 골자로 한 실리적 조합주의 노선의 등장을 망연하게 쳐다볼 뿐 이것이 96년 현대자동차의 ‘대등한 노사관계’ 00년 ‘진보적 노동조합주의’ 등으로 이어지며 노동운동 내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써 그리고 ‘세력’으로서 자리잡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던 책임 또한 고스란히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전투적인 선진활동가들이 초보적인 현장활동을 의식적으로 회피했는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각적으로 현장을 치고 들어오는 자본의 전략에 뒤지지 않게 조합원들을 주체화할 수 있는 자신의 내용과 형식을 갖고 조합원들의 삶에 밀착된 활동영역을 개척해나가는 것보다 집행부의 무능력과 타협주의에 대한 비판, 노조의 지침전달에 그치거나 개인적 친분수준을 극복하지 못한 현실이다. 이런 실천은 조합원 대중에게 어떠한 투쟁의 확신도, 유익함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당시 활동가들이 87~90년 선봉투쟁의 대외적 명망성과 헌신성으로부터 획득된 권위에 안주한 채, 투쟁지도부의 해고와 구속으로 단절되어버린 대중의 정치적 경험을 회복하고 운동의 연속성을 이어갈 후배 활동가 층을 교육·훈련시키고 새로운 지도력을 세워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장대중과 접촉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장기적인 활동과 의식적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90년대 중후반 현장의 침체를 딛고 새로운 선진노동자 세력으로 떠오른 대공장 현장조직 활동가들의 경우도 이러한 한계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했다. 자본의 탄압으로 각 부서로 흩어져 2~3년에 걸친 투쟁의 공백기를 숨죽여 보낸 활동가들은 투쟁의 물결을 타고 95년 현대중공업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를 시작으로 각 지역의 주요 대공장 현장조직으로 재결집했다. 이는 ‘아래로부터의 현장권력 쟁취’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내건 ‘전국회의’ 운동의 출발이 되었다. ‘전국회의’는 압도적인 자본의 힘의 우위로 활동가들의 입지가 현저하게 약화된 불리한 계급투쟁의 조건에서 기존의 활동방식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구조조정 반대투쟁이라는 고양기와 맞물려 전국회의 활동가들은 노동운동 내 개량주의에 맞서 민주노조의 전투성을 방어하고자 선도적인 싸움을 조직했다. 그러나 전국회의 내에서 ‘현장권력 쟁취’ 슬로건이 갖는 의미와 실내용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조합원 대중과의 결합, 일상적 현장장악력의 획득이라는 문제에서는 과거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초기에 전국회의를 이끌었던 현대중공업 전노회가 대표적인 예다. 초기에 분과, 부서를 중심으로 일상활동이 진행되었지만 선진적 몇몇 활동가 수준에서 진행되었고 “투철한 선진층이 주도하는 조직인데 대중성을 갖지 못하면서 고립이 가속화”되었다. 이는 다른 현장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선도적 투쟁을 뒷받침할 대중 투쟁역량의 기초를 만들어내야 하는 중심적 과제는 뒷전으로 미뤄지고 여전히 집행부 장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압도적이었다.
현재 대공장에서 대의원과 활동가들은 노조행사와 상징적인 정치활동이상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현장소모임은 극소수로 남아 겨우 명맥만 유지되거나 활동가들만의 이질적인 공간으로 전락했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조합원 중 절반이상이 대의원들의 권력의 상징인 ‘붉은색 투쟁조끼’를 벗는 것에 찬성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제도언론에 의해 왜곡된 측면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현장권력은 활동가와 대중들에게 현재와 동떨어진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오히려 현실은 자본의 압박과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고립·우경화라는 위축감 속에 노조에 대한 모순적인 태도와 자칭타칭 ‘활동가’들에 대한 거북함으로 표현되고 있다. 어용과 반동의 땅이 되어버린 현대중공업에서 격랑의 시기를 보낸 한 활동가는 “(신경영전략이 들어오던) 그 때 제대로 대응했더라면 붕괴속도를 늦출 수는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도 활동가들을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 당시의 충격과 패배의식은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자본의 신경영전략과 노동의 패배를 되씹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에도 거듭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운동주체들에게 동일한 과제를 던지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오늘날 현장권력의 부활을 소망하지만, 실천적으로 대중의 저편에 서 있는 대다수 현장활동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는 ‘갖가지 지배수단을 통해 작동하는 자본의 지대한 영향력으로부터 어떻게 ‘계급으로서의 대중’을 되찾아올 것인가’이다. 그것이다.
그것이 단지 강박으로써가 아니라 새로운 실천적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역사적 경험에서 뽑아낸 교훈을 다시금 각성의 재료로 삼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87~92년 동안 존재했던 현장소모임은 대중들의 자발성과 단결을 고취시키는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기층 조직이며 노동자 간에 연대의식을 싹틔우는 공간이자 주체형성의 근거지였다. 또한 신경영전략으로 인한 현장조직력의 붕괴과정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이러한 현장소모임의 해체와 약화였으며 자본은 이러한 기초질서를 파괴하고 전취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현장권력을 둘러싼 노자 간 대립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계급대중의 일상과 의식에 깊숙이 관여하는 현장의 가장 작은 단위와 밑바닥에서 시작되었고 또 결판났다.
누구나 강조하듯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의 현실이 근본적으로 바뀔 리는 없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현장의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거나 특정한 계기, 정치적 경험에 의한 확신 없이는 대중적인 행동으로 쉽사리 일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생산현장 안팎에서의 긴밀한 대인관계와 대중선동을 통해 기층의 움직임과 충돌지점을 읽어내는 작업은 활동가들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이며 현 시기 운동정세는 잘게 쪼개진 작업장과 공장 전체를 일상적 실천공간으로 재인식하고 작업 현장을 자신의 거점으로 강화할 것을 시급하게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대중의 이런저런 관심의 충족, 욕구불만의 해소의 장이 아니라 각성된 선진층을 구분해내는 통로이자 대중사이에 뿌리내린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영향력을 깨뜨리는 기초로서 소모임을 비롯한 기층 활동은 그 목적의식성과 계획성을 분명하게 띠어야 한다. 현 시기 활동가들이 생산현장 안팎에서 주변동료, 노동자 대중과 연결되는 단단한 끈을 엮는 매개로서 그리고 정치의식화의 장으로써 현장소모임을 활용하지 못하고서는 현장의 복구도 대안권력의 창출도 알 수 없는 미래의 것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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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혁신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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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수] 대공장에서 현장권력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사회주의노동자신문>창간호, 20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