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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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06 17:31:08
leeus
자본론에 대한 소고-1998.9
1998.10[구로 노정련 기관지, 노동정치 창간호]

지금 이 현실에서 살아 있는 자본론

이은숙(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기획1실장)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 바로 ‘이 현실’ 이라고 할 때, 그 ‘현실’의 내용은 각자가 놓여 있는 상황에 따라 백이면 백 모두 제 각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고 있는 그 ‘현실’들은 가까이는 현세대인 자신의 부모형제, 자녀, 친구들과의 사회관계에서부터 조금 멀게는 그 앞 세대, 그리고 종국에는 인류의 탄생에까지 이어지는 역사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렇게 세대를 위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자신들만의 현실’은 더 이상 자신들 각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보통 이런 사실을 학교교육을 통해서보다는 오히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통해서나 아니면 부모가 살아온 얘기 혹은 그분들이 살아가는 모습, 친구들과 각자의 생각을 나누면서 훨씬 더 풍부하게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선 굵고 대차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살아가려면 그 혹은 그녀가 직접 겪는 것만 가지고 사색해서 사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부족하다. 이것은 “사랑이 뭐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을 때 우리의 답이 모두 동일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는 “눈물의 씨앗”(유행가 가사에서)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영화제목에서)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그리움”(어떤 소설책인가 시집에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만나 나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무언가 동질성을 찾고 싶어 한다. ‘각자의 현실’을 나누고 싶어 하고, 이 현실이 아닌 것 같으면 동의를 구하고 싶어 하고, 아닌 것 같은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 속에 <자본론>이 있다.

사람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어느 정도 ‘뜻하는 바’를 이룰 수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그 직접적 관계를 벗어나게 되면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지 않은가? 왜 그럴까? 그래서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 ‘세상 사는 이치’를 우리는 알고 싶어 한다.
이 현실 속에 <자본론>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우리는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지금 ‘이 현실은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에 의하여 총체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부분적이 아니고 전면적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현실이 우리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과 그것이 바깥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현상들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론>만큼 정확하게 분석하고 풍부하게 묘사한 책은 <자본론> 전에도 없었고, <자본론>이 발간된 지 1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없었다고 하면 지나치게 <자본론>에 대해 어용이라고 말할 것인가?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리와 작동원리를 해명함으로써 이 사회의 생성과 전개, 그리고 소멸의 필연성을 객관적으로 논증하였다. 그 논증은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인류역사는 수많은 우연성의 개입과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세력들의 힘관계에 의하여 일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자본론>은 1867년에 제1권이 간행되었다. 지금부터 130여년 전이다. 맑스는 1843년 말부터 약 40여년에 걸쳐 경제학의 체계적 연구에 착수하였는데, <경제학-철학수고> <독일 이데올로기> <철학의 빈곤> <임노동과 자본> <공산당 선언>에 이어 1859년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출간하고 그 후속작으로서 <자본론>을 간행하였다.
맑스는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명확하게 꿰뚫어 냄으로써 130여년이 지난 현대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를 놀라게 만들고 있다. 제1판 서문에서 맑스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의 그의 연구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며, 이 책의 최종목적은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적대관계, 계급적 적대관계를 구조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밝혀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 정도가 높은가 낮은가는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하여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세상사는 이치’는 그러한 ‘법칙들’ ‘경향들’을 포괄하여 나오는 것일게다. 우리는 물론 시공을 초월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현대를 살아가고 있고, 그 안에서 이러저러한 관계들을 맺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는 저런 방식으로 각양각색 살아간다. 그 사회의 ‘법칙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이다. 그래서 ‘제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안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법칙들은 혹시 대체로 엇비슷한 조류들이 이 뭉텅이 저 뭉텅이로 묶여지고, 그것이 큰 줄기로 형성되어 어떤 ‘경향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자본가는 사회관계/계급관계에서 보면 ‘자본의 인격체’

그런데,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들’, ‘경향들’을 분석함에 있어 개인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여기에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해관계의 담지자인 한에서 이다.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은 주관적으로는 아무리 이러한 관계들을 초월하여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것들의 산물이다.”
개인으로서 어떤 자본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헌금도 잘 하고 가정에도 충실하며 사람들 하고 사이도 좋고 등등 하여튼 사회관계, 즉 계급관계를 사상하고 개인적으로 그를 떼어 놓고 보면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자본가인 한, 즉 사회관계/계급관계에서 보면 그는 ‘자본의 인격체’일 뿐이다. 이제 그의 지상 최대 목적은 이윤(잉여가치)이고, 이윤이 되는 것이라면 어디든지 무슨 일이든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노동자의 임금을 어떻게든 줄이려 하고, 노동조합을 어떻게든 못만들게 하거나 회사편으로 만들려고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자는 가차없이 해고하고, 여하튼 그의 최대 가치는 이윤이 된다. ‘자본’이 그를 ‘야누스’(janus.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이 무엇이길래, 어떤 ‘법칙들’ ‘경향들’이 지배하고 있기에, 그리고 그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어떤 원리로 조직하고 있기에(계급관계/사회관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자본을 형성하는 ‘잉여가치’

<자본론>에서는 그것을 밝힌다.
제1권에서 맑스는 <자본의 직접적 생산과정>을 다룸으로써 자본의 본질을 철저히 밝혀낸다. 자본주의적 부(富)의 기본 형태는 ‘잉여가치’이며, 그것은 ‘자본’을 형성하는 기초이다. 제1권에서는 이 잉여가치의 비밀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2대 계급인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평등한 등가교환관계’라고 가정하였다. 즉 노동자는 노동을 제공하고,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그 가치대로 지불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고찰하였다. 물론 실제로는 불평등/부등가 교환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의 본질, 착취의 본질을 보다 선명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우리는 보통, 탐욕스런 자본가가 정상적인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 경우에만 착취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가 밝혀낸 사실은,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서도, 자본 그 자체가 생산되는 과정에서 이미 착취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맑스는 자본을 ‘불변자본’(=기계/원료 등 생산수단에 투하되는 자본 부분)과 ‘가변자본’(노동력의 구입에 지출되는 자본부분)으로 구분하여 분석함으로써 가치의 변동사실을 명확히 확인하였다. 즉 생산과정에 투입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자본부분은 노동력 구입에 투하되는 자본(즉 가변자본)뿐이다. 이것을 흔히 ‘노동가치설’이라고 하는데, 이 사실까지는 리카르도도 발견하였다고 맑스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리카르도는 맑스가 <자본론> 1권에서 밝혀낸 비밀(즉 자본의 생산과정 자체가 이미착취과정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으며, 적어도 모른 척 했다. 그러나, 맑스는 기계나 원로 등은 자신의 가치를 변동시키지 않고 그대로 새로운 생산물에 이전시키는 데 불과한 ‘불변자본’임을 해명하면서 자본의 본질을 밝힌다.

임금의 비밀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가치’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의 기준이 되는 ‘노동력의 가치’는 전혀 다른 크기이다. 즉 노동에 의하여 창출되는 ‘새로운 가치’의 크기는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시간의 길이에 의해 결정되는 반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살아나가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생활자료(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전자는 후자보다 훨씬 큰데, 전자와 후자의 차액을 자본가는 무상으로 취득한다.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이다. 즉, ‘평등한 등가교환 관계’를 가정해서 설사 자본가가 정상적인 임금을 지불했다고 할지라도 합법적으로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맑스는 증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가 한사람 한사람의 탐욕스러움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제도의 객관적 구조라는 사실, 즉 자본주의는 계급에 의한 계급의 착취에 입각하는 경제구조임을 <자본론>은 과학적으로 해명해낸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자본가들과 그 주구들은 끝까지 철저하게 숨기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비밀을 해명해낸 맑스를 맹렬하게 비난하고 1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비판인지 비난인지를 퍼부어대고 있다. 그들의 비난인지 비판인지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맑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잉여가치는 어떻게 실현 되는가

제2권은 <자본의 유통과정>을 다룬다. 1권에서 잉여가치의 비밀을 밝혀내면서 자본의 본질이 파헤쳐졌다면 2권에서는 그러한 자본(잉여가치)이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리고 자본이 어떻게 재생산되는가의 문제가 개별자본 뿐만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의 수준에서도 다루어진다. 2권에서는 말하자면 자본의 흐름을 분석한 것인데, 1권에서의 ‘불변자본’ ‘가변자본’ 구분과는 달리, 2권에서는 ‘고정자본’(기계설비/건물 등 생산과정에서 몇 번이건 사용되고, 해마다 소모되는 양에 비례하여 조금씩 생산물에 자신의 가치를 이전시키는 자본 부분)과 ‘유동자본’(원료/노동력 등 매번의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를 전부 생산물로 이전하는 자본부분)을 설명한다.
제2권 제3편의 <사회적 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에서는 사회의 총생산물을 두 범주로 구분하는데, 한편으로는 소재적인 측면에서 생산수단(I부문)과 소비수단(II부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구성부분 측면에서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로 분할하여 고찰된다. 이 각 부분들이 어디서 생겨나서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 의해 구매되는가(=이것은 가치의 보전과정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매매를 통하여 자본가와 노동자가 어떻게 소비수단(생활수단)을 입수하고, 또 소모된 생산수단의 현물보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것은 소재보전과정에 해당된다)의 경로가 추적된다. 이것은 해마다 생산된 생산물이 판매됨과 동시에 다음연도의 생산에 필요한 생산소재가 재배치되는 경로, 즉 사회적 재생산 경로와 그것을 원활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한 해명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고전파경제학의 케네가 ‘경제표’에서 제기한 경제학상의 난제를 해결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사회의 총수요와 총공급의 관계를 해명한 이 재생산 이론은 경기순환과 공황분석에서 불가피한 이론을 구성하고 있다.
제3권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과정>이 다루어진다. 여기에서는 개별자본들 간의 경쟁이라는 자본의 현실적인 운동과정이 분석되어 있다. 첫째로, 제1권에서 해명된 ‘잉여가치율’ [=잉여가치 / 가변자본]과 구별하여, 자본가의 이익계산에서 더 절실한 ‘이윤율’[=잉여가치 / (불변자본+가변자본)]이 규명되었다. 각 생산부문에서는 노동자당 필요한 생산장치 면에서 큰 차이가 나므로, 잠정적으로 각 부분에서 잉여가치율이 동일하다고 가정하여도 이윤율의 크기는 각 부문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런데 자본은 이윤율이 낮은 부분에서 이윤율이 높은 부문으로 이동하려고 하고, 자본이 과잉 유입된 곳에서는 공급초과에 의하여 생산물의 시장가격이 저하하고, 실현되는 이윤율도 저하되므로, 자본의 일부가 또한 다른 부문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자본의 부문간 이동을 통하여 각 부문의 이윤율 격차가 균등해지고, 장기적으로 보면 하나의 ‘평균 이윤율’이 성립한다. 평균이윤율의 성립과 동시에, ‘생산가격’개념이 등장하는데, 이 ‘생산가격’은 비용가격[=소모된 불변자본의 가치+가변자본]+평균이윤[=투하자본액X평균이윤율]을 말한다. 개개 상품의 시장가격을 규제하는 역할은 가치[=비용가격+잉여가치]가 아니라 이 ‘생산가격’이 수행한다.
평균이윤율과 생산가격을 축으로 하여 상업자본가, 대부자본가, 자본주의적 토지소유자 등 유산계급들에게 상업이윤, 이자, 지대 등의 형태로 잉여가치의 재분배가 일어나게된다.
<자본론>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자본관계에 의해 오염된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담스미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경제학자들을 비판할 때, 그는 그들의 논의를 완전히 이해하고 그들이 기여한 것을 충분히 평가한 다음 무엇이 문제인지를 철저하게 짚어내어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개념이나 명제, 문제제기들에 대해서는 누가 맨 처음 그 말을 했는지를 반드시 밝혀주고 있으며, 그리하여 <자본론>은 바로 “경제학 역사를 총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황, 실업이 왜 일어나는지 <자본론>은 해명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론>에는 ‘경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들을 축으로 하여, 자본주의의 생성/발전/몰락의 법칙이 규명되어 있는데, 자본주의 경제는 어디서 생겨나서 어디로 발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1권 말미에 있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경향>절에서 집중적으로 답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소멸한 뒤 어떤 사회가 나타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취득양식/사적소유의 부정은 ......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인 협업과 토지 및 노동 그 자체에 의하여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점유를 기초로 하여 개인적 소유를 재건한다”고 맑스는 말하고 있다. 이때 ‘개인적 소유’는, 엥겔스가 <반듀링론>에서 명쾌하게 설명하였지만, 소비수단의 개인적 소유이지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는 아니다. <자본론> 1권에서 3권에 걸쳐 각 곳에서 맑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자본론> 전 3권에 대해 개괄적으로 소개하여 보았다.

필자의 식견이 일천한 관계로, <자본론>을 연구한 선행자들의 분석 글을 많이 참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불필요하게 난해한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워도 참아내고 끝까지 읽어낸다면, 우리는 읽을수록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황의 문제, 노자관계의 문제, 실업문제 등이 왜 일어나는지를 <자본론>은 해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대의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론>이 해명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의 현실들을 이미 130여 년 전에 그토록 정확하고 풍부하면서도 깊이 있게 통찰해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자본론>은 우리 시대에 강력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199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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