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운동과 새로운 사회전망
- 노동자를 중심으로 시간을 재구성하기 위하여
이은숙(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세상에는 신비스러운 비밀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지극히 일상적인 비밀이 하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관여되어 있고 누구나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조금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 비밀이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을 재는 것으로는 달력과 시계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똑같은 한 시간이라도 사람이 겪는 환경에 따라서는 영원한 길이로 느껴지는 때가 있는가 하면 한순간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바로 삶(生)이기 때문이다. - 미카엘 엔더의 {모모} 에서.
1. 시간은 곧 삶이다
우리에게 '시간'은 무엇인가? 다시 말한다면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우리들의 삶이 되고 있는가?
{모모}라는 소설책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거기에서 시간은 그 자체가 삶이다. '모모'의 시간은 물론이거니와 이야기꾼 지지와 청소부 페포 할아버지 그리고 심지어는 '회색인간들'에게도 시간은 곧 그들의 삶이다. 매우 흥미롭게도 모모는, 우리가 의심 없이 받아들여왔고 그래서 바로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간은 금이다'라는 통념이 죽어있고 거짓된 것이며, '시간은 곧 삶이다' 라는 것을 제 삶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모모}에서 '회색인간들'은 자기의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다. 회색인간들은 어느 순간 검은 승용차에 검은 양복을 빼 입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모모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회색인간들은 사람들에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시간을 저축하라며 시간을 저축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초단위로 시간을 계산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다닌다. 순박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회색인간들에게 시간을 '저축'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고 시간에 쫓기면서 살아가게 된다. 사람들은 점점 시간이 더 없어진다. 각자 자신들이 기뻐하고 여유롭게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회색인간'들의 시간저장 창고 속에 냉동보관된다. 그 시간들은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만큼 바빠진다.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더 회색으로 변해가고, 자유롭게 이것저것 계획되던 사람들의 시간은 회색인간들의 시분초 계산으로 대체된다. 회색인간들에 의해 냉동보관되고 있는 시간들은 회색인간들의 식량이 된다. 회색인간들의 사회에서 최대의 징벌은 냉동된 시간을 배분하지 않는 것이다. 회색인간들은 그 저장된 시간이 각자에게 주어지지 않으면 회색의 재로 변하여 푹삭 사그라지면서 사라져 버린다. 그들의 죽음은 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더 이상 공급받지 못하는 순간 찾아온다. 그렇게 그들에게도 시간은 삶인 것이다.
그러나 "심장으로 느끼지 못하는 모든 시간은 죽은 시간이다."
다시 한번 우리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지금 이 사회에서 우리의 시간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스스로 처분할 수 있고 기획할 수 있고 심장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들, 그 시간들은 있는가? 주위를 둘러보자. 시간을 마음대로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가?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이 사회에서 일을 하고싶지 않아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선, 이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먹고살 수 없다. 비럭질을 하더라도 돈이 있어야 먹고살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며 살면 되지 않나? 농사를 지으려 해도 땅뙈기나 밭뙈기를 장만할 돈이 있어야 한다. 그 돈을 구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비럭질도 일이다.
사람의 시간은 하루 24시간이다. 우선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이 마련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필요한 각자의 시간이 '필요노동시간', 평균적으로 이 사회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데 필요한 시간'은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사람들 각자가 이 필요노동시간들까지 스스로의 시간기획에 넣어서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일단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이 시간은 주어져 있는 삶의 조건이었다.
남의 시간을 그러니까 남의 삶으로 제 시간을 삼고 제 삶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회색인간'과 그들의 '시간저장창고', 그리고 회색인간들에게 자기의 시간(삶)을 저당잡힌 채 시간이 갈수록 각박하고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나날이 줄어드는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
시간은 삶이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돈으로 환산되어야만, 돈(냉동된 시간)을 목적으로 일을 해야만 하는 삶이 되어 있고,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 시간을 어떻게 자신의 삶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의 흐름 속에 있고 그러면서도 나의 시간은 갈수록 없어지는 그런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일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럼 어떻게 먹고사나? 일하지 않고 일하고 있는 남의 시간(삶)을 빼앗아서 살거나 내가 일을 하면서 살거나 둘 중 하나다. 그 새중간에 여러가지 삶의 유형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들 앞에는 모두에게 형식적으로는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루 12시간을 일해서 벌어도 바득바득 살기 힘든 반면 어떤 사람은 하루 4시간만 일하고도 떵떵거리며 산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놀아도 온갖 고상한 취미생활과 산해진미를 누리고 호사스럽게 산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있지 않을까 한다. 흔히 '서민'이라고 말할 때 예외 없이 거기에 포함되는 사람들이 노동자다. 이 노동자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총칭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 강조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시작이 '모모'를 통해 돼서 좀 그렇지만 나는 여기에서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모'로 시작한 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시간들을 제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노동자의 시간을 점점 더 거꾸로 돌려놓을, '죽어있는 시간'으로 만들 가능성이 큰 논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우선 우리 사회의 시간을 누가 어떻게 기획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되고 있는지, 지금 노동자들이 전개하고 있는 노동시간단축운동이 어떤 방향을 가져갔으면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2. 왜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한가?
(1) 노동자의 '일할 권리'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 특히 노동자는 우선 '일할 권리'를 보장받으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숨을 쉬듯이 당연한 일인데,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 소득을 얻어야 하는데 일하고 싶다고 모두에게 그저 일자리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무언가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고 따라서 소득도 얻을 수 없다. 그렇게 하여 임금을 받아 의식주와 교육, 자녀양육, 문화생활 등을 할 수 있는 돈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영농민이나 가게 주인처럼 독립적인 소생산자 혹은 소상인들도 '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한다'. 모두 돈이 되는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노동은 사회적인 생존을 위한 강제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이 갖는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계급이 노동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일을 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됨으로써만 사회적인 생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데 자본가에게 고용되어야만 그 또는 그녀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의 필요에 종속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사실이 일차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을 다른 사회 및 다른 계층의 노동과 구별짓는다.
그런데 자본의 필요에 의하여 고용관계가 형성되고 노동권이 주어지고 하는 바로 그 점으로부터 어떤 노동자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실직하거나 또 어떤 노동자는 가끔씩 밖에 일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일자리에 서야 하는 일들이 발생한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볼 때 노동자의 '일할 권리' 혹은 '살아갈 권리'(생존권)는 노동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가지고 있다. 그것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주체가 노동자 자신이 아니라 자본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노동자의 노동권과 생존권은 자본에 저당 잡혀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우리가 90년대 후반기의 경제 공황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시기동안 직접 경험한 대량실업사태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증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었듯이 자본이 위기(공황)를 겪게 되자 노동자들을 가장 먼저 일터 바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다시 불러들일 때는 이전의 노동조건 이하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이점이 공식 통계상으로 98년 한 때 8%대까지 올라갔던 실업률이 2000년 현재 5%대 이하로 떨어져 있는 것의 실상이다.
요컨대 노동자의 노동권이 자본가의 수중에 들어 있다는 점은, 일하는 주체는 노동자인데 어떻게 해서 그 자신의 노동권이 타인에게 있게 되는가 라고 하는 의문이 들 법 할 만큼 커다랗고 근본적인 모순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고유한 생산관계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생산수단은 자본가에 의하여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되고 있으며, 노동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다'.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함으로써만 사회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있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생산의 과정에 들어가 자신의 노동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기자신의 필요에 따른 노동뿐만 아니라 자신을 고용한 계급의 필요에 따른 노동까지 전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된다. - 자본가는 일거리를 주는 대신에 노동자로부터 자유로이 일할 권리를 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자본가는 노동자의 시간으로 생존한다. 즉 노동자는 자본가를 위한 일까지 전담한다. 노동자가 자기자신과 그 가족의 생존을 위하여 일하는 것의 대가를 임금으로 지급하고 그 나머지 노동자가 일하는 모든 생산물(의 가치)은 자본가가 모두 가져간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생산의 사회화.
(2) 노동시간 단축 요구의 근거
우선,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살아있는 시간들의 응결물이다. 때문에 자본가는 점점 더 많은 일을 노동자에게 요구한다. 자본가는 자본의 인격체에 다름 아닌데, 노동자의 노동이 없으면 자본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끊임없이 자본의 필요에 맞추어 요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을 위한 노동과 타인(자본가)을 위한 노동이 그것이다. 노동은 노동하는 시간을 통하여 객관화된다. 전자는 '필요노동시간', 후자는 '잉여노동시간'이다.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잉여노동시간'을 제공받아서 생존한다.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명확해지는 이와 같은 노동시간의 분할과 잉여노동시간의 자본가의 전유(이것이 곧 착취의 개념이다)는 자본주의 사회를 그 이전의 모든 사회들과 구분짓는 특징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생산의 사회화가 노동에 적용되는 방식이다.
자본가는 점점 더 '잉여노동시간'의 양을 늘리려 한다. 그것이 자본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까지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거부할 수 있고 또 거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잉여노동시간이다. 노동자는 필요노동까지를 거부할 수 없다. 필요노동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노동자의 기본 생존권을 확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잉여노동시간을 주목적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자본가로서는, 필요노동시간에 해당하는 노동자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일에 대하여 지불되는 임금을 비용으로 간주한다. 즉 필요노동시간의 화폐적 형태가 임금으로 주어지는 노동자의 생활비인데, 그것에 대하여 자본은 자신들이 탐욕스럽게 확보하고자 하는 잉여노동시간에 대한 낭비로 여긴다. 이로 인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할수록 그 사회에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수많은 과잉인구(실업자 및 반실업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시야에서 제기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노동에 대한 기본 입장에서 '노동시간 단축' 요구의 근거가 확보된다.: 모든 노동자가 필요노동시간에 해당하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이 사회에서의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하는 것. 그것은, 자본이 전유하는 총 잉여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노동자 계급 스스로가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잉여가치에 대한 탐욕 때문에 항상화되어 있는, 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과잉과 기본적인 생존을 위한 필요노동마저 할 수 없게 된 노동자들(즉 실업자들)의 노동시간 부족을 동시에 해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가 요구하는 '일할 권리'의 핵심이며, 동시에 노동자가 주장하는 '노동시간 단축'의 내용이다. 요컨대, 잉여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노동시간의 길이축소는 결국은 이를테면 과로사 같은 것으로 표현되는 현대의 강화된 노동강도로 귀결되고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를 가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의의도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3.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 노동자,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운동
그들은 실체가 없으면서 생명을 지탱한다. 그들은 인간의 삶에서 훔쳐 온 시간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이 시간이란 것은 그것이 참된 소유자를 떠나면 바로 죽은 시간이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각기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그러한 것이 생겨날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존재들이다.
만약 그들이 더 이상 시간을 훔칠 수 없게 된다면,
그들은 출발점이었던 무(無)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이미 인간 가운데 퍽 많은 협력자를 갖고 있다. 그것이 불리한 점이다.
- {모모}에서.
모든 노동은 역사적 조건하에서 인간들의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거꾸로 인간들의 생존의 문제는 역사적 조건에 의하여 규정받는데, 이때 역사적 조건이라 함은 해당 사회의 생산관계, 사회관계에 다름 아니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주의 지배하에서 노예들이 사회의 모든 생산물을 생산하였고 노예의 노동과 그 생산의 결과는 노예주에게 온전히 귀속되었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봉건영주의 지배 아래서 농노들이 그 사회의 모든 생산물을 생산하였고 그 생산의 결과는 영주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노예제와는 달리 봉건제에서는 토지(라고 하는 생산수단)가 농노에게 점유됨으로 말미암아 농노의 노동생산물의 일부는 농노에게 귀속될 수 있었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의 노동 전부가 노예주의 것이었지만, 봉건제 사회에서 농노의 노동은 공물 생산과 부역노동의 형태로 영주에게 갈 것과 농노의 것으로 남을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회관계였다.
마찬가지로, 모든 형이상학적인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거기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까지 포함하여 모든 사회적·물질적 관계가 자본을 위주로 하여 편재되고 작동되고 있다.
노예제 하에서 노동자는 노예, 봉건제 하에서 노동자는 농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임금노동자이다. 노예제 하에서는 노예가 그 자체로 물건처럼 거래되고 농노제 하에서는 농노가 현물로 된 노동생산물을 영주에게 가져다 바친 반면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임금노동자가 자본가로부터 화폐임금을 받는다. 노예는 심신이 완전히 노예주의 것이었음에 반하여 농노는 영주로부터 독립적으로 생산수단을 점유하여 생산하고 그 생산물을 영주에게 헌납하였다. 노예제에서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전부 노예주의 것이었으므로 노예의 생산물을 노예주가 전부 취하였던 반면, 봉건제에서는 생산수단인 토지에 부속된 존재로서의 농노의 노동력까지 토지와 함께 영주의 소유였지만, 바로 그 농노와 토지의 결합력 때문에 농노의 노동생산물을 영주가 전부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요컨대 형식적으로는 생산수단인 토지와 농노가 영주의 소유였어도 실질적으로는 토지가 농노에게 점유되어 있었고 거기에서의 노동생산물은 농노에 의하여 영주에게 공물로 바쳐지는 것이었으므로 생산물은 일단 농노의 곳간에 들어갔다가 영주에게 가는 것으로서 그 생산물의 일차적인 주인은 농노가 될 수도 있었다. 그 곳간이 영주의 소유라는 것은 그러한 경제관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는데, 위와 같은 관계들은 모두 바로 영주의 소유지(영지)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떠한가? 노동자는 이제 노예제나 봉건제에서와는 달리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노예주나 봉건영주의 토지로부터 '해방'되었다. 즉 노동자는 이제 인격적으로, 그리고 생산수단(토지)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력을 자기 스스로의 소유물로서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에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그 또는 그녀)는 이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서밖에는 먹고 살 길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인격적으로 자유로워진 노동자, 그러나 토지(생산수단)로부터 분리되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본주의적 노동자(=임금노동자)를 탄생시킨 것이다(자본의 '시초축적').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노동은 자본에 의하여 우선 '생산적 노동'인지 '비생산적 노동'인지가 판별된다. 자본이 보기에 자본을 살찌우고 자본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되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모든 노동은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게 '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될 수 있는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뿐이다. 그 노동이 바로 '임금노동'이다.
처음에는 화폐소유자로 등장한 자본가는 자본의 인격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본,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로 본질이 규정된다. 자본은 '가치'이며, 그것도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일 수 있는 비밀은 바로 자본주의적 노동 속에 있다. 바로 '임금노동' 속에 비밀이 있다.
요컨대 자본을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로 만들어주는 것은 '임금노동자의 노동'이다. 이 사실은 다시 말한다면, 자본은 임노동자의 노동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노동자의 잉여노동시간이 없이 자본은 존재할 수 없다. 요컨대 자본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시간의 덩어리일 뿐이다. 그것은 기계 등 생산수단과 원료 등 불변자본으로도 존재하고 구매한 노동력 즉 가변자본으로도 존재한다. 전자는 살아있는 노동자의 과거의 노동(회색인간들의 냉동창고 속의 시간), 그리하여 (이제 노동자에게는) 죽은 노동이요, 후자는 현재 살아 있는 노동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본은 스스로의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체가 없다. 그들은 살아 있는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앗아서 생명을 유지할 뿐이다. 살아 있는 노동자의 살아 있는 노동(시간)이 없다면 그리고 그 중에서도 잉여노동시간이 없다면 자본은 허공에서 흩어져 버리고 말 회색의 재와 같다.
사태가 그러하기 때문에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의 확대를 중심으로 하여 긁어모아야만 한다. 그들은 노동자의 시간을 '냉동창고'에 저장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은 모두 '비생산적 노동'이 된다. 따라서 자본을 형성하지 못하는 노동, 즉 직접적으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노동은 자본에 의하여 모두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된다. 그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란 오직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뿐이므로 자본을 형성하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에게 귀결되는 가치의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은 모두 자본에게는 가치 없는 노동에 해당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동은 필요노동시간의 확대로 귀착되는 것이라서 잉여노동시간을 확대하고자 하는 자본의 탐욕 속에서 볼 때는 반자본적 행위에 해당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적게 투입하고도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잉여가치(이윤)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하여, 곧 잉여노동시간을 확대하기 위하여 신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을 앞다퉈 도입함으로써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상대적 과잉인구(실업자 및 반실업자)의 증대 과정이 축적의 고도화와 동시에 일어난다.
오늘날 자본이 세계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의 배경,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9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IMF 관리체제하에서 본격화되고 97년과 98년 동안 법제화과정을 거친 노동시간의 변형과 파견 노동 및 정리해고제 등의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의 배경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진전에 따라 생산과정으로부터 노동자를 끊임 없이 배출함으로써 거대한 규모로 형성된 상대적 과잉인구를 자본의 필요와 구미에 맞게 생산과정으로 재진입시켜 살아있는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야만 존속할 수 있는 자본의 근본적인 요구에 기반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타협적 복지체제에 의하여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저항에 근거한 결집과 정치적 세력화를 체제내화시켜 왔던 70년대 초반까지의 소위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체제마저도 유지할 수 없을 만큼 자본의 과잉축적(자본의 재생산이 가능한 이윤율 수준을 달성하지 못할 만큼 가변자본에 대한 불변자본의 비율이 높아진 상황)이 심화된 자본의 위기상황에서 케인즈주의적인 복지국가체제를 폐기하고 대신에 '신자유주의적 전략'으로 대체하면서 계급적 저항 없이 광범위하게 살아 있는 노동력을 생산요소로 원활하게 동원하고자 하는 요구를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노동자의 노동에서 잉여노동시간을 전유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고자 하는 자본의 열망과 탐욕은, 한편으로 그 자체가 생산력의 발전으로 귀결되는 것과 함께 노동자의 필요노동시간을 줄여나오게 되었는데,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는 자본의 잉여가치취득욕에 의하여 노동일의 감소가 아니라 잉여노동의 증대로 흡수되었다.
그래서 생산력 발전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인 가능성으로서의 노동시간 단축의 가능성은 노동자 1인당 노동을 경감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노동자를 거꾸로 일터에서 쫓아냄으로써 노동자 수를 감소시켜 실업·반실업의 상대적 과잉인구를 누적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대체되어온 것이다.
냉동창고에 죽어있는 시간이 쌓이는 동안 살아있는 노동자들이 먹고살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는 자유는 점점 더 큰 규모로 제약당하게 된 셈이다.
4. 노동시간 단축의 의의와 목표
지금 이 사회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은 노동자 1인당의 노동량을 균등하게 경감시키고 노동하는 인구의 수를 늘림으로써 노동을 보편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잉여노동시간의 사회적 귀속력이 지금처럼 자본가계급에게가 아니라 사회 그 자체로 이전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현대 과학기술혁명이 가져온 엄청난 생산력의 발전이 각 개인의 자유로운 시간으로 귀속되지 않고 대량실업과 부의 양극화로 귀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시킬 수 있다.
그 점에서 노동시간 단축의 의의와 목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고용노동자의 노동경감과 실업/반실업 노동자의 노동권 확보.
둘째, 각종 차별의 근절과 노동조건의 전반적인 향상.
셋째, 노동의 보편화와 자본의 독재 종식.
요컨대 노동시간단축의 의의는 '일하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필요노동시간을 보장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의 생산력 수준에서 과연 사회적인 필요노동시간은 몇 시간이면 족할까? 회색인간의 냉동창고에 쌓여가고 있는 '냉동된 시간들'이 클수록 실은 사회적인 필요노동시간은 작아진다. 냉동된 시간들이 '각자의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들'로 해방된다고 가정하고 그 시간들까지 포함한 사회적 생산력 수준은 사회적으로 평균 필요노동시간이 하루 3시간보다도 훨씬 적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유력한 가시적인 근거 중 하나가 전세계적으로 누증되고 있는 실업자와 반실업자 규모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과학기술혁명은 냉동시간들을 더 많이 축적하려는 세력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그 결과물 또한 그들의 냉동시간(잠시 죽은 시간)으로 수렴되었다. 즉 생산력 발전의 결과 각자의 노동시간이 줄어들 수 있는 가능성은 냉동창고에 의하여 차단되어 오히려 일자리를 놓고 노동자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면서 냉동창고는 더 비대해지는 반면 사람들은 더 눈코 뜰 새 없어 각박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우선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의 일터를 갖는 데로 수렴됨으로써 일하는 사람들 1인당 일하는 시간이 대폭적으로 줄어드는 내용을 가질 때만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죽어있는 시간의 저장, 즉 자본의 시간냉동창고 불리기로 수렴되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만일 노동시간이 단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 동안 벌어진 급격한 실업·반실업 노동자 규모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우선 판가름될 것이다.
현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이 급박하게 제기된 것은 경제위기의 폭발과 대량실업자 발생에 기인한 바 크다. 더욱이 완전실업자 뿐만 아니라 반(半)실업자 층이 급격하게 증대하면서 노동자와 그 가족을 비롯한 민중 전체의 생활 자체가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짐에 따라 생활을 위한 소득의 보장 측면에서 전 사회적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었다.
그 점에서 지금의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일반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계속선상에서 노동자의 생존을 방어하는 차원의 성격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실업이 동전의 양면인 이 사회에서 자본의 수중에 들어 있는 저당 잡힌 노동권을 노동자 수중으로 되돌리는 차원의 공세적 성격을 지닌다.
또한 노동시간 단축은 본질적으로 '노동의 보편화'를 지향한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한 사회에 타인의 노동에 기생하여 사는 층의 수를 줄이는 문제,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전유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지배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의 독재'를 종식시키자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본에 의하여 전유되고 있는 노동자의 시간을, 그 시간에 생산되는 가치를 노동자가 다시 가져오는 차원의 운동인 것이다. 그 점에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노동을 지양(aufheben)하는 전망을 담고 있다.
요컨대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현재의 생산관계 내부적인 운동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산관계의 전망을 내올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역사적인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들어 '노동하지 않을 권리' 혹은 '노동거부권' 논의가 일고 있다. '노동 거부'의 문제의식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적 노동에 대한 광범한 거부를 내포함으로써 자본주의 이외의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점에서 유의미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성격, 즉 '노동의 보편화'와 '자본의 독재'에 대한 공격이라는 측면과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한껏 확장시켜내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는 역사적이고 특수한 사회에서의 노동의 문제가 초역사적인 노동 그 자체의 문제 속에 용해됨으로써 결정적으로 현재성을 갖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인 필요노동시간의 확보와 자본의 총 잉여노동시간의 축소라고 하는 논점이 불명확하거나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현실 속에서 배태되고 현실 속에서 검증 받는다. 기본적으로 초역사적인 의미에서는 '노동 거부'가 성립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에 대하여, 그리고 자본가 계급 지배 사회에서의 노동시간에 대하여 문제삼는 점이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모든 논의들에서 분명해질 필요가 있다. 더욱이 역사적 현실로서 노동하는 계급에 의하여 노동 그 자체가 문제시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이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일어나고 있는 점이 거꾸로 그것을 설명해준다. 노예제나 봉건제 사회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운동이라는 것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성립할 수도 없었다. '노동'은 지배적인 생산관계와 사회관계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그 성격이 변화되어 왔다. '노동 거부'가 역사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 현대에도 관철되고 있는 "누군가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그 사실이 해결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생산관계의 문제이며, 사회관계의 문제이다. 노예-노예주 관계, 영주-농노 관계, 자본-임노동 관계, 그 현실 속에서 누군가는 노동을 해야 하는 계급지배의 사회에서 '노동 거부'를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노동에 의존하여 생활할 수 있는 중간계급 혹은 지식인뿐이었다. '노동 거부'는 지배적인 생산관계에 대한 저항의 주체가 없이는 공허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노동 거부'라는 것은 초역사적인 관념론 이상이 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노동자의 의식이 바뀌면 이루어지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 지금은 그 삶의 명줄을 자본이 쥐고 있는 현재의 사회구조에서 그것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에 의한 지배, 자본에 의해 짜여지고 유지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관계에 굳건히 터하여서 그것을 깨뜨려 나가야 한다. 현재의 사회관계와 생산관계를 도외시한 모든 논의는 그 점에서 공허하다.
요컨대 이 사회에서의 노동을 거부하는 것은 자본에게 최대의 타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생활수단의 확보를 포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슬만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다. 노동은 사회적 생존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일차적으로 임금노동의 형태로 나타나며, 사회관계 전체가 이미 임노동관계(=자본관계)의 구조로서 전일화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자본에 고용되는 것을 통하여 생활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는 것은 목숨을 끊으라는 정도의 극단성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공상적인 요구가 될 수밖에 없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노동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는 성격과 차원을 달리한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무엇보다도 '일할 권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몰계급적인 '노동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요구하는 '일할 권리'는 사회적 생존의 권리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필요노동시간'(노동자의 생활비)을 보장하라는 요구이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타인에게 전유되는 (잉여)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할 자유 즉 이 사회에서 생존할 권리를 실업으로 인해 박탈당하거나 기준 이하의 노동밖에 할 수 없는 비정규직 등을 포함한 반실업 노동인구가 노동할 자유를 보장받도록 하자는 사회적 운동이다. 그것은 '노동은 사회적 권리'라는 점을 당연한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회적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예컨대 자본에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에게 전유되는,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잉여의) 노동을 하지 않고 개인들이 자유로이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투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노동에 종사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예컨대 실업자)에게는 생존을 위하여 노동할 시간을 확보하는 투쟁이다. 그 점에서 노동시간 단축운동에는 '잉여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 요구와 '필요노동을 할 권리' 요구가 공히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노동시간 단축이 '잉여노동시간 확대'로 치환되거나 수렴되어서는 위와 같은 의의들이 성립되지 않는다. 노동시간 단축의 의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는 그와 같은 경로는 노동시간 단축과 함께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 생산성 증대를 위한 자본측의 설비투자, 그리고 노동강도 강화, 임금의 실질적 저하 등이다.
노동시간 단축은 단순히 노동시간의 양적인 길이를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노동시간의 질적인 길이도 있다. 바로 노동강도가 그것이다. 자본측이 '잉여노동시간' 즉 '잉여가치'를 늘리려고 맘먹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시간의 질적인 길이를 늘리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시간의 길이 그 자체를 안팎으로 줄일 때 비로소 단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 지금 현재의 생산력 수준에서 전국적/전산업적으로 동시에 적용되도록 단축되어야 한다. 자본측이 끊임 없이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한 잉여노동시간의 감소를 만회하기 위해 노동강도 강화와 생산성 증대를 도모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노동시간의 산정기준을 하루 노동시간으로 잡아야 한다. 노동시간을 1일 기준으로 하지 않고 주/월/년으로 잡을 때 시간에 대한 자본측의 기획력과 재량권은 더욱 커지는 반면 노동자의 시간에 대한 재량권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작아지기 때문이다. 셋째, 임금 등 전반적인 노동조건의 하락을 동반해서는 안된다. 노동시간 단축의 효과가 고스란히 노동자의 생활고와 건강상실 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 노동시간단축과 새로운 사회전망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며, 무슨 사건에 참여할 때는 어느 정도 긴장감도 느껴야 한다. 시간이, 집단의 일원으로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 그리고 바라건대,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 P. 톰슨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미래 사회의 전망, '노동의 보편화'와 모든 사람들의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의 증대를 열어갈 가능성은 노동유연화를 통한 노동시간의 냉동창고불리기를 얼마나 차단시켜내면서 노동시간 단축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시간이 만약에 앞에서 말한 의의와 목표를 살리면서 단축된다면 그 때 열릴 사회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톰슨이 말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일을 몸소 창조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시간'과 '외부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수 있는 시간'과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모든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과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정말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주어질 것이다. 그것은 "심장으로 느끼는 시간들"의 다른 표현일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이 가져올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공상적인 그림은 톰슨의 이야기로 족할 것 같다.
만약 그런 사회가 다가올 사회라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제들이 전 사회적으로 풀어져야 한다. 첫째로, 기술의 사회적 이용의 경로와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엄청난 생산력 발전은 과학기술혁명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다. 그것의 자본주의적 이용, 즉 잉여가치생산에의 기여 일변도라고 하는 원리 자체가 사회성을 갖는 것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둘째로, 사회의 공적 영역이 보다 확대되어야 하고, '공익'의 개념이 보다 분명하게 재정립되어야 한다. 이 사회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일반 국민은 다름 아닌 노동자와 민중을 이르는 것이다. 노동자와 민중을 국민과 대립시키는 모든 논의는 기만일 수밖에 없다.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여론주도세력이란 실은 실체가 없는 가상이라고 해야 옳다. 권력이 여론을 주도하고 그 여론을 다시 이용한다. 노동자가 파업을 할 때 '공권력'이 투입되고 그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진압하는 것은 아주 흔한 예에 속한다.
셋째로, '생산적 노동'의 개념이 재정립되어야 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노동에 대하여 '생산적/비생산적' 명패를 붙이는 주요하고도 지배적인 논리는 그 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느냐 잉여가치를 깎아먹느냐이다. 새로운 사회 전망을 열어나가려 할 때 이러한 가치기준을 바로 그 노동의 현장에서부터 전화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대표적으로 가사노동을 예로 들어 재생산과정에서의 노동이 갖는 성격에 대하여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를 논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러한 논의들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핵심적인 재평가 기준은 그것이 '생산적 노동'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논점의 절반은 포괄할 수 있을지언정 나머지 절반을 공백으로 만들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생산적/비생산적' 구분에 잉여가치 생산/소비 여부를 넣을 경우, 가사노동이 생산적인 노동이라고 주장하는 의미는 가사노동 역시 자본주의적 노동이라는 것이 된다. 가사노동의 자본주의성을 드러내는 것은 가사노동이 비로소 자본주의적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며,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폐된 잉여노동임을 분명하게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의의에도 불구하고, 거기로부터 그 은폐된 잉여노동을 어떻게 폐절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임금'의 요구에 대해서도 나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식견이 짧은 관계로 나중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넷째, 갈수록 노동자간 일자리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앞에서 말한 기술의 자본주의적 이용에 의하여 크게 촉발되어온 자본의 과잉축적에 따른 상대적 과잉인구의 누증에 따른 것이다. 이 현실은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분할과 계층화로 나타나고 있다.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규모 사업장과 중소영세 사업장, 고용노동자와 실직자, 내국인과 외국인 등등 크게 묶어보아도 가지수가 많은 분할이 있고 그것을 자본은 축적의 유력한 지배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분할들 속에서 어떻게 연대해 나갈 것인가가 다른 모든 사안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운동에서 핵심적인 과제이다.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위와 같은 분할을 노동자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수많은 논쟁점들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지배적 생산관계에서부터 문제해결의 출발을 잡아내야 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역사를 거듭하면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의 가닥들을 하나씩 하나씩 정교하게 풀어내는 작업은 언제나 모든 일의 시작이다.(200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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