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은숙
◎ 작성일:2000.07.30(일)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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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운동의 현실과 과제
서울대교지 [관악] 원고(1998.5.27)
1. 세계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한국경제의 위기
세계자본주의는 지난 95년의 WTO(세계무역기구) 발족 및 98년 5월 유럽 화폐통합 선언을 축으로 커다란 구조변환이 궤도에 올랐음을 알리고 있다. 그 서막은 이미 70년대 중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뒤 맞이한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종말을 고하고, 그 기간 동안 전후 계급타협체제를 성공리에 이끌어온 케인즈주의에 대한 '마녀재판'을 거치면서 시작되었다. 레이건주의와 대처리즘이 자본의 새로운 축적전략의 주축으로서 떠올랐다. 그로부터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론을 대신하여 이른바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모럴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80년대 초중반부터 미국중심의 GATT체제가, 서유럽 및 일본의 경제력 상승에 더하여 아시아권의 급부상으로 심하게 흔들리면서 GATT체제에 대한 회의와 세계자본주의 '질서'의 새로운 재편논의도 가속화되었다. GATT의 우르과이라운드는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면서 '신국제질서'를 목표로 시작되었으며, 7년 여를 끌다가 WTO체제를 성립시키게 된다. WTO는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과잉축적과 독점자본간 경쟁의 격화를 배경으로, 지역주의와 역내무역 확대에 대응하여 지구적 규모의 시장통합을 노리는 미국,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를 경계하는 EC, 세계시장 확대를 목표하는 아시아 국가들의 '동상이몽'이 빚어낸 합작품으로서, 80년대를 풍미한 영미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조류를 체현하고 있는 기구이다. WTO 협정은 세계무역의 경쟁조건과 규칙, 분쟁절차 등을 담고 있다. GATT와는 달리 WTO협정 비준국에게 7개 부속서까지 일괄수락(single and taking)할 의무와, 국내법에 우선하여(국내법을 개정하여) 이를 준수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이는 '자본의 세계화(globalization of capital)'를 위해 WTO가 세계시장의 규칙을 표준화시켜 통합력을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자본의 세계화는, 본래부터 국경 없이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자본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경향이며, 이것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초국적 자본이다. 초국적 (산업, 금융) 자본의 거대한 자금력이 세계시장을 떠돌아다니면서 각국의 통화금융 및 무역 질서에 새로운 규정성을 갖게 되자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이 크게 증대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시장의 통합성을 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쟁의 격화와 시장분할을 요구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은 신용제도의 발달을 매개로 하여 금융위기 형태로 분출되고 있는 중이다. 더욱이 80년대 후반기에 소련·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세계자본주의는 냉전체제에 묻혀 봉합되어 있던 모순의 새로운 봉합책을 찾아내야만 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체제경쟁에서의 승리와 함께 자체적인 모순의 분출로 인한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자본은 80년대 중후반 ~ 90년대 '신자유주의' 전략을 택하였으며, 그것은 7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어온 계급타협체제를 폐기하고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공격을 핵심원리 중 하나로 하여 자본주의의 본질적 모순이 가져오는 축적위기(공황)의 터널을 빠져나가려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담론은 '규제완화, 탄력화, 민영화, 작은 정부, 개방화' 등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본의 운동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모아지는 것 같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조직적인 저항은 핵심적인 '규제'에 해당된다. 전세계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중심 프로그램 중 하나가 노조를 비롯한 노동자계급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본의 논리와 자본의 운동으로 사회를 다시한번 재편하고자 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국경제의 위기와 그에 따른 IMF 관리체제가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흐름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한국경제는 90년대 들어 국제화·개방화를 모토로 시장개방을 적극화시켰으며(UR협정조인), 93년 김영삼정권 등장 이후에는 '신경제정책', '세계화'전략(96년 OECD 가입) 등으로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자본축적구조 재편에 본격적으로 동승하게 된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처한 현재의 엄혹한 상황은 자본의 위와 같은 세계적인 재편과정과 그 와중에서 우연적으로(국내적 요인으로 볼 때는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온 바이기도 하지만) 걸려든 한국경제의 위기에 의하여 강요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96년말 총파업투쟁을 통하여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87년 이후 비로소 개화하였던 노동조합운동, 그리고 노동자대중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전투성이 아직 노동자계급을 순치하는 데 '서툴렀던' 정권과 자본의 어리숙함에 의하여 촉발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정세조건에 의존된 바도 있다.
그러나 97년을 경과하면서, 즉 민주노조운동의 총본부인 민주노총에 의한 총파업투쟁과정까지를 경과하면서 자본·정부는, 그러한 자발적 전투성에 기반한 운동을 순치하는 방법, 노동자계급의 어디를 공격해야 하는지를 간파하였다. 관료화된 지도부, 철저히 대중의 요구에 기반하지 않고 오히려 대중을 핑계로 지도의 역할을 포기하는 지도부, 대중보다 더 자본의 논리에 흔들리는 지도부, 그러한 지도부를 대중과 떼어내서 확보한다면 1차적으로 지휘관 없는 대중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저들은 간파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조류들을 동원하여 매우 효과적으로 여전히 투쟁적인 대중과 일부 투쟁적인 지도부를 무력화시켜나가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97년 임단투과정에서부터 대통령선거까지, 그리고 대선후 2월의 노사정'합의'까지, 세계적인 경쟁 격화에 따른 자본축적조건의 악화를 앞세워 자본·정권이 본격적 공세를 취하게 되자, 87년 이후 노동자운동을 이끌어온 민주노조운동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고통을 분담하는 노동운동' '사회개혁적 노동운동' 등의 담론에 포위되어 노동자의 대의를 '국민의 한사람' '시민의 한사람'으로 해소시키면서 한국노동자의 투쟁력을 담보해온 자발적 전투성마저 상실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하나의 중심계기로 작용한 것이 김영삼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에 의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노개위)와 김대중정권에 의해 차려진 '노사정위원회' 등 총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조합주의(neo-liberalist corporatism) 전략이다.
2. 1987년 이후의 한국노동조합운동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을 경과하면서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1987년 6월말 현재 2,742개에 불과하였던 노동조합수는 1987년 12월31일 4,103개, 1989년에는 7,883개로 폭발적 증가를 경험하였다. 조직노동자의 수도 86년 6월말 현재 1,050,201명이었다가 1987년말에는 1,267,457명, 1989년에는 1,932,415명으로 두배 가까이 늘어 그야말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적 성장과 함께 '민주노조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조직화한 것이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노동조합은 노동자들 자신의 조직으로서 일반화되었으며, '자주성, 민주성'을 노조운동의 새로운 이념이자 관행으로 정착시켜 나갔다. 파업이 비로소 일상적인 노동자들의 투쟁 무기로서 일반화되었으며, 지역과 업종을 뛰어넘어 전국적으로, 그리고 사무직/생산직을 막론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성과는 90년 1월22일의 전노협결성으로 일차 전국조직 건설이라는 결실을 거두었다. 그러나 업종노협과 이른바 '중간노조'로서 존재하였던 대기업노조들까지 총망라되는 전국적 중앙조직의 건설은 아직 시간을 더 필요로 하였다. 전노협은 90년대 초반기에 악전고투하며 '민주노조운동'을 지켜낸 대신에 91년 하반기에 들어오면 그 조직적 규모가 창립 초기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상황을 겪어야 했다. 한편 업종노조들은 또다른 의미에서 악전고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넥타이부대' 노동자들의 대중적인 토양은 노동조합으로서 자신들을 조직해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사무전문직'의 동질성 형성에 우선 관심이 두어져 있었다. 이들이 91년 ILO공대위를 통하여 전노협과 한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은 그런 점에서 커다란 조직적 결의가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총단결이라는 대의를 '넥타이부대'가 대중적으로 수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사무전문직 노동운동과 전노협운동의 만남은 그때까지의 이질적 배경을 내용적으로 통합하면서 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의 소중한 성과들, 민주적 관행과 노동자의 입장에 철저할 수 있었던 자본과 정권으로부터의 자주성을 지키고 키워나가야 하는 엄중한 과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이후 94년 민주노총 준비위가 꾸려지고 95년 민주노총이 창립하는 과정까지 그와 같은 엄중한 과제는 여전히 남겨져 있었으며, 민주노총이 출범하고 96년에 김영삼정권이 '신노사관계 구상'을 내세우면서 경제위기 공세를 가속화하고 노개위에 민주노조운동진영을 포괄할 때, 그리고 총파업 과정에서도, 노조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미해결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의 미해결과제에 대한 이야기를 위하여 먼저 현시기 '노사정위'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합의'의 한국에서의 의미와 노동조합운동의 대응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한국에서의 '사회적 합의'와 그 귀결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합의'라는 말은,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된 이후 물리적 탄압으로 일관하던 노태우정권과 전노협을 적대시하던 자본측이 소위 '사회적 합의 형성을 위한 대토론회'를 91년과 92년에 연달아 열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그것은 '산업평화 정착'과 한쌍을 이루어, 87~89년에 걸친 폭발적인 노동자들의 투쟁과 그 성과를 담아내려는 전노협운동을 겨냥하였다.
그에 앞서 90년 4월에 한국노총과 경총에 의해 주도되어 '노·사·공익'(한국노총·경총·공익) 위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경사협)가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노동자대중으로부터 '떠오르는 전노협과 수세에 처하게 된 한국노총'의 정세를 반영하여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이름뿐'이었던 제도였다. 그렇지만, 경사협은 당시 신규노조 건설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민주노조운동의 흐름이 노동운동의 한 축으로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자본·정부측이 한국노총을 파트너로 '노·사·정 3자 정립구도'를 형성하여 제도적으로 기존의 한국노총을 보호하는 한편 갓 태동한 민주노조운동(전노협)을 포위공격하는 이데올로기적 부수효과를 노린 제도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합의'의 제도화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것은 김영삼정권이 출범한 1993년 4월 1일의 '노총·경총 합의'와 그해 10월 27일의 '노사정합의'이다. 93년 4월 1일 임금인상투쟁시기에 한국노총과 경총간에 '중앙노사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소위 '4.1 임금조정합의'에서는 노총과 경총이 단일안으로 그해 임금인상 요구율을 4.7∼8.9%로 결정했다.
이러한 '노·경총 합의'는 당시 노총과 경총간 임금인상요구율 차이가 10∼20% 이상이었던 현실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노동자들의 노총에 대한 불만과 비난이 거세게 제기되었다. 당시 노총이 경총과 '한자리수 합의'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본·정부에 의해 제기되었던 '경제회생을 위한 고통분담'이었다. 그 때, 자본측(경총)은 92년 대선 이후 정권이 교체된 이 시기에 경제상황의 악화를 들이밀면서, 조합원들과 전노협의 견제를 받으면서 주저하고 있던 한국노총을 공략하여 한국노총으로 하여금 '한자리수 요구율'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노총은 1994년에도 역시 경총과 '중앙노사합의'를 통해 5.0%∼8.7% 인상요구율을 제시하였다. 94년 당시에도 전노협의 인상요구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노동자들에게는 아직도 최소한 16%∼18% 이상의 임금인상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국노총이 93년에 이어 94년에도 '노·경총 중앙 합의'를 계속했다. 이것은 한국노총이 '왜 그럴까?'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지만 그동안 끈질긴 평가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중요하다. 노동자의 기본적 상태(20%가까운 임금인상이 필요했던 상태)는 자연적으로 한국노총이 잘못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지만, 본질적으로 왜 노동자의 조직이 노동자의 요구와는 달리, 즉 자신의 조합원대중에서부터 해서 노동자 전체를 묶어세우는 단결과 연대를 하지 않고 자본과 연대를 하는가? 이것이 해석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93, 94년의 '노·경총 합의' 문제는 단지 임금을 몇 % 올려야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첫째로, 그것은 한국노총이 자신의 운동을 자본운동의 부침과정(경기순환)에 맞추어 '자본운동 안에서' 움직였다는 점, 둘째로 '자본의 논리'는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을 '국민'으로 여기도록 하여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해를 우선시하지 않고 자본의 이해를 우선시하는 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켰다는 점, 그리하여 노동조합운동이 '자본의 이해'를 더욱 확고히 대변하면서도 그것을 '국민의 이해'라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 데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와 민중)는 확실히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위해(그러나 실은 '자본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등등의 논리가 노동운동 안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문제는 96년 노개위, 98년 노사정위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위와 같은 문제는 한국노총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은 96, 97년도에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것은 현실의 사회관계를 볼 때 '자본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 될 가능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 자본이 사회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의 노동운동에서 '국민'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는 그 또는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93년 '노·경총 합의'가 있은 후 김영삼 정권은 93년 10월27일 이른바 '노·사·정 합의'를 도출하였는데, 이는 '노·사·정' 3자 정립구도를 갖춘 최초의 시도였고, 김영삼정권의 '신경제정책'이 필요로 하고 구상했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때 '노사정 합의'에서 노측은 역시 한국노총이었고, 근거는 '노·경총 합의' 때와 마찬가지로 '고통분담론'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 초기 '사회적 합의' 시도들은, 실질적으로 활발한 노조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민주노조운동 진영을 포괄하지 못함으로써 자본·정부는 '순응하는' 한국노총만을 '합의 대상'으로 해야 했다.
그러다가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1995년 11월 민주노총을 창립하기에 이르면서, 정부·자본의 '사회적 합의' 기도는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까지 포괄하게 되었고 1996년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그리고 김대중 정권의 '노사정위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96년부터 민주노총이 노개위에 참가함으로써 자본과 정권은 드디어 전체 노조운동을 '사회적 합의'의 상대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사회적 합의'들은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는 명약관화하다.
주지하다시피 노개위의 결과는 자본·정부의 의도대로 변형노동시간제,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노동자가 총파업투쟁을 벌이면서 저항했지만 결과를 무효화시킬 수 없었다. 밑으로부터의 노동자대중의 반발, 그리고 노동자 총파업투쟁이 그나마 살아 있던 97년 2월까지는 그래도 정부·자본이 완승한 것은 아니었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관련하여 93년 이래 도입하고자 모색해온 노동자파견제는 도입하지 못했고, 정리해고제에도 2년 유예 단서를 붙여야 했던 것이다.
이것을 세트플레이로 한번에 모두 해결한 것이 '노사정위'를 꾸려서 '사회적 합의'를 시도한 김대중정권이다. 말하자면, 김대중 정권은 '노사정위'를 통해 90년대 들어 자본이 줄곧 요구해왔지만 부분적으로밖에 성공하지 못해온 변형시간제·정리해고제·노동자파견제 도입을 완결지은 셈이다.
반면에 노동조합운동 지도부는 96년부터 98년에 걸쳐 두 번의 '사회적 합의' 혹은 '정책참가'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제도화시키는 데 '참가'했다.
결국, 한국에서의 '사회적 합의'라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된 이후 시작되어 경제상황 악화 때마다 자본·정부에 의해 제기되었고, 노조운동 지도부는 '참가'에 일정하게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대응하였지만, 결과는 자본의 논리에 의하여 함몰되는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소위 '사회적 합의' 혹은 '사회적 협약'을 통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거나 아니면 '사회개혁'을 할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현실의 계급관계하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이 '참가'를 요구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사회의 각 분야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통제력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참가'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노동자계급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참가'를 위해 투쟁을 회피하거나, 혹은 '국민과 함께' 하기 위해 '사회개혁투쟁'을 한다면서 '임단투'를 '협소한 경제투쟁'이라고 간주하며 소홀히 하는 과정은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투쟁력(교섭력)을 잠식시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힘을 증강시킬 수 없는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 확실시되는 '참가', 노동자와 민중의 생존권방어에 근거하지 않는 사회개혁투쟁, 그것은 무의미하다 못해 노동자운동을 수렁에 빠뜨려 종국에는 노동자계급의 힘을 소진시키고 말 것이다.
노조운동진영 일각에서 '참가'의 모범답안처럼 간주되는 독일 등 '사회적 합의' '참가' 등등이 잘 발달해 있다는 서유럽 18개국 노사관계를 비교연구한 코르피라는 '참가주의'('조합주의') 경향의 학자도 "노동자, 사용자, 그리고 정부 사이의 3자간 사회적 협상에서 …… 부르주아지 정부는 사용자와 함께 하기가 쉽다는 것, 그리고 노동자보다 좀 더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계층이나 중간계급과 호의적이기가 쉽다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어떤 진보적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정부가 누구를 대변하면서 누구를 위해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적 합의'를 요구할 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4. 현시기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소위 '사회적 합의' 문제에 대하여 다소 길게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통하여 노조운동이 크게는 자본의 논리에 대응하여 명확히 노동자계급의 설 곳과 앉을 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현시기 노조운동의 '위기'와 높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 노조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장벽은 '국가의 경제위기'라는 문제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 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미 90년대초반부터 자본에 의해 제기되고 있었던 '국가경쟁력 강화론' '고통분담론'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한 대응을 통해 여러차례 경험하면서도 노동운동이 아직까지 돌파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경제위기'와 이를 통해 핵심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 자본이 제기한 '노동시장 유연화'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볼 수 있듯이 노조운동은 위와 같은 자본의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채 '고통을 전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이 90년 전노협 출범 이후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짊어지고 있는 미해결의 과제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자발성에 기초한 대중적 투쟁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을 민주노총 1기운동(1995. 11 ~ 1998.3.)은 '국민과 함께 하는' '사회개혁투쟁' 등으로 방향을 정하면서 풀어보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97년부터 민주노총은 임단투보다는 '사회개혁투쟁' 및 '경영참가'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이유는 '임단투는 협소한 투쟁'이라는 것이었고, 사회 전반적인 개혁의 문제에 노동운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말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서 지적하였듯이 노동자계급의 투쟁력에 기초한,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상승시켜내는 선상에 서 있지 않는 한 자본의 논리에 완벽하게 침윤당하고 만다.
이것은 자본과 정권으로부터의 자주성을 견지하는 문제와도 연관된다. 그리고 관료주의를 경계하면서 노동조합운동조직의 내부 민주주의를 가꾸어 나가는 노동운동의 항상적 과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노동운동, 그 중에서도 노동조합운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삶(계급) 자체에 기초한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의 대의를 부단히 찾아내고 사회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노동조합운동이 처해 있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돌파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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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5] 한국노동운동의 현실과 과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