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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
2006-07-05 22:30:33
박성인
[보리스 까갈리쯔끼] 단 하나의 출구: 사회주의의 부활
단 하나의 출구: 사회주의의 부활

보리스 까갈리쯔끼(Boris Kagarlit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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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오스트레일리아 민주사회주의당이 주관하여 발행하는 국제적 이론지 Links, 2000년 1-4월호에 실린 글 “The Prospects for Socialism (or Barbarism)”[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에 대한 전망]을 번역한 것으로서, 까갈리쯔끼의 최신 저서 New Realism, New Barbarism(Pluto Press)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강조는 모두 우리말 번역자가 단 것입니다. / <당원의길>2002.04.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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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주의의 쇠퇴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이 급락한 작년의 유럽의회 선거 직전에 가장 권위있는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소위 “새로운 중도(neue Mitte)”의 원칙을 정식화한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그 원리는, 전통 사회민주주의 사상(재분배, 혼합경제, 케인즈의 정신에 따른 국가 조절)을 신자유주의의 정신에 따른 새로운 접근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실 이 서한의 저자들은 시장이라는 수단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면서 신자유주의 자체와는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들은 세계무역 문제를 더 많은 자유화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연대 대신에 더 많은 경쟁을 요구했으며, 일자리의 창출 대신에 젊은이들을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도록 준비시킬 것[직업훈련 중심의 실업대책]을 주장했다.
  독일 민주사회주의당의 창설자이며 이 당의 의원단 지도자인 그레고르 기지는 블레어와 슈뢰더에 응수하는 문서를 작성·공표했다. 그 제목은 「현대 사회주의 정책에 대한 12개의 명제」였다. 이 명제들은 사회적 연대, 조절, 그리고 재분배라는 원칙들에 대한 일관된 옹호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선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기지의 명제들에 사회주의적인 것은 없었다. 이 문서는 노동운동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고, 이 글이 옹호한 개혁이란 것들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국가의 위로부터의 주도에 의한 것뿐이었다. 본질적으로, 기지는 자본주의의 틀거리 안에서는 전반적으로 진보적이지만 결코 이 틀거리 너머로 확장되지는 않으며 체제의 논리와 충돌하지도 않는 일군의 조처들을 옹호하고 있었다. 1970년대라면 이러한 글은 우파 사회민주주의적인 것으로 해석됐을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말에는 이런 글이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좌파적 비판의 사례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내 친구 그레고르 기지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 술집의 피아니스트처럼 그는 “가능한 만큼만”,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조건이 허락해주는 만큼만 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한 명의 현실 정치인으로서 기지는 자신의 명제들이 논쟁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추상적 이데올로그”, “유토피아주의자” 등으로 보일 것이며, 결국 아무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논쟁 맥락에서 기지의 입장은 가장 좌파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전대미문의 역사적 쇠퇴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쇠퇴는 노동조합과 여타 노동자조직 형태들의 위기를 배경으로 발생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때때로 파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만, 전반적으로는 다시 한 번 “대자적 계급”으로부터 “즉자적 계급”으로 돌아가버렸다. 노동자들 중 상대적으로 운 좋은 집단들, 즉 첨단 기술에 관여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육체·기계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연대를 보이고 있지 않다.

2. 야만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하지만,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세력의 쇠퇴로 인해 보다 강력한 성장을 보인 것도 아니다. 자체의 논리에 따라 체제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1997년과 1998년의 아시아·러시아 금융 대란 와중에 이 위기의 영향은 어김없이 미쳤다. 금융 위기가 제일 처음 타격을 입힌 나라들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이 이들을 뒤따라 새로운 위기를 약속하고 있다. 일련의 금융 참사는 전반적인 위기 과정의 단지 한 양상일 뿐이다. 1989년과 1991년 사이에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확장의 극한에까지 이르러, 진실로 전 지구적이 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더 이상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모순의 첨예화를 의미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라는 선택을 언급했었다. 결국, 그녀가 옳았다. 사회주의는 고통스러운 후퇴를 겪고 있고, 야만이 승리하고 있다. 이러한 야만은 현재 세계체제의 변방, 즉 러시아, 아프리카, 구 유고슬라비아, 콜롬비아에서 출현하고 있다. 이들 지역에 나타난 것은 순전히 대혼돈의 온상이다. 보편적 경쟁의 세계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의 말에 딱 들어맞는 제어 불가능한 폭력의 세계이기도 하다. 법은 필요할 때만 언급된다. 승리의(혹은 자신을 따돌린 자들에 대한 복수의) 욕망만이 절대적이다. 이는 바로 체제의 논리에 따른 것이며,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필연적으로 원초적 공격욕을 야기한다. 최근 몇 해 동안의 경험을 통해 이미 1920년대에 정식화된 정신분석학자들의 결론이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비이성적인 지역간·민족간 갈등, 대량학살 무기의 확산, 부패의 증대, 마피아, 마약산업, 이 모든 것들이 주변부에서 창궐하고 있다. 민족주의의 확산은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예상 가능한 결과다. 르완다, 시에라리온, 콩고의 학살 규모는 이미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인간성 파괴에 필적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는 살육이 거대한 역사적 격돌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데 반해 지금은 우발적이고 진부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쿠르드족의 땅으로, 체첸으로, 타지키스탄으로, 구 유고슬라비아로, 콜롬비아로 폭력의 지대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이러한 폭력의 폭발은 시장의 부에 동참할 가능성도 없고 다른 토대에 기반해 자신을 변화시킬 전망도 없는 주변부 사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주변부의 충격은 점점 더 중심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국들은 망명과 이민의 물결로 괴롭힘당하고 있으며, 이는 다시 인종주의, 폭력, 경찰 통제의 성장을 부추기고 있다. 교육의 쇠퇴는 주변부에서뿐만 아니라 중심부에서도 일반적 현상이 되고 있다. 이는 점점 더 주변부의 두뇌유출에 의존하고 있는 선진국에서 훨씬 더 심각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두뇌 자원은 쉽게 고갈될 것이다. 경제 위기는 지식의 위기로 전환될 수도 있다.
  대혼돈이 확산되고 있으며, 점점 더 새로운 지역들, 생활 영역들로 퍼져가고 있다. 후꾸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서구뿐만이 아니다. 소련 공산당 강령의 유명한 문구를 빌려 말하자면, 현 세대는 현대 문명의 총체적 붕괴를 목격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더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독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문명의 붕괴조차도 인류의 절멸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인류는 고대 사회의 폐허 속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잔해 위에서 나타날 것에 대해 말하자면, 우린 최후의 로마인이 르네상스의 도래를 점칠 수 없었던 것처럼 결코 어떠한 전망도 할 수 없다.

3. 사회주의냐 아니면 야만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야만이 아니라면, 바로 사회주의다. 급진적인 체제 대안, 즉 자본주의를 개선하고 “손질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인 저 사회주의 말이다. 내가 보기에,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중운동의 “복귀”는 전반적인 야만화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만약 21세기의 첫 십년 동안에 이러한 “복귀”가 이뤄진다면 이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상세한 예언은 불가능하지만, 약간의 예상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이 점차 자신의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조직 형태가 바뀔 것이다. 노조는 덜 집중화되고 관료화된 모습을 취하게 될 것이며, 노조의 이데올로기는 보다 급진적이고 국제주의적이 될 것이다. 방어적 투쟁 대신에 노조는 공격에 나서게 될 것이다. 점차 초국적 기업의 약한 고리를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 자신들의 활동을 조정해가면서, 노동조합은 다시 한 번 노동과 자본 사이의 세력 균형을 뒤바꿀 것이다.
  노조의 재편은 고용 노동자계급의 구성이 변화해가는 보다 일반적인 과정의 일부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고용 노동은 곧 육체 노동이라는 전통적 관념은 과거의 것으로 사라지고 있다. 과학과 교육은 전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됐다. 기술혁명의 와중에서, 어떤 새로운 사회 계층, 일종의 “기술 엘리트”가 형성됐다. 그리고 이 기술 엘리트는 노동의 세계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특권적 위치로부터 과실을 따먹는 데 익숙해 있으며, 실제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오직 기술혁명의 상승기에만 가능한 것이다. 어떤 혁명이든, 설사 그것이 기술혁명이라 할지라도, 중단없이, 휴식없이 계속될 수는 없다. 기술 발전의 혁명적 국면은 점진적 국면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기술 엘리트의 지위는 변화하고 있다. 상당한 정도로, 이들 엘리트는 자신들이 실은 부르주아 사회의 진짜 엘리트들--금융 과두층, 민간부문의 초국적 기업 관료들--에게 종속돼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기술 엘리트가 자신의 이해와 부르주아지의 그것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면 할수록 (과학자, 교사, 의료인 모두 포함하여) 자신이 노동 세계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된다. 심리상의 변화는 완만하게 발생한다. 즉, 한 세대는 족히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필연적이며 논리적인 과정이다. 일부 사회학자들(예를 들어, 알렉산드르 타라소프Alexander Tarasov)는 자본주의의 무덤파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이들 기술 엘리트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봉건 사회에 대해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할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키워주고 초기에 이들을 지탱해주었던 것이 절대주의였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겠다.
  아무튼 새로운 기술 엘리트는, 마치 부르주아지가 한때 자신들을 제 3신분[프랑스 대혁명기에 국왕 및 귀족, 가톨릭 사제에 대항하는 광범한 민중을 지칭했던 말]의 일부로 인식하고 경제적 이해보다 공통의 계급 이해를 우선시한 것처럼, 노동 세계의 일부로 자신을 재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적 원자화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전통적 노동운동의 주된 과제였다. 현재 문제는 어떻게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다.  

4. 사회주의의 문제 - 시장과 소유

  실제로, 노동계급은 마치 19세기 중반에 산업 노동이 장인 노동을 박차고 등장할 때처럼 혁신의 와중에 있다. 새로운 계급의식에 기반할 경우, 새로운 사회주의 기획이 가능하다. 새로운 원칙들을 추구하는 최신의 논쟁들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핵심 사상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변할 경우 이는 더 이상 사회주의도 아니다. 사적 소유로부터 사회적 소유로의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민간부문의 이윤상의 필요에 종속된 경제로부터 사회부문이 장악하고 사회적 필요에 복무하는 경제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새로운 경제관계는 “혼합 경제” 혹은 “이행기” 경제의 형태, “시장 사회주의” 형태로만 실제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시장과 사회주의의 결합이 모든 모순을 해결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회주의가 반드시 시장을 배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가 시장 논리의 결과인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주의를 역사적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경제를 조직하는 토대로서 시장의 잠재력이 갖는 제한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동과 연대에 기반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 시장을 뿌리뽑는 과정이 기계적이어선 안 된다. 즉, 시장 관계가 자연스럽고 필요한 영역에서는 시장이 잔존할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과 기초 과학의 경험에서 드러나듯이, 기술 발전이 이뤄진 경제 영역에서는 다른 논리가 작동한다. 탈산업적 기술이 확산되면 될수록 사회는 더욱 더 비시장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사회부문은 국가 소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국가 소유가 그 자체로 선이기 때문이 아니라(종종 이는 악이다) 국유화 없이는 사회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레온 트로츠키는 삶의 막바지에, 사회화는 국유화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며 이는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과 같다고 언급했다. 수백만의 번데기가 나비가 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소련 경제가 바로 그랬다. 소련 경제는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 경제가 되지 못했다. 집중화된 국가의 관료적 시체더미는 모든 질적 성장에 장애물을 놓았다. 발전과 변혁 대신에 퇴보가 시작됐다.
  트로츠키의 말을 빌리자면, 일정한 단계에 소유는 국가소유 형태로 “번데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후에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발전이 이뤄질 수 있으려면, 국가 자체가 급진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5. 사회주의의 문제 -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의 민주적 혁신에 대한 요구는 사회주의적 요구만은 아니다. 이는 세계화라는 도전에 대한 사회의 자연스럽고 적극적인 응전이다. 초국적 기업 엘리트들과 금융 과두층은 서로 통합되어 있으며, 동시에 사회로부터는 격리되어 있다. “주변부” 나라들뿐만 아니라 “중심부” 나라들에서도 그러하다.
  사회는 세계화될 수 없다. 노동 시장도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세계화 정책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좌파는 초국적 엘리트들에 반대하는 사회의 이해를 옹호한다. 이로 인해 좌파들은 “애국주의적”이 되고 있으며, 여기서 우린 매우 첨예한 문화적·이데올로기적 문제에 도달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와 멕시코에는 인류 및 시민권 개념, 계몽과 자유의 가치들에 긴밀히 결합된 민주적·혁명적 애국주의의 전통이 존재한다. 이와 반대로, 러시아와 터키에는 민주적·좌파적 전통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대결하는 가운데 발전했다. 그 결과, 좌파들은 뒤늦게 애국주의적으로 되어가는 가운데 “신토불이”류의 갖가지 반동적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얻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쥬가노프의 러시아연방공산당으로부터 이것이 야기하는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원칙상 “좌파 애국주의”에 대한 대답은 민주화의 일관된 추구여야 한다. 세계화의 출현 이래로 국제적 형태의 민주주의와 대의제가 참으로 긴요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것 없이는 일국 수준의 민주주의는 방어적이고 불완전할 뿐이다. 하지만, 국민국가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아예 존재할 수도 없다. 사회는 국민국가의 틀거리 안에서만 자신의 이해를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국제적 구조는 그것이 모든 개별 국가들의 민주주의에 의존하는 경우에만 대의제에 충실하고 민주적일 수 있으며, 이는 일국 수준의 민주주의가 지방 수준의 자주관리에 의존함으로써만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초국적 자본과 국제금융조직이 점점 더 무책임해지고 모든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는(본질적으로 이들은 선거로 뽑힌 정부를 자신들이 법적으로 통제하려 한다) 이 때, 국민 주권의 옹호는 전 국민의 기본적 시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동격이 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관계되는 모든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갖고 있다.
  주권이 이렇게 이해될 경우, 이는 “혈통적” 연합이라는 이데올로기나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설교하는 “데르자브노스찌(derzhavnost, 짜르 시대 권위주의적 쇼비니즘의 파생물)” 따위와는 아무 공통점도 없다. 경제 주권을 위한 투쟁은 그것이 다른 나라 민중들과의 연대 활동의 형태를 취할 때만 의미를 지닌다. 이는 민족주의 사상(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관료적 민족주의)이 아니라 국제주의와 반(反)제국주의 전통에 의존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세계화의 시대에 좌파가 “현대화”하고 “최신화”하려면 이들은 역설적이게도 다름아닌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오래된 원칙들[국제주의와 반제국주의]에 계속 충실해야 한다.

6. 새로운 진보정당운동의 필요성

  분명히 가장 심각한 변화를 겪을 필요가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사상이 아니라 좌파 정당의 개념이다. 단순히 민주집중제에 대한 레닌의 이해가 처음부터 권위주의적 타락을 내장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게 요점은 아니다. 이러한 정치조직 형태는 20세기 초반 러시아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등장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이에 대해 뭐라 말하든 이는 당시의 조건들에 부합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의 과제는 레닌주의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해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정식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구조와 현재의 집단적 경험에 부합하는 조직 형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는, 역사를 통해 그 어려움이 입증된, 일관되게 민주적인 정당을 창조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다. 지금까지는 공산주의자들도, 사회민주주의자들도,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주변부 나라들의 민족해방운동들도 이러한 도전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러한 과제가 아직 실천되지 못했다는(아마도 이론적인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원칙적 문제다.  
  이상적인 정당 모델, 어디서나 재생산될 수 있는 그런 모델은 불가능하다. 현대 좌파의 정치조직 문제는 전혀 이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며, 정확히 실천적인 차원의 과제다. 실천 운동 없이는 어떠한 정당 구조도, 강령도 쓸데없다. 운동이 일단 존재하는 곳에서는, 비록 이상적 모델을 발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수많은 문제들과 모순들에 대한 실천적 경험을 찾아낼 수는 있다.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결국 우리를 앞으로 이끌어준다. 이의 사례는 브라질의 노동자당, 독일의 민주사회주의당,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재건당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정당들의 경험은 좌파의 당위적 모습에 대한 일부의 이상적 관점에 따라 비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론화는, 적절한 경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함께 따르지 않는다면, 실천 운동에 대한 참여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바로 이런 차원에서 기지가 취한 입장은, 비록 내가 그의 주장들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를 비판하는 자들의 말보다도 더 무게 있게 다가왔다. 비록 비판자들의 담론이 이론적으로는 더 올바를지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다).

7. 개량과 혁명

  새 시대에 개량주의자와 혁명가 사이의 분열은, 비록 그것이 기본 원칙의 문제들 중 하나라 할지라도, 좌파를 한편으로 하고 전(前) 좌파들 혹은 사이비 좌파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갈등보다 덜 중요한 것이 되고 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가 마주한 문제는, 사회민주주의 세력들의 온건화와 개량주의가 아니라, 이들이 개량주의조차도, 가장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조차도 일관되게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적인 입장은 이제는 사회민주주의 조직 내의 반대파나 “사회민주주의” 왼쪽의 정당들에서나 발견 가능하다(독일의 민주사회주의당, 스웨덴의 좌파당 등등).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는, 개량주의의 천성적인 제한성을 충분히 고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개량주의의 과제가 새롭게 정식화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한편 좌파 운동의 취약성은 역설적으로 급진주의가 필수불가결함을 말해준다. 개량주의는 세력 균형이 노동운동 쪽으로 기울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세력 균형의 변화는 혁명적 투쟁의 결과로만 나타난다. 오늘날의 지배자들로부터는 약간의 부분적 개량을 얻어내는 것조차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이들로 하여금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좌파 운동은 체제에 확실하게 위협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동정이 아니라 공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오직 그때에야 좌파는 존중받을 것이다. 지배자들에게 좌파의 “진지함”이나 “책임성”을 설득시키려는 정책들은 궁극적으로 운동의 자기파괴를 초래할 뿐이다. 운동은 오직 노동자들에게만 자신의 진지함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정서를 표현해야 하며, 사회적 지지 기반의 이해를 위해 실질적 성과를 낳아야 한다. 매우 자주, 이러한 성과는 1995년 12월의 파리[공공부문 노동자 총파업이 있었음]에서처럼 상당히 “무책임한” 행동의 결과로 등장한다. 당시 노조는 공무원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정지시켰었다. “중심부” 나라들과 “주변부” 나라들의 정치적 급진주의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 원칙은 어디에서나 같다. 즉, 오늘날 성실한 개량주의자라면 누구나 혁명적이 되어야 한다.    

8. 문화와 사회주의    

  마지막 논점이 남았다. 사회주의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문화다. 사회주의의 원칙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원칙은 시장 바깥에 위치하며, 어느 정도는 시장에 적대적이다. 미는 통화 단위로 측량될 수 없으며, 인간의 우수성이 항상 수익성을 띤 것은 아니고, 지식은 매매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지식은 만인의 것이다.
  20세기 초기에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가졌던 이해(利害)는 새로운 사상의 유행이나 혁명적 열망의 시대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는 직업상의 요구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었고,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심지어 경제적 이해에 따른 것이었다. 문화는 근본적으로 반(反)부르주아적이며, 문화가 작동하는 법칙은 사업의 그것과는 다르다. 만약 현재 지식인들이 자유주의 입장으로 대대적으로 전향하고 있다면, 이는 사회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상실해버린 지식인 자신의 심원한 위기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예술은 연예 사업으로 대체되고 있고, 과학은 계약자들의 입맛만을 맞추는 “연구 프로젝트”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어떤 사회도 문화와 과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낡고 썩은 조롱받는 지식인들 대신에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할 것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새 세대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마주할 것이다.

* 저자 보리스 까갈리쯔끼는 러시아의 정치이론가이며 활동가로서, 80년대에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구소련의 관료독재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고, 이후 줄곧 사회당, 노동당 건설운동 등의 진보정치활동에 참여했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는, 구소련의 반체제 지식인사를 다룬 󰡔생각하는 갈대󰡕(역사비평사), 구소련의 몰락 과정을 분석한 󰡔소련 단일체제의 와해󰡕(창작과비평사), 선진자본주의에서의 변혁의 가능성을 탐구한 󰡔변화의 변증법󰡕(창작과비평사), 제 3세계의 정치·경제적 대안을 모색한 󰡔근대화의 신기루󰡕(창작과비평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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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회발제문-맑스엥엘스사회(공산)주의생산관계의 공백과확장-곽노완-20060705  

 박성인
2006/07/05 3830

 [보리스 까갈리쯔끼] 단 하나의 출구: 사회주의의 부활  

 박성인
2006/07/05 4845
3
 [박성인] 그래도 ‘사회주의’는 그 자체로 옹호되어야 한다.[현장에서미래를]2004.04.  [1]

 박성인
2006/07/05 3279
2
 1회발제문-1970년대 자본주의 위기와 유로코뮤니즘  

 박성인
2006/07/05 3250
1
 취지와 프로그램  [3]

 한노정연
2006/06/22 3755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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