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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현장으로, 그 신바람을 일으키자

현장에서 미래를  제53호
백기완

모두 현장으로, 그 신바람을 일으키자



백 기 완/ 자문위원,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작품 “인간단지”


김정한의 소설 “인간단지”를 보면 문둥병환자들의 끈끈한 삶의 이야기가 뭉쿨하게 다가온다.
작품의 역사적 배경은 일제식민지 시대를 거쳐 이른바 남한에 분단정부가 세워진 뒤의 상황, 그러한 역사적 변전의 소용돌이가 한가정 한 개인에게 들이닥치는 상황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 ‘우중신’ 노인은 본디 밥술이라도 먹는 집 자식으로 그 당시로 말하면 고등교육기관인 중학을 진학하면서 문학을 지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학을 마치기도 전에 집안의 강권에 못 이겨 요샛말로 하면 사랑놀이도 한번 거치질 못하고 장가부터 들게되고 이어서 그렇게 맺혀진 아내하고는 잠자리 한번 안 해보고 일본 유학을 하는 동안 사건은 벌어진다.
우중신 노인의 아내 복돌이의 시집살이는 여간 만만치가 않았다. 시에미의 닥달도 닥달이지만 노상 사랑방에 누었는 시할아버지라는 것은 문둥병 환자라, 복돌이의 시집살이는 그 문둥병 환자를 돌보는 일인데도 복돌이의 정성이 그렇게 갸륵할 수가 없다. 아마도 맨살을 에이는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운 시집살이지만 그러나 그 찬바람을 견디어 내는 며느리의 인내력과 의지는 더 뜨겁다는 것을 가장 적절하게 대비시킨 대목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문둥병을 돌보던 복돌이가 끝내 문둥병에 걸리게 되자 시집살이라는 봉건적 가족주의의 거짓됨은 한 여인의 정성과 순경의 등불을 여지없이 뒤엎고 만다. 복돌이를 내쫓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도 모르고 일본에 유학중인 우중신 노인은 그의 지망인 문학공부를 해볼 겨를도 없이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중신 노인의 아내는 우중신 노인의 집안의 학대를 이겨낸 보람도 없이 그 당시로 말하면 불치의 병인 문둥병을 얻게 되고 바로 그것 때문에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는 반면 그 복돌이의 남편 우중신 노인은 그러한 내부 모순을 안고는 있지만 일제로부터 짓밟힌 사람 사는 세상 다시 말해 조국의 해방을 쟁취하고자 작가의 말을 빌리면 “일제 경찰서를 사랑방 드나들드키” 하는 것으로 우중신 노인의 인간적 발전을 그리고 있다.
우중신 노인의 발전은 이에 그치질 않는다. 일제를 무너뜨리고 8․15해방을 쟁취한 뒤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그 동안 홀로 남겨두었던 아내 복돌이에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는다. 다시 말하면 비로소 남녀의 사랑에 눈을 뜬것이라고나 할까. 그도 아니면 인간적 뉘우침의 한계에 얽힌 동정의 언저리를 끝없이 서성이는 상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사람은 비인간적인 봉건적 가족주의에 희생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깨우치고 또 한사람은 엄청나게도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인간해방을 눈 떠가는 상황설정으로 작품은 극적으로 전환되는가 싶다가 느닷없이 사랑이라는 개인사적 말뜸(話頭)으로 얽힌다.
우중신 노인이 집이랍시고 돌아와 보니 아내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 깜짝 놀라 수소문을 해보니 그 맑고 건강하던 복돌이가 문둥병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안 우중신 노인은 해방조국을 어떠 어떠하게 세우겠다는 생각도 또 문학을 해보겠다는 뜻도 새겨볼 겨를도 없이 백방으로 문둥이 수용소를 뒤진 끝에 그 복돌이를 만나는 대목에서 우중신 노인의 사랑이야기는 맘판(絶頂)으로 치닫는다.

이미 병세가 심각하여 몸이 기울어진 복돌이를 문둥병 수용소에서 끄집어 내 깊숙한 산비탈에 오두막을 세우고서는 거기서 처음으로 신혼살림을 차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필자는 바로 이 대목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소설적 상상력의 현실화가 아니라 사랑의 실체를 그릴 수 있는데 까지 그려낸 것, 다시 말해 예술만이 창조할 수 있는 사랑의 높은 경지라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말로 해서 예나 이제나 어느 누가 문둥병으로 이미 기울어진 고름 투성이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 그것도 문명권 밖인 외진 산골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단 말인가. 병간호를 해주는 정도라면 몰라도.
여기서 필자는 작품을 채 읽기도 전에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사랑의 승리이자 작가 김정한의 승리라고.


현장을 놓쳤구나 하는 탄식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여기서부터 또 다른 문둥병의 늪으로 곤두박질하고 있음을 걸러 낼 수밖에 없는 내용에서 필자는 곤혹을 치르게 된다.
무슨 말일까. 우중신 노인과 같이 살던 아내는 마침내 죽고 그 때문에 우중신 노인이 문둥병에 걸리는 대목은 앞서 말한 사랑이야기를 더 한층 높은 감동의 세계로 이끈다.
또 이로 말미암아 우중신 노인이 해방조국에서 어엿한 일거리를 맡는 것이 아니라 한 병자로써 문둥병 수용소에 들게되는 사태에서 필자는 우중신이라는 사람의 비극만 읽는 기분이 아니었다. 도리어 해방된 조국이 둘로 갈라져 이를테면 수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분단억압체제 속으로 오라가 지워지는 민중의 비극을 역사적으로 떠올리기도 했다.
더구나 우중신 노인이 들어 있는 수용소는 그냥 문둥병 수용소가 아니었다. 수용소 책임자 박원장이란 사람이야말로 몸도 병들고 마음보도 병든 부정부패 분자, 이 때문에 수용소 “자유원”이란 가련한 사람들의 재활원이 아니라 도리어 박원장의 돈벌이의 소굴로 되어지고 있는데 대해 우중신 노인이 앞장서 그 썩어문드러진 박원장의 지배체제와 싸우는 장면은 그대로 우중신 노인을 한없이 거듭나게 하는 매우 감동적인 설정이라고 여겨졌다.
사랑을 깨우치면서 세상에 대한 사랑도 아울러 깨우치는 그야말로 전인적 발전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감동의 연속성도 잠시, 매우 실망하게 되는 것이 그 작품의 매듭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박원장과 싸우던 우중신 노인이 느닷없이 환자들과 함께 몰래 수용소를 탈출하여 외진 산골에다 문둥이의 공화국 이른바 “인간단지”를 만들었다가 문둥이와 는 같이 살수가 없다는 동네 사람들의 습격으로 우중신 노인은 죽고 또 더러는 정처 없이 달아나 결국 인간단지는 파탄 나고 마는 결말이다.

필자는 인간단지라는 이 소설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배신감에 사로 잡혔음을 솔직히 털어 놓는다.
무슨 말일까. 우중신 노인의 병은 단순한 문둥병이 아니다. 불쌍한 문둥이를 등 처먹는 수용소 박원장의 부패 폭력으로 이중화된 병이다.
때문에 참말로 문둥병으로부터 소생하려고 하면 그 썩어문드러진 현장에서 그 부패 그 폭압과 싸워 수용소를 바로 잡아야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중신 노인과 그를 따르는 환자들은 수용소라는 현장을 떠남으로써 그네들의 이상 인간단지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들을 저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우중신 노인은 동네 사람들한테 매를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배신하여 죽음에 이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인간단지”의 끝머리다.

“한참 난투극이 벌어졌다. 천막은 헐리고 음성 나환자들은 여기 저기 쓰러졌다. 부락민도 더러 낫에 상했다. 이건 그저 싸움이 아니라 바로 죽이고 살리고 하는 전쟁이었다. 세 부족으로 달아나듯 경기까투리를 비롯한 젊은 환자들은 드디어 몇 갈래로 나뉘더니 비호같이 산길을 내려 쏘았다.
이젠 그들의 머리 속에도 조국이니 동포니 하는 생각은 요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매듭짓고는 있으나 이것은 작가의식의 한계를 분칠하는 것일 뿐 소설적 실패를 만회하는 것으로는 되질 못한다.

어쨌거나 나는 왜 30년 전에 읽었던 이 소설을 다시 꺼내 해묵은 새김질을 하는 것일까.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현장을 떠나면 바로 그 순간 죽되 속절없이 죽는다는 깨우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30년 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방 이 땅의 변혁운동이나 진보운동이 모두 현장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동현장이 있으되 노동자들이 그 속에서 꿈을 빚어 꿈을 일구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생활을 얻고자 함으로써 사실상 노동현장으로부터 유리되는 상황에 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날로 피폐 해 가는 농촌의 농민들도 그곳에서 자주․자족적인 경제구조를 일구어 내자는 것이 아니라 소득증대만을 겨냥하다가 국내외 독점자본의 약탈적 자본증식논리에 밀리어 빚만 쌓이고 그래도 그저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단순한 소득증대만 노림으로써 농촌이라는 현장으로부터 유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새해가 왔다. 이제 이 땅에 상기도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그 양심들은 모두 현장으로 들어가는 새 바람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학생들은 치부․출세․안전 항해를 위한 직장으로가 아니라 현장으로 파고드는 일대 신바람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거리에 내쫓겨 거리에서 서성이는 이들은 그들이 방황하는 뒷골목이 바로 현장으로 되어야 한다.
직장인들은 바로 그 직장이 현장이 되어 거기서 부정부패와 싸워 인간의 보편적 원리인 꿈을 실현하고자 해야한다.
모든 노동현장은 노동자들의 꿈이자 인류의 꿈을 실현하는 현장으로 제 모습을 바로 해야 한다. 그러지를 못하고 만약 작품 “인간단지”의 주인공 우중신 노인처럼 엉뚱한 곳으로 도피 거기서 문둥이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을 때엔 결국 죽되 하염없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지금 우리 모두 현장에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장을 잃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한/노/정/연

2000-03-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0&no=8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