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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의 세상, 도둑놈이 된 노동조합

현장에서 미래를  제108호
김영수

권두언

도둑질의 세상, 도둑놈이 된 노동조합

김영수 / 한노정연 부소장. 교육위원장


온통 아우성이다. 시골 마을에서 한 판 벌어지는 잔칫집의 떠들썩한 소리가 아니다. 한반도 여기저기서 서로 ‘도둑질한 놈들을 죽이자’는 소리로 아우성이다. 이제야 신종 도둑놈을 잡았다는 환호성과 영문도 모른 채 도둑놈이 되어 버린 노동자들의 한숨으로 말이다. ‘죄를 지은 노동자가 감옥에나 가야지 무슨 얼어 죽을 투쟁이야’라는 곡소리와 함께.

2005년 초부터 저 멀리 전남 광주와 부산에서 시작된 노동조합 간부들의 도둑질이 이제는 서울 한복판으로 상경하여, 오래 전부터 노동조합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은 지금이 아니면 노동조합을 죽일 수 없다는 일념으로 설쳐대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모든 간부들이 도둑놈인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도둑질을 한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많든 적든, 이 놈도 도둑질, 저 놈도 도둑질. 도둑놈들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해 듣는 이의 마음을 터지게 한다.

도둑질이 만약 ‘정당하지 않게 남의 것을 가로채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당하게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의 노동’에서 만들어진다. ‘노동을 하지 않는 자들은 먹을 권리조차 없다’는 노랫말처럼, 노동과 소유는 한 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세상에서 도둑질의 수법이 너무나 다양하다. 노동자들도 또는 노동조합의 간부들도 자본주의 세상의 도둑놈으로 변해 가고 있다.

가장 ‘위대한 도둑놈’은 노동자들의 노동을 도둑질하는 자본주의 세상의 지배세력이다. 여기서 뜯고 저기서 뜯어, 즉 노동자들을 많이 착취하여 이윤을 많이 남기면 남길수록 소위 ‘영웅’으로 칭송되는 도둑놈들이다. 자기들이 노동자와 나라를 살려주고 있다고 큰 소리로 아우성을 친다. 내가 감옥으로 잡혀 들어가는 순간 노동자와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는 영웅들이다. 이러한 도둑질은 지극히 정당하다. 법과 제도가 보장하는 도둑질이다. 노동착취는 정당하고 그 착취에 거부하는 행위는 부당하다는 것을 자본주의의 법과 제도가 강요하고 있다. 위대한 도둑놈들 밑에서 살아가는 노동자에게는 피골이 상접한 골육으로라도 살고자하는 처연한 몸부림만 남는다. 비정규직으로 내동댕이쳐진다 하더라도, 일만 할 수 있다면 하고 싶어 하는 가슴 밑바닥의 욕구를 도둑질하는 현실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철면피 도둑놈’들이다. 이들은 위대한 지배세력과 한 배를 탄 세력이다. 진짜 도둑놈들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도둑질을 하지만, 이들은 얼굴을 뻔뻔하게 드러내면서 위대한 도둑놈들을 위해 도둑질을 하는 집행관이다. 위대한 도둑놈들에게 잘 보여 떡고물이라도 챙기려고 집행의 권력을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철면피들이다. 물론 철면피들 중에는 그 철판 두께가 얇은 도둑들도 있지만, 이미 위대한 도둑놈들의 그물망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도둑질을 한다. 이들이 행사하는 집행권력도 당연히 노동자들로부터 도둑질한 것이다. 권력의 실질적인 주체들을 소외시키는 대의제 권력이 그것이다. 권력을 한 번 위임한 노동자․민중들은 자신의 권력을 도둑질에 사용하는 그들로부터 지배받으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공범이 되어 버린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세상에서나 아마도 철면피 도둑놈들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 ‘비굴한 도둑놈’들이 있다. 위대한 도둑놈들이나 철면피 도둑놈들을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도둑질을 하는 세력들이다. 한국에서는 19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발전하기 이전까지, 노동조합을 거의 철면피 도둑놈으로 간주했었다. 하지만 민주노조운동이 발전하면서 ‘위대한 도둑놈’과 ‘철면피 도둑놈’들을 잡아서 노동자들의 원한을 풀어 줄 수 있는 ‘노동자․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노조운동의 간부들이다. 최근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도둑질을 한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그들이다. 노동자․민중들에게 ‘희망의 얼굴’로 동시에 ‘음모와 좌절의 얼굴’로 다가간 두 얼굴의 세력들이다. 이들은 부당하게 남의 것을 챙기는 도둑질 말고도 또 다른 도둑질을 한다. 노사간의 이면합의, 노사 평화 및 무쟁의 선언, 노사간의 인정-관리 파업, 그리고 노사정간 사회적 합의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이는 노동자들이 원하고 바라는 일이라고 하면서 그 작업들을 하지만, 위대한 도둑놈들이나 철면피 도둑놈들이 그 작업들을 더 원할 경우, 노동자들을 팔아먹는 도둑질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노동자들을 팔아서 남는 대가가 무엇일지 궁금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불쌍한 도둑놈들이 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무전유죄, 무권유죄, 무연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돈이나 권력이나 연줄이 없어서 도둑질하고 감옥에서 살고 나와야만 하는 도둑놈들이다. 이들의 죄질도 다양하지만, 생계형 도둑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도둑놈들이다. 정말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도둑질이라도 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도둑질! 이들은 보통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유형의 도둑놈들이 만든 거푸집에서 나갔다는 범죄를 저질렀다가 감옥에 들어간다. 지배세력의 이해를 추구하는데 적합한 거푸집, 지배세력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데 유리하게 만들어진 거푸집, 그 집에서 일탈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거푸집에 의해 희생되는 도둑놈들이다. 물론 그 거푸집은 위대하고 철면피 같은 도둑놈들의 이해를 건드리지 않는 사람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사회구성원들의 ‘일반이해’로 규정되는 상식적인 규범과 질서들이다. 이러한 규범과 질서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정말 위대한 도둑놈과 철면피 도둑놈들이 지배하는 독재사회이거나 파시즘 사회일 것이다.

도둑놈들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위대한 도둑놈들과 철면피 도둑놈들은 또 다른 비굴한 도둑놈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려 한다. 그물망을 던져 놓고 고기를 몰아가는 고기잡이처럼, 자본은 항시 노동을 포섭하고 순치시키려 한다. 주요 대상이 노동조합의 간부들이다. 특히 투쟁의 영향력이 큰 대기업 노동조합의 간부들이다. 그물망에 걸리는 순간, 그곳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비굴한 도둑놈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관했던 사람들은 또한 누구인가? 바로 조합원들이다. 조합원들은 이렇게 변명할 수 있다. ‘자기들끼리 몰래 속닥속닥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노동조합이 힘을 가지니까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만약 이러한 변명을 한다면,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조직이 아니라 노동조합 간부들의 조직에 불과하다. 노동조합을 일상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조합원들에게 있지만,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조합원의 ‘직무유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더 나아가 조합원들은 비굴한 도둑질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노동조합의 간부로 선택하기도 한다. 비굴하게 도둑질해서 자신에게 또 다른 떡고물을 던져 달라는 몸짓이다. 조합원 스스로 비굴한 도둑놈의 공범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바로 비굴한 도둑질에서 벗어나는 과제, 정말 쉽지 않지만 이것이 노동조합운동의 혁신과제이지 무엇이겠는가..

2005-06-09 13:44:49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2&no=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