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사태,
올바로 보고, 똑바로 대응하자
강 연 자 / 연구기획실 연구원
7월 15일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기업으로 선정되면서 기아사태의 귀추를 둘러싸고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자동차 생산량 세계 서열 17위, 종업원 56,700여 명, 96년 매출 12조1천8백억 원, 계열사 38개를 거느린 재계 8위 그룹일 뿐 아니라 하청업체만도 5,000여 개로 20여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거대기업 기아가 한순간에 부도위기에 처해, 그 향방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기아사태는 기아자동차를 한계기업으로 규정하면서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거론한 삼성의 이해, 대선을 둘러싼 각 당의 이해, 자동차 개별자본의 이해, 채권단과 정부의 입장이 뒤얽혀 난맥상을 보여 왔고, 8월 22일 삼성의 ‘신수종(新樹種)보고서’1)가 보도되면서 복잡함을 가중시키고 있다. 하지만 기아부도유예의 본질적 성격은 정부와 총자본의 정책인 ‘경쟁적 시장구조’로 전환되는 산업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과정에 노동계를 포함한 각 진영의 이해가 뒤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정부와 총자본은 한국의 산업구조를 고부가가치산업, 첨단산업으로 재편하기 위한 환경 조성을 위해 ‘경쟁적 시장구조로의 전환’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규제완화와 민영화로 나타나는 이러한 정책은 산업구조조정을 내용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기아를 포함한 대기업들의 부도나 부도유예조치는 정부와 총자본의 이러한 ‘경쟁적 시장구조로의 전환’ 정책의 큰 흐름 속의 한 사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2)할 것이다.
올 상반기만도 우리나라 7대 도시에 11,130개의 업체가 신규 설립되었고 부도로 쓰러진 기업수는 2,535개나 된다. 올 초부터 우리 사회에서 내노라 하던 대기업들인 한보, 삼미, 삼립, 대농, 진로가 부도를 맞았거나 부도유예협약이 체결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와중에도 부도기업수의 무려 4.4배나 되는 기업이 신설된 것이다. 기업이 신설되고 망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적인 일이다. 특히 산업구조조정을 맞이한 우리 사회에선 더욱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 예상된다.
기아사태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에도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 기아자동차노동조합은 물론 상급단체인 자동차연맹, 민주노총까지 개입하고 있고, 기아사태에 대한 노동운동 진영의 대응은 이후 노동운동의 진로에 많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가 기아사태를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민주노총에 가입한 힘있는 노동조합이 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진영으로서는 만일 기아자동차에 노동조합이 없거나 82년 자동차구조조정 시기의 구사운동을 주도했던 어용노조였다면 기아사태는 한보나 대농, 진로처럼 사회문제의 하나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힘있는 노동조합이 개입함으로써 상황 전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은 이 사태에 특히 주목하고,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아사태에 대한 노동운동진영의 개입경과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노동운동진영의 대응이 과연 기아노동자, 나아가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올바른 대응방안은 무엇인지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역사와 ‘기아살리기’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역사는 36년이나 된다. 88년 이전까지 간선제로 선출된 노조위원장들은 20년간 혹은 6~7년간 장기집권하면서 노동조합을 자본의 노동통제기구의 일부로서 굳건히 유지시켜 왔다. 위원장이 되는 것은 곧바로 출세를 보장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회사가 낙점하지 않은 조합원이 대의원에 출마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어서 대의원과 노조간부 대부분을 감독자층이 겸임하였다. 작업장은 고과권이 부여된 관리감독자의 전횡하에 통제되었다. 회사측이 자랑하는 82년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시 상여금 반납과 임금 동결을 통한 구사운동도 이러한 구조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3)
그러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파급은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노동자들은 87년 밀실임금협상 거부투쟁, 88년 직선제 쟁취투쟁, 89년 해고반대 분신, 91년 임금협상 직권조인 반대 투쟁(6.28투쟁) 등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대량징계와 해고, 그리고 분신이 발생하였다. 93년 민주를 표방한 12대 집행부가 탄생하면서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은 비로소 민주노조 대열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94년 한국노총 탈퇴, 95년 자총련(현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가입, 96년 임단투 과정에서 10일간 파업을 거쳐, 97년 총파업에서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기아자동차노동조합은 대외적으로 민주노조, ‘강성노조’로서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기아자동차에는 독특한 기업문화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문경영인제도’(‘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대한 막연한 자긍심, 우리사주제,4) 봉고신화라는 위기극복의 경험과 계속적인 경영위기설 등이 빚어낸 결과이다. 이러한 기업문화와 맞물려 기아자동차 경영진은 노조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조합 지도부의 권위를 인정하는 속에서 노사협조주의적 노동통제를 이끌어 내는 데에 노력해 왔다. 87년 이전까지는 회사가 그 지위와 권한을 인정하고 보장해 주는 노동귀족화된(?) 노동조합 지도부를 통해 현장통제를 확실히 했고,5) 87년에서 93년까지는 물리적 탄압과 회유정책을 동원해 왔음에 비해서, 93년 민주를 표방하는 집행부가 들어선 이후부터 회사는 집행부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한편 애사주의를 부추킴으로써 경영권의 방패막이로 노동조합을 배치하려 해왔다.
12대 집행부의 94년 삼성승용차 진출 저지투쟁이나 올해 삼성보고서 유출과 관련하여 임금협약을 사측에 무교섭 위임한 사건, 그리고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 기업으로 선정되자 노동조합이 즉각 ‘기아살리기’에 나선 것 등은 기아와 그 노동조합에 배어 있는 그러한 독특한 기업문화와 그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부도유예협약이 발표되자 노동조합은 즉각 ‘기아살리기’에 나섰다. 노동조합은 그 이유를, “우리가 회사를 지켜 내지 못한다면, 고용불안이라는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제3자 인수로 넘어가는 상황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우리의 일터와 삶의 조건이 더욱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기 때문”(ꡔ함성소식ꡕ, 97. 7. 19)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기아를 살리는 것만이 고용을 보장받고 근로조건을 사수하는 길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기아살리기’라는 이름으로 기금사업을 전개했다. 노조복지기금 19억원을 회사에 조건 없이 대여하였으며, 1천억원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8월 9일 현재 600억원을 모금하였다. 상여금과 하기휴가비 및 상반기 월차수당을 반납했으며, 97년도 임금인상을 동결하고 복지부문 및 단협 비용부담 항목을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유보한다는 것 등도 결의하였다. 또한 여름휴가를 반납하고 수출차종과 부족차량에 대한 잔업특근을 실시할 것과 용역을 축소하는 것에 합의하였다. 거기다 자연감원 및 신규인원 모집 중지 합의, 회사측의 일방적인 배치전환에 대한 합의가 추가되었다. 이에 더하여 노동조합은 7월말 채권단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제3자 인수 혹은 최고경영자 변경시 무효로 한다’는 전제조건 아래 ‘3년간 무교섭, 무분규, 단협갱신, 노조상근자 및 대의원수 축소를 비롯한 인원합리화’ 방안에 합의한 상태이다.
지금 현장은 어떤 상태인가? 기아그룹은 올 연말까지 8,835명에 대한 감원계획을 갖고 있다. 7월 15일부터 8월 20일 현재까지 3,497명이 자의 및 타의에 의해 퇴사하였는데6) 그 가운데 기아자동차가 1,200여명으로 가장 많다. 부도유예 이후 생산성 향상운동과 용역철수로 인해 현장의 노동강도가 대폭 강화되고 있는데, 실상을 보면, 계속되는 자연감원에도 불구하고 채권단의 요구에 따라 잔여 인원으로 이전의 물량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다. 특히 아산공장은 세피아Ⅱ 라인이 새로 배치되면서 500여명의 신규인원이 필요한 상황이나 노동조합이 자연감원과 일방적 배치전환에 합의함으로써 자연감원된 현재 인원으로 전체 물량을 생산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장감독자들은 배치전환에 문제를 제기하는 노동자들에게 “배치전환을 거부하면 노동조합에서 징계위에 회부할 것”이라고 위협하거나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서는 개인의 의견은 수용될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회유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리는 상태이다. 한편 올 연말까지 크레도스 왜건, 밴형 승합차인 KV-2의 생산이 시작되면 1,200여 명의 신규인원이 필요하지만 신규채용의 가능성은 없고, 게다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자연감원을 감안할 때 현장의 노동강도, 노동통제가 얼마나 악화될지 쉽게 예상해 볼 수 있다.
한편 현장감독자를 통한 사측의 일방적인 배치전환과 구사조직의 현장대표를 현장감독자층이 겸임하면서 현장의 통제권은 다시 관리감독자에게 집중되고 있다. 수년간의 투쟁으로 다져온 현장내 노동자 권력기반이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장은 복지지출 축소로 생수지급이 중단되었고, 출퇴근 버스운행이 중단되었으며, 10여년 근무한 노동자에게조차 그 동안 지급되던 결혼부조금이 지급되지 않는 등 경조사 보조가 끊겼다. 어떤 계열사의 경우에는 식당에서의 식사지급이 중단되는 등 최악의 복지수준을 경험하고 있다. 더욱이 8월 14일 현재 기아그룹의 체임은 1,343억원에 달하고 있다.7)
노동조합은 기아를 살리는 것만이 고용을 보장받고 근로조건을 사수하는 길이라며 ‘기아살리기’에 나섰지만, 현재 현장은 가중되는 고용불안과 노동조건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2.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의 ‘기아살리기’의 문제점
1) ‘기아위기, 강성노조 책임론’과 ‘기아살리기’
기아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채권단을 중심으로 한 총자본측은 노조 무력화와 정리해고제 조기관철을 일관된 정책으로 밀고 나왔다. 부도유예협약 발표가 나자 조선일보를 필두로 부르주아적 언론은 ‘기아위기 강성노조 책임론’을 주요축으로 노동자계급 일반과 기아노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해 왔으며, 채권단은 경영권의 문제라며 노동조합의 조건 없는 감원 동의서, 단협갱신을 집요하게 요구해 왔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독점자본의 총본산인 전경련은 ‘부도유예 기업과의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 대상기업에 대해서는 정리해고제를 (지난 3월에 개정된 노동법상의 유예기간에 대한 예외조치로서) 즉각 인정할 것’을 주장했다.
노조 무력화를 노린 부르주아적 언론의 ‘강성노조 책임론’은 기아노조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여 기아노조가 ‘기아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는 주요 요인의 하나로 되었다. 그리하여 노조는 ‘기아살리기’로 노사협조를 사회적으로 가시화시킴으로써 그 ‘강성’ 이미지를 벗겨 내고자 했고, 스스로 상당한 성과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 총자본측의 이러한 ‘회사위기, 노동조합 책임론’에 대한 기아노조의 노사협조를 통한 ‘여론 잠재우기’식 대응은, 기아 생산현장의 노동강도 강화․노동조건 악화 등의 효과 외에 또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
‘강성’ 기아자동차노동조합(강성이라는 용어도 자본이 붙인 것일 뿐이다)의 적극적인 노사협조적 모습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곳은 정부와 전체 자본가집단임에 틀림없다. “기아처럼 투쟁하던 노동조합도 회사가 어려워지니까 회사살리기에 전면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 아닌가? 더도 덜도 말고 기아노조만큼만 해라,” “기아노조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다. 회사 망하기 전에, 노동조합이여 정신 차려라” 라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자본진영이 경영위기와 노사화합을 적절히 배합해 노동을 공격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다분히 조작된 ‘강성 노조’ 이미지를 들먹이면서 구체적으로 노사협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8)
지금 기아가 처해 있는 것과 동일한 상황에서는 노동조합이 여론을 의식하여 몇 가지 가시적인 ‘회사살리기’를 실천하고 생산에 차질을 빚는 행위를 삼가는 조심성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게는 조합원의 권리를 지키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크게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대의를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일이다. 그렇지 않은 ‘회사살리기’, 노사화합을 강조하는 노동조합의 모습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고, 현재처럼 잃을 것만 남을 뿐이다. 노동조합은 채권단의 감원요구에 대해서는 자연감원과 용역철수에 따른 노동강도로 인한 현장의 고통을 폭로하면서 오히려 신규충원의 필요를 주장해야 한다. 노사화합을 통해 국가경쟁력 강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신문광고가 아니라 자본의 공세에는 언제라도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음을 알리고 투쟁해 나가야 한다.
2) ‘악덕재벌(?) 삼성’9)에 대한 투쟁
기아노동조합은 현재 김선홍 외의 다른 경영진은 거부하고, ‘악덕재벌 삼성’에 대해서도 예민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다. 반삼성투쟁의 논리기조는 ‘악덕재벌 거부’에 초점이 가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삼성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된다”는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경영신조로 삼고 있는 기업이다. 무노조 경영을 위해 삼성은 한편에서 동종 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삼성맨 의식’ 창출 등의 기업문화를 통해 노동자를 통제해 왔고, 이것을 기반으로 높은 생산성을 유지해 왔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삼성은 노조건설 움직임 등에 대해서는 협박과 회유, 해고, 어용조직 건설 등의 온갖 노동탄압을 자행해 왔다.
때문에 기아노동조합과 노동운동진영의 ‘악덕재벌 삼성’의 기아인수 반대투쟁은 삼성의 반노조정책에 대한 투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투쟁이 ‘악덕재벌 거부’ 혹은 ‘악덕재벌 삼성의 기아인수 반대투쟁’으로 제기될 때, 투쟁의 초점은 다분히 ‘반노조정책에 대한 투쟁’에서 ‘경영권 이동에 대한 투쟁’으로 옮겨가게 되고, 실제의 상황도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반삼성 투쟁의 초점은 ‘악덕재벌 삼성’에서 ‘삼성의 반노동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무노조’라는 시대착오적인 노무정책과 노동탄압을 폭로함으로써 노동진영이 특히 더 삼성을 거부하는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삼성그룹에 민주노조들을 건설할 토대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3) 조합원의 권리 사수 ꠏꠏ 노동조건의 유지, 개선
노동조합은 ‘기아살리기’ 투쟁만이 조합원의 정서에 부합한 투쟁으로서 조합원의 대오를 유지시킬 수 있고 이후 투쟁전선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무조건적인 희생 속에서 조합원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조합원의 노동조건이 철저히 보호되야만 조합에 대한 신뢰가 쌓이게 될 것이며, 그 신뢰 위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전선으로 함께 나갈 수 있다.
금융자본은 최근 ‘부도유예협약’을 개정하면서 ‘부도유예’의 조건으로 노동조합의 감원 동의서와 임금삭감 동의서까지 요구하고 있다. 개별자본의 ‘위기’와 함께 발생하는 해당기업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역이용하여 고용불안(정리해고)과 저임금을 강요하려는 것이다. 이는 정부와 총자본이 치밀하게 준비해 온 ‘노동의 유연화’를 기아사태를 계기로 강화하려는 것으로서, 기아자동차 투쟁은 앞으로 전면화될 ‘노동의 유연화’라는 총자본의 요구와 고용보장․노동조건 사수라는 총노동의 요구가 충돌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기아자동차노동조합의 올바른 투쟁은 기아의 차원을 넘어, 널리 노동운동 일반의 이해와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87년 이후 쟁취된 조합원의 권리는 언제, 어느 시기에도 양보할 수 없는 노동운동 공동의 기반임을 분명히 하자.
4) ‘기아살리기’가 노동운동의 연대전선을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아투쟁은 실제로, 성격상 총노동과 총자본의 쟁점이 대립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리하여 총자본은 다각도로 전선을 쳐 오고 있는데, 노동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민주노총과 자동차 연맹, 한국노총 중앙이 기아노동조합을 지원하면서 ‘기아살리기’에 함께 하고 있지만, 이를 들어 노동이 연대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기아사태에 대한 노동진영의 개입이 ‘기아살리기’라는 형태를 띠면서 노동운동내 연대전선은 차단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노동조합들은 자본의 경제위기 공세로 그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노사협조주의적인 ‘기아살리기’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여러 노조에 노사협조주의를 강요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 ‘기아살리기’에 배어 있는 애사주의는 경쟁논리를 강화시키면서 기업별 노조를 고착화시키고 노동자간 탈연대를 조장하고 있다.
기아사태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기아 노동자들의 이해는 ‘자본으로서의 기아살리기’가 아니라, 자본에 의한 ‘노동의 유연화’, 고용불안 조성, 노동조건의 악화에 반대하는 총노동의 요구와 맞닿을 때에만 전체 노동자계급의 실질적 연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3. 노동자 계급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ꠏ 자동차 연맹과 민주노총의 ‘기아살리기’ 비판
자동차 연맹과 민주노총, 특히 민주노총이 기아자동차 노조의 ‘기아살리기’ 투쟁을 지지․지원하면서 ‘경제위기’, ‘경영악화’를 내세운 자본의 공격에 대한 노동의 대응투쟁은 ‘단위기업 사수(노동측의 희생을 감내하면서)를 통한 노사공존’으로 그 틀이 형성되고 있는 인상이다. ‘기아살리기’에 개입하는 민주노총의 입장과 그것이 노동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민주노총은 7월 23일에 ‘기아 정상화와 국민기업화를 위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의 크라이슬러와 일본의 마쯔다 등의 사례를 들면서 정부지원을 촉구하고 특정재벌의 기아인수 반대와 기아노동조합의 ‘기아살리기’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나아가 국민주 모금운동, 국민모금 방식에 의한 전국민 전환사채 갖기 운동 등의 방식으로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이러한 대응기조는 다음 날(7월 24일)의 대의원 대회 특별결의문, 8월 7일의 성명서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8월 7일의 성명서는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지원을 계속 거부한다면 기아부도후 법정관리, 제3자 인수라는 시나리오를 추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기아 정상화와 국민기업화를 위한 범국민운동 추진, 총파업 등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민주노총이 ‘기아살리기’를 바라보는 기본시각은 기아사태가 정부와 삼성의 밀약에 의해서 발생했다고 보는 것, 즉 정치논리로 접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기아살리기’를 함으로써 민주노총의 사회개혁 3대 과제 중의 하나인, 정경유착을 근절하고 재벌의 경제집중을 막기 위한 ‘재벌개혁’ 투쟁을 수행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재벌개혁’ 문제는 기아사태와 관련한 모든 성명서의 주된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데,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기아를 살려야 하고 기아가 국민기업으로 거듭나서 재벌개혁의 모범으로 자리잡아야 하며, 이러한 재벌개혁을 통해 우리 경제살리기 제1의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그러나 자동차산업구조조정을 놓고 정부와 삼성의 밀약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기아사태는 객관적으로 자동차산업부문에서의 과잉생산, 그리고 정책적으로는 ‘경쟁적 시장구조로의 개편’이란 기조 속에서 발생되었으며 해결의 과정 또한 그러한 정책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강조한 바이다. 이러한 경제정책의 큰 줄기 속에서 노동측에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일방적 희생이 강요되고 있다는 점이다. 올 총파업을 불러왔던 정리해고제와 변형근로시간제, 근로자파견제 등이 그것인데, 2년간 유예된 정리해고는 삼미특수강을 기점으로 기아사태에서도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다. 감원동의서는 정부와 채권단의 요구형태를 띠면서 자금지원을 거부하기 위한 ‘기아죽이기’로 호도되고 있지만, 사실은 ‘노동의 유연화’를 관철하기 위한, 자동차업계를 포함한 총자본의 일관된 정책의 표현이다.
그런데 기아사태와 관련한 민주노총의 정책기조 및 투쟁방향은 총자본의 그러한 공세에 대한 총노동의 올바른 대응방향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례를 들자. 미국의 크라이슬러는 무리한 설비투자와 오일쇼크, 일본차의 공세 등에 의해 70년대 말 파산직전에 이른 기업이다. 크라이슬러는 아이아코카를 영입하여 대대적인 구조조정(restructuring)을 단행하여 노동자를 10만에서 7만으로 감원하고, 연봉도 일률적으로 10% 삭감하면서 정부로부터 채무보증 등의 지원을 받아 냈다. 크라이슬러와 기아의 단순비교도 문제지만, 크라이슬러를 예로 들 때 민주노총은 개별 기업 살리기를 위해 이 정도의 노동자 희생은 당연히 감내해야 한다는 것인지,10) 그 의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민주노총 기관지 ꡔ노동과 세계ꡕ11)는, “기아가 죽으면 정부의 노동운동 죽이기가 본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기아가 살아야 노동운동이 산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8월7일의 민주노총 성명서에서도 잘 드러난다. 감원과 노조무력화라는 채권단의 의도가 이미 분명해졌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동기본권 사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아정상화를 위해 총파업 등의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총자본측은 기아가 죽기도 전에(?), 혹은 기아의 죽음과 상관없이(?) ‘부도시 퇴직금 우선변제권 무효, 부도유예시 감원과 임금삭감 동의서 제출’ 등으로 실질적인 정리해고와 노동조건 악화를 제도화했다. 이러한 정부와 총자본의 움직임을 민주노총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기아정상화’가 문제의 핵심인 것이 아니라 ‘노동기본권의 사수’가 문제다. 특히 총파업의 대가로 ‘2년간 유예된 정리해고’가 삼미특수강에서 이미 관철되고 있고, 기아사태에도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음을 읽어 냈다면, ‘기아살리기’라는 우를 범하기보다는 그에 투여될 역량을 ‘삼미특수강․포철의 위장정리해고 규탄․반대투쟁’에 투여시켰어야 했고, ‘기아노동자의 생존권․노동기본권 사수투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했다. 즉, 7월말 채권단의 요구가 분명해졌을 때 ‘기아살리기를 위한 총파업’이 아니라 ‘노동기본권 사수를 위한 총파업’을 결의하고 준비해 들어가야 했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한편 민주노총은 무교섭 위임과 ‘기아살리기’라는 기아노조의 노사협조주의 노선에 지지를 표명하고 또 직접 ‘기아살리기’에 참여함으로써 노사협조주의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노사협조주의는 당연히 장기적으로도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에 많은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기아사태는 산업구조조정 과정에 과연 노동운동이 어떤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를 총체적으로 고민하게 한다. 산업구조조정을 저지(?)할 것인가? ‘기아살리기’처럼 개별기업의 회생에 목을 매닮으로써 고용을 보장(?)받을 것인가? 목매단다고 그 기업이 회생될 것이며 고용은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인가? ꠏ 앞으로 전면화될 산업구조조정에서 노동에게 요구될 희생을 어떻게 저지 혹은 최소화하면서 노동운동의 역량을 강화시켜 나갈 것인지, 올바른 노동운동의 방향 모색은 매우 시급하고도 중대한 과제일 것이다. 그 단초를 고민해 보도록 하자.
민주노총 발표에 의하면 97년에 단협갱신에 들어간 228개 노조 중 62개 노조가 “노동조합의 동의 없이는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다” 등의 내용으로 고용안정협정을 맺었다고 한다. 이는 개별노조 차원에서 꼭 확보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이 외에도 “기업활동 변경시 고용 및 근로조건, 노동조합 및 단체협약의 승계” 등의 조항을 확보함으로써 기업의 합병․정리․해산․양도 등의 구조조정에 대비하여 제도적 방어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단위노조 차원의 주요 방어책이다.
그렇다면 상급노조 차원에서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수세적 대응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90년대 초반 전자산업과 섬유산업의 구조조정이 일어났을 때 전노협 핵심사업장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전국적 고용투쟁 같은 것이다. 당시 힘든 투쟁이었지만 전체 노동진영이 연대하여 끈질기게 사회문제화시켰고, 고용보험이라는 제도적 성과를 쟁취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용보장․노동조건 유지투쟁 등을 통해서 그 악화를 저지하고, 발생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보상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율실업․저임금․장시간 노동을 내용으로 하는 ‘노동의 유연화’라는, 현 시기 자본의 공세에 대해서는 수세적 투쟁만으로는 부족하다. 공세적인 요구, 즉 고용안정과 노동조건의 유지․개선을 포함한 ‘노동의 안정화’란 측면에서의 전선설치가 필요하다.
‘공격에 대한 저지’는 최대의 성과가 ‘현조건의 유지’일 뿐이다. ‘공격에 대한 저지투쟁’은 또한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릴 수밖에 없고, 노동쪽이 조금 양보해서 마무리되면 다음에 다시 공격해 오는 양상을 띤다. ‘저지’라는 수세적 대응으로는 현재의 조건조차 유지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유연화’ 공세에 대한 ‘노동의 안정화’ 측면에서의 공세적 요구로서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고용확장’을 요구하자. 물론 이러한 요구는 현재의 노동운동의 역량으로는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하지만 격화되고 있는 자본측의 공세의 배경 및 성격에 비추어 그에 대한 대응으로는 공세적 요구만이 가장 합리적인 전술임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현재의 산업구조조정은 90년대 초의 그것과는 그 성격이 달라 업종과 기업규모에 상관없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만큼 노동자의 희생과 노동의 배제도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에 대비하여 노동운동진영은 ‘노동시간의 대폭적 단축을 통한 완전고용 실현’을 요구․쟁취해야 하고, 고용보험을 넘어선 실업수당 쟁취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1) 삼성그룹은 “자동차 사업의 조기 경쟁력 확보를 위해 쌍용 및 기아자동차의 전략적 인수를 추진”하며, 이를 위한 “여론조성을 위해 정책건의를 강화하고 정부와의 공조체제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라는 내용의 “신수종사업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을 그룹비서실에서 작성(97. 3. 4)했음을 8월 22일 시인했다.
2) 총자본의 공격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종탁, ‘구조조정의 완성을 위한 자본의 공세 ’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97.9. 특집 참조
3) 회사측은 기아의 노사관계를 “……기아의 노동조합은 회사의 성장과 종업원의 권리를 함께 추구하는 독특한 공존의 노사협력체제로 회사와 종업원을 지켜 온 자랑스런 전통을 지니고 있다.……경영위기를 비롯하여 난국이 있을 때마다 노동조합은 힘을 하나로 묶어 난국극복의 선봉이 되었으며, 종업원의 권익 주장에 앞서 회사의 성장을 먼저 생각하는 성숙된 자세로 타사의 모범이 되어 왔다.”고 정리하고 있다.(기아자동차, ꡔ기아 50년사ꡕ, 1994)
4) 기아자동차의 종업원 주식보유율은 97년 6월 현재 14.19%(우리사주 13.8%, 경영발전위원회 0.39%)로서, 그것들을 통합할 경우 포드(16.91%)에 이어 두번째의 대주주이다. 그러나 우리사주조합의 이사는 회사의 각부서 부장과 노동조합위원장 등 7명으로 구성되고 조합장의 선임은 회사의 총무부장에게 위임됨으로써 우리사주의 권한은 사실상 김선홍 회장에게 완전히 위임되어 있고, 노동조합은 어떤 위력적 개입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5) 20여 년 동안 장기집권한 제1대 김모 위원장은 80년 ‘사회정화조치’로 제명되자 곧 김종필계의 국회의원으로 진출하였고, 81년 ‘구사운동’을 주도한 제3대 위원장은 “노조위원장에게 잘못 보이면 조합원은 물론이고 회사 관리자도 좌천된다”는 말이 공공연히 얘기될 정도로 그 권위가 대단하였다. 그는 이후 기아그룹의 교육․복지시설인 ‘기아의 집’ 이사로 재직한다.
6) 이러한 퇴직 사태는 채권은행에서 파견된 자구계획점검반조차 “감원이 생각보다 원활히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ꡔ한겨레ꡕ, 97. 8. 21).
7) ꡔ내외경제신문ꡕ, 97. 8. 15.
8) 기아자동차 노동조합이 97임금 결정을 무교섭으로 사측에 위임하자 대우자동차의 소식지인 ꡔ한마음회보ꡕ(97. 6. 27)는 “기아노조의 교섭권 위임은 처절한 생존권의 몸부림”이라며 기업별 노조의식을 부추겼다. 자동차연맹 소속 사업장인 만도기계의 자본측은 교섭석상에서 기아의 무교섭에 관한 신문 스크랩을 내보이면서 “회사의 어려운 상황을 함께 극복하자”고 요구하기도 했다.
9) 삼성은 현재 여론조사에서 ‘기업이미지’ 1위 기업이고, ‘대학생 취업 선호도’ 1위 기업이며, 각 업종마다 최고 임금을 지급하는 기업이다. 그런데도 삼성에는 으레 ‘악덕재벌’이라는 관형어가 따라다닌다. 철저한 반노조정책, 정격유착의 축적과정, ‘사카린 밀수’ 등으로 얼룩진 과거 등이 얽혀서 만들어 내는 이미지일 것이고, 한국의 대표적 재벌로서 재벌 일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모아지는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재벌 혹은 ‘독점자본 일반’이 모두 ‘악덕재벌’인 것이지 삼성만이 그러한 것은 아닐 것이다.
10) 크라이슬러를 예로 든 민주노총과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겠지만, 7월 말의 채권단 요구는 감원동의서를 요구하는 데에 머물렀으나 최근에 개정된 ‘부도유예협약’은 감원과 더불어 임금삭감까지 요구하고 있다.
11) ꡔ노동과 세계ꡕ 제11호(97. 8. 15)는 “기아문제를 똑바로 보자”라는 ‘주장’(다른 신문의 ‘사설’에 해당하는)에서,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 ‘삼성의 기아 인수전’의 선봉에 서서 ‘기아 죽이기’를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고, 이에 맞서 <기아노사-노동계-자동차업계-시민단체>가 힘겹게 대응하고 있다. ‘기아 죽이기’가 성공하면 그 여세를 몰아 ‘기업의 인수․양도․합병시 정리해고 허용, 기아노조 무력화’ 등 ‘노동운동 죽이기, 민주노총 죽이기’도 본격화될 요량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노동운동과 시민단체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이나 시민단체가 기아 살리기에 나서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을 피력 …… 정부와 채권단의 ‘기아 죽이기 ꠏꠏꋼ 삼성의 기아 인수’를 멀거니 바라봄으로써 결과적으로 삼성의 경제력 집중 심화와 노동운동 죽이기를 돕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될 것이다.”라며 ‘기아살리기’에 문제제기하는 노동운동 진영을 비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