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직 소방관들을 돌아보며 |
현장에서 미래를 제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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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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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직 소방관들을 돌아보며
김 상 태
편집위원
지난 4일 새벽 다가구 주택 화재를 진화하던 소방관 6명이 그
건물의 붕괴로 인하여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었다. 불이 난 건물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는 다급한 구조 요청으로 다수의
소방관들이 진입했다가 발생한 재난이었다.
한국의 소방관들과 구조대원들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정평이 나있다고 전해진다. 성실함, 헌신성, 뛰어난 구조능력
등이 인정을 받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삼풍백화점 참사 때 그
활약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고 대만 지진참사 때에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또 이러한
소방관들의 면모는 그 밖의 여러 곳에도 자주 등장하곤 했다.
모르긴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 이처럼 폭넓게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고 있는 직능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연일 정쟁에다
경제사범 등 엽기적이고 눈살 찌푸려지는 사건들만 접해야 하는
시민들에게 이들은 희생, 헌신,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이와 같은 시선과 정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 충분히 외화 되기도
했다. 대통령이 조문을 보내오고 언론매체는 이들을 추모하는
프로그램들을 연이어 기획했으며 순직 소방관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적잖은 반항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실 그들의 아픈
죽음에 누구인들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모두
고인들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하지만 그 죽음과 슬픔은 자꾸 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그로 인해 더 깊고 커다란 슬픔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 같다.
이 죽음들은 단순한 살신성인의 드높은 덕성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문득 하나의 그림같은 것이 떠오른다. 큰집에 주인이 있고
거기엔 다수의 노예들이 있었다. 그 노예들은 모두 고된 일에
시달리며 각자가 맡은 일을 힘겹게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그들
중의 일부는 다른 노예들이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하거나 몸이
다치면 그들을 구조하고 치료해 주는 일을 담당한다. 주인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득에는 크게 소용이 안되는 이
구조노예들을 가능하면 최소화하고 적은 비용으로 유지하고자
했다.
물론 이 구조 노예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혹시나 주인가족에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고 빈틈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 구조 노예들은 바쁘고 가난하고
고달프다. 어쩌면 다른 노예들보다 더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이름은 소방대원이거나 119 구조대원일
수 있다.
물론 유치한 우화이다. 그러나 이 상상의 그림과 현실의
소방관들 사이엔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본질적인 동일성이
있다. 소방관들의 사회적 본질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국가에
고용된 하급 공무원 노동자라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의 형이고 동생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이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보여지는 소방관들의 장례식장에는 바로
이러한 소방관들의 가족들이 비추어진다. 옆에 있는 민중들의
바로 그 모습들이다. 다시 말해 소방관이란 우선 서민이며 우선
민중이란 말이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해왔던가? 앞서 말했듯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난 후 그 콘크리트 구덩이 사이를 목숨을 걸고 돌아다닌다.
연례행사로 벌어지는 수재의 현장에, 국토의 절반을 태울 듯한
산불의 현장에 그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헌신성을 돌아보기
이전에 이 얼마나 가슴 메이는 일인가? 자본과 지배층이 만들어
낸 그 엄청난 부정과 살육의 재난을 소방관들이 대신 틀어막고
있는 것 아닌가? 사고라는 게 그저 우연의 산물일 수 없다는 걸
상기한다면 이야말로 떡 먹는 놈 따로 있고 똥 치우는 놈 따로
있는 격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사회체제가 조직적으로 양산하는
재난, 가진 자들의 탐욕이 만들어 내고 무엇보다 자본의
가차없는 이윤논리가 만들어 내는 그 재난들을 온 몸뚱아리로
막아내야 하는데 그들이 이름하여 소방관이고 구조대원인
것이다. 어떻게 이들의 죽음을 희생정신이라고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것은 끝없이 순환해야 하는 참혹한 비극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에 뒤이어 더욱 슬퍼진다. 온 사회가 그들을
하나의 정신적 표상으로 기리는 그 자체가 그렇다 그것만이
강조되고 모든 것이 덮어짐으로써 진정한 문제와 책임져야 할
당사자들은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고된
현실을 더 견디고 더한 착취와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라고
암암리에 강요당한다. 여기서 만사는 끝나고 만다. 과연 이것이
그 말없는 용사들이 숨져간 진정한 의미일까?
희생, 성실성, 살신성인의 실로 위대한 미덕. 이것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가장 아름답고 값진 덕목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덕성이 사회의 진정한 모순과 문제를 덮어두는 데
이용되고 있다면 이것은 그 순간 사람의 수치가 된다. 수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사회적 학살을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은 결코 순직한 소방관들의 죽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슬픔아래 있는 또 한 꺼풀의 슬픔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소방관들의 죽음 앞에 그들이 이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받은 대우가 무엇이었는가를 올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의 조문과 국가보훈처의 연금지급,
모금운동이나 틀에 박힌 칭송으로 끝날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단순한 동정이나 감상만으로 대신할 수도 없다. 그들의 죽음은
건강하고 소박하며 선한 우리들 자신의 죽음이며 그 죽음의
이면엔 일상적으로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하나의 상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바로 그
인식이야말로 그들의 죽음 앞에서는 우리의 제대로 된 애도의
모습일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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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3-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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