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단상 |
현장에서 미래를 제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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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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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알려주는 것,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에 대한 단상
김 상 태
연구위원
사실을 말하자면 더 이상 할말도 없거니와 어쩌면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든다. 린다 김, 옷로비, 그밖에 수도 없는
부정부패와 비리뇌물 사건은 더 이상 논의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썩어 있었고 따라서 여전히 범죄자들이었다. 이게
전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용호 게이트’ 운운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한 치도
비켜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한 마디를 첨가하는
것은 낭비를 넘어서 이미 불유쾌한 소음이나 다름없는 일이
된다. 그 검은 속들을 들여다보는 일도, 그것에 잔뜩 욕을
퍼부어 대는 일도 이젠 신물이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뭔가
발상을 달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범위를 넓히거나 깊이를
추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정권은 언제나 부패의 온상이었다. 단
한번도 예외인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 아래서만 이렇게
소란스러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있다. ‘그 대상이
과거와 같은 대기업들이 아니라 본 적도 없는 벤처기업
사장들이나 코스닥 주가조작들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와 비슷한 질문들은 그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그러나
요지는 간단하다. 정치자금과 착복을 위해 벌이는 이와 같은
수작들 속에는 현 정권과 현 한국사회의 어떤 특징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 현 정권, 곧 김대중 정부는 일제를 거쳐 해방 이후 수십
년을 한자리에서 뿌리를 내려온 한국의 주류 기득권층에 대한
사실상의 적이다. 그 기반은 재벌과 기간의 권력엘리트로 구성된
이 주류 기득권층에 소외당하던 또 다른 자본가들과
엘리트들이다. 호남지역은 이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들은
무자비한 집단이기주의와 권력지향적 지배층이란 측면에서 주류
기득권층과 동일하지만 한 밥그릇을 놓고 쟁탈을 벌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철천지원수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이다. 계급사회가 시작된 이래로 살육과 음모와 전쟁의
대부분은 바로 이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들이었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에겐 힘과 돈이 언제나 태부족이다. 김대중 정부의 모든
기구와 기관에는 구멍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검찰, 국정원,
언론, 일체의 행정기관에는 수십 년 묵은 그 적들이 앉아 있다.
그러므로 똑같은 일은 해도 소란은 몇 배나 증폭된다.
나아가 돈을 만들어야 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정부는 여전히, 그리고 철저히 자본의 정부이지만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이 했던 식으로 재벌들에게 상납을 받을 수는 없다.
시저와 부르투스는 똑같이 로마의 장군들이었지만 그들 자신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살해해야만 하는 관계였던 것처럼
말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조선일보의 모 사장은 그렇게
기세등등이고 어떤 검사는 분기탱천한 항명파동을 일으킨다.
게다가 이제 정권은 말기에 이르렀고 주류 기득권은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한편 현 정권을 이루고 있는 정치인들은 미숙하고
촌스러워서 삼 일 굶은 걸인이 밥을 먹는 것처럼 게걸스럽고
천박하다. 소란스럽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둘째, 더 중요한 것은 이 소란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소란은 우리사회가 부추기고 있거나 최소한 용납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마다, TV마다, 또 사람마다 이 소란들을
비난하고 개탄하지만, 그러나 그 비난과 개탄을 일삼는 주체들이
비난과 개탄의 대상과 거의 다르지 않다. 언론과 정치인과
종교인들, 그 중 목소리가 클수록 거반이 그렇다는 사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며, 대중, 서민 그리고 민중 자신이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김대중 정부 건 그 반대의 주류 기득권
층이건, 그들을 지도자로 뽑는 건 민중 자신인데 지금까지도
수백, 수천만의 국민들이 지극 정성으로 그렇게 한다. 이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민중자신은 조금도 득을 보지
못하는데도 그렇게 한다. 곰이 자기를 부려 입장료를 탈취하려는
주인을 옹위하려고 안달하는 모양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기가
막힌 아이러니가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우리는 1850년대
벽두에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이상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은
프랑스 국민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던 맑스의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한 사회가 한
시기에 처해있는 자본의 운동과 계급 역관계의 역동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사회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먼저 우리사회의 대중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미국의 테러참사가 전격적으로 보도되었던 그 다음날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말해준 한 샐러리맨이 있었다. 그에
의하면 회사 업무가 사실상 마비되었다는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한 번 알아맞춰보라. 바로 주식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자기가 보유한 주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느라고 다른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다들 알고
있는 저간의 현실인바 주식열풍은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이야기 속에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방법과 사고
방식이 질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7~80년대까지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근검, 절약하여 몇 개씩
적금통장을 보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예를 하나 더 들기로 하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도 가지 못한, 그러나 어지간히
가난한 집안의 아들인 한 청년이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은
돌아다니기만 하고, 때 아니게 차를 사서 몰고 다니고 무슨무슨
일을 한답시고 세월을 보냈다. 그가 성공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대부분 그렇듯 그도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한 빈털털이가 되어야
했다. 중요한 건 그 청년 때문에 그 가난한 집의 부모는 수천만
원을 부어넣어야 했다는 점이다. 거의 막노동에 가까운 일을
해가며 푼푼이 모은 돈들이 다 그리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이건
대체 무언가?
1. 이 청년에게 열심히 일해 돈을 번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2. 이와 같은 청년의 생각이 현재 우리사회의 주된 사고
방식이다.
3.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사회 하층의 엄청난 노동이 이상한
방식으로 착취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예는 2~30년 전에 비추어 우리 사회의 무엇이
달라 졌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사회는 그 시기동안
자본의 생산력의 증대를 경험했으며 동시에 기존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잉여와 그것의 특별한 분배 메카니즘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이 잉여를 뭔가 다른 방식으로 획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식은 그 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투기다. 왜 그렇던지 이 믿음은 워낙 일반적이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가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이 잉여의 분배에
투기적으로 참가해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다녔다.
판돈을 들고 게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구성원 전체가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할 수 없어서가
문제이지 어느 누구라도 자신에게 기회가 있다면 어지간한
불법이라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가 보기에 고스톱이라는
화투열풍은 바로 이 분위기의 반증이다. 그리고 이용호 게이트는
바로 이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라. 돈이란 결국 노동자가
생산한 생산물이다. 온갖 상품과 서비스가 다 그것들이다.
우리사회의 모든 재화와 문명 전체도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현 시기 자본은 이들을 철저히
바닥으로 밀어내고 이들이 만들어 낸 잉여로 이들에게 전혀
괴상한 게임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결과를 따지고 보면
이들―공장 노동자, 점원, 식당 종업원, 환경 미화원,
일용노동자―의 노동이 자본과 재벌로 흡수되는 일방통행에
불과하다. 꿈과 희망은 대단했지만 우리 이야기 속의 샐러리맨과
청년은 자신이 일한 것은 물론 주변에 일은 죽도록 하지만 더
못이고 못 먹는 사람의 노동마저 송두리째 자본과 재벌에 갖다
바치는 중이다. 어찌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힘이 들수록
도박장이 번성할 것은 당연지사인 때문이다. 이용호 게이트는 이
엄청난 착취게임의 진짜 물주중의 하나가 벌인 사건이며 그런
점에서는 상식이자 일상의 다반사일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소위 386세대라는 것과 시민운동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다. 오늘날 게임에서 그나마 성공의 예가 많은
경우가 바로 386세대임을 기억하자. 과거와 같은 지배 엘리트가
아닌 전문직 기능으로서 고시 합격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성공한
벤처기업 사장들, 상품으로서 베스트 셀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이들이 다 386세대들이다.
특징이 뭔가?
1. 재벌 대기업의 횡포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
2.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것
3. 그래서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치장한다는 것
이것이 386정치인들이 그렇게 개혁을 떠들면서 룸살롱에서
추태를 부리는 이유이며, 이것이 그들을 그렇게 고상한 척 하는
속물로 만드는 이유이며, 이것이 그들을 저항의 논리로 무장한
쁘띠적 자유주의자들로 만드는 이유이다.
한편 시민운동은 어떠한가? 진지한 시민운동의 대의, 존경할만한
활동가, 그리고 시민운동의 운동으로 필요성을 부정하거나
좌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지와 실체는
종종 심각하게 분열되어있다.
정말이지 터놓고 얘기해보자. 가령 80년대에는 혁명을 예기하던
청년이 타협에 타협을 거쳐 교수가 되었다고 상상했을 때 이
사람에게 안티조선운동은 단순히 운동과 도덕성만의 문제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들에게 있어 이 운동은 자신의
정체성을 합리화하는데 거의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역시 수십 년을 묵어온 기존 교수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꼭
김대중 정부처럼 주류에 비해 힘이 부족하다. 그러면서도
기득권을 향유하고 싶어한다. 시민운동의 이러한 본질을 과연
주가 부정할 수 있는가. 그들은 마음 한구석에서 노동자들과
그들의 투쟁을 부담스러워하고 때론 미워한다. 그러면서도 말은
근사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것이 김대중
정권-386-시민운동-이용호 게이트로 이어지는 동전의
앞뒷면들이다.
결국 2001년의 오늘은 한국 자본의 과도기이자 계급역관계의
과도기이다. 민중의 일부는 이 과도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게으름뱅이에 투기꾼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속고 뺏기고
착취당하고, 마음은 더 모질어지고 언제까지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강도, 범죄자집단을 지도자로 끄집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뜨거워지는 물은 언젠가 끓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투쟁은 지속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역사가 증명해왔듯 그것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대답이자 삶의
대안이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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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10-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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