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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어용 노조간부들을 비웃는다

현장에서 미래를  제83호
이철의

신어용 노조간부들을 비웃는다


이 철 의/ 연구위원





한때는 열렬한 투사였다가
그는 한때 열렬한 투사였다. 그는 불과 수십 명의 발기인으로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 노조의 첫 번째 파업을 보기 좋게 승리로 이끌었다. 87년, 88년의 대투쟁기에 그는 투쟁 사업장을 찾아다니며 연대사업에도 열심이었다. 그리고 연대투쟁의 성과를 모아 지역노조협의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마침내 그는 옥에 갇혔다가 해고를 당하였다. 전국의 해고자들을 조직하여 헌신적으로 해고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아직 어용 노조의 그늘아래 신음하는 인근 사업장의 조합원들에게 살아있는 신화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십년 뒤
그는 민주노조를 지켜온 동료들 덕에 복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옛날 그의 지도력을 기억하고 있는 조합원들에 의해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위원장에 출마할 때 그는 “조합원들에게 실리를 가져다주겠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파업투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던 시기는 지났다, 지난 시절 우리 사업장의 파업들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싸우지 않고도 회사와 상생하는 노동운동이 되어야 한다” 고 주장했다. 조합원들은 현혹되었고 번번이 그를 위원장으로 찍어 주었다. 그 노조의 민주파들은 끊임없이 그를 위원장직에서 끌어내리려고 노력했지만 몇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지켰다. 민주투사의 이름을 스스로 저버린 그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합리주의자? 출세주의자? 아니면 기회주의자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아예 어용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까? 면전에서 어용이라고 부르면 그는 화를 내기라도 할까?


타고난 어용간부들도 있다
처음부터 어용노조의 버릇이 몸에 밴 사람들이 있다. 한국노총 산하에 있는 숱한 노조간부들이 바로 그들이다. 처음 노동조합을 배울 무렵 선배들은 모두 어용이었다. 주변의 동료들도 어용이고 회사쪽도 어용노조에 익숙하였다. 아기가 세끼 밥을 숟가락으로 떠먹듯이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어용의 활동방식을 몸에 익혔다. 직권조인은 위원장의 책임과 권한이고 간선제는 조직의 혼란을 막고 단결과 화합을 이끌 수 있는 좋은 제도였다. 회사측과 인간적인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기 주장만 할게 아니라 회사의 고충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사업장은 조합원들의 불만도 적어서 굳이 파업이나 과격한 투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큰 싸움에서 지고나면
어느 노동조합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조합원들도 굳게 단결하고 지도부도 매우 헌신적이어서 정부와 총자본과 보란듯이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싸움은 고비를 넘지 못하였다. 결정적일 때 대오는 허물어지고 간부들은 고립되었다. 수배되거나 상징적인 장소에서 농성을 벌이던 간부들은 차례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쑥밭이 된 현장에서 보궐선거가 있을 때 회사쪽의 지원을 받는 합리주의자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다.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 기회주의자들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나중에는 아주 당당하게.
큰 투쟁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할 때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다. 그들은 아주 고집이 센 사람이거나 결과적으로 고집불통으로 바뀌게 된다. 왜? 그에게도 합리주의자, 실리주의자들의 유혹이 있기 마련이니까. 찬바람 쌩쌩부는 겨울 거리를 하염없이 걸어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조합원들도 등을 돌려버린 그 길을.
조합원들이 지칠 때, 혹은 회사측의 감시에 의해 꼼짝하지 못할 때, 그래서 열혈 투사들도 실망하여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신어용들이 슬금슬금 나타난다. 불만 끄면 여기저기서 나타나 썰썰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들처럼.


해고자
해고자들은 대개 감옥을 한번쯤은 갔다온다. 몇 번쯤 단식투쟁을 한 경험도 있고 텐트에서 몇 달이고 농성을 한 경험도 있다. 조직이 크면 생계비를 온전히 받고 조직이 작으면 그만큼 고생도 크다. 좀 껄끄럽기는 하지만 집행부에서도 적당히 대우를 해주고 조합원들도 “우리를 위해 총대를 메다 고생했으니” 하고 인정을 해준다. 그렇게 지내기를 십여 년, 이제 복직이 되어도 일을 다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가 가지고 있던 기술은 많이 잊어먹거나 쓸모도 적어졌다.
그런데 해고자에게 명예퇴직금을 주고 퇴출시킨 노동조합이 생겼다. 그것도 회사측과 짜고, 들어가는 돈도 서로 사이좋게 부담하였다. 집행부는 “조합원들 동의를 얻었으니까” 하고 태연한 모양이다. 그는 해고자들이 돈을 목적으로 노조운동을 한 것으로 아는 모양이다. 몇 차례나 감옥에 갔다오고, 단식하고, 회사쪽 경비원들에게 두들겨 맞고 이런 것들을 돈 몇 푼으로 보상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차라리 회사쪽하고 노골적으로 붙어먹으며 내놓고 어용짓을 하니 이게 무슨 해괴망칙한 장난일까? 없는 길을 과감히 닦아치운 그 배짱이 놀랍다. 그리고 두렵다. 누군가 그 길을 또다시 갈 것만 같다.


생존권을 걸고 고스톱을 쳐?
SBS나 인천방송을 돌리다 보면 미국 프로레슬링 경기를 볼 수 있다. 때리고, 차고, 비틀고, 공중에서 날아내려 덮치기도 한다. 가끔 가다가 링 밖으로 던져 버리기도 하고 의자를 들어 내리 찍기도 한다. 더 웃기는 것은 프로레슬링 경기에 반드시 미녀가 등장하는 것이다. 미녀에게 악당 선수가 시비를 하면 정의의 용사가 나타나 그 여자를 구해준다. 처음에는 반칙 따위에 실컷 곯지만 결국 통쾌하게 악당을 때려눕힌다. 그러면 관중석에서는 난리가 난다. 그렇게 단순한 쑈를 늘 반복하는데도 좋아들 하니, 참 단순무식한 관중들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은 어떨까? 프로레슬링 대본작가보다는 노동조합 간부들이 훨씬 더 고수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파업 일보직전에 극적인 타결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인준투표에서 곧잘 가결을 만들어 낸다. 가끔 파업을 할 때도 있지만 단기간에 상쾌한 타결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그 타결을 이끌어 내기 위해 얼마나 숱한 특사들이 오가며 물밑대화를 하였는지 조합원들은 알 길이 없다. 그 사실을 목격한 몇몇 사람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욕을 하지만 어찌 하겠는가. 인준투표는 거뜬히 통과되고 비판자들은 할말을 잃게 마련이다. 심지어 직권조인을 해도 찬반투표는 대개 통과된다. 인준투표를 하지 않아도 조합원들은 또다시 그 사람을 찍어준다.
증거를 잡지 못하니 물밑대화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파업을 하고도 해고를 당하지 않거나, 분명히 사고를 친 것 같은데 회사쪽에서 집행부를 그다지 심하게 다루지 않아서 꼬리를 잡히는 경우도 있다.


그놈의 돈 때문에
“돈이 주인인 세상”을 반대하는 노동조합 운동에도 돈은 필요하다. 87년 뒤 임금인상도 많이 되었는데 조합비는 늘 쥐꼬리만해서 노동조합은 항상 가난하다. 작은 조직은 작아서 가난하고, 큰 조직은 쓸데가 많아서 늘 허덕인다. 연맹이나 총연맹은 쥐꼬리의 끝만큼 잘라서 올리니 더 허덕일 수밖에 없다. 연맹들은 의무금이 대개 이천원 안팎이니 그걸로 무슨 사업을 펼칠 수 있겠는가? 총연맹 의무금 내고 사무실 유지비나 인건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다. 그래서 몇몇 말썽꾼들이 늘 행패를 부리는데도 참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걸핏하면 의무금을 보내지 않는가 하면 대의원대회나 중앙위원회를 유회시키기도 한다. 연맹은 총파업이나 총력투쟁을 하는데 회사쪽과 노사평화선언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 노조에서 의무금을 보내지 않으면 연맹이 파산할 지경인데. 그러니 징계는 그만두고 “더 말썽이나 부리지 않았으면” 하고 끙끙 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조합비를 좀 올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말썽꾼들 때문에 부족한 만큼은 특별결의로 의무금을 일시적으로 인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돈 때문에 말썽꾼들을 징계하지 않으면 결국 말썽부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을 과감히 치지 못하니 “흥, 민주노조 좋아하네, 의무금 몇 달 안보내면 당장 달려와 대화하자고 할 인간들이” 하며 배짱을 부리기 마련이다.


징계
아주 심한 말썽꾼들은 가끔 상급단체로부터 징계도 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연맹이나 총연맹은 가입단위가 노조이기 때문에 자연인을 징계하지 못하고 조직을 통째로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별 노조운동의 대표적인 약점이다. 아무리 연맹이지만 말썽부린 사람만 징계하고 조합원이나 건강한 간부들에게는 권리를 인정해주는 방법은 없을까?


표 때문에, 아니면 덩치 때문에
이런 대표적인 말썽꾼들도 대접을 받을 때가 있다. 바로 선거때이다. 이들도 투표권이 있으니 이때만큼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통이 크거나 안면이 넓은 사람들을 통해서 은근히 표를 찍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그럴 때 말썽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더 문제가 큰 이런 작자들이라도 모아서 자꾸 뭔가 해보려는 시도들이다. 무슨무슨 연대니 무슨무슨 포럼이니 하는 조직들을 살펴보면 꼭 이런 자들이 부지기수로 끼어서 협의회를 합네, 투쟁을 합네 하고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그러면 조선이나 중앙, 동아일보 같은 신문들이 대서특필을 해주고 심지어 경제신문까지도 잘한다고 써주는 것이다. 이들도 사람인지라 운동 전체가 욕하면 그런 짓을 하기가 힘이 들텐데 비호하기도 하고 좌판을 깔아 주기도 하니까 고개를 쳐들고 다니는 것이다.


신어용 판별법
이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몇 가지 식별요령을 깨달았다.
첫째, 이들은 실리를 주장한다. “투쟁만 해서 얻은 게 뭐 있느냐? 투쟁할 때는 투쟁하더라도 대화를 통해 실리를 얻어내야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 투쟁을 위한 투쟁을 사양하고 조합원들에게 진정한 실리를 가져다주는 노동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다.
둘째, 자기가 어용이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극구 강변한다. “구조조정이 대세인데 이걸 반대한다고 막을 수 있느냐? 조금이라도 덜 빼앗기는 게 사실은 얻는 것이다, 줄 것은 주면서 최대한 실리를 챙겨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동료 조합원 몇 명의 목을 치는 대신 임금 몇 푼이나 노조 복지기금 같은 실리를 곧잘 얻어낸다.
셋째, 규약이나 규정을 교묘히 피해간다. 규약이나 규정을 아주 안 지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키는 것도 아니고 상황에 따라 조응한다. 대의원대회에서 반대하면 조합원 총회에 붙이고 조합원 총회가 불리하면 대의원 대회로 간다. 직권조인을 해서 일단 파업을 접은 뒤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찬반투표를 붙이기도 한다. 찬반투표를 신임투표와 연계시키기도 하고 현장 간부들 전체를 묶어서 신임투표에 붙이기도 한다. 한마디로 규약이나 규정에 있는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신축, 자유롭게 운용한다.
넷째, 조선, 중앙, 동아 같은 대표적인 제도언론들이 칭찬할 때가 많다. 신문에서 알아서 써 줄 때도 많지만 별별 희한한 발상을 통해 기자들을 꼬이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노사정위원회 타결임박”과 같은 분위기일 때 “노사정위원회를 빨리 타결하라”고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다. 언론은 무슨 사건이 있으면 배우들을 꼭 내세우고 이런 자들이 꼭 배우로 등장한다.
다섯째, 집행부 내에서 제왕처럼 행동하며 어디 갈 때는 꼭 졸개들을 끌고 다니며 위신을 세운다. 그래서 어용짓에 항의하는 일부 몰지각한 조합원들과 체신없이 다투지 않는다.


분할하여 통제하기
노동조합의 조직원리는 단결과 연대에 있다. 이들도 이것을 부정하지는 않아서 늘 “단결하고 화합하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노동자들을 늘 분열시키고 그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첫째로 이들은 직종이나 부서간의 갈등을 조장한다. 선거때는 말할 것도 없고 임투때에도 직종이나 부서간 다른 임금체계를 만들며 갈등을 부추긴다.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의 본질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도 바로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이다. 이들은 비정규직의 투쟁을 탄압하거나 아예 방치한다. 심지어 비정규직을 희생시키고 정규직의 고용을 안정시켰다며 생색을 내기도 한다. 이것이 과연 노동조합을 하는 자의 태도인가?


기회주의자들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있다
문제는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민주노조 운동의 태도이다. 단호하게 일벌백계하면 이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한번쯤 돌이켜 보게 될 것이고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물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이들을 묵인하고 심지어 방조하거나 이들까지 끌어안아 세력확대를 꾀한다면 흐름이 건강해지는 것은 그야말로 “백년이 지나도 안되게 되어” 있다. 어차피 버린 동네인 한국노총은 그렇다 치자. 민주노조운동 안의 기회주의자들을 척결하지 않으면 운동의 장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노/정/연

2003-01-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4&no=1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