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파업투쟁속보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오르다. |
현장에서 미래를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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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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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마당 발문>
이 번호 열린마당에는 민주노총과 노동자뉴스단이 제작한
「총파업투쟁속보」에 대해 평가한 글과,
「총파업투쟁속보」가 2월 23일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부분으로 초대되어 상영되고, 상영 이후 토론된 내용을
상영당일 한국측 통역자로 참가한 정병기 씨가 보내 온 글을
실었다.
「총파업투쟁속보」는 이 번 총파업 투쟁을 세계에
알려내는 데 큰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에서 영상매체가
갖는 가능성을 한 단계 높여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노동법 총파업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오르다
정병기(해외연구원․베를린 자유대 박사과정)
상영이 되기까지
제 47차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이틀전인
2월 23일, 영화제기간 가운데에서도 귀중한 공휴일 중 하루인 두
번째 일요일, 오후 5시 30분에서 7시 50분까지의 황금시간대에
베를린 아르제날(Arsenal) 영화관은 “한국과 연대”하는 열기로
뜨거웠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 제작한 총파업투쟁속보 1부와
2부가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초대된 것이다.
관람객은 예상을 넘어 몇 사람들은 서서 보아야만 했다.
전통적으로 독일의 영화관들은 대개 여러 개의 작은 개별
관람실들을 가지고 있어 관람실마다 각자 다른 영화들을
상영한다. 그 중 한국의 「총파업투쟁속보」가
상영된 200여 명을 수용하는 관람실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러한 초대가 최근 한국 총파업투쟁으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은
국제영화제준비위 측의 관심의 표현이었다면, 이 표현은 그간
베를린과 독일 지역의 뜻있는 사람들이 보여준 지난한 연대의
결과였음은 물론이다. 이미 한국의 일간신문에도 보도된 바와
같이 지난 1월 16일 ‘한국 민주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모임(Solikor)’, 금속노조 베를린지부 국제연대분과 및 베를린
노동교실과 자유대학 한인 학생회가 공동 주최한 한국총영사관
앞의 시위가 후속되는 서명운동과 함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었다. 뿐만 아니라, 1월 29일에는 당시 독일을 방문하고
있던 민주노총 금속연맹 정책1국장 김상복씨의 자유대학
강연회도 자유대학 전체 학생회가 직접 주최자로 나선만큼
중요한 선전효과를 발휘하여 훔볼트대학과 자유대학 신문의
보도와 더불어 영화제의 길을 터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지난 부산영화제 관계로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도로테 베너(Dorothee Wenner)씨가 독일 노동운동가들과
한국 교민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한국민주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모임’에 문의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구체적
답변자료는 1월 18일자 ‘한겨레창’ “분노의 거리를
찍는다”가 제공했다.
베너씨는 사회적 관심과 영화적 감각을 연결시키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실무를 맡을 사람들로는 독일
사람들 못지 않게 한국사람들이 필요했다. 비디오를 독일어로
바꾸어야 했고, 그밖에 한국과 독일의 사정에 능통한 사람이
긴요했다. 이 모든 실무를 맡고 조직한 사람은 이름이 없다.
다른 교민과 유학생들의 도움 또한 컸다.
감동과 웃음, 그리고 투명한 연대의 눈물
상영에 앞서 감독을 비롯한 주요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영화제의
많은 경우처럼 이번에도 - 그러나 노동자뉴스제작단이나
민주노총 활동가가 직접 참여하지 못한 상황에서 - 주최를 맡은
‘한국민주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모임’의 인사가 도로테
베너(Dorothee Wenner)씨의 사회로 상영 전에 이루어졌다. 이미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영화관, 스크린 앞 조그만 무대에는
1995년 민주노총 출범에 즈음하여 한국을 방문한 바 있는 베를린
BMW 직장평의회 상근간부인 한스 쾨브리히(Hans
Köbrich)씨와 독일노총 베를린지부 교육부장 빌리
하옠(Willi Hajek씨)씨가 우측에 나란히 자리하고,
사회자를 사이에 둔 왼편에는 최근 소식과 구체적 정보에 관한
한국인 답변자로서 필자가 앉았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국제영화제에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떠오를
때, 날치기 통과 장면으로 시작하여 단호한 투쟁 모습과
시민들의 호응이 감동의 영상으로 처리되고, 인터뷰와 현장의
이모저모 및 투쟁의 지속결의로 마무리되는 장면 장면은 웃음과
함께 눈물도 자아내었다. 7분이 채 안되는 사이에 날치기되고
3번의 망치가 두드려지는 순간 관람객들은 경악했고,
“선진국에는 쟁의가 없는데 한국 노동자들은 해마다 쟁의를
한다”는 김영삼대통령의 참으로 유식한(?) 발언에 독일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으며, 용광로같이 달아오르는 투쟁의 열기가
스크린을 메울 때 교민․유학생들이 삼키는 연대의 투명한
눈물 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상영이 끝난 후 인사와 소개의 무대는 영상으로 풀지 못한
궁금증을 쇄도하는 질문과 토론으로 채우는 자리로 다시
꾸며졌다. 다음 영화 상영이 임박한 가운데 시간적 한계로
추려진 질문들의 내용은 주로 한국의 구체적 노동조건과
노동자조직상태 및 강경한 투쟁성의 비결이 중심이었다. 정치적
투쟁이 금지된 독일노조관련법과 개인주의가 확대되어 가는
유럽문화를 가진 독일인들이 비록 날치기일지언정 국회를 통과한
법률을 반대하고 정권의 퇴진까지 주장하는 한국 노동자들의
진지한 투쟁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연구되고 대답되어야 할 이러한 질문들에 한국인
답변자로 나선 필자로서는, 강한 투쟁이 있기 전에 우리들에게는
그만큼 폭력적인 탄압과 열악한 노동조건이 존재했으며, 현재
한국 노동운동은 급속한 발전단계에 있다는 대답으로 그들을
만족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 시간으로 한정된 질문과 토론이 메꾸어 주지 못한 관심은
준비된 다른 영화들을 위해 영화관 옆 카페로 자리를 옮겨 다시
이어졌다. 기차를 타고 멀리 타지역으로부터 올라온
교민․유학생들도 함께한 이 자리에서는 개개인의 진솔한
느낌들을 들을 수 있었다. 상영직후 첫 질문을 하기에 앞서 평소
독일의 신문이나 TV를 통해 볼 수 있는 싸움의 장면 외에
구체적이고 새로운 내용이 부족해 기록영화상영에는 다소
실망했다는 한 독일인의 평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베를린영화제 상영물보다 더 신선하고
감동적이었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느낌을 같이했다.
한편 ‘한국민주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모임’은 지난 전노협 관련
소책자 발간에 이어 근 1년 동안 준비해 온, 민주노총과
총파업투쟁 및 한국의 외국인노동자문제를 중심으로 서술된
「민주노총」이라는 소책자 2호를 발간하여, 이번
행사와 함께 소개했다. 비디오 구입에 관한 문의와 함께
쏟아지는 소책자 구매 문의는 바로 연대와 공감의 증거였다.
준비된 100여 권은 동이 났다.
조국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연대와 공감의 뜨거운 표현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민주노동운동과 연대하는 모임’과
한국노동자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독일 노조활동가들은 이러한
연대가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화와 더불어 항상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노동운동의 세계적 연대에 기여토록 하고자
작년에 이어 3월 넷째 주말 독일노총의 한 연수원을 빌려
한국총파업에 대한 더 깊숙한 논의와 이후의 연대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끝으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비디오
「총파업투쟁속보」에 대한 평가 및 영화제와
관련된 평가는 베를린 영화제에 오른 모든 영화제작물들에 관한
공개책자에 나온 설명으로 대신한다. 이 책의 78번째 순서에
자리한 ‘한국과 연대 - 총파업투쟁속보’는 한겨레 1997년 1월
18일자 한겨레창의 “분노의 거리를 찍는다”라는 기사
모자이크를 오른쪽 면으로 담고, 왼쪽 면에는 베를린의
자유기고가인 헬무트 회게(Helmut Höge)가 쓴 간단한
소개문을 독일어와 영문으로 각각 실었다. 그 내용을 완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 연대
총파업 투쟁속보
한국의 투쟁이 2월을 넘어 계속되는 가운데, 5개의 한국
비디오그룹들(독립영화협의회,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
보임, 서울영상집단)은 2개의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편집자 주 :
이 글을 쓴 헬무트 회게(Helmut Höge) 씨는
「총파업투쟁속보」가 5개의 비디오 그룹들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특히 그 기록물들은 저항의 중심지인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이미 공개 상영된 바 있다.
1996년 12월 26일 아침 6시 한국정부는 노동법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6시 30분, 파업은 곧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12월 27일 파업 규모는 참가자 35만 명을 돌파했고,
그와 동시에 「총파업 투쟁 속보」 제 1부의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한 독립
법외노조로서 기업별노조들의 상급조직인 민주노총은 ‘투쟁의
기관차’로서 자신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정부에
협조적인 다른 상급조직인 한국노총에 소속된 조합원들로부터도
파업참여를 유도해 낼 수 있었다. ― 이것은 한국노동운동에
있어 하나의 커다란 전기로 평가된다.
남한은 아직도 노동시간과 산업재해 면에서 공업국가들 가운데
가장 열악한 처지에 속한다. 1970년 섬유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함께 한국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비약했다. 그리고
1987년에는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대중적 저항과 노동투쟁이
일어났다. 또한 1988년 말이래 한국 노동자들은 억압적
노동법들을 폐지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 투쟁
과정에서 열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분신을 했고,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독일 금속노조의 산별조직 형태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지난
1월 독일을 방문했던 한국 금속연맹의 한 간부인 김상복은,
“우리들의 노동운동은 죽음을 딛고 발전해 왔다. 전에는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운동을 이끌어 왔으나, 이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운동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공장 내
총파업과 가두투쟁이라는 고전적 투쟁형태가 재생되었다.”
김상복은 또한 현재 한국의 투쟁을 1918년 독일평의회운동과
비교하면서, 그러나 “이 투쟁이 자칫 의회주의 속으로 희석되어
갈 지, 하나의 독립된 사회세력을 형성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해 아직 가시적으로 평가될 단계는 아니다”라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국민들의 호응이 이처럼 크게 나타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아주 새롭고도 소중한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럽의 사민주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경향성을 상실해 간 것을 잘 알고 있다.” 현재까지
한국노동자들의 투쟁 목표는 개악된 노동법․안기부법의
철회와 김영삼정권의 퇴진이다. “정권퇴진을 목표로 직접
투쟁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노동해방의
지속발전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일정한 한계들을 안고
있다.”
2부로 구성된 이 기록영화(1부 25분과 2부 50분)는 파업
참가자들의 단호한 투쟁과 ‘노동투쟁의 한 무기’로서 카메라가
갖는 가능성을 담았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디오운동은 1997년
1월 18일자 한겨레의 서술처럼 “90년대의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평가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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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4-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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