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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금융위기 예정된 파국

현장에서 미래를  제36호
러시아 금융위기 예정된 파국



러시아금융위기, 예정된 파국
정세읽기
러시아 금융위기, 예정된 파국



성 원 용
한림대 강사/경제학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러시아 정부는 제2의 인도네시아 사태를 막기 위해 루블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고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8월 17일 러시아 정부가 발표한 주요 내용은 1) 연말까지 달러당 환율변동폭을 6.0~9.5루블로 설정 2) 99년 12월말까지 만기 도래하는 루블화표시 중․단기 국채(GKO, OFZ)의 신채권으로 교체 및 그 때까지의 잠정 거래 중단 3) 내국인의 대규모 외환거래에 대한 임시 규제조치 도입(대외 채무 상환, 증권담보부 채무에 대한 보험금 지급, 확정기한부 외환선물거래에 대한 지급 등에 대해 90일간 모라토리엄) 4) 1년 만기 이하의 루블화자산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금지 등이었다. 이번 조처는 환율의 변동폭 상한을 7.13루블에서 9.5루블로 상한 조정, 사실상 기존(달러당 5.27~7.13루블)보다 약 33%의 평가절하를 더 용인하고, 국내 정부부채 및 대외민간채무에 대한 모라토리엄 선언을 통해 평가절하에 따른 대규모 외자유출 경로를 부분적으로 차단, 외환위기의 심화를 방지하자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금융파국의 실태

어찌하여 러시아가 이 지경까지 가게 되었는가. 세계는 러시아의 금융환란을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PlanEcon 및 EBRD, Economist Intelligence Unit 등이 러시아가 동유럽 국가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지만 본격적인 경제성장궤도에 진입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던 사실을 회고해 본다면, 그리고 러시아가 지난해 시장개혁이후 처음으로 미미하기는 하나 0.4% 성장을 기록하며 자신감을 보이기까지 했던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분명 ‘돌발사태’이다.
도대체 러시아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지난 7월 13일 러시아가 IMF, IBRD, 일본 등으로부터 226억달러의 긴급 구제금융을 지원받기로 한 소식이 알려졌을 때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금융위기는 한 고비를 넘기는 듯 했다. 하지만 8월 들어 다시 금융시장의 불안은 심화되어갔다. 러시아 주식․채권시장은 광란의 투매양상으로 번지고 루블화 폭락세는 계속되었다. 러시아의 금융시장은 조정능력을 상실했다. 금리는 폭등하고, 주가는 폭락하는 양상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었다.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지원 계획도 투자자들의 이탈심리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이렇게 일본의 엔화 약세로 다시 촉발된 경제위기는 13일 ‘검은 목요일’로 현실화되었다. 여기에 세계 금융계의 큰 손 조지 소로스 미국 퀀텀펀드 회장은 루블화의 평가절하 불가피론을 들고나와 루블화 하락세에 직격탄을 쏘았고, Mood’s와 S&P 등 신용평가 회사들의 신용등급 하향조치가 이어지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이런데도 엘친은 루블화 평가절하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시장상황은 통제아래 있으며 우리는 계속 통제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고, “우리는 앞서 이를 계산했으며 이 파고에 맞설 외환보유고를 두고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키리엔코 총리는 고작 은행간 외환거래 중지라는 비상조처로 급한 불을 끄고 보자는 식으로 대응했고, 금융위기는 결코 금융상의 문제가 아니라 투자자들의 ‘심리적인 문제’라며 애써 문제의 심각성을 축소했다.
그러나 러시아 외환시장이 악화되면서 국제금융자본의 러시아 이탈은 더욱 가시화되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대부분의 외국증권사들은 그들이 갖고있던 보유증권을 대거 매각하는 등 루블화 표시 자산의 처분에 열을 올렸고, 외평채 시장 붕괴로 러시아 은행들이 단기정부채권을 투매하고 달러매입에 나서면서 가뜩이나 평가절하 압력을 받아온 루블화는 벼랑끝으로 내몰렸다. 결국 가용 외환보유고가 시장개입으로 루블화 폭락을 방어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을 드러내자 두 손을 들고 항복선언을 한 것이다.
러시아의 총체적 파국위기는 그 진원지가 아시아의 금융위기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세계자본주의는 70년대 이후 지속적인 구조적 위기 속에서 과잉축적 구조를 만들어 내었고, 실물거래와는 상관없는 엄청난 규모의 화폐자본들이 선진자본국 시장에서 과잉유동성을 낳았다. 이 금융자본이 수익성 있는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지 못하자 투기성 자본화하여 동구와 중남미, 동남아 등 신흥자본시장(emerging market)으로 유입되어 금융외환시장을 교란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아시아가 과잉유동성-과잉투자-과잉생산의 메카니즘에 포획되어 외환위기를 겪게되었다. 러시아의 금융위기는 바로 이러한 아시아 위기에서 촉발된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에 의해 증폭된 것이다. 그렇다고 러시아 금융위기의 원인을 국제투기자본의 파괴적 양태에만 집중해서 살펴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러시아의 금융위기는 대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러시아 금융위기의 대내․외적 요인

대내적 원인으로는 재정수지의 악화, 단기부채의 급증, 정치사회적 불안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개혁․개방이후 러시아 정부의 재정수지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동안 원유, 가스 등 국제원자재 수출로 무역수지 흑자를 유지해온 러시아는 그러나 올 들어 국제원유가의 하락으로 수출이 감소함에 따라 무역수지 적자폭이 늘었다. 러시아 수출에서 석유,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수출액의 약 48%로 42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런데 국제유가는 지난해 배럴당 16~17달러선에서 최근 11~12달러선까지 폭락했다. 다음으로 국영기업 매각을 통한 정부수입이 예상 밖으로 감소했다. 당초 올해 정부예산안에는 국경기업 매각을 통한 정부수입이 81억 루블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8월 현재 10억루블 선에 머물렀다. 여기에다가 조세체계의 미비와 경제성장의 둔화로 인한 세원확보의 어려움도 재정수입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반면 대외원리금 상환에 따른 과도한 재정지출(재정지출의 30%)은 GDP의 7% 수준에 달하는 재정적자의 누적이라는 상황을 초래했다. 러시아 정부는 그동안 고수익률의 단기국채를 발행하거나 차관도입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존해왔다. 그리고 국채의 만기가 도래하기 전에 또 다른 고금리국채를 발행하는, 즉 빚을 내어 빚을 갚는 악성 채무구조에 빠져들었다. 수익률이 229.7%까지 급등하였던 루블화 표시 단기국채(GKO)의 99년 5월까지 상환도래액은 약 420억 달러에 이르고, 해외시장에서 차입한 차관규모는 97년 12월말 현재 722억 달러에 달하고 있으며, 이중 1년 이하(1년만기 포함)의 단기차관이 324억 달러로 45%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IMF 구제금융 조건으로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혁 법안의 의회승인 거부 등 보수­혁신갈등과 사회정치적 불안이 외국인투자자들의 불안심리를 가중시켰다.
대외적 원인으로는 아시아 경제위기의 여파, 경상수지 악화 및 환율방어 등으로 인한 외환보유고의 감소, 국제신인도의 하락 등을 들 수 있다. 아시아 금융위기를 계기로 국제투자가들은 이미 신흥자본시장의 위험성을 인식, 러시아 자본시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3년 연속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던 주식시장마저 올해 들어 급락했다. 러시아의 주가지수는 연초보다 73%나 하락했으며 1일 주식거래 규모도 예전의 10% 수준인 1천만 달러로 줄어든 상태였다. 최근의 엔화약세와 중국 위안화 절하 압력도 러시아에 대한 불안을 가중시켰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현 위기는 금융부문의 성장과 발전이 실물부문의 악화 등 경제적 위기의 상황하에서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현상이었다.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은행과 종금사를 통해 유입된 단기자금이 설비투자 등 장기자금으로 운용되어 과잉투자를 유발하고 그래서 차입과 운용의 불일치(missmatch) 현상이 발생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생산 및 투자감소라는 경제전반의 침체속에서 증권시장이 확대되었다. 이 점이 바로 아시아와 다른 점이다. 러시아 은행들은 그동안 기업대출 등 정상적인 여신업무는 거의 없이 외환투기와 고금리의 국채투자를 통해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올 들어 아시아 금융위기 등의 영향으로 루블화가 흔들리고, 실세금리 상승으로 러시아 국채가격이 폭락하면서 이들 은행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지급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특히 문제는 1백92억 달러 규모의 해외차입금과 5백억~1천억 달러로 추정되는 외국금융기관과의 선물환 계약이었다. 외국은행들로부터 대출금 상환압력을 받고있는 러시아 민간은행들은 중앙은행 지원금 등 가용자금을 총동원, 달러화 사재기에 나섰던 것이다. 건성성 금융감독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가운데 러시아 정부가 금융자유화를 실시한 것은 아시아 국가들과 동일하다. 시장개방과 규제철폐를 감독폐지로 혼동, 적절한 감독장치를 마련하지 않은 채 금융시장을 개방해 ‘세계화’의 덫에 걸린 것이다.


모라토리엄 선언의 배경과 전망

러시아 정부는 왜 이런 특단의 조처를 취했는가. 이번 루블화 평가절하로 러시아 정부는 수출경쟁력 증대,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인 원자재의 환차익 발생, 러시아 수출기업의 수입확대로 인한 세수증대 및 러시아 경제위기의 주 원인인 재정적자 해소 등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더구나 러시아의 경우 1년안에 상환해야 하는 달러표시 대외채무는 240억 달러인 반면 루블화 표시 정부부채는 400억 달러이므로 평가절하로 단기적으로는 채무부담의 완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평가절하로 인해 예상되는 부정적 효과 또한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수입품의 가격인상이 문제다. 생필품의 50%이상을 수입품에 의존하고 있는 러시아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가져올 파장은 매우 심각하다. 무엇보다도 엘친개혁의 최대성과로 꼽히는 물가안정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고 소련 붕괴이후 경험한 초인프레 상황을 몰고올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이것은 현금자산, 특히 급료에 의존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누적된 대정부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에 따른 기대물가 상승으로 이자율의 상승과 그에 따른 경기침체, 러시아 상업은행의 도산이 우려된다. 1700여개에 달하는 러시아 상업은행의 경우 해외은행 차입은 달러 표시인 반면에 자산의 운용은 루블화 표시이다. 결국 루블화의 평가절하로 자산규모의 축소 및 부채의 증가에 따른 경영 부실화가 예상된다. 실제로 8월 25일 은행간 자금유동성 악화에 시달려온 러시아의 3개 은행(우네심방크, 메나쩨프, 모스트 방크)이 금년말까지 합병을 완료할 것이라고 밝힘에 따라 추후 이러한 은행간 합병사태가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정부는 평가절하로 예상되는 대규모 외자유출로 인해 외환위기가 심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으나 이로 인한 대외신인도의 하락으로 외자조달비용의 상승은 물론 앞으로 당분간 국제자본시장 접근자체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은행에 예금하지 않은 700억 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국민들은 자국화폐인 루블화를 더욱 불신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러시아의 현상황에서 평가절하는 사실상 루블화의 자유낙하를 의미하게 된다. 일주일만에 외환거래를 재개한 모스크바 은행간외환거래소(MICEX)에서 루블화 가치가 속락하고 주가도 연일 사상최저치를 갱신하는 사태는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2차대전 이후 최악의 세계경제위기를 맞는 가운데 서방 선진국들의 대응은 어떠한가. 러-미 정상회담에서 클린턴은 효율적인 세금징수, 인플레 억제, 러시아 경제에 대한 신뢰구축 등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 마련을 엘친에게 요구하며 ‘시장개혁의 지속’을 주문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짓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서방도, 통화기금도 러시아를 지원할 추가여력이 없고 러시아를 위기에서 탈출시킬 묘책도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결국, 이번 사태로 엘친은 집권이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 내년 의회선거와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엘친은 지난 6년간 시장개혁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이번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스스로 경제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다. 이에 따라 엘친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땅에 떨어졌고 과연 그에게 위기관리 능력이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는 처지다. 실제로 최근 실시한 여론 조사는 러시아 국민 3명중 2명이 엘친이 사퇴해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반면에 공산당 등 야당은 이번 사태를 호재로 삼아 엘친의 하야와 조기총선을 촉구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대통령에 대한 탄핵절차를 밟겠다며 대대적인 정치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엘친이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권력의 분점밖에 없다. 총리 서리로 재임명된 체르나무르진 전총리가 현재의 난국 타개를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야당에 연정구성을 제안할 것으로 전망되고 양 진영은 더 많은 통제권을 갖기 위해 밀고 당기는 힘겨운 줄다리기를 반복할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신자유주의적 통화론에 기초한 시장개혁 기조가 후퇴하고 국가의 규제역할이 증대되고 경제통제권이 강화되는 위기관리체제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서방이 생각하는 것처럼 ‘계획경제’로의 회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다우클라드적 혼합경제를 지향하는 첫걸음이 될지는 시간이 보여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국가독점 강화로 국가 재정수지를 정상화하고, 위기에 처한 금융산업그룹이 안정적인 자본축적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면서 과두지배세력간 재편을 시도하려는 기도로 판단된다. 물론 이것이 절대 대다수 러시아 국민의 이해에 반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러시아 위기의 파장 - 세계화 패러다임이 파멸

러시아의 위기가 과연 어떤 강도로 세계시장에 파급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초기에 세계금융시장에서는 이번 조처가 오히려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러시아를 가르켜 ‘핵을 가진 인도네시아’로 비유하는 일부 서방의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국제경제적 규모가 작기 때문에, 또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도 핵폭발의 방사능 낙진은 견딜 만한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이후 사태가 보여준 바와 같이 러시아발 금융대란은 미국 뉴욕의 월가를 뒤흔들고 있다. 주식시세는 폭락과 급등이 반전되면서 요동치고 있다. 뉴욕 증시와 상호 연동돼 있는 런던, 프랑크푸르트, 파리 등 유럽의 주요 증시와 중남미 주식시장의 주가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세계주식시장이 동요․불안의 단계를 넘어 추락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유럽, 일본 등 서방은 세계금융시장에 대란이 일어나고 있고, 그 대책은 성장궤도의 회복이라는 점에는 인식을 같이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대응책은 마련하지 않고 있다. 각국의 국내사정과 미묘한 입장차이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고통분담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러시아발 금융대란이 진정될지 모르지만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축적양식으로 등장한 자본의 국제화와 세계화 패러다임은 이번 사태를 통해 자기파멸적 한계성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한/노/정/연

1998-09-05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4&no=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