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 찬가를 위하여 |
현장에서 미래를 제41호
|
이진경
|
실업자 찬가를 위하여
칼럼
실업자 찬가를 위하여
이 진 경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어떤 말을 자주 듣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덮쳐오는 서러움보다도 어찌할 바 모를 당혹감이 더 당혹스럽고,
예견되는 배고픔보다는 차라리 가슴 시린 허전함이 더
고통스러워 피해가고 싶은 말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슴 아픈 말을 일년 넘게 얼마나 많이 들어야
했던가. 그래서 신문도 잘 안보고 살건만, 어디서 구르다 눈에
띤 오늘 아침 모 조간신문은 또 6만명이나 그 끔찍한 말을
삶으로 내몰 거라는 기사를 제일 머리에다 써 놓고 있었다.
실업은 왜 그리 힘들고 슬프며 고통스러운 것일까? ― 어이없는
질문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그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걸 진지하게 질문하는 바보 같은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정말 실업은 왜 그리 힘들고
고통스런 것일까? 노동이 즐겁고 신나는 것도 아닌데.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자기 의지의 실현이 아니라 타인의 의지의
실현이고,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맑스를 인용하는 것은 현학적인 짓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그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노동하지 않음은
즐거움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실업은 차라리 즐거움의
요소를 갖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왜 노동하지 않음은, 혹은
실업은 기쁨을 주지 않는 것일까? ― 또 다시 어이없는
질문이다.
아마도 소득이 어느 정도 보장된다면, 그래서 먹고 살 길이
막혀버리지 않는다면, 실업은 기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실업의 고통을 직접 겪는 200만이 넘는 사람들이나,
그들로 인해 함께 고통받는 다른 ‘국민’들이나, 그 고통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세워야 하는 정부가 동시에 끔찍하고
거대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너무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막대한 자금과 성금으로 조성된 실업기금을 이용해 실업자들에게
생계비를 보장해주면 된다. 그러면 실업자는 생계 걱정 없이
고통스런 노동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으니 좋고,
우리 ‘국민’들은 없는 일자리에 굶고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들의
삶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좋고, 실업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닌 만큼 정부로서도 해결책 없는 실업자 문제에 골머리
썩일 일도 없으니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정부나 자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나 실업자도 이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거의 유일한 것이다.
일자리를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일자리를 나누자고 하거나,
취로사업과 같은, 일자리를 만드는 사람에겐 그다지 쓸모 없고
일하는 사람으로서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자리를 억지로
만든다. 실업급여는 최소한 구직을 위해 노력했다는 알리바이
없이는 주지 않는다.
자본가나 정부로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냥 소득을 보장해주면 누가 일을 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타인의 노동을 통해서만 증식할 수 있는
자본으로서는 중요한 반론이다. 그러나 그건 노동하려는
사람들을 거리로 내쫓는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을까?
더구나 노동의욕에 불타는 수십만의 청년들을, 단지 전쟁이라는
장래의 파괴적 사태를 염려하여, 아무런 생산적 노동을 하지
않는 자리를 강요하며 먹여 살리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그건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는 일이다. 호황이라는 장래의 생산적
사태를 미리 염두에 두고 나중에 추가로 일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그보다는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안’을 노동자 자신이 별로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개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실업은 단지 생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소득으로 대신할 수
없는 박탈감의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득이 있는 경우에도
실업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도 기쁨을 얻지 못하며,
비노동 내지 실업을 통해서도 기쁨을 얻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기쁨이라고는 줄줄 모르는 체제인 것이다. 아마도
니체라면 이러한 사태를 두고 ‘허무주의’라는 말을 써서
표현했을 것이다. 즉 자본주의는 현세적인 어떠한 기쁨도 주지
못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가장 허무주의적인 체제다.
실업의 고통은 생존의 위협 이전에 무력감으로 덮쳐 온다. 이
무력감이야말로 실업자가 느끼는 박탈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이 무력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동할 수 없다는 것이 자신의 무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무의식적 관념
때문이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숨겨진’
비밀과 정확하게 상응하는 것이다. 맑스가 자본주의가 시작하게
된 지점을 파헤친 연구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자본주의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을 분리하는데서 시작한다. 농민을 생산수단인
토지로부터 쫓아내 무산자로 만드는 피어린 과정이 그것이다.
이는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생산자에게서 빼앗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자본은 생산자에게서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빼앗아
그들을 무력화시키는데서 탄생한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생산의
목적, 생산의 대상을 결정하는 의지를 자본 자신의 의지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동자의 능동적인 힘은
자본의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의지 아래 복속된다.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란 노동하지만 자기 뜻대로 자신의 신체를 움직일 수 없는
자다. 무력함은 실업자만이 아니라 노동하는 자에게도 공통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무력함은 자본의 생존조건인
셈이다.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이와 무관할 리 없다. 사실
농민들에게서 대대적으로 토지를 빼앗은 이후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혹은 다른 이유로 이곳저곳을 무리지어 떠돌아 다녔다.
걸식을 하며 떠도는 이들은 귀족이나 자본가들이 보기에는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해충’들이었다. 17세기에 대대적으로
늘어난 무산자들의 이 부랑을 막기 위해서 영국에서는 이른바
‘구빈법’이라는 이름으로 귀를 자르고 다리를 자르며 결국은
사형에 이르는 방법으로 부랑자를 처벌했다. 프랑스에서는 이
‘게으름뱅이’나 가난뱅이, 부랑자, 광인, 범죄자 등을 모두
잡아 ‘종합병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에 가두었다. 그 감금의
범위는 파리 시민 100명당 1명을 가둘 정도로 거대했다. 그리고
그 수용소에서는 이 ‘사회적 해충’들을 ‘인간’으로
‘교육’하기 위해 강제노동을 부과했다. 물론 그 강제노동의
‘경제적’ 성과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아담 스미스는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노동이 가해진 것만이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이론화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헤겔은 이러한 생각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했다. 노동은 합목적적인 활동이고, 이 점에서
동물들의 행동과 구별되는 인간의 본질이다. 이제 인간은 노동과
등호로 연결된다.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다.” 다시 말해
노동하는 자만이 이 사회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대개 ‘노동의 인간학’이라고 부른다. 18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이러한 생각이 부랑하는 저 사회적 해충들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종합병원’에 가두고 노동을 통해
그들을 ‘교육’하던 역사와 정말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도 아니면서, 노동하지 못하면 또한
고통을 느끼는 실업자의 ‘심리학’이 과연 이 가슴 아픈 역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고 살 자격이
없다는 무노동무임금의 논리나, 적어도 노동을 찾으려 하지 않는
자는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실업급여의 논리가 이 끔찍한 역사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업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사회적 임금’은커녕 실업자의
최소한의 삶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관념조차 생소한
우리로서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위한 보너스 ― 프랑스어로
‘13번째 임금‘ ―를 달라며 농성을 하는 프랑스의 실업자는
차라리 뻔뻔스러워 보인다. 어떻게 실업자가, 노동도 하지 않는
주제에 휴가비까지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만큼 우리는
’노동의 인간학‘에 충실한 것이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자본의 정언명령을 신체에 강하게 새기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실업자의 무력감은 자본이 우리의 신체에 새긴 저
‘노동의 강박’의 뒷면이며, 실업이 주는 박탈감과 고통은
‘노동의 인간학’이 제공하는 자본주의적 위무(慰撫)의 짝이다.
자본은 실업자의 생존을 담보로 하는 그 고통을 통해,
노동자들로 하여금 훨씬 강화된 노동과 훨씬 길어진 노동시간을
감내하게 한다. 노동자는 노동하면서 착취당한다면, 실업자는
노동하지 못하며 착취당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인간을
등치시키는 ‘노동의 인간학’의 방정식에서 벗어나지 않고서,
노동과 비노동 모두를, 현세의 삶을 모두 고통으로 만드는 이
허무주의적 착취에서 대체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노동의 강박에서 만큼이나 ‘노동의 인간학’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노동은 신성하다”는 저 상상적인
위안을 강하게 뿌리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실업자를 위하여,
그리고 노동자를 위하여, 우리 모두를 위하여.
한/노/정/연
|
1999-02-05 00:00: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