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의 한 귀퉁이 삶의 풍경 |
현장에서 미래를 제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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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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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의 한 귀퉁이
홍희주 / 한노정연 연구원
I. 2003.12.04 19:00
1. 냉이
그거 아러?
냉이는 봄나물이 아니었다.
어무니 말에 의하면 냉이의 뿌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해 겨울은
춥단다.
겨울을 나기 위해 냉이는 뿌리를 깊게 내린다고.
하면서, ‘올해 겨울은 참 춥겠구나’ 하신다.
뿌리가 깊고, 잔뿌리가 많이 나는 겨울철의 냉이야 말로
향도 향이거니와 딱 제철 나물이란다.
냉이가 봄나물이 아니었다니... 온세상 사람들이 다들 나를
속였거나, 속고 있거나, 모르고 있거나 이다.
냉이는 원래 날 때부터 겨울냉이 였는데,
겨울에 가장 많은 뿌리를 내리고, 단단하게 겨울채비를 하고
있었거늘
무지랭이 사람들이 겨울에는 눈 감고 있다가,
봄에 호들갑을 떨며 봄나물이니, 봄소식이니 그랬던 거다.
그래서, 늘 답은 현실과 그에 조응하는 감성에서부터
찾아야한다.
2. 변비
산골에서 내려온 뒤부터 똥이 안나오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산골에서는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책도 보고,
바깥 경치도 구경하면서 응가.. 했는데,
그게 이제 버릇이 든 건가?
그럼 난감하군...
3. 첫눈
첫눈이 이번 주 내로 온다는 뉴스 때문에 맘이 바빠졌다.
빨리 산골로 가서, 조용하게 내리는 첫눈을 보고 싶다.
옛날, 남원에서 봤던 눈...
여기다 더해 분위기를 한껏 잡으려면 망또를 빨리 떠야
하는데,
이눔의 뜨개질 때문에 근골격계 질환에 걸릴 것 같다.
당구 초짜처럼 눈에서 계속 코바늘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이틀째 계속 4시간 밖에 못잤다. -.-
아- 불면의 밤이여.
4. 고전적 풍경
어제 밤 풍경.
아부지, 어무니, 내가 TV 드라마를 본다 - 새엄마가 나오는
드라마인데 못된 새엄마 때문에 분개하는 어무니와 나.
“나쁜년” - 어무니
“어머머, 왠일이야~ 장난아니네” - 나
화면에 시선을 빼앗긴 채, 어무니는 재봉틀로 뭔가를 계속
만들고,
나는 뜨개질을 연신 하고 있다.
“어무니, 우리 너무 고전적으로 노능거 가터요.”
“차라리 떡을 썰까?”
아부지는?
“드르렁~ 피유~ 고로롱 푸ㄹ~”
II. 2003.12.05 18:27
시골가는 길, 사거리에 떡 하니 내놓은 간판.
[인] 같이삽시다 [력]
큭- 어리버리한 조폭 분위기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III. 2003.12.05 18:38
[시] 연애시집
김용택의 [연애시집]을 어제 자기 전에 다 읽었다.
시는 느릿느릿 읽어야 하지만, 이노무 성질 때문에
만화책보다 더 빨리 읽는 게 시집이다.
김용택이 [연애시집]이란 제목으로 연애시집을 냈다.
다른 연애시집은 쳐다보지도 않다가, 김용택이 냈다길래 냉큼
집었다. 속보인다, 속보여~
첫 장을 펼치니, 한줄 이렇게 씌여 있다.
‘연애란 말에서는 봄바람에 실려 오는 햇풀 냄새가 난다.’
그 다음 장을 펼치니, 자서가 적혀있다.
‘작년 어느 가을날 갑자기 시가 씌여졌다. 그리고 며칠 동안
여러 편의 시를 쓰며 지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시가 되었다.
그럴 때가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것들이 다 내 말이 되어줄 때가
있다. 그럴 때 내 삶은 최고지만, 그럴 때는 가문 땅에 콩 나듯
드물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직도 내 몸의 어디, 세상의
어딘가에 푸른 콩잎 같은 시가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시들은
그렇게 갑자기 씌여진 시들이고, 대부분 발표하지 않은
시들이다. 10년이 넘게 고이 간직하고 있던 시도 두어 편 된다.
그냥 간직하고 있어도 행복한 시들에게 작고 멋들어진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이제 나의 시들은 모두 집을 찾아든 셈이다.
안심이 되고, 맘이 편하다. 나는 텅 비었다. 저 푸른 산천을
뚫고 오는 흰 빗줄기 같은 시가 또 다시 나에게 찾아올지
모르겠다. 기다리기로 한다. 봄 지난 산같이 한가롭고 싶다.
시집 제목을 ‘연애시집’으로 해보았다. 연애란 말에서는
봄바람에 실려 오는 햇풀 냄새가 난다. 연애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세상 어느 곳에서 상큼한 머릿결 냄새가 이는 것 같다.
아련한 곳, 정답던 그곳, 달이 뜨면 강으로 그대를 만나러 가던
그리운 그 어느 곳에 대한 설렘과 떨림 그리고 애틋함이 이
시집에서 묻어났으면 좋겠다. 아내랑 자주 가는 강천사 흙길에
한 줄기 바람이 인다. 산딸나무 흰 꽃잎이 떠내려 오는 맑고
깨끗한 강천사 도랑물에 세상을 걸어온 맨발을 담그고 마주앉아
웃으며 놀던 행복한 사람, 내 아내에게 이 작은 시의 집을
준다.
섬진강 강가 작은 학교에서 2002년 김용택.’
내가 무릎을 탁 치며 아쉬운 것은, 김용택 같은 사람 있으면 딱
연애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현실은 김용택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하나, 김용택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IV. 2003.12.05 18:41
[꿈] 여전히
요즘 가끔 쫓기는 꿈을 꾼다.
머-, 현실이니깐.
근데, 문제는 꿈에서도 ‘전혀’ 침울해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진지하지도 않으며,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으며,
실없는 농담하면서
여기저기, 이사람 저사람 참견하고 돌아다녔다. -.-
오늘 낮잠에서...
그래도 이런 저런 사람들이 나와서 좋기는 하네..
V. 2003.12.08 18:26
[폼생폼사]
“우리 엄마는 폼생폼사야”
근영의 남동생이 무슨 말 끝에서 농반으로 툭 던진 말이다.
사실 그랬다.
시골 촌부의 푸짐한 아줌마를 상상했던 나로서도.
긴 검정 A라인 치마에, 검정 니트를 입고 하얀 차를 끌고
나타났으니...
말투는 또 어찌나 고상한지..(하지만 운전대만 잡으면 고상에서
약간 벗어나, 또 한 터프한다.)
암튼,
오늘 아침에 내가 쿨 하고 자고 있을 때, 근영과 푸닥거리를
했나보다. 요즘 근영의 결혼 때문에 영 입맛도 없고, 똥도
안나오신다더니, 급기야 한판 터졌다.
하긴, 이집은 조용하고 간결하게 준비하는 편이다.
아마 우리 집 같았으면 엄마 눈물바람 부터 시작해서, 온 집안이
찌짐처럼 몇 번은 뒤집어졌을 것이다.
오늘 아침 말다툼 끝에 근영이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얼굴도
못생긴 나”라고 했나보다.
의도야 새댁 편을 드느라 그랬다지만 어무니가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하면서.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고생고생해가며 여봐란 듯이 키웠는데,
나 못났다고 하면 수십 년의 공든 탑이 배신의 잿더미(캬~)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어무니를 달래드렸지만, 내가 달랜다고 달래지나.
엎지른 놈이 물을 퍼 담아야지..ㅊㅊㅊ
그나저나 우리 엄마도 지금 저 심정이려나.
곱게 낳아놨더니 엉망으로 커버렸다고, 땅을 치고 통곡이라도
하고 있으려나...
그동안 없는 듯 했던 효심이 막 커지는 거 보면 집 떠나 철드는
것도 있어 좋은 점도 있다.
어쨌든,
아침 나절의 충격과 배신 때문에 어무니는 근영을 키우며
공부시키기 위해 지냈던 지난날의 고생들이 필름처럼 ‘차르륵’
돌아가나 보다.
나 역시, 우리 모친이 고생했던 일들이 필름처럼 ‘촤르륵’
겹쳐 돌아가고 있었다.
“12살 때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한 말을 다 커서야 알았어. 그
의미를”
“뭐라셨는데요?”
“옷 잘 입고 다녀라”
-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 엄마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유언처럼 가슴에 새겼단다.
올 잘 입고 다니라고. 밥 한 끼 굶는 것은 티 안나도, 옷 못
입고 다니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 시며, 옷 잘 입고 다녀라..
하셨단다.
어디 가서도 반듯하게, 단정하게, 무시받지 않도록 처신하라는
함축적인 의미이리라. 품안에 넣고 키우지도 못한 어린 딸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는 어미의 심정이 어떨까. 옷 잘 입고 다녀야
한다.
어머니의 눈물겨운 폼생폼사의 내력이다.
VI. 2003.12.22 19:57
[세상 밖으로]
내가 살던 세상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온 지 40일이 지났다.
금산 할머니를 만났고,
산장지기를 만났고,
익산 아저씨를 만났고,
돌싱도 만났다.
엄마는 계속 울기만 하고,
아빠는 환갑을 설움 속에 보내야만 했다.
사람들은 나를 잊은 듯
뭔가를 계속 써대고,
주장하고, 거리로 나가고,
크리스마스는 돌아오고 있다.
낮에 먹은 스테이크가 꽝 체해서
좀처럼 내려가질 않는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시키지도 않은 원고를 쓰겠노라고 했던 건
왜 그랬을까.
그래, 나 잘 살고 있다.
그런 거 보여주려고 했나?
암튼, 지금 가장 간절한 것은
30분이 빨리 지나 연속극을 보는 일이다.
그리고 뉴스 하는 시간 동안을 견디며
또, 연속극을 보는 것.
그 외에는 아무 것도 하기가 싫다.
VII. 2003.12.23 10:50
[꿈] 왜 안잡아
심란한 끝에 잠들어서 그런지,
마침, 내속을 알기라도 하듯 뉴스에서는
도시철도가 파업을 끝내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앵커의 숨가쁜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카메라에 비춰진 파업대오 속에는 아는 얼굴들이 역시 비장한
표정과 함께 나오고..
‘쳇...’
순간 확 밸이 꼬여서 채널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얼굴도 TV에서 돌려버렸다.
꿈속에서는
무슨 회의나 수련회였나 보다.
문건이 놓여져 있고,
사람들인 삼삼오오 무슨 이야긴가를 쑥덕거리고 있고,
나는 뒤에서 왔다갔다 하다가 뒷풀이 자리가 왔는데, 홍킹에게
포악을 떨었다.
왜 모임날짜를 안 잡냐고, 안 잡는거냐, 못잡는 거냐.
니들은 졸라 바쁘겠지만 왜 그것 때문에 나를 한달 동안이나
묶어두냐.
모든 걸 다하려고 하지 마라.
못하면 맡기던가.
그러고는 꽝 하고 나와버렸다.
나 간다. 붙잡지 마라.
나온 세상은 쌩하니 찬바람 부는
어느 골목길이었고,
뛰어노는 아이 하나 없는 놀이터가 왼쪽으로 나져있었고,
그랬다.
순간 어디로 가지?
그러다가 깼다.
그래, 모여봤자 뭐가 달라지기에
나는 그토록 집착했을까.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예전에 내가 자주 쓰던 말들,
행동들,
장난치던 거 한번하면
좀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 그랬던 것 같다.
지리산 후유증인가.
빠마를 해야겠다.
VIII. 2003.12.24 14:40
[곧 떠난다]
오늘 벌써 두 번째다.
짭새가 집 주변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첫 번째는 그냥 넘겼지만, 두 번째는... 확실하다.
아직, 심증이 없는 건지, 배회하기만 하고 있다.
아는 선배한테 전화해서 급히 차를 끌고 와달라고 했다.
곧 가마고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모든 짐을 잽싸게 꾸렸다.
마치 내가 여기 있었던 모든 흔적, 먼지라도 다 쓸어가듯이..
새로운 곳에 가서,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인가?
40일이 넘고 나니 짐이 너무 많아졌다.
꼭 지고 다닐 만큼의 짐을 유지하는 것,
참, 어렵고도 힘든 숙제이다.
한 치의 욕심도 허용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아직 안오신다.
오실 시간이 지났는데...
모두들 잘 계세요.
봄에 장 담그러 오겠습니다.
아니, 그전에 좋은 일 있는 날..
제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고 갑니다.
장점?
뻔뻔하게 빈대 붙고, 밥 많이 먹으며, 뒹굴거리기.
그리고, 큰 소리 치기!
“아, 배불러~!”
VIIII. 2003.12.26 21:23
[영화]원스.어폰.어.타임.인.아메리카
때로는,
사실 아주 자주
말로는 다 표현하기 싫은 감정이 있는 거다.
크리스마스날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자네의 인생마저 실패한다면 난 섭섭할 걸세’
뭔가를 끄적거리고 싶었는데,
역시, 그저 마음뿐이다.
나 역시도,
로버트 드 니로 같은 표정으로
한 세월을 보낼까.
보낼 수 있을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다 쏟아내고,
아니 쏟아내지 못한 그리움으로
그늘이 된 남자.
화장을 지우는 그녀, 데보라의
눈 주름이 생각이 난다.
‘나에게도 세월은 어쩔 수 없었어요.’
또, 얼마가 지나서
이 영화를 보게 될까.
엄마, 아빠는 내가 없는 동안 슬퍼하지 말고,
촬영 대기 중인 배우들처럼,
또 다른 일상을 살았으면.
그래서 큐 싸인이 떨어지면,
그때 나를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이제 왔니’ 하며 문을 열어줬으면.
정말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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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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