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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 인간해방의 꿈을 꾸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

현장에서 미래를  제119호
남구현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올려다 본 하늘, 눈부시게 햇빛이 내려 쬐는 그 하늘은 너무나도 파랗고 아름다웠다. 원형경기장은 2천 년 전 노예였던 검투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주로 노예들이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종교 박해로 사자에 물어뜯기며 죽어갔던 곳이다. 원형경기장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 몇 천 년을 변치 않고 지켜온 하늘을 보며 로마의 노예들도 내가 보고 있는 바로 저 하늘을 보며 죽어갔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수천 년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보편적 인간 해방의 메시지다. 왜 초기 기독교인, 그들은 노예로 살다가 당시의 지배자들에게 박해를 받아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신앙을 지켰을까.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앙을 지키도록 한 힘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보편적 인간 해방의 단초를 보았기 때문이었지 않을까.
노예들이 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켰는지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로마의 다신교에 대해 기독교가 유일신을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에서 전파될 수 있었다는 것이 이태리 여행 중에 도처에서 들을 수 있었던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과연 다신교냐 유일신교냐 하는 도그마가 그 힘이었을까? 아무리 이해해주려고 하여도 유일신 사상이라는 신학적 도그마로서는 왜 ‘노예들’이 주로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는지가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 몇 층으로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미로로 연결되어 숨어 들어가면 찾기 힘든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몰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원형 경기장에서 죽어 가면서도 신앙을 증거한 로마의 노예들, 그리하여 결국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기독교인이 생겨나고 급기야는 국교로 지정되기까지 굳건하게 신앙을 지킨 그들. 그들이 죽음을 이기게 한 힘은 귀족만이 아니라 자신들도 하나님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구원되어질 수 있다는 바로 그 보편적 인간 선언이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엥겔스는 초기 기독교에 대한 그의 글에서 초기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비교하면서, 초기 기독교의 해방적 모멘트에 대해 쓰고 있다. 초기 기독교 역사는 근대 노동자 운동처럼 피억압자의 운동으로서 노예와 자유인, 빈민 등 로마 제국의 탄압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 노예 상태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종교의 언어로 선포되었고, 사회주의는 사회 혁명을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억압자들에 의해 탄압당하면서 피억압자의 해방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계급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은 흔히 간과되고 있다. 실제로 성서에는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참다운 이웃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던 유대의 사람들이 당시의 유대사회의 지배자들이었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 아니라 어부, 세리, 창녀 등 그 사회의 밑바닥 층이라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보편적 세계관으로서의 예수의 가르침은 외부적으로는 유대민족이 아니라 이민족에게까지 확장된 측면이 있다면, 내부적으로는 버림받고 배제되어있는 민중에게로 시야가 넓어진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보편적인 해방이 선언되어짐에 따라, 이는 바로 유대 사회의 지배자들의 특수한 이해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내 속에 있고 내가 하나님 속에 있듯이, 너희가 내 속에 있고 내가 너희 속에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유대 민중은 하나님과 동격으로 격상되었으며, 하나님과 유대 민중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중재자로서 장사를 하고 있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제끼고 하나님은 유대 민중 모두에게 직접 접속되었다. 어찌 바리새인들의 원성을 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 상황을 지금으로 확장하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선한 모슬렘이 우리의 참된 이웃이라든지, 똑똑하고 잘난 종교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무지랭이 노동자 민중들이 무매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찾을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꾸고 나니 얼마나 래디칼한 선언인가. 이러한 주장을 누군가 한다면 그 역시 2000년 전의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

캠벨은 지역과 역사 사회적인 특수성을 넘어서 인류가 가지고 있는 꿈을 신화를 분석함으로써 드러내고자 하였다. 건강, 생동감, 생식과 종족 보존에 대한 기원, 현세의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이러한 것들이 인류가 보편적으로 바라는 것이고 이의 표현이 신화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신화 및 예술을 분석함으로써 지역과 역사발전단계를 불문하고 관통하고 있는 인류의 ‘보편적 꿈’을 탁월하게 분석하였다. 그러나 그가 결론처럼 내리고 있는 인간 구원 - 그것도 주술적이고 밀교적인 형태로 신비화된 개인 구원- 에는 고통 받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꿈의 ‘사회적 성격’이 간과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보편적인 인류학적 인간은 추상적으로 남게 되었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해당 사회는 역사발전단계와 사회가 구성되어 있는 특수한 형태에 따라 모순과 모순에 의해 고통받는 사회의 구성원들, 또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몸부림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꿈에 조차 이러한 특수성이 각인되어질 것이다.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꿈에 이러한 모순성이 더 분명히 표현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나 붓다의 가르침, 인류가 그리는 이상사회는 모두 신분과 계급 모순이 사라지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해방된 모습을 전제하고 있다. 켐벨이 주되게 인용하는 융식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는 해방 사회를 그리는 열망이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신분의 굴레를 뛰어 넘어 악의 무리를 쳐부수는 ‘홍길동’이 일반적인 이름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전봉준은 새야 새야라는 노래의 선율로 남아 우리의 집단 무의식의 저 밑바닥을 긁어 댄다. 스스로 자신의 ‘인간됨’을 자각하고 해방된 사회를 열망하게 하는 그 힘은 무엇일까. 보편적인 인간해방에 대한 꿈, 보편으로서의 자기 인식, 모든 인간에게 내면화되어 있는 보편성, 인간만이 역사 속에서 보편 속에 스스로를 위치지울 수 있고 볼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성은 사회적 성격 속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이해함으로써, 엥겔스는 2000년의 역사를 뛰어 넘어 근대 이래의 노동자 운동과 노예들의 종교였던 초기 기독교 사이에 접점을 찾을 수 있었다. 제도화되고 화석화된 기독교의 교리, 즉 유일신 사상이나 삼위일체설에 근거해 초기 기독교의 노예들의 신앙을 설명한다면 근대 이후의 사회주의 운동과 초기 기독교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도그마와 도그마가 충돌할 때에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적인 이웃 사랑을 말 그대로 실천한다면, 현실에서는 강도 만나 피흘리고 있는 노동자 민중과 만날 수밖에 없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에서의 저 유명한 맑스의 종교 비판은 종교를 구름위에서 현실세계로 끌어 내리는 것이었다. 다른 곳에서 맑스는 공산주의를 로마의 직접민주주의가 노예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 또 기독교의 이웃사랑이 현실 세계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보편적 인간해방에 대한 꿈은 무엇보다도 지구화의 시대에 더욱 더 그 현실적 의미를 획득한다. 자본 지구화는 나라와 국경을 불문하고 신자유주의적 지배 전략을 보편화 시키면서 말 그대로 모순의 지구적 확장을 야기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사회운동 역시 지구화하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노동자 쥐어짜기의 지구적 확산을 의미하며, 보편적 착취에 대한 보편적 인간해방의 열망 역시 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자기 무덤을 파는 자’들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

2006-05-10 00:46:04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5&no=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