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여자의 일생 |
현장에서 미래를 제1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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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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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선 부모 때문에 집 나가고,
자라선 남편 때문에 집 나가고,
더 자라선 아들 때문에 집 나가고,
신 여자의 일생-삼종지도가 아닌 삼리(떠날 리)지도 혹은
삼출지도.
며칠 전에 드디어 접시를 깼다.
밥그릇 뚜껑을 아이에게 집어던졌더니, 이것이 아이 가슴에 맞고
떨어지면서 깨졌다.
나는 그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 며칠 전부터 가지가지로 일이 꼬이더니 결국은 아이가 잔을
넘긴 한 방울이 되었다.
사연인즉,
우리 애는 고2. 내년엔 입시를 봐야 한다.
그런데 이 애가 공부 안 하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나에게 위로한다.
부모가 다 머리가 좋은데 왜 그럴까?(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두뇌는 격세유전 이래.)
엄마가 머리가 좋은데 왜 그러니? 공부를 안 시켰구나.(나는
아무 대답도 안한다.)
아, 그런데 이 애는 좀 심하다.
내가 반에서 1,2등은 고사하고 3,4등 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전교? 그건 꿈도 꾸지 않는다.
단지 반에서 1/3수준으로만 되어도 감사하겠다.
모의고사 성적이 300점대를 오가니...
2년 동안 참고참고, 또 참고... 아이와 합의하기론
340점대까지만 올려라. 그러면 말 안하마.
애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 말 뿐이다.
사단은 이렇게 되었다.
이제 겨울방학이 되었으니, 그나마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겨울방학동안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를 학원에서
수강하라고 했다.
사탐과 과탐에서 점수를 팍팍 깎아먹고 있으니까.
아이가 그러겠다고 했다.
그 약속을 한 게 1달 전.
어느 학원을 갈 것인가를 물었더니
친구들에게 물어보겠다나?
그러기를 1달이 다 가고, 방학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아직도 알아보지 않았단다.
그래서 참다 못해 ‘내가 알아보랴?’ 했더니 그러란다.
그래서 알아보았다. 신도림에 있는 학원. 사탐.과탐은 아무
곳에서나
개설하지 않는다.
그곳을 등록하려고 했더니
아이가 맘이 바뀌어서 하는 말이
사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나?
말인즉 혼자서 하겠다고.
당연히 안된다고 했다.
난 그 아이 속셈을 다 안다.
과탐은 토.일요일만 수업하는데 사탐은 월부터 금까지 하니까
하기가 싫은 거다.
나의 단호한 거절에 아이도 단호하게 저항했다.
둘이 티격태격하기를 이틀. 나는 속이 탔다.
빨리 신청해야 하는데.
급기야 나는 최후통첩을 했다.
‘나는 등록을 한다. 가기 싫으면 등록증을 버리든지 구워
삶아먹든지 니 맘대로 한다. 일단 나는 등록한다.’
아이도 최후통첩을 했다.
‘후회하실 거예요.’
나는 속된 말로 꼭지가 도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뭐냐? 확실히 얘기해.’
애가 말했다.
‘돈이 아까워서요.’
‘무슨 돈?'
‘우린 돈이 없잖아요. 두 과목 들으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효자 났다 효자 났어...
‘니가 그걸 왜 걱정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어떻게 엄마 혼자서 결정해요? 엄마가 쓰는 돈이 엄마
혼잣돈이
아니잖아요? 우리 가족 모두의 돈인데..'
참고로 사탐 학원비는 6주에 15만 원이다. 과탐도 15만원.
그러니까 15만원이 아까우니 안가겠단다.
그날 밤, 난 뒤집어졌다.
내가 열 받아서 혈압이 올라갈수록
이 아이는 목소리가 낮아졌다.
‘엄마 후회하실 거에요.'
‘감정만 앞세우지 마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하리.
애를 방밖으로 내쫓고 문을 쾅 닫고 카셋트를 크게 틀었다.
볼레로를 집이 떠나가도록 틀어놓았다.
그날 밤.(토요일이었다.)
남편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내가 한바탕했으니 당신이 아이에게 잘 얘기해서 둘을 다 듣게
해라.
남편이 야밤에 아이와 한참 얘기했다. 그래서 둘이 합의했다.
월부터 금까지는 못하겠고 토/일 이틀을 하루 종일 사탐/과탐을
듣겠다고.
그래서 간신히 나는 좀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일요일.
9시부터 애가 외출준비를 했다.
어딜 가냐고 물었다.
친구와 코엑스를 간다고.
전시회를 본다나?
게임안내 전시회였다.
게다가 전시회 끝나고 친구와 게임방엘 가기로 했다고 한다.
나는 길길이 뛰었다.
니가 제정신이냐? 니가 그러니 너를 신뢰할 수 없다,
너 나가라, 너 같은 애를 첨 보겠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눈앞에서 사라져라...
애가 또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렇잖아도 지금 나갈 거에요.'
그러면서 외투 어디 있냐고 묻는다.
그러니 내가 돌밖에.
식탁위에 있던 밥그릇 뚜껑을 집어던졌다.
내가 길길이 날뛰자 남편이 나섰다.
남편은 나를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피신시켰다.
남편은 길길이 뛰는 나를 제지해 본적이 없다.
항상 실패했었고, 잘못하다간 기름을 붓는 격이 된다는 걸
잘 안다.
꼴을 보아하니 애 잡게 생겼다 싶었는지
애를 얼른 방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애를 타일렀다.
엄마가 왜 그러는지 등등.
그리고 게임을 1시간만 하고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아이가 나가고,
내가 남편에게 신경질을 내면서 말했다.
나, 4,5일 동안 집에 안들어올 거다.
난 쟤 얼굴 보면 미칠 것 같다.
안 보는 게 좋겠다. 그러니 집 나가겠다.
남편이 묵묵부답.
나는 정말 가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것이 좋겠다 싶었다.
대강 집을 치우고 사무실로 출근했다.(일요일도 나는 출근한다.)
그리고 마음먹었다.
어디 갈 데도 없으니, 오늘 저녁엔 밤 막차 타고 부산까지
가야겠다. 그리고 다시 새벽 첫차타고 서울로 와야겠다고.
그런데 전화가 왔다.
올케언니에게서.
오늘이 친정어머니 생신이라고. 며칠 뒤의 생신을 오늘 앞당겨서
하기로 했다고.
결론적으로 나는 그날 엄마 생신 때문에 가출도 못했다.
왜냐하면, 아이와 함께 친정엘 가야하니까.
그날의 일은 그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다음날 학원에 가서 등록을 했고 아이에게 등록증을
던져주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근 이틀을 아이와 나는 냉전을 했다.
밥 주세요. 밥 여기 있어. 돈 주세요. 돈 여기 있어.
그렇게만 보냈다.
그리고 또 한 삼일 지났다.
나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좀 심했다 싶었다.
그래서 마음먹고 아이에게 말했다.
‘지난 번에 그릇 던진 건 미안하다. 그렇지만 너도 너무했다.
어쨌든 미안하게 됐다.'
그랬더니 아이 말.
‘뭘요. 한두 번이 아닌데...'
나는 아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두번이 아니라니, 한두 번밖에 더 돼? 그릇 던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00.12.21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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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0 00:4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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