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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생태학

현장에서 미래를  제72호
존 벨라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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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생태학*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
* 이 글은 Monthly Review(vol.53, no.5, October 2001)에 실린 “Ecology against Capitalism”의 번역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monthlyreview.org/oct2001.htm



“우리의 환경오염”에 관한 1963년의 대담에서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생태학 이론의 완전한 함의를 끌어내오기를 거부하는 20세기 후반의 사회와 다윈의 진화론에 저항하는 빅토리안 시대간의 밀접한 비교를 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나는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여러분들이 찰스 다윈이 자신의 진화론을 발표한 이후 뒤따랐던 소동을 상기하길 바란다. 전-생명체로부터의 인간의 발생이라는 개념은 강렬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거부되었으며 또한 그 거부는 단지 대중들뿐만이 아니라 과학에서 다윈의 동료들로부터도 나온 것이다. 많은 해가 지나서야 종의 기원에서 설명된 개념들이 확고하게 안착되었다. 오늘날, 교육받은 이들 중 진화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명백한 결론을 부인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진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천의 다른 종들의 생활을 통제하는 바로 그 환경적 효과에 의해 영향받는다(Lost Woods: The Discovered Writing of Rachel Carson, pp.244~45).
인간을 조건짓는 생태학적인 기초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이렇듯 대중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지배”라는 개념, 즉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서구 문명 내 깊은 문화적 결점으로서 이를 보아왔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의존을 인정하기 거부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대부분은 확실히 자본 형태의 부의 축적을 사회의 지상 목표로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 논리와 관계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전통적인 경제학은 자기 자신을 희소물품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과학으로서 정의한다. 그러나 관계된 물품은 시장 상품으로 좁게 표현된다. 생태적인 결핍과 되돌릴 수 없는 생태적인 퇴보를 일으키는데 있어 경제학의 영향은―그것이 방어하고자 하는 체제와 더불어―소위 “외부적” 혹은 “사회적” 비용을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은 용인된 경제학의 범위 외부에 존재한다.
자본주의와 그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생태 문제를 심각하게 처리해야 할 것으로보다는 숨겨야 할 어떤 것으로 다루어왔다. 경제성장 이론가인 로버트 솔로우(Robert Solow)는, 유명한 “성장의 한계” 논쟁이 한창일 때 1974년 5월 ꡔ미국경제평론ꡕ(American Economic Review)에서 이렇게 썼다. “만약 자연 자원들을 다른 요소들로 대체하는 것이 매우 쉽다면, 그때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세계는 자연 자원들 없이 효과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자원고갈은 재앙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된 솔로우는 이에 대해 가정적으로 말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대체성이 현실로 되었다거나 또는 자연 자원이 완전히 없어도 된다는 식으로까지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대체성 정도가 아주 높기 때문에 생태의 최후 심판의 날을 예언하는 자들의 모든 걱정은 무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가정들을 따랐다. 환경 비용을 고려하지 못하게 되는 가격체계 내의 어떠한 사소한 결점이라도 시장 인센티브의 사용을 통해서 치료될 수 있으며, 정부는 그러한 인센티브를 창조하는 데 있어 극히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다.
MIT 전문가 그룹이 1970년대 초반 성장의 한계라는 문제를 최초로 제기했을 당시 솔로우와 같은 전통적인 경제학자를 격분시켰던 것은 그 주장이 지수(exponential) 성장 경향을 제시하면서 경제학자들 자신도 자주 사용하는 수학적인 컴퓨터 예측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경제 팽창의 마술보다는 오히려 유한한 환경에 대한 수요에 있어서의 지수의 증가에 초점이 놓여졌다. 성장의 한계를 예측하는 이론가들이 비록 문제점들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한한 환경 내에서의 무한한 팽창이라는 말이 명사모순이라는 자명한 이치―자본주의와 그 경제학자들에 의해 간단하게 무시되어 온―를 강조했다. 이는 따라서 지구적 자본주의와 지구적 환경간에 잠재된 파멸적인 대항관계를 만들어 놓았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엇보다 이윤의 증가에 따라 작동하고 따라서 사실상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대다수 세계 인구의 착취와 고통을 포함하여. 이러한 돌진은 일반적으로 에너지 및 자원의 급속한 흡수와 더욱더 많은 폐기물을 환경 속으로 쏟아버림을 의미한다―결국은 환경 파괴를 심화시키게 될 경제적인 성장에 따라 작동한다.
끝없는 팽창에 대한 자본주의의 강조와 마찬가지로 투자를 결정함에 있어 단기간의 시간 범위 역시 중요한 것이다. 어떠한 투자 전망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자본 소유자들은 예측가능한 기간(보통 매우 짧다) 내로 자신의 투자를 제한하면서도 이윤은 그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되길 기대하고 있다. 광산이나 유전, 그리고 여타의 자연 자원에 대한 투자자들이 일반적으로 보다 긴 기간의 투자전망을 채택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영역들에서의 지배적인 동기는 분명히 최종 생산물의 제조를 위한 원료의 공급을 보장하는 것과 오랜 기간 동안 예외적으로 높은 수익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조차도 시간의 범위는 10년에서 15년을 거의 초과하지 못한다. 생물계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기간인 50년에서 100년(또는 더 긴 시간)과는 많이 떨어진 요구인 것이다.
인간 사회를 가장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그러한 환경적 조건들과 관련해서, 경제 발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 즉 수자원과 그것의 분배, 깨끗한 물의 이용가능성,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보급과 보존, 폐기물 처리, 인구에 대한 영향, 그리고 산업 계획을 위해 선택된 특수한 지역과 연관된 환경을 포함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세대간의 환경적 동등성이라는, 지속성의 문제를 대표한다. 한편 이것들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 투자를 보상받고자 할 뿐 아니라 이윤을 보장하려는 비박애적인 자본의 단기간의 시간 범위 속으로 통합될 수도 없다.
대규모 투자자들은 자본 팽창의 요소이자 합병 및 이익의 촉진자로서 증권 시장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주식회사는 그들 주주의 주식 가치를 유지하고 정기적인 배당금을 제공하게 되어 있다. 최고 기업 간부들의 재산의 상당량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시장가격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이 받는 고액의 상여금은 이윤의 증가뿐 아니라 종종 기업의 주식가격 상승에 의해서도 영향받는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는 유동적인 증권시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증권시장에 대한 평가의 관점은 최근 이익의 획득 혹은 손실의 비율이나 다음 해의 이윤에 대한 전망에 근거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신경제에 투자되는 떠들썩하게 치켜세워진 자금의 흐름조차도 그것이 기업의 손실들을 일시적으로 간과할 수 있게 해줄 수는 있으나 이미 그 자체에 당연한 응보를 가지고 있다. 증권시장이나 위험부담 자본(venture capital)을 통해 고소득을 기대하는 투기적인 투자자들은 몇 해 동안은 인내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심도 기업들이 계속해서 손실을 기록한다면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자기 자신의 잉여자금을 투자하는 외에도, 주식회사는 장기채권을 통하여 자금을 빌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이자를 갚고 미래에 채권을 상환하기 위한 감채기금(sinking fund)을 챙겨놓기 위해 충분한 돈을 벌어야만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투자 결정에 있어 단기간의 시간 범위의 풍토(endemic)가 전체적인 환경적 영향을 결정하는데 있어 결정적 요인으로 된다. 가장 유해한 몇몇 오염물질의 방출에 대한 통제는 인간 생활에 긍정적이고 거의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환경의 실제적 보호는 다가올 세대들의 필요라는 관점을 요구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다수의 장기적인 환경 정책은 제3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곳은 부유국에 기반한 자본이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한 신속하게 회수하고자 하는 곳인데, 1~2년 내에 최초의 투자액만큼을 요구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때 투자를 결정하는 시간 범위(time horizon)는 사회와 미래 세대를 위해 이윤을 기꺼이 포기하려는 “착한” 자본가 혹은 그렇지 못한 “나쁜” 자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단순한 문제이다. 전형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종류의 산업들조차도 조만간 투자자와 채권단, 그리고 은행의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환경에 대한 관계에서의 앞서 말한 결점들은 우리가 보통 “환경 위기”라 부르는 것의 모든 영역에서 오늘날 명확하게 존재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한다. 지구 온난화, 오존층의 파괴, 열대 삼림의 파괴, 산호초의 소멸, 어류 남획, 종의 멸종,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 환경과 음식에서의 유독성 증가, 사막화, 물공급의 감소, 맑은 물의 부족과 방사능 오염―단지 일부만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그 목록은 아주 길며 계속해서 급속하게 길어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공간적 규모도 증가하고 있다.
생태학과 자본주의사이의 갈등이 특정한 생태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수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가장 긴급한 지구적 생태 문제라고 간주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 가스들”이 대기 내에 열을 가두면서 방출될 때 발생하는 “온실 효과”와 연관되어 있는 지구 온난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현재의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제어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금세기 내에 세계적인 규모의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지금 과학적으로 동의되고 있다. 주로 화석 연료의 방출과 관계있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달성된 것은 그러나 거의 없는 실정이다.
무엇이 필요한 행동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 축적의 과정이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 주요한 국제 외교적 노력―교토 의정서―을 방해하는 특수한 방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토 의정서의 실패
온실 가스 배출을 통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1990년대 초에 시작됐다. 기후협약을 만들어내기 위한 이러한 초기의 시도가 1992에 합의된 UN기후변화협약(UNFCCC)을 탄생시켰다. UN기후변화협약은 각 국가의 자발적인 배출 목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체제 하에서 배출량을 줄이는데 국가들이 실패함에 따라 한층 심화된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해 모든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2008년에서 2012년까지 1990년 수준의 5.2% 이하로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일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확정한 1997년의 교토 의정서가 탄생하였다. 이 협약 하에서 유럽 연합은 8%, 미국은 7%, 그리고 일본은 각각 6%의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게끔 되어있다. 기후 협상에 관한 이전의 협정(베를린 협약으로 알려진)에 따라 중국을 포함한 개발 도상 국가들은, 비록 그 협정과 관계되어 있지만 배출 감소에 있어 이러한 초기 단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교토 의정서의 이행여부에 관한 뒤이은 협상들은 끈질기게 문제되어 온 두 가지 점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배출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로부터 그것을 구매함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방출 감소에 동의하게 하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와, 삼림과 농지에 대해 배출 특권을 제공하는 “탄소 흡수원”(carbon sinks)의 허용. 유럽 연합은 두 안을 배출 감소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제로 실패한 것을 위장하기 위한 얄팍한 시도로 보고 이에 대해 저항했다. 미국, 일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는 이러한 조치를 지지했다. 양측이 이러한 분쟁에 대해 굴복하려 하지 않음에 따라 2000년 9월, 헤이그에서 협상은 결렬됐다.
2001년 3월,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며 주요 산업 국가들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부시 행정부는 교토 의정서가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기후 협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탈퇴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교토 의정서 비준을 위한 방법을 준비하기 위한 협상이 2001년 6월 본에서 열렸다. 그 협약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지구 온실 가스 배출의 55%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들에 의해 그것이 비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만일 미국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일본,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비준이 결과적으로 필수적이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아래서 유럽 연합은 미국이 이전에 헤이그에서 진전시킨 바로 그 위치를 채택하면서 차례차례 협상에서 양보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미국의 탈퇴에도 불구하고 교토 의정서는 본에서 아직 살아있지만, 그것은 배출 감소 목표를 밑돌며 허점으로 가득 차 있다. 농지와 삼림은 탄소 흡수원으로 취급되었으며, 배출 감소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 나무들이 자라는 것이 관찰된다면 사실상 그 국가는 배출을 줄인 것으로 계산되어야 한다. 1990년 이래로 온실 가스 배출을 실질적으로 증가시켜온 일본,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국가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자국의 산업 구조 덕택으로 1990년부터 극적인 배출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러시아와 같은 국가로부터 배출권을 구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오염거래권(tradable pollution permits)은 허가되어야 한다. 배출 감소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유일한 처벌은 다음 번에는 그 국가의 목표량을 일정 비율만큼 높이는 것이다. 감소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국가들이 기후에 피해를 준데 대해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제안은 거부되었다. 일본에 대한 대폭적인 양보 속에서, 원래 협약이 가진 “법적 구속력이 있는” 특징은 그 협약이 “정치적으로 구속력이 있다”는 말을 선호하면서 거부된 것이다. 교토 의정서와 원래의 UN기후변화협약 사이를 구별짓던 바로 그 사실―“법적 구속력을 가진” 배출량 감소의 확립―은 따라서 기각되었다.
세계 온실 가스 배출량의 1/4을 차지하는 미국이 기후 협약의 당사자로 남아있기를 거부한 것이야말로 본에서 개최된 협약의 가장 눈에 띄는 실패이다. 2001년 6월 10일 부시 대통령은, 3월에 그의 행정부에 의해 채택된 교토 의정서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되풀이했다. 기후 협약에 대한 미국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모든 활동이 미국 자동차 산업 복합체의 반대에 직면하여 정지하게 되었던(이는 미국 의회 내에서 그 협약의 비준을 아무도 지지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전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을 부시는 이로써 더욱 명확하게 만들었다.
2001년 6월에 기후협약에 대해 부시가 또다시 반대를 한 것은 그가 유명한 국립과학협회(National Academy of Science)로부터의 보고서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행정부는 이전에 이미 기후 변화에 대한 심도 깊은 조사가 필요함을 주장하였고 그래서 국립 과학 협회(NAS)로 하여금 기후 과학의 현재 상태(특히 기후 변동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의 조사 결과)를 연구하고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지구 온난화를 저지하기 위한 국제 협약이 공인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한 몇몇 과학적 근거들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부시 행정부는 NAS에게 이렇게 썼다. “행정부는 기후 변화에 관한 미국의 정책을 재조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가장 큰 확실성들과 불확실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기후 변화의 과학에서의 영역들을 확인하는데 있어 협회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IPCC의 보고서와 IPCC의 요약서 간에 실재적인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원한다. 우리는 응답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평가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따라서, 자신의 보고서를 세계 최고의 기후 과학자들이 작성한 IPCC가 근원적인 과학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닌 다소간 정치적으로 결정된 결론들을 만들어냈는지, 혹은 더욱 나쁘게도, 지구기후연합(교토 의정서에 반대하는 기업들에 대한 주요한 로비 조직)이 주장해왔듯이 그 과학이 정치적으로 매수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줄 것을 NAS에게 요구하였다.
부시의 2001년 6월 11일의 연설 몇 일전에 NAS는 자신의 보고서, 「기후 변화 과학: 몇 가지 핵심 문제들에 대한 분석」(“Climate Change Science: An Analysis of Some Key Questions”)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는데, 이 보고서는, 인간 활동의 결과로서의 지구 온난화는 하나의 현실이자 생물권의 안정성에 대한,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증가하는 위협이라는, IPCC가 이미 여러 보고서에서 확증한 사실을 강하게 재확인하였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NAS는 의심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는데, 바로 그 첫 단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온실 가스는 지표면 대기의 온도와 바다 밑의 해양 온도를 상승시키면서, 인간 활동의 결과로서 대기에 축적되고 있다. 온도는 실제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수 십년간에 걸쳐 관찰된 변화들은 대부분 인간 활동에 기인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몇몇 중요한 부분이 또한 자연적 변화성(variability)을 반영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인간에 기인한 온난화 및 이와 관련된 해수면 상승은 21세기 내내 계속될 예정이다. 제2의 효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기본적인 물리적 추론에 의해 제시된다. 이는 강수량의 증가와 반건조지역의 건조지역으로의 전환을 포함한다. 이러한 변화들의 효과는 온난화의 규모와 그것이 발생하는 비율에 특히 의존하게 될 것이다.

NAS는 IPCC의 보고서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IPCC의 ꡔ정책 입안자들을 위한 개요ꡕ(Summary for Policy Makers)가 근원적인 과학적 발견들을 왜곡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부 대표자들과 주요 저술가들간의 만남 이후에도 과학적인 주제 내에서는 중요하다고 여겨질 만한 어떠한 변형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진 사소한 변화들 역시도 당시 모임에 참여한 주요 저술가들의 동의로써 문서화되고 결론지어졌다는 것이다. IPCC의 과정이 정치적으로 매수되었다는 모든 주장은 따라서 잘못된 것이다.
기후 변화 과학에 대한 NAS의 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과학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끔 보이는 것 이외의 어떤 대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래서 6월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다른 온실 가스와 더불어 이산화탄소의 배출로부터 발생하는 현저한 지구 온난화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그리고 “국립과학협회는 (온도의) 증가가 인간의 활동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는 기후 변화와 그 효과에 관한 특별한 계획들, 또한 대기 중에 온실 가스의 형성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술적 전망들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있음을 계속하여 지적했다. 그는 교토 의정서 자체가 두 가지 이유에서 결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1) 그것은 “노동자의 해고와 소비자 물가 증가 등 미국에 부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주범중의 하나인 중국과 인도같은 개발 도상국들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온실 가스 배출의 의무적인 축소를 규정하고 있는 교토 의정서는 분명 미국 자본과 정부가 수용하려고 하는 것을 넘어서 있다. 기후 협약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자신의 관점에서 그러한 배출량, 특히 주요 온실 가스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미국 경제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단순히 너무 비싸다는 반대의 진정한 본질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럽이 교토 의정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미국은 1990년 수준 이하로 온실 가스(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에 왜 그렇게 부정적인가? 기후 협약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고유한 조건들을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 미국―기업들과 정부―적 특수성 때문인가?
여기서 1990년대 미국, 유럽 연합 및 일본에서의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부터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그림 1을 보라). 1993년 4월, 클린턴 대통령은 일련의 자발적인 조치들에 의존함으로써 2000년까지 온실 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으로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1990년대 동안 화석 연료의 연소로부터 발생한 미국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990년 1,355 MMTCE(million metric tons of carbon equivalent, 과불화탄소 배출량)에서 1999년 1,520 MMTCE로 12% 증가했다(화석 연료 사용으로부터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현재 전체 미국 온실 가스 배출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같은 시기 화석 연료 사용으로부터 배출된 일본의 이산화탄소는 269 MMTCE에서 307로 14% 상승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EU의 배출량은 1990년대에 904 MMTCE에서 913으로 단지 1% 증가에 그쳤다. 유럽 연합이 1990년 수준에 비해 아주 작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증가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로 독일(통일 이후)과 영국(북해에서의 천연 가스의 발견으로 인한 결과로서)에서의 고탄소 석탄 자원을 이용하지 않게 된 것과 관계가 있다. 이는 1990년대 초 이들 두 국가에서 탄소 배출량의 급격한 감소를 낳았지만 그 후에도 지속적인 감소 경향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반면에 대다수 EU 회원국들은 그 기간동안 화석 연료에 기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현저하게 증가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교토 협상에서 유럽 연합의 “거품 제안”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 연합 국가들은 한 국가 단위에서는 교토에서의 감소량을 지킬 수 없었으나 결국 모두는 EU의 거품 내에 포함되어 버렸다.
1990년 수준 이하로 유럽 연합이 배출량을 줄이는 데 실패한 것(또한 대부분의 회원국들의 배출량 증가한 것)과 동시에 미국과 일본에서의 탄소 배출량의 극적인 증가는 중요한 점을 말하고 있다. 교토 의정서에서 1990년은 “원년”(year zero)의 의미를 가진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2012년까지 원년 수준으로 배출량을 되돌리는 것은―특히 미국에서―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2000년 7월에 미국 기후 협상가 대표인 프랭크 로이(Frank Loy)는, 교토에서의 목표를 만족시키려면 미국은 2010년까지 30%만큼 배출량을 줄여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일본과 캐나다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현재 미국은 매년 1인의 화석 연료 사용으로부터 5.6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독일은 그 절반 수준을 배출하고 있으며, 원자력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프랑스는 1인당 1.8톤을 방출한다. 주도적인 전체 자본주의 국가들(G8의 일원으로서 러시아가 참여하기 전까지는 G7으로 불렸음)은 매년 1인당 3.8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이와 비교해서 세계의 나머지 전체는 단지 매년 0.7톤의 이산화탄소만을 배출하고 있다. 선진 산업국가들과 나머지 국가사이에 이렇게 큰 배출량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명확하다. 세계 은행에 따르면, 선진 산업경제는 개발도상 경제와 비교해서 1인당 4배정도의 에너지를 더 사용한다(World Development Report, 1992, p.115).
탄소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경제적 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화석 연료에 대한 수요 역시 따라서 증가한다. 에너지 효율성의 단순한 증대―대체 에너지 형태의 실제적 개발에 반대되는 것으로서―만으로는 수요 증가에 직면한 이러한 과정을 제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증대된 효율이 단위 에너지 비용을 감소시키는 한에서 그것은 수요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화석 연료 사용에 대한 높은 수요는 또한 이로부터 획득되는 고이윤에 의해 고무되며, 한편으로는 자본으로 하여금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경제(지금 깊숙이 안착된 현실)를 구조화하도록 유도한다. 교토 의정서에서의 철수와 함께 캘리포니아 에너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석탄을 원료로 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미국 부시 행정부는 단 6개월만에 석탄 가격을 두 배로 올리는데 역할을 수행했다(New York Times Magazine, 2001.7.22, pp.31~34).
석탄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선진 자본주의에 관계된 정도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꾸준히 증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클린턴 행정부가 실패했다는 사실, 1990년대의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계속하여 배출량이 증가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럽 연합이 대다수 자신의 회원국들로 하여금 그들의 온실 가스 배출량을 막도록 하는데 무능했다는 사실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예정된 에너지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1,300개의 추가적인 발전소에 대한 행정부의 요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계획된 부시 행정부의 ꡔ국가 에너지 정책: 국가 정책 발전 집단의 보고서ꡕ(National Energy Policy: Report of the National Policy Development Group)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시 행정부에 의해 옹호된 이 국가 에너지 정책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아주 짧은 언급(긴 보고의 중간에 6개 단락)만을 하고 있다.
무공해 에너지 자원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증가시키는 반면에 화석 연료에 대한 보조금은 단계적으로 삭감하겠다는, G8에 의해 위촉된 국제적인 제안을 7월 부시 행정부는 반대하였다. 미국 정부는 그러한 조치들은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게 될 것이며, 시장이야말로 에너지 자원의 적절한 혼합을 더욱 잘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1년 7월, 유럽 연합은 2002년 7월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석탄에 대한 보조금의 단계적 삭감을 실시하지 않고 다음 10년 간 이러한 보조금을 계속 시행하기로 결정했다(The Economist, 2001.6.28).
교토 의정서 실패의 배후에 있는 커다란 아이러니는 그것이 그 원래의 개념에서조차도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저지하는데 있어 단지 매우 온건하면서도 상징적인 최초의 조치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1990년 수준보다 약 5% 이하로 온실 가스 배출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그것은 지구 온난화를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세계 기후 과학자들이 반복하여 주장해왔던 배출량의 대량 축소를 결여하고 있다. ꡔ런던 타임즈ꡕ(London Times, 2001.7.9)에 의하면, “그 협정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조차도 그것이 지구 온난화를 억제하는데 충분하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몇몇 모델은 2100년까지의 그것의 효과가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것보다 겨우 0.15◦C의 온도가 떨어지는 것에 그칠 뿐이라고 제시한다. 미국 해양대기부의 제리 맬먼(Jerry Mahlman)은, 기후에서의 뚜렷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60 내지 70퍼센트의 온실 가스 배출량의 감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유사한 30개의 또 다른 협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교토 의정서와 같은 온건한 배출량 감소조차도 반대하기로 결정하고서, 워싱턴은 일부 주요 석유 회사들과 함께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의 하나로서 탄소 제거에 관한 색다른 연구에 착수했는데 이는 배출량의 증가는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겨지고 있다. 2001년 6월에 부시는,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이 배출량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는, 특히 탄소의 포획 및 저장, 그리고 제거 기술에 대한 커다란 전망을 제공하리라 믿는다”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에너지국(department of Energy)을 통해 수천만 달러의 돈을 그러한 기술의 연구에 쏟아 붓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다음을 목표로 한다. (1)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서 뽑아낸다. (2) 이산화탄소를 그것이 발생한 광산이나 유전, 혹은 바다 속으로 재주입한다.
지구 온난화에 관한 주요한 경제적 분석가인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그의 공저가인 조셉 보이어(Joseph Boyer)는 Warming the World(2000)에서 예언적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교토 의정서는 경제학 혹은 환경 정책에서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드하우스와 보이어는 지구적 수준의 배출량 감소와 연관된 사적 산업에 대한 엄청난 비용이 너무 분별 없이 채택되어서는 안되며 대신 그들이 가망성 있는 “무비용” 기술이라 부르는 심화된 연구를 지지해야 함을 주장한다. “지구공학(geoengineering)은 햇빛의 후방산란을 증가시키기 위해 대기 중으로 소립자를 주입하는 것과 바다에의 탄소의 흡수를 촉진시키는 것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pp.126~27)
탄소의 포획과 제거 기술에 대한 모든 희망은 탄소에 기반한 경제를 이전과 같이 지속시키면서 배출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기술들 중에 현재 조금이라도 실용적인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ꡔ디스커버ꡕ지(Discover, 2001년 8월)에서 논의된, 현재 정부와 기업의 자금을 받고 있는 연구 계획들은 “이산화탄소와 반응하는 많은 화학물들 중의 하나로 덮혀 있으며, 지나갈 때마다 공기로부터 이산화탄소를 뽑아낼 수 있는 거대한 흡수성을 가진 조직(strip)”의 체계 일부분에 관한 연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냉각되고 기압이 일정하게 유지된 이산화탄소를 바다 깊숙이 밀어넣을 길이 2마일의 파이프를 끌게 될 선박과 연결되어진다. 달리 말하면, 규모면에서나 완전한 어리석음의 면에서나 스타워즈 방위체계를 위축시키게 될 작동 규모를 포함하는 제안들이 현재 고려중인 것이다. 그것들 모두는 나름대로 커다란 환경적 고려를 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가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위와 같은 심각한 고려는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배출량 감소보다는 폐기물을 단순히 다른 길로 수송하게 하는 공상 과학적 기술 해결책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제거 기술을 통해 제안되고 있는 해결책은 과잉된 이산화탄소를 다른 곳, 예를 들어 공기대신에 바다로 버리는 것이다. 바다를 인류 경제로부터 발생한 폐기물의 최후의 종착지로서 이용하는 것은 1950년대와 60년대의 레이첼 카슨에게도 이미 염려스러운 일이었다.
어떠한 합리적인 관점으로부터도, 교토 의정서에 의해 계획된 것보다 더욱 공세적인 수준으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지구 온난화를 다루는 데 있어 필요하다. IPCC의 제1활동그룹은 자신의 2001년 보고서에서 “지난 50년 동안 관찰된 대부분의 온난화는 인간 활동에 기인한다는 새롭고도 강력한 증거가 존재한다”라고 결론지었다. 금세기에 1.0에서 3.5◦C(1.8~6.3◦F)로 온도가 증가할 것이라는 초기 IPCC의 추정 대신에 그들은 이제 1.5에서 6.0◦C로의(2.7~10.8◦F) 온도 증가를 추정하고 있다. 이런 증가가 실현된다면 지구의 환경은 급격하게 변해서 격변하는 결과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타날 것이다. 이로써 분명 건조지역에서의 사막화 및 폭우, 그리고 다른 지역들에서의 홍수의 위험이 증가할 것인데 이는 열대지방 및 결국 온난지역에서도 농작물에 대한 심각한 피해를 가져올 것이다. 한편 (빙하의 용해 때문에 발생하는) 해수면의 상승은 섬들과 삼각주 지역을 물에 잠기게 할 것이고, 결국 생태계에도 피해를 주게 되어 종과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을 초래하게 되며 무엇보다도 인류 건강에의 위협이 증가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가장 착취받는 지역과 그곳의 주민들이 가장 공격받게 쉽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대기 중에 있는 온실 가스의 형성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구상의 생물들에게 아무리 절박한 문제라도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교토 의정서가 크게 실패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자체가 경로를 되돌릴 수는 없음을, 즉 결국은(또한 많은 측면에서 짧은 기간 안에) 환경적 재앙을 초래하게 될 산업과 축적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제시한다. 자본축적의 일확천금의(get-rich-quick) 명령에 반대할 때에야 생물권은 간신히 균형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화석 연료의 소비와, 자동차 산업 복합체에 맞게 조정된 발전의 형태로부터 획득된 이윤의 강조는, 지구 온난화가 단지 수세대안에 지구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연관된 장기적인 문제들을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이윤의 신 vs 환경
레이첼 카슨은 1963년에, “근대 세계는 속도와 양의 신, 그리고 빠르고 쉬운 이윤의 신을 숭배하며, 따라서 이러한 우상숭배로부터 끔찍한 악마가 탄생한다”라고 이야기했다. 빠른 경제적 보상을 위해서 유사 공장 형태로 자연을 조직하는 것의 배후에는 최악의 생태계적 문제들이 놓여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Lost Woods, pp.194~95). 하지만 그러한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결정적인 발언을 가지고 있는 생태학보다는 경제학(좁게 정의된)으로 이전과 같은 대규모의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거대 이윤 취득자들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 현대 문명의 생태적이고 사회의 위기의 깊이와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생산의 급진적 재조직화에 대한 필요는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들에 의해 끊임없이 무시되어 왔는데, 이들은 의미있는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카산드라”(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의 예언자)로서, 즉 우리 주위에 있는 생활의 질의 실제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는 이들로써 묘사한다. 산업 역시도 그러한 자기 만족적인 태도를 조성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책임감있고 환경적으로는 온화한 존재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선전하고 있다. 거의 기업의 영향 하에 있는 과학도 종종 자신의 규칙을 등지고 방어할 수 없는 것을―예를 들어 위험 경영 분석(risk management analysis)을 통해―방어하곤 한다.
레이첼 카슨이 1962년 자신의 여성국립출판클럽에서의 연설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던 것은, 과학 자체에까지 파고들어가는 지배이데올로기 내에서의 그러한 왜곡에 대한 도전이었다.

산업은 어렵거나 불편한 진실은 뒤에 두고 단지 해가 되지 않는 소량만을 통과시키는, 사실들이 걸러지는 하나의 체가 되고 있는가? 나는 많은 지각있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조직들이 산업의 최전선으로 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혼란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한 명 이상의 과학자가 리셍코 학설(lysendoism)의 정신이 오늘날 미국에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이 철학은 러시아에서의 유전 과학을 곡해하고 파괴하였으며 심지어 농업 과학에까지 침윤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의 노선에 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기 이익에 순응하고 이윤과 생산의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본적 진실에 대한 재단과 걸러냄이 행해지고 있다(Lost Woods, p.210).

“이윤과 생산의 신들”에게 충실히 봉사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하고, 우리의 관심 수준을 낮추며, 현재 환경의 전반적 퇴조를 야기한 바로 그 경제 체계 자체를 그것이 일으킨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바라보게끔 권유하고 있다. 따라서 생태학과 자본주의 사이의 갈등에 관해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현재 일종의 지적 저항, 즉 현존하는 생산양식 및 그것의 환경 파괴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준엄한 결단에 직면해 있다. “이윤의 신”을 우리의 생태문제의 해결책으로 부여잡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질서 건설의 요소로서 자연과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아니면 자연적 결과, 곧 인간 존재 및 우리와 관련맺고 있는 무수한 다른 종들에 대해 되돌릴 수 없으며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급속히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위기에 직면하느냐? 한/노/정/연



번역: 성준규(연구기획실원)
기․획․번․역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생태학*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
* 이 글은 Monthly Review(vol.53, no.5, October 2001)에 실린 “Ecology against Capitalism”의 번역입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monthlyreview.org/oct2001.htm





“우리의 환경오염”에 관한 1963년의 대담에서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생태학 이론의 완전한 함의를 끌어내오기를 거부하는 20세기 후반의 사회와 다윈의 진화론에 저항하는 빅토리안 시대간의 밀접한 비교를 하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볼 때 나는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여러분들이 찰스 다윈이 자신의 진화론을 발표한 이후 뒤따랐던 소동을 상기하길 바란다. 전-생명체로부터의 인간의 발생이라는 개념은 강렬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거부되었으며 또한 그 거부는 단지 대중들뿐만이 아니라 과학에서 다윈의 동료들로부터도 나온 것이다. 많은 해가 지나서야 종의 기원에서 설명된 개념들이 확고하게 안착되었다. 오늘날, 교육받은 이들 중 진화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명백한 결론을 부인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과 진화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수천의 다른 종들의 생활을 통제하는 바로 그 환경적 효과에 의해 영향받는다(Lost Woods: The Discovered Writing of Rachel Carson, pp.244~45).
인간을 조건짓는 생태학적인 기초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 이렇듯 대중적으로 실패하게 되는 이유는 무수히 많다.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지배”라는 개념, 즉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리고 인간의 종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서구 문명 내 깊은 문화적 결점으로서 이를 보아왔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의존을 인정하기 거부하는가에 대한 대답의 대부분은 확실히 자본 형태의 부의 축적을 사회의 지상 목표로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의 팽창 논리와 관계가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전통적인 경제학은 자기 자신을 희소물품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과학으로서 정의한다. 그러나 관계된 물품은 시장 상품으로 좁게 표현된다. 생태적인 결핍과 되돌릴 수 없는 생태적인 퇴보를 일으키는데 있어 경제학의 영향은―그것이 방어하고자 하는 체제와 더불어―소위 “외부적” 혹은 “사회적” 비용을 거의 고려하고 있지 않은 용인된 경제학의 범위 외부에 존재한다.
자본주의와 그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생태 문제를 심각하게 처리해야 할 것으로보다는 숨겨야 할 어떤 것으로 다루어왔다. 경제성장 이론가인 로버트 솔로우(Robert Solow)는, 유명한 “성장의 한계” 논쟁이 한창일 때 1974년 5월 ꡔ미국경제평론ꡕ(American Economic Review)에서 이렇게 썼다. “만약 자연 자원들을 다른 요소들로 대체하는 것이 매우 쉽다면, 그때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있을 수 없다. 세계는 자연 자원들 없이 효과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자원고갈은 재앙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이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된 솔로우는 이에 대해 가정적으로 말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대체성이 현실로 되었다거나 또는 자연 자원이 완전히 없어도 된다는 식으로까지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현재의 대체성 정도가 아주 높기 때문에 생태의 최후 심판의 날을 예언하는 자들의 모든 걱정은 무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가정들을 따랐다. 환경 비용을 고려하지 못하게 되는 가격체계 내의 어떠한 사소한 결점이라도 시장 인센티브의 사용을 통해서 치료될 수 있으며, 정부는 그러한 인센티브를 창조하는 데 있어 극히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하게 된다.
MIT 전문가 그룹이 1970년대 초반 성장의 한계라는 문제를 최초로 제기했을 당시 솔로우와 같은 전통적인 경제학자를 격분시켰던 것은 그 주장이 지수(exponential) 성장 경향을 제시하면서 경제학자들 자신도 자주 사용하는 수학적인 컴퓨터 예측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 경제 팽창의 마술보다는 오히려 유한한 환경에 대한 수요에 있어서의 지수의 증가에 초점이 놓여졌다. 성장의 한계를 예측하는 이론가들이 비록 문제점들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한한 환경 내에서의 무한한 팽창이라는 말이 명사모순이라는 자명한 이치―자본주의와 그 경제학자들에 의해 간단하게 무시되어 온―를 강조했다. 이는 따라서 지구적 자본주의와 지구적 환경간에 잠재된 파멸적인 대항관계를 만들어 놓았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엇보다 이윤의 증가에 따라 작동하고 따라서 사실상 어떤 댓가를 치르고서라도―대다수 세계 인구의 착취와 고통을 포함하여. 이러한 돌진은 일반적으로 에너지 및 자원의 급속한 흡수와 더욱더 많은 폐기물을 환경 속으로 쏟아버림을 의미한다―결국은 환경 파괴를 심화시키게 될 경제적인 성장에 따라 작동한다.
끝없는 팽창에 대한 자본주의의 강조와 마찬가지로 투자를 결정함에 있어 단기간의 시간 범위 역시 중요한 것이다. 어떠한 투자 전망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자본 소유자들은 예측가능한 기간(보통 매우 짧다) 내로 자신의 투자를 제한하면서도 이윤은 그 이후에도 영원히 지속되길 기대하고 있다. 광산이나 유전, 그리고 여타의 자연 자원에 대한 투자자들이 일반적으로 보다 긴 기간의 투자전망을 채택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영역들에서의 지배적인 동기는 분명히 최종 생산물의 제조를 위한 원료의 공급을 보장하는 것과 오랜 기간 동안 예외적으로 높은 수익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조차도 시간의 범위는 10년에서 15년을 거의 초과하지 못한다. 생물계를 보호하는데 필요한 기간인 50년에서 100년(또는 더 긴 시간)과는 많이 떨어진 요구인 것이다.
인간 사회를 가장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그러한 환경적 조건들과 관련해서, 경제 발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 즉 수자원과 그것의 분배, 깨끗한 물의 이용가능성,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보급과 보존, 폐기물 처리, 인구에 대한 영향, 그리고 산업 계획을 위해 선택된 특수한 지역과 연관된 환경을 포함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세대간의 환경적 동등성이라는, 지속성의 문제를 대표한다. 한편 이것들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 투자를 보상받고자 할 뿐 아니라 이윤을 보장하려는 비박애적인 자본의 단기간의 시간 범위 속으로 통합될 수도 없다.
대규모 투자자들은 자본 팽창의 요소이자 합병 및 이익의 촉진자로서 증권 시장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주식회사는 그들 주주의 주식 가치를 유지하고 정기적인 배당금을 제공하게 되어 있다. 최고 기업 간부들의 재산의 상당량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시장가격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이 받는 고액의 상여금은 이윤의 증가뿐 아니라 종종 기업의 주식가격 상승에 의해서도 영향받는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는 유동적인 증권시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증권시장에 대한 평가의 관점은 최근 이익의 획득 혹은 손실의 비율이나 다음 해의 이윤에 대한 전망에 근거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신경제에 투자되는 떠들썩하게 치켜세워진 자금의 흐름조차도 그것이 기업의 손실들을 일시적으로 간과할 수 있게 해줄 수는 있으나 이미 그 자체에 당연한 응보를 가지고 있다. 증권시장이나 위험부담 자본(venture capital)을 통해 고소득을 기대하는 투기적인 투자자들은 몇 해 동안은 인내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내심도 기업들이 계속해서 손실을 기록한다면 재빨리 사라져버린다. 자기 자신의 잉여자금을 투자하는 외에도, 주식회사는 장기채권을 통하여 자금을 빌린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이자를 갚고 미래에 채권을 상환하기 위한 감채기금(sinking fund)을 챙겨놓기 위해 충분한 돈을 벌어야만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투자 결정에 있어 단기간의 시간 범위의 풍토(endemic)가 전체적인 환경적 영향을 결정하는데 있어 결정적 요인으로 된다. 가장 유해한 몇몇 오염물질의 방출에 대한 통제는 인간 생활에 긍정적이고 거의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환경의 실제적 보호는 다가올 세대들의 필요라는 관점을 요구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한 다수의 장기적인 환경 정책은 제3세계와 관련이 있다. 이곳은 부유국에 기반한 자본이 자신의 투자 수익을 최대한 신속하게 회수하고자 하는 곳인데, 1~2년 내에 최초의 투자액만큼을 요구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때 투자를 결정하는 시간 범위(time horizon)는 사회와 미래 세대를 위해 이윤을 기꺼이 포기하려는 “착한” 자본가 혹은 그렇지 못한 “나쁜” 자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단순한 문제이다. 전형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종류의 산업들조차도 조만간 투자자와 채권단, 그리고 은행의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한다.
자본주의의 환경에 대한 관계에서의 앞서 말한 결점들은 우리가 보통 “환경 위기”라 부르는 것의 모든 영역에서 오늘날 명확하게 존재하며 이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한다. 지구 온난화, 오존층의 파괴, 열대 삼림의 파괴, 산호초의 소멸, 어류 남획, 종의 멸종,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 환경과 음식에서의 유독성 증가, 사막화, 물공급의 감소, 맑은 물의 부족과 방사능 오염―단지 일부만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그 목록은 아주 길며 계속해서 급속하게 길어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공간적 규모도 증가하고 있다.
생태학과 자본주의사이의 갈등이 특정한 생태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수준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많은 이들에 의해 가장 긴급한 지구적 생태 문제라고 간주되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 가스들”이 대기 내에 열을 가두면서 방출될 때 발생하는 “온실 효과”와 연관되어 있는 지구 온난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현재의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제어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금세기 내에 세계적인 규모의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지금 과학적으로 동의되고 있다. 주로 화석 연료의 방출과 관계있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달성된 것은 그러나 거의 없는 실정이다.
무엇이 필요한 행동을 가로막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자본 축적의 과정이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 주요한 국제 외교적 노력―교토 의정서―을 방해하는 특수한 방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토 의정서의 실패
온실 가스 배출을 통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이 1990년대 초에 시작됐다. 기후협약을 만들어내기 위한 이러한 초기의 시도가 1992에 합의된 UN기후변화협약(UNFCCC)을 탄생시켰다. UN기후변화협약은 각 국가의 자발적인 배출 목표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체제 하에서 배출량을 줄이는데 국가들이 실패함에 따라 한층 심화된 협상이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해 모든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2008년에서 2012년까지 1990년 수준의 5.2% 이하로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일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확정한 1997년의 교토 의정서가 탄생하였다. 이 협약 하에서 유럽 연합은 8%, 미국은 7%, 그리고 일본은 각각 6%의 온실 가스 배출을 줄이게끔 되어있다. 기후 협상에 관한 이전의 협정(베를린 협약으로 알려진)에 따라 중국을 포함한 개발 도상 국가들은, 비록 그 협정과 관계되어 있지만 배출 감소에 있어 이러한 초기 단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교토 의정서의 이행여부에 관한 뒤이은 협상들은 끈질기게 문제되어 온 두 가지 점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배출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로부터 그것을 구매함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방출 감소에 동의하게 하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와, 삼림과 농지에 대해 배출 특권을 제공하는 “탄소 흡수원”(carbon sinks)의 허용. 유럽 연합은 두 안을 배출 감소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제로 실패한 것을 위장하기 위한 얄팍한 시도로 보고 이에 대해 저항했다. 미국, 일본,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는 이러한 조치를 지지했다. 양측이 이러한 분쟁에 대해 굴복하려 하지 않음에 따라 2000년 9월, 헤이그에서 협상은 결렬됐다.
2001년 3월, 이러한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며 주요 산업 국가들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부시 행정부는 교토 의정서가 치명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은 기후 협약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탈퇴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교토 의정서 비준을 위한 방법을 준비하기 위한 협상이 2001년 6월 본에서 열렸다. 그 협약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지구 온실 가스 배출의 55%를 차지하고 있는 국가들에 의해 그것이 비준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만일 미국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일본,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비준이 결과적으로 필수적이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아래서 유럽 연합은 미국이 이전에 헤이그에서 진전시킨 바로 그 위치를 채택하면서 차례차례 협상에서 양보하기를 강요받고 있다.
미국의 탈퇴에도 불구하고 교토 의정서는 본에서 아직 살아있지만, 그것은 배출 감소 목표를 밑돌며 허점으로 가득 차 있다. 농지와 삼림은 탄소 흡수원으로 취급되었으며, 배출 감소에 있어 도움이 되었다. 나무들이 자라는 것이 관찰된다면 사실상 그 국가는 배출을 줄인 것으로 계산되어야 한다. 1990년 이래로 온실 가스 배출을 실질적으로 증가시켜온 일본,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국가들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와 자국의 산업 구조 덕택으로 1990년부터 극적인 배출 감소를 경험하고 있는 러시아와 같은 국가로부터 배출권을 구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오염거래권(tradable pollution permits)은 허가되어야 한다. 배출 감소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유일한 처벌은 다음 번에는 그 국가의 목표량을 일정 비율만큼 높이는 것이다. 감소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국가들이 기후에 피해를 준데 대해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제안은 거부되었다. 일본에 대한 대폭적인 양보 속에서, 원래 협약이 가진 “법적 구속력이 있는” 특징은 그 협약이 “정치적으로 구속력이 있다”는 말을 선호하면서 거부된 것이다. 교토 의정서와 원래의 UN기후변화협약 사이를 구별짓던 바로 그 사실―“법적 구속력을 가진” 배출량 감소의 확립―은 따라서 기각되었다.
세계 온실 가스 배출량의 1/4을 차지하는 미국이 기후 협약의 당사자로 남아있기를 거부한 것이야말로 본에서 개최된 협약의 가장 눈에 띄는 실패이다. 2001년 6월 10일 부시 대통령은, 3월에 그의 행정부에 의해 채택된 교토 의정서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되풀이했다. 기후 협약에 대한 미국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모든 활동이 미국 자동차 산업 복합체의 반대에 직면하여 정지하게 되었던(이는 미국 의회 내에서 그 협약의 비준을 아무도 지지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전 클린턴 행정부의 입장을 부시는 이로써 더욱 명확하게 만들었다.
2001년 6월에 기후협약에 대해 부시가 또다시 반대를 한 것은 그가 유명한 국립과학협회(National Academy of Science)로부터의 보고서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행정부는 이전에 이미 기후 변화에 대한 심도 깊은 조사가 필요함을 주장하였고 그래서 국립 과학 협회(NAS)로 하여금 기후 과학의 현재 상태(특히 기후 변동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의 조사 결과)를 연구하고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지구 온난화를 저지하기 위한 국제 협약이 공인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한 몇몇 과학적 근거들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부시 행정부는 NAS에게 이렇게 썼다. “행정부는 기후 변화에 관한 미국의 정책을 재조사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가장 큰 확실성들과 불확실성들이 존재하고 있는 기후 변화의 과학에서의 영역들을 확인하는데 있어 협회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우리는 또한 IPCC의 보고서와 IPCC의 요약서 간에 실재적인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원한다. 우리는 응답에 대해 가능한 한 빨리 평가할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따라서, 자신의 보고서를 세계 최고의 기후 과학자들이 작성한 IPCC가 근원적인 과학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닌 다소간 정치적으로 결정된 결론들을 만들어냈는지, 혹은 더욱 나쁘게도, 지구기후연합(교토 의정서에 반대하는 기업들에 대한 주요한 로비 조직)이 주장해왔듯이 그 과학이 정치적으로 매수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줄 것을 NAS에게 요구하였다.
부시의 2001년 6월 11일의 연설 몇 일전에 NAS는 자신의 보고서, 「기후 변화 과학: 몇 가지 핵심 문제들에 대한 분석」(“Climate Change Science: An Analysis of Some Key Questions”)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는데, 이 보고서는, 인간 활동의 결과로서의 지구 온난화는 하나의 현실이자 생물권의 안정성에 대한,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지구상의 생명체에 대한 증가하는 위협이라는, IPCC가 이미 여러 보고서에서 확증한 사실을 강하게 재확인하였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NAS는 의심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는데, 바로 그 첫 단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온실 가스는 지표면 대기의 온도와 바다 밑의 해양 온도를 상승시키면서, 인간 활동의 결과로서 대기에 축적되고 있다. 온도는 실제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수 십년간에 걸쳐 관찰된 변화들은 대부분 인간 활동에 기인하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몇몇 중요한 부분이 또한 자연적 변화성(variability)을 반영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인간에 기인한 온난화 및 이와 관련된 해수면 상승은 21세기 내내 계속될 예정이다. 제2의 효과는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기본적인 물리적 추론에 의해 제시된다. 이는 강수량의 증가와 반건조지역의 건조지역으로의 전환을 포함한다. 이러한 변화들의 효과는 온난화의 규모와 그것이 발생하는 비율에 특히 의존하게 될 것이다.

NAS는 IPCC의 보고서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IPCC의 ꡔ정책 입안자들을 위한 개요ꡕ(Summary for Policy Makers)가 근원적인 과학적 발견들을 왜곡시키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정부 대표자들과 주요 저술가들간의 만남 이후에도 과학적인 주제 내에서는 중요하다고 여겨질 만한 어떠한 변형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진 사소한 변화들 역시도 당시 모임에 참여한 주요 저술가들의 동의로써 문서화되고 결론지어졌다는 것이다. IPCC의 과정이 정치적으로 매수되었다는 모든 주장은 따라서 잘못된 것이다.
기후 변화 과학에 대한 NAS의 보고서는 부시 행정부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과학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끔 보이는 것 이외의 어떤 대안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래서 6월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다른 온실 가스와 더불어 이산화탄소의 배출로부터 발생하는 현저한 지구 온난화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그리고 “국립과학협회는 (온도의) 증가가 인간의 활동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한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그는 기후 변화와 그 효과에 관한 특별한 계획들, 또한 대기 중에 온실 가스의 형성을 감소시키기 위한 기술적 전망들에는 많은 불확실성이 있음을 계속하여 지적했다. 그는 교토 의정서 자체가 두 가지 이유에서 결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1) 그것은 “노동자의 해고와 소비자 물가 증가 등 미국에 부정적인 경제적 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지구 온난화의 가장 큰 주범중의 하나인 중국과 인도같은 개발 도상국들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
온실 가스 배출의 의무적인 축소를 규정하고 있는 교토 의정서는 분명 미국 자본과 정부가 수용하려고 하는 것을 넘어서 있다. 기후 협약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어떠한 과학적인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자신의 관점에서 그러한 배출량, 특히 주요 온실 가스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미국 경제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단순히 너무 비싸다는 반대의 진정한 본질을 인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럽이 교토 의정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미국은 1990년 수준 이하로 온실 가스(특히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에 왜 그렇게 부정적인가? 기후 협약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고유한 조건들을 반영하는 것이라기보다 미국―기업들과 정부―적 특수성 때문인가?
여기서 1990년대 미국, 유럽 연합 및 일본에서의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부터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그림 1을 보라). 1993년 4월, 클린턴 대통령은 일련의 자발적인 조치들에 의존함으로써 2000년까지 온실 가스 배출량을 1990년 수준으로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1990년대 동안 화석 연료의 연소로부터 발생한 미국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990년 1,355 MMTCE(million metric tons of carbon equivalent, 과불화탄소 배출량)에서 1999년 1,520 MMTCE로 12% 증가했다(화석 연료 사용으로부터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현재 전체 미국 온실 가스 배출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같은 시기 화석 연료 사용으로부터 배출된 일본의 이산화탄소는 269 MMTCE에서 307로 14% 상승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EU의 배출량은 1990년대에 904 MMTCE에서 913으로 단지 1% 증가에 그쳤다. 유럽 연합이 1990년 수준에 비해 아주 작은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증가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주로 독일(통일 이후)과 영국(북해에서의 천연 가스의 발견으로 인한 결과로서)에서의 고탄소 석탄 자원을 이용하지 않게 된 것과 관계가 있다. 이는 1990년대 초 이들 두 국가에서 탄소 배출량의 급격한 감소를 낳았지만 그 후에도 지속적인 감소 경향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반면에 대다수 EU 회원국들은 그 기간동안 화석 연료에 기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현저하게 증가시켰다. 이러한 상황이 교토 협상에서 유럽 연합의 “거품 제안”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 연합 국가들은 한 국가 단위에서는 교토에서의 감소량을 지킬 수 없었으나 결국 모두는 EU의 거품 내에 포함되어 버렸다.
1990년 수준 이하로 유럽 연합이 배출량을 줄이는 데 실패한 것(또한 대부분의 회원국들의 배출량 증가한 것)과 동시에 미국과 일본에서의 탄소 배출량의 극적인 증가는 중요한 점을 말하고 있다. 교토 의정서에서 1990년은 “원년”(year zero)의 의미를 가진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2012년까지 원년 수준으로 배출량을 되돌리는 것은―특히 미국에서―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2000년 7월에 미국 기후 협상가 대표인 프랭크 로이(Frank Loy)는, 교토에서의 목표를 만족시키려면 미국은 2010년까지 30%만큼 배출량을 줄여야만 한다고 단언했다. 일본과 캐나다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현재 미국은 매년 1인의 화석 연료 사용으로부터 5.6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독일은 그 절반 수준을 배출하고 있으며, 원자력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프랑스는 1인당 1.8톤을 방출한다. 주도적인 전체 자본주의 국가들(G8의 일원으로서 러시아가 참여하기 전까지는 G7으로 불렸음)은 매년 1인당 3.8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이와 비교해서 세계의 나머지 전체는 단지 매년 0.7톤의 이산화탄소만을 배출하고 있다. 선진 산업국가들과 나머지 국가사이에 이렇게 큰 배출량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명확하다. 세계 은행에 따르면, 선진 산업경제는 개발도상 경제와 비교해서 1인당 4배정도의 에너지를 더 사용한다(World Development Report, 1992, p.115).
탄소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경제적 성장이 일어남에 따라 화석 연료에 대한 수요 역시 따라서 증가한다. 에너지 효율성의 단순한 증대―대체 에너지 형태의 실제적 개발에 반대되는 것으로서―만으로는 수요 증가에 직면한 이러한 과정을 제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가 없다. 증대된 효율이 단위 에너지 비용을 감소시키는 한에서 그것은 수요를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화석 연료 사용에 대한 높은 수요는 또한 이로부터 획득되는 고이윤에 의해 고무되며, 한편으로는 자본으로 하여금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경제(지금 깊숙이 안착된 현실)를 구조화하도록 유도한다. 교토 의정서에서의 철수와 함께 캘리포니아 에너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석탄을 원료로 한 발전소 건설을 추진함으로써, 미국 부시 행정부는 단 6개월만에 석탄 가격을 두 배로 올리는데 역할을 수행했다(New York Times Magazine, 2001.7.22, pp.31~34).
석탄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선진 자본주의에 관계된 정도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꾸준히 증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클린턴 행정부가 실패했다는 사실, 1990년대의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계속하여 배출량이 증가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럽 연합이 대다수 자신의 회원국들로 하여금 그들의 온실 가스 배출량을 막도록 하는데 무능했다는 사실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예정된 에너지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1,300개의 추가적인 발전소에 대한 행정부의 요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계획된 부시 행정부의 ꡔ국가 에너지 정책: 국가 정책 발전 집단의 보고서ꡕ(National Energy Policy: Report of the National Policy Development Group)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부시 행정부에 의해 옹호된 이 국가 에너지 정책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아주 짧은 언급(긴 보고의 중간에 6개 단락)만을 하고 있다.
무공해 에너지 자원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증가시키는 반면에 화석 연료에 대한 보조금은 단계적으로 삭감하겠다는, G8에 의해 위촉된 국제적인 제안을 7월 부시 행정부는 반대하였다. 미국 정부는 그러한 조치들은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방해하게 될 것이며, 시장이야말로 에너지 자원의 적절한 혼합을 더욱 잘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1년 7월, 유럽 연합은 2002년 7월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석탄에 대한 보조금의 단계적 삭감을 실시하지 않고 다음 10년 간 이러한 보조금을 계속 시행하기로 결정했다(The Economist, 2001.6.28).
교토 의정서 실패의 배후에 있는 커다란 아이러니는 그것이 그 원래의 개념에서조차도 지구 온난화 경향을 저지하는데 있어 단지 매우 온건하면서도 상징적인 최초의 조치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1990년 수준보다 약 5% 이하로 온실 가스 배출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그것은 지구 온난화를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세계 기후 과학자들이 반복하여 주장해왔던 배출량의 대량 축소를 결여하고 있다. ꡔ런던 타임즈ꡕ(London Times, 2001.7.9)에 의하면, “그 협정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조차도 그것이 지구 온난화를 억제하는데 충분하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몇몇 모델은 2100년까지의 그것의 효과가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것보다 겨우 0.15◦C의 온도가 떨어지는 것에 그칠 뿐이라고 제시한다. 미국 해양대기부의 제리 맬먼(Jerry Mahlman)은, 기후에서의 뚜렷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60 내지 70퍼센트의 온실 가스 배출량의 감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유사한 30개의 또 다른 협정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교토 의정서와 같은 온건한 배출량 감소조차도 반대하기로 결정하고서, 워싱턴은 일부 주요 석유 회사들과 함께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해결책의 하나로서 탄소 제거에 관한 색다른 연구에 착수했는데 이는 배출량의 증가는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겨지고 있다. 2001년 6월에 부시는, “우리 모두는 과학기술이 배출량을 대폭 감소시킬 수 있는, 특히 탄소의 포획 및 저장, 그리고 제거 기술에 대한 커다란 전망을 제공하리라 믿는다”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에너지국(department of Energy)을 통해 수천만 달러의 돈을 그러한 기술의 연구에 쏟아 붓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다음을 목표로 한다. (1)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에서 뽑아낸다. (2) 이산화탄소를 그것이 발생한 광산이나 유전, 혹은 바다 속으로 재주입한다.
지구 온난화에 관한 주요한 경제적 분석가인 윌리엄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그의 공저가인 조셉 보이어(Joseph Boyer)는 Warming the World(2000)에서 예언적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교토 의정서는 경제학 혹은 환경 정책에서 아무런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드하우스와 보이어는 지구적 수준의 배출량 감소와 연관된 사적 산업에 대한 엄청난 비용이 너무 분별 없이 채택되어서는 안되며 대신 그들이 가망성 있는 “무비용” 기술이라 부르는 심화된 연구를 지지해야 함을 주장한다. “지구공학(geoengineering)은 햇빛의 후방산란을 증가시키기 위해 대기 중으로 소립자를 주입하는 것과 바다에의 탄소의 흡수를 촉진시키는 것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pp.126~27)
탄소의 포획과 제거 기술에 대한 모든 희망은 탄소에 기반한 경제를 이전과 같이 지속시키면서 배출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기술들 중에 현재 조금이라도 실용적인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ꡔ디스커버ꡕ지(Discover, 2001년 8월)에서 논의된, 현재 정부와 기업의 자금을 받고 있는 연구 계획들은 “이산화탄소와 반응하는 많은 화학물들 중의 하나로 덮혀 있으며, 지나갈 때마다 공기로부터 이산화탄소를 뽑아낼 수 있는 거대한 흡수성을 가진 조직(strip)”의 체계 일부분에 관한 연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냉각되고 기압이 일정하게 유지된 이산화탄소를 바다 깊숙이 밀어넣을 길이 2마일의 파이프를 끌게 될 선박과 연결되어진다. 달리 말하면, 규모면에서나 완전한 어리석음의 면에서나 스타워즈 방위체계를 위축시키게 될 작동 규모를 포함하는 제안들이 현재 고려중인 것이다. 그것들 모두는 나름대로 커다란 환경적 고려를 하고 있다. 그러한 연구가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위와 같은 심각한 고려는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서, 지구 온난화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배출량 감소보다는 폐기물을 단순히 다른 길로 수송하게 하는 공상 과학적 기술 해결책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제거 기술을 통해 제안되고 있는 해결책은 과잉된 이산화탄소를 다른 곳, 예를 들어 공기대신에 바다로 버리는 것이다. 바다를 인류 경제로부터 발생한 폐기물의 최후의 종착지로서 이용하는 것은 1950년대와 60년대의 레이첼 카슨에게도 이미 염려스러운 일이었다.
어떠한 합리적인 관점으로부터도, 교토 의정서에 의해 계획된 것보다 더욱 공세적인 수준으로 온실 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지구 온난화를 다루는 데 있어 필요하다. IPCC의 제1활동그룹은 자신의 2001년 보고서에서 “지난 50년 동안 관찰된 대부분의 온난화는 인간 활동에 기인한다는 새롭고도 강력한 증거가 존재한다”라고 결론지었다. 금세기에 1.0에서 3.5◦C(1.8~6.3◦F)로 온도가 증가할 것이라는 초기 IPCC의 추정 대신에 그들은 이제 1.5에서 6.0◦C로의(2.7~10.8◦F) 온도 증가를 추정하고 있다. 이런 증가가 실현된다면 지구의 환경은 급격하게 변해서 격변하는 결과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나타날 것이다. 이로써 분명 건조지역에서의 사막화 및 폭우, 그리고 다른 지역들에서의 홍수의 위험이 증가할 것인데 이는 열대지방 및 결국 온난지역에서도 농작물에 대한 심각한 피해를 가져올 것이다. 한편 (빙하의 용해 때문에 발생하는) 해수면의 상승은 섬들과 삼각주 지역을 물에 잠기게 할 것이고, 결국 생태계에도 피해를 주게 되어 종과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을 초래하게 되며 무엇보다도 인류 건강에의 위협이 증가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가장 착취받는 지역과 그곳의 주민들이 가장 공격받게 쉽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대기 중에 있는 온실 가스의 형성이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구상의 생물들에게 아무리 절박한 문제라도 하더라도, 이러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교토 의정서가 크게 실패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자체가 경로를 되돌릴 수는 없음을, 즉 결국은(또한 많은 측면에서 짧은 기간 안에) 환경적 재앙을 초래하게 될 산업과 축적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제시한다. 자본축적의 일확천금의(get-rich-quick) 명령에 반대할 때에야 생물권은 간신히 균형상태를 유지하게 될 것이다. 화석 연료의 소비와, 자동차 산업 복합체에 맞게 조정된 발전의 형태로부터 획득된 이윤의 강조는, 지구 온난화가 단지 수세대안에 지구 자체를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연관된 장기적인 문제들을 대부분 무시하고 있다.

이윤의 신 vs 환경
레이첼 카슨은 1963년에, “근대 세계는 속도와 양의 신, 그리고 빠르고 쉬운 이윤의 신을 숭배하며, 따라서 이러한 우상숭배로부터 끔찍한 악마가 탄생한다”라고 이야기했다. 빠른 경제적 보상을 위해서 유사 공장 형태로 자연을 조직하는 것의 배후에는 최악의 생태계적 문제들이 놓여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Lost Woods, pp.194~95). 하지만 그러한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결정적인 발언을 가지고 있는 생태학보다는 경제학(좁게 정의된)으로 이전과 같은 대규모의 성장을 계속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거대 이윤 취득자들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 현대 문명의 생태적이고 사회의 위기의 깊이와 지속 가능한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생산의 급진적 재조직화에 대한 필요는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들에 의해 끊임없이 무시되어 왔는데, 이들은 의미있는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카산드라”(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의 예언자)로서, 즉 우리 주위에 있는 생활의 질의 실제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는 이들로써 묘사한다. 산업 역시도 그러한 자기 만족적인 태도를 조성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으로 책임감있고 환경적으로는 온화한 존재로써 자신을 끊임없이 선전하고 있다. 거의 기업의 영향 하에 있는 과학도 종종 자신의 규칙을 등지고 방어할 수 없는 것을―예를 들어 위험 경영 분석(risk management analysis)을 통해―방어하곤 한다.
레이첼 카슨이 1962년 자신의 여성국립출판클럽에서의 연설에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던 것은, 과학 자체에까지 파고들어가는 지배이데올로기 내에서의 그러한 왜곡에 대한 도전이었다.

산업은 어렵거나 불편한 진실은 뒤에 두고 단지 해가 되지 않는 소량만을 통과시키는, 사실들이 걸러지는 하나의 체가 되고 있는가? 나는 많은 지각있는 과학자들이 그들의 조직들이 산업의 최전선으로 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혼란해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한 명 이상의 과학자가 리셍코 학설(lysendoism)의 정신이 오늘날 미국에서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이 철학은 러시아에서의 유전 과학을 곡해하고 파괴하였으며 심지어 농업 과학에까지 침윤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의 노선에 적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기 이익에 순응하고 이윤과 생산의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기본적 진실에 대한 재단과 걸러냄이 행해지고 있다(Lost Woods, p.210).

“이윤과 생산의 신들”에게 충실히 봉사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하고, 우리의 관심 수준을 낮추며, 현재 환경의 전반적 퇴조를 야기한 바로 그 경제 체계 자체를 그것이 일으킨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바라보게끔 권유하고 있다. 따라서 생태학과 자본주의 사이의 갈등에 관해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현재 일종의 지적 저항, 즉 현존하는 생산양식 및 그것의 환경 파괴를 지지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준엄한 결단에 직면해 있다. “이윤의 신”을 우리의 생태문제의 해결책으로 부여잡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에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질서 건설의 요소로서 자연과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아니면 자연적 결과, 곧 인간 존재 및 우리와 관련맺고 있는 무수한 다른 종들에 대해 되돌릴 수 없으며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급속히 통제를 벗어나고 있는 생태적이고 사회적인 위기에 직면하느냐? 한/노/정/연



번역: 성준규(연구기획실원)

2001-12-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7&no=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