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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문제의 저변에 깔려 있는 자본의 논리

현장에서 미래를  제7호
임삼진

기획 2

자본이냐 노동이냐(6)


자본간 경쟁이 국경을 넘어 격화되면서, 국내 독점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총자본의 공세가 거세어지고 있다.
공기업의 민영화, 자본의 신경영전략 등으로 드러나는 자본합리화 공세는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과 ‘자본 축적의 효율성’ 그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노동자의 생활과 노동을 새롭게 재편하려 하고 있다. 자본의 이러한 공세 앞에서 노동자는 ‘자본 축적의 논리에 전면적으로 순응하느냐’, 아니면 ‘미래 사회의 새로운 삶의 대안’을 찾아 투쟁하느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해 있다. 이 양자택일의 문제는 단지 생산현장에만 국한되어지지 않고, 노동자를 둘러 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기되고 있다. 법적․제도적 측면만이 아니라 가치관․문화․습관에 이르기까지, 의식의 세계만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도 이 양자택일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자본이냐 노동이냐’.
이 기획은 생산현장에서의 노․자간 대립을 둘러 싼 쟁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둘러 싼 모든 영역에서 자본관계에 의해 은폐된 현실을 드러내 보이고, 노동자의 눈으로 세계와 미래를 재구성하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 여섯번째 내용으로 ‘교통문제의 저변에 깔려 있는 자본의 논리’라는 주제로 임삼진씨의 글을 실었다. 필자는 현 시기 교통문제의 핵심인 자동차화를 자동차 자본의 지배과정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자동차 자본의 논리에 부응한 승용차 과잉우대 정책을 극복하기 위해 교통정책 방향이 사회적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통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교통문제의 저변에 깔려 있는 자본의 논리

임 삼 진 (녹색교통운동 사무처장)


교통문제, 그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교통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 현대인이다. 너도 나도 자동차를 사는 열병이 우리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이래 많은 여론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생활 불편 요소로 교통문제가 수위를 차지해 왔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인식은 교통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만큼 복잡하게 얽힌 영역도 드물 것이다. 현상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여러 대립요소들이 ‘교통문제’라는 한마디 말로 개념화되어 있다. 하지만 문제를 겪고 말하는 사람마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천차만별이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몇가지 관계들을 꼽아보자.
- 대중교통 이용자와 자가용 승용차 사이의 도로공간 배분을 둘러싼 대립
- 보행자와 타 교통수단 이용자의 대립
- 여러 교통산업 간의 경쟁, 예를 들면 항공·철도·고속버스·시외버스의 경쟁, 지하철·시내버스·택시 사이의 경쟁
- 운수노동자와 이용시민 사이의 서비스를 둘러싼 갈등
- 주차공간을 둘러싼 이웃주민 간의 대립
- 교통법규의 적용을 둘러싼 경찰과 운전자 사이의 시비
- 운전자와 보행자, 운전자와 운전자들 사이의 불필요한 대립
- 교통사고 처리를 둘러싼 보험사·가해자·피해자·경찰 등 관계자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대립
- 요금결정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관계부처, 재정경제원, 업계, 시민 사이의 미묘한 갈등
- 교통행정을 둘러싼 중앙정부, 지방정부의 대립
- 운수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저항
- 임금․단체협약․근로조건을 둘러싼 운수노동자와 운수자본 사이의 대립
- 적색교통수단(승용차, 비행기)과 녹색교통수단(보행, 자전거, 대중교통수단) 사이의 대립
- 거대 자동차 자본과 일반 국민 사이의 대립
- 사회간접자본·건설·보험 및 교통관련 정책·법·제도를 총괄하는 국가(총자본)와 사회세력·이해세력 간의 대립
다소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관계가 열거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왜 빠졌지?’ 하는 것을 수 없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교통과 관련된 이들 사회관계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교통문제’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자동차화 시대 이후 흔히 교통문제=체증문제라는 단순한 도식을 떠올려 왔는데, 실제로는 보다 훨씬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생명 파괴의 상징인 교통사고, 대기오염이나 소음 등 환경파괴, 대중교통의 서비스 저하, 시민 교통권 침해, 무분별한 도로건설로 인한 공간 및 환경훼손과 자원낭비, 주차분쟁을 비롯한 낮은 교통문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자동차화 : 자동차자본의 지배과정

그렇다면 이런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는 자동차화(motorization)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공업이나 농업 생산양식의 혁명적 변화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일반적 조건인 ‘교통의 혁명’을 필요로 했다. 자본주의의 대규모 생산방식에 조응해서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근대적 교통수단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 주자는 철도였다.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신속성·경제성과 함께 대량수송능력을 가진 철도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철도 건설에 나섰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철도 대신에 자동차가 지배적인 교통수단으로 부각된다. 궤도나 대규모 역(驛)을 필요로 하지 않고 기동성이 뛰어난 자동차는 철도를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화물수송은 트럭이, 여객운송은 버스가 성장해 나갔는데 철도와 달리 사적 교통자본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자동차교통의 모순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도로의 국가소유와 자동차의 사적소유 사이의 모순이 그것이다. 이들 교통산업은 중소기업이나 영세기업 형태로 극심한 경쟁 속에 운영돼 왔다. 전반적으로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중요산업으로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볼프강 주커만’이 말하는 인류 역사의 획을 가를 만한 변화는 없었다.
두드러진 변화를 가져온 것은 자가용 승용차의 대량보급이었다. 1920년대 포드 자동차가 대량생산 시스템을 도입, 자동차 가격이 크게 저하되면서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승용차를 일반 사람들도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됐다. 도로의 건설·유지·관리는 여전히 국가의 책임으로 남아 있지만 대중적인 자가용 승용차 소유로 교통수단의 사유화가 전면적으로 촉진된다. 급격한 자동차의 보급은 경제, 사회, 문화에서부터 도시구조나 지구환경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자동차는 어떤 면에서 자본주의 시대정신과 가장 맞아 떨어지는 상품이었다. 즉 대량의 에너지 소비에 의한 대량생산, 대량소비라는 자본주의 경제법칙에 맞아 떨어지는 성격을 갖고 있다. 자동차화의 폭발적 진행과 함께 자동차 자본은 엄청난 축적을 이루게 된다.
자본주의, 그리고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승용차를 이용한 교통이 일반화됨에 따라 직장과 주거지 사이의 거리는 길어지고 교통수요는 비약적으로 증대된다. 그 과정에서 자가용 승용차의 급증 - 도로용량의 한계 - 교통체증 심화 - 대중교통 서비스 저하 등 선후를 가리기 어려운 ‘자동차화의 악순환 구조’가 정립된다. 악순환 구조를 상세히 살펴보자.
자동차가 늘어나고 전반적인 교통체계가 자동차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에 따라 정부의 교통투자가 도로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대중교통 수단의 부족과 서비스 부실, 비합리적인 운영체계가 나타난다. 이로 인해 교통빈곤 계층(the transportation poor)이 양산되고 그나마 여유가 있는 사람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승용차를 보유하게 되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로 인해 생계의 압박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무분별하게 도시가 확장되고 또다시 자동차의 증가를 부추긴다.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인한 버스 운행시간의 지체는 시민의 발길을 승용차로 돌려 놓고, 승객을 뺏긴 버스업계는 심화되는 경영난 속에 시달리며 버스 이용 시민들의 불편은 가중된다. 환경파괴와 주거환경 악화로 저소득층일수록 환경파괴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결국 자동차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요인들과 병리적 현상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악순환 속에서 유일하게 성장을 구가하는 것이 바로 자동차 산업이다. 그래서 자동차화를 자동차 자본의 지배과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동차화의 진전과 그 영향력은?

2만여개의 부품이 조립되는 자동차는 철강, 금속, 고무, 유리, 전기, 전자 등 여러 산업에 파급효과를 갖고 있다. 또한 정유, 보험, 금융, 레져 등 광범위한 영역에까지 영향을 준다. ‘자동차 관련 산업의 번영과 다수 시민의 교통권 침해’라는 모순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자동차·․교통문제 해결을 위한 개혁 움직임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마비증상에 비유될 정도로 심각한 교통난에 대처하는 방식은 우선 대도시 내 궤도 교통수단의 도입이다. 대도시 교통난은 총자본의 입장에서든 개별자본의 입장에서든 자본의 축적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국가나 도시정부는 지하철·전철 같은 대규모 교통수단의 건설을 통해 사유화된 교통수단을 다시 재사회화시켜 문제해결을 모색하게 된다.
또 한가지는 교통수요 관리를 통해 자가용 승용차에 대해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방법이다. 교통수요 관리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는데 혼잡통행료 징수, 버스 및 다인승 차량 전용차선제, 각종 버스 우선처리방안, 대중교통 환승편의 제공, 자전거 이용환경 개선, 대중교통 노선망의 개선, 버스·지하철 시설확충과 서비스 개선 등은 그 대표적인 예다. 자동차 자본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한계에 다다른 도시교통난 해소를 위해 고육지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정책적 개입을 통해 조금이나마 교통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시민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 심각한 교통문제의 숨통을 틔우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의 도시교통 문제는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중앙집권적 개발독재에 기초한 국가권력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자본의 원활한 축적과 효율적 흐름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인적·물적 자원의 국가총동원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수도권 집중도가 어느 나라보다 높다. 그 결과로 경제의 비약적 성장이라는 과실을 얻는 대신 도시의 급팽창에 따른 다양한 도시문제, 특히 교통문제의 악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해찬 전 부시장의 말을 빌면 “서울은 낡은 가전 제품과 같아서 도시문제를 풀어 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도시다. 특히 교통문제는 가히 폭발적인 양상을 띄고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좁은 땅덩어리에 자동차 산업이 비대해서인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 보행자와 대중교통을 방치, 구박해 왔다. 그 대표적인 예는 도로 중심의 교통투자다. 전체 사회간접자본의 60~70%를 도로에 ‘쏟아 부어’ 왔는데, 그 귀결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교통 모습이다.
하지만 도로가 신설되면 그 도로를 메꾸는 것은 또다시 승용차들이다. 따라서 사실상 과도한 도로 중심의 투자는 그것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경제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일부 계층을 우대하여 소득재분배에 역행하는 쪽으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자동차교통을 중심으로 한 교통체계 하에서는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사회적 형평성을 침해하는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 승용차에 지워야 할 부담을 지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에 대한 지원을 방치한 결과 시민들은 승용차로 달려가게 됐다.
또 하나는 정책적으로 ‘자동차 과잉우대’를 추진해 왔다. 우리가 얼마나 자동차 우대에 집단최면이 걸려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주거지, 생활공간에서의 사람과 자동차의 지위다. 삶의 터전이어야 할 생활공간은 자동차가 주인이 되고, 사람은 객으로 전락한 상태다. 주차차량들과 오가는 차량행렬로 뒤덮여버린 이면도로는 도로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보행자, 특히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생활공간의 쾌적성(amenity)은 온 데 간 데 없고 망가진 경관에 주차분쟁으로 이웃간의 정이 메말라 버리고 있다.
안전한 이동로, 아이들의 놀이터, 이웃과의 교제공간, 휴식과 산책을 즐기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할 생활도로가 자동차에 의해 점령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자동차의 반인간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은 교통사고의 위협에 시달리고 놀이공간을 빼앗겨 집안으로 떠밀려 들어가 자폐적(自閉的) 증상을 앓게 됐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친밀감을 나눌 수 있는 ‘터’를 빼앗기게 됐다. 자동차 행렬이 풍요로워야 할 생활공간을 흉물스럽게 뒤덮어 여유와 아름다움을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이같은 자동차의 대량 보급은 얼마 만큼 인간을 행복하게 했을까, 또 계층간 형평성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다. 에너지의 소비구조와 형평성 문제를 연관지어서 이반 일리히는 오히려 수송수단의 발전이 형평성을 악화시킨다고 말한다.
“수송수단의 속도가 어떤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시민들은 수송기관의 소비자가 되어 집에서 나와 돌아가는 매일의 순환회로 - 통행trip -를 타게 된다. 수송기관에 부여된 에너지가 증대한다는 것은 매일 정해진 행로를 이동하는 인간의 수와 그 속도, 그리고 이동범위가 증대된다는 것을 뜻한다. 곧 각자의 나날의 행동반경이 확대되는 것에 의해 아는 사람의 집을 잠깐 방문한다거나, 직장에 가는 도중에 공원에 들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일부의 사람들에게 극도의 특권이 부여되는 것을 대가로, 만인이 에너지에 대한 노예가 되어야 한다. 곧 한 무리의 선택된 인간들이 제멋대로의 여행생활에 무제한의 거리를 포함시킬 수 있는 반면에, 대다수 민중들은 스스로 즐기지 않는 통근에 그 생활의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극소수의 인간들이 마법의 담요를 타고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지점과 지점 사이를 여행하고 잠시 동안의 체류에 진귀함과 매력을 맛보는 한편, 대다수의 민중들은 통근의 거리와 시간의 증대, 통근을 위한 준비와 피로의 회복에 소비하는 시간의 증대를 강요받고 있다.”
수송수단의 과도한 발전에 따른 이득과 여유, 풍요는 극소수의 제트기족들만이 누릴 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길에서, 체증 속에서 좌절감을 맛보아야 하는 비극의 구조라는 것이다. 실제로 승용차 위주의 교통정책은 과도한 자동차 의존 사회로 사회 전체를 길들여 왔다. 지나친 자동차 의존은 경제와 환경, 사회적 형평, 심지어 인간관계에까지 커다란 희생을 가져왔다. 우리의 경우 이 단계를 이미 넘어섰지만 ‘마르시아 라우에’의 지적대로 “개발도상국에서 자동차는 단지 소수 엘리트에게만 직접 혜택을 줄 뿐 인구의 대다수에게는 아무런 편의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교통문제의 심화’와 ‘그 개인적 해결을 위한 자동차 구입 붐’이라는 논리적 순환고리 속에서 어쨌든 자동차화가 급격히 진전됐다. 자동차 증가율이 피크를 이룬 1989년에 전국적으로 30.7%, 서울은 27.3%라는 놀라운 증가추세를 보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열병이라도 걸린 듯 자동차 구입에 나섰다. 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최근 들어 냉각되고 있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자동차 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승용차 위주의 교통정책 속에서 대중교통 이용자나 보행자들의 불편이 너무나 커지고 이런 사람들의 불편 속에서 자동차들, 아니 자동차 소유자들은 은연중에 이른바 ‘중산층’ 의식을 갖게 되고 보행자나 차를 갖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막연한 우월감을 갖게 된다. 중산층 의식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약화와 연결돼 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얻어진 자아의 확장에 자부심을 느끼는 우월감은 생명경시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고의는 아닐지라도 사람, 특히 어린아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사람이 전쟁기간보다도 훨씬 많을 정도로 일상화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더욱이 자동차는 진정한 자아실현과 사람들 사이의 공감(共感) 형성을 방해한다는 것이 최근의 분석이다. “자동차가 다른 사람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시민적 권리를 침해하는 탈 것이라는 것, 다른 사람이 평온하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고, 아이들의 노는 권리를 빼앗을 뿐 아니라 이이들의 생존권조차 현실적으로 빼앗고 있는 것, 따라서 자동차는 위헌”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올 정도다.
자동차가 이미 대중화돼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누구나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외치는 상황에서 교통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가.
어차피 개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교통정책 방향이 자동차 자본의 논리에 부응하여 자유방임 속의 승용차 과잉우대 정책 속에 모든 시민이 희생되는 구조였다면 향후의 교통정책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목적지에 큰 어려움 없이 다다를 수 있게 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모색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연히 사회적 차원에서!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교통의 우선순위에 대한 전면 재조정이다. 향후의 교통계획은 그 중심부분에 보행(자전거)을 위치지우고 그 다음 대중교통, 다시 마지막에 자가용 승용차의 이용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대중교통 수단과 자전거 이용 및 보행에 대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투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특히 대중교통 수단을 획기적으로 우대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대중교통 수단이 시민들에게 신속하고 안락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는다면 자가용 소유자까지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 동안 정부당국의 교통정책은 대중교통의 육성을 통한 대응방안 모색보다는 도로공급정책 위주로 부적절하게 대응해 왔다. 이로 인해 대중교통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이에 따른 승용차 증가와 교통체증의 악순환으로 교통체계의 비효율성이 초래된 것이다.
대중교통 수단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가 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이른바 ‘민영화’ 바람이 분 국가들의 경우 대중교통에 대한 보조금을 대폭 삭감한 결과 예외없이 대중교통 이용률이 대폭 감소하고 있다. 캐나다의 경우 대중교통 서비스 수준과 이용률은 1970년부터 1990년 사이에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으나 최근 4년동안에는 11%나 감소했다. 중앙정부가 단행한 보조금 감축으로 그 부담을 지방정부가 대신 져야 했고, 이로 인해 대중교통 요금의 인상이 불가피했다. 결국 1990년 이후 대중교통 이용률과 대중교통의 수송분담률이 급속히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영국의 경우에도 1980년 이후 대중교통 이용자 수가 20% 감소했다. 일본 국철의 민영화 과정에서 문제가 됐듯이 경영개선, 재정부담 감축 등을 이유로 적자노선의 폐지를 감행하자 ‘지방주민의 발’을 빼앗는 제도라며 거센 반발이 나오게 된다.
규제완화와 맞물려 추진된 대중교통 보조금 삭감은 서비스의 악화와 대규모의 요금인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규제완화가 반(反)대중교통정책이라는 논리를 뒷받침해 준다. 대중교통 산업에 대한 규제완화 및 민영화 조치가 대도시권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단절시키고 지역계획 기구의 기능을 무능화시켰으며, 대중교통의 몰락을 부추기고 결과적으로 승용차 이용을 늘렸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이들 국가와 대조적으로 독일이나 스위스, 네덜란드가 대중교통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대중교통 육성정책을 펼쳐서 대중교통 이용률을 스위스 22%, 네덜란드 25%, 독일 15% 씩 높였다. 이렇게 볼 때 대중교통에 대한 국가 지원을 늘리면 재정부담이 늘겠지만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사회적 플러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교통 이용률의 꾸준한 증가, 승용차 이용률의 감소, 도로혼잡의 완화와 대기오염 수준의 감소, 통행수단 선택기회의 증대 등의 긍정적인 결과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환경적·문화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그리고 자가용 승용차에 대한 실질적인 규제조치가 필요하다. 자가용 승용차에 대해서는 다양한 규제장치와 ‘오염자 부담원칙’ ‘수익자 부담원칙’을 적용해서 사회적 비용을 내부화하고,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이를 위해 혼잡료 징수, 무료주차 혜택 폐지, 배기가스 정기검사제 시행, 전 운행차량 대인보험 가입 의무화, 차고지 증명제, 환경오염 부담금 부과 등의 조치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같은 오염자 부담원칙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음에 따라 그 피해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오염자 부담원칙에 따르면 공해를 일으키는 사람이 공해를 막는 데 필요한 비용은 물론이고 공해로 손상된 부분까지 부담해야 한다. 공해를 일으키고도 아무런 비용 부담을 하지 않는 ‘무임승차자’를 없애는 것은 중요하다. 오염자가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직접 간접의 피해를 입게 되고, 비용부담까지 떠맡게 된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모순인가. 가히 천문학적 수준에 달하는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을 재해를 당한 당사자나 국가, 또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고 있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한다.물론 이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동차 자본과의 전쟁을 필요로 한다.
특히 도로 투자액을 줄여서 그 투자재원을 확보한다는 것이 우리 나라처럼 자동차 산업이 국가경제의 중핵을 이루고 있는 국가에서는 싱가포르와 달리 효과적인 교통수요 관리정책을 펼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같은 대전환이 없는 한 불가능하다.
실질적인 교통수요 관리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교통정책처럼 ‘몇 년도에 얼마나 교통수요가 늘어나니까 그것을 채워야 한다.’는 식의 접근방식에서 ‘어느 수준에서 묶겠다.’는 정책적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야 말로는 교통수요 관리라고 하면서, 실천으로는 도로에 대한 집중 투자를 하는 이중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1. 한국공간환경연구회, 교통문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공간환경 제35호, 1995년 3․4월호
2. Wolfgang Zuckermann, END OF THE ROAD, The Lutterworth Press, 1991
3. 杉田聰, 人に とって クリマは 何か, 大月書店, 1993
4. 日比野正己, 交通權の 思想, 講談社, 1985
5. Marcia D. Lowe, 「수송체계의 재발명」, 1994 지구환경보고서, 따님출판사,1994
6. Ivan Illich, Energy and Equity, Haper and Row, 1974, 박홍규역,<마이카 시대의 에너지 위기론>, 형성사, 1990 한/노/정/연

1996-01-2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7&no=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