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례발표회
문화취향과 이데올로기
양 민 석/사회학 전공
이 글은 지난 2월 2일(토) 연구소 제64차 월례 콜로키움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1. 들어가며
다양한 문화이론과 문화정책의 가시적 증가와 함께 ‘문화’는
이제 사회과학적 논의 속에서 사회의식과 사회적 관계의 이해를
위한 중심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논의는 흔히
노동영역의 의미축소를 가져왔고, 슐쩨(G. Schulze)에 따르면
노동은 제반 경험영역(Erlebnisfeld) 중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노동사회의 종말(Ende der Arbeitsgesellschaft) 역시
‘노동’이란 경험영역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폐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경험사회(Erlebnisgesellschaft)에 의해서
경향적으로 점점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계급분석과 거리를 둔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성에 대한 분석을
새롭게 요청하고 있다. 말하자면 특정지위집단 보다는 생활양식
중심의 집단구분이, 그리고 계급적, 사회경제적 정체성보다는
사회문화적 정체성이 현재의 삶의 형태들을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실천자의 개인적 자율성과 함께 문화적 재생산에 대한
보편적 참여가 강조되면서 문화영역의 중요성은 제반 사회
경제구조의 맥락을 뛰어넘어 확대되고 있다.
‘문화사회(Kulturgesellschaft)’의
‘개인화(Individualisierung)’과정에 대한 논의는 물질적
분배투쟁이 문화-상징적 차원으로 전이되었으며 ‘문화적
차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집단적’으로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획득되어 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문화영역은 이러한 구조와 가치변동을 기반으로 부각된
독자적 비중 때문이 아니라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작용과 함께 그
안에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한 구조가 상징적으로 은폐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현대사회의 문화연구는 문화의
현상형태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문화가 갖는 상징적
작동방식 또한 주목해야 한다.
특히 점점 더 분명하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도피처’ M.
Raphael, Arbeiter, Kunst und Künstler, Dresden, 1978,
p.257.
가 되고 있는 예술을 포함한 미학적 영역에 대한 분석은 이
시기에 필요한 과제이다. 이러한 분석이 일상생활과 관련한
미학적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태와
작용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배관계의 상징적 차원으로의 변형
또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문화취향의 미적 평가를 둘러싼 상징투쟁을 예술과
키치라는 대극적 가치평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문화취향이 성립, 전유되며 그것에 대한
가치평가는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또한 개인의 문화적 실천이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주요한 내용이다.
2. 논의의 전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문화적 지배 논의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이데올로기적 기만성과 그것에 근거한 사회적 제 집단 간의
헤게모니 투쟁은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배집단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우선 문화적 생산물의 내용과
일상미학을 통한 감각과 욕망의 발전과정에 전제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통해서 표현된다. 또한 피지배집단을
문화적 이해와 향유에 필요한 ‘전유능력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러한 테제를 분석의 준거로 삼을 때
필요한 것은 일상생활과 대한 주목이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일상의식 속에 드러나는 허위적 관념형태를
밝혀낼 수 있으며 생활양식과 관련한 미적 취향의 전유는
주요하게 일상생활의 미학적 영역을 대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테제는 지배집단은 그들의 헤게모니의 정통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일상적 생활양식의 문화적
가치와 우월성을 확보해야 간다는 것이다. 경제구조를 통한
물질적 기반을 토대로 지배계급은 대중취향에 대해 분명한 획을
그으며 구별짓기의 욕구를 만족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새로운
소비방식과 전유형태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는데 있어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이론과 문화비판, 그리고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이 논의에
필요한 이론적 단초를 제공해줄 것이다.
문화산업의 대중취향생산이 대중기호에 대한 조작과 왜곡의
성격을 갖는 것은 대중의 일상을 지배하는 잃어버린 신화적
세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에 근거하고 있다. 대리보상적,
유흥적 문화산업은 이윤을 목적으로 감각적, 환상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며, 대중의 문화취향을 신화적 동경과
갈망을 좇아 만들어 내며 정형화시킨다. 결국 문화산업의 총체적
효과는 반계몽적이라는 점, 문화산업을 통한 계몽이란
대중기만을 의미하고 문화가 향락산업으로 추락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문화이론에 있어 아도르노가 기여한 바는
그가 문화산업 비판을 통해, 상품생산으로 매개되는, 이데올로기
생산의 사회적 조건들뿐만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의식형태들의
생산과 수용양식, 그리고 개별인자들의 획일화를 규명한다는 점,
그가 대중의 의식분석을 통해, 현대사회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표면적 진실과 감춰진 진실의 교착으로 보고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밝혀낸다는 점, 그리고 신화적 억압아래
놓여 있는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예속상태에 대한 유효한
이론적 단초들을 제공한다는 점 등이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의 서술은 ‘아비투스’와 ‘취향’
등의 중심개념과 함께 이데올로기화 과정의 실상에 집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지배관계가 문화, 상징적 차원
속에서 드러나지 않고 작동할 수 있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고귀하고 탁월한 정통성을 부여받은 취향과
그것의 물질적 토대와의 관계가 바로 주도적, 지배적 시각의
이데올로기적 관철을 가능하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은 지속적으로 은폐되어 있다. ‘취향’이란 사회적 구조와
개인적 실천 사이의 변별적인 매개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때 이데올로기란 불평등의 은폐와 위장,
정당화 뿐 아니라 이 불평등의 재생산과 관련된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3. 일상, 의식, 취향
1) 개인적 취향의 자유와 한계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은 ‘계급적 개인과 사적 개인의
통합체’라는 마르크스의 테제에 근거하여 파악될 수 있다.
개인의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계급관계를 통해서
조건지워진다. 왜냐하면 개인의 노동조건과 삶의 조건은
계급조건의 틀 속에서 결정되고 개인은 자신의 계급귀속성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를 갖게되며 또한 그 안에서 자신의 사적인
발전가능성 담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은 사적인
삶의 세계를 형성해가면서, 자신의 물질적 재생산 관계와 더불어
다른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한다. 즉 개인은 자신과 사회를 위한
부를 재생산함과 동시에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모순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계급적, 사적
개인의 통합체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을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 파악한다.
그러므로 특정 계급에의 귀속성은 개인의 의식 그리고 취향으로
표현되는 문화적 전유양식에 규정적으로 작용한다. 취향판단은
사적이고 우연적인 경험에 근거한 사적인 판단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위치와 분명한 연관성을 갖는다. 따라서 개인의
아비투스 속에는 사적 개인뿐만이 아니라 계급적 개인의
규정성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계급아비투스’는
개인의 생활영유에 있어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개인의
계급적 위치는 개별적 삶의 실현에 있어 규정적인 제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각각의 미적 대상물들은 계층귀속성과
관련된 그리고 그에 따른 가치행위, 사고방식, 삶의 양식
그러니까 넓은 의미의 도덕과 윤리의 의미있는 특징들을 갖고
있다. 결국 계급연관성이 없는 미적 의미란 없다.” C.
Borgeest, Das sogenannte Schöne: Ästhetische
sozialschranken, Frankfurt am Main, 1977, p.179.
2) 일상생활의 구조: 비노동영역의 의미증가
일상세계의 물질적-비물질적 전유를 통한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에 상응하여 개인의 행동양식과 의식형태들이 지속적으로
성립된다. 개인의 활동영역은 노동영역뿐만 아니라
비노동영역으로 확대되었다. 노동영역과 비노동영역의 두 영역은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의 일상생활을 이루는 두 가지
기본구조이다. 계급적 개인과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의 규정과 다른 한편 노동영역과 비노동영역의
상호분리를 토대로 일상의식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이 형성된다.
자유로운 행위영역이 새롭게 확대되면서 ‘노동’과 ‘삶’의
관계가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개인은 계급적 개인과 사적
개인의 모순 속에서, 즉 그의 삶의 과정이 물질적 생활의 창조와
개인적인 자유활동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지면서 ‘노동영역’은
삶의 전제가 되는 영역으로, 필요불가결한 악으로, 그리고
‘비노동영역’은 자신의 진정한 삶으로 보여지게 된다. 결국
‘삶의 수단으로서의 노동(Arbeiten als Mittel)’이라는
의식형태가 지배하게 된다. 노동은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비노동영역이 바로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운 의사로
만들어내는 진정한 삶의 영역으로 보인다. 개인의 감각적-미적
차원의 전유방식은 이러한 전도된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 취향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문화적 전유과정에는 이러한 일상의식의
이데올로기적인 차원, 즉 문화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며
취향은 사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의식들은 비노동영역의 미적 형상화가 문화산업을
통해 자본제적으로 추진되면서 지속적인 발전형태를 갖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욕망의 창출과 구별짓기의 변증법적인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문화의 통속화와 그에 상응하는
대중취향의 배제라는 대립적인 공조와 함께 전개된다.
문화산업은 상품생산의 신속한 변화를 꾀하며 한편으로는 문화적
통속성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배제시키며 이 과정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항상 새로운
상품을 창출해야 하는 압박을 받는데 이것은 결국 이전의 것들을
폐기해야하는 압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롭고 통속적인 일상문화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배경으로 그리고
일상의식을 왜곡하는 문화산업 이데올로기의 허구화 방식을
배경으로 일단 성립된 대중취향은 한편으로 통속화되어지면서
다른 한편 배제되어 진다. 취향의 통속화란 대중취향에 대한
거부와 부정을 통한 구별짓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개인의 문화적 실천을 통해 재생산되어 진다. 대중취향에
대한 규정은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유래하고 미적 취향에 대한
입장은 상징적 대결 속에서의 사회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통속적 취향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가치중립적인 통속성이란 허구와 같은 것이다.
다음 단락에서는 통속적 미학과 ‘나쁜 취향’으로 명명되는
키치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미적 평가와 취향판단을 둘러싼
상징적 대결의 문제를 분석한다.
4. 키치의 사회학적 의미
1) 키치의 개념과 문제의식
키치 개념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독일 남부지방과 독일어권인
스위스에서 “신속하게 팔아버리다”, “헐값으로 처분하다”
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verkitschen이란 용어가 갖고
있는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값싸고 신속하게 처분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구매자에게 자신의 생산물, 즉
키치(Kitsch)를 제공하는데 있어 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을
제외하고는 그 이상의 노동과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이미
verkitschen이란 표현에 키치 생산물의 가치절하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19세기 중후반 재빨리 만들어낸 싸구려 미술품을
관광객들에게 팔았던 뮌헨의 화상들에게서 이미 그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키치라는 용어는 ‘윤리성의 추락’과 ‘진품에
대한 부정’의 준거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 기인하여 키치는 예술이고자 하지만 예술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유사 또는 사이비 예술로 파악된다. 데쉬너(K.
H. Deschner)에게 키치는 “언제나 진품이 아니고 진실이 아닌
유사예술”일 뿐이다. K. H. Deschner, Kitsch, Konvention und
Kunst, Frankfurt am Main; Berlin, 1991, p.23.
시몬-쉐퍼(R. Simon-Schäfer)도 “판단능력이 없는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비창조적이고 발전능력이 없는, 진품의
모방”으로서 키치를 정의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 대중을
근본적으로 미적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구별짓는데 반대하며, 수용자의 판단능력이란 편견과 같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된 판단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키치에 대한 부정적 규정은 브로크(H. Broch)와 기쯔(L.
Giesz)에게서 인간본질에 대한 문제로 더욱 발전한다. 브로크는
키치를 키치적 인간(Kitschmensch)에 의해서 야기되는 “예술
가치체계 속의 위악”으로 규정하고, 기쯔는 인류학적 맥락
속에서 ‘키치적 인간’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킨다. 키치적
인간이란 키치를 선호하고 예술품 생산자로서 그것을 만들어
내며, 키치의 소비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비싼 값에 기꺼이
구매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몰르(A. Moles)는 키치의 등장을 물질적으로 풍요해지고 욕구를
만족시킬 수단이 많아지게 되는 서구 자본주의 시민사회의
발전과정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그는 키치란 물질적 풍요를
통한 소비욕구의 증가를 가져온 소비사회(Konsumgesellschaft)의
미학적 운명이라고 파악한다.
역사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위딩(G. Üding)은 키치를
‘자본주의 문화의 주요경향들의 응축점’으로 본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욕구와 감각상태에
상응하는 키치의 대리충족의 관계를 이데올로기 비판적으로
설명한다. 키치의 감상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키치 안에
표현되어 있는 욕구를 정당한 것으로 인식한다.
결국 키치는 미학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키치가 산업화, 계급의 성립, 소비중심사회, 대중의
자유시간 확대 등 사회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과정과 함께
해왔다는 점, 그리고 변화된 사회적 조건과 맞물려 변화되어
왔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키치의 영향과 작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산업생산의 발전과 소비가능성의 증대와 함께 20세기에 들어와
키치는 일상적인 소비생산물로부터 미술관의 키치예술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확산되었다. 이런 점에서
아무도 키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키치가 한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현대사회의 예술은
없다고 말한다. H. Broch, Dichten und Erkennen, Essays Bd.1,
Zürich, 1955, p.34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키치 사이에 근본적이고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주장이 아직도 지배적이고 키치는 오물이나
쓰레기라는 부정적인 규정과 함께 미학적 영역에서 ‘나쁜
취향’으로 규정된다. 아직도 키치란 어원의 가치평가 절하와
관련된 초기 뉘앙스가 강고한 영향력을 갖는다.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키치의 사회적 구별작용과 키치취향의
차별화이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배경 속에서 키치취향을 갖게 되는가? 키치취향은
진정 ‘키치인간’이라는 인류학적 본질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것인가? 어떤 것이 키치라고, 그리고 키치취향이 ‘나쁜
취향’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키치판단의
사회적 구별작용이 존재하는가?
2) 키치취향과 사회적 구별짓기
부르디외가 미적 취향판단과 관련한 그의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미적 전유능력은 개별 사회적 집단과 계급이 갖고 있는 미적
대상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도구, 즉 ‘미학적 코드’에
기인한다. 미학적 코드와 그에 상응한 미적 전유능력은
행위자들의 계급적 사회적 조건, 즉 행위자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물질적-비물질적 존재조건에 기인한다. 미적 또는
예술적 생산물들은 개별 행위자가 갖고 있는 미학적 코드에
따라 “단순하고 일상적인 경험에서부터 다듬어진 감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예술품
또는 키치 생산물에 대한 미적 평가에 있어 필요적 수준의
미학적 코드를 갖고 있는 하층계급의 경우 예술작품 보다는
일상적인 키치 대상물에 가치부여를 하는 반면 교육을 통해
적당한 예술적 코드를 획득한 상층계급의 경우 키치에 대한
거리감을 갖는다. 이와 같은 문화적 매개와 전유의 과정을
거쳐서 획득된 문화자본은 지속적인 문화자본의 축적을 이루고
사회적 계급간의 문화자본의 분배구조를 재생산시킨다. 이것은
부르디외가 관심을 가졌던 ‘천부적 능력으로서의 취향’이란
이데올로기, 다시 말해서 문화취향의 성립과 차이의 원인이 사회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 또는 개별 집단으로 전이되는 것을
의미한다. 미학적 능력과 교육을 포함한 사회적 조건간의 관계가
사상된 채 인간은 미개한 그리고 문명화된 부류로 나뉘게 되고,
인간의 천부적 능력을 강조하는 ‘카리스마적 이데올로기’는
결국 사회적 특권과 위계질서 그리고 계급간 세력관계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야기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술이란 사회적 특권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술적 향유란 그에 상응하는
전유조건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육혜택을 받은 계층의 특권으로 존재하고
예술이란 그들에 의해서 인지되고 해석되는 예술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층계급은 ‘예술능력의 획득’ 기회로부터
지속적으로 배제당하고 키치로 가치평가된 미적 대상물들을
수용하게 되며 키치취향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통해 교육받은
상층계급의 예술적 특권과의 비교 속에서 ‘키치인간’이라는
인간적 본질규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예술과 키치와 같은
차별적 취향은 개인이나 개별 집단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조건에 따른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 조건을
배태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가 바로 취향에 대한 차별적
가치평가를 생산하는 원천이다. “결국 주요한 요인은 교육의
정도가 아니라, 특정한 교육을 가능하게 하거나 저지하는 물질적
관계인 것이다.” W. Wolf, Die Phänomenolügie des
‘Kitsches’, Osnabrück, 1980, p.11.
3) 예술특권과 키치의 배제
사회적 특권과 위계질서의 정당성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지배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피지배집단과 계급의
문화와 문화적 실천이 부적절함을 부단히 상징화시켜 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계급사회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우세한 집단의
문화적 실천은 ‘부정의 대상’을 통해서 문화적 명분을 더욱
획득해 가고 자신의 방어기제(Abwehrmechanism)를 강화시켜
간다. 이런 점에서 키치의 ‘문화적 부당성(kulturelle
Gegen-Legitimität)’이 상징화되고 키치취향은 정통성을
부여받은 문화취향의 구별짓기를 위한 준거적 대립물이 된다.
예술특권과 함께 정통성을 부여받은 문화취향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지속적 ‘존립’에 대한 관심뿐만이 아니라 구별짓기의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는 ‘키치의 배제’에 대한 관심을
배태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명명권력을 둘러싼 투쟁(Kampf um die
legitime Benennungsmacht)’이다. 이것은 무엇이 예술이고
키치인지, 또는 예술성 높은 문학작품이고 통속물인지 등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고 이 투쟁에는
예를 들어 문학의 경우 작가, 출판사, 기획자에서부터 비평가,
교육자 그리고 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과 역할자가 있다.
그러므로 키치의 미적 평가에 있어 분명한 것은 취향판단의
이분법적 구별이 개인의 자유로운 자율성이 아니라, 문화적
생산이나 수용과 관련한 사회적 권력관계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 속에서 특정 산물이 예술품이 되기도 하고
키치적 대상이 되기도 하는 ‘상징적 연금술’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표찰행위(Etikettierung)의 규정력은 충분한 명명권력이
있거나 카리스마적인 지위가 있는 경우 더욱 효과적이다.
키치와 통속성은 특정한 미적 대상의 고유하고 영속적인 본질이
아니라 이러한 표찰행위의 작용원칙에 따라 그런 것으로
규정되며 문화적 위계질서 속에서 미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키치현상을 사회적 연관성과 무관하게
미학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은 오류이고, 키치가 역사적으로
변화해왔으며 사회적으로 설명가능한 현상이라는 점이 다시 한번
강조될 수 있다. 이제 키치취향에 대한 가치평가는
‘키치사회(Kitschgesellschaft)’ 또는 ‘키치의
시대(Kitschzeitalter)’라고 설명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문화산업의 확대로 누구나 소비대상으로서 키치적 생산물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고급-저급 문화간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현실에도 불구하고 취향에 대한 양분화된 가치평가와 그러한
구별짓기 욕구만은 항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키치판단은 문화 간 경계투쟁의 도구가 되는데, 특정
문화수준들이 서로 근접해 갈수록 키치라는 평가와 비난을
수단으로 삼는 경계투쟁이 더욱 치열해 간다. 어떤 예술작품이
광범위한 대중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향유되어 지면 예술
애호가들은 이 작품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화적 정당성을 인정받는 예술취향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술적 대상물로서 더 이상 특별한
구별짓기의 효과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별짓기의 유리한 효과를 둘러싼 미적 영역에서의 투쟁은 결국
문화적 정당성과 사회적 지배질서에 대한 상징권력을 둘러싼
투쟁을 반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가치규정만이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전체 사회가 어떻게 명시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키치 안에 존재하는 통속성이
사회적 차원으로 전이되면서 우리는 가치들을 자신에게 맞게
구별하고 분리시키는 사회적 유형을 보게되는 것이다.” A.
Silbermann, “Zur Wesentlichkeit dr Beziehung zwischen
Künstler und Gesellschaft”, in Kölner Zeitschrift
für Soziologie und Sozialpsychologie, SH.17, 1974,
p.331.
5. 맺음말
여기에서는 한편으로 문화취향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가치평가를, 다른 한편으로 사회구성원의 문화적 전유와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주요하게
살펴보려 했던 것은 결국 ‘사회적 관계의 문화-상징적
위계질서’ 속에 감춰져 있는 메커니즘이었다. 개인 문화취향의
구조틀로서의 일상에 대한 주목과 또한 일상생활의 문화영역이
사회적 지향과 차별화 과정의 결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상문화와
그것을 둘러싼 가치평가 그리고 일상의 상징적 행위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한 구조가 문화-상징적
차원에서 어떻게 재생산되는가를 밝혀내는 작업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지배집단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문화산업과 같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적인 효과를 통해서 그리고 피지배집단을
문화적 전유능력으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을 통해서 추구되어
진다. 둘째로 문화적 정통성을 인정받은 취향판단의
이데올로기화는 자율적으로 보이는, 개인 취향전유에 실제적인
동기를 부여하며, 지속적으로 왜곡된 형태의 일상의식에 작용을
한다. 셋째 대중선호적이고 통속적인 취향의 부정적 가치평가와
배제는 사회적 관계의 상징적 대립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결국 문화적 정통성을 인정받은 취향과 저급한 취향의 양분화란
문화적 헤게모니의 쟁투 속에서 이해될 수 있고 이것은 결국
사회적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욕구 안에 그 기원적,
기능적 그리고 작용적 연관성을 갖는다. 이러한 논의는 앞으로
보다 구체적인 분석대상을 통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질의응답과 토론
문: 키치와 관련해서 볼 때 수용자나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는데 생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키치란 용어가
대중화된 것이 70년대라고 했는데 그것도 누가 딱 선도적으로
씀으로서 신조어처럼 대중화된것 같다. 비평가들이 구체적으로
예술적 행위자체에 대해 저건 키치다라는 언급을 실제로
하는가의 문제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내가 무슨 키치냐 나는
예술이다는 식의 구별짓기, 반발의 문제가 존재한다. 또 사실상
키치와 키치가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이 필요 없는 상황 속에서
구별짓기로서의 키치가 이루어지는 맥락은 무엇인가를
발표자께서 질문하셨기 때문에 거꾸로 이러한 발표자의 분석을
통해서 전복적인 사유, 저항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
최근의 문화적 실천 맥락에서 본다면 대중문화이지만 오히려
키치라는 것들에 대해서 거꾸로 ‘그래 내껀 키치인데 어쩔래’
식의 소위 고급예술이란 것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것들을 종종
봤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 키치가 구별짓기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배제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향유하고 자기의 취향으로 취득하는 것은 하층계급이다.
그런데 그런 차원에서 키치라는 것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개발해야 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키치라고 하는 것이
그런 구별짓기에서 고급문화라는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그런
어떤 대응되는 대상으로서 존재했다는 것을 제가 분석했다.
그런데 키치라고 하는 것들은 수많은 영역들뿐 아니라 대중문화
그 자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 자체의 긍정적인
단초라고 하는 것을 발전시킬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 드라마 같은 것도 보면 키치적인 수준이다라고
표현이 되고 또 하층계급들이 전유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와 관련해서
영역들이 굉장히 광범하지 않은가. 그런 차원에서 드라마의
내용성, 형식들을 노동자적인 입장과 그 이익과 관련된 속에서
개발시켜 나가는 부분을 생각해볼 수 있다.
문: 그렇게 되면 너무 범위가 넓어진다고 본다. 드라마=키치라고
광범위하게 인식되어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답: 물론 드라마도 여러 종류가 있긴 하지만 예를 들어 드라마
중에서도 어떤 한 부분이 통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다. 여성과 관련한 부분에서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등 남녀의 성적 불평등을 대변하는 그 모양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또 그 모양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는 측면들에 대해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문: 오늘의 발표가 키치나 대중문화가 긍정적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다. 키치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으로서 규정한다면, 이 규정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인 것 같다. 문화라는 건 항상 그래왔던 것
아닌가. 맑스도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키치와 관련한
이러한 문화해석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답: 문화에 관한 부르디외의 이론 역시 60년대에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가 새로운 이론이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구태의연한 의미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런 부분이
현실적 맥락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연구와 고민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키치 역시 우리 일상에 많이 퍼져있는
것들이고 우리의 일상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다. 이에
대한 설명 및 분석은 중요한 것이다.
문: 미술품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키치는 소위 저급문화와 관계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현상은 수십년간 계속되어왔고, 문화간 구별짓기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이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아니냐. 내가 보기에는 이건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냐 하는
느낌도 들 수 있다. 고민되어져야 할 지점은 바로 왜 이것이
우리시대에 있어 중요한가의 문제 아닌가?
답: 문화의 영역은 점점 확대되어가고 있지만 그 영역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화로 대표되는
비노동영역에서의 논의가 사장될 수도 있다. 고발하고 비판하는
선에서 우리의 과제가 멈춘다면 물론 문제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하고 답답해하는 부분, 바로
대안이라는 부분을 찾는 작업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판하는 작업, 이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올바른 대안으로 향하게 해주는 작업도 중요하다.
문: 그럼에도 이미 결론난 문제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답: 엄밀히 말해 문화영역에 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것
아니냐.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현상은 여전히 제대로 해명이
안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실제로 문화와 관련된 정치적인
해석들이 분분한 것이다.
문: 이는 해석문제와는 다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실천적
개입의 문제로, 실천적 개입과 해석의 문제는 서로 다르다.
답: 충분히 결론이 나있고 그에 관해 합의가 되어있냐의 문제는
쉽게 논의될 수 없다고 보는 이유가, 어떤 연구영역에서
이런저런 식으로 하나의 현상을 볼 때 그것이 연구영역 속에서의
해석에 대한 문제라면 해석을 위한 일정한 준거를 가져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준거를 가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석들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보아야 하는 것이라면,
키치에 대해서 여태까지는 키치냐 아니냐하는 문제가 중요
쟁점이었다. 우리가 문제를 키치에 한정해서 놓고 본다면 이것이
키치냐 아니냐하는 문제는 순전히 미학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어떠한 담론 속에서 형성되는가의 문제 속에서, ‘저건 아니지
않은가’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분석해 본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사회적 제 관계망 중 노동문제 등과 같은 문제 내에서 실제로
구별짓기를 따져보자.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유흥과
여가를 구분했다. 그가 볼때 귀족집단이 하는 것은 여가, 이것은
키치가 아니다. 그리고 노예나 노동자들이 하는 것은 유흥, 이건
키치다. 이건 이미 이천년 전에 나온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부르주아집단 자체가 키치적 집단인데
현대사회 속에서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이 집단이 어떠한
형태로든간에 계급적 구분들, 혹은 계급적 지배망을 구축해가는
방식들을 개발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키치가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았는가라는 시각이 제시될 수 있고 그에 따른다면 키치는 아주
현대적인 현상 속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문: 키치적 스타일의 추구 자체가 비판적인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답: 우리나라에서는 키치를 장정일이 떠들었다. 한국에서는
키치가 저항의 문화로 등장했던 것이다. 저런걸 저항이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통렬하게 반박할까 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다. 키치가 이데올로기적 구별짓기고 은폐라는 사실은
좌파진영에서는 이미 결론 난 사실이다. 오히려 이런 키치를
가지고 무슨 저항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였다.
문: 키치는 취향의 통속화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 이는
또다시 구별짓기와 연결되는데, 장정일의 경우, 누구는 진보
누구는 반동적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키치에 대한 정치적 성격, 그리고 이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해야하나?
답: 키치예술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서 규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개별 작가, 작품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키치에서 저항성의 가능성을 볼 수는
있지만, 키치가 그런 함의를 얼마나 가지고 있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솔직히 크다. 키치를 생산하고 움직이는 동력은
자본주의적 이윤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키치예술이 가질 수 있는
추상적인 저항잠재성만 가지고 키치의 저항성을 보편적으로
설명하기는 무리라고 본다.
답: 키치의 저항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보는데, 개인적으로는
문화적 경계투쟁이 관심있는 부분이다. 내가 20대만 하더라도
구별짓기는 분명했던 듯이 보였다. 고급문화지향과
저급문화지향이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떤
순간부터 융화되고 벽이 무너지면서 구별짓는 선들이 가로세로
막 그어져 버렸다. 결국 서로 치고 박고 하는 선이 어디에
그어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참가해서
경계투쟁이 발생하는지가 관심이다.
문: 경계투쟁의 선은 특정하게 확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답: 이는 문화적인 상징자본, 권력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에 좌우된다고 생각한다.
답: 구십년 들어 놀란 사건은 비평가들내에서 내분이 벌어졌다는
사실. 과거에는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 정도가
문학비평에서의 일정한 권위를 가졌다. 이제 이들은 20억 정도의
자본을 갖고 젊고 유능한 논객들을 모아 서로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문: 이를 헤게모니 투쟁으로 보면 안되나.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가를 두고 다투는 식으로서 말이다.
답: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문제이다. 이것이 벌어지는 양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을 분석하는 문제가 고민되어야 한다.
헤게모니 투쟁의 행양상 속에서는 누구나가 진리라는
것을 상대방에 대해서 가져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즉,
저쪽은 이쪽에 의해서 키치가 되며. 서로는 서로에게 키치적
존재로 자리매김된다. 이 현상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가의
내용이 없이는 거기에 개입하기 쉽지 않다.
문: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제도는 어떻게 제도화되고
변형되었나. 이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화산업에서
실제 문화상품들을 생산하고 문화기획들을 하는 에이전트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문화산업이 어떻게 움직이는가가
좀더 주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들 문화 에이전트들은
기존의 문화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를 어떻게
유지시키고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한편 문화운동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문화상품 소비쪽에 초점을 맞추는
운동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답: 그러한 문제에 대한 지적들에 그치는 게 아쉽다. 왜
한시대를 풍미했던 노동가요가 지금은 안 불려지는가. 그렇지만
노동가요는 여전히 유의미성을 갖는다고 보는데, 노동가요의
쇠퇴현상은 노동가요를 준비하는 대안집단들이 수행하는
구별짓기 투쟁이나 문화적 헤게모니 투쟁에서 이기지 못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이것이 단순하게 저래서는
안되는데라는 식의 지적, 문화기획자들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성
문제만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내세우는 전략들, 내세우는
내용성들에 대한 점검이 없는 한, 세상은 계속 저급문화라는
내용을 저항집단들에게 딱지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답: 한국 노동자문화와 저항이 아직 주체성을 못 찾은 것 같다.
이전에 문화운동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김지하, 메아리 등등.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노동가를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 현장에서는 하나의 틀로 굳어져
있다. 한국노총, 민주노총의 노동자를 막론하고 한 두개의
노동가요쯤은 부를 수 있는 상황이 됐지만 시기에 맞는 노래를
부르는 식의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노동가를 만드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현장에서는 이전에 만들어져 있는 노래를
가지고 투쟁의 공간에서 부르는 수준이다. 이전의 파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은 대중가요에다 노래의 가사를 바꿔서 부르는 실험
등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실험들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투쟁의
공간에서 불려질 수 있는 노래는 있지만 이를 넘어 노동가요는
불려지지 않는 실정이다.
답: 사실은 이런 현상 속에서, 저항문화에 개입해 들어가고 그
성과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를 넘어가는 한 단초를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왜 문화라고 불렀는지 궁금하다. 레닌도
사회주의 2단계 투쟁을 문화혁명이라는 용어로서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문: 발표자님의 발표 잘 들었다. 사실 문화현상에 관련해 제대로
정리조차 되어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에 관해
제대로 소개를 하고 키치에 대해서도 명쾌한 분석을 하여
문화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서
고맙다.
답: 토론의 과정을 통해 자극이 되는 이야기, 생각할 꺼리를
많이 얻었다. 이론적인 공부에 치중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를
현실적으로 변형시키고 나아가 자신도 변형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여러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이야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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