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여성의 시민권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 게시판 담론을 중심으로*
1)
1. 문제 제기
19세기 후반 서구에서 대중적인 여성운동이 등장한 이래, 여성들은 남성들이 독점해 온 근대적인 권리를 자신을 비롯한 피억압자에게 확장하기 위해 싸워왔다. 그 결과,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대다수 국가에서 여성들은 투표권을 쟁취하고 비록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임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것은 여성들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남성들과 평등한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곧 시민권(citizenship)을 획득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부활한 여성운동은 이러한 형식적인 시민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여전히 다양한 불평등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제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떠한 이론도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사적인 영역을 그러한 억압의 주요한 근원지로 지목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라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명제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여성들이 사소하고 개인적이라고 생각해온 일들이 실은 대다수 여성들의 공통의 경험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것으로 여겨왔던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sexuality)가 새로운 투쟁의 영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성폭력은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을 대표하는 문제 중에 하나이다. 페미니스트들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규명해왔다. 이러한 성폭력의 편재성은 성폭력이 특정한 여성들의 개인적인 불행이 아니라 여성 집단에 대한 폭력이자 차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은 전통적으로 남성들이 독점해 온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여성을 배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직장과 학교 등 공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인 성희롱(sexual harassment)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점에서 성폭력은 여성들이 형식적인 시민권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평등하고 자율적인 구성원이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실질적인 장애라고 볼 수 있다(Pateman, 1989b; 배은경, 1997). 따라서 성폭력을 반대하는 운동, 곧 반(反)성폭력 운동은 공적인 영역을 중심으로 정의되어온 시민권을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반성폭력 운동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대략 1990년대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가정과 직장, 학교 등 여성이 존재하는 다양한 공간에서 성폭력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성폭력특별법)을 제정하고 성폭력에 대한 문제 의식을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성과를 일궈내었다.
2000년이 저물어가던 12월 11일, 성폭력 사례를 가해자의 실명과 함께 공개한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는 이러한 한국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 위에서 태동하였다. 100인위의 활동은 ‘운동사회’1)의 성폭력 문제를, ‘피해자 관점’에 입각하여, ‘가해자 실명 공개’라는 초법적인 방식을 통해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문은 100인위의 활동을 성폭력과 여성 시민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보고, 100인위가 제기한 혹은 100인위에 의해 드러난 다양한 쟁점 중에서 시민권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90년대 이래로 다양하게 전개된 반성폭력 운동 중에서 특별히 100인위 활동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100인위는 ‘운동사회’의 성폭력이 여성의 “집단적인 생존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곧 성폭력 문제가 여성이 ‘운동사회’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남성과 평등한 구성원으로 존재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100인위가 성폭력을 여성의 신체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여성이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데 있어 실질적인 장애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둘째, 지금까지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정조를 침해당한’ 여성, 곧 “울고 있는 여성”으로 여겨졌다면, 100인위 운동에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은 ‘운동사회’에서 남성과 평등한 존재임을 거부당해서 “분노하는 여성”들이다. 전자가 시민사회의 당당한 주체라기보다는 피해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적인 보호를 받았다면, 후자는 ‘운동사회’의 평등하고 자율적인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 100인위가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한 게시판에서는 100인위의 운동의 정당성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100인위가 제시한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종류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성폭력 개념과 기준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가 가장 큰 쟁점이었고, 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입장들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모두 특정한 사건을 성폭력이라고 판단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 여성과 100인위가 과연 어떤 시민적, 정치적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그리하여 100인위 게시판은 ‘운동사회’에서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시민권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100인위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이 여성의 시민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롭고 유의미한 사례이다. 이에 대해 본 논문이 구체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0년대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성 위에서 100인위의 태동 과정과 운동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100인위 활동이 고립적이고 우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지난 10여 년 간의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를 이어받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의 한계에 의해 제약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100인위 운동의 주무대가 되었던 100인위 게시판 논쟁을 분석함으로써 성폭력을 둘러싼 현재의 담론 지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 비교적 일관된 입장을 보이는 담론들을 추출하여, 각각의 담론들이 성폭력에 대해 어떤 관점과 기준을 제시하는지, 또 성폭력을 문제 제기하는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성폭력이 여성의 시민권과 어떠한 연관을 맺는지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상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여성이 진정으로 ‘운동사회’, 나아가 시민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문제의식과 실천이 필요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이론적 자원 및 연구 방법
1) 이론적 자원
(1) 성폭력과 여성의 시민권
마샬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시민권(citizenship)은 “한 사회(community)의 완전한 구성원(full member)에게 부여되는 지위(강조는 인용자)”로서, 그 지위를 지니는 모든 이들은 그것이 부여하는 권리와 의무의 측면에서 동등하다. 그것은 세 가지 요소, 곧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민적 권리는 개인적 자유로서 언론, 사상, 신념의 자유, 사유 재산을 가질 권리, 합법적인 계약을 맺을 권리, 정의에 대한 권리 등을 포괄한다. 정치적 권리는 정치체의 구성원이나 그러한 정치체의 구성원을 선출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사회적 권리는 최소한의 경제적 복지와 사회적 유산을 충분히 공유할 권리,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인 기준에 따라서 문명화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이다(Marshall, 1950).
마샬은 이러한 시민적, 사회적, 정치적 권리가 역사적으로 차례로 획득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사회학자인 월비는 이러한 마샬의 명제가 역사적으로 서구 백인 남성에 입각한 것이며, 여성의 경험과 배치된다고 비판하였다. 정치적 권리에 앞서 시민적 권리를 획득한 백인 남성과 달리 서구와 3세계의 여성들은 정치적 권리와 동시에 시민적 권리를 얻거나, 정치적 권리를 얻고 난 뒤에도 시민적 권리를 완전히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투표권 쟁취 이후에도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 이혼의 자유와 모든 형태의 임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등을 누릴 수 없었다. 성폭력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것은 여성의 신체적 자유와 남성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정의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Walby, 1997: 171~175).
성폭력에 대한 많은 경험적 연구들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경험한다는 점, 그러나 사법적 체계는 이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성을 가혹하게 다룬다는 점, 이것은 다시 남성의 폭력을 재생산한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밝혀내었다(박선미, 1989; 심영희, 1992; Hanmer and Maynard, 1989; Kelly, 1993; Kelly and Radford, 1996; Sanday, 1996). 또한 성희롱의 문제 설정은 성폭력이 여성의 신체와 성적 자기결정에 대한 침해임과 동시에, 여성을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고 여성의 경제적인 불평등을 결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MacKinnon, 1979; 정양희, 2001).
이처럼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연구와 달리, 페이트만은 사회계약론을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보다 근본적으로 근대적 시민권에 대한 논의를 비판한다(Pateman, 1989a; 페이트만, 2001). 사회계약론은 근대적 시민사회와 시민권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이론적 시도이다. 그것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 상 자유로우며 계약을 통해서 의무와 권리를 부여받고, 사회를 구성하는 평등한 성원이 되었다. 이러한 계약은 기본적으로 “언어의 교환, 즉 발화행위를 통하여”(페이트만, 2001: 93) 체결된다.
이처럼 자유로운 개인이 자발적인 동의를 통해서 사회를 구성한다는 사회계약론의 가정은 전통이나 관습을 통해서 지배를 정당화해온 봉건적 질서를 전복하는 혁명적 함의를 지닌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서구 남성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계약론자들은 이러한 혁명성이 피지배계급 전반에게 미칠 위험한 측면을 탈각시키고 시민적 복종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페이트만에 따르면, 이를 위해 계약론자들은 두 가지 전략을 채택하였다(Pateman, 1989a: 72~76).
첫째는 자발성을 가설적인 것으로 보는 것(hypothetical voluntarism)이다. 가장 익숙한 예로 로크의 ‘암묵적 동의’를 들 수 있다. 현재 혹은 미래의 세대들은 그들의 조상이 이미 사회계약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개인들은 일상의 모든 사항들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 극단적인 예는 홉스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연상태에서 여성이 아이를 기르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이가 성장한 후에도 어머니의 적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에 아이가 자발적으로 동의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는 강제된 복종을 자발적인 동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둘째는 특정한 개인들이나 사회적 관계들을 동의의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다. 페이트만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과 성적 관계를 들었다. 로크는 여성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아니라 타고난 신민들이라고 보았고, 루소 역시 여성들은 자신의 정념을 승화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성들의 공동체를 해치는 무질서의 영원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계약론자들은 여성을 근대적인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존재로 보았다. 이런 점에서 페이트만은 사회계약을 “아버지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연적 자유의 승리를 외친 남성들이 맺은 형제 계약”(페이트만, 2001: 121)이라고 비판하였다.
페이트만은 이러한 계약론의 가정이 근대적인 사법 체계와 일반인들의 관념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성폭력 문제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Pateman, 1989: 77~82). 계약론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 법체계는 성폭력과 성적 합의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강간에 대한 법정과 여론의 태도는 홉스적이다. 여성의 언어적 거부는 거부로 인정되지 않고, 피해자의 침묵 곧 (강요된) 복종은 동의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이 언어를 통한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 곧 시민권을 지닌 근대적인 ‘개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2)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근대 사회에서 여성들은 형식적인 정치적 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대적 ‘개인’, 곧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성폭력은 여성의 신체적 권리와 성적 자기결정권 등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를 침해함과 동시에, 여성을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또한 성폭력에 대한 사법 체계는 여성의 언어적 동의 여부를 체계적으로 무시한다. 이것은 여성이 언어적 동의를 통해 근대적인 사회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 곧 시민권을 지니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폭력을 시민권의 관점에서 고찰한 연구로 배은경(1997), 황정미(2001), 신상숙(2001a, 2001b)의 논문을 들 수 있다.
(2) 사회운동과 젠더
젠더(gender)는 원래 인도-유럽어족에서 명사에 부여되는, 임의적인 성별 구분(여성, 남성, 중성)을 의미하는 문법적인 용어이다. 19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관념과 역할이 문법적 성만큼이나 임의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젠더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왔다(Scott, 1998). 여성의 종속은 생물학적 운명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고, 따라서 변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젠더가 사회적 성별 관계를 의미하는 용어가 되자, 섹스(sex)는 생물학적인 영역에 남게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주로 후기 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 관점에서 이러한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다(Gatens, 1992; Chanter, 1995). “젠더: 역사적 분석에서 유용한 범주”라는 1988년 논문에서 젠더의 의미와 중요성을 옹호했던 스콧도 이러한 입장을 지닌 사람 중 하나다. 그녀는 섹스/젠더 구분은 섹스의 자연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여성과 남성간의 보편적인 차이를 가정하고, 그리하여 섹스 역시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개념이라는 것을 무시한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해결하는 문제보다 만들어내는 문제가 더 많다고 본다(Scott, 1998). 섹스와 젠더는 둘 다 성차(sexual difference)에 대한 어떤 신념의 재현이고, 자연에 대한 투명한 묘사나 반영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인지가 조직화된 구성물이라는 것이다(스콧, 2001: 215).
이런 점에서 젠더는 정치와 독립된 체계이거나 상호작용하는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정치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생산된다. ‘거세 콤플렉스’와 정치적 공포를 연관짓는 프로이트의 논의, 혁명을 지옥의 복수의 ‘여신’으로 형상화하는 에드먼드 버크의 논의 등은 정치적 위협이 성적인 위협으로 형상화되는 예이다. 또한 남성성은 다만 페니스의 소유와 부성(父性)만이 아니라 군인, 재산소유자, 과학자, 시민이라는 지위들에 의해 의미화된다. 자율성과 독립성, 자기대표의 힘과 권리들은 생물학적 페니스의 기능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같은 글: 219~229). 이처럼 젠더는 정치적 과정에 의해 생산되는 지식이자 실천이고, 젠더는 다시 정치적인 특질을 결정짓는다.
이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중간 계급 개혁가들은 노동자들을 ‘종속적이고’, ‘나약하고’, ‘매춘 여성들처럼 성적으로 착취되는’ 등의 여성적으로 코드화된 용어로 묘사했다. 이에 대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생산자’, ‘강함’, ‘여성들과 아이들에 대한 보호자’로서 노동 계급의 남성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대응하였다(Scott, 1988: 48). 이런 점은 서구 사회에서 노동 계급 형성에 대한 연구나 제국주의와 식민지 관계, 그리고 이에 대한 민족주의의 대응에 대한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지적된다(Perrot, 1986; 파농, 1998; Spivak, 1988; Chaterjee, 1993). 곧 지배 세력(부르주아, 제국주의)은 피지배 세력(노동자 계급, 식민지 민중)을 여성화하고, 이에 대항하는 피지배 세력(노동운동, 민족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전략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운동의 젠더 정치는 실제로 사회운동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조순경과 김혜숙은 우리 사회의 사회변혁운동을 주도해 온 민족민주운동 내에서의 성차별적 관행은 지금까지 구성원들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은폐되어 왔음을 지적한다(조순경․김혜숙, 1995). 그리고 이러한 성차별적 관행들이 여성들을 사회운동으로부터 배제하는 기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연구로 박현귀(1997), 권인숙(1999)의 연구를 들 수 있다.
3) 연구 방법
(1) 역사적 분석
이 논문의 첫 번째 연구 과제는 9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성 위에서 100인위 운동의 성격과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다. 100인위의 성폭력의 개념 정의와 가해자 실명 공개라는 운동 방식은 반성폭력 운동의 과정에서 발견되고 재구성된 것이다. 또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의 한계는 100인위의 활동에 대한 제약이자 이후 전개된 100인위 게시판 논쟁의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100인위 운동은 고립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 위에 있음과 동시에 그 한계에 의해 제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100인위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90년대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 논문은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논문, 자료집, 팜플릿, 인터넷 게시물 등을 통해 이러한 작업을 시도한다.
(2) 게시판 담론 분석
100인위 게시판에는 2001년 9월 20일 현재, 개인으로는 176개의 아이디,3) 단체나 조직으로는 14개의 아이디가 참여하여 1742개의 글이 등록되었고 그 분량은 A4 용지로 2000여 쪽에 달한다. 이 논문은 질적인 내용분석의 방법을 사용하여 게시물에 나타난 담론들을 분석할 것이다(이만갑․한완상․김경동, 1979). 질적인 내용분석은 텍스트의 단어와 문장들을 분석대상으로 삼아서, 거기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와 문장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추론하여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어떤 담론이 생산된 시기의 정치사회적 맥락, 담론 주체의 특성 등을 질적으로 고려하면서 생산된 담론의 의미를 추론할 수 있다(구도완, 1994: 116).
100인위의 게시판 논쟁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 객관성 문제, 피해자에 대한 논란, 프리섹스주의, 가해자 인권 등 성폭력을 둘러싸고 참으로 다양한 쟁점들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대체로 ‘성폭력은 무엇이며 누구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로 수렴된다. 이것은 성폭력에 대한 관점, 성폭력 판단의 기준, 그리고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 여성에 대한 이해로 정리될 수 있다. 이 문제들은 100인위 논쟁의 중심축이자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들을 둘러싸고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등장하였다. 이처럼 복잡하고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입장들을 분석한 결과, 비교적 일관된 입장을 보이는 세 가지 담론을 추출할 수 있었다.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 성적 자유주의 담론, 페미니스트 담론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각각 성폭력과 섹슈얼리티를 둘러싸고 진행된 1990년대 논의의 역사성을 배후에 깔고 있으며,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 생산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각 입장을 시민권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3. 90년대 한국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와 100인위 운동
3장에서는 90년대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이 각 시기와 운동 주체별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100인위 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인 고찰을 바탕으로 100인위 운동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먼저 90년대 초반 여성단체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의 법제화를 통해 여성의 시민권을 보장받고자 한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성단체는 성폭력을 ‘정조에 대한 죄’로 규정한 기존 형법을 비판하고, 여성의 관점에서 성폭력을 정의하고자하였다. 그런데 성폭력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논쟁과 실천의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다. 이 시기 여성단체들도 성폭력의 개념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성폭력은 ‘성적인 폭력’, 곧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정의되었다. 성폭력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여성이 비로소 자신의 신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결정권을 지닌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성폭력특별법 제정 과정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여성단체의 정의가 누락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판단 가능한지는 여전히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이처럼 초기 성폭력의 법제화를 통해 여성의 시민권을 보장받고자 한 여성단체의 시도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다. 그러나 성폭력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직장과 학교 등 다양한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1993년 서울대 신정휴 교수 사건을 필두로 직장 내 성희롱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것은 소수 일탈자에 의한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만이 성폭력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들 역시 성폭력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을 의미하는 성희롱이 ‘희롱’으로 번역됨으로써 성폭력은 심각한 범죄이고, 성희롱은 가벼운 범죄라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인 실정이다. 성희롱 문제는 또한 성폭력이 여성의 신체와 인격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여성을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하는 기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여성이 공적인 영역에서 남성과 평등한 시민이 되는데 있어서 성폭력이 실질적인 장애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은 여성단체의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 위에서 그것을 더욱 급진화시켰다.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일 뿐 아니라 여학생들의 ‘시민권’에 대한 침해로 확장되었고, 성폭력 판단에 있어서 피해자의 관점이 가장 일차적인 준거로 대두되었다.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할만한 점은 성폭력 해결 방식의 하나로 가해자 실명 공개 사과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폭력을 대학 공동체의 문제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공개 사과는 성폭력의 피해자에 대한 사과일 뿐 아니라 대학 구성원들 전체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폭력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은 이후 100인위의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90년대 성폭력 문제의 제기가 뒤늦게 도달한 곳은 ‘운동사회’이다. 이는 사회운동이 젠더적 관점을 결여하고, 지배 집단과의 도덕적인 경쟁을 의식해 조직 내부의 문제 제기를 억압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90년대 후반에 ‘운동사회’의 이러한 성차별적인 관행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100인위 운동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100인위는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를 법에 의존하기보다는 공동체 내부의 공개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100인위는 ‘가해자 실명 공개’라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성폭력의 문제를 공론화함으로써, 성폭력으로 인해 ‘운동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침해받았던 여성 활동가들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00인위 운동은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100인위는 성폭력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종류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급진적으로 규정하였다. 이 개념은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 속에서 도출된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가 법적, 제도적인 차원에서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논쟁적인 문제로 남아있다.
이처럼 100인위 운동은 ‘운동사회’ 여성들의 시민권의 문제 제기라는 측면과 급진적인 성폭력 규정의 측면을 동시에 지닌다. 이 중에서 100인위에게 더욱 중요한 문제의식은 전자라고 볼 수 있다. 100인위의 입장글(100인위, 2000a, 2001)이 보여주듯이, 100인위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운동사회’ 성폭력이지, 성폭력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100인위 게시판에서 논쟁된 것은 100인위가 자명하게 받아들인 성폭력의 개념과 기준이었다. 이처럼 논쟁이 100인위의 애초의 의도와 달리 성폭력 자체에 대한 논의로 굴절된 것은 일차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이라는 공간이 운동 주체의 문제의식에 따라 마음대로 통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확고한 정의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100인위 운동과 이후 전개된 게시판 논쟁은 90년대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에서 출발함과 동시에 한계에 의해 제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00인위 게시판은 현재 한국의 성폭력 담론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신상숙은 100인위 사건은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며,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100인위의 ‘효과’로 모습을 드러낸 성폭력 담론의 논쟁적 지형”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신상숙, 2001a). 따라서 100인위 게시판을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성폭력에 대한 담론의 구도와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
100인위 게시판에는 성폭력의 개념 정의와 기준, 가해자 실명 공개, 프리섹스주의, 객관성과 경험 등 다양한 쟁점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게시판을 분석한 결과, 성폭력의 개념 정의와 기준이 가장 큰 쟁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모두 특정한 사건을 성폭력이라고 판단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 여성과 100인위가 과연 어떤 정치적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100인위 게시판을 분석함으로써 성폭력과 여성의 시민권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4. 100인위 게시판에 나타난 성폭력 담론
1) 100인위 게시판의 논쟁들
100인위가 ‘운동사회’ 성폭력 가해자 16인의 명단을 공개한 2000년 12월 11일 이후,4) 100인위 게시판에서는 100인위의 성폭력 기준과 실명 공개의 정당성 등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2001년 9월 20일 현재, 개인으로는 176개의 아이디, 단체나 조직으로는 14개의 아이디가 이 논쟁에 참여하였고, 1742개의 글이 등록되었으며, 글의 분량은 A4로 2000여장에 이른다.
이 논문은 이러한 100인위 논쟁이 성폭력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떻게 판단될 수 있는지, 그리고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각각 성폭력에 대한 관점과 기준, 그리고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 이 세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100인위 게시판의 텍스트를 분석한 결과, 크게 세 가지 입장이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1990년대 성폭력 담론의 역사성과 각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각각을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 성적 자유주의 담론, 여성주의 담론으로 명명하였다.
90년대 들어 여성 연구자들과 여성 활동가들은 한국 사회운동의 가부장성을 지적해왔다. 여성단체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회운동 세력은 운동의 ‘대의’를 지키고 지배 집단과의 도덕적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내부의 성차별적 관행을 묵인해왔다는 것이다(조순경․김혜숙, 1995; 박현귀, 1997). 전통적인 성역할에 따른 일의 분담, 조직 내에서의 여성 배제, 남성중심적 성문화, 여성의 성적 대상화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의 기저에는 계급운동/노동운동/정치투쟁만을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여성문제를 부차적이고 주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성맹성(gender-blindness)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되었다((이박)혜경, 2001).
100인위는 ‘운동사회’의 다양한 성차별적 관행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몇몇 가해자들과 가해자 소속 단체는 100인위 활동이 ‘운동사회’의 도덕성을 훼손함으로써 ‘운동사회’를 음해하려는 시도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반응은 이미 100인위 이전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조합 등 ‘운동사회’의 성폭력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바로서(보건의료노조 성폭력 사건 피해자, 2000; 수원대 성폭력 사건 대책위, 2000; 엄혜진, 2000; 정양희, 2000; 정주연, 2000), 전형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 사회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런 입장의 역사성을 고려하여, 이를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운동사회’라는 공동체의 도덕성을 근거로 100인위를 비판하였다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개인의 성적 자유라는 측면에서 100인위를 반대한다. 이 입장은 개인의 ‘자연스러운’ 성적 욕망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회적인 제재가 최소화되거나 궁극적으로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본다. 100인위의 반성폭력 운동 역시 이러한 사회적인 제재 혹은 권력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입장은 100인위 논쟁에서만 고립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90년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성담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마광수, 장정일, 박일문, 김완섭 등 주로 남성 지식인과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주창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적 쾌락을 중요하게 여길 뿐 아니라, 지배 권력을 비웃고 그것에 대항하는 무기로 이해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법부 등 보수적인 지배 세력은 이들의 작품을 검열하고, 심지어 이들을 구속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주의의 탄압은 오히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스스로를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진보적인 세력으로 자임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 대립하는 또 하나의 세력은 여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주창하는 성적인 쾌락은 여성을 사물화하고, 정복하는 모티프로 구성되어 있다고 비판하였다(고갑희, 1997; 조주현, 2000). 매춘 여성을 미화할 뿐 아니라 모든 여성이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고 설파했던 ꡔ창녀론ꡕ의 저자 김완섭은 성해방을 위해서는 ‘성폭력 특별법’과 ‘윤락 행위 등 방지법’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갑희, 1997: 341~342).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와 여성주의는 성적 자유와 해방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로 인해 갈등과 대립의 여지가 많다.
1920~30년대와 1960~70년대 두 차례의 성혁명(sexual revolution)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보다 성적 자유주의의 출현이 빨랐던 서구 사회에서는 성매매, 성폭력, 포르노그라피 등을 둘러싸고 성적 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대립이 보다 분명하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성적 자유주의(sexual liberalism)라는 명칭은 이러한 오랜 논쟁과 대립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들은 도덕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적 쾌락을 추구하고, 섹슈얼리티를 개인 차원에서 해석함으로써 성별 권력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Kappeler, 1990; Jeffreys, 1990a).
100인위 논쟁에 등장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 역시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담론을 주창하는 이들은 주로 한국에서 성적 자유주의가 출현한 9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그것에 대체로 동의하는 젊은 남성들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서구의 성적 자유주의와 90년대 한국의 성담론의 역사성과 담론 생산 주체의 특징을 고려하여 이러한 입장을 성적 자유주의 담론으로 명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운동사회’ 성폭력 문제를 제기한 100인위와 100인위를 지지하는 입장을 여성주의 담론으로 명명하였다.5) 성폭력이 나쁘고,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원칙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지만, 성폭력이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해결할 지에 대한 입장은 다양할 뿐 아니라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인 통념을 지배해왔던 보수주의적 입장은 성폭력의 원인을 배꼽티를 입거나, 술에 취하거나, 밤늦게 돌아다니는 여성에게 있다고 보고, 여성을 단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울러 성폭력을 행하는 일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성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는 것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형식적으로는 성폭력에 반대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성폭력을 여성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집단에 대한 구조적인 억압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사회적인 해결의 필요성을 역설한 여성주의적 입장과 대립된다. 100인위와 100인위를 지지하는 입장을 반성폭력 담론이 아니라 여성주의 담론으로 이름 붙인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60년대 후반 서구에서 여성운동이 부활한 이래, 성폭력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 중에 하나가 되어 왔다. 에드워즈는 강간이 성매매나 낙태와 달리 모든 여성들이 입장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초기 여성운동에서 지배적인 이슈였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1971년 그리핀이 “강간: 모든 미국인의 범죄”를 발표한 이후 전개된 성폭력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많은 사회에서 남성성의 일차적 요소로서 섹슈얼리티, 공격성과 폭력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둘째, 강간과 ‘정상적’ 이성애의 삽입성교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셋째, 강간은 성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집단적 지배, 곧 정치적 행동이자 테러리즘이다. 넷째, 여성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피해를 배상하는 법률적, 사법적 체계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Edwards, 1987: 18~19). 이러한 입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성폭력 운동을 정치적인 운동으로 이해하고 이를 주도한 페미니스트들이 대체로 공유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여성운동과 여성학 역시 성폭력에 대해 이러한 관점을 발전시켜왔다(이명선, 1989; 심영희, 1992, 1998; 이성은, 1995; 권수현, 1999; 변혜정, 1999; 민경자, 1999). 특히 한국의 보수적인 형법에 대항하여 성폭력 정의에 있어서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과 피해자의 관점이 강조되었고,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여성의 동의 여부가 중요하게 부상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대학의 반성폭력 운동과 100인위 운동 역시 이어받고 있다.
이러한 담론의 역사성을 고려하여 100인위 게시판 논쟁에서 100인위를 지지하는 입장을 여성주의 담론으로 명명하였다. 담론의 주요 생산 주체는 ‘운동사회’ 여성 활동가들과 여성 연구자들, 그리고 일부 젊은 남성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90년대 반성폭력 운동,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의 급진적인 반성폭력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성폭력을 성별적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문제로 바라보고, 100인위의 급진적인 성폭력 기준과 가해자 실명 공개 방식에 동의한다. 따라서 여성주의 담론은 100인위를 비판하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 대립하게 된다.
2) 논쟁에서 드러난 담론 1: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
(1) 성폭력을 바라보는 관점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의 주요 생산 주체는 100인위가 공개한 일부 가해자들과 가해자 소속 단체이다. 대표적으로 사례 5번6)과 사례 11번 가해자, 그리고 사례 17번 가해자 소속 단위인 KBS 노동조합 8대 집행부를 들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운동사회’를 지배 집단과 대립되는 단일한 진영으로 사고한다. 지배 집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운동사회’의 단결이 중요하다. 따라서 ‘운동사회’에 속한 남성이 저지른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내부의 분열을 조장할 뿐 아니라 ‘운동사회’의 도덕성을 훼손할 수 있으므로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이것은 ‘운동사회’ 성폭력 피해자가 침묵을 지키도록 직․간접적으로 강제되는 결과를 빚는다.
‘운동사회’ 남성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이 은폐되는 것은 경찰이나 미군 등 지배 집단의 남성이 자행한 성폭력 문제가 크게 공론화되는 것과 대조적이다. 86년 ‘부천서 문귀동 성고문 사건’이나 92년 ‘케네스 이병의 윤금이 살해사건’의 경우, 당시 사회운동은 이를 노동자 혹은 민족을 탄압하는 지배 집단의 폭력으로 표상하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대해 사회운동이 이 사건들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이라는 점은 무시하고 계급 문제, 혹은 민족 문제로만 해석함으로써 지배 집단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투쟁으로 이용하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정희진, 1999; 이상록, 2001a, 2001b).7)
이런 점에서 가부장적 사회운동은 성폭력을 성별적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지배 집단의 남성과 ‘운동사회’ 남성의 도덕성 경쟁의 문제로 바라본다. 정작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의 위치는 지워져 버린다. 이런 태도는 100인위 게시판에서도 등장한다.
세련된 중산층 남성들 … 과 운동권 남성들을 단순 비교하여 운동권 남성들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 결국 그 남성본위 사회를 향한 사투에서 동지가 되어야 할 세력에게만 뒤에서 칼을 날린 셈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Guest, “한 마초의 고백”, 2000.12.31.)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검증절차도 없이 선거전에 이용하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만 그 진실 말이다 … 상대후보가 이를 선거전에 원 없이 이용한 덕에 … (바이, “[펌] KBS건에 대한 KBS노조의 입장”, 2001.3.6.)
위 인용문에서 성폭력은 ‘운동권 남성들’ 대(對) ‘세련된 중산층 남성들’의 문제로, 노동조합의 현 집행부 대(對) ‘상대후보’의 문제로 등장한다. 따라서 100인위의 반성폭력 운동은 “운동권 남성들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것이자, “상대후보가 선거전에 원 없이 이용”하는 빌미를 주는 행위로 이해된다. 성폭력 문제가 ‘운동사회’와 지배 집단(혹은 상대 진영)의 도덕적, 정치적 경쟁 논리에 의해 압도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자명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폭력 사건은 ‘운동사회’ 혹은 지배 집단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공격할 수 있는 도구로만 이해될 뿐이다. 따라서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에서는 100인위의 급진적인 성폭력 개념과 정의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100인위 게시판 논쟁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 대(對) 여성주의 담론’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성적 자유주의 담론 대(對) 여성주의 담론’의 대립구도로 전개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00인위가 일차적으로 비판하고자 했던 세력이 ‘운동사회’ 내부의 성폭력 문제를 침묵시켜온 가부장적 사회운동임을 감안하면, 이런 구도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인지할 수 있는 문제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을 구사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폭력이 아니라 성폭력 문제 배후에 있는 정치적 세력과 그것이 ‘운동사회’에 미칠 영향인 것이다. 따라서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에게는 성폭력 문제를 어떤 개념과 기준을 가지고 제기했는지는 크게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2)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에 대한 이해
‘운동사회’를 단일한 진영으로 사고하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가해자 개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운동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인다. 아래 KBS 노동조합의 입장은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두 여성의 주장과 ‘100인위’의 무책임한 폭로는 부위원장 개인은 물론이고 KBS 노동조합, 나아가 KBS에 대한 중대한 명예훼손이다 … 선배들이 정말 ‘피땀 흘려’ 쌓아온 진보의 발걸음에 더 이상 먹칠을 하지 마라. (바이, “[펌] KBS건에 대한 KBS노조의 입장”, 2001.3.6.)
인용문에서 KBS 노조는 피해 여성들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가해자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진보운동에 “먹칠”을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가해 남성=가해자 소속단체=선배들이 ‘피땀흘려’ 쌓아온 진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처럼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에서 가해자 개인은 ‘운동사회’ 전체로 확장되고, ‘운동사회’는 가해자 개인으로 환원된다. 곧 가해 남성은 ‘운동사회’와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화신(化身)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운동사회’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운동사회’ 외부에서 ‘운동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운동사회’의 도덕성을 훼손하는 존재로 낙인찍힌다는 점은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의 성차별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상정하는 ‘운동사회’가 남성들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운동사회’가 남성들의 공동체로 이해될 때, ‘운동사회’ 내부의 여성들의 위치는 어떠한가? 여성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은 여성 활동가들이 ‘운동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동사회’와 결별해야 하는 딜레마에 부딪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조순경․김혜숙, 1995; 박현귀, 1997; 서정영주, 2001; 시타, 2001).
여성이 가부장적 사회운동의 논리를 수용할 때, 여성은 ‘운동사회’의 구성원, 곧 ‘남성’이 됨으로써 공동체에 흡수된다. 게이튼스의 표현을 빌면, 여성들은 ‘운동사회’라는 “정치적 몸(the body politic)에 완전히 포섭되어 내장 등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제공함으로써 몸의 단일성을 유지시켜”줄 뿐이다(게이튼스, 2001: 107). 여성이 남성과 성적 차이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은 부정된다. 그러나 여성들이 이에 저항할 때 여성은 공동체 외부에서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로 가시화된다. 이렇듯 ‘운동사회’ 내부의 여성의 위치는 모호하고 모순적이며, 이것은 ‘운동사회’의 여성들을 쉽게 공동체 밖으로 배제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적 기제가 된다.
앞의 인용문은 이러한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의 논리를 잘 보여준다. 인용문에 등장하는 “두 여성”은 KBS 노조의 상근자로서 이들 역시 노조의 성원이다. 하지만 부위원장의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자마자, 이들은 더 이상 노조의 구성원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노조의 외부에서 노조를 위협하는 존재로 표상된다. 이처럼 피해 여성을 ‘운동사회’로부터 배제함으로써 가해자 개인 혹은 그를 둘러싼 집단은 ‘운동사회’ 전체로 동일시된다.
가해자 집단과 동일시되는 ‘운동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피해 여성의 언어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대략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는데, 그 중 하나는 피해 여성을 정신적으로 취약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자신이 직접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으로 고백했고 … 알콜중독으로 인한 판단력 장애와 우울증상, 히스테리를 앓고 있는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tsWOM100, “[펌/사례5번 가해자]100인위원회, 광기 어린 정신병자들의 행진”, 2000.12.14.)
끝으로, 이른바 피해자 K에게 세 번째 사과를 드린다. 하루 빨리 성폭행에 대한 피해망상증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건강을 되찾아 운동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시타, “[펌] 사례11 가해자 글”, 2001.1.3.)
인용문에서 여성들은 “판단력 장애”, “히스테리”, “피해망상증”을 앓고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여성들의 언어를 신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지정하는 위치를 벗어날 때, 여성의 언어는 ‘정상적인’ 인간의 말로 인정되지 않는다.8)
또 다른 방식은 여성들을 지배 집단이나 상대 진영에 이용되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다. 주목되어야 할 것은 이 여성들 배후에 있는 정치 집단의 의도이지 여성들의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성폭력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운동사회’로부터 분리된 여성들은, 상대 남성 집단으로 서둘러 귀속되어 버린다. 100인위를 지배 집단의 하수인, 곧 ‘프락치’로 보는 사례 5번과 11번 가해자의 반박문은 이러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00인위원회(이하, 백)의 발표는 명백한 백색테러 행위다 … 그들은 결과적으로 진보운동에 분열을 내고, 진보운동의 대의를 흐트리고, 진보운동에 해악을 가져오는 프락치 세력이라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tsWOM1009), “[펌/사례5번 가해자] 100인위원회는 명백한 프락치세력이다!”, 2000.12.14.)
지배권력의 정보기관과 수구언론에 운동권에 대한 공격의 무기를 제공하여서는 안 된다 … 그것은 100인위원회에 침투한 프락치의 소행일 것이다. (시타, “[펌] 사례11 가해자 글”, 2001.1.3.)
이처럼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정신적으로 취약한 존재, 혹은 지배 집단에 이용당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모두 여성들을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 곧 과소개인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이것은 가해 남성을 ‘운동사회’ 그 자체, 혹은 화신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운동사회’를 남성적 공동체로 상정한다. 따라서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함으로써 남성 모델을 수용하는 여성들은 구성원으로 인정하되,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배제한다. 성폭력은 이러한 배제가 작동하는 대표적인 기제이다. 이것은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운동사회’의 여성들을 남성들과 평등한 구성원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민권을 “한 사회의 충분한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자격”(Marshall, 1950)으로 정의할 때, 이것은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운동사회’에서 여성의 시민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논쟁에서 드러난 담론 2: 성적 자유주의 담론
(1) 성폭력에 대한 관점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자유주의적 인간관을 공유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사회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고, 사회의 구속에 대항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한다. 사회는 이러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상정된다. 따라서 개인은 언제나 사회에 선행하는, 초월적이고(disembodied) 원자적이며, 추상적인 존재인 것이다(Frazer and Lacey, 1993: 45).
둘째, 성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개인의 자유 중에서도 특히 성적인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Brownmiller, 1975; Heller, 1990; Jeffreys, 1990a, 1990b; Kappeler, 1990; Rush, 1990). 이들은 기존의 도덕적인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난 성적 자유를 주창하거나, 자유로운 성행위가 이러한 억압에 대항하는 무기라고 보기도 한다.
100인위 게시판에서도 이러한 논리를 공유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등장하였다. 이 담론의 주요 생산 주체는 한국에서 성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90년대 무렵에 대학을 다닌 젊은 남성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적인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적 쾌락을 추구한다. 아래 인용문은 이러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섹스라는 걸 스포츠 정도로 보는 시각이 주를 이룰 겁니다. (pyein, “섹스하기 싫어하는 여자..”, 2001.1.21.)
나 여러 여자 따먹었어 라는 말처럼 여자들도 나 여러 남자 따먹었어 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에이 씨, 그래도 저 놈 따먹고 헤어졌으니 다행이네”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숲의정령, “tamara님.....”, 2001.1.5.)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섹스는 “스포츠”처럼 즐겁게 누리는 것이며, 여성들도 이를 누릴 수 있다고, 아니 누릴 수 있도록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원자적이고 추상적인 ‘개인’들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욕망의 충돌의 문제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지배 집단과 ‘운동사회’의 대결, 곧 공동체와 공동체의 문제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대조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성폭력이 설령, 그 발생의 구조적 메커니즘이 남성권력이 작동한다손 치더라도 그 구체적 행위는 개인 & 개인의 관계입니다. (천이, “[to 474] 역차별 & 권력관계 개념의 “남용”에 대해”, 2001.1.9.)
모든 것을 구조 탓만 해서는 안되지요. 성폭력 사건은 개인을 뛰어넘는 사회적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 사례들은 개인의 문제를 뛰어넘는 사례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pyein님이나 저의 입장이겠지요. (미구엘, “odradek님에 대한 답변은 여기에...”, 2001.2.8.)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이 원칙적으로는 사회적 문제일 수 있다고 보는 듯 하지만, 실제로 개별 성폭력 사건에 접근할 때는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파악한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이렇게 성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이해함으로써 성별간에 작동하는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과 개인의 문제로 다루어야 할 성폭력 사건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100인위의 시도는 사적인 관계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억압적 행위로 이해된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바람둥이의 행위는 성폭력이며 이를 공적 권력으로 막아보겠다는 발상은 파쇼국가에서 가능한 일이지요. (pyein, “답합니다. 시타, 울타리, 선인장님..”, 2001.1.4.)
아무튼, 전 개인의 가치관 (그게 어떤 가치관이건 간에!) 자체가 판결문의 준거로 작용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단히 대단히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입니다. 국가보안법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숲의정령, “이런.. 제가 실수한건가요? ^^”, 2001.1.5.)
위의 인용문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피해자와 100인위가 성폭력으로 판단한 사건들을 “바람둥이의 행위” 혹은 “개인의 가치관”의 문제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성폭력 사건으로 공개한 100인위는 “파쇼국가”의 “공적 권력” 혹은 “국가보안법”에 비유한다. 이처럼 성폭력을 개인의 사생활로 해석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자 여성 집단의 시민권의 문제로 이해하는 여성주의 담론과 대립한다.
또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과 욕망의 문제로 이해한다. 따라서 성폭력을 폭력의 문제로 접근하는 여성주의 담론과 대립한다. 폭력과 성의 경계가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주의 담론은 이를 폭력의 문제로 바라보는 반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욕망의 문제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태도는 다음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1) 성관계를 갖다가, 남자가 여자의 옆구리를 세게 때렸습니다. 이것은 ‘성폭력’입니까? ‘폭력’입니까?
(2) 성관계를 갖다가, 남자가 여자의 양팔을 붙잡고 얼굴에 방뇨를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성폭력이 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 세상에는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성행위를 즐기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삶의평화, “임의로 왜곡편집된 오늘의 책 사례..성폭력인 이유는????”, 2001.2.10.)
인용문에서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성관계는 “대중적이지 않은 성행위”로 묘사된다.10) 이것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폭력성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히려 그러한 폭력성은 자연스러운 욕망의 일부로 이해된다.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성적 욕망을 실현할 자유에 대한 침해인 것이다. 그리하여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논리 내부에는 ‘반(反)성폭력=반(反)섹스=성적 엄숙주의’의 등식이 성립한다.
여성이 성적인 약자라는 이유로, 성 자체를 지극히 억누르게 되는 이중적인 모습, 그 와중에 기윤실 같은 곳과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가리켜 성적 엄숙주의라고 비꼬는 겁니다. (숲의정령, “푸름님, 말씀 잘 하셨습니다”, 2001.1.5.)
그리고 그러한 사회는 성적 엄숙주의와 경건주의가 만연하는 아주 숨막히는 성적 이중성을 재생산할 뿐이다. (천이, “백인위]파쇼와 싸우다 파쇼를 닮아가는??”, 2000.12.3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한편으로는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해석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폭력이 아니라 욕망의 문제로 해석한다. 그래서 욕망의 실현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을 부인하며, 설령 폭력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적인 자유를 위해서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으로 이해하고 이를 반대하는 반성폭력 운동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적인 권력 혹은 도덕적인 억압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상정하는 ‘개인’이 누구인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개인을 원자적이고 초역사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성별은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과 남성 모두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동시에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다. 이것은 폭력적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는 대다수의 경우 남성들에게만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폭력을 욕망의 문제로 해석함으로써 폭력성을 기각하는 것은 여성들의 이해보다는 남성들의 이해에 부합한다. 이런 점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상정하는 개인은 형식적으로는 성중립적인(gender-neutral) 존재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 입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추구하는 쾌락 역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다. 앞에서 인용한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성관계의 예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남성의 쾌락을 위해서 여성은 구타나 “방뇨”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급진적인’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삽입) 섹스와 이성애적인 욕망을 거부하는 여성을 극심하게 비난한다. 아래 인용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것은 어떠한 형태든 개인의 성적 자유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주장과 모순된다.11)
“섹스하기 싫어하는 증세”는 사실 정신병입니다. 선진국이었으면 바로 정신병원에 집어넣어야 될 사람이지요 … 제가 비판하는 부류는 남성 혐오증과 섹스 공포증이 뒤범벅되어 있으면서도 이런 정신병 증세를 마치 진보적 여성 이데올로기로 포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pyein, “섹스하기 싫어하는 여자..”, 2001.1.21.)
이처럼 (삽입) 섹스와 이성애를 거부하는 여성을 “정신병원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다시 말해서 병리화하는 것은 미국의 성혁명 당시에 풍미했던 성과학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성과학은 남성의 공격성을 자연화하고, 여성은 이러한 공격적인 성욕의 대상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성 중심성을 드러내었다.12) 그리고 이러한 성적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 여성들은 불감증(frigidity)이나 억제(inhibition)13) 등의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Jeffreys, 1990a, 1990b).
이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은 성적 자유주의가 주도한 성혁명과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성과학이 남성의 욕망을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Brownmiller, 1975; Heller, 1990; Jeffreys, 1990a, 1990b; Kappeler, 1990; Rush, 1990). 대표적으로 제프리즈는 성혁명은 당시 노동시장에 참여함으로써 지위가 상승하기 시작한 여성들에 대항한 반혁명(counterrevolution)이라고 비판한다. 성혁명은 기혼여성뿐 아니라 독신 여성까지도 남성지배/여성종속의 섹스로 징집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성적 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보다 30~40년 앞서 등장한 미국의 경우, 성적인 자유가 남성의 권력과 폭력을 더욱 증대시켰다는 비판들이 제기되었다(Jeffreys, 1990a; Gold and Villari, 2000). 성적 자유주의와 이를 뒷받침하는 성과학이 가장 풍미했던 5, 60년대, 이른바 2차 성혁명 시기는 성별 권력 관계를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오히려 1, 2차 성혁명 시기인 1931년부터 76년까지 미국의 강간 범죄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고, 특히 그 증가율은 1956년~71년에 가장 높았다. 이를 두고 한 여성은 성혁명은 “남성들의 야수성과 적대감, 착취성을 해방시켜주었을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Sanday, 1996: 162~163). 이것은 성폭력을 욕망과 쾌락의 문제로 해석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지니는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2) 성폭력의 판단 기준
① 가해자의 의도
100인위는 성폭력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피해자인 여성의 관점이 성폭력의 일차적인 판단의 준거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성폭력이 가해자의 경험이 아니라 피해자의 경험이고, 따라서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판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의 관점이 성폭력 기준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하고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여성의 관점에 입각하여 성폭력 사례들을 공개한 100인위를 비일관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한다.
술자리에서 콘돔으로 풍선을 분 것은 성폭력이 되고, 종묘 공원에 여성의 성기 조형물을 걸어 놓는 것은 예술이라는 정신분열적 주장. (삶의평화, “그러면서 순결서약은 비난하는 분열적 모습!!!!”, 2001.1.17.)
더 나아가 합리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 “기존의 합리는 남성들의 합리이기에 우리가 따를 필요 없다”라고 그간 주장해 왔었으니까요. (숲의정령, “괜한 헛수고..”, 2001.3.28.)
이러한 비판의 저변에는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이라고 판단하는 여성 주체에 대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피해를 입고도 혹은 피해를 입는 과정에도 가해자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당시에는 피해라고 인지하지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 성폭력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여성을 불신하는 근거가 된다.
“너의 메일이 수북히 쌓여 있구나. 미안해 답장 못해서.” 이런 편지를 보내놓은 사람이 그 당시 스토킹으로 공포감에 시달려 밤을 세우리라고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요? (pyein, “더 궁금한 것 두 가지”, 2001.2.8.)
연애관계가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즉시 거부를 하고 그래도 계속했으면 그 당시에 공개 실명 대자보를 붙였어야지요. (pyein, “답합니다. 시타, 김보명, 선인장님..”, 2001.1.4.)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피해 여성을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이러한 여성의 관점을 성폭력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인간관에 입각하여, 구체적인 현실과 권력 관계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을 상정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에 선행하는 초역사적인 개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적이고 단일한 판단 기준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현재 어떤 사건을 성폭력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발생 당시에 이미 성폭력으로 판단되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개인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피해 여성에게 적용하기 때문에, 피해 여성은 대체로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간주된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피해 여성을 불신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피해 여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고의로 성폭력을 왜곡하거나 부풀릴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단, 강간당했다고 무조건 강간당한 것은 아닙니다. 꽃뱀일 가능성도 있지요. 이 세상엔 착한 여자만 있는 법은 결코 아닙니다. (숲의정령, “tamara님.....”, 2001.1.5.)
나중에 헤어지고 (남성이어도 마찬가지인데) 그 여성이 일종의 복수 심리로 남성을 상대로 ‘성폭력’ 문제로 고발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천이, “백인위]파쇼와 싸우다 파쇼를 닮아가는??”, 2000.12.30.)
이렇듯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의 일차적인 기준으로서 피해자의 관점을 도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여성의 관점은 자의적이고 주관적이며, 모순적이고 혼란스럽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여성은 남성의 명예와 재산을 노리는 “꽃뱀”이거나, 헤어지고 난 뒤의 “복수 심리”로 성폭력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내거나 왜곡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이러한 피해자 관점보다는 가해자의 의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성폭력 판단의 근거를 ‘피해자 관점’으로부터 ‘가해자 관점’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성폭력이 여성의 경험이라는 사실은 무시된다.
어떠어떠한 피해가 있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가해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피해는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미구엘, “예전에 읽었던 스토킹 관련서적...(영국의 사례)”, 2001.2.10.)
<거부의사표현> 이.후.부.터.로. 개념이 성립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고의성이 전혀 없는 성적인 농담들은 십중팔구 성폭력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천이, “백인위]파쇼와 싸우다 파쇼를 닮아가는??”, 2000.12.30.)
위의 인용문은 가해와 피해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고의성”이 없었다면 “성폭력을 감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성폭력 피해라는 결과는 가해 혹은 가해 의도, 곧 “고의성”과 분리된다. 이것은 가해 의도가 없었으면 피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며, 그 피해는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피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가해자의 의도, 곧 가해자의 관점이 성폭력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을 ‘개인’에 미달할 뿐 아니라, 고의로 성폭력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존재로 불신한다. 따라서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피해자 관점 대신 가해자의 의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지점에서 모순과 한계가 있다.
첫째, 폭력과 욕망, 혹은 폭력과 성이 연속적인 경험이라고 볼 때, 여성이 둘 사이를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인 기준을 지닌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구나 분노나 불쾌감을 느꼈다고 해서 ‘즉각’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으며 ‘당장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연애나 동료 관계에서 느끼는 수치심, 혐오감, 분노라는 감정은 본능적인 반사감각이라기보다 맥락적 상황에서 해석적 행위를 통하여 도달하는 이해이기 때문이다(신상숙, 2001b: 29).14)
둘째, 여성들이 성폭력 사실을 왜곡하거나 부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은 원칙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실증적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이 실제로 남성을 성폭력 가해자로 거짓 고소할 확률은 다른 범죄와 같은 수준인 2~3%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다(Tong, 1984: 101). 이 통계가 우리 사회보다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해결 방식이 앞선 미국의 것이라는 점, 또 한국에서 정조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하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러한 비율은 더욱 낮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죄와 달리 유독 성폭력 피해자들은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불신하는 것은 성차별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왜 피해자의 관점에 비해 가해자의 관점이 더욱 합리적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적용했던 엄격한 자유주의적 개인의 기준을 가해자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가해자에게 ‘왜 피해자가 직, 간접적으로 거부를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행위를 지속하였는가’, ‘그러한 행위를 지속해도 된다고 판단한 객관적 기준은 무엇인가’,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왜 미리 생각해보지 않았는가’, ‘설령 자신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해도, 행해진 결과에 대해서 왜 책임지지 않는가’ 등의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들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형식적으로는 성중립적인 개인을 상정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의 이해와 경험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준다.
② 명백한 거부 의사의 언어적 표명
90년대 한국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을 ‘동의 없이 행해진 성적 언동’으로 규정함으로써, 동의 여부가 성폭력 판단의 기준임을 주장해왔다(변혜정, 1999; 민경자, 1999). 100인위 역시 이러한 기준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의 동의를 성폭력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거부하다간 몇 대 두들겨 맞거나 강간당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면 거부의사를 표명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숲의정령, “동의, 합의, 거부에 대한 생각”, 2001.1.5.)
인용문은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대 두들겨 맞거나 강간당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거부의사를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성폭력을 가해자의 가해가 아니라 피해자의 저항 여부로 판단하는 태도이다. 이처럼 성폭력 판단의 기준을 가해자의 행위가 아니라 피해자의 행위로 이동시키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태도는 다음의 인용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피해자가 “싫어. 전화하면 신고할 거야.” 이 말만 제대로 해줬으면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pyein, “미숙아에게 공개사과까지 요구해요?”, 2001.2.7.)
인용문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피해자가 언어적으로 명백한 거부, 아니 “신고할” 것이라는 위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다고 본다. 이것은 성폭력의 원인을 제공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싫다’고 말할 수 있도록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쓸데없이 성별권력이니 자본주의니 이런 것 공부하지 말고 다 함께 “No. stop it!” 이걸 하루에 100번씩 합창하십시오. (pyein, “선인장님. 그래서 미숙아 교육이 필요합니다.”, 2001.1.9.)
하지만 여성이 ‘싫다’고 말하면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 성적 자유주의자는, 동시에 여성이 ‘싫다’고 말하는 것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논리의 모순을 드러낸다.
특히 애인있는 여자와 연애할 때는 “싫어.” 이 말은 그냥 흘려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려드립니다. (pyein, “선인장님 답 하나..”, 2001.1.6.)
분명히 첫 관계를 맺을 때 피해자는 두세 번 정도 형식적인 저항을 했을 테고, 그 남자는 사랑한다는 말로 무마시켰을 테니, 나중에 연애관계 깨지면 지금 피해자들이 진술한 대로, … “난 차였어, 난 피해받았어. 난 성폭력 당한 거야.” 그냥 이렇게 끝나는 겁니다. (pyein, “제가 휘두른 폭력?”, 2001.1.3.)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은 반드시 언어적 거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 남성은 이러한 여성의 언어적 거부를 “그냥 흘려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이 ‘싫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주장은 모순에 부딪치게 된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논리에 따르면 피해자가 거부할 경우에도 가해자는 그것을 “형식적인 저항”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행동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피해자의 언어적 거부나 저항 여부와 상관없이 가해는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으로 피해 여성의 명백한 언어적 거부 표명을 제시했다. 나아가 성폭력의 책임이 언어적인 거부를 표명하지 않은 피해 여성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의 언어적 거부를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내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의 거부를 거부로 인정하지 않거나, 여성의 침묵을 암묵적 동의(tacit consent)로 해석한다.
이처럼 명백한 언어적 거부 의사 표명이 성폭력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경험적 연구들은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들이 즉각적으로 피해의 경중을 따지고, 그것이 더욱 심각한 폭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쉽게 중단될지를 판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영희(1992)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예측되는 피해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다양한 성폭력 유형이 피해자 개인에게는 거의 모두 충격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또 맥네일(S. McNeill)(1989)은 성기노출증자가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혼자 노출증자를 대면했을 때는 강간에 대한 공포를 넘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폭력의 상황에서 여성들이 피해의 정도를 파악하거나,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명시적인 언어적 거부를 강요하는 것은 성폭력의 폭력성을 기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여성이 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성은 공포가 아니라 혼란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여성이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니라는 것은 성과 폭력이 선험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성적인 것의 혼돈에 대한 모든 해명의 책임을 피해자 여성에게 부당한 방식으로 전가하는 것이다(신상숙, 2001b: 28). 이러한 전가를 통해 남성들은 자신의 행위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할 책임을 회피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페이트만(1989a, 2001)은 근대적 시민권이 언어적 동의에 의한 사회계약으로부터 도출됨에도 불구하고, 성관계에서는 여성의 동의 혹은 비동의가 언제나 무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여성을 언어적 동의라는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결여된 존재, 곧 근대적인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의 침묵 혹은 (강요된) 복종을 동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여성을 동의에 참여할 수 없는 존재, 곧 근대적인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이것은 그들이 상정하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개인이 사실은 남성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3)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에 대한 이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첫째, 사회와 현실적 권력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이고 원자적인 개인을 상정한다. 성별 권력 관계 역시 이러한 권력 관계에 포함되므로, 이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성중립적인(genderneutral) 존재이다. 둘째, 이러한 개인의 자유 중에서도 특히 성적인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은 성중립적인 존재이므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이러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처럼 원칙적으로는 여성도 남성과 평등한 개인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여성을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 곧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대비된다.
하지만 성폭력에 대한 성적 자유주의의 주장은 그것이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인 이해와 개인관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탈맥락적이고 초월적인 개인을 상정함으로써 현실의 권력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관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명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성폭력의 상황에서 그것을 성폭력이라고 즉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인지했다 하더라도 거부 의사를 표명하지 못하는 여성은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인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친구 사이에서 “싫어!” 이 말을 못하는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금치산자라 이야기해도 할 말 없는 겁니다. (pyein, “선인장님. 그래서 미숙아 교육이 필요합니다.”, 2001.1.9.)
인용문의 “금치산자”, “미숙아”라는 표현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여성을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여긴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별 권력 관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권력 관계 속에 있는 여성을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폭력 판단의 기준을 정할 때도 피해 여성의 관점보다는 가해자의 의도, 곧 가해 남성의 관점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개인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기준을 남성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의 언어적 거부나 침묵을 동의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폭력과 성, 폭력과 욕망이 연속적인 현실에서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일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과 남성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상정하는 원자적이고 초월적인 개인은 실제로는 남성의 이해와 경험에 입각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성적 자유주의 모델은 성적인 쾌락과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욕망의 실현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을 부인하며, 설령 폭력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적인 자유를 위해서 감내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성과 욕망의 이러한 폭력적인 측면을 견디지 못하는 여성을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피해자로 묘사한다.
연애하다 깨졌다고 야마 돌아버리는 정서.. 이건 서울대 연대 공주병 걸린 애들이나 보이는 정신착란 증세이지 진보적 여성운동의 관점과는 거리가 멉니다. (pyein, “서울대와 연대 사건만 문제가 되는 이유..”, 2001.2.9.)
바람둥이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약골 소녀들과 그걸 성폭력으로 보고 있는 세력들이 과연 진보세력으로서의 자질이 있냐는 게 핵심입니다. (pyein, “혼인빙자 간음과 비교해보지요..”, 2001.1.8.)
인용문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피해자들과 100인위가 성폭력으로 판단한 사건들을 “연애” 혹은 “바람둥이”에 의한 상처로 보고, 피해자들과 100인위를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공주병” 환자, 혹은 “약골 소녀” 등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일상적인 여남 관계에서 드러나는 폭력성을 문제 제기하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합리한 것은 가해가 아니라 “그것을 피해로 여기는 것”이다(MacKinnon, 1987: 108).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들과 100인위가 비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여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아니 피해를 성폭력으로 인지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들 내부의 성에 대한 두려움과 수동성을 떨쳐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한다.
순결 이데올로기 변종은 가급적 버리시길 바랍니다. 뿌리깊이 남아있는 성에 대한 두려움, 사랑과 순결에 대한 환상은 빨리 벗어버릴수록 좋습니다. (숲의정령, “2차 성폭력 그리고 기타 등등”, 2001.1.5.)
그리고 이처럼 성에 대한 두려움과 수동성을 떨쳐버리는데 애써야 할 여성운동은 오히려 성의 폭력성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은 “집단적 망상”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집단적 망상이라고 해야 할 것 같군요. 우리는 성폭력 당했어, 라고 하는 집단적 망상말예요. 둘 이상이 모이면 무슨 일이든 무서울 게 없지. (미구엘, “미구엘, 할 말을 잊다...”, 2001.2.15.)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피해 당시에 성폭력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밝히지 못하며, 욕망의 폭력적인 측면을 감내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피해자에 고착된 여성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피해자는 물론 근대적인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이다. “금치산자”라는 명명은 이러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피해자들의 판단에 동의하고, 성폭력 문제를 집단적으로 제기한 100인위 역시 “집단적 피해 망상”에 입각한 운동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이러한 “금치산자”일 경우에 모든 개인은 자유로우며, 성적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성중립적 가정은 더 이상 성립 불가능하다. 또한 그것은 성적 자유주의자들이 성적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자유로운’ 파트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이러한 피해자에 고착된 여성과 성을 자유롭게 누리는 여성들을 대비시킨다. 이처럼 여성들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명백한 이분법에 따라 구분된다.15) 아래의 인용문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녀 관계의 권력 차 때문에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어.” 스카이대학 소녀들이 이렇게 자학하는 척 하고 있을 때, 다른 영역의 여성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표현하며 성을 즐기고 있습니다. (pyein, “성적 대상화와 기만적인 술문화”, 2001.1.4.)
좁은 판에서 모여있어서 잘 알지 모르겠지만, 스카이러브나 세이클럽 통해서 번섹하는 아이들 남녀에 상관없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 사람들 자유롭게 성을 즐깁니다. (pyein, “사례 13번, 문제제기 합니다..”, 2000.12.16.)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적 자유를 누리는 여성과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전자는 남성과 평등한 개인으로 인정하는 반면, 후자는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여긴다. 이런 점에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제기하는 여성을 ‘개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같은 논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여성을 ‘자유로운 개인’과 ‘피해자’로 구분하고, 후자를 평등한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몇 가지 한계와 모순점을 지닌다.
첫째, 남성적인 성적 쾌락의 모델, 곧 “계속해서 섹스할 수 있고, 언제나 욕망하며, 사랑하는 감정과 섹스를 분리시킬 수 있으며, 모든 성적인 기회를 활용하는”(Jeffreys, 1990a: 236) 것을 수용하는 여성들만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이 실제로 이러한 남성 모델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해도, 성과 욕망을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지배적인 남성 문화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Jeffreys, 1990a; Sanday, 1996). 따라서 이러한 모델을 수용하지 않는 대다수의 여성들을 개인의 범주로부터 배제하는 것은 부당하다.
둘째,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과 피해자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다. 곧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들은 결코 성폭력 피해를 입거나 피해를 입었다고 문제 제기하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피해를 제기하는 여성들은 결코 성적 자유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과 피해자 여성은 배타적 범주가 아니다.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여성들도 얼마든지 성폭력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대다수의 여성들이 일생동안 지하철에서 ‘가벼운’ 성추행과 직장이나 학교에서 언어적 성희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성폭력을 경험하는 현실에서, 이처럼 무작위적으로 발생하는 성폭력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들만을 피해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 대(對) 성적으로 보수적인 여성’과 ‘성폭력 피해를 제기하지 않는 여성 대(對) 성폭력 피해를 제기하는 여성’의 구도를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 대(對) 성폭력 피해를 제기하는 여성’의 대립 구도로 자의적으로 치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 입각하여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 피해를 제기하는 여성’을 ‘성적으로 보수적인 여성’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셋째,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폭력 피해를 제기하는 여성을 피해자에 고착된 여성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이러한 가정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비판이 미국에서도 제기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비판이 여성폭력법률(Violence Against Women Act)을 제정하고, 미국 전역의 각 대학에서 반성폭력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인 90년대 초반에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Sanday, 1996; Brown, 2000).
이처럼 여성들이 성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피해자의 수동성과 피해자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미국의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언론과 ‘페미니스트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antifeminist feminist)들의 공격에 대해16) 브라운은, “만약 여성들이 정말로 수동적이고, 무기력하고, 겁에 질린 “희생자”로 행동하고 있다면, 주류 언론과 학자들이 이렇게 방어적일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Brown, 2000: 87).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비판은 여성의 수동성과 피해자성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적극성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100인위 논쟁에서 제기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비판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성들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여성을 피해자에 고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적극적으로 자기 정의(selfdefining)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폭력 운동은 성적 자유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들이 성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자 하는 실천인 것이다.
4) 논쟁에서 드러난 담론 3: 여성주의 담론
(1) 성폭력에 대한 관점
여성주의 담론의 주요 담론 생산 주체는 주로 1990년대 반성폭력 운동, 특히 대학의 반성폭력 운동에 직접 관여했거나 영향을 받은 이들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100인위 논쟁의 여성주의 담론은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의 논쟁을 통해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의 성과 위에서 그것을 더욱 급진화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을 지배 집단과 ‘운동사회’라는 남성 공동체간의 문제로 이해하고,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원자적 개인들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문제로 바라본다. 이에 비해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작동하는 폭력으로 규정한다.
성폭력이 ‘성’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임, 따라서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이야기가 가능하단 말인가? (시타, “.......”, 2001.1.11.)
강간 등의 물리적 폭력만을 성폭력으로 가볍게 이해하는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남성중심적 구조와 사회에서 배태되는 다양한 환경과 문화 그 자체에서 위축감과 위협감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tsWOM100, “가해자 실명공개는 성폭력 사건 해결의 시작일 뿐이다”, 2000.12.26.)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권력”과 “폭력”의 문제이자 “남성 중심적 구조와 사회에서 배태되는 다양한 환경과 문화”로 규정한다. 성폭력에 대한 이러한 광의의 규정은 성폭력이 여성 집단에 대한 대중적인 테러나 위협이라고 본 급진적 페미니즘의 정의와 유사하다(Griffin, 1977; Brownmiller, 1975; MacKinnon, 1989). 100인위가 스스로를 피해자 및 잠재적 피해자로 정의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구조적 권력 관계로부터 여성들이 느끼는 “위축감과 위협감”은, 성폭력이 개인의 신체적 자유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권리에 대한 침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처럼 성폭력이 ‘운동사회’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할 권리에 대한 침해라는 점은 아래의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대다수 운동사회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의 삶의 기반인 운동사회로부터 정당한 자기 권리를 찾기는커녕 축출되어 왔다.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은 피해자 및 잠재적 피해자들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생존권 싸움이자 저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tsWOM100, “가해자 실명공개는 성폭력 사건 해결의 시작일 뿐이다”, 2000.12.26.)
그녀들이(우리가) 진보진영/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 사례에서 나열된 성폭력들, 강간에서부터 섹슈얼 허래스먼트에 이르는 광범한 사례들은 모두, 결국 그 “피해자” 여성들을 진보진영/운동사회로부터 배제하고 추방하는 것으로 작동하였다. (sereneb, “진보진영, 운동사회의 성폭력을 문제삼는 이유는..”, 2001.2.6.)
인용문에서 여성주의 담론은 ‘운동사회’가 성폭력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성 구성원들을 배제해왔음을 비판한다. 따라서 ‘운동사회’의 성폭력을 근절하는 것은 “진보진영/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집단적인 생존권 싸움”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00인위의 반성폭력 운동은 여성들이 ‘운동사회’라는 공동체(community)의 충분한 성원으로서의 자격, 곧 시민권을 얻기 위한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 문제를 외면하거나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해결’해온 ‘운동사회’를 여성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따라서 ‘운동사회’ 주류의 입장에서 피해 여성을 지배 집단의 “프락치”, 곧 ‘운동사회’의 배신자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 한편,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폭력을 해결함에 있어서 공동체와 사회의 책임을 강조한다. 이와 반대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별 권력 관계를 부정하고, 성폭력을 욕망과 성의 문제로 해석한다. 또한 개인과 문제로 다루어져야할 성폭력을 사회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주의 담론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 대립한다.
이렇듯 성폭력을 바라보는 관점과 해결에 대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여성주의 담론은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성적 자유주의 담론으로부터 이중적인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본 장 2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자명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집단과 ‘운동사회’라는 공동체간의 도덕적 경쟁의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폭력 자체에 대한 입장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100인위 게시판 논쟁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 대(對) 여성주의 담론’의 구도로 전개된다.
(2) 성폭력의 판단 기준
① 피해자의 관점
물리적인 폭력이나 성기 삽입이 동반되지 않은 대부분의 성폭력은 ‘물질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성폭력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해 맥키넌은 “대부분의 남성들의 무기는 부인하는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MacKinnon, 1987: 113). 이에 대해 여성주의 담론은 피해자의 “고통”이 바로 피해의 결과이자, 확고한 증거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에 주목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해자의 ‘진술’은 피해자의 ‘고통’을 기술한 것이며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견고하고 합리적인 ‘증거’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안드레아, “capit님”, 2001.2.23.)
피해자와 가해자가 이런 상반되는 주장을 하면 우린 어떻게 ‘진실’을 가려야 할까? 게다가 둘만 있었을 때 억지로 한 입맞춤인 경우 어디서 증거를 가져올 것인가? 여기서 ‘진실’을 가릴 때 누가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안드레아, “무엇이 ‘진실’인가?”, 2001.2.16.)
실제로 개별 성폭력 사건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확연하게 다른 경우가 많다. 남성에게는 자연스러운 감정, 연애, 악의 없는 장난이 여성에게는 폭력으로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담론은 이러한 남녀의 의견 차이는 개인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라고 본다.
성폭력은 성별권력이 경험적 차이로 드러나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견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아리아든, “말머리. 단상, 그리고 초점.”, 2000.12.18.)
성폭력 사건은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가해자의 ‘의도’는 성폭력 사건의 규정시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으며, 따라서 가해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그것을 성폭력으로 경험하였다면 성폭력 사건은 성립된다(100인위, 2000d).
인용문에서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이 “성별권력”의 문제이므로 이러한 권력 관계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본다. 이것은 성폭력이 피해자의 경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가해 의도”와 상관없이, “피해자가 그것을 성폭력으로 경험하였다면” 그것은 성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100인위는 이러한 논리에 따라 성폭력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종류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고 규정하고, 피해자 진술에 입각하여 성폭력 사례들을 공개하였다.
이처럼 여성주의 담론은 피해자의 관점이 성폭력 판단의 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봄으로써, 가해자의 의도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 대립한다. 하지만 여성주의 담론이 주장하는 ‘피해자의 관점’은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상정하는 원자적인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 집단의 관점이다. 이는 다음 인용문에서 잘 드러난다.
합리적인 피해자 관점이란, 피해자 관점에서 사건을 ‘일차적으로’ 파악하되 그것이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합리성이란 한 특출난 개인이 아니라 집단의 눈으로 보았을 때 합리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집단이란 현실적으로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낮은시선, “성폭력 사건 판단 주체의 문제”, 2001.1.17.)
인용문은 피해자의 관점이 합리적인 것은 피해자가 “특출난 개인”, 곧 인식론적인 특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 집단의 관점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피해자는 고립적이고 원자적인 개인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하는 여성 집단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주의 담론이 성폭력을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 집단과 여성 집단의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러한 권력 관계의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여성과 남성의 경험과 태도는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성폭력은 가해자의 경험이 아니라 피해자의 경험이므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다를 경우에는 피해자의 관점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주의 담론이 이해하는 피해자의 관점은, 그러나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상정하는 원자적인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여성 집단의 관점이다.
이처럼 여성주의 담론은 객관성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로 다른 입장을 병치하거나 종합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입장”, 곧 ‘피해자 관점’에 천착할 때만이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으로부터 가능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객관성이 획득될 수 있다는 실증주의적 인식론의 가정과 대립된다.
페미니스트들은 실증주의 인식론이 가정하는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응시’가 실제로는 남성의 시선임을 비판해왔다. 따라서 이전에는 객관성 획득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져왔던 특정한 상황이나 입장에 천착할 때, 오히려 더욱 성찰적이고 확고한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Haraway, 1996; Harding, 1996). 여성주의 담론 역시 ‘피해자 관점’에 입각해 성폭력을 판단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의 연속선 위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피해자의 관점’이 합리적이라고 이해하는 여성주의 담론과 달리, 한국의 법체계는 ‘합리적인 개인의 관점’과 ‘피해자의 관점’을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울대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의 2심 결과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일반 평균인’의 입장에서 볼 때, 피해 여성이 제기한 문제는 악의가 없었고 성적인 의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성희롱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이것은 피해 여성을 일반 평균인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법이 구사하는 언어와 관점은 성적 자유주의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에 대해 여성운동가들은 이러한 시각이 일방적인 남성의 입장이며, 피해자의 관점에서 성희롱을 판단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대법원 판결에는 이러한 여성단체의 입장이 반영되어 대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17) 이런 점에서 100인위 논쟁에서는 서울대 신정휴 교수 성희롱 사건의 ‘합리적인 개인’과 ‘피해자 개인’의 경합이 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② 자유로운 동의 의사의 언어적 표명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으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다른 폭력과 마찬가지로 성폭력의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쉽게 거부를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른 범죄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거부 여부를 범죄 성립 요건으로 보지 않는데 비해, 유독 성폭력에서 이를 고수하는 것은 성폭력의 범죄성을 기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아래 인용문은 이러한 여성주의 담론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예전에 우리 언니가 중학생일 때 험하게 생긴 아이들이 골목으로 부르더란다. 따라(끌려) 들어갔더니, 돈 좀 꿔달란다. 무서워서 있는대로 주고 몇 번 얼르더니 돌려보내줬단다. 언니는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 성폭력 문제에서는 무엇이 다른가? 왜? 성폭력 문제를 다른 폭력범죄와 같이 생각하지는 못하는가? (말해봐, “누가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랴”, 2001.1.11.)
이러한 여성주의 담론의 주장에 대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 교수와 제자 등과 같은 명백한 권력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거부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성주의 담론은 성별 관계 자체가 권력 관계임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비록 친구이자 활동을 함께 하는 동료 관계라 할지라도 성폭력 상황에서는 여성들이 명백하게 거부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18)
우리는 거부의사를 돌려서도 이야기해보고, 달래보기도 하고, 심지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이러한 우리의 호소는 ‘거부의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우리는 심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이러한 ○○○의 행동에 대해 같은 모임에 있는 사람으로써 막연히 미안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반성폭력, “[why?] 피해자들의 입장”, 2000.12.28.)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피해자들은 “돌려서도 이야기해보고, 달래보기도 하고, 화를 내보기도” 하고, 가해자에게 “막연히 미안한 감정”을 갖기도 한다. 이처럼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료이거나 친밀한 관계일 경우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쉽게 거부를 표현하지 못하거나, 우회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이를 동의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의 행위를 그만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브라운밀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데이트 상황에서 공격자는 즐거움이 즉각적으로 불쾌함으로 바뀔 정도로, 그리고 여성이 협상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넘어설 정도로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강제한다. 그러나 깍듯함과 여자다움을 명령하는 전통적인 여성적 행동의 특성과 엄격성은 여성들에게 그녀들이 할 수 있는 한 우아하게 견디고 적당히 요리조리 빠져나가도록 요구한다. 직접적인 대립은 이러한 행동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Brownmiller, 1975: 257)
그리하여 여성주의 담론은 여성의 동의 의사 표현이 성폭력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1990년대 한국 여성운동의 입장과 동일하다. 그러나 100인위 게시판의 여성주의 담론은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동의가 체결되는 상황과 동의의 실질적인 내용을 문제삼는다. 끊임없는 강요나 비난 등의 강압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동의는 동의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행위에 동의했다고 해서 그 이후에 행해진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지적한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에는 어떠했는가. 첫째, 가해자는 미리 동의를 구한 내용 이상의 요구를 하거나 행동으로 옮겼다. 즉, ‘옆에 있게만 해 달라’고 하여 동의하였는데, 그 이상의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거나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는 처음의 합의를 무시하였다. 둘째, 최초의 요구에 대하여 거절하였을 때, 그는 우리의 거절 의사를 무시하였다. 셋째, 더 나아가 그는 우리의 거절 이유를 묻고, 대답을 강요하며, 이유에 대해서 비난과 반박을 하였다. (그음, “ [9번사례피해자모임]이 사건은 왜 성폭력인가”, 2000.12.20.)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계약에서 동의는, 계약자가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가 분명하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현명한지를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거치고 난 후에야 체결된다. 그리고 동의가 만약 강제되었다면 그것은 무효로 여겨진다.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여성주의 담론은 사회적인 계약의 모델을 성관계에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성적인 관계 역시 자율적이고 실질적인 동의에 기반해야 하며, 그 동의가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떠한 강제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관계가 “적극적인 언어적 동의(affirmative verbal consent)”, “자유롭게 주어진 동의(freely given agreement)”, “성적인 의사소통(sexual communication)”과 같은 계약 모델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은 90년대 초반 북미 반성폭력 운동의 핵심적인 구호였다(Sanday, 1996: 265~287). 이것은 동의 여부가 성폭력 판단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동의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내용이다. 그리하여 만약 동의가 억압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거나, 동의한 이상의 행동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성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일반적인 계약과 마찬가지로 충분한 의사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9)
이렇게 성폭력을 저항이 아니라 동의의 문제, 나아가 자율적이고 실질적인 동의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근대적 시민권이 사회 계약, 곧 언어적 동의로부터 도출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것은 여성을 동의라는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 곧 개인의 자격을 지닌 존재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성관계 혹은 일상적인 여남 관계에 새로운 사회계약과 의사소통 모델을 확장함으로써 남성이 더 이상 기존의 성별 권력 관계에 기대어 자신의 욕망을 이기적으로 추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언어적 거부 의사 표현을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폭력과 성을 구분하고 해명하는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신상숙은 “남성 위주의 편의적인 사고”라고 비판하였다(신상숙, 2001b: 29). 이에 대해 여성주의 담론은 남성 역시 자신의 행위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성찰하고, 폭력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의사소통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 성폭력을 제기하는 여성에 대한 이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성폭력은 여성 개인의 신체와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여성 집단의 시민권의 문제로 이해된다. 100인위가 스스로를 피해자 및 잠재적 피해자로 정의하고, ‘운동사회’의 자율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반성폭력 운동을 펼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다.
또한 여성주의 담론은 권력 관계 속의 서로 다른 위치로 인해, 성폭력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판단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남성에게는 욕망, 연애, 친밀함의 표시가 여성에게는 폭력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폭력은 피해자의 경험이므로, 따라서 가해자의 관점이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여성주의 담론은 여성들이 이러한 피해와 고통을 언어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폭력과 성의 경계가 선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피해의 상황에서 여성들이 겪는 혼란을 잘 보여준다.
이 때 D는 가해자에게 약간의 혼란을 느꼈으나(이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있는 것일까, 등등) 이후 이건 성폭력인 것 같다고 말했으나 가해자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개 사례 13번)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그 당시 제대로 대처하거나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입니다. (공개 사례 14번)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대다수의 여성들은 성폭력 상황에 즉각적으로 성폭력으로 인지하고, 거부를 표명하지 못한다. 100인위가 공개한 성폭력 사례의 대다수는 피해가 발생한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지하고 판단한 것들이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이러한 혼란이 피해자들이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 곧 “금치산자”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여성주의 담론은 그것이 여성 개인의 미숙함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정의할 수 있는 언어의 부재, 기존 성폭력 정의의 협소함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아래 100인위의 주장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다양한 유형의 성폭력들이 채 ‘언어화’도 되지 못한 채 피해자에게 고통과 침묵만을 강요하며 남겨져 있다(100인위, 2000b).
실제로 성폭력에 대한 경험적 연구들은 많은 여성들이 피해 당시에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심영희(1992)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강간이라고 판단함에 있어서 가해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곧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일 때는 여성들이 강간이라고 판단하는 비율이 높은데 비해, 아는 사람일 때에는 그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성폭력의 대다수가 아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여성들에게 ‘성폭력’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 켈리와 라드포드(1996)는 314명의 여성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여성들이 남성들의 폭력으로 인해 불쾌감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사실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20) 일상적으로 겪는 일들을 성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흥분하는 바보 같은 일”이 된다는 것을 여성들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 붙여지지 않은 폭력은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형태도 없으며 인식상의 일관성도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MacKinnon, 1987: 106).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부인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완전한 기억의 억압, 곧 망각을 초래하기도 한다. 켈리는 60명의 여성을 심층 면접한 결과, 강간당한 여성 중 58%가, 근친에 의해 폭력을 당한 여성 중 62%가 오랜 시간동안 경험을 망각하고 있었음을 밝혀내었다. 그녀는 이러한 망각의 원인을 폭력에 대한 사회적 정의(definition)의 부재, 곧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이름 붙이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러나 다른 폭력을 경험하거나, 대화나 인터뷰 등을 통해 다른 여성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지나간 경험을 기억하고 재정의하는 계기가 된다(Kelly, 1993: 138~158).
실제로 100인위 게시판에서는 100인위의 성폭력 사례 공개가 계기가 되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성폭력 경험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20여 개가 넘게 이어진 ‘나의 경험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의 대다수는 피해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누구에게 얘기하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그리고 이처럼 말해지지 못한 경험들은 잊혀지기도 했다. 아래의 글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해야 할까... 과연 사람들이 믿을까? 이렇게 이 사건은 묻혔고 동아리 친구들 후배, 선배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난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이 사실을 믿을까도 의심스러웠고, 나에게 손 올린 사람도 술에 취해 자고 있었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 것이 너무나 분명했고 나만 바보같이 거짓말쟁이로 몰릴 수 있고 오히려 그 사람을 음해한다고까지 오해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틈틈, “[나의 경험13]”, 2001.2.18.)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지 그 무섭고, 참담했던 기분을 나는 어느새 뇌의 한 켠에 꼭꼭 숨겨두고 있었나 보다. (sodeep, “[나의경험]”, 2001.2.16.)
브리슨(1997)은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narrative)가 훼손되었을 때, 자아 역시 훼손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야기의 훼손으로 인해 자아는 단지 이전의 기억을 잃는 것뿐 아니라 인지적이고 감정적인 기본 능력이 없어지거나 급격히 바뀌게 된다. 폭력에 의한 심리적 외상, 곧 트라우마(trauma)는 이러한 이야기를 훼손하는데, 브리슨은 이를 치유하고 자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가 말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언어와 자신의 얘기를 들을 수 있고, 듣고자 하는, 그리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청중이 필요하다. 고립된 채로는 트라우마가 치유될 수 없다는 것이다.
100인위 게시판의 ‘나의 경험 시리즈’는 성폭력에 의한 트라우마가 침묵을 통해 지속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침묵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믿어줄 청중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한 이 사실을 믿을까도 의심스러웠고”, “오히려 그 사람을 음해한다고까지 오해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은 성폭력 경험을 “뇌의 한 켠에 꼭꼭 숨겨”두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의 얘기를 믿어주고 들어줄 청중이 확보되자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하고, 이러한 말하기는 트라우마가 치유되는 첫걸음이 된다.
“나의 경험”을 쓰기 위해, 그 경험과 마주하기 위해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명백히 장애물이다. 당신들에게는 이 장이 놀이터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이 장은, 경험을 털어놓고 함께 치유하는 쉼터이다. (lyric, “그만두시오. sofphia와 친구들!”, 2001.2.23.)
이처럼 성폭력의 피해가 여성이 처한 상황과 공동체에 따라서 치유되거나 유지된다는 사실은 개인이 관계적인(relational)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00인위가 2차 가해를 1차 가해인 성폭력에 못지 않게 중요한 폭력으로 인식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2차 가해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공동체로부터 인정받고 치유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는 1차 가해보다 더욱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을 자유주의(100인위 논쟁에서는 성적 자유주의)가 가정하는 것처럼 고립적이고, 원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적인 존재라는 명제는 페미니즘이 제공한 주요 통찰 중에 하나이다(길리건, 1997; Benhabib, 1987).21) 100인위 논쟁은 성폭력 문제를 통해 개인이 관계적이고 맥락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또한 피해 여성은 ‘희생자(victim)’에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 ‘생존자(survivor)’로 회복되고 거듭나는 존재이다. 여성주의 담론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생존자’로 호명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생존자는 아름답다. 수치와 공포 따위는 가해자들과 함께 컴컴한 땅속에 같이 썩도록 묻어버리고, 생존자들은 인생을 축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안드레아, “타이터스”, 2001.3.6.)
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담론은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성폭력이 발생하는 권력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바라본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성폭력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것은 피해자들의 가슴속에만 있던 피해가 공감할 수 있는 피해로 변화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분노할 수 있고, 함께 싸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모두 달라 보이는 개개의 사건 밑바탕에 깔린 무언가 공통점들도 찾게 되구요. (술래, “‘경험’들을 읽으면서”, 2001.2.18.)
이처럼 성폭력의 경험을 공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피해자들의 가슴속에만 있던 피해가 공감할 수 있는 피해로 변화”할 뿐 아니라, “함께 싸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100인위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00인위는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지만 제대로 언어화하지 못했던 고통을 들어주는 청중이자 그것을 사회적으로 문제 제기하는 “확성기”(배은경, 2001)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를 통해 성폭력이 개인적인 피해가 아니라 ‘운동사회’ 여성의 집단적인 생존권, 곧 시민권의 문제임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22) 이처럼 피해자가 변화할 뿐 아니라 집단적인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여성을 피해자에 고착시킨다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에서 비롯된 폭력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폭력 상황에서 여성들은 이러한 성별 권력에 압도됨으로써 피해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정의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들어줄 공동체가 형성되자 여성들은 이러한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그러한 과정은 여성이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을 관통하는 공통적 구조와 이를 언어화할 수 있는 사회적 정의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집단적인 의식 고양(consciousnessraising)의 과정을 통해 여성들은 성폭력을 집단적인 시민권 문제로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존재로 이해한다. 따라서 100인위와 피해 여성을 ‘운동사회’의 배신자, 곧 “프락치”로 이해하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대조적이다.
또한 여성주의 담론은 여성이 성별 권력 관계에서 열등한 위치에 있다고 보지만, 여성 집단의 힘으로 이러한 권력 관계를 바꾸어갈 수 있는 역동적이고 적극적인 존재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오히려 여성을 피해자로 본질화한다고 주장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 대립된다. 하지만 여성을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과 피해자 여성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오히려 피해자를 본질화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주의 담론이 보여주듯이, 여성들은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5) 소결: 100인위 게시판 논쟁과 여성의 시민권
지금까지 100인위 게시판에 등장한 글들을 분석하고, 비교적 일관된 입장을 보이는 세 가지 담론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담론이 성폭력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는지, 성폭력의 판단 기준을 어떻게 제시하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각각의 담론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 표는 이를 정리한 것이다.
<표 1> 100인위 게시판 논쟁 정리
|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 |
성적 자유주의 담론 |
여성주의 담론 |
주요 담론 생산 주체 |
일부 가해자 및
가해자 소속 집단 |
성적 자유주의자
(90년대 성적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젊은 남성들) |
여성주의자
(90년대 반성폭력 운동, 특히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에 영향을 받은 ‘운동사회’ 여성 활동가/일부 ‘운동사회’ 남성 활동가/여성학자) |
성폭력에 대한 관점 |
‘운동사회’와 지배 집단 남성의 도덕적 경쟁의 문제
성폭력 자체에 대한 정의나 기준이 없음 |
개인과 개인의 욕망의 충돌 |
성별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
‘운동사회’ 여성들의 집단적인 시민권의 문제 |
성폭력 판단의 기준 |
언급 없음 |
가해자의 의도
명백한 거부 의사의 언어적 표명 |
피해자의 관점
자유로운 동의 의사의 언어적 표명 |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에 대한 이해 |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지배 집단 혹은 상대 진영의 “프락치” |
여성을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남성과 똑같은 여성)/피해자 여성으로 구분
피해자 여성은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금치산자”) |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거듭나는 존재 |
먼저 몇몇 가해자들과 가해자 소속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된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 문제의 제기를 ‘운동사회’를 정치적으로 음해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한다. 가해자 개인에 대한 비판은 ‘운동사회’ 전체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해되고, 가해자 개인은 ‘운동사회’와 동일시된다. 이에 비해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은 ‘운동사회’의 외부에서 ‘운동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러한 ‘위협’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피해 여성과 100인위를 정신적으로 취약한 존재이거나 지배 집단에 이용되는 존재, 곧 “프락치”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 곧 시민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젊은 남성 성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현실의 권력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원자적이고 고립적인 개인을 상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자유 중에서 특히 성적인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은 동등하고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성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남성만을 ‘운동사회’의 완전한 성원으로 인정하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대조적이다.
그러나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상정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개인은 사실은 남성의 경험과 이해에 입각해 있다. 이 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모든 개인들이 모든 상황에서 자유로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모두가 똑같은 욕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23)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성별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성폭력 상황에서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쾌락의 형태가 동일하지는 않다. 특히 성별적인 사회화의 경험이 다른 여성과 남성의 성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확연하게 다르다. 따라서 남성에게는 ‘자연스러운’ 성적 욕망과 표현이라고 이해되는 것들이 여성에게는 폭력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적인 차이와 권력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남성적 욕망을 수용하고 재생산하는 여성들만을 자유로운 ‘개인’으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보수 소녀”나 “금치산자”로 비난한다. 이처럼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동등하다고 가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현실의 성별 권력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성폭력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근대적인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100인위와 피해 여성은 근대적 시민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90년대 반성폭력 운동에 영향을 받은 ‘운동사회’ 여성 활동가와 일부 남성 활동가 그리고 여성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한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이 성별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이 여성들이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 되는데 있어서 큰 장애가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 활동가들이 ‘운동사회’의 정당한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을 ‘운동사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지배 집단의 “프락치”로 이해하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과 대조적이다.
여성주의 담론은 그러나, 여성이 ‘운동사회’의 시민권을 얻는 것은 단지 ‘남성과 똑같은’ 존재로 인정되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폭력은 성별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이자 남성과 ‘다른’ 경험이므로, 이러한 여성의 경험이 말해지고 존중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성을 고의적으로 침묵시키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위력을 떨치는 한, ‘운동사회’에서 여성이 평등한 구성원이 되는 것은 요원하다. 또한 남성적인 합리성과 쾌락을 일방적으로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경험과 성적 차이를 부정하는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동일성의 정치”(이리가라이, 2000) 역시 여성의 시민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이 모델이 된 ‘개인’에 미달하는 존재, 애매하고 모순적인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성주의 담론이 여성의 경험을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성폭력 판단에 있어서 피해자의 관점, 곧 여성의 관점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주의 담론은 성폭력을 성별 권력 관계의 문제이고 여성이 열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지만, 이러한 입장이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주장하듯이 여성의 취약함을 본질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성별 권력 관계를 지적하는 것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생래적으로 열등한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와 100인위 게시판의 ‘나의 경험 시리즈’가 보여주듯이 성폭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은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공유하고, 여성에 대한 억압을 발견하고, 이에 대항함으로써 공동체에서 평등한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자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피해자화(victimize)함으로써 사회적인 보호를 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치학이다.
따라서 100인위의 반성폭력 운동은 한 편으로는 성폭력을 해결함으로써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고자하는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100인위의 일차적인 비판의 대상이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은 여성을 ‘운동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100인위 게시판 논쟁은 여성이 진정한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남성적 개인 모델에 편입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적 개인 모델은 남성과 똑같은 존재만을 근대적인 ‘개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과 여성주의 담론이 대립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결론적으로 100인위 운동과 이후 전개된 게시판 논쟁은 여성이 근대사회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성폭력을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관점과 경험이 반영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100인위 운동과 게시판 논쟁은 시민권이 여성의 ‘다른’ 경험에 입각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쟁점을 던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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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논문 「성폭력과 여성의 시민권: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 사례 분석」(서울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2002)을 4장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 ‘운동사회’는 엄밀한 이론적 개념 정의라기보다는 시민사회, 정치사회에 유비되는 서술적 개념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운동 그 자체나 사회운동 조직과 세력이 위치한 장(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100인위의 용례대로 이 개념을 쓰되, 작은 따옴표를 쳐서 사용하기로 한다.
2) 한국의 경우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하여’가 형법상 강간죄를 구성하는 조건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피해자가 명백히 거부의사를 표명했고 그것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하더라도 실제 신체적 위해를 불사하는 피해자의 저항이 없었다면 그 폭력은 강간죄를 성립시키는 폭행으로 인정되지 않는 근거가 된다(배은경, 1997: 62). 이것은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1995년에야 비로소 미국의 한 주에서 여성의 거부는 거부를 의미한다는 법안, 곧 일명 “no-means no-legislation”이 통과되었다(Sanday, 1996: 237~238).
3) 원칙적으로는 개인이 여러 개의 아이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논쟁에 참여한 인원은 이보다는 다소 적을 수 있다.
4) 2차 공개는 2001년 2월 19일 이루어졌다. 그래서 100인위가 공개한 성폭력 사례는 모두 17개이다.
5) 여기서 여성주의는 feminism, 여성주의자는 feminist의 번역어이다. 이러한 번역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90년대부터 여성단체와 여성학자들을 중심으로 사용되어온 관행에 따라 본 논문에서도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을 혼용해서 쓰기로 한다. 특히 참고한 논문과 책에 여성주의라고 표기되어 있을 경우에는 대부분 이를 그대로 살렸다.
6) 흥미로운 점은 90년대 성적 자유주의의 대표 주자였던 사례 5번 가해자가 막상 자신이 ‘운동사회’ 성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되자 성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운동의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른 성폭력 문제와 달리 ‘운동사회’ 성폭력에 있어서는 가부장적 사회운동 담론이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7) ‘문귀동 성고문 사건’에 대한 어느 좌담회에서 권인숙을 변호했던 한 변호사는 이 사건을 여성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국가 공권력의 가장 추악한 형태인 고문이 초점이 되어야 하는 이 때에 여성문제를 운운한다면 오히려 본질에서 빗나가는 게 아닐까요?”라고 대응하였다(이상록, 2000a: 234~235). 또 정희진은 ‘케네스 이병의 윤금이 살해 사건’을 통해 민족담론이 여성운동을 압도하여 여성 문제를 비가시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동안 사회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기지촌 여성인 윤금이가 미군에 의해 살해되자 순결한 딸, 강대국에 핍박당하는 ‘조국의 온 산천’, 우리 민족의 몸으로 비유되는 것을 두고, 정희진은 ‘죽어야 사는 여성의 인권’이라고 비판한다(정희진, 2000: 338~345). 두 여성이 모두 딸, 누이 등으로 호명된다는 사실은 당시의 사회운동이 여성을 시민이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가족 구성원으로 바라본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8) 게이튼스는 정치적 몸에서 지정된 자리를 벗어난 여자들이 촉새, 악녀, 암여우, 암캐, 말괄량이 등과 같은 이름으로 매도되고, 그녀들의 언어가 인간의 말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게이튼스, 2001: 110).
9) 100인위 게시판에서 사용된 100인위의 공식 아이디이다.
10) 이 “대중적이지 않은 성행위”, 곧 새도매저키즘의 문제는 성폭력에 관한 논의에서 주된 논쟁지점 중에 하나이다. 성폭력과 새도매저키즘적 행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가 문제인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레즈비언 새도매저키스트 집단인 SAMOIS는 새도매저키즘적 성행위는 사전에 파트너의 동의가 있을 때만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또 파트너가 도중에 그만두기를 원했을 때는 중단되어야 한다. 동의와 의사소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매저키즘적인 성관계는 이른바 ‘정상적인’ 성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Pineau, 1996: 100~101). 따라서 동의에 기반한 새도매저키즘적인 성행위와 성폭력은 구분이 가능하다.
11) 이에 대해 게시판 논쟁에 참여했던 한 여성주의자는 “‘(혼전)순결이데올로기’나 ‘왜 여성주의자면서 (삽입)섹스를 싫어하냐’고 윽박지르는 거나 여자들이 제 몸에 대해 결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음험한 음모인 건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하였다(안드레아, “pyein/‘자유’롭다?”, 2001.2.4).
12) 실제로 성혁명 시기의 가장 유명한 성지침서였던 ꡔ섹스의 기쁨ꡕ(The Joy of Sex)의 저자인 컴포트(A. Comfort)는 여성들에게 “기꺼이 남성 파트너의 열정적인 성적 대상물이 되어라. 그리고 자신의 건강이나 자존감까지도 희생해가면서 남성의 성에 봉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여성들은 남성들의 성에 적합하게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고 남성들에게 그 안타까움을 한참 늘어놓은 뒤 “그래도 여성들은 남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그들을 안심시킨다(Jeffreys, 1990a: 117~120).
13) 제프리즈는 이 억제 개념이 60년대 성혁명가들의 무기고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고 주장한다. 만약 어떤 여성이 성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건 그것은 그 여성이 이러한 억제를 만든 유년기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억제 개념은 여성 자신을 위한 성적 선택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억제는 개인을 올바르게 발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여성 자신의 책임이었다. 남성이 억제라고 비난한 여성들은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는데, 그녀는 구식에다 속이 좁고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들이 자기 개선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것은 대부분 이 여성들의 문제를 지적한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진정한 기쁨을 얻었다기보다는 참고 죄책감과 비난을 피하는 법을 간신히 배울 수 있었다(Jeffreys, 1990a: 95~96).
14) 이에 대해서는 (3) 여성주의 담론 부분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5) 이것은 여성을 정숙한 존재임과 동시에 성적으로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았던 보수적 입장이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구분했던 것과 유사하다. 보수적 입장이 ‘창녀’, 곧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을 비난하고 ‘성녀’, 곧 성적으로 보수적인 여성을 옹호했다면, 성적 자유주의 입장은 ‘창녀’를 옹호하고, ‘성녀’를 비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입장은 남성 판타지를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에게 투사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같은 논리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6) 샌데이는 이러한 공격을 십자군(crusade)에 비유한다. 대표적으로 파글리아(C. Paglia)를 들 수 있다. 스스로를 ‘페미니스트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로 칭하는 그녀는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강력하고 통제할 수 없는 힘으로, 역사상 가장 창조적인 힘으로 묘사한다. 강간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유혹에 대한 남성의 자연스러운 반응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성이 성을 즐기고자 한다면 그러한 위험을 무릅써야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성폭력의 피해를 호소하는 것은 미성숙의 결과라는 것이다. 거트만(S. Gutmann) 역시 여성들이 성관계에서 느끼는 양가적 감정으로 인해 강간을 주장한다고 본다. 따라서 반성폭력 운동은 남성에게 불공평할 뿐 아니라 여성의 수동성을 강화한다고 주장하였다.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이러한 주장을 반복하였는데, 이것은 100인위 논쟁의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Sanday, 1996: 239~264).
17) 그러나 우리 사회에 비해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가 길고,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이 ‘합리적인 것’으로 법과 제도에 반영되기 시작한 서구 사회에서는 성폭력 판단의 기준으로 ‘합리적인 피해자 관점’을 수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82년 미국의 EEOC(남녀고용평등위원회)는 피해자가 증인 없이 성희롱을 당했을 경우에 피해자가 입증 책임을 지는 것은 법적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고, 1983년에는 여성의 진술에만 입각해서 성희롱 판정을 내렸다(MacKinnon, 1987: 113). 이것은 피해자의 경험이 성폭력 판단의 일차적인 기준이며, 다른 물증이 없을 경우에는 피해자의 진술만으로도 성폭력이 성립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합리적인 여성의 관점(the perspective of reasonable woman)’ 또는 ‘피해자 관점(the victim’s perspective)’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1991년 엘리슨 대(對) 브래디(Ellison vs. Brady) 성희롱 사건의 판결이었다(신상숙, 2001c: 33). 당시 재판부는 “우리는 성맹적인(sex-blind) 합리적인 개인 기준이 남성 편향적이며, 체계적으로 여성의 경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합리적인 여성의 관점을 일차적으로 채택한다”고 판시하였다(Becker et al., 1994: 762).
18) 켈리는 이러한 형태의 성폭력을 ‘섹스를 하도록 받는 압력’(pressure to have sex/pressurized sex)로 정의한다. 이것은 여성이 싫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하도록 압력을 받는 상황을 지칭한다. 켈리가 인터뷰한 60명의 여성 중 2/3가 첫 번째 이성애 성관계에서 자유롭게 동의하지 않았다고 응답하였다. 켈리는 또한 강제적인 섹스(coercive sex)를 성폭력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것은 실제적, 물리적 강제 혹은 그것에 대한 위협이 동반된 섹스로 여성들이 ‘강간 같았다(like rape)’고 표현한 경험이다(Kelly, 1993: 81~84).
19) 이러한 반성폭력 운동의 주장은 법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형법,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형법, 미국의 앤티악 대학(Antioch College)의 학칙 등이 그것이다(Pineau, 1996; Sanday, 1996). 대표적으로 캐나다 형법은 “원고가 말이나 행동으로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거나, 성행위에 동의한 원고가 말이나 행동으로 행위를 지속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할 경우”에는 동의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본다. 또 피고가 원고가 동의했다고 확신하기 위해서 적절한 절차를 밟지 않았다면, 피고가 동의했다고 믿었다는 것은 변호가 될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동의의 기준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규정함으로써 캐나다 형법은 데이트 성폭력 등 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원하지 않는 성적인 접촉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이 법에 근거해 유죄 판결을 받은 1993년의 판례를 들 수 있다. 한 고등학생이 데이트 도중에 파트너의 동의 하에 키스와 애무를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동의 없이 셔츠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졌다. 여성은 그의 손을 뿌리쳤고, 행위는 거기서 끝났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 소년을 경찰에 고소하였다. 이에 법정은 ‘키스에 대한 동의’는 ‘가슴을 만지는 것에 대한 동의’가 아니므로 성폭력이라는 판결을 내렸다(Pineau, 1996: 64~65). 이러한 성폭력 규정은 100인위가 공개한 성폭력의 대다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20)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한 남자가 나를 붙잡고 자기 몸으로 나를 밀었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크게 고함을 질렀죠. 그는 나의 뺨을 때렸지만 역에 도착하자 도망쳐버렸죠.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nothing actually happened)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나는 종종 밤에 남자들이 던지는 말에 화가 나요. 아무 일도 일어나진 않지만(Nothing happens), 그것은 일종의 공포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자신들이 웃는 것이 공포란 걸 그들도 알고 있어요. 비겁하게도, 그들은 오직 무리를 이룰 때만 그렇게 하죠.”(Kelly and Radford, 1996: 24~25, 강조는 인용자)
21) 벤하빕은 자유주의적, 계약론적 전통에서 상정하는 탈배태적이고(disembedded), 초월적인(disembodied) 개인이 백인 남성 부르주아라는 특정한 주체 집단의 경험을 인류의 보편적인 경우로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대리주의적(substitutionalist)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자란 개인들의 세계이며 아이가 되기도 전에 소년이 남성이 되는 세계, 어머니도 누이도 아내도 존재하지 않는, 한 마디로 이상한 세계라는 것이다(Benhabib, 1987; 81~86).
22) 이것은 서구에서 반성폭력 운동이 등장한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이다. 신좌파 세력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억압을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리하여 독자적인 여성운동을 조직한 미국의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모여서 제일 먼저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강간 문제였다. 오랫동안 감추어왔던 자신들의 피해 경험들을 저마다 소리내어 얘기함으로써(SpeakOut) 그들은 강간이 그들이 알고 있던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며, 구조적인 권력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차원의 의식 고양은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1971년 4월, 뉴욕급진페미니스트들(New York Radical Feminists)은 700여명이 모인 회의에서 강간을 여성 운동의 지속적인 주제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Sanday, 1996: 168~174).
23) 그러나 본 장 3절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이러한 성적 자유주의 담론이 자유롭고 동등한 개인의 모델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 자유주의 담론은 성중립적이고 동등한 개인을 가정하지만, 성폭력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피해자의 관점보다 가해자의 의도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며, 여성의 거부는 거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명백한 성차별적 태도이며, 성적 자유주의 담론의 기본적인 입장과도 모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