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조활동가 Renate Hürtgen 노동운동가 평전 |
현장에서 미래를 제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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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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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2 - 노동운동가 평전(3) >
여성노조활동가
Renate Hürtgen
독일통일과 구동독 여성 노동운동가의 삶
** 이 글은 구동독지역 여성노동운동가를 대상으로 하여
독일노총 소속 한스 뵈클러 재단(Hans-Böckler-
Stiftung)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2년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신 연방주(州) 여성노동운동가”라는 책(97년 봄
출간 예정) 중 두 인터뷰 내용을 저자가 직접 선정하여 보내준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뷰 내용 외의 부분은 저자가 함께 보내 온
자신의 책 소개와 연구계획서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의 양해를
통해 역자가 짜깁기한 것입니다.
레나테 휘어트겐(Renate Hürtgen)
1947년 동베를린 출생
훔볼트 대학에서 문화학, 미학 전공
철학 박사
라디오 및 영화 시나리오 작가
1989년 이후 특히 구동독 지역의 직장평의회와 노조의 재건을
위한 다양한 활
번역: 정병기(해외연구원,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박사과정)
동서독의 여성들은 1990년 통일 후 구동독 지역에 직장 및
종업원평의회가 조직됨으로써 처
음으로 함께 노동하고 함께 활동하게 되었을 때, 자못 커다란
호기심과 기대를 가졌었다. 특히 서독의 진보적 여성들은 동독의
자매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면, 노조운동과 노조 외 기타
운동들이 새로운 도약 단계로 진입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상호 대립적 이해관계는 너무나 빨리 표면화되었으며,
뒤따르는 실망의 폭도 꽤나 넓었다.
자신들이 대체 어떤 사람들과 갈등하고 있는지, 서독 여성들은
알고 있었는가? 동독여성들의 경험과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서독
여성들의 기대가 과연 적당한 것이었는가? 그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필자는 직장 및 종업원평의회 “제1세대”
여성위원들이 거친 구동독 시절의 사회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베를린(Berlin)시와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주의 5개 직장 및 종업원평의회로부터
표본추출된 30명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였다. 그들은
모두 1990년 당시 평의원으로 선출된 여성들이며, 그 중 5명은
현재에도 평의원으로 남아 있다.
인터뷰는 다음을 주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즉, 그들이
지금까지 어떠한 발전과정을 밟아왔는가? 그들은 어떠한
가치들을 형성해 왔으며, 어떠한 해방관을 가지고 활동해
왔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변동”이라는
새로운 상황 속으로 투영해 나갔는가?
관찰 결과, 구동독 지역의 여성들은 생활과 사고 및 행위
면에서 모두 뚜렷이 모순을 노정해 왔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모순은 특히 구동독 시절 여성들의 존재방식
자체가 매우 모순적이었으며, 그 “좋은(gut)” 면과
“나쁜(schlecht)” 면이 분리 불가능한 형태로 뒤섞여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몇 명의 발전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로
모순적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 가운데, 현재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거나 통일 이후의
상황을 이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필자는 그러한 향수나 이념화를 거부하고, 그 모순들을 올바로
파악하여 변화된 대응양식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고 보며, 그
모순된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관찰의
결론들을 몇가지로 간추려 요약하고, 그 대표적인 두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덧붙여, 이 연구가 비록 여성들에 한정되어 이루어졌지만,
내용상 남녀를 막론하고 통일 후 구동독 지역 전체의 직장평의회
및 노조 활동에 대한 이해를 위해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1. 표본 추출된 여성들의 다수가 - 구동독의 평균적 여성들과
매우 유사하다 - 본인들이 분명히 의식하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비정치적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구체적으로 큰 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적게 갖는 반면, 가족 문제와 소규모 노동집단
보장시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들은
수 년 동안의 노동생활을 통해 특히 이후의 성격과 업무능력,
개인적 추진력과 주체적 현실참여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2. 표본의 모든 여성들은 스스로 동료들을
“보호․지도(Betreuung)”하고, 사회적 냉담을 제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회정책위원회나 인사위원회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나, “경제문제”와 그 외
기업구조문제에 대해서는 남성 평의원들에게 내맡긴다. 그들 중
다수는 갈등적이기보다 화합적인 활동경향을 보인다. 정치적
갈등이나 그와 같은 수준의 갈등에 대해 그들은 기업내
조직에서조차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3. “제1세대” 직장 및 종업원평의회 여성위원들은 노조 정책에
특히 노조 여성정책에 전혀 내지는 그다지 잘 통합되지 못했다.
연구결과는 우선 그 여성들이 사회적, 구조적 성차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활동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집단적 형태(여성보호와 같은)의 해결을 종종 거부하고,
개인적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형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이 노조적, 여성정책적 주제와 과제분야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방법과 형태의 문제도 거부되었다.
표본의 대부분 여성들은 여하튼 모든 정치적 활동으로부터
그리고 노조 활동으로부터도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들은 정치에
대해 이제 “신물이 났다”.
4. 많은 일반적이고 집단특수적인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1990/91년 이후 당시까지 동질적이었던 여성그룹들은 해체되어,
직업적 위치, 정치적 참여방식 또는 이해관계대변에 대한 입장에
따라 상호 분리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곧 직업적이거나
개인적 발전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표본
중 많은 여성들이 그러한 형태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반면,
한 작은 그룹, 그 중 5명이 아직도 직장평의회 일을 하고 있는
그룹의 몇 명은 현저하게 정치화하여, 적극적이 되고 자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인터뷰 1. 아이스너(Eisner): “그 때는 정말 그랬어요”
아이스너는 1961년 베를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모는
자연과학자로서, 과학 아카데미(Akademie der Wissenschaften)에
근무했다. 아이스너의 성장과정은 “아주 원만”했으며, 그는
스스로 자신의 성장환경에 대해 “자유롭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10학년 때(독일에서는 초등과정에서 고등과정까지 학년을
모두 합산하여 부르는데, 대개의 과정이 서독의 11학년에 비해
동독은 10학년까지로 되어 있다 - 역자) 그는 “정치적으로
상반되는 의견”을 피력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간신히 그는 부모의 노력으로 10학년을 마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아이스너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열 다섯 안팎의
어린 소녀가 국가와 다른 의견을 가졌다고” 그렇게나
“흥분하여 반응하다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때부터
그는 더욱 비판적이 되었으며,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정부는 “매우 중요한 경험”을 제공한
것이다.
줄기찬 노력으로 그는 자동화기술 중 하나를 습득했다. 만일
그가 학교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분명 기술을 배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한 전기회사에서 실습을 마치고, 그
곳에서 1989년까지 일을 했다. 그는 딸을 낳은 불과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만 쉬었다. 아이스너는 비록 비판적인 인물로
평가받기는 했지만, 1989년 전에는 결코 동독의 변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스스로 그는 변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정치적 세계지도”를 가지고 성장했다고 했다. 체제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에 반대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매일 매일의 일을 완수하는데
몰두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르바쵸프로 인해 그는 무엇인가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소련의 발전과 동독의 발전간에
나타나는 모순은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이 상태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을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그는 “만일” 구동독 국가가
“보다 더 자유스럽고, 조금만 더 국민들에게 자유를
허용했다면, 모든 사람들이 만족했을 것이 자명하다”고 한다.
“변동”의 물결이 일기 몇 년전 아이스너는 일하고 있던
기업의 관리부로 옮겨, 그 곳에서 사회보장담당 전문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변동”의 와중에는 다시 “인사담당
전문인”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아이스너에게 그 “변동기”는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또 실제 그렇게 했던 변혁의 시기였다.
기업경영측이 즉시 새로운 상황으로 돌입했던 것처럼 그도
직장내에서 - 그의 표현에 따르면 - 매우 현명하게 대처했다.
따라서 혼란은 그리 크지 않았고, 신속하게 합리적인 생산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스너는 “극단적 행동”과 파업
불사라는 태도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 구동독 기업의
실태가 그러한 행동이 옳았음을 증명한다고 한다.
그는 직장평의회의 다른 여성 평의원들과 달리, 사람들이
그에게 출마를 권유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스스로 그는
직장평의회 선거를 미리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매우 빨리 구서독 지역 노조들과 접촉하고, 직장평의원과
노조활동가가 되기 위해 많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곧 “그저
놀라운 한 여성”을 넘어 “독자적인 입장을 가진 한 여성으로
변해갔다. 그는 우선 직장내 노조활동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밝히기를, 그 때까지만 해도 직장평의회 활동과 노조
활동이 통일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였다. 물론 지금의
그는 전혀 달리 생각하고 있다. 1990년 그는 직장평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직장평의회 전임으로 일하고
있다.
아이스너는 직장평의회가 기업경영측에서도 인정한, 통일된
하나의 활동팀으로 발전하는 데, 자신이 조력한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는다. 그는 그 동안 딸이 많이 자랐다고
덧붙이며, 과거의 친구들이 여전히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반면,
자신은 “최근 몇 년간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으며, 그러한
현재의 상황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인터뷰 2. 쉬레더(Schröder): “삶은 힘들지만
아름답다”
쉬레더는 베를린에서 1944년 자신이 태어난 거리에 아직도
살고 있다. “나치 저항군 출신 공산당원”으로서 당내에서도
항상 독자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았다고 그는 밝혔다. 반면 그도 처음부터 그러한 일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당내에서 일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정의를 위해 일했지만, 특정한 형태에 묶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쉬레더의 아버지는 기술자였으며,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하러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했다.
쉬레더는 10학년을 마치고 먼저 의약 전문노동자 일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두 아이들을 위한 탁아소 자리를 얻지 못해 한동안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으므로 다른 직업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실험수 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19살 때
그는 결혼했다.
그는 처음부터 자유노동조합총연맹(FDGB: 구동독노총)에서
일했다. 그는 언제나 노조신임대의원(노조원들 중 직장별로
선출되어 현장과 노조를 연결하는 과제를 맡음 - 역자)으로
일했는데, 옛 노조내의 분위기가 얼마나 화목했던가를 항상
슬픔에 젖어 회상하곤 한다. “이제는 모두들 지나가 버린 일로
그렇게 살아갑니다.” 또한 당시에 분명 무언가 움직일 수도
있었으며, 70년대에는 더욱 그러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업내 노조지도부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앉아 있는 가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그의 업무분야는 특히 여성들이 종사하는 부문으로서 “그의
공들이는 농사”같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불만은 없었으며,
작업은 특히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고 했다. “그래요, 불만이나
동요는 없었어요.” 마치 대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동독의 “변동기”에 관한 쉬레더의 감정은 아픔을 쾌감으로
느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오히려 혼란을 걱정했다.
“모두가 뒤죽박죽이 되는 판에 좋은 점을 볼 수는 없었어요.”
시민권운동이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려 했지만, 상황은 너무나
빨리 변해버렸다고 그는 술회한다.
신임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같은 직장내 동료들의 행위는 결국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는 바로 그들이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쉬레더는 질서 있게 행동할 수
있을 때 평온과 안정이 가능하다는 점에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의 파업시도를 말리는 (서독지역의) 노조를
지원하기도 했다.
노조신임대의원으로서 그는 이제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를
자문한다. 그는 직장내 선거를 조직하였고, 1990년 최초의
직장평의회 선거에 출마하였다. 직장평의회내에서 그는 “기업내
이익보다는 사회보장적 사안에 더 중점을 두는” 그룹에
속하였다. 그래서 그는 해고되는 모든 개별노동자들을 위해 힘써
주었다. 그는 최초의 직장평의회에 대해 “건전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변했다고 말했다.
직장평의원 시절 그는 노조원으로서의 임무도 충실히 했다.
자신이 속한 산별에서 자유노총 조합원들이 탈퇴자 하나 없이
모두 화학․제지․요업 노조(IGCPK)에 재가입하게 된
것에 그는 커다란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그 후 점차 많은
동료들이 탈퇴하게 되어 그는 “매우 괴롭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올바른 노조활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쉬레더는 현재 임시직장평의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마지막 활동일 것으로 보인다. 다수파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나 “임시직으로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로서는 더 편하다”고 한다. 그는 “이제 직장평의회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게 되어, 더 이상 보통 노동자들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위상을 높혀줌으로써
기업경영측은 직장평의회 위원들을 어느 정도 “샀다”고
쉬레더는 말한다. 한편 자신에 대해 그는 전과 마찬가지로
뚜렷한 해방의식과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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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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