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여, 낙점하소서? |
현장에서 미래를 제75호
|
한겨레21 제397호
|
미국이여, 낙점하소서?
ꡔ한겨레21ꡕ 제397호
2002년 2월 20일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진주한
이래 한국의 대권결정 과정에 미국이 관여를 포기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역대 한국 대통령의 선출과 집권세력의 등장은
이러한 미국의 ‘공작 정치적 산물’이거나 또는 그 위력에
힘입은 바 크다.
이승만 정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특히 한국의
지배세력에 ‘최종적인 결재권한을 가진 존재’로 인식돼왔으며,
이 인식의 경계선에는 미국의 의도에 어긋나거나 저항하는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판단이 끈질기게
버티고 있다. “미국 말을 들어라.” “미국에 덤비지 말라.”
그것이 대권을 겨냥한 인물과 세력의 금과옥조이다.
최종결재자의 미소는 무엇인가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김구 선생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암살의
배후,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까지 포함해 미국의
직․간접적 영향력이 곳곳에서 확인 내지는 감지된다. 한국
정치의 대세를 가늠하는 길목에는 언제나 미국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지난 50년 넘게 냉전시기에 미국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자신의 이해를 대리하여 관철할 수 있는 인물과 세력을
물색한 뒤 옹립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항세력을 제거하는
‘비밀공작’을 수행해온 나라다. 가령 1972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에 의한 쿠데타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그가 이끌던 정권이 붕괴되었던 것은 그 대표적인
보기다. 옛소련 해체 이후 공산당의 정치적 복귀를 저지하고
러시아의 옐친 당선을 위해서도 미국은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으며, 선거기술 전문가를 지원했을 정도로 미국의 대권
관련 공작사례는 끝이 없다.
최근 ꡔ파이낸셜 타임스ꡕ와
ꡔ워싱턴포스트ꡕ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미국
방문과정에서의 발언과 움직임을 한국의 차기 대권 향방에 대한
부시 정권의 관리방식과 연결시켜 보도한 내용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미국의 관성적 행태를 보여주는 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회창 총재 진영이 방미 이후 대단히
고무된 분위기 속에서 귀국할 수 있었던 까닭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대선’이라는 거대한 정치변동 과정을 앞에 두고
‘최종결재자의 미소’ 무엇을 의미하게 될 것인지를 “즐겁게
예감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국이 한국의 정치과정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 들어와 자신들의 이해에 맞는 방향으로
관리하려 들 것인지를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추적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비밀공작’이라는 작업의 성격 자체가 공개적 자료를 노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1947년 미 중앙정보국(CIA)의 제3세계
공작과 관련한 ‘국가안보협의회 비밀명령 NSC 10/2’에는 미국
정부의 ‘관련부인’(Plausible Denial)을 규정한 대목이 있어
공작의 실체규명과 그 책임소재 입증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쿠바의 혁명 수반 카스트로 암살시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관련이
다양한 경로로 드러났음에도 미국 정부가 이를 인정한 바는 아직
한번도 없다. 관련 부인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정보자유법에 의한 비공개 자료의 판독도 2~30년
뒤에나 이루어질 수 있고 그나마 민감한 대목은 검은 줄로
지워서 공개되기 때문에 정확한 판독과 결론에 왜곡이 생길
여지가 있다.
사진: 미 대사관 건물전경. 미국의 국내 비밀공작 제1차 작업은
철저하게 정보정치로 이뤄진다. (이정용 기자)
정교한 인사파일 작성
하지만 ꡐ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질서가 목적하는 바가
종국적으로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ꡑ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면 그 수단인 비밀정치공작의 내용은 그런 대로 윤곽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 CIA가 미국의 패권체제를 확보하는
비밀공작기구라는 점을 주목하면 이는 자명해진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한반도 주민들의 이해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는 강력한 의지와 기반을 가진 세력의 집권을
실현하려할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민족의 자주성을
고취․옹호할 민족주의적 인사, 자본의 지배에 대한
계급투쟁의 정치세력화를 주도하는 인물과 세력은 철저하게
제거하는 쪽으로 사태를 몰아간다. 미국의 개입을 배제하게 될
‘중립화론’ 역시 미국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자주적
한반도 중립화론’은 그러한 의미에서 미국의 패권질서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어 있다.
한마디로 미국의 지배가 한반도 지역에서 관철되는 과정에
미국에 최대의 적은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이며
해방공간에서 희생당한 인물들이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미국의 정치공작 대상은 명료해진다. 미국의
선택을 기다리는 대권주자들은 민족의 자주와 정치․경제적
정의에 침묵하는 것이 따라서 상책이 된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 한국 정치를 관리하는가? 여러
가지 접근이 필요하겠으나 비밀공작정치의 기본유형을 통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미국이 한반도에서 어떤 질서를 원하는가를 꾸준히 알리고
이에 호응해오는 세력을 포섭하고 이들 가운데 지도적 역량이
있는 자를 내심 지목하여 장기간에 걸쳐 육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군부 내 인맥의 장기적 육성은 그 뒤 1980년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이어졌고, 민간 정치인의 친미적 성향을 길러내는 일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미국은 대상국가 내부의
정치권에서 자신이 주시하는 인물에 대해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30년의 시간을 두고 여러모로 관찰하고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여 길러낸다는 것을 안다면, 미국의 공작정치가 가지고
있는 호흡의 길이를 우리는 깊이 염두에 두고 대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미국의 국내 비밀공작 제1차 작업은 철저하게
정보정치로 이뤄진다. CIA의 최우선적 기능은 여기에 있다. 이
작업을 통해 미국은 그들의 의사에 순응할 수 있는 세력과
인물들에 대한 정교한 인사파일을 작성하고 이와 함께 유사시
제거 내지는 진압해야 할 세력의 명단도 짜놓는다. 유력
정치인의 미국 방문과정과 기타 국내의 외교적 접촉을 통해서
그리고 각 정치집단 내부에 미국 정보원을 심어 한국 정치의
움직임을 매우 자세하게 파악한다. 특히 미국 정보원의 역할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된다. 정치인을 비롯하여 언론인, 종교인,
지식인, 기업인 등 미국이 활용하는 정보자원은 무궁무진하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미국은 그에게
제거대상 명단을 넘겨주어 무수한 학살을 자행했던 역사는
이러한 정보정치의 결과물이었다.
각종 비리사건 정보도 축적
정보는 이러한 인물평가 파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각종
비리사건과 부패 연루, 기타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을 오랜 기간 축적해간다. 그리고 이를 필요한 때 적절한
회로를 통해 정세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공작한다. 한국의
대권주자들이 미국을 두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이러한 정보공작정치에 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미국의 비밀 정보공작정치가 언론기관과 결탁되어 추진될 경우
그 파괴력은 매우 크다. 심지어 대통령이라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정보공작정치는 구시대 군사정권의
유물로만 판단해서는 오산이다. 따라서 자주적 민족국가를
이루려는 뜻을 가진 인물들은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미국의
정보공작정치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돈문제가 미국이 한국 정치를 요리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라는
점은 분명하다. 선거자금의 지원을 비롯해서 민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증시조작과 극단적으로는 경제봉쇄 위협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선택하고 동원할 수 있는 돈의 위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제봉쇄 위협은 다소 생소할지 모르나 이미 지난
1997년 금융위기의 처리 과정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상을
놓고 내부적인 격론이 벌어졌을 때 미국쪽이 그들과 인맥을 가진
인사들을 통해 흘린 사안이라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대해 미국의 처방을 최선의 것으로 선전하고
활동했던 인물이 IMF와의 협상에서 마치 대단한 스타처럼
만들어졌던 상황도 새삼 점검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자신이
관리하는 인물들이 너무 친미적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도 이따금 이러한 인물들이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하도록 권고한다는 점 또한 꿰뚫어봐야 한다.
진보진영 내부에도 그들의 움직임을 손바닥에 놓고 볼 수 있도록
미국의 정보원으로 길러진 인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2차대전 이후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이탈리아 노조에 미국 정보원을 깔아 진보정치의 지도자로
행세하게 하여 결국 과격하고 극단적인 파업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노조의 고립을 자초하게 했던 역사는 고전적인
공작정치의 한 보기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정보원들이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한국 정치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으리라는
점은 특히 대선과정에서 적지 않게 염두에 둬야 것이다. 적대적
정치세력간의 정보전보다 우리 민족 전체에 더욱 큰 위협은 바로
미국의 정보공작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 키운 정치인을 떼내라
사진: 미국이 지지하는 대선주자는 위싱턴 정가의 고위층과
인맥을 쌓게 함으로써 국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다. (GANNA)
언론은 미국이 가장 신경을 쓰는 공작정치의 수단이다. 미국에
유리한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도록 평소의 인맥관계를 두텁게 할
뿐만 아니라 이로써 향후 대권주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미국의
입장을 옹호해야 할 것인지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인맥관계에서는 워싱턴 정가의 고위층과 인맥을 쌓고 과시하는
데 지원함으로써 국내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번 이회창 총재의 방미과정은 그러한 대목을 압축해서
보여준 셈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미국의 우리 내정에 대한
간섭과 개입은 기본적으로 ‘국가건설’ 개념에 기초해 있다.
미국이 우리를 비롯한 타국의 내정을 간섭 조정하는 기초는 우선
군사력으로 대세를 장악하고 정치지도자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각종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건설
프로젝트야말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식민통치기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며, 이 과정에 동원되는 인물과 정치세력은 결국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일신과 일족의 영달을 위해 비리와 부패,
그리고 그 밖에 부도덕한 방식으로 정치를 피폐하게 만들어가게
된다. 일단 이러한 세력들이 집권하게 되면 전략적 국가재원을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미국 자본의 소유로 만들고, 광산
채굴권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권이 헐값으로 넘어감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뇌물거래가 발생한다는 점을
추적해야 한다. 이는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반면교사로
고스란히 보여주는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내정간섭에 호응하는 세력, 특히
언론과 정치권 내의 세력에 대한 청산을 줄기차게 그리고
강력하게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2002년 대선은 그러한 우리의
정치적 결의가 좀더 구체적이고 집단적인 역량으로 힘차게
솟구쳐나와야 할 정치과정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미국의 지배 아래 정복된 나라의
주민처럼 살아가는 운명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민족의
자주와 정치․경제적 정의를 부르짖는 인물과 세력이 한국
정치의 올바른 중심에 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식민통치의 전략․전술에 자발적으로
포섭되는 인물과 세력의 정치적 척결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명심할 일이다.
|
2002-03-20 00:00:0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