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 |
현장에서 미래를 제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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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현․이해영․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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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정국에 대한 올바른 정치적 접근과 ‘민중탄핵론’ 비판
남구현․이해영․최형익 (한신대 교수)
www.another0415.net 2004년03월23일
1.
현재의 탄핵정국은 대부분 인정하듯이 다가올 선거에서 의회
다수권력을 빼앗길 상황에 처해있던 수구세력이 몰락의 위협, 그
공포를 과장한 나머지 자행한 합법을 가장한 의회쿠데타 이자
설익은 ‘테르미도르의 반동’기도이다. 부르주아
정치이론적으로만 본다면야, 탄핵은 부르주아 정치 국가권력의
양대 축인 국회권력과 대통령 권력이 충돌한 사태에 지나지
않으며 그 절차 역시 철저히 합헌적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정치 혐오증에 젖어 있던 일반 대중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는 아래로부터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온
나라를 탄핵반대 시위로 들끓고 있는 것일까? 그 형식에 있어
탄핵 반대, 민주 수호, 국회 해산 등으로 집약될 수 있는 대중적
공분은 대통령을 탄핵한 국회의원들을 향해 있다. 따라서 현재의
탄핵반대 시위는 얼핏 보기에 계급적 프리즘으로 잘 잡히지
않으며, 지난 김대중 국민의 정부, 현재 노무현 참여정부 들어
집중적 공세에 시달렸던 노동자 운동 내부, 특히 좌파
일각에서의 양비론 혹은 민중 탄핵론 제기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 힘들며, 현재 사태를 바라보는 정세관, 나아가
실제로 전략 전술을 세워 정세 개입적 차원에서 운동을 전개하는
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2.
현재 사태의 핵심이 과연 민중탄핵을 주도하는 좌파일각의
주장처럼 탄핵반대 시위가 단지 빈사상태에 빠진 노무현과
열우당을 기사회생 시킨 것이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두
가지 점으로 나누어서 분석해 볼 수 있다. 먼저, 탄핵 전에
노무현과 열우당이 빈사상태에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결과로 볼 때, 열린우리당은 이미 제1당으로 올라서
있었다. 야당 내부 분열사태와 함께 이러한 추세가 탄핵을
감행한 배경임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이
빈사의 상태에 빠진 것을 탄핵사태를 두고 하는 말일 텐데, 결국
민중탄핵론을 주장하는 입장의 배경은 이처럼 사실상 탄핵찬성과
동일한 생각의 연장에 있다.
한마디로, 한민당이 단행한 의회쿠데타에 대해, 노동자 계급의
주적이자 신자유주의 개혁정권인 노무현이 탄핵 당할 바에야
우리가 잃을 게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탄핵 역시 반대할
일이 없다는 얘기다.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좌익공론적이며,
정치적으로 유해하고 무책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도로
말하지 않겠다.
만일 이러한 우리의 비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좌고우면하지 말고, ‘노무현 탄핵찬성’을 전면에 내거는 게
정직한 활동가의 태도일 것이다. 사실 그게 민중탄핵론의 내밀한
핵심 아닌가? 사실 대중적 수준 그리고 현실정치적으로
‘민중탄핵론’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2중대’가 싫어,
수구반동적 한나라-민주당-자민련의 ‘2중대’를 자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3.
과거 같았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을 의회쿠데타는 이제
의회소동으로, 탄핵정국은 탄핵 게이트로 넘어가고 있다.
쿠데타가 해프닝으로 변질되게 하도록 한 결정적 주역은 수십만
대중들의 단호한 직접행동이었음을 명백하다. 한마디로,
대중들의 직접 정치행동이 빈사에 빠진 노무현 정권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구해낸 게 현 사태의 규정적 핵심이다.
그것이 친노로 귀결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오히려 부차적
문제다. 이제 탄핵을 둘러싼 입장표명의 시점은 물 건너간 게
사실이다. 탄핵정국은 총선정국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이제
탄핵찬반 내지 민중탄핵을 내세운다고 해서 사태가 달라지는
것이 전혀 없다. 그것이 이번 사건이 갖는 한계점이기 때문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여전히 이러한 사태에 대해 좌파의 무능함이
여실히 증명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어째서 대중들은 대규모 정치적 시위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 정치적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가? 상식적으로 4월 15일이면
총선이 있을 것이고 그때 열심히 투표해서, 노무현과 열린
우리당을 구해주는데 그치면 될 것 아닌가? 어차피 노무현
정권의 복권과 노무현 지지를 바란다면 말이다. 하지만, 대중은
오히려 그러한 표 찍는 기계에 머무르지 않고, 무엇보다 ‘합법,
합헌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말이 아닌 몸으로 표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사태의 번뜩이는 혁명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현재
탄핵사태는 노무현지지 여부를 떠나 좌파 혹은 진보적 정치가
적극적으로 활용으로 그 정치적 외연을 넓히고 대중들에게
현재의 사태를 정확히 인식하도록 선전, 선동 조직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한마디로 좌파 입지를 제고할 수 있는 열린
정치공간이었다. 투쟁이 있는 곳에, 투쟁하는 대중이 있는 곳에
좌파가 함께 함은 지극히 당연한 요구 아닌가.
4.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중들의 탄핵반대 시위는 민주주의와
계급투쟁을 예비하는 중요한 정치학교의 성격을 지닌다. 미군에
죽임을 당한 효순, 미선 양에 대한 추모 반미시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좌파 일각의 대응은 그러한 태도를 취하기는커녕
탄핵반대가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에 자리를 내주는 것 내지
몰계급적 입장이라고 비판하였다.
물론 현재의 시위가 액면 그대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아니며
그것과 연결짓는데 어려움이 있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의 한계이자 정치적 상태이다. 나아가 모든 시위가
우리의 입맛대로 반신자유주의로 환원되어 져야 하는가? 오히려
이러한 대중적 분노와 자발적 형태의 정치진출의 물결을 타고
반신자유주의, 민중민주주의 투쟁의 수로로 모아가는 것이
좌파정치의 역사적 임무가 아닌가?
보다 정직하게, 좌파가 현재의 탄핵사태 그리고 대중적
반대시위에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는가? 이대로라면 우리는
대중의 정치적 의식을 진두지휘하며 앞서 나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꽁무니를 따라 잡기에도 바쁠 것이다.
‘신자유주의=파시즘’이라는 등식 역시 현실의 복잡한 제
관계들을 가리는 극히 단순화되고 과장된 도식일 뿐이다. 오히려
이 도식을 통해 지난 20세기 좌파 사회운동사의 가장 치명적인
역사적 오류 가운데 손꼽히는 1920년 말~30년대 초의
‘사회파시즘 테제’라는 우울한 경험이 연상되는 것은 웬
일인가. 임박한 히틀러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당시 독일공산당은
사민당을 히틀러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사회파시즘론을
공식입장으로 천명한 바 있고, 그것이 좌파 모두의 공멸로
귀결되었음은 익히 알려진 있는 사실이다.
이 좌익소아병적 사회파시즘론이 국제운동사에서 공식적으로
극복되는 계기가 이른바 1935년 디미트로프의 통일전선론이었다.
따라서 현 노정권과 그 지지세력을 한 움큼으로 싸잡아서
‘신자유주의 개혁파시즘’으로 단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오류이자, 실천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통전이전 단계로
좌파이론을 퇴보시키고, 고립을 자초하는 그래서 실천적으로
정치적 자살로 이어지는 관점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민중탄핵론이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노무현정권=파시즘이라는 도식은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마치
구체적 현실인 것으로 상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나아가
만에 하나 노정권이 파시즘화될 경우 필연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는 대중운동의 역할과 가능성을 아예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또한 중간계급에 대한 정교한 계급론적 문제설정을
망실함으로써,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진보적 정세분석론의 원칙과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어쩌면
이야말로 ‘모기잡기 위해 도끼를 휘두르는’ 겪이 아닌가.
5.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좌파운동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탄핵찬성주장, 나아가 민중탄핵 제안에 대해 반대한다. 하지만,
현재의 투쟁이 이후 반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전화되어야 하며, 또
탄핵반대 투쟁과정에서도 이를 반신자유주의 투쟁과 접속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기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견을
같이한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탄핵반대 주장과 이후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치는 것은 전혀 대립, 모순된 일이 아니며, 적극 연동되어
있음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오히려 전자, 즉 현재의 민주주의
투쟁의 적극적 개입은 반노무현,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개하는데 모순됨이 없으며, 오히려 이의 대중적 확산에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탄핵반대를 위해 집결한 대중이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에 동의하고, FTA에 찬성하며, 이라크파병을
지지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6.
노무현 민중탄핵의 주된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지난 시기 문민정부 시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제창자로서의 한나라당과 국민의 정부
시절 그것을 확대한 자로서의 민주당에 대해 분명한 관점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일찍이 1996년도 노동법 개정시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기업 단위로 도입되던 신경영 전략을
전국적 차원에서 전면화 한 것이다. 한편 독점 재벌의 이해만
관철하며,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경제
성장, 그 모순의 폭발로서 IMF 경제위기가 터졌을 때, 그
해법으로 국민의 정부 시절 철저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현 참여 정부는 이전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 받았으며,
제도권 진출을 노리며 암묵적으로 동조해 온 노동자 운동의 일
분파도 이에 묵시적인 동조세력이다. 신자유주의의 최대한의
수혜자는 독점자본을 위시한 자본가 계급이고, 그들의 정치적
대변자 가운데 가장 반동적인 계급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포진하고 있는 수구 보수세력이다.
지역주의를 매개로한 지배계급의 가장 반동적인 분파야 말로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먼저 척결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대중적인 구호인 국회 해산은 민중 탄핵의 제일
대상이 현재의 정치정세에서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양비론에 따르더라도 최소한 양자를 모두 탄핵해야한다.
7.
현재의 민중탄핵론은 부르주아 계급과 중간 계급의 개혁성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 주시하다시피 참여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어 받으면서, 정치개혁, 언론개혁을
진행하였다. 지금 정세는 참여 정부의 정치개혁으로 지역주의,
보스를 중심으로 한 사당정치가 위협받게 되면서 수구보수세력이
대통령 탄핵을 통해 반동적 공세를 취한 것으로 보아야한다.
물론 참여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된 기조로 설정하였고,
중간 계급이 손해보지 않는 방식으로 개혁을 진행하였다(예컨대
소액 주주 운동 등). 노동계급 내에서도 분열 정책을 통해
일부는 덕을 보고 일부는 피해를 보았으며, 비정규직, 여성,
장애인 등이 최대의 피해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애초에
부르주아 개혁, 또는 소시민적 개혁의 한계가 아니었는가.
정치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보다 많은
민주주의가 항시 중간계급의 요구가 되어 오지 않았는가. 각
계급이 각자 자기의 한계 내에서 개혁을 한다고 하여도 그러한
개혁은 자기의 한계 내에서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 내지
않았는가. 올바른 계급적 관점은 각 계급의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분석하고, 각 계급의 움직임을
역사적 진보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노동자 계급의 해방적 정치를
위해 최대한의 진보를 이끌어 내는 관점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보편적 계급으로
올라서서 사회의 실질적 주체로 서는 것을 관건으로 해야 한다.
매 시기 시기 즉자적이고, 모든 다른 계급에 대해 배타적인
이해관계에만 매달리도록 노동자 운동을 가두는 협소한 노동자
주의가 오히려 몰계급적인 관점이라고 본다.
8.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맑스의 언급을 굳이 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 참정권 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지금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운동이 그것이다.
개혁적 부르주아지와 중간계급의 개혁성이 한계가 있다고 이를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그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할
경우, 주창자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우리 사회의 가장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경우를 반동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또한
정치투쟁은 노동자 계급의 동력만으로 혁명을 완수할 수 없는 한
각 계급들간의 연합/연대전술이 필수적이다. 소위
‘민중탄핵’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정세에서는 결코 현재
의회탄핵과는 다른 구체적 대안, 정치적 절차를 제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것이 실제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노동자들의 힘만로 이루어 질 수 있는 혁명을 의미하지
않는 이상 타계급과 동맹/연대/연합을 해야 탄핵가결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9.
민중탄핵, 민중발의, 민중소환 모두 좋은 주장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입되는 게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소환해야 할 대상, 즉 대표자가 있어야 소환탄핵도 할
텐데, 이는 결국 대표를 선출하는 의회주의를 인정해야 현실화될
수 있는 주장 아닌가?
그리고 소환의 결과가 항상 진보적이라고 볼 근거도 없다.
국민소환이 도입되어 있는 미국 켈리포니아주의 경우 전직
주지사 소환탄핵 결과, 우익정치인인 터미내이터가 선출되지
않았는가? 결국 제도, 슬로건 그 자체가 진보정치, 계급정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지금은 수구 반동적 정치를
근절하고 대중 민주주의를 제고하는 게 급선무다.
수구반동, 보수세력이 현재의 국면을 친노/반노로 몰아가고
있으며, 탄핵을 반대하는 민주, 진보, 반자본 등 모든 조류를
친노로 규정하면서 좌익 용공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으며, 열린
우리당으로 대표되는 소위 개혁 분파는 민주/반민주로
민주노동당은 진보/보수로 이끌어 각기 향후 총선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현재의 탄핵 반대 투쟁은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의 분리
정립을 경과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러한 형국에서 유리한
정치적 지위를 갖기 위해서라도, 진보적 민주세력를 강화하면서
이를 제도 정치를 뛰어 넘는 노동자계급정치의 전망과
결합시켜나가는 것이 우리의 당면과제이다. 민주주의의 폐지가
아니라 그 완성을 통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제라면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중들의 진출을 막아설 그 어떤 근거도 없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스스로를 탄핵반대 대중운동과
분리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이들과 함께 또 투쟁속에서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구체화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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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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