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장은
49일간의 파업투쟁을 마치며...*
한국과학기술원지부 파업투쟁 약평
임 양 섭/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선전홍보부장
1. 역사적인 투쟁!* 이 글은 파업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파업 종료 후 자진 출두하여 구속수사를
받고 있는 한국과학기술원지부 정상철 부지부장이 유치장 안에서
이번 과기원 투쟁의 전반적인 약평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과기노조 선전홍보부장이 문서로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적인 투쟁이었다. 과기노조 36개 지부 중에서 그 어느 곳도
이처럼 오랫동안 파업투쟁을 해봤던 경험도 없었고, 또 이처럼
전 조합원이 힘차게 투쟁을 만들어냈던 적도 없었다. 그 자체가
모범이었고, 노동자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던 공간이었고,
또한 노동자의 진정 훌륭한 학교였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우리는 패배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게...그리고
처절히...
현장으로 복귀한 조합원들은 다시금 보직자와 교수들로부터
직․간접적인 탄압을 받고 있고, 불안에 떨고 있다.
과기노조 본부와 남아있는 지부 대의원들은 조심스럽게
공백상태의 지부 집행부를 추스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조합원들은 95년 정리해고를 통해 80% 가까운 우리의 동지들을
떠나보낸 이후 이를 회복하기 위해 5년의 시간을 침묵과 굴종
속에서 참아왔던 그 시간들이 다시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시설민영화 이외에는 그 어느 것도
합의되지 않은 가운데 사측에서 제시하고 나온 ‘전 조합원에
대한 고용안정 불가’의 방침은 업무에 복귀한 조합원들에게 2차
구조조정의 가능성으로 전달되고 있고, 노조의 패배를
주도해냈던 교수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이번 기회에 아예
노동조합을 없애버리던지, 아니면 옴짝달싹 못하게 그 싹을
잘라버리자는 결의 아닌 결의를 밝히며 현장의 조합원들을
공공연하게 탄압하고 있다. 아직까지 과기원 노동조합에 새로운
지도부도 구성되지 않고 있고, 민영화되어 일자리를 떠나가는
41명의 동지들의 조합원자격을 유지시켜야 하는 문제도 남아
있고, 2001년 상반기를 걸치면서 정부출연연구기관 전체에
몰아닥칠 엄청난 구조조정의 서슬을 막아낼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지상에는 공공연히 정부출연연구기관 종사자의
약 20% 정도 수준을 구조조정시킨다는 정부의 방침이 떠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인 투쟁’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는 ‘역사적인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역사적인
투쟁’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에겐 우리가 말하고 만들어왔던 ‘역사적인 투쟁’을
지켜내야 할 새로운 역사적 투쟁을 시작해야 할 임무가
주어졌다. 그 임무의 달성을 위해 우리가 지나왔던 흔적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2. 과기원투쟁의 시작
(1) 지리한 교섭
투쟁의 시작은 아주 의례적인 것부터였다. 매년 진행해 오던
임금 및 단체협약의 체결을 위한 교섭부터였다. 그나마
과기노조가 산별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과기부 산하 3개
기관이 공동으로 임금 및 단체협약 교섭을 시작했으나 기업별
노동조합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라 각 지부간 편차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지난 2000년 1월 18일
전면파업을 예고한 가운데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강요되었던
시설민영화를 간신히 막아냈던 터라 집행부와 조합원들에게 다시
투쟁을 만들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그러나 교섭은 순조롭지 않았다. 3월 3일부터 시작된 교섭은
뜨거운 여름을 지나 찬바람이 돋아나는 9월이 되도록 실마리를
풀지 못했고, 결국 9월 25일 일제히 대전지방노동청에
조정신청을 내고 냉각기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10월 5일
조정회의는 노사간 현격한 이견차로 조정안을 제시하는 것은
노사간의 갈등을 더욱 유발할 것이라는 이유로 조정불가 판정을
내렸고, 사실상 교섭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섭결과만을 기다리며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조합원들을 만나들어가며 교섭 진행상황을 설명하고, 만약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투쟁을 준비해왔다. 작지만 여러 차례의
투쟁을 경험해왔었고, 또한 지난 95년 엄청난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서 수많은 동지들을 떠나보냈던 아픈 기억들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음은, 투쟁의 당위성을 설득해내는데 좋은
조건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10월 6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는 87%의 투표율과 84%의
찬성율로 통과되었고, 조합원들은 서서히 마음의 준비를 해가고
있었다.
(2) 투쟁의 시작
곧바로 천막농성장이 설치되었다. 집행부는 철야천막농성에
돌입한 가운데 조합원들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아갔다. 그러던 중
결정적으로 우리를 분노케 하는 사안이 발생하였다. 10월 10일
과기부 명의로 한국과학기술원에 대한 시설민영화 및 민간위탁
방침이 하달되었다. 이에 대해 사측에서는 정부의 지침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라는 입장을 보였다. 조합원들은
극도로 분노했다. 지난 2000년 1월 최덕인 원장은 약속하건대
자신의 임기 내에 시설민영화는 절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때문에 투쟁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자신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획예산처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하에 몇 가지
경영혁신 지침을 하달해놓고 이를 이행치 않는 기관에 대해서는
예산 배정을 유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학생자녀
학자금보조비 폐지, 연월차수당 축소, 호봉승급분 불인정,
체력단련휴가 폐지 등의 요구는 출연기관 종사자의 실질임금을
약 20% 넘게 삭감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구조조정안이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적용되고
있었고, 한국과학기술원도 이로부터 예외가 아니었다.
이제 적은 단지 사측이 아니었다. 연구현장의 노동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책상 위에서 끄적거려 만든 허울좋은
구조조정안을 적용시키려는 기획예산처와 과기부 등 김대중 정권
자체로 우리의 분노는 이어져가고 있었다. 현수막이 내걸렸다.
‘불법지침 남발하는 과기부를 박살내자!’, ‘자율적 노사관계
부정하는 기획예산처를 박살내자’, ‘무소신 무능경영 최덕인
경영진 퇴진하라!’
10월 16일과 19일 우리는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과기부와 기획예산처의 홈페이지에 우리의 요구를 집중적으로
전달했다. 실명을 밝히며 글을 올리고 또 올리고, 수많은
조합원들이 동참했다. 과기부는 잠시동안 서버를 중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조합원들은 작지만 소중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10월 26일 한국과학기술원에 대한 국정감사가 진행되었다.
우리의 요구를 전달할 좋은 기회였다. 열심히 피켓을 만들었고,
국정감사장에 전달할 요구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측은 우리의
요구안을 치워버렸다. 조합원들은 국정감사장을 막고 국회의원의
출입을 통제했다. 사측은 몸이 달았다. 결국 요구안을 모두
전달한다는 조건으로 봉쇄를 해제했다.
10월 27일 첫 시한부 경고파업이 만들어졌다. 국정감사가
진행되는 원자력연구소 광장을 가득 메운 조합원들은 목소리
높여 과기부와 기획예산처 그리고 정권을 규탄했다. 조합원들은
이제 당연하게 정권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구조조정이
어디로부터 출발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11월에 들어서자 사측은 먼저 교섭을 요청해왔다. 지속되는
간부파업과 흐트러지지 않은 조합원들의 투쟁요구는 사측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교섭 속에서도
그들은 전혀 입장을 변화하지 않았다. 다만 유연해졌을 뿐.
그들의 본질이 낱낱히 드러나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교섭이 문제해결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한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던 파업이 우리에게 요구되었다. 11월 22일 마침내
무기한 파업 돌입! 거의 전 조합원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난방이
중단되었다. 전기 급수 관련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고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조합원들은
진작에 이런 투쟁을 했어야 한다는 가슴뿌듯함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파업 사흘만에 난방중단으로 분노한 학생들이 우리의
농성장을 무참히 부수어 버렸다. 조합원들은 허탈해했다. 이것이
맞는 투쟁인가? 아직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고, 우리는
스스로의 전술적 선택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파업은 유보되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현장에 복귀하길 원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시작된 싸움, 끝을 봐야 한다는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3) 마침내 파업의 돌입
다시금 교섭이 시작되었으나, 오히려 사측은 해볼테면
해봐라라는 식의 태도로 급변해 있었다. 여론이 노조에게
불리하니,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조합원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음은 조합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더구나 12월초 사측은 일방적으로 기획예산처의
지침에 따라 노사간 단 한마디의 협의 없이 경영혁신지침을
시행하는 사내원규를 개정해버렸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
12월 6일 지부장과 부지부장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조합원들을 끌어당기고, 이번 투쟁을 결코 질 수 없다는 의지,
사측에 대한 경고의 표현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조합원들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노를 모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12일의 교섭 결렬 후, 마침내 12월 13일 더 이상 후퇴할 수
없음의 위기감은 무기한 전면파업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단식
8일차임에도 지부장과 부지부장은 너무나도 결연히 조합원들
앞에 당당히 서고 있었다. 3일 이상을 넘길 수 없다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파업의 불길은 점점 거세게 타올랐다.
그러나 사측은 한번 시작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12월 19일
사측은 노동조합과 단 한번의 논의구조도 갖지 않은 가운데
일방적인 시설민영화 추진계획을 통보했다. 12월 28일 44명의
조합원을 해고통보하고 2001년 1월 31일부로 정리해고를
완료한다는 계획이었다. 더구나 파업 돌입 이후, 최소한의
동파방지를 위해 야간난방만이 공급되자 학생들과 교수들의
반발이 구체화되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과기원 내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학생들의 노조 파업 중단
촉구를 위한 집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임금 및 단체협약은 투쟁의 중심으로부터 비껴나가고
있었다. 투쟁의 본질이 흐려진 채 서로간 감정싸움으로 치닫고
있었고, 지도부 역시 감정의 골에 얽매여 제대로 된 투쟁의 상과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붙잡아야만 했던
것은 우리의 동지를 사수하고 정권의 구조조정을 막아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임무라는 점이었다. 우리가 무너지면 전체
출연기관의 노동자가 길거리로 내몰린다는 절대절명의 사명감은
파업대오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4) 시설민영화 강행
1월 4일 몇 차례의 봉쇄에도 불구하고 사측은 시내 모처
식당에서 기습적으로 시설민영화 해고대상자 선정을 위한
직원인사위원회를 강행하였다. 그리고는 1월 5일 내용증명을
통해 41명의 시설조합원들에게 해고예정통보를 했다. 해고날짜는
2월 9일!
더 이상 앞뒤 겨를을 따질 틈이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원장실에
대한 점거농성에 돌입하였다. 지금까지의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파업투쟁이 아니라, 정규전으로서의 파업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전개해야만 했고, 이는 조합원들의 자발적 의지의
표현이었다. 더 이상 사측과의 대화는 없었다.
과기노조 전체가 투쟁에 결합했다. 36개 지부 지부장들이 모두
원장실 점거농성에 돌입하였다. 한국과학기술원 노동자에게
투여되고 있는 구조조정과 경영혁신 지침이 나머지 출연기관에도
그대로 투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금씩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의 투쟁이
무의미하다는, 시설민영화는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사안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투쟁을 접자는 의견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지도부는 당황하고 있었다. 파업투쟁을
이어나가는 문제가 아니라, 파업투쟁의 결말을 먼저 고려해야만
했다. 조합원의 파업투쟁 결합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었다.
조금씩 현장에 복귀하는 조합원들이 눈에 띠고 있었다. 더구나
사측은 노동조합에 대한 수십 건의 고소고발을 넣고 있었고,
지도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투쟁을 접을 수는 없었다. 1월 18일 우리는
행정동 본관에 대한 봉쇄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사측은 1월
20일 시설민영화로 공백이 될 시설부문에 대해 외부 민간업체
대한 계약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점차 투쟁을 포기하는
시설부문 조합원들이 늘어나자, 지도부의 의견 역시 갈라지고
있었다. 투쟁을 접자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5) 49일의 파업투쟁...그러나...
1월 19일 지도부 12명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여론을
비롯한 모든 조건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우리는 결국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월 20일 시설민영화를 수용하겠다는 굴욕적인
잠정합의로 다가갔다. 시설 조합원들은 어쩔 수 없었던 대세가
아니었느냐는 입장과 함께 하나둘, 파업 현장을 떠나갔다.
그러나 사측의 공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체 직원에 대한
고용을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을 들고 나왔다. 이후 추가로
발생될 구조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시설부문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다시금 조합원들은 분노했다.
어차피 업무에 복귀한 이들은 그렇다치고, 남은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투쟁을 다시 만들자는 요구가 모아지고 있었다.
구정 연휴기간 사측은 지속적으로 공권력 투입을 통해 지도부를
제거하겠다는 협박을 했다. 남은 조합원들은 스스로 조를
편성하여 구정기간 내내 지도부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에
돌입하였다. 조합원들의 투쟁의지는 높았고, 얼굴 또한 밝았다.
투쟁으로 인해 지친 것은 지도부였지, 조합원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쳐있던 지도부는 더
이상 투쟁을 끌고 나가려 하지 않았다. 파업지도부의 잦은
회의가 이어졌고, 정규전이 아닌 비정규전으로라도 투쟁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 요구되었으나, 쉽사리 수용되지 않았다. 고공
농성과 다른 거점에 대한 점거농성까지 제안되고 준비되고
있었으나, 지도부는 이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1월 31일 49일간의 파업을 끝으로 지도부는 파업철회를
선언하였다.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조합원들은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정말 철저히 그리고
처절하게 깨어나가는 순간이었다.
3. 일방적 구조조정, 시설민영화 그리고 고용불안
(1)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위기
이번 사태는 이미 1996년 김영삼 정권의 PBS(Project Based
System)제도 시행으로부터 출발되고 있었다. 전체가
정부예산으로 운영되고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에게 외부로부터
과제를 받아오고 여기서 발생되는 과제운영비를 인건비 일부로
충당한다는 계획은 출연기관의 구조를 뿌리부터 흔드는
제도였다.
PBS제도의 시행이유는 점차적으로 출연기관에 투여되는
정부예산의 폭을 줄여내고 스스로 생존하라는 요구의 한
형태였고 이는 궁극적으로 출연기관의 민영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출연기관 민영화의 요구는 서구사회의 모델을
여과 없이 수용한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초국적 자본의 요구와
이해에 맞추어 연구기관 또한 기업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이윤창출에 철저히 복무할 때만이 그 생존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경쟁논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연구인력과 연구의
성과가 한 국가의 발전에만 복무하는 것이 아닌 수월하게
국제자본에게 착취당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시키기
위함이었다.
2000년 이후 기획예산처를 중심으로 예산권을 가지고 출연기관의
목줄을 좌지우지하는 형태는, 이러한 출연기관의 민영화를 향한
남한사회 자본과 정권의 요구와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 기획예산처의 경영혁신 지침
이러한 출연기관 민영화의 흐름이 김대중 정권을 통해 가장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기획예산처의 불법적인 지침 남발이다.
1998년 IMF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권은 4대 부문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을 밝혔고, 가장 먼저 공공부문에 대한 구조조정
작업에 돌입하였다. 특히 공공부문 중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정부가 시행하는 대부분의 대노동 및 구조조정 정책의
첨병으로서 출연기관에 수용되는 과정의 확인으로부터 다른
공기업 및 사기업에 적용되는 정책의 완성을 위한 실험용
모르모트로 전락하고 있다.
이미 1998년 기획예산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에 연봉제 도입,
계약제 시행, 퇴직금 누진제 폐지라는 출연기관 노동자의 생존권
자체를 흔드는 지침을 강요하였고, 전 국가적 위기 극복의
대안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구조조정이라는 대의 아닌 대의가
전국민적으로 동의 및 강제되고 있던 상황에서 구조조정 반대는
자기 밥그릇 지키기라는 집단이기주의로 전락될 소지가 컸기
때문에, 출연기관의 노동조합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이나
투쟁을 조직할 수 없었다.
그리고 2000년 김대중 정권은 스스로도 외환위기를 벗어났다는
자랑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태생적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금 구조조정의 칼날을 노동진영에게 들여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1998년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경영혁신
지침이라는 이름 하에 대학생자녀 학자금보조비 폐지,
연월차수당 축소, 호봉승급분 불인정 등의 시행지침과 함께,
나아가 이를 수용 및 시행하지 않는 기관에 대해 예산상의
불이익을 주겠다는 이미 확정된 예산의 수시배정 전환이라는
악랄한 카드를 던지고 있다. 또한 전체 출연기관 종사자의 20%
내외를 인력구조조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철저하게
김대중 정권이 전개하는 구조조정 정책의 적용을 위해 이에
대항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진영을 철저히 분쇄하겠다는 의도와
함께, 노동자를 개별화, 파편화시켜 고용을 넘어 생존권 자체를
철저히 자본에게 종속시키겠다는 의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특히 최근 김대중의 여러 차례 발언 대우자동차 사태와 관련하여
‘노동자든 기업이든 필요하면 쓰고, 필요 없으면
버려야한다’는 발언이나, 신임 민주노총 지도부의 총파업 투쟁
계획 등에 대해 ‘정부의 구조조정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의
집단이기주의에 대해 엄단하겠다’는 등의 발언 속에서 김대중
정권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모든 노동조합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을 통해 이러한 의도는 확인되고 있다. 이번 과기원에
요구되었던 시설민영화와 경영혁신 지침의 시행은 이러한 정권의
출연기관 민영화와 전체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그리고 남한사회
노동자 길들이기의 일환이었다. 또한 장기적으로 정규직 30%,
비정규직 70%의 구도를 형성시켜 선진국형 노사관계의 전형을
형성하겠다는 계획 속에서 남한사회 노동진영에 투여될 자본과
정권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3) 연구현장의 대응
그러나 아직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노동조합들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1998년 정부의 공세를
굴욕적으로 수용했음에도 2000년 이후 다시금 밀려드는 공세에
대해 조직적 차원의 투쟁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소산별의
이름을 걸고 있는 출연기관을 포괄하는 연구전문노동조합과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은 앞서 제출했듯이 전체 노동진영을
사수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과기원 투쟁에서도 확인했듯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인식은 하고 있으나, 조직적 대응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발생되는 사안에 대한 대응에 급급해할 뿐, 이를 전 조직적
투쟁으로, 또한 전체 노동운동진영 곳곳에서 형성되고 있는
각각의 개별 투쟁사안과 접목시켜 단일한 투쟁전선을 구축하거나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연구현장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심각한 고용불안에 떨고 있고, 노동자가 서 있을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는 2002년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전임자 축소 등의 시행 등 2001년 상반기 노동법 개악
의지의 표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4.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철저하게 깨진 만큼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번 싸움을 단지 시설조합원의 고용안정과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으로만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과학기술원의 최덕인 경영진의 노동조합 죽이기 등의 개별
자본의 노동탄압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 구조조정
달성에 목을 매고 경영혁신 지침을 남발하는 기획예산처 등의
정부부처를 타격하는 것을 넘어서, 전체 노동자가 자본과 정권의
허구적인 구조조정을 통한 초국적 자본의 이해에 복무하고자
한다는 본질, 그리고 이것이 현장의 노동을 유연화시키고, 이에
대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노동조합을 말살하려는 음모임을
폭로해내는 과정을 통해 현장을 조직화해내어 전국적으로 투쟁을
승화시켜야 한다는 절대 과제가 놓여있다.
또한 이번 시설민영화를 통해 발생되는 비정규직처럼, 연구현장
전반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비정규직의 문제와 함께, 기존에
출연기관 현장을 잠식하고 있는 비정규직 비정규직과 관련하여
지금 우리에게 놓여진 것은 선언적 문구로서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추상수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의 노동조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이해와 요구가 무엇인지, 정규직과
연대하여 투쟁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규직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이해지반을 확장시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에 대한 대안을 형성하고, 함께 하는 투쟁을 조직해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총체적 문제의식을 정리해내고 우리 자신의 투쟁과제로
정확히 받아안을 수 있을 때, 이번 과기원 투쟁이 그 의미를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머뭇거리는 동안 전선은 교란되고, 적들은 전열을
가다듬는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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