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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와 노동 유연화의 양태

현장에서 미래를  제65호
강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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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와 노동 유연화의 양태
강 수 돌/연구위원





1. 노동 유연화는 자본의 유연화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자본이 끊임없이 자기 몸을 불리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인간 노동력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또한 안다. 살아 있는 인간 노동력이 협력하지 않으면 자본은 한 순간도 생명력을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러기에 살아 있는 인간 노동력이 똘똘 뭉치기만 하면 자본을 휘어잡을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꿰뚫어 본다. 이렇게 잘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전례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자본이 우리의 밥줄을 날려 버릴까봐. 행여나 자본에 찍힐까봐.
왜 그런가? 인간 노동력이 자본을 먹여 살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인간 노동력이 자본 앞에 떨고 있다니? 행여 노동이 일을 하지 않을까봐 자본이 두려워해야 하는데도 거꾸로 노동이 자본의 눈치를 보며 떨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은 한마디로, 노동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직적 측면은 물론 내용적 측면에서.
조직적으로 노동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 노동력이, 노동하는 인간이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내용적으로 노동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노동의 대안, 즉 대안 세상에 대해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대안적인 그림조차 머릿속에 없는 경우가 많다. (막연하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싸우다 보면) 좋은 사회가 오겠지 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노동 유연화와 관련하여 조직적 분열의 문제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자.
생존 경쟁, 그렇다. 바로 노동자끼리의 생존 경쟁이 치열할수록 자본은 노동력을 더 쉽게 통제할 수 있다. 자본은 노동력을 일회용품처럼 필요할 때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버릴 수 있고 이 노동력과 저 노동력을 경쟁시켜보다가 더 효율적인 노동력만 남기고 다른 것은 바꿔버리기도 한다. 노동자의 생존 조건이 자본의 의도에 더욱 강하게 얽매이게 되는 것, 노동자의 삶이 자본에 더욱 경직되게 종속되는 것, 바로 이것이 노동 유연화의 본질이다. 따라서 노동 유연화는 자본 증식의 유연화이자 노동자 삶의 경직화이다.


2. 세계 경제의 변동과 노동의 유연화
세계 경제는 갈수록 불안정하고 이윤 증식은 그만큼 어렵게 되고 있다.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가 세계 자본을 압박하고 있다. 따라서 그만큼 역동적으로 몸부림을 쳐야 개별 자본은 생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의 몸부림이란 경영학 교과서에 ‘경영 혁신’, ‘경영합리화’ 또는 ‘경영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여러 전략들의 추구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거시 경제적으로 이러한 전략들을 뒷받침하는 물결은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 유연화 등을 통해 추진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다.
그렇다면 자본이 이런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갈수록 강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갈수록 이윤을 뽑아 올릴 토대들이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자본은 인간 노동력과 자연 자원들의 살아있는 에너지를 상품으로 바꾸어냄으로써 이윤을 추구하고 몸을 불려나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잉 생산, 과당 경쟁과 시장 포화, 다른 편으로는 노동의 저항과 자원의 고갈이 갈수록 심해진다. 흔히 자본가들이 ‘뼈빠지게 생산해봐야 남는 것이 없고 유통을 해야 좀 남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갈수록 경제가 ‘카지노화’하는 현상은 바로 이러한 이윤의 토대가 갈수록 엷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크게 보면 최근의 ‘지식 경제’나 ‘디지털경영’ 현상도 새로운 (=아직 고갈되지 않은) 이윤 공간을 찾아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자본의 한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런 현상이 전개된다고 해서 모든 개별 자본들이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요, 모든 자원들이 고갈된 것도 아니다. 또한 제 아무리 인터넷 혁명이 거세게 몰아닥쳐도 유통되는 상품은 인간 노동력과 자연 자원 없이는 만들어질 수가 없다. 결국 자본의 입장에서는 한편으로는 필요 노동을 최소화시키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그 필요 노동의 사용가치를 최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오늘날 정보화, 세계화 시대 앞에서 한편으로는 대량 실업, 다른 편으로는 불안정 고용 등 ‘노동 유연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노동의 유연화가 살아 있는 인간 노동을 서로간에 치열하게 경쟁하는 분열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에 대해선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산 노동이 경쟁적으로 분열될수록 그만큼 자본의 (총체적) 지배력은 강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 노동들이 제 아무리 강해져봐야 전체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면 자본 운동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나약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좀 거칠게 말한다면 노동자의 단결은 100% 아니면 0%인 것이다. 아무리 소박하더라도 제대로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면 비록 일시적으로라도 100% 단결해서 함께 움직여야 하지만 하나라도 관철되지, 그렇지 않다면(=어설픈 단결이라면) 아무 것도 아니게(0%) 된다는 말이다.


3. 각국의 노동유연화 양태
우리 사회도 이미 실질 실업자 300만, 비정규직 노동자 800만 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다. 정부의 실업 대책 효과로 인해 부분적으로 공식 실업자수가 줄었다 늘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심각할 정도로 진척되었다. 최근 들어서는 대졸실업, 여성실업, 장기실업, 중장년실업, 박사실업 등과 더불어 광범위한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주로 무노동권,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3D 업종’의 이주노동자들도 25만에서 30만을 차지한다. 특히 비정규직의 비중이 IMF 체제 3년을 경과하면서 45%에서 55%로 10%나 증가한 것은 매우 놀랄만한 수치이다. 개별 기업에서도 비정규직의 비중이 적게는 1/3에서 많게는 1/2이 넘기가 예사이다. 한편, 노동과정의 유연화도 신인사제도나 연봉제, 성과급제, 탄력근무제, 교대제 등으로 인해 상당한 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국가와 자본의 강제력과 힘의 우위, 다른 편으로 노동의 내부 분열에 기인한다.
다음으로 일본을 보자. 80년대 이후 90년대 초까지 세계 경제를 ‘주름잡았던’ 일본의 노동시장은 사실상 매우 극적이었다. 흔히 가히 ‘신화적’이라고 칭송되던 일본식 경영방식 또는 ‘린 생산방식’ 등의 비밀은, 한편으로 강력한 노동시장의 유연화, 다른 편으로 고강도의 ‘강제된 동의’ 체제의 구축 등이었다. 일본은 20% 내외의 핵심 노동력에 대해서는 종신고용이나 연공주의 임금과 승진 등의 유인책으로 확실히 대우를 한 반면에, 80% 내외의 주변부 노동력, 즉 여성, 미숙련자, 외국인, 하청, 파견, 계약직, 파트타이머, 일용직 등에 대해서는 일회용품처럼 취급하였다. 생산 구조도 20%의 핵심은 자신이 담당하지만 80%의 생산과정은 하청화한 것이다. 한편, 이런 주변부 노동자들은 서로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자기 밥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오로지 헌신적이고 충성스런 노동을 수행해야만 했다. 잘 하면 핵심 인력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핵심 인력은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에 대한 보답으로 충성을 다했다. 이런 식으로 분할 지배 및 ‘강제된 동의’가 절묘하게 구축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당시 일본 경제의 강점, 이른바 ‘높은 경쟁력’의 그림자들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핵심 인력층조차 90년대 이후 붕괴되기 시작한다. 정리해고와 연봉제, 성과급제 등이 자본의 무기였다. 그 결과는 인간파괴, 가정파괴, 사회파괴이다. 2001년 3월 10일에 동경시가 펴낸 ‘노숙자 백서’에 따르면 동경 23개구의 노숙자 수는 95년의 3300명에서 2000년에 5700명으로 무려 1.7배가 늘었다. 이들 노숙자의 70%는 경제 불황의 여파로 구조조정당했거나 가업을 이을 경제력을 상실한 자영업자의 몰락 결과이다. ꡔ노동일보ꡕ, 2001년 3월 12일자.

영국과 미국은 어떤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의 본거지인 영국과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로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의 억압, 다른 편으로는 노동력의 일용직화를 통해 ‘자본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주주 이익과 시장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영국과 미국의 기업들은 경영합리화를 통한 인원감축과 임금인하, 조직축소, 외주․하청화, 구조조정 등을 가속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쫓겨나고, 다수의 비정규직 사원들, 즉 용역, 촉탁, 파트타이머 등이 빈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이들은 더 낮은 임금에 더 긴 노동시간을 일하게 되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가 힘들게 된다. 노조원이라고 밝혀지면 일자리를 얻기도 힘들게 된다. 이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생활 유지를 위해 하루에도 두탕 세탕을 뛰어다니며 일해야만 한다. 그 결과 공식적인 실업률은 당연히 떨어진다. 실제로 미국의 ‘공식’ 실업률은 5% 내외인데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들은 15%를 맴돌고 있다. 이것을 두고 미국식 경제발전 방식이 유럽이나 다른 나라들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왜냐하면 실업률이 낮다는 것 그 자체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업률을 낮추는데 이바지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나 생활조건을 살펴보면, 이것이 과연 선진국 노동자들의 삶인가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90년대의 10년간 정보기술 덕분에 고성장에 저실업과 저물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고 법석을 떨던 ‘신경제’도 이제는 ‘연착륙’이니 ‘경착륙’이니 하는 말들로 그 본질적 위기를 살며시 가리고 있다. 떠들썩하던 실리콘 밸리에서도 감원 바람이 몰아치고 노조가 세워지고 있으며, 2000년에만도 미국 닷컴 기업에서 6만 5천 명이나 감원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최대 PC 메이커인 컴팩도 5천 명을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ꡔ노동일보ꡕ, 2001년 3월 17일자.
거품에 거품을 물며 온 세상을 거품 속에 뒤죽범벅시키다가 (먼저 치고 나간 놈이 한탕하고 뒤따르던 놈이 한탕하고 그래서) 어느 정도 ‘한탕주의’가 성숙될라치면 거품은 급속도로 빠지기 시작한다. (대개 수많은 개미군단들은 한탕 치고 빠져나가는 놈의 뒷다리 잡고 따라 가려다가 거품 속에 가려진 덫에 덜커덕 걸리고 만다.) 거품의 밑천들이 동이 나기 때문이다. 마치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사이버 공간에서조차 시장의 ‘한계’가 그를 증명하고 기술과 자금력의 한계가 그를 증명하며, 무엇보다 인간 노동력의 한계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편, 최근까지 유지된, 미국의 낮은 실업률은 노동자 삶의 질 악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95년 미국 전체 남성 사무직 및 생산직 노동자들은 22년 전인 1973년에 비해 시간당 임금이 11%나 줄어들었다(미국 인구센서스 자료 1995). 둘째, 1973년에서 1994년 사이에 미국민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분의 1이 올랐지만 전 노동인구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평균 총액임금은 오히려 19%나 떨어졌다. 독일 시사 주간지 ꡔ디 차이트ꡕ, 1996년 4월 26일.
셋째, 4백만 이상에 이르는 하층의 임금노동자들은 20년 전에 비해 임금이 25%나 줄었다. 넷째, 1995년 현재 멕시코와 미국 국경선에 위치한 미국 공장에서는 1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하루에 5달러 이하의 임금(자그마치 80년 전인 1914년 미국 포드 자동차 공장 노동자 수준)을 받고 일하고 있다. 다섯째, 1979년과 1995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모두 4,3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중 1,600만명은 장기 실업자로 몰렸고 2,700만 명은 재수 좋게도 일자리를 구했지만 그 2/3는 파트타이머나 일용직 호출노동자(기업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일하는 사람들) 등 용역 사원으로서 불안정한 일자리를 가지게 되어 ‘노동 빈민’(working poor)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97년 8월에 2주간의 강력한 파업이 있었던 UPS사에서는 80% 이상이 파트타이머로 일하는데 이들은 시간당 20달러를 받는 정규직에 비해 55%나 적은 9달러를 받고 일한다. 이런 맥락을 반영하기라도 한 듯 MIT의 저명한 경제학자 레스터 써로우는 미국의 실제 실업률은 놀랍게도 28%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이와 같은 사실들은 공식 실업률 그 자체보다는 고용의 내용과 삶의 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최근에도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2만 6천, 엑슨 모빌은 1만 6천, GM은 1만 4천을, 루슨트 테크놀로지와 월드컴은 1만씩을, 포드와 제록스, 모토롤라는 각 4천씩을 감원하기로 했다. ꡔ동아일보ꡕ, 2001년 2월 16일자.
물론 이런 해고 예정 발표들이 주가를 올리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ꡔ한겨레ꡕ, 2001년 2월 21일자.
또 이런 감량경영의 비용 절감 효과에 대해 논란이 있긴 해도, ꡔ노동일보ꡕ, 2001년 2월 23일자.
미국식 구조조정이란 역시 정리 해고를 비롯한 노동시장 유연화를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미국의 ꡔ뉴스위크ꡕ조차 이러한 미국식 자본주의를 두고 임금과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죽여나가면서 경쟁력을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킬러 자본주의’(killer-capitalism)라 비꼬기도 한 바 있다.
이러한 ‘킬러 자본주의’의 결과는 사회적 분열과 배척주의의 확산이다. 먼저, 힘들게 사는 하층민의 삶은 더욱 고달파지고 이들은 노동조합이나 정치권으로부터 별다른 보호를 받지도 못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이들은 앞서 보았듯 그 생활수준이 20년 전에 비해 20% 이상 하락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미국 노동력의 5분의 1은 공식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다음으로, 중산층들은 갈수록 삶이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기존의 안정된 일자리를 잃게 되면서 불안감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강하게 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많은 경우 이러한 하향평준화의 책임을 외국인이나 소수 인종들에게 돌린다. 마침내 이들은 해외로부터의 이민자들을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거나 불법체류자에 대한 강경한 처벌과 추방, 이주민들에 대한 각종 사회 보장 혜택의 축소 등과 같은 극우보수주의적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이제이’ 전략, ‘노노 분열’ 전략, ‘분할 지배’ 전략이 먹혀 들어가는 셈이다. 반면에 상류 계급은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끼리 모여 사는 부자촌을 형성하고 그 성의 외곽은 확실한 무장병력으로 경계를 세우고 있다. 모든 출입자들은 엄격히 검문을 받게 되고 주변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은 비밀 카메라같은 것에 의해 보이지 않게 감시된다. 이들 부유층의 수입은 1980년이래 두 배나 늘었다. 미국 내 약 1만명의 최부유층은 미국 내 전체 사유재산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의 고위 경영자들은 사무직 사원보다 평균 120배나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있다. 물론 최고급 경영자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받고 있다. 예컨대 1996년에 거대기업 제네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은 약 4천만 달러를 받았는데, 이것은 연봉 3만 달러를 받는 보통 사원에 비하면 1,300배가 넘는 액수이다. 그리고 식료품 업계의 독점 대기업인 하인즈그룹의 오레일리 회장은 1년에 8천만 달러가 넘는 보수를 받는데, 이것은 시간당으로 따지더라도 4천 달러(요즘 시세로는 600만원)를 벌고 있는 셈이다. 또 IBM사의 5명의 중역들은 1991년에서 1995년 사이에 12만여명을 정리 해고하는 등 약 1/3의 인건비를 절감하는 바람에 IBM사의 주가와 배당금의 액수 면에서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연봉 이외에 특별 보너스로 약 50억원 이상을 받았다. ꡔ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ꡕ, 1995년 11월 17일.
그런데 이들의 천문학적 고수익은 따지고 보면 중, 하층의 엄청난 희생―실업과 불완전 고용―을 담보로 한 것이다.
한편,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주된 구호로 하여 추진되는 세계화의 맥락 속에 미국은 캐나다와 멕시코를 하나의 시장으로 묶어 세우는 북미자유무역협정, 즉 나프타(NAFTA) 체제를 1994년부터 출범시켰다. 물론 유럽에서도 비슷한 맥락 속에서 이미 1993년부터 유럽단일 시장이 출범하였고 유럽연합(EU)이라는 국가동맹이 탄생하였다. 이러한 시장경제와 자유무역을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시도가 마치 도깨비 방망이와도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리 증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외쳐댔다. 예컨대 1988년에 브뤼셀에서 유럽공동체 운영위원회가 유럽 단일 시장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펴낸 ꡔ체치니 보고서ꡕ는, 앞으로 유럽 단일 시장과 더불어 6백만 명분에 이르는 새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며, 국가 재정적자가 2%씩 축소되고, 추가적으로 4.5%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들 유럽 나라들에서는 자유화와 탈규제화, 민영화와 경영합리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그 반대의 현상, 즉 미국에서와 같은 사회적 부작용이 엄청나게 크게 터지고 있다.
인구 1억 명의 멕시코는 1994년 북미자유협정의 출범과 더불어 OECD에도 가입하였는데, 그 결과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별다른 장애물 없이 개방된 멕시코 사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입상품의 물결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체들이 나날이 파산해갔다. 농업에도 자본주의적 합리화가 진행되어 수백만 명의 농업노동자들이 농업용 기계에게 일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 결과 이농향도 현상이 발생하여 수많은 농촌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도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파멸해 가는 국내 경제를 일구기 위해 정부는 미국의 투자기금사 등으로부터 수백억 달러의 빚을 들여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4년 12월에는 경기가 급강하하여 페소화를 7년만에 15%나 평가절하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재무장관과 IMF의 캉드쉬 총재는 거액을 투자한 미국 자본가들의 불만이 두려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금융시장의 붕괴를 두려워한 나머지 역사상 최대의 특별 구제금융을 실시했다. 그러나 멕시코는 국제 신용 회복을 위해 20%의 고금리 정책과 긴축재정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경기가 더욱 후퇴하게 되었다. 수개월 사이에 1만 5천개의 기업들이 파산 선고를 하였고 3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임금 동결과 세금 인상의 결과 국민들의 구매력은 최소한 1/3 이상 줄어들고 말았다. ꡔ뉴스위크ꡕ, 1996년 3월 18일.
이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 또한 거세다. 특히 수천 명에 이르는 남부의 사빠띠스따 농민군은 자체적인 저항군을 조직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공세에 대항하여 아래로부터의 권력과 민중 생존권 수호를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나오고 있다. 1993년 유럽 단일 시장의 출범이래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자그마치 500만 이상의 일자리가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태는 앞으로도 지속될 전망이다. 프랑스는 400만 이상의 실업자가, 그리고 독일에서는 사실상 600만 이상의 실업자가 사회적 결속을 위협하고 있다. 유럽 단일 시장과 더불어 남쪽의 포르투갈에서부터 북쪽의 코펜하겐까지 자본, 상품, 서비스, 기술, 정보가 아무런 장애물 없이 국경선을 마음대로 넘나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미국의 가장 효율적인 기업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공공부문이나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경영합리화가 가속화된다. 수백만의 공식 실업자로 몸살을 앓는 독일의 경우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근로계약의 형태도 다양화되는데, 한 조사에 따르면 주말근무나 교대근무, 야간근무는 91년에 42%에서 99년에 50%로 늘었다. 마침내 과반수의 노동자들이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의 형태로 노동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주4일 근무제를 도입하여 3만 명의 일자리를 구한 사례로 평가받는 독일 폴크스바겐 공장도 비록 대량의 일시적인 정리해고는 막았지만 무려 150개의 노동시간 모델이 운영되는 등 노동시간의 유연화는 전례 없이 가속화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북부 독일 브레멘의 벤츠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박종완씨에 따르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임금이나 복지 측면에서는 전혀 다른 점이 없되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심리적으로 무시하거나 괄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비정규직은 계약 기간을 연장받아 계속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기어야 한다는 점이 비정규직의 서러움을 말해 준다. 귄터라는 나이 든 비정규직 노동자는 이러한 감정을 정규직 동료들에게 솔직히 토로한다: “그런데 내기 참지 못하는 건 너네들이 나보고, ‘야! 너 그렇게 일 못하면 계약 연장 안돼!! 연장하려면 더 해야지 그게 뭐야!!’ 하는 말이야. 물론 농담이겠지만, 계약기간에 목숨 걸고 있는 나같은 비정규직은 그런 말 들을 때가 제일 가슴 아파.” 박종완, ꡔ민주노동과 대안ꡕ, 2001년 1월호.

한편, 높은 노동유연성(flexibility)과 동시에 높은 사회안정(security)을 동시에 추구하는 네덜란드 모델(바세나 협정, “유연안정성 flexicurity”)도 역시 높은 노동시장 유연성을 보인다. 그나마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는 경우도 예외 없이 노동 유연화를 강화하는 것이다. 사회 보장책이나 비정규 노동자의 보호 등만이 다를 뿐이다. 그 결과 나라마다 수만명, 수십만명, 수백만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걱정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십년간 사회적 완충 장치 역할을 해 온 복지제도가 최근 들어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예컨대 시민들의 학비나 의료비 부담이 늘고 있고, 주거비도 올라가는 반면에 국가에서 지급하는 사회보장성 혜택들은 줄고 있다. 단일 시장이 등장하면서 각종 보호 장치들이 제거됨과 동시에 경쟁력 없는 상품이나 기업들은 사장으로부터 조용히 밀려나야 한다. 경쟁이 더욱 살벌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이 지고 있던 부담은 가급적 줄여야 한다는 것이 이러한 시장자유주의자들의 기본 논리이다. 즉 시장과 경쟁은 최선이고 국가와 노조는 최악이라는 것이 이들의 도덕 기준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국가 개입을 배제하자는 그들이 시장의 자유, 자본의 자유를 위한 여건 조성에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쟁력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조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적 자금의 투입이나 기업 세금의 완화, 사회간접 자본의 확충 등이 바로 국가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노동에 대한 물리적, 제도적 탄압도 국가의 개입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근대 이후로 국가는 대체로 ‘자본의,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정치를 하느라고 존재해 온 것이 사실 아닌가? 따라서 국가와 시장, 자본을 상호 독립적으로, 대립적으로 보는 것은 무지이거나 기만이다. 결국 시장과 국가, 자본과 노조를 대립시키는 저들의 개념적 구도는 거짓에 불과하며 오히려 자본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국가와 노조를 그들의 이익에 걸맞게 적극 동원해야만 한다는 본질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동의 전략이 국가나 시장의 양자 택일 또는 양자의 절묘한 조화 등의 방식으로 스스로 편협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본 전략의 본질을 꿰뚫어보면서도 노동의 독자적 전략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4. 노동의 대응 양태
대개 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한 안전판’으로 비정규직을 허용해왔다. “정규직이 잘 하지 않으려는 작업을 비정규직으로 하청화하고 경기가 불안해지면 비정규직만 해고하면 정규직은 보호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상식은 주관적이다. 노동이 혼자서만 자신에게 유리하게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자본의 객관성은 냉정하다. 자본의 객관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존함으로써 유연성과 통제력을 높일 수 있는 데 있다: “대기업 P사의 한 협력업체에 근무하는 일용직 노동자 김씨가 점심식사를 마친 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같은 작업장에 근무하는 원청업체 P사 직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김씨에게 ‘야 임마, 너 지금 할 일 없지, 족구하게 이리와서 라인 좀 그어라’고 했다. 이에 김씨가 ‘당신들이 할 일을 왜 내가 하느냐’고 항의하자 직영 직원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일이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일 그만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느 업체 소속이냐?’라고 캐물으며 윽박질렀다.” ꡔ노동일보ꡕ, 2000년 10월 23일자.

오늘날 대규모 사업장, 현대자동차, 현대 정공, 현대중공업,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대우조선, 기아자동차 등 대부분의 사업장에는 비정규직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노조들도 “그때그때마다 조금씩 양보해왔는데, 이제 와서 보니 비정규직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전체 노조 활동에 부담과 위협이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다. 그러나 정규직에 비해 이들은 2류 노동자들로 취급받는다. 자본에게는 물론 정규직으로부터도. 그러나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홀대하는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자본이 노리는 바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적절히 경쟁시켜 가며 전체를 잘 통치(지배)할 수 있게 된다. 노동시장이나 노동과정에서 혜택을 받는 자와 차별을 당하는 자는 모두 다 차별구조(=자본)의 희생자들임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차별 구조는 바로 자본의 노동 지배 전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별과 위계 질서 속에서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본의 그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차별과 위계의 그물망 자체를 거두어들이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 이웃과 동료로, 친구로 거듭나는 것이다. 비정규직노동자센터(www.workingvoice.net)의 박영삼 국장은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란, 그 사회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좋은 임금과 적정한 휴식을 얻을 수 있고, 노동능력이 다한 후에도 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되겠다고 단호히 말한다. 박영삼, ꡔ당대비평ꡕ, 2000년 겨울호; ꡔ노동과 사회ꡕ 2000년 11월호.

이런 관점에서 늦게나마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조건의 획득’을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주장하거나 아니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뭉쳐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다. 99년 3월, 한라중공업 노조가 하청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적극 옹호하고 지지한 것이나 99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전국 모임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 2001년 2월에 결성된 뒤 사측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주) 캐리어 사내하청 노조가 원직 복직과 함께 정규직과의 동일한 노동조건 보장,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나선 것 ꡔ노동과 세계ꡕ, 2001년 3월 26일.
등은 바로 그 실례이다. 2001년 2월 7일, 노동 및 여성 단체들이 비정규직 법개정투쟁 결의대회를 시작으로 기자회견, 전국 대회 등을 열면서 근로기준법 완전 적용, 차별 철폐, 정규직화 투쟁 등을 본격화하기로 한 것은 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ꡔ한겨레신문ꡕ, 2001년 2월 5일자.
또 민주노총이 2001년 임금투쟁에서 비정규직이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생활임금 보장을 요구하고 나선 것과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한 것도 신선하다. ꡔ노동과 세계ꡕ, 2001년 2월 19일.
나아가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직 노조들이 2001년 2월 16일, 비상총회와 대의원대회 형식으로 총파업을 벌이고 서울역에서 2천여 명이 참가해서 대규모집회를 벌였다. 이 집회에서 이랜드 노조의 배재석 위원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주체”임을 강조하였는데 ꡔ노동과 세계ꡕ, 2001년 2월 26일.
이것은 모든 노동자의 ‘자기조직화’ 측면에서 대단히 시사적인 발언이다.
또한 최근(2001년 3월 5일) 이랜드 노조가 9개월 동안의 강고한 파업 끝에 2․3년 경력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룬 것이나, 2000년에 비정규직 철회를 쟁취한 롯데호텔 노조에 이어 한국통신 계약직 노조가 2000년 12월 13일부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및 불법 도급의 철회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이주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큰 범위에서 함께 투쟁의 전선에 나선 것은 ‘노동의 힘’ 측면에서 매우 시사적이다. (한편, ‘운동권’ 출신 사장이 먼저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시킨 한솔교육 ‘학습지 사업’의 사례는 자본 입장에서 보더라도 장기적으로는 정규직이 유리함을 시사한다 ꡔ노동일보ꡕ, 2001년 3월 14일자 참조.
) 특히 이랜드 싸움에 한국통신 계약직노동자, 볼보건설기계, SK인사이트코리아, 방송사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의식으로 전국순회투쟁을 포함한 공동 보조를 취했던 것은 매우 발전적인 모습이었다. ꡔ노동과 세계ꡕ, 2001년 3월 12일.
나아가 한국과 일본의 비정규노동자 관련 단체들이 정보교류를 시작한 일이나 민주노총 대표단이 2000년 11월말에 미국을 방문하여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함께 하고자 한 것 등은 긍정적인 신호들이다. 박영삼, 앞의 글.
궁극적으로는 정규직, 비정규직, 실업자 등을 전혀 가리지 않고 모두 하나가 되어 생동하는 연대를 이루어 노동자 자율성의 강화를 이루는 길, 이것만이 사태의 본질을 치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될 것이다.

5. 자본의 갈라치기 전략과 노동자의 연대 전략
“중국과 인도, 베트남, 방글라데시의 저임금 노동력이 우리를 위협한다”는 식의 주장은 우리가 자본으로부터 흔히 듣는 협박이다. ‘시키는 대로 일할래, 아니면 그렇게 개기다가 모두 망하는 꼴 볼래?’ 이런 식이다. 200개 되는 모든 나라들을 이렇게 상호 경쟁하는 적들로 위치지우는 것, 또는 선진국과 중진국, 후진국으로 구분해, 선진국은 중후진국의 추격을 물리치기 위해, 중후진국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또 중진국은 선진국을 추격하고 후진국을 뿌리치기 위해 제각기 노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있다.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고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어느 나라가 1등국이 되는가와는 상관없이 자본의 세계적 지배력은 더욱 강고해진다는 사실이다. 한번 1등국이 된다고 편히 살 수 있는가? 추격자를 무찌르기 위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할텐테. 이렇게 노동자들이 나라별로 분열되는 한 선진국 자본은 선진국대로, 후진국 자본은 후진국대로 그 노동력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세계 자본의 노동에 대한 범지구적 지배는 공고화된다. 이것을 우리가 꿰뚫어보는 순간 자본의 약한 고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서로 갈라져 싸우기를 이제는 ‘그만 두자!’고 선언하는 순간 자본은 고도의 긴장을 하게 된다. 예전의 지배력을 상실할 두려움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아직 안심이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일어난다면 … ?
“노동시장 유연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외국투자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전경련에서 말했다. ꡔ한겨레신문ꡕ, 2001년 2월 28일자.
미국상공회의소는 한국 정부에게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촉구를 비롯한 내정간섭까지 하고 나섰다. 그래서? 외국투자가 위축되면 제2의, 제3의 환란이 온다고? 민중이 또 속을 줄 아는가?
이제 우리는 지난 3년간 뼈저리게 경험했다. 외국 투자의 유치가 얼마나 유치하게 진행되는지를.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온갖 규제를 철회하고 완화하며 세금 특혜를 주고 노동권을 억압하며 노동조합을 규제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강화해서, 한마디로 외국 자본의 수익성을 높여 주어야 한다. 그들이 노동력과 자연 자원, 혈세를 무더기로 가져간다 해도 고용 창출과 외환 위기 해소를 해주었기에 감사해야 한다고? 이제는 케케묵은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한국 자본도 외국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 오면 되지 않느냐고? 천만에! 우리가 외자 유치를 유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까닭은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운동하는 자본이 이 세상의 모든 노동력과 자연 생태계, 인간 공동체를 경향적으로 파괴해 나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자본이 해외에 나가서 하는 파괴적 행위에도 우리는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고 있다. 예컨대 멕시코의 현대 한영기업이나 삼성전자가 마뀔라도라 수출 공단에서 자행하는 70년대식 노동탄압, 수많은 한국 기업들이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자행하는 환경 파괴와 노동 탄압들이 바로 그것이다. 국제민주연대, ꡔ사람이 사람에게ꡕ 1999년 11월; 진보네트워크센터, ꡔ한겨레신문ꡕ, 2000년 9월 15일자;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PICIS, http://picis.jinbo.net 참조.
결국 각 나라들이 서로 자본을 유치하느라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하향평준화 시켜나가는 과정은 경제의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었음을 보여준다. 서로 더불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라면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은 ‘일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바로 그 돈을 번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서로 갈라져서 서로를 갈구고 파괴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이러한 일(분열과 파괴)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단호하게 ‘그만두어야 한다!’

“(2001년) 3월 7일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의 조업재개시 … 1만 명에 이르는 경찰 동원으로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상황도 나를 놀라게 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짤린 자’와 ‘남은 자’의 서로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회사측은 ‘남은 자’들이 90%를 넘는 출석률을 보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 노동자의 힘은 오직 단결과 연대에 있는 것이 분명할진대, ‘남은 자’의 90%를 넘는 출석률, 그것은 연대의식의 부족과 팍팍한 생존이 불러온 비인간적 수모와 굴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홍세화, 「파리통신」, ꡔ노동과 세계ꡕ, 2001년 3월 12일.


앞서도 본 바와 같이 모든 노동 유연화의 핵심은 노동자끼리의 분열에 기초해 있고 그러한 분열은 국적별, 민족별, 인종별, 기업별, 성별, 능력별, 학력별, 지역별, 직종별, 신분별, 고용형태별 등 별의별 형태로 세밀히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의 분할 지배로 인한 현재의 온갖 두려움을 ‘살아 있는 연대’로써 극복하고, 노동자끼리의 보이지 않는 ‘유리벽’들을 과감하게 깨고 하나가 되는 것, 이것 외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제칠 길이 없다. 한편으로 자율성과 책임성, 다양성에 기반한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다른 편으로 상호 배려와 관용, 포용에 기초한 생동하는 연대(living solidarity), 이것만이 ‘노동의 희망’이다. 한/노/정/연

2001-04-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05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