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노정연 > 현장에서 미래를 > 글읽기 ]

어두운 현대사 가리기

현장에서 미래를  제67호
박노자

어두운 현대사 가리기


ꡔ한겨레신문ꡕ, 2001년 6월 10일
박노자/오슬로국립대 교수, 한국학




요즈음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로 한국 내외에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필자가 특별히 고무적인 일로 생각하는 것은, 일본 극우들의 역사 왜곡을 단순히 규탄하는 대다수의 일률적인 목소리 이외에도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보수․극우들이 써 온 우리 교과서들은 완벽한가?”라는 소수의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는 사실이다.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우경화․극우화를 막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국내 극우들의 ‘우민 정치’의 진실을 밝혀 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국내인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의 한국 국사 교과서를 놓고 볼 때, ‘왜곡’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누락’들이 눈에 매우 많이 띈다. 예를 들어, 한국의 보수적 사관의 핵심적인 허상인 이른바 ‘임시 정부 법통설’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초기 남한 정권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초기 남한군 역사에서 미국 군사 고문단의 구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누락된 반면, 광복군과 남한 군대의 연계성은 사실에 비해서 지나치게 부각되는 면이 있다.

물론, 일제 시기의 독립 투쟁에 의한 ‘정통성’을 내세우는 보수적 사관의 시각에서는, 미군 고문단의 지휘 하에서 미제 장비로 여수․순천의 항쟁을 탄압하는 일본군 출신의 남한군 장교들의 활약상을 그대로 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통성’의 허구를 쫓아 역사의 진실을 올바로 언급하지 않는다면 결국, 왜곡이란 누명을 쓸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국의 교과서들이 결코 말하지 않는 초기 남한군 역사의 주역 중 한 사람은, 미국의 사학자 커밍스에 의해 ‘남한군의 아버지’로 명명된, 하우스만(J. Hausman, 1918~1996)대위였다. 1946년 7월에 남한에 상륙한 하우스만은, 그후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정치 무대의 ‘배후 실력자’로 남아 있었다. 다른 미군 고문들과 달리 한국어를 빠르게 배워 미군의 ‘한국통’으로 통했던 하우스만은, 남한 군대의 모태였던 이른바 ‘조선 경비대’의 실세였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권력에게 남다른 충성을 바쳤던 정일권, 백선엽과 같은 친일파 장교 등용에도, 제주도 등지의 민중 항쟁의 토벌에도, 수사관들에게 동지들의 명단을 넘겨 준 남로당 박정희의 차후 출세를 보장해 주는 데에도, 하우스만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막대한 영향력 못지 않게 동시대인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집착에 가까운 반공주의에 입각한 그의 ‘학살주의’였다.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숙군’(군내 좌익 색출)작업을 지휘했던 그는, 자신의 하관들이 총살하는 장면을 촬영하여 ‘한국 좌익 총살 시청각 교과서’를 만들기도 했다. 한번은 20명의 제주도 민간인 총살의 지휘를 따졌던 미국 대사에게, “몇 개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의연하게 대꾸했던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충성스러운 친일파들의 보호자이자 민중 항쟁 토벌의 귀재, 대미 의존적 극우 체제 형성의 중심적 인물이며, 체제의 광기의 상징 인물이었던 하우스만, 필자는 그가 한국사 교과서에 꼭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장차 대미 의존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주의 주역이 되어야 할 한국의 젊은 새싹들이, 그들이 배우지 못한 또 다른 현대사 속에 어떤 모습들이 감추어져 있는가, 그리고 현대사에 있어서의 대미 관계는 어느 정도 종속적이었는가 하는 것 등도 확실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인식이야말로 젊은 새싹들에게―보수적 사관이 빚어낸 허구적 자존심이 아닌―정통성에 대한 진정한 사고와 열망을 키워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2001-06-07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0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