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농민전쟁 기념 조형물의 역사상
박 준 성/연구위원,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이 글은 지난 5월 19일 연구소 제59차 월례 콜로키움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왜 조형물을 묻는가?
역사의 현장에 세워진 조형물은 쓰여진 설명과 함께 조형물의
상(모양 형상)이 역사의 상상력을 촉진시키고 역사인식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기억을 특정한 형상으로
고정시키기도 한다.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 현장에는 곳곳에 알림판이나 기념
조형물이 많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현장에 세워진 조형물도
재구성한 역사이다. 1894년 농민전쟁의 현장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은 설립 시기와 주체에 따라 설립 의도가 다르며,
조형물의 상도 바뀌어 왔다.
시간과 지면의 제약 때문에 농민전쟁 기념 조형물을 모두
검토하기는 힘들다. 1963년의 황토재
「갑오동학혁명기념탑」, 1973년의 우금티
「동학혁명군위령탑」, 1987년의 황토현기념관
「전봉준장군동상」, 1994년의 고부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을 보기로 들어 앞으로
방향을 가늠해 보려고 한다. 이 조형물들은 나름대로 건립 시기,
주체, 의도에 따른 특성과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황토재 <갑오동학혁명기념탑>
1963년 정부 주도로 구성된 ‘동학혁명기념탑 추진위원회’가
그해 10월 세운 탑이다. 1894년 4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까지
황토재 일대에서 농민군은 전라 감영군과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관군과 맞붙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에 세워진 탑은 농민군
투쟁의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최초의 조형물이다. 그이후 농민군
승리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자리잡아 왔다.
좌우 보조 석물과 중앙 기둥 사이를 비웠으나, 중심 기둥은 좌우
균형 대칭 중심에 육중하게 하늘로 치솟아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기념조형탑의 젼형을 보여준다. 전서로 새긴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保國安民)’ 구호는 가까이
갈수록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아야 할 자리에 새겨져 있다.
농민군은 위아래를 양반 상놈으로 엄격하게 나누는 상하
수직적인 신분 질서를 깨트리고 수평적인 서로 대등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렇다면 조형물도 수평으로 낮게
세우는 편이 그 뜻을 담기에 마땅하다. 또한 농민전쟁은 기존의
질서와 지배의 균형을 깨고 세상을 바꾸려는 밑으로부터 일어난
투쟁이었다. 좌우 균형 중심에 하늘로 우뚝 치솟는 조형의 상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주의적 의도가 담겨있는 전형의
상이다.
갑오혁명기념사업협회장 문학박사 김상기가 지은
‘갑오동학혁명기념탑명문’에는 갑오동학혁명이 ‘동학교문의
대혁명가 전봉준 선생의 영도아래에서’ 일어났으며
‘국민생활의 근대화’를 촉진시켰다고 하여 전봉준 중심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5․16 군사쿠데타 이후
‘근대화론’의 영향을 담고 있다. 조형의 상과 명문에 국가가
주도한 의도가 담겨있다.
우금재 <동학혁명군위령탑>
공주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우금티에 1973년 11월 11일
‘동학혁명군위령탑 건립준비위원회’가 세운 위령탑이다.
우금재는 농민군이 1894년 10월 23일부터 25일,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공주감영을 점령하려고
경군․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수많은 목숨을 잃은
곳이다.
비문의 형상은 황토재 갑오동학혁명기념탑과 마찬가지로 좌우
균형 대칭과 수직의 탑으로 되어 있다. 화강암 이중 받침대 위에
육중한 기둥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더 위압적이다. 2층 받침돌
중앙 손이 닿는 위치에 비문이 자리잡고 있어 위령탑의 중심을
이룬다. 비문 내용에 탑 건립의 의도가 그대로 담겨있다.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
‘동학혁명’을 끌어다 박정희 정권이 그 역사를 계승한 것처럼
합리화하고, 군사독재의 시작인 ‘5․16 혁명’과 폭압적인
‘10월 유신’을 정당화하였다. ‘동학혁명군’의 혁명정신을
부정하는 것은 곧 10월 유신에 대한 부정이며, 농민군의
저항정신을 순국정신으로 규정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의식을
강조하였다. 희생당한 ‘동학혁명군’을 대상으로 탑을 세웠으되
목적은 유신체제에 국민들을 순응시키려는 것이었다.
농민군이 어떠한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여 싸웠는지, 무엇을
지향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반농민군의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도
드러나 있지 않다
지금 위령탑 비문에 쓰여있던 ‘5․16 혁명’ ‘10월
유신’ 박정희 글귀 부분은 알고 읽지 않으면 뭐라고
써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희미한 흔적만 남았다. 수많은
답사객들이 돌멩이로 수없이 쪼아 그렇게 되었다. 역사는 글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돌로도 쓴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황토현기념관 <전봉준 장군 동상>
1983년에 5공화국 전두환 정권이 역사를 ‘정화’하려고 건립한
기념관 안쪽 끝자락에 1987년에 세운 동상이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은 1894년 농민전쟁을 기념하는 지역 민간단체의 자율활동이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활성화되지 않도록 기념사업단체를
해체하고 황토재 전적지 일대 4만 5천평 부지에
‘황토현기념관’을 세웠다. 정권이 역사를 통제하고
억압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는 사업이었다.
기념관 바깥 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두환 대통령의
유시(諭示)’로 역사 유적지를 정화하였다는
‘황토현전적지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이름 위에도
어김없이 돌로 찧은 흔적이 보인다.
사당의 형태를 따 기념관 바깥 쪽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에 또
하나의 문이 있고, 그 안 가장 뒤 쪽에 전봉준 장군 동상이
서있다. 전봉준 장군 동상 머리는 맨상투다. ‘압송당하는
전봉준’으로 알려진 사진을 따라 그렇게 만들었을 터이다. 어떤
상황의 사진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잡혀 ‘죄수’가 되었을 때
찍혔기 때문에 맨상투다. 그런데 동상의 머리를 맨상투로
만들었으니 몸체는 농민군 지도자고 머리는 죄수가 된
꼴이다.
전봉준 동상은 높은 화강암 받침대 위에 청동 짙은 색으로 우뚝
서 있고, 동상 뒤쪽에서 좌우로 날개처럼 동상을 감싸고 있는
화강암 날개의 농민군 부조는 받침대와 비슷한 높이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장군의 발치 아래 눌리고 있는 꼴이다. 스스로가
농민이었으며 농촌 지식인으로 농민들과 아픔을 같이했고 결국
사형을 당한 녹두장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농민군 모습
어디에도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들고 목숨걸고 싸움터로
나가는 비장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위압적인 지도자에
복종하는 양순한 농민들 같다.
동상 받침대 뒤쪽에는 시행청이 ‘전라북도’이고, 조각한
사람이 김경승(金景承)이며, 1987년 10월 1일 완공했음을
알려주는 까만 표지판이 붙어 있다.
1915년에 태어나 1992년에 죽은 김경승은 동상제작의 최고
권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1939년 동경미술하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몇 차례 입선
특선을 하면서 총독상, 창덕궁상을 받는 기예를 떨쳤다. 홍익대,
이화여대 교수를 지냈으며 오랫동안 국전심사 위원에
심사위원장까지 거쳤다. 그의 경력에 걸맞게 그가 만든 동상의
주인공들도 손꼽히는 위인들이었다. 김유신 장군상, 세종대왕
동상, 이충무공 동상, 안중근 의사상, 김구 선생상, 안창호 선생
동상을 만들었으며, 4월 혁명 때 무너진 이승만 동상,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친일 행적이 있는 고려대 김성수
동상과 이화여대 김활란 동상도 그의 작품이다.
김경승에게는 엄혹한 우리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시대의
모순과 과제를 해결하려 온몸을 던져본 삶과 사상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가까이 지냈던 흔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1894년 목숨걸고 치열하게 싸웠던 농민군의 투쟁의지,
농민전쟁의 의미, 전봉준 장군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형상화
할 수 있는 실천과 경험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상은
위압적이나 1894년은 사라졌다.
고부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
전봉준 같은 농민군 지도자는 이름과 흔적이 남아 있고 동상이나
기념물도 세워졌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역사는 지도자들만이
싸워 이룬 것이 아니다. 이름이 없던 것이 아니라 이름은 있으되
역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농민들이 함께 싸워
1894년 농민전쟁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렇게 이름 남기지 못하고
쓰러져간 농민군의 영혼과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려고 정읍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1994년 9월에 세운
탑이다. 사발통문이 발견된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부락
녹두회관 앞에 세워졌다. 관이 아니라 시민단체와 뜻 있는 지역
주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여기 세워진 조형물들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지 않다.
가운데 주탑은 ‘無名東學農民軍慰靈塔’이라고 이름을 새긴
받침대 위 네모난 화강암 판에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감싸안고
죽창 들고 외치는 농민군 모습을 얕게 파서 새겼다. 파서 새긴
방법은 80년대 많이 보았던 민중판화와 걸개 그림을 양식을
따랐다. 그 위에 겹쳐 떠오르는 장면은 1987년 6월 항쟁이
본격화되기 바로 전, 6월 9일 최루탄 맞아 피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학생을 일으켜 안은 동료가 전두환 정권을 향해 분노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진이다.
토막 토막 따로 세운 1~2미터 크기의 32개 보조탑에는 하늘같은
밥그릇, 무명농민군의 얼굴, 농민들이 무기로 썼던 농기구를
새겼다. 화강암 돌기둥 위, 아래, 중간에 새긴 농민군 머리는
표정과 거칠기를 달리하여 삶과 죽음을 표현하였다.
탑 사이에 공간을 두어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고 안아보고
손으로 잡아 볼 수 있게 하였다. 먼 역사가 아니라 가까운
역사로 느낄 수 있게 한 배려이다.
그런데 주탑의 직사각형 선이 거슬리고, 보조탑 어느 기둥에도
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여자들과 어린이 모습은 없다. 모두 어른
남자 머리뿐이다. 남성중심, 어른 중심의 시각에 머물고 있다.
농민군 무기 가운데 ‘짱돌’도 빠졌다.
오른쪽 한 귀퉁이에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건립기념비’가
외따로 자그 많게 세워져 있다. 역사의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정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비문의 “구월봉기는
일본군의 궁성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한 민족적인 거사였으며 나아가 민족의 自衛를 위한
민중의 항쟁이었다. 甲午先烈들은 그들의 의로운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限을 품은 채 匪徒의 누명을 쓰고 방방곡곡 전장터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처절하게 쓰러져 갔다”는 내용은 반침략의
성격과 일본군에 의한 희생만을 강조하고 있다.
9월 봉기 이후의 2차 농민전쟁 또한 반봉건적 성격이 없었던
것이 아니며, 농민군을 탄압하고 학살한 반농민군 세력에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정부군과 각 지방의 보수 민보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사회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슬쩍 비켜갔다.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몇 가지 기념 조형물을 간단한 보기로 들어보았다. 조형물
건립을 군사독재정권이 주도했느냐 시민세력이 주도했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인데도 이처럼 다르게 형상화된다. 그 다름
사이에는 1987년 6월 민중항쟁, 7~9월 노동자투쟁과 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 활동이 놓여 있다. 현실의 실천과 경험이
역사인식과 함께 역사를 재구성하는 주체의 변화도 가져온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 조형물은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까지 변화해
왔다. 앞으로 농민전쟁 기념 조형물을 만든다면 이 위령탑을
딛고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담아야 할 것이다. 조형물이 다시
거꾸로 정권을 정당화하는 상징조작이 되어서는 안되며, 앞으로
지자체의 업적 과시용 사업의 수단이 되어서도 안된다.
기념사업은 국가나 지자체에서는 재정(국민 세금)을 지원하되
주관은 민간단체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형물은 역사를 좀더
가깝게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도록 낮추고 기울일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 관료주의 상징인 좌우 균형의 우람하고 육중한 수직
탑에서 벗어나 생존권 생활권을 바탕으로 계급모순 민족모순을
해결하려고 싸웠던 투쟁의 정신과 농민들이 염원하던 수평적
인간관계를 형상으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지도자와 농민군 뿐
아니라 온 몸으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가족과 후손도
조형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올바른 역사를 만드는 일은 과거의 기억을 제대로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지금 여기의 모순과 과제를 해결하는
노력과 실천과 맞물려 있다.
문 시민단체들이 중심으로 해서 만든 조형물에서 여성이나,
총각들의 싸움이 배제되었다고 했다. 우연치 않게 정읍에 있는
스님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태인 전투가 동학전쟁의 최후
전투라고 알고 있는데, 그 때 당시 그 지역에 많은 농민들이
지도부와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곧
싸움은 후반으로 갈수록 대중들의 자발성으로 항쟁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상징화할 수 있는 게
없을까?
답 이 시간에는 시간, 시기, 주체 변화를 네 가지 흐름, 그
중에서도 전라도, 주력부대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학농민전쟁은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하고 전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엄밀하게 따지만 각 지역에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 연합부대라고 할 수 있다. 각 부대들을 통괄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 중에 전봉준이 제일 나았던 것일 뿐이다.
따라서 각지에서 자발적인 싸움이 터져 나왔다. 장흥, 진주,
상주, 서석, 강원도, 경상도 등 그런 지역들을 다 찾아보지 못
했다. 그런 지역들의 싸움을 형상화할 수 있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곳에 세워진 상들을 어떻게 조형해내는 것이 과제인
것이다.
문 이러한 정치의 주체를 정권으로 설명하셨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는 정권만이 아니고, 또한 강요만이 아니라 동의에 기반한
측면도 있다. 김대중의 예가 그러하다. 정읍에서는 동학제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축구대회와 문화제들이 열렸다. 충렬사가
행사를 이끌어 나갔는데, 그런 행사에 김대중이 와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런 점에서 그러한 동의를
창출해내는 역할 주체들이 전두환 정권, 박정희 정권만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고 본다. 조형물의 의미를 해석할 때는 정권의
중심성 뿐 아니라 보조축의 역할이 더 클 수도 있다. 정읍의
경우. 정치적으로는 당시 신민당이 보조했다. 우리 아버지도 그
때만 되면 정읍에 가셨다. 막걸리 주고 하루 놀다올 수
있으니까. 그 와중에 농민들은 이데올로기의 동의주체로 나서게
되는 것이다.
문 마찬가지 차원에서 질문을 하자면 도시계획, 건물,
정부공공기관 건물, 아파트 등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본주의적 위세를 수직적이고 웅장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민중주체가 주도적으로 건설했을 때는 전혀
달랐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파시즘은
대중적인 동의가 없이는 곤란한 것 같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휩쓸어갈 때 노동자, 민중들이 참여, 주도한 경험들이 있다.
지금도 우리 나라 민중운동에서 민족주의적인 것이 강하다.
그러한 가운데서 파시즘적인 것이 드러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 민중운동이 제대로 거리를 두고 있나. 제대로
된 정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제대로 된 조형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답 고부의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의 경우 낮추고, 사이를
통하게 하고, 만져보게 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민족중심의
논리가 관철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좌파가 그런
조형물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상들을 만들어내는 관심들이
없다는 것이다. 지역 단위에서의 활동들을 근거지로 만들고
우리의 목소리를 반영해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 90년대 들어서 노동조합의 집회 시에 단이 자꾸 올라가고
리더를 강조한다. 대중과 멀어져 가고, 관료적인 형식성과
기술에 대한 찬미가 숨어있다. 무척 권위주의적인 경향이
모방된다. 일상의 삶이 식민화된 상태에서 익숙해져있다.
답 이를 노동운동사의 측면에서 보자면, 특히 큰 노동조합일수록
그렇다. 자기가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관료화되어 가는
모습들이 생겨난다. 좌우균형 대칭의 제단 위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낮추고 수평화되어 가는 것을 대비하면서 관료주의의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다고 본다.
문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상으로 건설되었을
때, 박제화의 출발이 아닌가?
답 조형물은 좌우균형과 대칭을 벗어나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도 논쟁이 되고, 수직적인 조형물을
스탈린주의적이라고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단칼로 볼
수 있는 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주은래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무덤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주은래를 추모,
조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어려운 문제이다.
요즘에는 기념 조형물 뿐 아니라 건축에 대한 관심이 있다.
골자는 친절감, 편의와 아울러 자연과도 조화되면서 수평적
민주화의 방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광장의 계단 하나, 벤치 하나도 청소하기 좋고 돈 덜 들어가는
쪽으로 만들어진다. 광장에서 토론하고 쉬는 배려가 아닌
것이다.
대안적 건축물로 두 가지 대표적 예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미국의 베트남 전쟁 추모비인데, 언덕을 파고 벽을 만들었다.
전몰자의 이름만 쓰고 해석을 하지 않았다. 국가중심이 아니라
스스로 전쟁에서 얻은 상흔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이에 대해서
보수적인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옆에 사실적으로
세운 동상들이 있다. 또 하나가 전쟁폭력에 반대하는 판인데,
파시즘에 반대하는 구호들을 낙서하도록 되어있다. 그것은
밑으로 가라앉게 해서 조형물 자체가 가라앉도록 설계되었다.
관심있는 분들은 『미술, 공간, 도식』이라는 책을 참조해도
좋을 것 같다.
문 김일성 상을 작게 만든다면 박제화가 아닌가?
답 김일성 상을 작게 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본다.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면서도 사실은 부르주아 미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 여자, 당시의 민중들의 고통들이 여전히 그대로
질곡으로 남아있다. 현재 사회의 현실 속에서의 모순을 중심으로
두면서, 그것을 미적으로 표현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적인 상징성을 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대안을 얘기하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바로 예상하는데, 그것 역시 주관주의적,
형식주의적이라고 비판을 받는다.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브레히트처럼 스스로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문 현재 모순의 질곡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이 뭔가를
바라보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주의
체제 자체도 모순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모순을 극복하는
주체로서의 상징조작은 있을 수 있지 않는가. 레닌의 동상이
크기가 문제라면, 방식의 문제라면 크면 낮추면 되고
관료적이라면 민중적인 방식으로 만들면 된다고 본다.
답 민중들, 노동자들의 운동의 특정한 주체를 염두에 두고
대안적인 문화, 예술적인 운동을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지배질서를 안정시키는데 기여하는
문화예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술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그 이데올로기가 물질화되어 대중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민중들의 입장에서 특정한 것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 때는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형식으로 위치할 것인가. 어린이, 여성들의 위치는 어디인가,
현실의 사회주의적인 조건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문 노동자, 민중들의 이데올로기적 상징 조작에 대해 대응하는
효과도 시간과 조건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레닌 동상이
세워졌을 때 노동자 민중들이 그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효과와 무너졌을 때 주는 효과는 차이가 있다. 노동자 민중의
주체 입장에서 조형물을 만든다 하더라도 단선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힘든 것이 아닌가. 상징조작의 주체들이
예술품이나 조형물을 토대로 해서 지향지점들에 대해서
동원기제들을 보다 더 강화시켜내는 것에 따라 조형물의 의미는
민중적일 수도 있다고 본다.
답 그런 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파퓰리즘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상징조작이 특정한 방식으로 대중들에게
자발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그래서 동원이 잘 된다면 그 결과를
가지고 특정한 작품을 평가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살아남는
예술작품은 뭔가. 단기적이고 특정한 시선에 근거해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작품일 뿐이다. 관행을 따르는 작품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풍부한 민중들의 다양한 경험들은 풍부히
표현되지 못 한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이
억압되기도 한다. 이는 모두 경험주의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노동자들의 평이 안 좋더라.”는 것이
기준이 되면 기존의 흐름에 끌려가는 것이 되고 만다. 기계적,
도식적, 관념론적 예술론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신병현).
문 민중적인 입장에서 낮게 조각된 동학조형물을 봐도 모두다
어둡다. 동학군이 장악을 하면서 즐거웠던 시절은 없나?
답 백산에 8천명이 모였을 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는
분산된 자연경제로 8천명이 모인 적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저
땅이 뉘 땅인데 나는 왜 착취를 당하는가라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백산’ 그 자체가 가장 큰 선동이었을 것이다. 대중들
스스로가 느끼기 때문이다. 민란의 경험도 있고, 자기들이
싸워서 이겼던 승리감도 있었을 것이고, 중앙의 경군을
300여명을 물리쳤던 것, 전주성을 입성했던 것 등은 모두 역사상
처음 체험하는 것으로 자신감에 가득찼을 것이다.
문 수평적 인간관계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이 해방공간을
형상화시키는 방법들이라고 본다. 농민군들의 삶이 표현되지
않아서 위대한 혁명 과정이었지만 실패했고, 무자비하게 탄압
받은 이미지가 더 강하다.
답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서 승리의 경험이 빠졌다는
것을 넣는 게 좋겠다.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역사 속에서 승리에
대한 경험을 끊임없이 배제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명농민군위령탑 만들 때, 그것도 은연중에 그런 기억과 경험은
그 안에 조형되지 못 했던 부분일 것이다. 환희의 경험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가 남는 문제다.
문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보고 갑오농민운동
형상을 만들라고 하면, 백산에다가 대나무 숲, 경작할 수 있는
땅, 쟁기를 꽂아놓고, 짱돌을 갖다놓는 것으로 하겠다.
답 조형물을 중심으로 설명했는데, 1894년의 이 역사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가 문제다. 화강암은 친절감과 거리가 있다.
살아있는 것을 키우는 것도 조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형물은
자동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어떻게 올바른 상을 만들기 위해서 적극적, 능동적으로 개입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역사 쓰기를 할 것인가가 남는 과제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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