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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본질은?

현장에서 미래를  제68호
최경희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본질은?
부채는 밑으로 가라앉고 부는 위로 올라가는 것
최 경 희/연구위원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본질은?



1. 한국사회 구조재편의 세 가지 경향
지금 한국은 사회구조를 조정․재편하는 계급투쟁 격화의 시기이다. 중기적으로 그 특징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김영삼 정권의 구상과 IMF 관리체제가 시작되었던 기간이다. 김영삼 정권의 세계화(globalization)전략 구상과 외환위기로 가시화된 경제위기는 거대 금융독점자본의 초국가적 관리기구인 IMF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재현했고, 그 돈을 빌려 쓴 결과로 IMF의 요구-구조조정 프로그램-를 수용하게 되었다. 두 번째 시기는 이러한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 요구를 수용, 실행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철저히 집행하는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통치과정이다. 집권 4년째를 맞고 있는 김대중 정권은 더위에 혀를 헐떡거리는 개처럼 통치능력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세 번째 시기는 지금부터 2002년 대통령 선거까지의 정치권력 재편기로서 계급투쟁이 격화될 양상을 보이고 있다.
첫 번째 시기를 시작으로 한국사회 구조재편에 대한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특징지울 수 있을 것이다. 당연 현 시기 지배적인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입장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의 회복을 강력하게 주장, 관철시키는 지배계급의 입장이다.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라고 하는 것은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를 중심으로 전 자본주의적 세계질서의 재편에 따른 한국자본주의 구조조정, 재편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피지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입장으로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이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면 철저히 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에 대한 정확한 반대의 입장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전세계적 반대운동의 궤를 같이하면서도 국내 계급투쟁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집행위원회인 김대중 정권에 대한 퇴진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세 번째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김대중 정권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이중적인 입장을 갖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진행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너무 지나치게 대자본의 입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면서도 재벌개혁이나 남북관계의 진전이나 언론개혁 등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해 개혁의 칼-소위 전근대성에 대한 개혁-을 대는 것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엄호하는 입장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한국사회의 구조재편에 대한 방향을 논할 때 ‘어떤 자본주의여야 하는가’를 초점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소위 ‘시장중심적 질서’라고 말하는 영미형 자본주의보다는 ‘시장 조절적’이라고 볼 수 있는 유럽식 자본주의에 힘을 싣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 경향은 특정한 그룹과 일대일 조응관계를 가지기보다는 한 계급 또는 특정 정치그룹 안에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함께 제출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입장과 태도들이 한 집단 내 갈등하고 있다거나 집단 사이에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글은 세 번째의 입장이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그 한계를 지적해 보려고 한다. 세 번째 입장은 한국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타당성을 근거로 대중적으로 진보적인 견해인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 물론 첫 번째 입장에 비하면 소부르주아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측면에서 또는 한국사회의 철저한 보수적 입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노동’이 선택해야 할 입장인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노선이 ‘국가’도 살리고 ‘노동’도 살리는 것처럼 노동 대중에 다가가는 그 이데올로기성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2. 참여사회 모델에 대한 비판적 평가
월간『말ꡕ지는 2001년 2월호에서 김동춘 참여연대 정책위원장과 ‘신자유주의와 시민운동’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인터뷰를 했던 기자는 글 말머리에 김동춘 정책위원장을, 이론적 성향은 ‘좌파’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그의 몸은 ‘리버럴’한 시민운동의 장에 속해 있다고 평가하며 이러한 모습 자체가 변혁운동의 고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동춘과의 인터뷰 내용에는 논리도 있고, 대안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을 접근하고 문제를 풀어 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김동춘의 논리와 변혁적 진영의 논리는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봉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혼돈 속에 있으며 어떠한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더욱 명확히 할 때, 변혁운동이 가야할 길이 명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비판 - 신자유주의는 스스로 낡은 관계를 바꾸고 있다
김동춘은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는 30년 개발독재와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시스템과 그것과 결합한 신자유주의 질서 때문에 생긴 겁니다. 실제로 이것이 민중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있죠. 그러나 근본문제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도입되기 전에 기존에 만들어져 있던 시스템 때문에 생긴 거예요, 한쪽만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김동춘은 현 한국사회의 근본문제를 30년 개발독재와 분단체제라고 보고,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모순을 심화시킨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인식논리에서 개발독재에 대한 대안으로서 ‘재벌개혁’을 상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개발독재, 분단체제, 신자유주의를 따로 따로 분리해서 파악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우리 사회의 근본문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인한 것이고, 30년 개발독재는 한국사회가 갖는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특정한 생성방식인 것이고 분단체제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결과물인 것이다. 그 속에서 한국사회의 모순이 심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개발독재’와 ‘분단체제’의 모순 그 자체를 심화시키기보다는 ‘개발독재’와 ‘분단체제’의 유지로는 더 이상 한국 자본의 이해를 유지, 관철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전의 사회체제를 스스로 깨고―국가주도형 경제성장모델에 대한 개혁은 자본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한국 사회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개발독재와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시스템에 신자유주의가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단계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근본모순을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첨병인 김대중 정권은 스스로 개발독재 모형에 대한 비판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주창하였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정치적 진전을 제1의 정치적 의제로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좌파진영은 시민운동을 신자유주의의 하위파트너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으며 이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전근대성 또는 근대성의 한계들을 바꾸어가면서 진행하고 있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전 세계적인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이전에 낡은 장치와 낡은 경제구조와 낡은 관념들을 스스로 부숴가면서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비판 - 친자본적 개혁의 주장
김동춘 정책위원장은 우리사회의 근본모순을 ‘총수 1인 독재 전횡체제’로 파악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기업내부의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이 경영참가를 통한 감시’ 시스템을 만들고 남은 문제는 주주와 소비자들의 힘으로 견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민주적 경영참여의 모델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민주적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민주적으로 착취․지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민주적으로 착취․지배했던 가정 전형적인 형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며, 더 진전된 것이 유럽의 복지국가 체제가 아니었던가. 자본은 스스로 이러한 형태로 더 이상 착취, 지배할 수 없어서 탈주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단계로 스스로 이전의 공간으로부터 탈주한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는 단계로서 제출된 것이기 때문에 1930년대 공황을 제2차 세계대전이란 전쟁으로 극복했던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가히 개별 국가에서 파시즘적 물리력을 동원하면서 비민주적 폭력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친족재벌체제에 따른 총수 1인 독재 전횡체제는 한국 독점자본의 특수한 형태인 것이고, 그러한 형태의 근본모순은 ‘1인 독재체제’와 주주와 소비자의 모순관계가 아닌 ‘독점자본’ 대 ‘민중’이자, ‘자본’ 대 ‘노동’인 것이다. 김동춘은 ‘재벌’에 대한 현상형태적 분석을 하고 있고, 이에 ‘자본의 민주적 개혁과 운영’을 주장하는 것은 현 시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논리에서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맞아 들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은 금융자본의 전세계적인 민주적(=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금융개혁과 개방을 강요하고 그래서 제1차적으로 은행권과 금융권의 친자본적 질서재편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소액주주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초국적 금융자본에게 대다수 민중의 생존권을 팔아먹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비판 - 노동운동에 대한 자의적 판단
김동춘 정책위원장은 “… 재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 요구는 재벌개혁 반대로 나타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 생존권 보장도 분명 가장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재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어요 …” 라고 말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를 노노갈등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동문제에 대해 ‘자본’의 논리로 파악하는 김동춘 정책위원장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분할통치를 어떤 거름장치도 없이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견해로 화살을 꽂고 있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핵심은 ‘경쟁’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동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분열과 분할’인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은 ‘경쟁’이자 이 생산관계의 재생산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를 통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끊임없이 ‘경쟁’이란 이데올로기로 개체를 사회화․내재화시키고 있다. ‘재벌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생존권’의 충돌을 상정하는 것은 바로 기본적으로는 노동문제에 대한 자본의 논리가 깔려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의 투쟁의 무기가 ‘단결’과 ‘연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본에 대한 혁명적인 저항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 반신자유주의 국제노동운동에 대한 김동춘 정책위원장의 견해이다. 김동춘은 지난 반신자유주의 국제노동운동의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는 ‘시애틀’과 ‘프라하’의 운동을 무정부주의적인 운동으로 일축하고 있다. 국가단위로 투쟁의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국제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 단위의 투쟁의 경험이 축적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투쟁의 내용이 ‘자본의 합리화와 민주화’, 즉 ‘얼굴 있는 자본주의’라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시애틀과 프라하의 운동을 무정부주의적인 운동의 경향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데는 일면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좌파혁명운동은 노동자 국제주의라는 내용과 개별 국가의 정치권력의 획득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을 때, 세계 자본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의 표현이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을 띤다고 했을 때,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가, 물론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이 노동자 국제주의로 정확하게 표현되고, 그러한 투쟁이 개별국가에서 좌파의 혁명적 정치운동으로 수렴되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시애틀과 프라하의 운동을 무정부주의적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국제노동운동의 양상을 친정부적 NGO 운동적 수준으로 편재하는 ‘국가의 민주적 개혁 프로그램’과도 역시 부합하는 내용인 것이다.
2001년 3월호 ꡔ노동사회ꡕ에서 김동춘은 한국 노동운동의 진로로서 전투적 경제주의 노선에서 사회운동적 조합주의 기조로 변화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아마 지금 시기 민주노총의 총파업 투쟁 또한 전투적 경제주의 단면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대중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총파업, 그것을 전투적 경제주의의 오류라고 하면서 일관된 비판적 견해를 제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노동운동은 심각한 문제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인과 해법을 찾는 김동춘의 논리는 노동운동의 변혁성 그 자체를 문제삼고 있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 즉, 민주노총이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로 노선을 변경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의 본질은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동반자적인 관계로 설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김동춘은 후발국가의 자본-노동관계는 세계자본주의 질서 속에 훨씬 깊게 편입되어 있고 국가의 세계체제 내의 위치에 거의 결정적으로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세계자본주의 위치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 단계운동이 표방했던 개량과 혁명의 이분법이 한국과 같은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한 구조와 위치로 인해 한국의 노동운동이 그 특수한 역사적 조건에서 하위파트너로서 관계를 맺으라고 당부하고 있는 듯 하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치 속에서 노동운동의 성격이 결정되는가? 노동운동의 성격은 노동자 대중운동의 정치활동의 수준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계서구조로 운동의 성격이 규정된다면 미국 노동운동 외에는 변혁적인 성격을 갖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논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점은 노동운동=조합주의운동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조합주의운동은 노동운동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면 한국의 조합주의운동의 한계는 민주노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 진전되지 못하는 그 한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운동이 어떤 구조적 제약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자본의 입장에서 파악하지 노동의 입장에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운동은 이미 반자본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물론 항상 일관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의미가 바뀌고 있다. 자본의 동반자적 관계로서 노동의 위상을 설정하라고 당부하는 그의 주장은 노동운동의 변혁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라는 주장과 같다고 보면 너무 과도한 것일까.


3. 소액 주주로 시장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대안인가?
한국사회의 구조재편에 대한 하나의 입장인 참여․개혁 모델은 의미성이 있다. 즉, 반자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친자본적 입장의 유의미성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현 단계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대안의 차이 때문이다. 참여․개혁 모델은 노동자․민중을 시장에 참여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그 길만이 살길이라고 하면서 부추기고 있다. 경영에 참가하고, 시장에 참여해서 당당히 한 주체―주주와 소비자―로 기능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장 만능주의’와는 조금 다른 ‘시장 참여 모델’로서 소액 주주운동과 종업원 지주제를, ‘시장 조절 모델’로서 사회적 합의주의―예를 들면 노사정위원회―제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시장 만능주의’와 ‘시장 참여․조절 모델’은 이데올로기적 효과의 차이를 갖고 있을 뿐이지 물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자․민중이 신자유주의적 금융시스템에 참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겠는가? 거대한 초국적 금융자본의 가공할 만한 무정부성과 그 횡포 속에 소액의 주주들은 그 권리를 누릴 수 있겠는가? 현 시기에 한국의 국가는 초국적 금융자본에 대한 자율성을 갖고 소액 주주의 권리를 확보, 보호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가? 무수하게 제기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해 “예”라는 정확한 답을 하기가 어려운 구조이다. 금융시장에 노동자․민중을 몰입하게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더그 헨우드의 분석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융시스템은 역사적인 조건에 따라 그 역할들을 변화시켜왔다. 초기 산업자본주의 단계에서 금융시장은 돈을 모으고, 생산적인 투자처에 돈을 대부해주는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 단계에서 금융시장은 돈 놓고 돈놀이하는 고리대의 특징을 갖고 있다. 금융시스템은 은행중심 시스템과 주식시장 중심시스템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은행중심 시스템은 주식시장 규모가 작고 그 중요도도 낮은 경향이 있다. 주식시장이나 채권시장이 아닌 은행들이 기업 금융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행들이 기업의 주식도 대규모로 소유하고 있다. 독일이 전형적인 예이다. 지난 15년간 자유시장을 내세운 이른바 ‘개혁’의 바람이 불면서 개발도상국 또는 제3세계로 불리는 나라들에서 주식시장이 엄청나게 성장했다. 이런 나라의 주식시장들은 금융 전문용어로 보통 ‘신흥시장’(emerging market)으로 불린다. 1994~1995년 멕시코 위기와 같은 사태가 신흥시장에 일어날 경우에는 신흥시장이 ‘침몰시장’(submerging market)으로 재치있게 표현되기도 한다. 신흥시장으로 불릴 정도의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신흥 주식시장들은 아직 그 규모가 아주 작다. 세계은행의 내부 투자은행인 국제금융공사에 따르면 신흥시장들의 상장주식 시가총액은 1996년에 세계전체 주식시장의 11%에 지나지 않았다. 뉴욕이나 런던의 투자자들은 그들의 호주머니 돈 정도만 이동시키면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의 주식시장은 통째로 사들일 수 있다. 신흥시장들은 이처럼 규모가 작고 거래되는 주식의 종류도 많지 않기 때문에 매우 불안정하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기업이 어떻게 소유되고 운영되는가를 규정하는 필수 메카니즘은 바로 주식시장이다. 영미형이라고 한다면 현금을 아주 많이 갖고 있거나 신용을 이용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개된 주식시장에 참여해 공개기업의 주식을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계 나라들에서는 기업의 지배 지분이 대개 대형 은행들의 수중에 있어 공개시장에서 기업 소유권이 매매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독일기업들이 해외투자를 늘리고 해외 주식시장에 주식을 상장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독일의 기업형태도 앵글로색슨형 닮아가고 있는 것 같다(핸우드 1999:39~42). 이러한 분석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주식시장은 매우 불안정할 것으로 예측 가능하며 뉴욕이나 런던의 투자자들이 그들의 호주머니 돈 정도만 이동시키면 필리핀이나 아르헨티나의 주식시장은 통째로 사들일 수 있다는 재미있는 비유가 금융시스템의 단면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리고 경향적으로 금융시스템이 영미형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더그 핸우드는 미국의 금융체제가 선전과는 달리 사회의 저축을 가장 적절한 투자 계획에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과업을 참담할 정도로 잘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체제는 엄청나게 많은 비용을 소모하고, 자본의 배분과 관련해 크게 잘못된 정보를 생성하며, 실제 투자와는 놀라울 정도로 관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고객 자금의 투자운용을 위탁받은 자금 관리자들은 대부분 시장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투자운용 실적을 내는 데 그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경우, 투자운용 실적이 올라가기보다는 오히려 떨어진다는 증거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은 거액의 보수를 받고 있고, 투자 중개인들은 엄청난 커미션을 챙긴다. 거의 모든 기업들은 자본지출은 이윤이라든지 감가상각과 같은 내부 금융의 조달된 자금에 의해 이뤄진다. 미국의 금융시스템은 투자를 촉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이와 정반대의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헨우드 1999:19~20).
즉, 더그 핸우드는 금융시장이 투자계획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집중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흔히 주식시장은 부의 재분배 공간으로 작용한다는 선전과는 달리 철저히 부를 집중하는데 역할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정부의 부채는 납세자들로부터 부유한 정부채권 소유자들 쪽으로 소득을 상향 재분배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게 아니라, 이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대신 이자를 지급한다. 그리고 소비자신용도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 즉, 오르지 않는 임금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가계수지를 맞춰 나가기 위해 비자카드를 사용하는 사람들은―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매달 카드 대금을 납입하는 것을 통해 채권자의 돈지갑을 불려 주고 있을 뿐이다. 비금융 기업들은 사업에 재투자하기보다 매년 주주들에게 거액의 배당금을 지급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부가 그토록 현저하게 상위 계층에 몰려 있다는 게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헨우드 1999:21).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경제 전체의 국내 총생산 대비 부채 비율이 상승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국민소득계정을 보면 가계는 금융체계상 궁극적인 청구권자이다. 한편 자금순환계정(1997)에 따르면 가계부문은 4,040억 달러의 신규채무를 지는 동시에 저축을 4,910억 달러만큼 늘렸다. 가계부문은 금융시장에서 빼간 돈보다 더 많은 돈을 금융시장에 집어넣은 것이다. 곧 부의 집중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시간당 실질임금의 하락과 가계소득의 정체 때문에 미국의 중․하위 소득 계측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돈을 부유해진 부자로부터 빌려야만 하는 것이다. 1983년 당시를 보면 10%미만의 상위계층이 가계부분의 순차입 가운데 85%를 융자하는, 소수가 다수에게 융자하고 있는 것이다(헨우드 1999:108~111). 이러한 상황이 비단 미국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하반기 한국자본의 경제 전망은 국민소득계정이 증가하며 소비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전망을 하였다고 한다. 국민소득계정이 증가하는 것이 실질임금이 인상되어 가계소득이 증가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국민소득계정의 증가는 한 집안의 빚이 늘어가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미국의 예처럼 한국도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경향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금융시스템에 노동자․민중을 몰입시키는 발상은 더욱 더 빚을 지게하고 부를 상층으로 집중시키는 역할에 부채질을 가할 뿐이다.


4. 마치며
신자유주의 시장질서 즉,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윤추구 활동에 날개를 달아준 구조조정에 동의하고 그 시장질서에 노동자․민중을 주주와 소비자의 주체로서 참여하라고 하는 것은 자본의 먹이사슬에 순순히 몸을 던지라고 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맑스는, 생산관계와 분배관계는 화폐의 개념 그 자체 안에 새겨져 있으며 따라서 유통수단의 변화만으로 생산관계와 분배관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았다. 화폐를 갖고자 하는 욕구는 노동자들을 노동하게 만들고 자본가들을 서로 경쟁하게 만든다. 이런 효과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경제 체제 안 깊숙한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현 시기 노동자․민중에게 화폐 소유자가 되라고 부추기는 자들은 노동자․민중을 자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며 현실 불가능한 것을 참주선동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폐체제에 대한 공격이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그것은 소유와 계급권력에 대한 공격이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한다. 또한 이러한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주체로 시급히 형성해야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 한/노/정/연



》참고문헌《
김동춘, 「신자유주의와 시민운동」, 월간 ꡔ말ꡕ, 2001년 2월호, 인터뷰.
김동춘, 「한국노동운동의 진로: 사회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의 위상 정립 필요」, ꡔ노동사회ꡕ, 2001년 3월호.
더그 핸우드 지음, 이주명 옮김, ꡔ월스트리트 누구를 위해 어떻게 움직이나ꡕ, 사계절, 1999.

2001-07-07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