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린 마 당
조사모삼(朝四暮三)도
결국 일곱
강신준 교수의 ‘개량적 국면에서의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
3부작을 비판한다.
채 만 수 (이사, 경제사회연구회 대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에서는 ‘열린 마당’이라는
꼭지를 개설하여 노동운동 진영에서 제기되는 주요 쟁점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를 대폭 싣기로 했다.
회보에 실린 글이나 최근 논의되는 주요 사안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으면 적극 투고해 줄 것을 기대한다.
지난 해 강신준 교수가 ‘개량적 국면에서의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라는 동일한 부제하에 발표한 ‘세 편의 연결된 형태의
논문들’ 「맑스 혁명주의의 실천적 유산」
(한국사회경제학회, ꡔ제30회 연구발표회
연구논문집ꡕ, 1995, pp. 31 - 54, [이하에서는
ꡔ실천적 과제-1ꡕ로 표시함]); 「일본적
노사관계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실천적 함의」
(한국사회과학연구소, ꡔ동향과 전망ꡕ, 1995년
가을호, 통권27호, pp. 244 - 274, [이하에서는 ꡔ실천적
과제-2ꡕ로 표시함]);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 (한국산업노동학회,
ꡔ신경영전략과 노동조합의 대응전략ꡕ [제3차
학술발표회 자료집], 1995. pp. 59 - 90, [이하에서는
ꡔ실천적 과제-3ꡕ으로 표시함]).
과 그 일부에 대해서 가해진 비판 임현주, 「강신준
교수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통권 3호, 1995년 10월, pp.
183 - 193, (이하에서는, ꡔ비판적 검토ꡕ로
표시함).
에 대한 대응 강신준, 「임현주씨의 비판에 답함 :
노동조합 임금정책에 대한 생산적 논의를 위하여
ꠏꠏꠏ 임현주(노기연)씨의 「강신준
교수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에 답하면서」(연대와 실천을 위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ꡔ연대와 실천ꡕ 통권 제17호,
1995년 11월, pp. 65 - 69, [이하에서는
ꡔ답하면서ꡕ로 표시함]).
은 결정적인 이론적 부조리와 특히 노동운동에 대한 실천적
해악(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언사로 포장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비판되고 그 본질이 폭로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작업이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극히 간략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강 교수 스스로 “모두 세 편의 논문이
연결된 형태를 띠고 있어서 내용도 지나치게 많다”
ꡔ답하면서ꡕ, p. 66.
고 술회하고 있는 장황한 논의를 극히 간략한 형태로 비판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여기서는, 그가 ‘연결된 형태’의 세
편의 글을 통해서 관철시키고자 하는 핵심적 목표의 내용과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한 논리(혹은, 논의) 조작 수법에 비판을
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그 수법부터 보자.
수법 (1) ꠏꠏꠏ 기만적 인상(印象) 심기와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강 교수는, ꡔ실천적 과제-3ꡕ의 내용을 비판한
임현주 씨에게 답하면서, “모두 세 편의 논문이 연결된 형태를
띠고” 있다라든가 “원래 이 문제의 논문을 한 편 속에
완결지은 것이 아니라 모두 세 편의 논문으로 나누어
집필”하였기 때문에 “이 논문(ꡔ실천적
과제-3ꡕ)만으로는 문제가 되는 부분을 충분히 논의하기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세 편의 논문을
통일적으로 파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독해력에 의한다면, 그의 그러한 요구는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19세기 유럽의) 사회혁명 전술로서의
노동운동의 전술(ꡔ실천적 과제-1ꡕ의 과제)과
자본의 ‘신임금제도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이 어떤
긴밀한 연결성을 갖는단 말인가? 그것들은 사실상 직접적 관련이
없고 그 양자 사이에는 무수한 중간항들이 존재해서, 강 교수가
(단지 일본에서의 노동운동의 경험만을, 그것도 자의적으로,
매개해서) 전개하는 식으로 논의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구조’
ꡔ답하면서ꡕ, p. 66.
에서는 사회혁명 전술로서의 노동운동의 전술과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은 교묘하게 연결지워져 있어서, 새로운
상황에 맞는 전술에 목말라 하는 많은 독자를 홀리기에
충분하다. 그 수법을 보자.
그는 ꡔ실천적 과제-1ꡕ에서의 논의를 통해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전술’을 “혁명적 전술” 혹은 “위기적
전술”과 “부르조아 민주주의 전술” 혹은 “(사회) 개량적
전술”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들 전술의 조건을 그는, “혁명의
조건은 ......객관적 조건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경향과 주관적 조건으로서 혁명적 계급의 역량으로
정리된다” ꡔ실천적 과제-1ꡕ, p. 44.
면서 혁명의 객관적 조건이 변화하면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전술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의
호황과 공황(=위기)이라는 “객관적 조건은 모든 주관적 역량을
뛰어 넘”기 때문에 사실상 “객관적 조건이 노동자계급의
전술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이상, ꡔ실천적
과제-1ꡕ, p. 45.
“혁명적 전술은 객관적 조건뿐만 아니라 주관적 요소에
의해서도 규정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혁명적 전술과
부르조아 민주주의 전술간의 구별을 객관적 조건에 의해서만
구별하는 것은 맑스의 혁명주의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오해로 규정된다” 이상, ꡔ실천적
과제-1ꡕ, p. 48.
라고, 정말 현기증 나게 이야기한다. ‘전술의 구별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조건은 사실상 자본주의적 생산의 호황과 공황이라는
객관적 조건이다’라는 명제와 ‘혁명적 전술은 반드시 객관적인
혁명적 조건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소위 ‘혁명적 전술의
이중성’ ꡔ실천적 과제-1ꡕ, pp. 46 - 47 참조.
)라는 명제 사이를 어지럽게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의 전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단연
‘객관적인 조건’이다. 그리하여 그가 ꡔ실천적 과제-2
및 -3ꡕ을 통해서 사실상 전술의 구별을 규정하는 조건은
후자,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호황과 공황’ 뒤에서 보는
것처럼, 물론 그 국면 규정은 극히 자의적인 것이지만!
이라는 객관적 조건이다 ꡔ실천적 과제-2ꡕ, pp.
249 - 250, 및 ꡔ실천적 과제-3ꡕ, pp. 59 - 65
참조.
. 특히 ꡔ실천적 과제-2ꡕ에서의 논지 전체는
사실상 ‘개량적 국면’에 ‘위기적 전술’로 대응한 일본
노동운동의 실패를 논증하는 것으로 된다. ꡔ실천적
과제-1ꡕ에서도 사실상 은근히, 즉 부정직한 형태로
‘수정주의’의 복권과 ‘사회 개량적 조건’ 하의 ‘개량적
전술’의 수용을 설파하고 있긴 하지만, 특히 ꡔ실천적
과제-2 및 -3ꡕ에 오면 이제 노골적으로 (‘개량적
국면’에서의) ‘개량적 전술’의 필요성이 강하게 주장되는
것이다. ꡔ실천적 과제-1ꡕ에서의 ‘전술의
이중성’ 운운은, 말하자면, 최대한 저항없이 ‘개량적 전술’의
필요성을 설파하기 위한 기만수법으로서, ‘노동자 이익을
대변하는 이론’이라는 인상(이미지) 심기였던 셈이다. 이러한
기만수법으로서의 이미지 심기는 세 편의 논문간의 관계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개개의 논문 내에서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예는 대표적이다. 즉,
그는 한편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노동조합의 조직형태의
기준은 노동자의 배타적인 이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면서 노동조합의 업종별, 산업별 조직형태조차 “자본의
‘이윤’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그것은 상호의존적인 것이며
신임금제도의 적대적 성격에 대응한 유용한 대응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일종의 ‘전국유일노조론’을 사실상
주장하는 것인데, 그 실현불능성을 잠시 제쳐둔다면, 얼마나
“철저하게 [노동자] 계급적인 성격”을 띤 주장인가!
(ꡔ실천적 과제-3ꡕ, p. 83 참조).
그런데 그는 바로 그 책장도 넘기기 전에, “노동조합의
임금체계관리정책의 기본방향은 (자본의 이해를 인정하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전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원문대로). “노동조합의 임금체계관리 정책은 바로
...... 자본의 이해를 인정하는 상호의존성에 바탕을 둔 대안을
지향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주장하고 있다.
동지의 발언이라는 기만적 이미지를 강하게 준 후에 그 잔영
속에서 자기 할 일을 하는 그런 수법인 것이다.
한편, ‘개량적 국면’에서는 ‘개량적 전술’이라는 명제는
일본의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무기에 그치지 않고, 그가
ꡔ실천적 과제-3ꡕ에서 이른바 ‘신임금제도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주장하는 전제 혹은 기초를 이룬다. 강신준
교수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정책적・실천적
대안(‘생활급’ + ‘노동급’)은 그렇게 ‘맑스의 혁명주의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군사독재에 의해서 예사로 벌어지던 시절에
유행하던 냉소적인 농담 중에, ‘1) 냉장고 문을 열고, 2)
코끼리를 집어넣고, 3) 냉장고 문을 닫는다’는 ‘냉장고에
코끼리 넣기 3단계’가 있다. 3단계를 통해서 간단히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 넣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농담만이
아니다. 실제로 ‘연결된 형태의 세 편의 논문’을 통해서
강신준 교수야말로 ‘혁명의 조건’ 혹은 ‘전술’이라는
코끼리를 ‘노동조합의 임금정책’이라는 냉장고에 가둬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맑스의 혁명주의의 유산’은 이제 냉장고
속에서는 ‘개량적 전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 특히,
ꡔ실천적 과제-3ꡕ, pp. 62 - 65.
로서 나타나는데, 이러한 일련의 조작을 통해서 그의
「‘생활급’ + ‘노동급’」이라는 임금정책은,
‘개량적 국면’ 속에서 ‘혁명주의’라는 ‘목표의 일관성’
ꡔ실천적 과제-1ꡕ, p. 47.
을 잃지 않은 ‘부르조아 민주주의 전술’ 혹은 ‘개량적
전술’이 되는 것이다.
수법 (2) ꠏꠏꠏ 전거 날조하기
강 교수는 때로 맑스-엥겔스 등을 왜곡인용하거나,
“자본유통정식에서 임금과 관련된 노동력의 거래과정”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과정”으로 “맑스의
ꡔ자본ꡕ 제1권 제2편 제3절(원문대로!, ......)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ꡔ답하면서ꡕ, p. 67.
는 식으로 있지도 않은 전거를 있는 것처럼 날조함으로써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그가 베른쉬타인의 동정적
지지자가 되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부분은 그러한 왜곡
중의 한 예이다.
그(베른쉬타인)는 자신의 공격을 위해 맑스 엥겔스의 글 속에서
두 개의 교두보를 만들었다. 이 교두보들은 기존의 맑스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로서 말하자면 맑스 엥겔스 스스로
맑스주의의 취약점으로 고백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그의 공격의 표적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강조는 인용자) ꡔ실천적 과제-1ꡕ, p.
35.
도대체 베른쉬타인의, 그리고 동시에 강신준 교수의 어떤
교두보가 “기존의 맑스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고 “맑스
엥겔스 스스로 맑스주의의 취약점으로 고백한 부분”이라는
것인지 하나만 보기로 하자. 위의 인용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들인데, 그의 왜곡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소위, 두 개의 교두보) 중 하나는 1872년 맑스와 엥겔스가
ꡔ공산당 선언ꡕ 신판 서문에서 파리 콤뮨의
교훈으로서 정리한 귀절이었다. 즉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콤뮨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노동자계급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국가기구를 그냥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 Marx, K. 1872, S. 574 (MEW Bd.
4, S. 574를 가리키며, 위 인용문에 있는 강 교수의 원주[原注
13)]이다.)
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기구 자체가 독립적으로 이미
계급적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서
부르조아 국가기구도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국가기구는 반드시
혁명적으로 전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상태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강조는 인용자).
강 교수에 의하면,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국가기구를 그냥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고 스스로 맑스주의의
취약점으로 고백했으며 이 부분이 “기존의 맑스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다?!
더 나아가기 전에, “노동자계급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국가기구를 그냥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움직일 수 있다”가 누구의 ‘표현’인가를 확인해보자.
서술 형식을 보면, “‘......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라고
하여, 마치 맑스와 엥겔스가 말한 것을 베른쉬타인이
(원문대로건, 나름대로 재해석해서건) 옮긴 것을 그로부터 강
교수가 재인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왜곡인용의
제일차적 책임은 베른쉬타인에게 있다(ꠏꠏꠏ
그렇더라도, 그에 기초해서 자기 주장을 전개하기 전에 그 진실
여부를 확인했어야 하는 강 교수의 책임이 물론 없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강 교수가 위 인용문의 전거를
베른쉬타인에게서가 아니라 맑스의 저작에서 직접 밝히고 있는
것에서 명확한 것처럼, 그 표현(여기서는, 번역)은 강 교수
자신의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극단의
왜곡은 강 교수의 수법이고 따라서 그 책임도 그 자신의 것이다.
“...... 했다는 것이다”라는, 교수답지 않게 앞뒤 맞지 않는
서술은 왜곡에 따른 죄의식의 무의식적인 표출이던가, 아니면
왜곡의 책임 소재를 조금이라도 모호하게 하려는 의도의 표출일
것이다.
강 교수가 인용 부분의 원문은 “die Arbeiterklasse nicht dir
fertige Staatsmaschine einfach in Besitz nehmen und sie
für ihre eignen Zwecke in Bewegung setzen kann”이고,
따라서 그것은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기존의 국가기구를
장악하고 그것을 그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서 운용할 수는 없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강 교수의 번역은 정반대이고,
그의 주장은 그 정반대의 번역을 ‘교두보’로 삼고 있다.
강 교수는 단순한 부주의나 착오에 의해서 이런 오역을 냈는가?
아니다. 나는 여기서 강 교수의 이 정반대의 번역은 의도적이고
악의적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그가 인용한 전거(MEW Bd. 4,
S. 574) 자체가 맑스의 저작 ꡔ프랑스의 내전ꡕ에서
이 문제가 더욱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고 안내하고 있고, 또
맑스가 루드비히 쿠겔만(Ludwig Kugelmann)에게 보낸
편지(1871년 4월 12일자)에도 이 문제가 언급이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이미 널리 회자되는 문제여서 강 교수
정도의 연구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이 맑스와 엥겔스의 본래의
의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의미로 ‘번역’하고
거기에 독일어 저작집을 전거로 제시하는 수법으로 강 교수가
노린 것은 국내의 많은 사람들, 특히 그가 ‘실천적 과제’
운운하면서 ‘실천적 의지와 조건을 가진’ 독자의 일부로
상정하고 있는 노동조합 혹은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의 거의
다수가 맑스 엥겔스 저작의 독일어본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교수의 권위로’ 그리고 맑스와 엥겔스의
권위를 빌려 베른쉬타인을 한국의 노동운동 속에 심고
부정직하나 실질적으로 개량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관철시키려 한 것 실제로 이 점에 그의 세 편의
논문의 ‘목표의 일관성’(ꡔ실천적 과제-1ꡕ, p.
47)이 있다.
이라고밖에는 달리 볼 도리가 없다.
강 교수는 이렇게 정반대 의미로 ‘인용’한 맑스 엥겔스를
근거로, “국가기구 자체가 독립적으로 이미 계급적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 것으로서 부르조아 국가기구도
이용하기에 따라서는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즉 국가기구는 반드시 혁명적으로
전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상태로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운운하고 있지만, ꡔ프랑스의
내전ꡕ에서 전개하는 맑스의 논지는 당연히 강 교수와는
정반대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ꡔ프랑스 내전ꡕ의
서술은 오히려 부르조아 국가기구가 ‘계급적 전제정치의
동력기관’이며, 빠리 꼬뮌은 노동자 계급의 혁명 후에는
‘꼬뮌이 가장 소규모의 시골부락에서조차도 정치적 형태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역설하고 있다.
파리 꼬뮌이 한창 진행되던 1971년 4월에 쿠겔만에게, “내
ꡔ브뤼메르 18일ꡕ의 마지막 장(章)을 보면 내가,
프랑스인들이 다음 번에 다시 혁명을 시도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관료주의적 군사기구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기지
않고 그것을 깨뜨릴 것이며 이는 대륙에서의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파리의 영웅적인 당 동무들이
지금 시도하고 있는 일입니다”라고 쓰고 있는 것을 보면, 강
교수가 뒤집어 인용한 부분이 결코 “기존의 맑스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로서 말하자면 맑스 엥겔스 스스로
맑스주의의 취약점으로 고백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강 교수처럼 인용함으로써만 그것은
“맑스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되는 것이다!
수법 (3) ꠏꠏꠏ 목적에 따라 자의로
규정하기
강 교수는, ꡔ실천적 과제-1ꡕ에서 ‘전술의
이중성’ 운운하면서 객관적 조건 여하에 불구하고 ‘혁명적
전술’을 구사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지만, ꡔ실천적
과제-1ꡕ, pp. 47 - 48 참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미지 심기 단계에서의 논의일 뿐,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논하게 되면 ‘위기적 국면엔
위기적 전술’, ‘개량적 국면엔 개량적 전술’이라는 관계가
강조된다. 이제는 “개량적 국면에서는 위기적 전술이 유효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 ꡔ실천적 과제-3ꡕ, p. 87.
이다.
“개량적 전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자본의 이해를 인정하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개량적 전술’, 그리고 ‘자본의 전술체계 내에 있는 개량적
전술’ “개량적 국면에서는 개량적 전술의
대안(ꠏꠏꠏ ‘개량적 전술을 대체할 안’이
아니라 ‘개량적 전술이라는 대안”의 의미이다 :
인용자ꠏꠏꠏ)이 필요하다. 개량적 전술의
대안은 어떻게 모색될 수 있는가? 이 글에서는 바로 그런 대안의
모색이 자본의 전술체계 내에 있다고
간주하였다.”(ꡔ실천적 과제-3ꡕ, p. 87).
을 설교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상, ꡔ실천적
과제-2ꡕ와 특히 ꡔ실천적 과제-3ꡕ 속에서
국면의 성격과 전술과의 관계가 이렇게 ‘위기적 국면엔 위기적
전술’, ‘개량적 국면엔 개량적 전술’로 정리되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스스로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처럼, 그는
‘실천적’ 문제의식에서 논의를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개량적 전술’이 구사되어야 하는 ‘개량적 국면’을 아주
간단히 실천적으로 자의적으로.
마련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 노동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얻은 후 개량적
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이런 개량적 국면은 1986년 이후
한국경제의 순조로운 발전과 1990년대부터 회복기에 접어든 세계
자본주의의 전반적 호황국면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진행되었던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기적인 대변화와
함께 결정적인 국면을 이루었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86.
나는 현 국면이 과연 개량적 국면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 판단은
어떠한 것을 들어서 하여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강
교수의 위 주장은 철저하게 자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세기적인 대변화’를 개량적
국면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적시하는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가 “1986년 이후 한국경제의 순조로운 발전과 1990년대부터
회복기에 접어든 세계 자본주의의 전반적 호황국면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전혀 사실과 반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상황이 상당히 바뀌어 있지만, 주지하는 것처럼, 우선
지난 89년도 봄 이래로 한국 자본주의는 격심한 공황에
빠져들어서 정부와 자본가 단체들은 ‘총체적 위기’ 운운하는
비명을 질렀고 노동자 계급과 소생산 계급은 모두 이른바
‘고통을 분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도
1990년부터 ‘회복기에 접어들어 전반적인 호황국면’에
들어갔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전후 가장 심각한 공황국면에
들어가서 서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아직도 극히 높은
실업율이나 금융위기 등 불황의 수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상황을 ‘호황 - 개량적
국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용이나 사실해석을 거꾸로 하는
것이 혹시 그의 가예(家藝)는 아닌가? 이른바 ‘개량적 전술’을
그것도 당당히 선전하기 위한 의도적・악의적인
왜곡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러한 자의적이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국면 규정은 비단
‘1987년도 이래의 현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가
ꡔ실천적 과제-3ꡕ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예비적
작업의 하나로 삼았던 ꡔ실천적 과제-2ꡕ에서도
일본 자본주의의 제시기에 대한 성격 규정은 철저히
자의적・목적의식적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는, “논점에
충실한 형태로만 자의적으로” “전후의 일본 노자관계를
시기적으로 구분”하겠다고 말한다 (ꡔ실천적
과제-2ꡕ, p. 252). “목적의식에 충실한
형태로만......”이라고 했더라면 보다 적절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10월부터’ ‘일시적으로’ 거친
‘잠깐동안의 위기’ ꡔ실천적 과제-2ꡕ, p.
263.
를 제외하고는 전후 일본 경제는 70년대 초두까지 내내 ‘개량적
국면’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전후, 특히 1945 -
50년까지의 일본 자본주의조차 ‘개량적 국면’이었고, 따라서
‘위기적 전술’로 대응한 노동자 계급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정말 묘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개량적 국면’에 노동자 계급은 ‘개량적 전술’로만 대응해야
하지만 자본가 계급은 ‘위기적 전술’을 ‘전개’할 권리를
갖는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ꡔ실천적
과제-2ꡕ에서는, “산별회의를 구심점으로 모여 있던 일본
노동운동의 위기적 전술은 개량적 국면하에서 자본측의 위기적
전술을 불렀다”(p. 257)며, 용의주도하게 그 책임을 노동자
계급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그 잔영 속에서 이제
ꡔ실천적 과제-3ꡕ에 오면, ‘개량국면에서의
자본의 위기적 전술 운용 권리’는 당연한 것으로 처리되고
노동조합에게는 자본의 그러한 전술을 개량적으로 수용할 것이
요구된다 (특히 pp. 63 및 81 - 82 참조).
그리고 자본이, 이른바 ‘기업합리화’를 추구하고 특히 그들의
구미에 맞도록 노동조합을 개편하기 위해서, 수십만의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고, 그 때문에 대대적인 파업투쟁이
벌어져도, 그의 규정에 의하면 여전히 ‘개량적 국면’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말한다.
1946년 9월 국철(國鐵)과 해원(海員)의 대량해고사태에 반발하여
조직된 산별회의의 10월투쟁은 공공부문의 투쟁으로 번져갔고
이는 교섭대상자인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으로 점차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결국 투쟁은 당시의 요시다(吉田)내각에
대한 총사퇴를 요구하는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고 산별회의는
1947년 2월 1일 내각총사퇴를 요구하는 전국적인 정치파업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이야말로 이 시기 전체를 통털어
일본노동운동이 가지고 잇던[원문대로] 전술인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내부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3자(군정청)에 의해 “주어진” 개량국면 여기에서는 국면의
성격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상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내부역량에 의하거나’ 정치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참고로, 강 교수에 따르면 “1945년 12월 22일 미군정청에
의해 노동조합법이 공포됨으로써 본격적인 조직활동의 고삐가
풀린 이래 노조조직률은 급속히 상승하였다”(ꡔ실천적
과제-2ꡕ, p. 254, 강조는 인용자). 그에 의하면,
노동조합법은 조직활동에 고삐를 매는 것이 아니라 고삐를 푸는
것이다. 이 얼마나 관념론적인 이해인가!
에 대해서 일본 노동운동은 계속해서 위기적 전술로 대응해
나갔던 것이다. ..... 파업은 성공할 수 없었다.
...... 이제 일본 노동운동의 전술적 오류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그 대가를 한꺼번에 치러야만 하였다. ꡔ실천적
과제-2ꡕ, 256.
여기서 강 교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교섭대상자가
정부일 경우, 그를 상대로 한 투쟁, 즉 정치투쟁을 (특히
‘개량국면’에서는) 해서는 안된다는 것, ‘개량국면’에
‘정치투쟁’을 하면 ‘결정적’・‘파국적’ 그는, 이
1947년 2.1 총파업을 ‘파국적 형태’(ꡔ실천적
과제-2ꡕ, p. 236)라고 묘사한다.
대가를 치른다고 하는 경고이다. 그런데, ‘개량국면’은
언제일까? 앞에서 본 것처럼, 사실은 공황국면일지라도, 그리고
자본이 대량 해고를 자행하고 나서는 시기일지라도, 그가
‘개량국면’이라면 ‘개량국면’인 것이고, 노동자들은
“자본의 이해의 적극적 수용을 통한 ...... 개량적 전술”
ꡔ실천적 과제-3ꡕ, p. 85.
을 써야 하는 것이다!
수법 (4) ꠏꠏꠏ 노자관계 구조론에서의
자의적 정식화와 뒤집기
강신준 교수는 ‘노자관계’ 혹은 “자본 임노동관계는 다시 두
가지 과정으로 정리된다. 즉 노동력 상품의 매매과정인 G - W
과정과 노동력 상품의 소비과정인 W ・・・
W'이 그것이다. 이 두 과정은 분리되어 있고 자본 임노동관계는
바로 이런 이중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ꡔ실천적
과제-2ꡕ, p. 247 및 ꡔ실천적 과제-3ꡕ, p.
66.
며, 이 소위 ‘노자관계 구조’론 혹은 ‘자본 임노동관계
구조’론을 ‘노동운동의 전술’ 논의나 임금 논의의 주요한
출발의 하나로 삼고 있다.
이에 임현주 씨는 강 교수의 오류가 ‘자본 임노동관계’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을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과정’으로 분해해버린 것”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비판하였고 ꡔ비판적 검토ꡕ, pp. 186 - 190.
, 이에 대해서, 앞에서 본 것처럼, 강 교수는 자본-임노동관계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과정이라는 것은 맑스의
ꡔ자본ꡕ 제1권 제2편 (제4장 : 인용자)
제3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며 있지도 않은 전거를
제시했다.
ꡔ자본론ꡕ에서도 G - W는 G - W - G'라는
과정(Prozeß)의 한 단계(Phase)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G -
W와 W ・・・ W'를 강 교수처럼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지는 의문이
있지만, 그렇다고 임현주 씨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한 것은 물론 오류이다. 이른바 ‘자본 임노동관계
구조’론과 관련한 강 교수의 결정적인 오류는 G - W와 W
・・・ W'를 분해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 및 ‘임금수준’ 및
‘임금체계’(의 관리)를 각각 G - W와 W
・・・ W'에 자의적으로 대응시키는 데에
있고, 다음으로는 이 논의를 묘하게 진행시켜 자본-임노동관계를
사실상 절대화하는 데에 있다.
강 교수에 의하면, 먼저 자본가의 이해는 W
・・・ W', 즉 생산과정을 통해서 달성되는
것이고 G - W에서는 노동자의 이해만이 특히 전일적으로
달성된다. ꡔ실천적 과제-3ꡕ, pp. 66 - 67 참조.
그렇다면, 자본가는 목적도 없이 G - W 단계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자본가가 G - W 단계에서 아무런
이해관계도 갖지 않는다면 거기에서 임금이 어느 수준에
결정되든 자본가에게는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강 교수의 전제에 따르면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어야 할
‘임금결정과정’을 자본은 “잉여가치의 최대한 획득”이라는
“자신의 목표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임금관리’,
‘임금수준관리’에 나서게 된다. “자본 임노동관계의 이중적
구조에서 우리는 자본의 목표가 잉여가치의 획득, 즉 ‘돈을
버는’데[원문대로] 있음을 확인”했는데 “이 목표는
노동지출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노동지출은 임금결정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충돌하는 두
주장 사이의 매개항이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0
참조.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는 것이 어느덧 ‘그 과정 속에서
임금을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낮추어야 한다’는 의미로
둔갑해 있다. 그의 ‘자본 임노동관계의 이중적 구조’에
대응하는 ‘논리 개념의 이중적 구조’라고나 해야 할까?
“노동의 이해가 더 관철되기 쉬운 임금수준관리가 자본의
임금정책에서 왜 필요한가? 자본 임노동관계는 본질적으로
양자의 이해가 대립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ꡔ실천적 과제-3ꡕ, p. 71)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마치 자본의 ‘임금수준관리’가 노동의
이해를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는가?
이러한 곡예를 한 끝에 그는, “노동지출(v + m)이 일정할 때
임금(v)을 낮추는 방법”과 “임금(v)이 일정할 때 노동지출(v +
m)을 늘리는 방법”을 자본의 ‘임금수준관리’와 ‘임금체계
관리’로서 논하고 있는데, ꡔ실천적 과제-3ꡕ, pp.
70 - 75.
이는 사실상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문제를 극히 저급한 형태와 내용으로 논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그 논의 속에서는 추상의 오류와 자의적
개념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추상의 오류 문제에 대한 논의는
지면 사정상 생략할 수밖에 없고, 대표적인 자의적 개념 하나를
지적하자면 그의 ‘시급(제)’ 개념일 것이다. 그는 이
‘시급(제)’라는 개념을 주급, 월급 등과 나란히
임금지불형태의 하나로서 거론하면서 “우리나라의
임금지불형태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현장노동자들에게는
거의 예외없이 시급제가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2.
그의 ‘시급(제)’ 개념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현장노동자들은 매노동시간마다 임금을 지불받는 것으로 된다!
현장노동자들도 매시간마다가 아니라 매월마다 임금 그것이
‘월정액’이든, ‘실제 노동시간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든.
을 지불받는다면 그의 ‘시급(제)’ 개념은 전적으로 자의적인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이중적 구조’를 발명해내면
좋을까?
아무튼 그는 특유의 ‘이중적 논리구조’를 동원하여 G - W에는
‘노동자의 이해’를, 그리고
W ・・・ W'에는 ‘자본의 이해’를
대응시키고, 동시에 각각에 (자본에 의한) ‘임금수준
(관리)’와 ‘임금체계 (관리)’를 대응시키는데, 이는 뒤에서
보는 것처럼 이들 개념틀들을 이용하여 ‘자본의 신임금제도’를
분석・비판(?)하고 그에 대한 ‘대안적 임금정책’을
모색(?)하기 위한 직접적인 사전조작(事前操作)이다.
그런데 그의 실천적이고 대안적인 임금정책을 보기 전에 우리는
강 교수가 역시 특유의 수법으로 ‘자본 임노동관계 구조’론
속에 끼워 넣은 자본-임노동관계의 사실상 절대화, 그를 기초로
상호의존성, ‘자본-임노동간의 이해의 일치’에 관한 열정적인
설교를 듣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설교한다.
자본 임노동관계는 ...... 서로 다른 이해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이해를 달성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상대편에게 의존해 있다.
...... 자본 임노동관계에서 양자는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
......
이런 상호의존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물론
호황국면에서이다. 자본과 임노동은 각자의 목적을 달성시키기에
어려움이 없고 양자의 이해는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호황국면에서 ...... 자본의 이해는 노동의 이해와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ꡔ실천적 과제-3ꡕ, p. 63.
개량적 전술은 여기에 토대를 두고 있다. ...... 이
상호의존성의 문제가 논의의 중심을 이룰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ꡔ실천적 과제-3ꡕ, pp. 68 - 69.
강 교수에게 있어서는 자본-임노동관계는 이렇게 ‘절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상호의존적이고 양자의 이해는
일치하기까지 하기 때문에,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로서
상호의존성이 논의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 그에게 있어
자본-임노동관계가 역사적이고 경과적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면서 그에
토대를 둔 ‘개량적 전술’을 모색・설파하는데, 그의
기만적인 이미지 심기가 이번에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
따라서 그 자신의 계급성을 직접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임금체계를 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임금수준에
개입시키기 위해서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5. 물론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면,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임금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고 말이다.
조삼모사(朝三暮四)나 조사모삼(朝四暮三)이나 결국은
일곱(七)
강신준 교수는, ‘연결된 형태의 세 편의 논문’의 ‘완결편으로
나타나게’ 된 그의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 ꠏꠏꠏ 개량적 국면에서의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 (3)
ꠏꠏꠏ」와 관련하여, “현재의
국면에서 노동운동이 신경영전략의 완결편으로 나타나게 될
신임금제도에 대하여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음을
절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최소한의 대안적 논의를
제안하고자 논문을 집필한 것이다.” ꡔ답하면서ꡕ,
p. 69.
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신임금제도와 그에 대한 ‘대안적
임금정책’ 자체를 보자.
우선 그는 특유의 이중성을 발휘하여, 한편에서는 “임금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은 대개” “임금수준관리와 임금체계관리로 크게
나뉘어지는” 자본의 임금정책 혹은 “임금관리의 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자본의 전술구조일뿐이기 때문”에 “그것의 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대안적 전술을 모색할 수
없다.”라고 기존의 논의들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기는
특권적으로 그러한 ‘임금관리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논의를 진행한다. ꡔ실천적 과제-3ꡕ,
pp. 69 이하.
그리하여 ‘이중적’ 혹은 특권적 이해력 구조를 갖지 못한
우리는 ‘우리 교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하고 당혹할 수밖에 없는데, 기만과 혼란에 조금 더
끈기를 가지고 읽어 가자면 그의 비판(?)은 사실은
‘임금관리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영학계측의 논의’와 ‘노동계측의 논의’가 각각
‘자본측과 노동측의 이해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에,
특히 “노동계의 논의는 노동자의 이해와 직결된 생계급을
강조”하여 “상호의존성에 토대를 둔 개량적 전술로 대응”
ꡔ실천적 과제-3ꡕ, p. 80.
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임금제도에 대한
기존 국내 논의의 검토’라는 절에서 그는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경영학계의 논의가 자본의 일방적인 이해만을 좇음으로써
노동측의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취약점은 노동계측의
논의에서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도 노동측의
이해만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뿐 자본의 이해는 대립적인
것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
......
...... 전노협은 우선 「1994년 임금지침」에서
임금을 아예 생계비 임금으로만 한정해서 논의하고 있다.
노동자측의 이해만을 논의의 틀로 삼고 있는 것이다. ......
...... 노동조합과 임금체계연구회(1993)의 논의는 ...... 아예
직능급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노동조합이 여기에
총체적으로(능력급 임금뿐만 아니라 능력주의 인사제도까지)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ꡔ실천적
과제-3ꡕ, pp. 79 - 80.
이러한 불만 때문에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을 모색하는
강 교수의 노력의 하나는, ‘기본급 + 제수당 + 상여금’이라는
임금구성항목들 가운데 “임금교섭에서 교섭의 핵심‘을 이루고
노동조합 등이 임금투쟁시에 그 비중을 높이려고 하는 기본급
ꡔ실천적 과제-3ꡕ, p. 73 참조.
개념을 해체하려는 데 모아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자본 임노동관계가 대립하는 양자의 이해가
착종하는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기본급은
“노동자의 이해인 생계를 반영하는 임금과 자본의 이해인
노동지출에 따른 임금이 함께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ꡔ실천적 과제-3ꡕ, pp. 73 - 74. 강 교수는 스스로
맑스의 ꡔ자본론ꡕ 제1권 제2편 제4장 제3절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자본 임노동관계 이중적
구조’론 혹은 ‘노자관계 이중적 구조’론으로 임금은
“노동자의 이해인 생계를 반영하는 임금과 자본의 이해인
노동지출에 따른 임금이 함께 구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지만, ꡔ자본론ꡕ의 문제의 절은 오히려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 따라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또 “노동력의 가치도 다른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유통에 들어가기 전에 [즉, W・ ・
・W'에는 말할 것도 없고 G - W에도 들어가기 전에 :
인용자] 결정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의 글 도처에서 그러한
것처럼, 여기에도 그의 가예가 발휘되고 있다.
그런데 부당하게도(?) ‘임금구성항목’을 ‘기본급 + ......’
등으로 나누는 기존의 논의 혹은 “이런 개념하에서는 임금은
기본급 하나가 임금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임금의 성격은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원문대로!)
ꡔ실천적 과제-3ꡕ, p. 73.
그리하여 그는, “임금은 기본급 하나로 이해”되지만 그
“임금결정기준의 세 요소”는 ‘노동자의 생계와 관련을 갖는
연공급’ 및 ‘노동지출과 관련을 갖는 직능급과 직무급’임을
밝히면서, “자본 임노동관계는 본질적으로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양자의 이해를 제각각 반영하는 기본급의 요소들 가운데
하나만이 기본급에 반영될 수는 없다.”고 다시 선언한다.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이해의 대립을 은폐시키려고
하는 것, 즉 “자본의 임금관리체계가 목표로 하는 것”
ꡔ실천적 과제-3ꡕ, pp. 73 - 74.
을 그가 열렬히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특유의 이중성을 발휘하여,
‘노동지출과정은 임금이 결정되고나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기본급에는 자본의 이해인 “노동지출”과 관련한 항목이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임금결정과정에 노동지출과정이 개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며, 노동자 이해의 대변자로 나선다.
“임금항목이 기본급 하나를 중심으로 구성되면
임금결정과정(임금수준관리)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기본급의
수준”인데, “기본급이 노동의 이해만이 아니라 자본의 이해도
함께 반영한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임금결정과정에서
노동자의 이해는 차별적으로 반영되기 어렵다. 노동의 이해인
‘생계비’를 반영하는 임금인상은 근거를 잃게 된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4.
는 것이다. 이제 자본의 이해를 위해서도, 그리고 노동의 이해를
위해서도, 즉 이중적으로 ‘기본급’ 개념을 해체해야 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으로서의 ‘생활급 + 노동급’인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서로 다른 이해가 모두 반영되어야 할 임금이
[기본급이라는 : 인용자] 단 하나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면”
그러한 임금구조는 “자본 임노동관계의 이중성을 반영할 구조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상호의존성에 기초한 노동조합의 임금체계전술은 이들 양자의
이해가 모두 반영될 수 있는 임금항목의 구성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 그리하여 임금구성항목은 이제 ......
노동의 이해를 반영하는 임금(이것을 “생활급”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노동자의 이해는 “생계유지”에 있으므로)과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임금(이것을 “노동급”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자본의 이해는 노동지출의 결과에 따른 “이윤”이므로)의 두
가지 항목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84.
이것이 바로 “신임금제도에 대하여 뚜렷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음을 절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제안하는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이다. ‘생활급 +
노동급’이어야 한다!? 이에 임현주 씨는 정당하게도 “그는
결국 무엇을 말해 버렸는가?”라며,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만일 「생활급 + 노동급」의 임금체계가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ꠏꠏ 이에 대한 관념적 치장을 벗기고
나면 ꠏꠏ 노동자가 노동력의 가격으로서의
생활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가격에 포함되지 않은 노동력
지출 ‘노동 지출’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부분에 대해(즉 노동능력에 대해 괄호 안은 전적으로
사족이다.
서조차 임금을 지급받는다는 논리를 노골적으로 보다 눈에 띠는
형태로 선전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즉 노동자는 노동력의
제 가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받는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ꡔ비판적 검토ꡕ, p.
192.
여기에 나의 비판을 덧붙이자면, “ꡔ‘자본’의
이해ꡕ의 저자이시고 ꡔ임금론ꡕ(M. 돕)의
번역자이신 교수시여! 그대는 ‘임금’이 무엇인지 아는가?”
강 교수는 한편에서, 자본의 임금관리정책, 특히 임금체계
관리의 목표는 그를 통해서 자본이 “자신의 이해가 걸린
노동지출과정을 노동자의 이해가 걸린 임금결정과정에
개입시키는” ꡔ실천적 과제-3ꡕ, p. 74. 자본가의
임금관리정책 혹은 임금체계관리는, 그에 의하면 “완전히
분리된 두 과정”의, 시간적으로 뒤 과정을 앞 과정에
개입시키는 ‘타임 믹서’(time-mixer ; 그런 것이 정말 있을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인 모양이다.
것에 있다고 파악하고, ‘신임금제도’도 이를 ‘전술적
일반성’으로 삼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리고 ‘신임금제도의
전술적 특수성’을 논하면서, “신임금제도의 기본적인 전술적
성격은 임금수준관리에 임금체계관리를 가능한 한 깊게
개입시키는 데 있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5.
며, “신임금제도의 임금체계의 핵심은 ‘직무수행능력에 따른
임금’이라는 직능급 임금체계에 있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6.
고 한다. 따라서 그의 ‘생활급 + 노동급’으로서의 임금정책은
‘직능급 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적 임금정책’인
셈이다. 그리하여, 그 차이를 아주 너절하고 궤변적으로
논증(?)하면서 특히 ꡔ실천적 과제-3ꡕ, pp. 75 -
78 및 84 - 85 참조.
“이 ‘노동급’은” “신임금제도의 직능급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노동조합의 임금이 된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85.
고 주장하지만, 지면 관계상 그 논증에 일일이 대응할 겨를도
없고, 또 그럴 가치도 없다. 더구나 그 특유의 이중성에서 뱉은
다음 한 마디가 그의 ‘대안적 임금정책’의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이 글에서는 자본의 공세적 전술의 일환으로 제기되고 있는
신임금제도, 특히 그것의 핵심내용을 이루는 직능급제도를
기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개량적
전술의 대안을 모색해 보았다. ꡔ실천적 과제-3ꡕ,
pp. 87 - 88.
익히 아는 것처럼, 송나라 때 어떤 노인이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주는데,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 주겠다’고 하니까 원숭이가
적게 준다고 화를 내자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고 하여 원숭이를 속였다는, 혹은 어리석은 원숭이가
그렇게 속았다고 하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古事)는
교활한 언사를 사람을 속이는 짓, 혹은 그러한 교활함에
어리석게 넘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대안적
임금정책’이란 바로 이렇게 ‘신임금제도’ 그것도 그
핵심내용을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서 바로 조삼모사의
교활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자는 그대의 어리석은
원숭이가 아니지 않은가!
이제 그의 대안의 성격뿐만 아니라 집필 동기도 ‘객관적으로
투명’해졌다. 즉, 그가 그 부재(不在)를 ‘절박한 상황으로
인식’하면서 마련하려고 한 ‘최소한의 대안’이란 바로
‘신임금제도, 특히 그것의 핵심내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에서의 ‘개량적 전술’이었던 것이고, 그 집필의 깊은
동기는 “노동자가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체교섭을 통해서만 가능해”[원문대로]지도록 “건강한 자본
임노동관계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행여 노동자
계급이 진정한 맑스주의의 ‘혁명주의’를 계승하여 “자본
임노동관계의 건전한 구조를 저해하게” 되거나 “궁극적으로 이
관계 자체의 위협으로 작용하게” ꡔ실천적
과제-3ꡕ, p. 86.
되어서는 안되겠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자여! 개량적 전술을 적극 수용하라!
ꠏꠏꠏ 이것이 ‘연결된 형태의 세 편의
논문’을 통해서 강신준 교수가 전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인
것이다.
실천적 대안 ?
앞에서 말한 임현주 씨의 비판에 대한 강 교수의 대답은 사실상
그 4분의 1 이상이 “대안적 실천의 논의를 이론적 성격을
판별하는 논의로” 재단해 버리지 말고 “더 적극적인 대안”
“대안적 임금체계”를 제시하라는 사뭇 훈계조의 요구로 되어
있다. 자기는 “대단히 이론적인 내용들[?]”
ꡔ답하면서ꡕ, p. 66.
을 맘껏 휘둘러 대고, 상대방한테는 거두절미하고 ‘대안적
임금체계’만 제시하라?! 논쟁에도 그 특유의 ‘이중적 구조’가
있는 모양이다.
그야 아무튼, ꡔ답하면서ꡕ에서 밝히는 그의 집필
동기나 ‘대안적 임금체계’를 제시하라는 그의 닦달은 (그가
제시한 ‘대안적 임금정책’ 말고는) 이른바 ‘신임금제도’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대안’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들린다.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그는 ‘대안’을 제시하라고
닦달할 근거를 전혀 가질 수 없다.) 그가 그 부존재(不存在)를
‘절박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대안이란 단지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과 같은 대안, 즉 ‘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면서
노동운동 전반에 개량주의를 고취하는 노동조합의 임금정책’
“노동조합의 임금정책은 ...... 자신의 목적을 일차적으로
달성시켜야 하되 자본가의 이해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용할 수 있는 구조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ꡔ실천적
과제-3ꡕ, p. 81. ꡔ‘자본’의 이해ꡕ의
저자이신 그는 물론, 자본-임노동관계 자체가 자본에 의한
임금노동의 착취제도라는 사실은 짐짓 은폐한다.
인 것이다. 그는 이미 노동자들의 ‘대안’을 알고 있고,
앞에서도 본 것처럼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노동계의 집단적 견해로 전노협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전노협은
우선 「1994년 임금지침」에서 임금을 아예 생계비
임금으로만 한정해서 논의하고 있다. 노동자의 이해만을 논의의
틀로 삼고 있는 것이다. 전노협의 이런 입장은 「임금체계
개편 사례분석ꡕ(1994.10)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ꡔ실천적 과제-3ꡕ, p. 79.
그에게 불만인 것은, 이들 논의에 “개량적 전술이 표방하는
상호의존적인 자본 임노동관계의 성격은 ...... 반영되지 않고
있다.” 같은 곳.
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일본의 ‘전산형
임금체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에서도 명확하다.
노동자의 표준생계비를 기초로 작성된 이 임금체계는 이상적이긴
하지만 자본가의 이해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임금체계였다. 즉
노동지출과 관련된 부분은 거의 반영되지 못한 임금체계였다.
...... 이 임금체계가 개량적 전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위기적 전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ꡔ실천적 과제-2ꡕ, p. 256.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이해만이 아니라 자본가의 이해도
반영하는 임금체계를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결국 강교수가
요구하는 ‘노동운동의 실천적 과제’인 것이다. 자본-임노동
제도 그것 자체가 이미 자본에 대한 임노동의 착취체제이고
자본이 패권이 관철되는 제도인데도 말이다!
한편 일부에서는 ‘임금체계를 포함한 정책적 대안의 문제를
제기한’ 강교수의 논의에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혹시 조사모삼도 결국 일곱임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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