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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한국 경제

현장에서 미래를  제70호
강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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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한국 경제

강 성 윤/연구원




1. 머리말

한국경제가 비틀거리고 있다. 97년 말의 공황 이후 강도높은 구조조정으로 신속하게 위기를 벗어났다고 자평하던 때가 언제인가 싶게, 각종 경제지표들이 지속적인 하락세를 나타내면서 경기침체 양상을 의문의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지난 해 말부터 생산 및 소비 증가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수출 증가세가 낮아지는 등 경기둔화 현상이 상당히 뚜렷하게 나타났으나, 정부는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구조조정과 제한적 경기조절정책의 병행 추진으로 2001년 하반기부터는 5~6% 대의 적정성장궤도에 진입”1)이라는 낙관적인 예측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내내 산업생산의 위축이 계속되고, 수출 감소폭의 확대와 설비투자의 감소세가 지속된 데다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 전반의 회복 전망 또한 불투명한 상태여서 현재의 경기침체가 쉽사리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작년 하반기부터 떠돌던 이른바 ‘제2위기설’의 실체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2001년 2/4분기 경제성장률은 2.7%에 그치고, 7월 중 수출이 공식 통계 집계 이후 최대의 감소폭(전년동월대비 -20.5%)을 나타냈으며, 특히 반도체, 자동차 등 제조업 분야의 부진이 심화되면서 기업들 또한 앞으로도 이런 추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표 1>, <표 2> 참조).


<표 1> 2001년 주요 실물경제지표 추이(전년동월대비, %)

 

2001.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산업생산

(전월대비)

0.1

(1.0)

8.8

(0.9)

6.4

(0.4)

5.6

(-1.4)

2.3

(-0.1)

-2.8

(-2.0)

-5.9

(-1.4)

-

평균가동률

73.9

74.9

75.2

74.7

74.8

74.1

71.0

-

설비투자추계

-9.2

-4.8

-5.0

-5.8

-5.3

-2.8

-10.3

-

도소매판매

2.2

1.6

3.6

4.0

4.8

4.5

2.5

-

수출

(통관기준)

4.0

5.1

-2.1

-10.3

-9.0

-14.6

-20.5

-19.4

소비자물가

4.2

4.2

4.4

5.3

5.4

5.2

5.0

4.7

자료: 한국은행, 「대내외여건 악화에 대응한 통화정책 운용방향 관련 기자간담회 자료」, 2001.9.19.


<표 2> 제조업 업황 BSI 추이

 

2000. 3/4

4/4

2001. 1/4

2/4

3/4

4/4

실적치

97

75

61

85

76

-

전망치

110

107

67

92

103

89

-내수

110

105

61

90

103

90

-수출

111

113

84

97

105

87

자료: 한국은행, 「2001년 3/4분기 기업경기조사 결과」.


더욱이 지난 9월 11일의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은 이미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미국경제의 급락을 부채질한 결과가 되었으며, 세계경제 전반의 동반침체에 따라 한국경제도 수출 격감과 원유 등 국제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물가불안까지 우려되고 있다. 또한 미국의 보복전쟁이 시작되면서 앞으로의 경제상황은 더욱 비관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2. 침체원인에 대한 자본의 주장

그렇지만 현 경제상황을 대외여건의 악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대규모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각종 노동조건의 악화 등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희생을 동반하면서 진행되어 온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왜 경기침체가 심화되고 있는가? 현재 경기침체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극심한 투자부진과 수출감소인데, 그 중에서도 투자부진은 더욱 심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서는 먼저 이에 대한 자본측의 진단을 「투자부진 현상 진단 및 평가」라는 제목의 삼성경제연구소 연구보고서(이하 「보고서」)를 통해 알아보자.2)

이 「보고서」는 한국경제가 지난해 말부터 나타난 급격한 투자위축 현상으로 인해 금년 하반기 이후 기대되던 경기회복이 불투명해졌으며, 장기적으로도 성장잠재력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과잉설비로 고전하는 분야에서는 신규투자를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나 경쟁력제고를 위한 투자까지 위축되는 것이 문제라고 보고 있으며, 투자위축 현상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507개 기업들을 대상으로 투자활동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정리하고 있다.


<표 3> 최근 투자 및 수출 추이 (%, 전년동월대비)

 

2000년

11월

12월

2001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설비투자증가율

-1.1

-2.2

-9.2

-4.8

-5.0

-5.8

-5.3

-2.9

수출증가율

5.6

0.1

4.0

5.1

-2.1

-10.2

-7.7

-14.3

자료: 산업활동동향(통계청), 수출입동향(산업자원부). 권순우 외, 「투자부진 현상 진단 및 평가」, 삼성경제연구소 연구보고서, 2001.8에서 재인용.


설문결과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상장기업의 절반이 넘는 53%가 외환위기 전에 비해 매출액 대비 투자규모를 줄였다고 응답했으며, 투자가 급격히 위축된 원인으로는 ① 경기둔화에 따른 시장침체, ② 기업가정신 위축과 기업활력 저하, ③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금융불안 지속, ④ 정부규제로 인한 투자활동 제약 등을 들고 있다. 이 중 ③과 ④의 진단은 철저한 자본가적, 재벌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호도하고 있지만, ①과 ②는 그나마 상황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제 각각의 요인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투자부진의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된 것은 2000년 4/4분기 이후의 급속한 경기둔화와 그에 따른 시장침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사실’이며, 이 ‘사실’을 초래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비록 현재의 시장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호전될 것으로 예상한다면 자본가들은 투자에 나설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요인은 단지 자본가들이 현재의 경제상황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추세 또한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을 확인해 줄 뿐이다.

한가지 특징적인 것은 외환위기 이후 경기변동에 따른 설비투자 변동폭이 크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경기둔화와 시장침체에 따른 투자위축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설비투자가 경기국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두 번째 요인으로 지적된 ‘기업가정신 위축과 기업활력 저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른바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이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윤을 획득할 가능성이 보이는 투자처를 찾아내어 모험적으로(투기적으로) 투자하는 자본가의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을 의미한다. 사실상 지금까지 한국경제의 발전은 이러한 모험적(투기적) 투자에 의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즉 70년대의 중화학공업, 80년대의 전자산업, 90년대의 정보통신산업 등과 같이 새로운 성장산업에의 대규모 집중투자가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동력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실패는 정부가 나서서 그 부담을 국민에게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구제해왔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3)

그러나 「보고서」는 지난번 공황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과 공격적 경영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 안정성 위주의 경영방식을 선호하는 현상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으며, 또한 외환위기 이후 영미식 자본주의가 빠르게 확산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장기보다는 단기실적에 치중하는 경영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큰 위험을 감수하여 그 대가로 큰 이익을 얻기(High risk-High return)보다는 이익이 비록 작더라도 가능한 한 위험을 회피하려는(Low risk-Low return) 성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대규모 투자에 실패했을 경우에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주던 이전까지의 방식과는 달리, 97년 말의 공황 이후 재벌급 독점자본까지도 공중분해되는 등 자신들에게까지 직접 투자 실패의 책임을 묻는 ‘신자유주의적 방식’에 대한 경험이 한국 자본가들의 “동물적 본능”을 움츠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세 번째로 지적된 요인은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금융불안 지속’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신용경색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환경이 더 악화되었다고 응답한 기업이 38.0%이고, 차입이 더 용이해졌다고 응답한 기업이 30.7%로 외환위기 이후 자금시장 양극화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금융기관 차입이 어려워졌다고 응답한 기업의 경우, 그 가장 큰 원인이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금융불안(40.9%)에 있다고 응답했으며, 이외에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24.9%), 기업자체의 신용악화(23.8%), 부채비율 200% 준수기준(7.8%) 등을 들고 있다. 또한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인해, 투자재원 조달이 어려운 부실기업은 물론 우량기업까지도 구조조정의 결과를 지켜본 후 투자를 결정하려는 유보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 근거하거나 문제를 호도하려는 시도이다.

김대중 정부는 지난 3월 이른바 ‘상시적 구조개혁 시스템’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정한 기간과 목표치를 갖고 정부책임 하에 진행되었던 1, 2차 구조조정과는 달리 금융, 기업 등 주요 시장주체가 ‘투명한 책임경영’을 통해 시장에 책임을 지는 한편, 시장의 일상적인 평가를 통해 일상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부실기업과 금융부실을 적시에 해소하는 ‘영구-자동적인 개혁(구조조정)체제’이다.4) 즉 시장에 의한 진입과 퇴출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로의 이행을 제도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정부의 의도가 과연 그대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어쨌거나 이에 따르면 구조조정은 결코 시간을 정해서 하는 일시적인 작업이 아니라 끝없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과정이며, ‘구조조정의 지연’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구조조정의 지연으로 금융이 불안해지고 투자가 위축된다는 주장은 사실상 김대중 정부가 요구하는 새로운 체제, 즉 투자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체제에 발을 들여놓기 싫다는 뜻이거나, 반대로 정부의 말과는 달리 퇴출되어야 할 기업이 여전히 생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빨리 제거해 달라는 압력이다.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이것은 네 번째 요인으로 지적된 ‘정부규제로 인한 투자활동 제약’과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은 이제 적당히 마무리하고 자본축적에 보다 유리한 조건을 조성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퇴출을 통해 과잉축적을 해소하는 작업이 갖는 위험과, 사실상 구조조정이 도리어 금융불안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즉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이 아무리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도산과 이에 따른 대량실업으로 인한 피해는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칫 경제시스템 자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는 신자유주의의 화신처럼 행동하는 미국조차도 정작 자국의 경제위기 때에는 막대한 규모의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부실구제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5) 더욱이 기업의 도산은 은행의 부실을 심화시킨다. 은행에 대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여 은행의 파산을 막는다고 하더라도 그 은행은 이후 기업에 대한 대출과 회사채 인수 등을 꺼리게 되어 사실상 자금공급기능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렵게 된다. 결국 상대적으로 건전한 다른 기업들까지 자금압박을 받아 도산하게 되고 이것이 다시 은행의 부실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상 한국에서도 이와 흡사한 상황이 공적자금 투입 은행들에 대한 정부의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로 인해 야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네 번째로 지적된 ‘정부규제로 인한 투자활동 제약’은 결국 출자총액제한 폐지를 비롯한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정부는 10월 4일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의 기자간담회를 통해 대규모 기업집단 계열사의 출자총액이 순자산의 25%를 넘을 수 없도록 한 출자제한을 폐지함으로써 재벌의 신규투자에 대한 제한을 무제한으로 허용하였다.



3. 경기침체의 진정한 원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실패

앞서 살펴본 경기침체의 원인에 대한 자본의 주장은 한국 경제의 현재 상황에 대한 부분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황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추진한 구조조정 정책 자체에 이미 위기의 싹이 내재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공황과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은 IMF를 내세운 초국적 화폐자본가들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일단 공황 직후에는 IMF가 요구한 고금리와 긴축정책을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금융기관과 기업의 대거 퇴출과 함께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대규모 정리해고에 대한 노동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후 금융, 기업, 공공, 노동의 네 부문에서 추진한 이른바 ‘4대 개혁’을 통해 노동의 일방적인 희생을 바탕으로 한 자본 합리화와 새로운 축적 체제로의 재편을 시도해 왔다.

그러나 4년에 가까운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공황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의 해소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국형 독점자본인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은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대우, 현대 등 일부 재벌의 경우 실질적인 해체와 축소를 겪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재벌은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의 수혜를 받아 부실계열사를 털어버리고, 주력업종을 강화할 수 있었다.6) 더욱이 최근의 경기침체를 빌미로 한 출자총액제 폐지 등으로 인해 한국 자본주의의 재벌 집중 현상과 무분별한 과잉축적은 더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한국과 같이 수출 의존적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반도체, 자동차 등 주요 수출상품의 생산능력이 전세계적으로 과포화상태인 상황은 일국적 규모의 구조조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엄청난 규모로 증가된 생산력의 파괴는 그 영향 또한 심대하여 자칫 경제시스템 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국가는 공황기마다 신용을 확대하고 파산상태에 있는 일부 자본을 구제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생존하는 기업의 수는 늘어나지만 과잉생산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이른바 자본가의 “동물적 충동”이 지시하는 투자의욕 또한 회복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97년 말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그대로 따라온 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또한 현재의 투자부진과 경기침체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라는 기치 아래 이전의 공황기마다 있었던 대규모 기업구제는 사라졌지만, 한꺼번에 축적체제를 변화시키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일면 신자유주의적이면서도 일면 이전 방식을 유지하는 어정쩡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구조조정의 핵심정책으로 추진된 노동에 대한 공격은 빈부격차의 확대와 함께 노동자계급 전반의 소비능력 저하를 낳았다. 이에 더하여 잘못된 금융정책으로 인한 신용경색이 계속되고 있다. IMF와의 밀약에 의해 강요당한 고이자율 정책 이후에도 은행건전화란 명목으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는 간접금융(은행 등의 금융기관을 통한 대출)을 사실상 고사시켰으며, 기업의 주요 자금조달 원천이 된 회사채 또한 정부가 신속인수제도와 신용보증 확대 등의 편법을 동원하여 자금을 유통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당연하게도 150조 규모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과 기업의 부실이 여전히 남아있으며, 회수되지 못한 공적자금은 결국 2~3년 안에 인플레이션이나 세금 등의 형태로 국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4. 대책은 있는가?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여 일부 정신나간 친자본 이데올로그들은 여전히 더욱 철저한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을뿐더러, 대규모의 기업퇴출은 결국 대량해고를 동반하는 노동에 대한 전면공격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공황으로 인해 폭발한 자본주의의 계급적 모순을 더욱 전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전에도 그 결과를 차마 감당하기 어려워서 미적거렸던 정부가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이를 실행에 옮길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결국 현재 다시 한번 위기를 예감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이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없다고 볼 수 있다. 기껏 한다는 것이 재정지출의 제한적 확대, 이자율 인하, 연기금의 증시 투입 등의 대증요법인데, 이것들은 사실상 그 효과가 극히 불확실할 뿐 아니라, 연기금의 증시 투입은 차후 주식시장이 붕괴될 경우 엄청난 파탄을 가져올 수도 있다.


이자율 인하 정책의 한계

이자율 인하는 흔히 경기부양을 위한 정책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미국 경제의 침체가 가시화된 지난해 말부터 미국 연방준비이사회(FRB)가 그야말로 ‘미친 듯이’ 금리를 인하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실물경제에는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단지 주식시장의 파멸적 붕괴만을 근근히 막고 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자율 인하의 효과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하에서 이자율이 그때그때 정부정책에 따라 규제되기 때문에, 마치 이자율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도 정부가 이자율에 개입할 수 있는 수준은 ‘단기 이자율을 단기에 걸쳐 규제하는 것’에 그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사실상 이자율은 대부가능화폐자본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따라서 이자율은 결코 경기변동을 조절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경기변동에 조응할 수밖에 없는 종속변수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예컨대 현재와 같은 공황 이후의 침체기에는 신규투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화폐자본이 풍부하여 이자율의 수준이 무척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97년 말 공황 이후 상당 기간 동안 고이자율이 유지되었던 것은 공황을 더욱 심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몫을 확실히 챙기고자 했던 초국적 화폐자본의 요구를 한국정부가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후 이자율이 계속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투자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이 과정에서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 등 잘못된 금융정책이 문제를 더 심화시킨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정부개입이 없는 상태라면 이자율은 주기적인 경기변동에 따라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즉 공황 이후의 침체기에 낮은 이자율이 지속되다가, 산업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이자율은 차츰 올라가게 된다. 호황일 때 이자율은 계속 높아지지만 높은 이윤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본가들의 기대 때문에 화폐자본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그러나 차츰 과잉생산의 결과가 드러나면서 경기가 붕괴하게 되고, 차입금을 갚지 못하는 기업이 생기게 됨에 따라 신용경색과 이에 뒤이은 연쇄반응이 일어나 결국 금융공황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 때 이자율은 최고조에 달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많은 자본들이 충분히 파산, 감가됨으로써 과잉생산능력이 해소되고 나면―이것이 바로 친자본 이데올로그들이 앵무새처럼 되뇌이고 있는 철저한 구조조정이다―다시 새로운 축적의 순환을 시작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정부가 공황의 조짐이 보일 때마다 대규모의 금융개입을 수행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마치 공황이 아니라 일시적인 경기침체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97년 말처럼 공황이 실제로 발발했을 때에도 고전적 형태의 공황처럼 격렬한 자본의 파괴를 그대로 감당하기는 힘들다는 것은 앞서 반복해서 지적한 바와 같다.

어쨌거나 <표 4>에서 보듯이, 한국 정부는 2001년 들어 네 차례에 걸쳐 이자율을 인하하였다. 그러나 통화정책을 담당하는 한국은행이 매달 발표하는 「통화정책방향」에서 2001년 내내 기업자금 조달여건이 계속 개선되는 추세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7), 이자율 인하는 투자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표 4> 2001년 콜금리 인하 추이 (%)

시기

이전 → 이후

인하폭(%p)

2월 8일

5.25 → 5.00

0.25

7월 5일

5.00 → 4.75

0.25

8월 9일

4.75 → 4.50

0.25

9월19일

4.50 → 4.00

0.50

자료: 한국은행.


한편 이자율이 계속 인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물경제의 침체가 계속되자 일부에서는 한국경제가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유동성 함정’이란, 이자율이 더 낮아질 수 없다고 생각되는 최저수준에 도달함에 따라 모든 사람이 이자율이 곧 다시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고 채권 등 이자 낳는 금융자산을 모두 팔고 현금만을 보유하게 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통화공급을 아무리 확대하더라도 경제주체는 현금만을 보유하고자 하며, 금리를 더 낮출 수도 없어 실물경제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에 대해 한국은행은, 현재 금리수준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중개가 여전히 활발히 이루어지는 가운데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채권 등 금융상품으로 자금이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금융상황은 근본적으로 유동성 함정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8) 그런데 한국은행의 주장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유휴화폐자본이 이윤을 찾아 좌충우돌하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따라서 ‘유동성 함정’을 둘러싼 논란이 의미하는 것은 정부가 이자율 하락을 통해 시도한 경기부양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이며, 또한 그만큼 현재와 같이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이 발현되는 구조적 침체기에는 정부의 개입이라는 것이 지극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결국 이자율 인하는 투자부진을 제어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단지 일시적으로 주식, 채권시장 등을 부양시킬 수 있을 뿐이다.9)


정부와 자본의 선택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철저한 구조조정을 외치는 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동안 축적된 과잉생산능력을 완전히 털어내고 살아남은 자들만이 다시 축적의 순환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대량해고와 임금삭감, 노동강도의 강화 등은 저들의 눈에 당연히 지불해야 할, 그리고 자신들은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부차적인 문제로 비칠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정부와 한국 자본주의는 ‘철저한 구조조정’을 전면적으로 시행하기에는 너무 허약하다. 따라서 저들의 선전은 사실상 이데올로기 공세에 그칠 공산이 크며, 오히려 노동에 대한 공격으로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가 이제까지 추진해온 구조조정의 최종단계라고 말해지는 ‘상시적 구조개혁시스템’에는 1, 2차 구조조정을 통해 달성하지 못한 공기업 및 공적자금투입은행의 민영화와 근로자파견제의 완전정착, 노동시간 단축과 일상적 해고-비정규직화를 연동하는 노동법 개악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히 위기심화와 구조조정의 반복을 아예 그 자체로 구조화하면서, 동시에 이에 수반되는 비용과 부담은 전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 전가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10)



5. 전망에 대신하여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인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현재의 경기침체가 지금까지 서술한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인만큼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어느 정도 명확하다. 또한 세계자본주의의 마지막 보루였던 미국의 경기침체로 말미암아 세계대공황의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때맞춰 터진 테러를 빌미삼아 경기침체를 전쟁으로 돌파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정책이 어떤 식으로 귀결될지가 한국경제의 이후 진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한국의 독점자본과 김대중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세계경제가 더욱 악화일로로 치달을 경우, 저들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노동자계급을 아비규환의 전쟁터―그것이 무한경쟁, 무한착취의 경제전쟁이든, 대공황에 대해 자본주의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처방인 군사전쟁이든―에 동원하려 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경쟁력 강화 논리와 맹목적 애국주의 등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갈수록 강화될 것이며, 이와 함께 세칭 ‘진보적’ 인사들의 반노동자적 본질 또한 갈수록 뚜렷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공세에 맞서 노동자계급이 생존권을 확보하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올바른 노동자적 입장으로 무장한 단일한 대오로 결집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2001.10.9) 

한/노/정/연


1) 재정경제부, ꡔ우리경제의 비전과 정책방향ꡕ, 2001.1.


2) 권순우 외, 「투자부진 현상 진단 및 평가」, 삼성경제연구소 연구보고서, 2001.8.


3) 1972년의 8․3 조치, 1980년대 중반의 산업합리화 조치 등이 대표적이다.


4) 이와 같은 시스템은 기업구조조정 전문 투자회사인 CRV, CRC 등의 설립과 M&A 시장 활성화 및 정크본드(투기등급채권) 시장 육성, 연기금의 주식투자 확대 등의 기반조성 계획을 포함하고 있으며, 기업 외부감시시스템 외에도 내부감시시스템의 명목으로 사외이사제 및 소액주주권을 강화․지원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이상훈, 「김대중정부의 상시개혁체제의 본질」, ꡔ사회진보연대ꡕ, 2001년 5월호, 정병기 외,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의 희망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창립 6주년 기념 심포지움 자료집, p.110에서 재인용).


5) 1980년대의 무분별한 과잉차입으로 초래된 1990년대 초의 위기 때, 미국 정부가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저금리정책을 시행하고 2천억달러의 공적자금 지출을 통한 저축대부조합 구제에 나섰던 것이 좋은 예이다.


6) 앞의 「보고서」에서 투자부진의 네 번째 요인과 관련한 설문조사를 보면, 한계기업 정리, 기업결합 및 분사 등을 통한 핵심부문 역량강화 조치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는데, 이것은 구조조정이 자본의 군살빼기와 집중의 강화에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7) 한국은행, 2001년 「월별 통화정책방향」 각호 참조.


8) 한국은행, 「대내외여건 악화에 대응한 통화정책 운용방향」, 2001.9.19.


9) 특히 미국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이자율 인하를 통해 경기부양을 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주식시장의 걷잡을 수 없는 폭락과 그에 뒤이은 공황의 폭발을 지연시키려는 의도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10) 정병기 외, 앞의 글.


2001-10-1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1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