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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총선의 결과를 보고

현장에서 미래를  제7호
한정숙

국 ◦ 제 ◦ 노 ◦ 동

환멸과 복고적 향수(鄕愁)의 정치적 표현
-러시아 총선의 결과를 보고-


한 정 숙 (연구위원, 세종대 교수, 역사학)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권의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이 각종 선거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둠에 따라 이 지역의 정치상황에 또다시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헝가리에서는 일찌감치 공산당 출신 정치인이 총리가 되었는가 하면 지난 해 11월 19일에 실시된 폴란드의 대통령선거에서는 공산체제에 맞서 투쟁한 자유노조(연대)의 지도자였다는 공로로 냉전종식 후 첫 비공산주의자 대통령이 되었던 레흐 바웬사가 옛 공산정권의 각료출신인 알렉산데르 크바스녜프스키(민주 좌파연맹 소속)에게 패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치러진 러시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하원의석 450석 가운데 157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 1당이 되었다. 현정부의 총리인 빅또르 체르노믜르진이 이끄는 <우리의 집 러시아>당이 제 2당으로서 고작 55개의 의석 밖에 확보치 못한 것을 볼 때 공산당의 승리가 얼마나 압도적인가를 알 수 있다. 그 외에는 극우 파시스트 정당이면서 의회에서 사안별로 공산당에 동조할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자유민주당(당수: 지리노프스키)과 역시 공산당에 동조하리라 예상되는 농업당, 그리고 경제개혁과 친서방대외정책을 지지하는 야블로꼬(야블린스키 블록) 및 군소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하였고 상당수의 무소속의원들도 선출되었다.
폴란드의 대통령선거 결과만 하더라도 비교적 태연히 보도하던 서방의 언론들은 러시아의 총선결과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만한 일이다”라는 등 극도의 경계심을 표하며 수선스럽게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태는 이미 충분히 예견되어 왔던 일이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옐찐 정권이 1992년 이후 지금까지 취해온 대내외 정책에 대한 러시아 유권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표출된 결과인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좌절과 옐찐의 집권과정

잘 알려진 대로 보리스 옐찐 러시아 대통령은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의 추진과정에서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얻어 모스크바시 공산당 책임자로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있어 고르바초프와의 불화 때문에 이 직책에서 밀려난 후 그와의 대결 속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이다. 옐찐과 고르바초프의 대결은 구 소련체제의 몰락을 가속화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의 목표는 사회주의의 개혁, 곧 ‘인간적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실현에 있었다. 당시 현실 사회주의 하에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한 것은 경직적 관료주의와 이로 인한 경제적, 기술적 정체(停滯)였다. 7,80년대에 구미의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른바 과학기술혁명을 통해 전자, 정보산업부문에서 현저한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냉전시대 동서방 사이의 체제대결 상황에서 사회주의권이 군사적 기술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빠질 우려가 컸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적으로 군비증강에만 전력을 기울인다면 일반국민의 생활수준에 타격이 가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관료주의 타파와 군비축소라는 양 날을 써서 경제적․기술적 수준향상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적극 추진했던 글라스노스찌도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창의성을 보장하는 자유롭고 활발한 지적 분위기를 형성한다면 경제적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시작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군사적 대결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민의 생활수준향상을 통해 사회주의의 우위를 입증하고자 한 마지막 사회주의 통치자였다.
이에 반해 옐찐은 공산당 당료출신이면서 개혁파로 나섰던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으나 고르바초프와의 대결과정에서 그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애썼다. 이 과정에서 점차 부각되었던 옐찐의 특징이 포퓰리스트적 성향과 반(反)사회주의적, 친미 자본주의적 노선이었다. 옐찐은 뚜렷한 이념적 지향성을 가진 인물은 아니되, 강한 권력본능과 대담무쌍하고 돌파력있는 성격 덕에 정치적으로 성장한 인물로서, 고르바초프의 권력기반을 흔들기 위해 공산당으로부터 탈당하고 당시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각 공화국들의 분리주의적 경향을 고무 격려하는 등 당시 소련의 근본체제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른바 개혁파 세력의 분열과 경제적 난조로 일찌감치 좌절돼 버렸지만, 소련의 최종적 해체는 경제적 문제보다는 오히려 각 공화국들의 원심분리적 경향의 강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곧 이 문제에 대한 고르바초프 정권의 무기력한 대응이 무력으로라도 “강력한 소련”을 유지하려는 수구파 군부의 쿠데타 시도(1991. 8.19.-21.)를 초래하였고 이에 맞서 놀랄만한 용기로써 대항하였던 옐찐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는 쿠데타 격퇴 후 자신의 인기가 절정에 있던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의 정치지도자들과의 합의로 소련의 해체를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이것은 이것대로 옐찐에 의한 쿠데타라 이름해도 지나치지 않을 사태였다. 다시 말해 1991년 여름, 당시만 하더라도 소련 내 일개 공화국에 불과한 러시아연방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던 옐찐이, 군부쿠데타 좌절 이후 다시 권좌에 복귀한 고르바초프를 무력화시키고 스스로 러시아의 명실상부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불안한 정정을 틈타 감행한 것이 곧 소련의 해체였던 것이다.
이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움직임이 큰 변수로 작용하였음에 반해 노동운동의 정치적 영향은 그리 큰 편은 아니었다. 소련체제 하에서 노동조합은 기능적 측면에서의 노동자교육, 노동자들의 복지후생 문제를 돌보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은 하였으되 정치적으로는 당의 의사를 아래로 전달하는 전달벨트 이상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좀더 눈에 띠게 되었으나 이 때에도 이념적, 정치운동적 성격이 표출되기 보다는 임금체불에 항거하는 노동자(특히 광원들)들의 파업과 같은 형태의 노동운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소련체제 하에서뿐 아니라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도 소련의 노조활동 및 노동운동에는 뚜렷한 방향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1980년대 초부터 자유노조운동이 활발하였던 폴란드의 경우와 대조를 이루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상황

소련의 해체 후 그 후계국가가 된 러시아연방은 친서방적 부르조아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 하의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계획경제체제로부터 시장경제로의 급격한 전환을 실험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친미, 친서방노선을 취해왔다. 사상, 언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거주이전의 자유, 여행의 자유도 (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허용되었다. 이 가운데 이번 총선에서 시험대에 오른 것은 무엇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 그리고 대외정책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옐찐의 후견 아래 경제정책을 담당한 것은 가이다르 전 총리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시장경제 신봉자들이었다. 경험부족과 경솔함, 객관적 여건의 제약 그 어떤 것이 원인이 되었건 간에 이들의 정책은 시행착오를 낳고, 그 결과 광범한 대중의 불만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외교정책을 주도한 것은 역시 젊은 나이의 서방통 안드례이 코지례프 외무장관이었는데 그 또한 많은 러시아인들에게는 지나치게 친서방적이라는 이유로 불만의 대상이었다.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문제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공업생산성의 하락 내지 정체, 농업생산의 침체 등등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같은 문제점들은 단적으로 말하면 계획경제를 국영기업으로 전환시키고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는 정책이 지나치게 즉흥적으로 실시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은 페레스트로이카 말기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1992년 초 가이다르 전 총리에 의한 가격자유화조치가 실시된 이래부터는 그 정도가 엄청난 것이 돼버려 일반봉급생활자나 연금생활자들은 극심한 물가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정부는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면서 일종의 국민주라고 할 수 있는 바우처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는데 엄청난 인플레이션 때문에 바우처의 가치도 폭락해버려 국민주로서의 의미는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그런 한편 국내 소비재생산은 침체를 면치 못해 도시주민들의 대다수는 일상소비재를 외국으로부터의 수입품으로 충당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공급부족의 상황에서 국내공업을 육성하는 정책을 쓰지 않고 외국상품시장을 지나치고 급격하게 개방한 데서 초래된 문제라고 생각된다. 소비재수입을 위한 외환은 철강, 금속, 석유 및 석유화학제품의 수출로 충당하고 있는데 이같은 수출입구조 때문에 경화(硬貨)에 대한 루블화의 환율문제가 대단히 중대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1995년에는 공업생산성의 하락이 멈추고 향상곡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되고 있고 또한 주택건설분야와 같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분야가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경제회복을 확신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공업생산성 하락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가 농업의 부진 및 이로 인한 식량부족 사태이다. 물론 소련체제 하에서도 농업은 아킬레스건으로 취급되어 왔고 많은 농산물이 수입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나 종전에는 생산량 자체의 낮은 수준보다는 오히려 분배과정의 비효율성으로 인한 낭비가 더 큰 문제로 지적돼 왔었다. 그러나 체제전환 이후에는 생산량 자체의 감소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부터 집단농장체제에서 개인농체제 혹은 명실상부한 협동조합적 생산 및 판매체제로의 전환이 적극 권장되었으나 농업생산성 증대와 관련해서는 이 대안도 실질적 효과를 가지지 못하였다. 법률적 지원, 기술, 도구 등의 여건이 매우 불리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에서 획기적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는 한 현재로서는 러시아농업이 침체로부터 탈출할 전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문자 그대로 식량난이 닥칠 가능성조차 있는 것이다.
경제정책이 초래한 심각한 사회적 결과로는 빈부격차의 급격한 심화, 실업자의 증가, 범죄의 급증을 들 수 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최대의 수혜자로 부상한 것은 기업불하 정보에 밝은 구 특권층(공산당당료, 관료, 정보기관 종사자, 기업책임자 등)으로 이들은 거의 공짜로 국영기업을 인수하여 순식간에 백만장자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정세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젊은 층에서도 외국과의 합작을 비롯한 크고 작은 사기업을 일으켜 자본가대열에 뛰어오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목격되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신(新)러시아인”이라 불리는 신흥부유층을 이루면서 절제없는 소비생활로 부를 과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고정된 수입으로 살아가는 봉급생활자들(특히 지식인들)과 연금생활자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최대의 피해자가 되면서 대부분의 경우 빈곤층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들의 어려움은 임금, 연금수준이 인플레이션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 아래서 무료로 주어지던 의료 및 교육의 비용이 크게 뛰어올랐다는 점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학비를 내지 못해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이제 거의 통제불능에 가까워졌다는 우려마저 낳고 있는 조직범죄의 창궐과 경찰, 관리들의 부정부패 등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범죄없는 사회에서 살던 주민들을 심한 불안에 빠지게 하고 있어서 이같은 식의 체제전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소박한 의문이 러시아 현실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들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러시아인들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있는 또 한 가지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 추락이다. 이와 관련된 불만은 이미 페레스트로이카 후반부터 들리기 시작한 것으로, 특히 독일의 통일과 관련해서 당시 많은 소련인들은 고르바초프가 서방에 지나치게 많은 양보를 하였다고 비난해 마지 않았다. 옐찐 정권 아래서 코지례프 외무장관이 추진한 정책은 대외강경파들로부터 더욱 심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나토의 기구를 동유럽의 바르샤뱌조약 국가들에까지 확대하겠다는 논의가 오가고 동유럽국가의 정부들이 이에 동조하는 반응을 보인 것은 나토가 이제 완충지대도 없이 직접 러시아를 겨냥해서 군사적 대결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으면서 러시아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러시아 인이라면 이념적,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거의 모든 사람이 일치된 반대의 목소리를 내 왔다.
또 다른 문제로 등장했던 것은 보스니아 내전에서 미국과 서유럽국가들이 러시아측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무시했다는 데 대한 러시아인들의 반발이었다. 러시아인들은 보스니아 내전에서 그들과 같은 정교(正敎)를 신봉하는 세르비아인들을 지지해 왔었는데 서방측은 세르비아인들을 범죄자로 몰고 회교도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하면서 러시아측의 동의없이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에 폭격을 가하는 등 러시아의 발언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정책을 써 왔다. 이러한 사실이 러시아 언론에 보도되면서 러시아에는 옐찐 정권의 외교노선을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고르바초프와 옐찐이 서방에 구걸외교를 다닌다는 이유로 크게 자존심을 상해 하던 러시아 인들 중에는 이제 외교노선을 더 이상 방치할 없다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러시아가 겪고 있는 경제난은 구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들이 떨어져나가 사회주의적 분업구조가 파괴된 데서 비롯된 것이니 구 소련을 다시 회복해야 된다는 의견들도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을 염원하는 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반면 체첸인들의 독립운동을 군사력으로 짓밟으려는 옐찐정권의 시도는 ‘강한 러시아’를 신봉하는 인물들 사이에서조차 반발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옐찐 정권의 인기를 하락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는 러시아인들에게 인명의 살상과 엄청난 전비의 투입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페레스트로이카가 허용한 정치적, 지적 자유에 열광하며 체제의 전환을 지지했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현재와 같은 식의 개혁정책에 대한 깊은 회의적 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전통적 지식인들은 개혁정책으로 인한 최대의 물질적 피해자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여기에 누적되어가는 연금생활자들의 불만, 7%에 달하는 실업률 등을 감안할 때 현 정부의 정책이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개혁정책의 결과로 발생한 문제점들 중에는 단순히 과도기적인 것으로만 보아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구조적인 것들도 있어서, 러시아가 기존의 사회경제 정책을 계속한다면 자본주의화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불안정한 남미형 자본주의로 귀착되고 말 것이라고 전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많은 러시아인들에게는 그리 유쾌하기만 한 전망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선거

체제 전환이래 옐찐대통령과 의회의 관계는 별로 순탄치 못했다. 특정 정당에 소속돼 있지 않은 옐찐은 의회 내 원내세력의 지지에 입각하지 않고 행정부 각료들과 자신의 개인적 측근들을 중심으로 정책결정을 내려왔다. 바로 옐찐 자신의 충동적 성격도 의회와 행정부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원인의 한 가지로 들 수 있다. 1991년 여름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선출되었던 첫 러시아연방의회는 구 특권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정국 주도권을 둘러싸고 옐찐측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다가 결국 1993년 10월 초에 의사당 건물 및 방송국 건물에서의 유혈참극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는 엘찐이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내세운 <러시아의 선택>(당시 경제개혁의 총책임자이던 총리 가이다르가 당수임)당이 부진을 면치 못한 반면, 동구를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두겠다고 공언하며 영토팽창정책을 공공연히 내세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자민당이 정당별 투표에서 2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이며 제 1당으로 부상,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자민당의 원내 제1당 진출은 엘찐 정부의 정책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지리노프스키는 의회 안팎에서 각종 추태를 연출, 그렇지 않아도 신망이 높지 못한 러시아 의회의 성가를 실추시키는 데 한 몫한, 비정상적인 인물이다. 이같은 인물이 199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8%의 득표율을 과시하는가 하면 의회에도 그같이 성공적으로 진출하였던 것은 유권자들의 일종의 항의성 투표의 결과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는 지리노프스키 파의 세는 이미 크게 줄어들고 있다.
제대로 된 정강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선동적이고 심지어 희극적이기까지한 자민당에 비해 공산당은 일단 훨씬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승리한 공산당은 엄밀히 말하면 각 공화국 자치 강화의 물결 속에서 1990년에 창설되었던 러시아연방공화국 공산당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1991년 8월의 정변이 실패한 후 해산당했던 소련공산당의 기간조직을 대부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92년 공산당의 활동이 다시 합법화된 이래 아주 빠른 시일 동안 그 세력을 크게 확장시키는 것이 가능하였다. 여기에는 모스크바나 뻬쪠르부르그 등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구 소련체제 하에서의 각종 기관, 조직들이 (이름만 바꾼 채)거의 그대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정에도 크게 힘입었다. 나아가 지방 유권자들의 의식 속에서는 소련은 아직도 해체되지 않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공산당은 개혁정책으로 야기된 많은 모순들을 지적함으로써 연금생활자들이나 실업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층의 지지를 얻고 있다. 이들은 검소하나마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구 체제에 대한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 강화를 바라는 대외강경파와 구 소련의 회복을 바라는 수구파들도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러시아 공산당은 노동해방의 이념적 기치와는 별로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이 정글식 자본주의의 모순에 항거하는 세력들을 결집시킬 정도의 역량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구 소련체제 하에서 공산당은 천만이 넘는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던 조직이므로, 그 가운데 일부만 잔류하더라도 그 세는 대부분 최근 몇 년 사이에 창당된 다른 정당들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이 현재까지 진행된 시장경제화를 완전히 무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의회의 장악만 가지고는 실질적인 정책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의회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일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어 왔기 때문이다. 다만 대외정책에서는 여러 사안에서 러시아의 태도가 좀더 강경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오히려 이번 여름에 있을 대통령선거의 결과이다. 공산당 당수인 겐나지 주가노프는 총선에서의 승리를 이끌어낸 주역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당선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끈질긴 조직가이긴 하되 정치가로서의 흡인력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체제전환이 준비없이 졸속하게 실시됨으로써 빚어진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면서도 공산정권의 회복은 결코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옐찐의 체첸침공 결정에 항의해 군복을 벗음으로써 일약 전국민적 관심을 모으는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된 알렉산드르 레베지가 훨씬 유력한 대통령후보로 손꼽히고 있다. 옐찐은 신통치 않은 건강 때문에 대통령으로 재출마할 지 확실치 않으나 그가 재출마하더라도 레베지가 승산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지식인들 중에도 공산당의 재집권은 상상할 수 없지만 레베지의 집권은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레베지의 정치적 신조는 그리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만약 그가 집권하게 된다면 온건한 개발독재 스타일의 정치체제가 수립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정당활동 및 언론자유의 일정한 제약, 범죄의 경감, 대외강경노선 등이 따를 것이고 군부의 영향력이 상당히 강화될 것이다.
최근의 체첸반군에 의한 인질극 사태와 이에 대한 옐찐정권의 초강경 군사적 대응에서도 알 수 있듯 러시아의 대내외적 상황에는 수많은 폭발적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회적, 민족적, 외교적 갈등을 정당정치와 평화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지 못할 때 ‘강한 손’ 곧 군부에 의한 문제해결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한/노/정/연

1996-01-20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