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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대중문화

현장에서 미래를  제73호
김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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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락 건/편집부장


특집: 자본주의와 문화
자본주의와 대중문화



들어가며
지금 우리는 가히 문화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앞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문화라는 것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way to live)으로서, 즉 라이프 스타일(life-style)로서 정의한다면, 그것은 당대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차이에 따라, 그리고 각각이 속한 계층 혹은 계급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어느 정도 비슷한 지역적 공간에 살고 있는, 그리고 비슷한 소득수준을 점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 즉 라이프 스타일은 다양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라는 것을 문화물 또는 문화 ‘상품’(commodity)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진정 난립하는 문화물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문화 상품으로서의 문화를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대중문화라고 흔히 부르기도 한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음반들, 매주 새롭게 개봉하는 영화들, 그리고 사이버 공간에서 혼란스럽게 벌어지는 여러 이벤트들. 매일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이러한 문화 상품들을 모두 소비하고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내리기 어렵다. 사실 아무도 그러한 것에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으며 단지 자신의 입맛에 따라 약간의 문화 상품들을 적당히 소비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잠시 상황을 정리해보자. 문화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i) 라이프 스타일로서의 문화
(ii) 문화 상품 혹은 문화물, 나아가 대중문화
(iii)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행태로서의 문화

우선 (i)과 (ii)에 대해서는 앞에서 잠깐 언급했었다. 위의 그림에서 (iii)은 (ii) 문화 상품 혹은 문화물을 소비하는 방식, 다시 말해 소위 문화생활의 측면에서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근대로 이행하면서, 아니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비로소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된 대중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에 대해 살펴보겠다. 그리고 나서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관계,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일상생활의 변형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대중문화의 확장
앞에서도 잠깐 말했던 바와 같이, 봉건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비로소 대중문화라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사실 봉건사회에서의 대중문화라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 아니 개인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귀족이나 승려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일단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특정 지역에 구속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사람들은 봉건 영주를 위한 부역 혹은 공납,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의 삶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라는 것은 기껏해야 선술집에서의 유흥이나 한 달에 몇 번 정도 있었음직한 장터에서의 교류 정도였을 것이다.
그랬던 것이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즉 농노가 장원에서 해방되어 도시의 자유로운 노동자로 변신함에 따라 비로소 도시의 문화, 즉 도시 노동자들의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제서야 이들 도시 노동자들의 문화에 대비되어 상류계층의 문화가 고급문화로 규정되었을 것이고 노동자들의 문화는 저급의, 부정적인 의미의 대중문화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부정적이고 저급한 것을 취급받던 대중문화가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은 바로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이 대중들이 자신들의 삶을 재생산하기 위해 노동해야 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줄임으로 해서 그들이 문화생활을 할 여지를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봉건귀족들의 상층문화 중 일부가 대중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대중문화화하기도 하였고, 대중문화는 나름대로의 동력을 갖고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다양한 직종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중에서 문화물만을 생산하는 직종들도 대거 등장함으로써 대중문화는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었다. 영화처럼 발전한 기술을 밑바탕으로 해서 생겨날 수 있는 문화물이 있는가 하면, 도시라는 공간이 제공해주는 다양한 문화 상품 생산의 장 역시 존재할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신분적으로 속박당해야 했던 봉건사회에 비해,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문화, 대중의 문화가 급격히 발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들어서서 문화라는 것은 이전의 어느 시기보다도 짧은 기간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대중문화 비판?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서면서 발전하게 된 대중문화라는 것이 진정 각 개인들의 삶에 기반하여 생성된 것, 그리고 대중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그 어떤 것이라고 말하기는 분명 어려울 듯 싶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문화라는 것, 대중들이 향유하는 문화상품이란 것은 반드시 대중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자신의 노동으로 자신의 생활을 재생산하고 여가시간에는 보다 창조적인 노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대중문화의 생산자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 또 그것을 통해 대중문화라는 것이 그것을 소비하는 개인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문화상품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기제로 작동하고 있느냐를 말하느냐일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문화라는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는데, 그들은 대중문화의 양식이라는 것을, 대중들로 하여금 생산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그리고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매스 미디어를 통한 대중문화에 주목한 사람들은, 매스 미디어가 제공하는 대중문화라는 것은 대중들을 광고주에게 팔아먹기 위한 것 정도로 여기고 있기도 하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대중문화의 내용을 분석하는 사람들은 대중문화라는 것을 주변부 국가의 대중들에게 제국주의적인―자본주의적인―심성을 체득하게 하는 수단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대중문화에 대한 판단들은 이렇게 다양하게 존재한다. 물론 위의 세 가지 관점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은 가지고 있다. 단지 문제는 대중문화를,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의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러한 측면도 있고 동시에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TV나 영화를 보다 보면 물론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과거 60~80년대 한국 사회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한쪽으로 치우쳐있는 문화 상품들의 내용들에 익숙할 것이다.
어쨌건간에 생산 주체의 의도성만으로는 탐탁치 않은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다면 이제는 문화 상품의 생산규모, 혹은 그 시장의 크기란 것으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에서는 80년대 후반부터 그러한 시장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제 문화 상품의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 듯 하다. 하여간 많이 팔리는 것이 장땡인 시기가 와버린 것이다.
문화 상품들이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문화 상품의 생산자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문화 상품을 생산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ꡔ시뮬라시옹ꡕ에서 보여준 분석같은 것도 꽤 많은 부분들을 설명해주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용과 의도에 대한 질문은 그만 해도 될 것 같다. 문화 상품들이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계속 하기보다는 팔릴만한 문화 상품들만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편이 지금 훨씬 유용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문화 상품들이 생산되는가?
TV를 켜면 뉴스 시간대와 그를 전후한 드라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들을 겨냥한 쇼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예전부터 있었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교양프로그램의 탈을 쓴 쇼프로그램, 토크쇼를 빙자한 쇼프로그램뿐이다. 나오는 사람들은 역시 대상과 비슷한 연령대의 가수, 탤런트 등 연예인들이다. 방송국 제작의 프로그램들 사이사이에 나오는 상업광고들 역시 마찬가지다. 레코드샵에 가면 10대 아이돌 가수들의 음반들이 중심으로 진열되어 있으며 편의점 서적판매대에 꽂혀있는 잡지들은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자들을 위한 패션잡지 일색이다. 거기에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종로, 명동, 신촌, 대학로, 강남역, 홍대 앞에 가보면 온통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상점들만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대부분이 청소년인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은 분명할텐데 왜 대부분의 문화 상품들은 청소년들만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하긴 여기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게 해야 잘 팔리니까. 만약 내가 문화 상품의 생산자라면 어떠한 내용과 형식의 문화 상품을 만들 것인가? 물론 잘 팔리는 것. 90년대 이후―80년대 후반 이후라고 할 수도 있겠다―문화 상품의 시장이 크게 확장된 이후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과 의도라는 것은 사실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어쨌든 잘 팔리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웬만큼 뜨지 않으면 금새 잊혀지는 대중문화판에서 어떤 내용을 담느냐가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잘 만들고 그렇지 않고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앞에서 언급한 바 어떤 지향 혹은 의도를 갖는 내용이냐는 것이다.
잘 팔리는 문화 상품이라면 어떤 것인가? 다른 방식으로 질문해보자. 도대체 문화 상품이란 것을 주로 소비하는 집단은 어느 집단인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청소년들이 바로 그들이다. 아직 스스로의 생활을 재생산하기 위한 노동이라는 굴레에 얽매여 있지 않은 동시에 가장 여유시간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자 대중을 향해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살만한 세상이다”라는 식의 내용을 담은 문화 상품들을 생산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화끈하게 살다 가버리자”도 좋고 “노세 노세 젊어 놀아”도 좋다. 어쨌든 번지르르한 포장으로 싸서 한 몫 남기고 팔아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모든 문화 자본―부르디외(P. Bourdieu)가 말한 문화 자본의 개념이 아니다. 문화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을 말한다―들이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면 나름대로 틈새시장을 노려봄직도 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저씨들이나 아줌마들이 G.O.D나 H.O.T같은 가수의 노래를 즐겨들을리 만무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모든 연령계층의 문화 상품 소비수준이 동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비중은 다음을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년 내내 수많은 아이돌 가수들이 등장하고 수없이 많은 노래들이 길거리 리어카에서 흘러나오지만 그에 비해 아저씨들이나 아줌마들의 문화 향유 욕구는 연말에 나훈아나 조용필 디너쇼 두서너번 정도, 그리고 마당놀이나 신파극 몇 건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 사회의 대중문화라는 것이 극히 기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 상품들이 등장해야 한다던가 지금의 문화 상품의 수준은 지극히 저급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급이든 저급이든 대중들이 향유하는―그리고 대중들이 스스로 만들어내든 말든―대중문화라는 것이 청소년들만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허위의식의 문제로
대중문화의 기형적인 발전이라는 문제와 더불어 여전히 문화 상품 소비주체들의 의식 차원의 문제는 남아있는 것 같다. 앞서 문화 상품의 내용은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문화 상품들, 그리고 자본의 이윤추구논리에 따라 짜여지는 대중문화판이라는 것이 청소년들의 의식 형성에 주고 있는 영향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한국 사회 청소년들이 머리 속에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의식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문화 상품의 내용이라던가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듯이 사기치고 있는 TV 프로그램이 곧바로 청소년들에게 원하는 바의(!) 효과를 발현시키는 지 역시 확실하지 않다. 또한 한국 사회 청소년들의 의식상태가 이러저러하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 대중문화의 영향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단지 많은 문화 상품들이 청소년들의 의식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건간에 단언하건대, 지금 한국 사회의 청소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돈”이다. 필자는 그것을 몇 차례의 통신공간에서의 경험을 통해 감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데, 주로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 저학년들이 밀집해 있는 속칭 커뮤니티에서의 앙케이트 조사를 통해서였다. ‘장래 희망’이라던가 ‘소원’을 묻는 질문에서는 백이면 백 어김없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던가 “부자가 되는 것”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하긴 예전의 젊은이들도 역시 돈을 많이 벌거나 혹은 출세하거나―그것도 역시 돈과 관련되겠지만―할 수 있는 직업들을 장래 희망으로 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학교 교육의 형식화와 계급 구획의 명확화, 거기에다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 재편으로 인한 실업자 및 비정규직의 증가 등으로 인하여 한국 사회의 청소년들에게 더 이상 미래의 꿈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는지도 모른다. 물론 약간 좋은 시절에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거짓말일테지만 말이다. 어떻게 보면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라고 속이는 것, 그만큼보다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화 상품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마치며: 일상생활의 자본주의적 변형
지금까지 대중문화의 등장과 대중문화 비판에 대해, 그리고 청소년 대상 일색인 한국의 대중문화와 청소년들의 의식의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보았다. 자본은 항상 높은 이윤을 가져오는 투자처를 찾아 움직이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대중문화판은 그럭저럭 괜찮은 벌이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청소년들은 문화 상품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계층으로 자본은 당연히 이들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내용의 문화 상품들을 생산해내려 할 것이고 그 결과 대중문화의 기형적인 발전이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잠시 청소년들의 의식형성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일상생활의 변형이라는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이 점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것은 생활의 재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노동을 경감시키기보다는 노동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게 된다. 쉽사리 옛날보다는 살기 좋아졌다는 말을 할 것이 아니다. 발전한 기술이나 기계가 같은 시간에 노동자를 얼마나 더 쥐어짜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몰아냈는지를 생각해보자.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일상생활―여기서는 일하지 않은 여가시간을 주로 말한다―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 일상생활 역시 작업장 내에서의 시간들과 같이 엄격히 기획되며 나아가 점차 노동하는 시간과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 것 같다. 살고 있는 공간들은 자본의 회전이 용이하도록 엄격히 구획되며 금전관계가 개입되지 않은 인간관계라는 것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기도 힘들게 변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미 생활 자체가 자본주의적인 논리에 따라 움직여가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문화의 내용을 따지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 하는 생각에서 덧붙였으며, 자본주의적인 공간의 구획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노/정/연

2002-01-15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2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