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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처지가 부끄럽고 그가 부러웠다
 노동자가 쓰는 노동운동사3/

현장에서 미래를  제113호
정병모

연재/노동자가 쓰는 노동운동사3



내 처지가 부끄럽고 그가 부러웠다

정병모/ 조선소 노동자




9. 외할머님

갑자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하나 밖에 없는 딸을 가난한 집에 시집보내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사는 딸이 가여워 평생 애달파 했던 외할머니였다.
더구나 사십 문턱에서 남편을 잃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후, 안 해본 것 없이 험하게 살아온 내 어머님이 가여워 눈물 마를 날 없던 외할머님이셨다.
가난을 평생 안고 살았던 외할머니였지만 돈만 생기면 내 어머님 손에 쥐어 주시며 자식 잘되길 빌고 외손주들을 위해 쓰고, 정작 자신을 위해선 백 원 하나 쓰지도 않으셨다.
자신도 평생 한번 호강 못했으면서도 불행하게 살아온 내 어머님 걱정에, 못난 외손자들 걱정에 애달파 하셨던 외할머니였다.

형편피면 한번 모시고 옛말하며 웃으리라 했는데.
소식 듣자마자 눈물부터 쏟으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 태백에 갔다.
외할머니는 참 평안해보였다.
뼈만 앙상한 얼굴이, 쥐면 한줌도 안 될 허리춤이, 늘그막에 고부라진 허리로 부엌일하려 애쓰던 그 모습은 간데없고 평화로웠다.
세상의 모든 걱정을 도맡아하며 고생고생 하신 외할머닌 간데없고 인자한 모습으로 조용히 눈감고 계신 할머님을 보니 나조차 편안해졌다.
그리 고생만 하시더니 이제 편안하게 쉬시게 되었구나.
며칠을 머물며 외할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울산으로 돌아왔다.


‘속보’ 울산노동소식

며칠 만에 출근을 한 탓인지 외할머님의 장례를 치른 탓인지, 마음이 붕 뜬 상태에서 출근을 하는데 중공업 정문에서 낯선 사람들이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중공업 경비대는 당황한 탓인지 멀찍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젊은, 학생같이 보이는 사람과 청년들이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6월이 생각났다.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 버린 6월이, 어깨동무 힘차게 뛰어다니며 구호를 외치던 성남동이 생각났다.
쫓아가서 유인물을 뺏다시피 받았다.

‘속보’ 울산노동소식이란 제목의 유인물이었는데, 힘 있게 써내려간 내용은 이렇다.
좀 길지만 자료를 인용할까 한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기에 요즘과 다른 철자법이 눈에 띄었지만 고치고 않고 원문 그대로 적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현대엔진(주) 노동자, 노동조합 결성하다.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위대한 승리
7월 5일 일요일 오후3시 시내 주리원 백화점 옆 모처에서 100여명의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그동안 노사협의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이 자리에는 전국금속노동조합 연맹의 조직부장 이진우씨도 참석하여 격려해 주었으며, 금속노련의 인정도 받았다. -- 중략 --
시청 사회과에 당당히 노조설립 신고를 하였으며 임원을 중심으로 점심시간을 기해 식당에서 노동조합결성 보고대회를 가졌다.
이 보고대회는 노동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미처 들어오지 못한 노동자들은 창문에 매달려 환호를 보냈고, 권용목 위원장의 인사말이 끝난 후 임원 인사를 하려하자 이사(이기정)가 집회를 제지하였다.
그러자 노동자들이 “죽여라! 죽여라!” 소리를 질렀다.
이에 놀란 이사는 도망을 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 중략 --

뿔테안경 권용목

놀란 것은 도망 간 이사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갑자기 멱살 잡힌 것 같이 숨이 탁 막히며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그 조그만 뿔테 안경이, 너털웃음 좋던 순해 보이던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니 놀라웠다.
노동조합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현대그룹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던 정주영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위원장이 되었다니 갑자기 만나보고 싶었다..
반장직을 빼앗길 때, 나지막하고 또렷하게 후회할 것이라며 힘주어 말하던 그가 생각났다.
천지를 모르고 뛰어다니던 나와 달리 조용히 준비해온 권용목을 비롯한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저력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다시 인용한다.

올해 초 ‘상여금 차등지급 철폐’를 주장하는 몸 벽보 붙이기를 시작으로, 임금인상이 회사측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회사측 안대로 통과해버리자 항의의 표시로 500여명이 질서정연하게 참석하여 축구시합을 벌이는 등 싸움을 계속해 왔으며, 지난 6월 노사협의회 본회의에 ‘여름휴가를 유급으로’, ‘유해 작업장에 대한 공해방지 시설 및 수당지급’, ‘야간근무시 간식지급’등의 안건으로 밀고 당기기를 해 오면서 노사협의회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노조를 결성하는데 뜻을 모았다. -- 중략 --

아! 그랬구나. 그래서 시내 집회 같이 가자는 어처구니없는 내 제안에 너털웃음으로, 다음에 만나서 막걸리 한잔 하자고 그랬구나. 그래서 풍물 배운다고 그랬구나.
바보 같은 난 그것도 모르고 젊은 사람이 시내 집회도 안 간다고, 괜히 우쭐대고 허술하게 생각했는데. 그것 때문이었구나.
‘노동조합’
그것 때문에 애써 태연하게 끓어오르는 울분을 삼키며 당당하게, 오늘에 있은 일을 후회할 거라고 힘주어 말했구나.
내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내가 감히 생각도 못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그는 먼저 앞장서 가고 있구나.
갑자기 그가 보고 싶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껄껄껄 웃던 권용목을 만나고 싶었다.
다시 인용한다.

현대그룹 다른 공장들도 연대하여 싸우자.
군부독재정권의 장기집권 야욕은 일단 온 국민대중의 단결된 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허나 정권야욕을 위해 동족을 학살한 자들이 이제 와서 민주화를 하겠다는게 얼마나 현실성 있는 말이겠는가?
민주화를 떠들고 있는 지금 그전과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독점자본들의 횡포는 여전하고 저임금에 장시간을 노동을 하고 있고 잘못된 노동법은 그대로 아닌가? 이제 민주화가 되겠지 라며 안도의 숨을 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 민주화 투쟁의 시작이다.

현대엔진 노조결성은 이 땅의 주인으로서 민주화를 앞당기는 힘찬 발걸음이다.
현대엔진 노조결성은 현대엔진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꼭 같은 처지인 현대그룹 다른 공장 모든 노동자들의 기쁨이고 나아가서 민주화의 열기에 찬 우리나라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전체의 경사이다.
우선 현대그룹 다른 공장들은 이 힘찬 행진에 힘찬 박수를 보내고 노조설립신고필증이 나오도록 함께 싸워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 사업장에서는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단결된 용기를 본 받아 노조결성에 온 힘을 모으자. -- 중략 --

구구절절 옳은 말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6·29선언에 멍든 가슴이 슬슬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른바 6·29선언이 나오자마자 어느 곳 한 곳 반대 없이 잔치분위기 되어 들떴지만, 나에겐 개코같던 소리였다.
뺑뺑이 치는 공돌이는 공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경을 쳐도 시원찮을 떡을 칠 놈들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사람 죽이고 정권을 잡은 놈들은 그대로 6·29선언을 이루어낸 민주화투사로 큰소리 뻥뻥 치며 변신했고, 노동자를 때려잡던 놈도 선의의 피해자로 둔갑하고,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시켜 배 터지던 기업주도 그대로였다.

이른바 6·29선언이 있던 6월 29일 저녁.
퇴근 후 찾아갔던 집회장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집회장에서 사람을 기다리며, 기다리며 느꼈던 슬픔이 분노가 배신의 아픔이, 이것이 부족해 그랬구나. 대안을 찾지 못한 나에게 문제가 있었구나.
어리석은 놈. ‘노동조합’이었구나.
사회 민주화보다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직장의 민주화구나.
사회가 민주화되어야 직장이 민주화되는 것이 아니라, 직장이 바로 되어야 민주화가 완성되는 것이구나.
‘노동조합’이였구나!
돌파구를 찾으려 짱돌을 던졌지만 뚫리지 않았던 벽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나를 번번이 무너뜨린 것이, 허탈하게 한 것이 ‘노동조합’이 없는 탓이었구나.
내 처지가 부끄럽고 그가 부러웠다.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현대엔진노동자들이 부러웠다.(다음호에 계속)

2005-10-28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