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니 타스 룩스 미아 |
현장에서 미래를 제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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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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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 타스 룩스 미아
권두언
손 호 철
이사
“베리 타스 룩스 미아”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의 이 말은 한국 제일의
명문대학이라는 서울대학교의 교시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진리에 순종하라”는 등 많은 대학들이 ‘진리탐구’를 대학의
교시로 삼아 왔다. 그러나 이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이제
대학의 교시는 “머니 타스 룩스 미아”, 즉 “돈은 나의
빛”으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자본의 재생산구조로부터
자유로운 적은 없었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필요노동력과 지배적
생산관계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학도
예외일수는 없다. 대학은 상아탑이라는 외양적 중립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자본주의에 필요한 고급인력과 기술, 지식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왔다(따라서 대학교육은 졸업 후의
‘노동을 위한 준비노동’이므로 대학등록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턴월급을 받아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이 미국 대학의
급진적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바 있다). 물론 자본주의 하의
모든 사회적 제도들이 그러하듯이 이같은 목적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은 아니고 대학은 또 다른 계급투쟁의 장으로
전화되어 부단한 저항에 부딪쳐 왔다. 서구의 경우 특히 60년대
말 반전시위와 관련해 대학은 심각한 저항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같은 흐름으로부터 예외는 아니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한국자본주의에 필요한 고급인력과 기술의 생산지로
간주되어 왔다. 게다가 종속적 자본주의와 종속적 파시즘체제의
특성과 관련해, 그나마 대학이 서구에서 누릴 수 있었던 외양적
중립성마저도 수시로 침해당해 왔다. 그러나 80년
광주민중항쟁이후 진보적 운동이 복원되면서 대학은 이에 대한
강한 저항의 중심으로 변모해 왔다.
이같은 현실은 다시 90년대 들어, 특히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수요와 공급’의 양면에서 심각한 도전에 처해 있다. 우선
‘수요’의 경우 소련동구의 몰락과 87년 ‘민주화’ 효과에
따른 한국사회의 전반적 보수화와 신세대 문화 속에서
대학사회에 실용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면서 대학사회에는 대학을
취직학원으로 간주하는 풍토가 만연하고 있다. 충격적인 예로
몇년 전 5월 17일 밤에 서울대학교에는 근 천여 명의 학생이
노천에서 줄을 서 밤을 새웠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이 기사를
보고 5․18 광주민중항쟁 전야제를 위한 것인가 하고
반가워 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니 18일 9시부터 가을학기
수강신청을 받는데 수강인원이 제한된 고시준비용 법학강의
수강신청을 위해 밤새기를 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게다가 97년 경제위기 이후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상한 청년실업
문제는 이 같은 대학의 취직학원화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공급’쪽의 변화 역시 이에 못지 않게 놀랍다. 김영삼 정권에
이어 김대중 정권은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여 우리 사회를 국제경쟁력이라는 이름 하에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면서 대학마저도 신자유주의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내세운 코미디같은
신지식인론(바로 이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신지식인의 1호로
인기코미디언을 선정한 것은 너무도 상징적이다)이 보여주듯이
경제적 부의 생산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은
대학에서 퇴출시키려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대학정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김대중 정부에게 있어서 대학의 키워드는
‘진리’와 ‘비판적 지성’이 아니라 ‘경쟁력’과
‘생산성’이다. 그리고 이같은 정책에 발맞춰 일부대학은
기존학과를 폐쇄하고 대학전체를 돈이 되고 인기가 있는
의과대(Medical), 경영대(Business), 공과대(Mechanics), 법과대
(Law)로 재편하는 ‘MBML’계획을 추진하기도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과거에도 대학은 외양적 중립성과
진리추구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자본에 통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와는 달리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에 의해
대학이 경제논리, 특히 단기적인 경제논리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위 순수과학의 경우도 순수과학의 발전이
없이 응용과학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별로 순수하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논리에 통합되어 온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신지식인론’이라는 단기적인 경제논리에 의해
순수과학은 퇴출당하게 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 같은 수요와 공급의 추세가 결합한 결과, 이제 대학은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대학이 아니라 ‘지식공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지성의 상징이었던 대학총장은
‘지식공장 공장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같은 대학의
지식공장화, 신자유주의적 대학정책의 일환으로 주목할 것은
대학 노동력의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전략으로서의 교수계약제와
연봉제이다. 특히 김대중 정부는 최근 교수사회와 노동계,
진보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약제와 연봉제를 강행한다는
방침아래 세부지침 마련을 각 대학에 지시하는 등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바, 이 모두는 대학의 교육과 연구에 대한 자본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로서 그 파장이
심각하게 우려되고 있다. 문제는 두 가지 측면이다. 우선
계약제와 연봉제가 갖고 있는 일반론적인 문제점들인 바, 이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기에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대학이 갖는 특수성, 나아가 한국대학의 특수성과 관련된
문제점들이다. 우선 연봉제의 경우 연봉제라는 것 자체가
노동통제를 위한 자본의 전략이라는 일반론적 사실이외에도
산술적이고 객관적인 ‘생산성’에 대한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학문의 속성에 연유한 대학의 특수성까지 겹쳐져 우려되는 바가
크다.
계약제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사실 신자유주의와
노동유연화의 원조격인 미국에서조차도 대학에 한국과 같은
계약제는 실시하지 않고 있다. 즉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을
하면 이후 정년을 보장하는 것이 미국식 제도라면 우리의 경우
사실상 평생을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평생계약제를
도입하려고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대학의 현실을 고려하면
계약제의 폐해는 생각하기조차도 겁이 날 정도이다. 즉 우리는
그동안 교수재임용 탈락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중 절대다수는
연구실적이나 강의능력 부족 등 학문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라 학문적 능력은 뛰어나도 사회적 불의나 사학의 비리에
저항한 교수 등 정부와 재단이 밉보인 사람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같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계약제와 연봉제를 실시하면 이미
한계점을 넘어선 재단의 전횡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학문적
자유와 교수의 자율성은 더욱 위축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이제 대학은 학문에 적합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 가장 부적합한 자들이 살아남는 ‘역다윈주의’의
실험장이 될 것이 자명하다. 다시 말해, 재단이 모든 것을
전횡하는 한국의 봉건주의적 대학현실에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를 적용할 경우 그 결과는 그나마 신자유주의적
‘장점’마져도 발휘할 수 없는 ‘봉건적 신자유주의’ 내지
‘신자유주의적 봉건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하긴
미국에서조차도 최근의 엔론사태가 보여주듯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또 다른 형태의 크로니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말이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투쟁을 조직화해냄으로서 이들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저지하느냐는 실천이다. 이와 관련, 계약제, 연봉제
반대투쟁이 주의해야 할 문제가 두 가지 있다. 우선, 대학의
‘일용잡급직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강사 문제이다.
사실 그동안 교수운동은 이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침묵하고
투쟁을 해오지 않은 것이 부끄럽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같은 풍토는 바뀌어야 한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자주적 노동운동이 이제 한국노동자의 50%이상을 차지해
한국노동자의 전형이 되어버린 절대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외면한 채 남성, 대기업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조합원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조합주의적 투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교수들의 계약제, 연봉제 투쟁이 이
문제를 끌어안고 이의 발본적인 해결을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계약제, 연봉제 반대투쟁은 교수라는 ‘철밥통’을 지키기 위한
집단이기주의의 발로라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계약제, 연봉제 반대투쟁의 중심은 교수노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민교협, 국교협, 사교련 등 교수단체들이
반대투쟁에 나서고 있으나 사안의 성격과 관련해 투쟁에 있어서
전략적 우위를 갖는 것은 교수노조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수노조운동이 안고 있는 구조적 딜레마이다. 이는 한 연구자가
소련동구의 몰락과 관련해 그간의 노동운동을 회고하며 지적한
‘이해관계(interest)’와 ‘전략적 힘(strategic power)’의
분절현상이다. 즉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투쟁에 나설 이해관계와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전략적 힘을 동시에 가지게 될 것이라고
본 맑스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에 의해 전략적
힘을 가진 선진국 노동자는 체제내화되어 혁명에 대한
이해관계가 약하고, 역으로 제3세계 노동자계급은 열악한 현실에
의해 이해관계는 있지만 전략적 힘은 없는 분절현상이
일어났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이해관계와 전략적 힘의 분절현상이 심각한 것이 바로
교수사회라는 점에서 교수노조운동이 안고 있는 이 구조적
딜레마를 극복하기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즉 열악한 환경의
악덕 사학의 경우 투쟁을 해야 하는 이해관계가 절실하지만
투쟁에 나서는 경우 당장 해고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전략적
힘이 약하고, 전략적 힘이 있는 명문대학의 교수들의 경우
현실이 상대적으로 ‘견딜 만’ 함으로서 구태여 투쟁에 나서야
할 이해관계가 약한, 이해관계와 전략적 힘간의 분절현상이
두드러진 것이 대학사회의 현실이다. 이 같은 분절현상을
창조적으로 극복할 때만이 계약제, 연봉제 반대투쟁, 나아가
교수노조운동은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실 계약제, 연봉제 등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대학정책은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그것은
대학 졸업 후에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6~7년씩 공부를 한
‘최고의 지성인’인 교수가 무슨 노동자냐는 자기도취에 취해
있던 교수들에게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그들 역시 남과 다르지
않은 노동자(‘고등교육노동자’)라는 냉엄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계약제, 연봉제 반대투쟁과
교수노조운동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한국의 교수들이 아직도
충분히 당하지 않았는지 모르며, 다른 노동자들처럼 더 악랄하게
당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최근의 공공부문 파업과 관련해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 완벽하게 보장해주고 있다고
자화자찬한 노동권에 의해서 말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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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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