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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투쟁

현장에서 미래를  제76호
선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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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월 사유화 저지투쟁경과 및 향후과제

선 지 현/교육기획실





1. 들어가며

공공부문 사유화(민영화) 저지를 위한 공공 3사의 파업투쟁은 4월 3일 발전산업노조의 ‘현장복귀’로 일단락된 듯하다. 그러나 ‘파업’ 그 자체는 일단락되었을지 몰라도 정부와 자본의 탄압공세는 더욱 강고해졌으며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파업’은 마무리되었지만 ‘투쟁’은 끝나지 않았음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이 시점에서 2~3월 파업투쟁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 5월 투쟁을 이야기해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보여진 모습은 서로가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고, 이후 투쟁을 요구하는 발전노동자들을 외면하는 것이었으며 급기야 성원미달로 5월 투쟁도 결의하지 못한 채 대의원대회가 유예되는, 그야말로 ‘절망’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발전노동자들은 현장에 복귀하자마자 포탄처럼 떨어지는 탄압공세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시급하게 다시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선 투쟁전선을 복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당면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출발점이며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조운동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상당기간 표류하게 될 것이고 그 동안에 노동자 대중은 자본에 잠식되어 무력감과 패배감으로 구조조정의 칼날에 맥없이 휘둘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바로 그 기로에 서있다.


이 글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공공 3사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전선의 성격과 의미 그 속에서 전개된 파업투쟁의 경과 및 주요 쟁점, 그리고 현 국면을 극복하기 위한 향후 투쟁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전선을 부활시킨 공공 3사 파업투쟁

이번 공공 3사 투쟁은 공공부문을 필두로 해서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을 정착시키려는 정부와 자본에 맞서 ‘사유화 저지투쟁’ 전선구축으로 구조조정 저지투쟁을 복원시킨 투쟁이었다.

정부의 공공부문 민영화를 앞세운 구조조정 정책은 99년 서울지하철 파업 이후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주체의 취약성 때문에 사실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왔다. 공공연맹 산하노조들은 각개격파되면서 정원감축, 퇴직금누진제 폐지, 연봉제 및 성과급제 수용, 조직개편 등 구조조정 내용을 대부분 수용했고 그 속에서 ‘구조조정 반대’는 불가능한 투쟁요구이고 ‘공기업 개혁은’ 노동조합도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팽배했다. 이러한 논리를 한번에 제거시킨 것이 바로 공공 3사의 파업결정이었으며 발전노조의 파업투쟁이었다. 이것은 바로 공공부문 투쟁이 자본의 논리를 일부 수용하면서 무력화 된 것을 극복하고 수세적인 상황을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또한, 파업 과정에서 공공 2사가 먼저 파업을 접었지만 민주노총의 연대파업을 이끌어내고 발전노조가 파업을 계속 유지하면서 단위사업장에서 시작하여 단위사업장으로 끝났던 지난 4년간의 투쟁경험을 뒤집고 전국전선으로 만들 수 있었던 기점이 바로 2~3월 공공 3사 공동파업인 것이다.

특히 계속된 발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월드컵과 국민경선제를 통한 소위 ‘노풍’으로 정세를 몰아가려는 정부와 자본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면서 노동자 대중투쟁으로 돌파하고 있었으며 4․2 민주노총 총파업이 결정되면서 정세 주도권을 둘러싼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격돌로 정세는 진전되었고 전체민주노조운동은 이로 결집된 것이다.



3. 공공 3사 파업투쟁의 주요 경과

1) 2000년, ‘공공연대’를 통한 민영화 저지투쟁

2000년 위로부터 조직된 ‘공공연대’가 한국전력노조집행부(위원장 오경호)의 ‘전력산업구조개편’을 수용하는 직권조인으로 끝나면서 공공부문 연대 방식과 기조에 대한 비판1)이 제기되었다.

비판의 내용은 주로 △투쟁을 결의하고 있는 단위사업장들의 연대투쟁단위가 아닌 양적 확장을 통한 교섭력 증대를 꾀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연대방식이라는 점 △공동의 국회청원, 대정부교섭 요구, 범국민적 캠페인 방식의 투쟁으로 노동자 대중 자신이 투쟁의 주체로 설 수 없었던 투쟁이었다는 점 △‘민영화 철회’ 요구를 내세우고 있었으나 사실 요구 자체가 분명히 정립되지 못했고 그 결과 ‘민영화 부분적 수용’등이 투쟁과정에서 제기되었으며 이는 직권조인으로 정부 입장을 수용하는 것으로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 등이다.

결국, 전력노조의 전력산업 구조개편법 수용, 철도노조의 인력감축 합의로 일단락된 공공연대는 대중의 분노를 낳았고 2001년 철도의 민주노조 건설투쟁, 전력노조에서 발전부문이 탈퇴(현재의 발전산업노조)하면서 역시 민주노조 건설투쟁으로 이어졌다.


2) 2001년 10월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공동투쟁본부 구성, 그리고 2002년 2월 25일 파업돌입

2001년 10월, 공공연맹과 철도․가스․발전 등 6개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은 ‘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이하 공투본)’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사유화 저지투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을 일선에서 준비하고 있었던 다수의 활동가(민주노총 임원, 상근자, 외부의 연대대오)들 조차도 ‘파업성사’를 자신하지 못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함께 했던 2000년 공공연대의 재현 가능성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공투본의 파업불발로 인한 노동법 개악저지투쟁의 악영향을 점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예상은 파업이 선언되기 불과 하루 전날 밤, 대중에 의해 깨져 버렸다. 불과 한 달도 준비하지 못한 발전노조의 파업선언, 2,500여명의 집결을 예상하던 지도부의 판단을 넘어 5,300여 명의 발전노동자들은 서울대로 집결했고 가스부문 역시 2,000여 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모였다. ‘사전 타결 가능성’을 점쳤던 철도 역시 파업이 강행되었다.


2월 25일 04시 공동파업 선언

발전산업노조는 중앙쟁대위를 열고 ‘가스, 철도가 파업에 돌입할 경우 연대파업에 돌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철도, 가스노조 역시 단독파업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끼고 있었고 공동파업이 성사되면 파업을 하겠다는 입장을 비공식적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단사의 파업결의로 공동파업을 모아내는 것이 아니라 공동파업의 결의로 단사 파업을 견인하는 형태가 보여진 것이다.

24일 밤, 가스노조는 정부와 상당한 의견이 접근된 상태였고 철도 역시 단체협약에 대한 의견접근을 이루고 있었고 남은 것은 핵심요구인 ‘철도 민영화와 해고자 복직’문제였다. 이 상태에서 24일 저녁 양대노총이 발표한 18시 노정교섭은 사실상 노정교섭이라기 보다는 ‘민영화는 교섭대상이 될 수 없다’는 방용석 장관이 입장을 확인하는 자리에 불과하였고 교섭은 3개의 노조가 서로 다른 곳에서 진행하고 있었다. 교섭 과정에서 정부와 사측은 3개 노조에 대해 ‘민영화를 제외한 단체교섭의 요구를 일정부분 수용하겠다’는 밝혔고 결국 핵심쟁점은 ‘민영화’ 문제로 집중되었다.


25일 새벽 4시, ‘민영화 교섭대상 불가’라는 정부입장이 분명한 상태에서 서로에 기대어 출발한 투쟁은 공공 3사의 공동파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가스노조의 경우, 이미 의견접근을 상당히 이룬 과정에서 연대파업이라는 대의를 거스를 수 없었고 서울대에 운집한 2,000여명의 조합원들의 투쟁결의를 순식간에 없앨 수는 없던 것이다. 공공 3사 노조위원장은 파업을 선언했고 서울대와 건국대에 운집한 조합원들은 함성과 폭죽을 터뜨렸으며 노동의 반격은 시작되었다.


25일 가스노조 타결

파업선언과 동시에 ‘교섭 지속’입장을 천명한 공공 3사 노조는 25일 아침부터 교섭을 재개했다. 25일 아침 11시, 가스노조 타결기사가 방송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합의내용의 핵심은 ‘민영화와 관련하여 추진방법은 시기와 방법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재논의’하겠다는 것이었고 노조집행부는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을 ‘집행부 총사퇴’로 희석시켰고 조합원들은 현장복귀를 수용했다.


민주노총 연대파업 성사

누구도 자신하지 못했던 공공 3사의 파업, 집행부를 압도한 대중의 운집과 파업결의가 파업을 성사시켰고 또 민주노조의 연대파업을 가능하게 했다.

지난 2001년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반대, 정리해고 분쇄’파업 투쟁, 울산 화섬 3사의 파업투쟁에도 민주노총 연대파업은 성사되지 못한 던 상황을 되살린 다면 연대파업의 성사는 전체민주노조운동에 큰 의미일 것이다. 특히,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99년 서울지하철, 한라중공업 투쟁, 2000년 롯데, 2001년 대우자동차, 한통계약직, 울산 화섬 3사 투쟁 등 지난 4년간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는 대중투쟁은 끊이지 않았으나 대중에게 패배로 남겨졌으며 총자본 對 총노동의 대립국면에도 불구하고 총노동의 투쟁은 성사되지 못하였던 점에 비추어본다면 이번 공공 3사의 투쟁은 이러한 패배감, 고립감을 딛고 전체민주노조운동이 이 투쟁을 받아 안으며 연대파업을 성사시켜냈다는 점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진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25일, 민주노총은 3차 투본대표자회의를 열고 “26일 오전 13시까지 타결되지 않을 경우 민주노총은 연대파업에 돌입한다”고 결정했고 그 내용이 비록 4시간 경고파업의 성격이었지만 26일, 금속 소속 사업장을 중심으로 전체 100개 사업장 18개 노조 130,122명이 참가(민주노총 공식집계)하는 연대파업을 성사시켜냈다.

그러나 이후에 좀더 살펴보겠지만 연대파업은 성사는 사실 ‘공공 3사 파업의 지원’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었을 뿐 총노동의 투쟁전선 구축과 확장이라는 의미규정과 전체노동운동의 임무 인식은 아니었다. 이것은 2․26연대파업 이후 3월 24일 대의원대회에서야 비로소 연대파업이 결의되었다는 점, 결의된 4․2총파업 유보 결정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2월 26일 산개투쟁 돌입

발전노조는 가스노조의 타결, 철도노조의 타결임박을 확인하면서 거점투쟁이후 투쟁전술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현장과 명동성당지도부의 논란 속에서 조합원들의 전체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침탈전 산개’를 결정하고 산개에 돌입했고 전체 38일 동안의 파업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2월 27일 철도노조 타결

27일 오전 7시 철도노사가 최종 합의하면서 11시로 현장복귀가 결정하게 된다.


주요 합의내용

- 민영화 문제: “… 철도가 국가 주요 공공 교통수단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 공공적 발전에 대해 공동 노력한다”

- 임금보전을 전제로 3조 2교대로 근무형태 변경(2004년까지 단계적으로 시행)

- 경영진단 용역결과에 따라 단계적으로 인력충원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한다.

- 2000년 12월 노사정위원회 합의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2002년 9월까지)


노사타결 내용을 접한 건국대에서는 노조의 합의를 비판하는 유인물이 돌았고 합의내용을 전달하는 집행부에 대해 조합원들의 반발도 일어났다.

비판의 주 내용은 △철도파업의 핵심투쟁요구는 ‘철도 민영화 철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관철되지 못하였다는 점 △노동조건 개선과 관련하여 3조 2교대로 근무형태를 변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른 인원충원 등 구체적 합의가 부재하다는 점 △해고자 복직은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하였다는 점 △노동조합 규약상 ‘잠정합의’를 가지고 조합원 총투표로 결정하기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원장이 직권조인을 행사했다는 점 △연대투쟁 결의로 공동파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타결을 하였다는 점 등이었다. 3일만의 타결, 그리고 현장복귀였다. 노동조합은 현장복귀이후 3월 10일, 사실상 지도부의 신임까지를 포함하는 합의안 총투표를 실시하였고 70% 찬성으로 재신임된다.


2) 발전노조의 독자파업과 산개투쟁

26일 산개결정, 일 주일이 넘어서도 복귀율은 0%에 가까웠다. 노동조합은 ‘매각 철회 없이는 파업도 중단없다’는 입장을 발표하고 완강한 파업대오에 지도부의 투쟁의지를 분명히 밝히기도 했다. 3월 10일 중부권 5곳에서 번개집회가 감행되고 수도권 지하철 역사를 중심으로 기습선전전이 진행되면서 특별한 ‘투쟁’없이 산개해 있던 대오가 어렵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3월 10일이 넘어서면서 노동조합은 ‘매각 유보’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정부는 3월 25일을 복귀 최종시한으로 설정, 전조합원 해임이라는 극악한 방법을 동원했다. 흔들리지 않는 파업대오에 대한 당혹감과 정부와 자본의 위기감을 공세적인 탄압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의 침탈과 25일 전조합원 해임 위협에 대오의 손실이 있었으나 파업대오의 다수는 24일 연세대 결집을 통해 정면돌파를 결의했다.

그러자 정부와 자본은 4월 3일로 최종시한을 연기했고 37개 지부 상집간부들까지(총 348명으로 확대) 해임결정을 내린다.


3) 민주노총의 노정교섭과 현장복귀 명령

정부는 4월 3일 2차 해임통보 위협을 시작했다. ‘민영화 교섭대상 불가’라는 입장은 불변했으며 나아가 ‘노동조합의 민영화 수용 명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은 매각철회→매각 유보입장에서 4․3 2차 해임 위협이라는 상황에서 최종요구를 ‘노코멘트’로 선회하였고 교섭은 급진전되었다. 정부의 ‘민영화 동의’를 요구하는 상황을 정부의 강력한 민영화 의지로만 해석할 뿐 매각반대라는 여론이 확산되고 ‘매각반대’와 ‘찬성’ 이 두 가지의 대립이 점점 첨예해지면 ‘더 이상 몰릴 수 없다’는 정부의 인식과 태도라는 점은 간파되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사태해결이라는 입장에서 노정교섭을 만들었고 그 순간에는 이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사태를 해결한다’는 교섭중심의 해결방안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4․2 총파업의 조직화는 없어진 채 ‘전조합원 해임’이라는 상황만 남았고 교섭은 투쟁과 완전 분리된 채 급진전된 것이다.

4월 2일 오전에는 이미 타결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교섭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다수의 파업대오는 파업지도부가 아닌 보수 언론을 통해 노정합의를 알게 되었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확인 불가능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던 현장에서는 민주노조운동 역사상 유례없는 ‘총파업 대기’ 명령을 받았으며 지역집회는 취소되거나 ‘보고대회’로 치러졌고 현장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12시가 넘어서도 잠정합의문은 공개되지 않았고 교섭이 끝났다는 소식은 없었으며 민주노총의 ‘12까지 타결되지 않으면 총파업에 돌입한다’는 결정은 지도부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저녁 무렵, 잠정합의안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현장은 더욱 혼돈에 빠졌다. ‘노사화합선언’, ‘중재안을 존중하여 민영화는 논의대상에서 제외’, ‘징계는 적정한 수준에서’ 등 38일간의 파업투쟁과 대중의 연대총파업의 의지를 무위로 돌리는 아니,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사수해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흔들어낸 합의안이었다.

대중은 분노했고 발전노동자들은 오열을 터뜨렸다. 그리고 지도부는 침묵했다.


총회 무산과 개별적 현장복귀 명령

발전노조 파업지도부는 잠정합의안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묘집회에 ‘정부 최종 제시(안)’을 배포했고 이어 2일 밤, 명동 결집 명령을 내렸다. 명동에서 총회를 통해 잠정합의안 및 현장복귀 결정을 하겠다는 것. 그러나 총회시도는 무산되었고 노동조합위원장의 3월 총회 재시도 약속으로 대오는 해산했다. 그러나 “조직적으로 파업을 결정했고 현장복귀 역시 조직적으로 결정할 것”이라는 노동조합위원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3일 총회는 불과 800여 명의 조합원들만 참석했고 다수는 개별적으로 현장에 복귀했다.


민주노총 임원 총사퇴, 잠정합의안 폐기, 그러나 …

4월 3일 민주노총은 산별대표자회의를 열고 잠정합의안 폐기와 임원 총사퇴를 결정했다. 이어 4월 8일 중앙위원회에서는 임원총사퇴에 따른 단병호위원장 거취문제, 비대위 구성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교섭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설명했다. 이른바 투쟁동력 부재의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지도부는 “민주노총이 노정교섭을 하면 그 수준과 내용이 달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발전노사의 문제로 인식, 피해최소화라는 것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현장복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발전노조의 상황과 4월 2일 총파업 이후 투쟁동력이 사실상 급감한 상태에서 교섭을 통한 타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를 설명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세인식이 드러나는 발언이었다. 정권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투쟁전선을 복원해낸 2․25 공동파업이 발전노사의 문제였다는 것. 이것은 4․2 총파업이 발전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했고 발전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총파업을 결행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이러한 정세인식은 민주노총이 2․25 공동파업을 계기로 정세를 주도해내면서 수세에서 공세로의 국면전환을 이루게 했던 것, ‘매각’ 찬반 여부를 둘러싼 대립이 점점 첨예화되고 나아가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격돌의 상황반전이 가능했던 것. 이것은 김대중 정부도 알고 있었다. 정부가 극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공세를 취한 것은 바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것, 즉 김대중 정부의 4년간의 ‘노동에 대한 전면 공격을 통한 자본의 위기 극복’이라는 치적(?)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대항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바로 이런 사실을 간과한 채 지난 4년간의 오류를 되풀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4) 현재(사측의 현장탄압과 재파업 배수진)

가스노조는 현장복귀와 동시에 결정된 지도부 총사퇴에 따라 3월 4일 임시대대를 열고 이번 파업 투쟁에 평가에 기초하여 ‘한국노총 탈퇴, 민주노총 가입’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이어 3월 25일 집행부 선거를 진행, 새롭게 지도부를 선출하고 조직정비에 들어갔다.

한편, 정부는 가스산업 관련 3개의 법안이 4월 임시국회에 상정되어 있으며 16일 의사일정에 상정되어 있는 상황이다(국회 산자위 일정 4월 16~18일).

철도노조는 철도청의 징계 및 가압류, 부당노동행위 등 현장탄압으로 현장에서는 ‘다시 파업투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8명 간부구속, 57명 고소․고발, 23명 직위해제, 5명 중징계, 16억 손배 청구, 하급관리자급 2000여 조합원에 대한 조합탈퇴강요(「철노속보」 101호). 철도청의 징계가 중앙간부들의 징계보다 현장간부들의 징계를 우선 실시되고 징계가 전체 조합원들까지 확대되면서 현장의 반발이 매우 높아 있고 노조는 ‘2차 총파업’ 배수진을 치고 다시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상태이다.


사상 유례 없는 현장탄압에 신음하는 발전노동자들,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인가

구속 수배 24명, 343명 해고, 404명 고소고발, 62억 2,500만원에 달하는 가압류(조합비 및 개인급여 포함)에 이어 추가 징계 및 148억에 달하는 손배소송과 더불어 현장에서는 서약서 강요, 전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감사에 이어 반성문 작성까지 요구하면서 그야말로 반인륜적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현장탄압이 자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장탄압의 본질은 지난 4월 11일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산업자원부의 ‘산별 해체, 기업별노조 유도’, ‘노사화합형 노조’로의 전환 등의 계획에서 드러난 것처럼 노조자체를 파괴하겠다는 것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 과거 전력노조의 잔재인 어용세력들의 조직적 행보가 나타나면서 현장복원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4. 제기되는 문제들

‘민영화 철회’라는 투쟁요구는 불가능한 것인가

2․25 공공 3사 파업과 발전파업이 성사되면서 ‘민영화 철회’라는 투쟁요구는 ‘구조조정 불가피성’논리를 완전 무력화시켜냈고 ‘정부의 민영화 정책은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노동조합의 투쟁요구로 분명히 정립되었다. 정부의 ‘정부정책은 교섭대상이 될 수 없다’는 거듭된 주장에도 ‘민영화 철회’를 걸고 공공 3사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했으며 파업을 조기 종결한 공공 2사 조합원들의 분노는 바로 민영화 문제를 정면돌파하지 못한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투쟁은 전체 민주노조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전국적 전선 구축으로까지 확장되었으나 역으로 민주노총은 이를 단 한번의 노정교섭으로 무너뜨렸고 ‘민영화 철회’요구의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리고 총파업 유보 이후 이러한 논리가 또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4․2 총파업은 단순히 발전노조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2․25 공동파업과 발전파업에 대한 의미규정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총파업을 조직하는데 있어서 ‘발전노조 지원, 엄호 연대파업이냐 아니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하는 민영화(매각) 철회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이냐’이냐의 문제이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발전노사의 문제로 바라보고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타결에 집중했다’는 주장은 바로 후자의 정세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정세인식으로 인해 4․2 총파업은 유보되었고 그와 같은 잠정합의안이 도출되었다. 과연 이러한 정세인식은 타탕한가?


노정교섭과 잠정합의

잠정합의안 발표가 있은 후 민주노총 교선실 명의로 제출된 ‘발전파업 무엇을 남겼는가’라는 제목의 문건은 대중의 분노를 더 확대시키기도 했는데 ‘노정교섭을 했으니 그 자체로 성과이며’, ‘국민들의 80%가 매각반대에 찬성하는 등 국민여론을 만든 것도 성과’라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발전노동자들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분노한 이유는 바로 교섭이 타결되기도 전에 총파업 유보를 한 지도부의 결정과 잠정합의의 내용이다. 이를 모르는 자는 없다. 그런데도 성과를 교섭틀의 문제, 국민여론의 문제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확산되는 투쟁의 파고는 간과한 채 여전히 교섭만을 중심으로 놓고 보는 점, 지도부의 투쟁의지는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양적인 동력 그 자체만으로 투쟁동력을 판단하는 기존이 방식을 되풀이하고 있는 민주노총 상층지도부의 관점의 문제이다.


민주노총 임원의 오류였는가, 민주노총의 전체의 문제인가

3월 24일 대의원대회의 4.2총파업 결정이후 산별대표자회의, 비상투본회의에서 보여준 각 단사 및 연맹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대의원대회의 민주노총 총파업 결정은 잘못되었다’, ‘매번 단사가 파업할 때마다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때려야 하는가’, ‘우리 연맹의 조건에서는 총파업을 절대 할 수 없다’, ‘조건과 관계없이 총파업 강행하려는 지도부는 문제다’ 등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뒤집는 논의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란은 4월 2일 아침까지도 계속되었다. 과연 이러한 문제를 임원의 문제로만 해석할 수 있는가?

2001년 민주노총의 7.5총파업 역시, 연맹과 단위노조 특히 대공장노조들의 불참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민주노총은 어떤 평가도,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이것은 현재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 아닌가? 민주노총 상층지도부에서부터 연맹, 단위노조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관성과 관행으로 얼룩진 민주노조운동의 관료화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그간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라고 하는 자들의 사상과 실천의 빈곤함은 이제 민주노총을 지탱하기도 어려운 지경까지 이른 것은 아닌가?



5. 민주노조운동의 희망은 있는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투쟁전망과 과제

1) 투쟁전선의 복원으로 출발해야 한다

4․2 총파업유보와 잠정합의로 무너진 투쟁전선은 이제 의미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발전노조에 대한 노조파괴공작, 근로기준법 개악을 전제로 한 노동시간단축을 위한 노사정 대타협 시도, 공기업 민영화 상정과 통과 시도 등 정부와 자본의 공세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민주노조진영의 투쟁은 어떠한가?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 대우조선 노동자들의 투쟁, 여전히 정부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발전노동자들 …

5월,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총노동의 투쟁전선이 복원되지 않는 한 총자본의 공세는 민주노조운동을 ‘노사타협’으로 잠식해 들어오면서 무력화시킬 것이다.

또한 민주노총의 현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무너진 투쟁전선을 복원하여 총자본의 공세를 돌파하는 것이다.


2) 구조적으로 한계에 다른 민주노총, 탈출구는 없는가

4․2 총파업유보와 잠정합의, 임원사퇴와 잠정합의 폐기, 비대위 구성논란과 대의원대회 유예 등은 민주노총의 형식적 지도력조차 무너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지하철 배일도 노조위원장의 ‘제3노총’ 언급과 ‘4․2 무파업 선언’, ‘공공연맹 징계조치에 대한 반발’ 등은 민주노총의 최소한의 지도력도 대공장 단위노조에 먹히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민주노총의 정치적, 사상적 지도력의 빈곤과 동시에 구조적인 한계에 대한 극복대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민주노총 2기 때에 시도된 ‘직선제를 비롯한 규약변경’ 등은 민주노총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부분이다.


3) 민주노총의 정체성 찾기: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을 바로 세우기

상층지도부의 관료화, 사상적, 정치적 지도력의 빈곤, 노선의 문제 등은 이미 지난 98년 정리해고 합의 당시에도 제기되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의 분노는 조직된 행동으로 옮겨졌고 임원총사퇴와 비대위 구성, 그리고 민주노총 혁신을 대중적 과제로 인식시켰다.

2002년, 민주노총은 조합대중에게 혁신해야 할 내조직인가? 아니면 소수 상층 관료들의 조직으로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산별연맹과 단위노조들은 어떠한가? 현장활동가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민주노총 상층지도부와는 다르게 정말로 4․2 총파업을 사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가? 제 정치조직들은 또 다시 이를 민주노총이 결단해야 할 문제라고 대상화시키지는 않았는가?

자주성과 민주성, 연대와 단결, 투쟁을 통해 발전해온 민주노조운동은 여전히 사수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민주노조운동진영은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그리고 아래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을 다시 세우는 실천으로 민주노총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이것은 작게는 민주노총의 구조적 문제를 고치는 것에서부터 당면해서는 5월 총파업투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한/노/정/연


1) 이와 관련해서는 ꡔ현장에서 미래를ꡕ 2000년 12월호 특집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발전과 모색(1)”을 참조.


2002-05-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