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히 국가주의와 전쟁 선동의 극성시대 |
현장에서 미래를 제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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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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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초점
가히 국가주의와 전쟁 선동의 극성시대
채 만 수
부소장
I
부르주아 사회의 일상적 현상이긴 하지만, 최근 정세의 특징은
부르주아적 의제(議題), 부르주아적 국민통합 이데올로기가 특히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지하는 것처럼, 지난 6월의 월드컵 축구대회를 계기로
‘붉은 악마’ 현상, 혹은 “대~한민국”이나 “오~필승
코리아”라는 함성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 혹은 애국주의로서
참으로 극에 달해 있다.
‘월드컵’을 계기로 이 국가주의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가는, 커다란 실례를 무릅쓰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도리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서해교전의 해결도
히딩크처럼”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글 제목과 그 글의
전개방식에서, 나아가, ‘월드컵’에 즈음하여 거대 상업언론을
통해 축구를 찬미하고, ‘월드컵’을 더욱 성대하게 장식할
‘꺼리’를 찾아 눈이 벌건 수십 명 기자들의 환시리에
인천공항까지 히딩크를 환송하는 백기완 선생의 동정에서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생께서는 필시
‘월드컵’을 계기로 국가와 독점자본이 무엇을 위해서 어떤
정세․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전력투구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결코 필부의 그것으로 무심히 보아
넘겨지지는 않을 것임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도 그렇게
움직였으니 말이다.
‘붉은 악마’ 현상이 얼마나 심각하고 맹목적적인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조장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붉은 악마’를
부추기지 말라”는 논평 이 책의 ‘자료’ 참고.
을 낸 인권운동사랑방의 홈페이지 게시판이 얼마나 입에 담기도
거북한 욕설과 악담, 증오로 도배질되었는가를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이 글에 대한 반응도 아마 틀림없이 그러한
저열한 것이겠지만).
‘사랑방’은 ‘붉은 악마’나 그 외, 거리의 응원에 나선
사람들을 비판한 것은 아니라고 한 발 물러섰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 논평의 창끝도 주로 ‘붉은 악마’ 등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언론과 특히 “망발”을 일삼고
있던 언필칭 ‘진보적 지식인들’을 향한 것이었지만,
‘사랑방’의 홈페이지를 그렇게 욕설과 악담, 증오로
도배질하는 ‘붉은 악마’나 그 동조자들도 결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붉은 악마’는 말한다. 자신들은 결코 누구에 의해서 조종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라고. 자발적으로!? 그런데
그들은 그 ‘자발성’이 어떤 계기에, 무엇에 자극받아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의 순수
자발성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 무지 아니면 강변 아닌가?
‘붉은 악마’는 말한다. 자신들은 결코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순수하다고. 그들이 “비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필시 자신들은 결코 부정부패로 궁지에 몰린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등 민주당의 이(해)관계와는, 따라서 그
반대편에서 차기 집권을 노리는 이회창 씨나 한나라당의
(이)해관계와는 전적으로 아무런 상관도 없고 그런 편들기에
관심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 ‘정치성’을 거론한 일부의
‘비판’이 그러한 차원의 것이었고 그에 대한 응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차원의 ‘비판’과 응수야말로
‘정치’의 의미를 참으로 왜소화시키는 것 아닌가? 계급적
이해의 대립이라는 정치의 본령을 은폐․사상하는 게
아닌가?
실제로, 그네들끼리 주고받은 ‘비판’과 응수의 차원에서라면,
나 자신 ‘붉은 악마’와 그 현상이 ‘비정치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조금도 인색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열광적인 국가주의․애국주의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그 문제와 대항하여 그리고 생존권을 위해서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그리고 (예컨대,
보건의료산업노조의 파업․농성투쟁에 대한 공격처럼)
그들에 대한 국가권력과 자본의 잔혹한 탄압․공격을
얼마나 가렸는가, 그들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사실, ‘월드컵’과 그것을 계기로 한 광적인 ‘붉은 악마’
현상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역기능을 했는가에 대해,
그러한 광적인 현상을 앞서서 조장하고 부추긴 보수언론 자신의
얘기를 들어 보자(물론, 이 사회의 지배계급, 지배기구의 주요한
일부로서의 언론의 시각으로는 ‘무척 긍정적인
순기능’이겠지만 말이다). 6월 11일자
ꡔ동아일보ꡕ는, “심리학으로 본 응원열기, 답답한
일상의 청량제, 정치 사회적 불만 시민축제로 승화”라는 긴
제목의 기사에서, “서울 세종로에서 수십만 명이 모여서
한꺼번에 활화산 같은 힘을 분출하며 응원하는 모습에”
외국인들이 “압도당했다”는 둥, 외국 기자들이 볼 때,
“엄청난 규모의 군중이 자제력을 갖고 응원하는 것이
놀랍다”거나 “‘한국의 축구팬들은 세계에서 가장 점잖은
응원을 하지만 미국전이 끝나면 야수의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으나 “한국 응원단은 축구를 축제로
승화시키고 성숙한 응원문화를 지켜냈다”는 둥, 한껏 추어준
다음,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 도대체 이런 폭발적인 응원문화의 뿌리는 무엇일까?
정신과 전문의들은 이 같은 응원문화를 ‘집단 히스테리’의
범주에서 분석하고 있다.
서울대 의대 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집단 히스테리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표출해서 해결하는
순기능으로도 작용하는데 우리의 응원문화는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우리사회는 현재
정치․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인데 시민의 잠재적 불만이 ‘축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가 되면서 표출하고 있다는 것(운운).
정신과 의사의 관점에서야 ‘순기능’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으로는 어떨까? 부르주아 계급, 부르주아
언론처럼, (그들이 말로야 뭐라고 하든 그 이해관계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정치․사회적으로 지도층에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현재의 상태”가 다치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세력․집단에게야 물론 카타르시스고 ‘순기능’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상태를 타개해야 하는, (저들의 표현을
그대로 빌면) ‘시민’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잠재적 불만”이
“‘축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표출”된다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지연시키는 부정적인 역기능일 수밖에 없다.
“폭발적인 응원문화”, 즉 ‘붉은 악마’ 현상은 바로 그러한
역기능을 한 것이 아닌가?
II
그런데, 한편 생각하면, 생각 있는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보수․파쇼 언론들이나 상업지들이 그러한 역기능을
조장하고 부추긴 것은 여기서 크게 문제삼을 게 못 된다.
그들이야 원래 그런 족속들로 호가나 있어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풀 접고 생각했을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월드컵’ 국면에서 가장 해악스러운
역할을 한 것은 누구니 누구니 해도 ꡔ한겨레ꡕ나
ꡔ한겨레21ꡕ을 비롯한 이른바 ‘진보언론들’이고,
그 중에서도 ꡔ한겨레ꡕ의 이른바 “월드컵
기획자문위원단”으로 참여, “월드컵 포럼”을 통해
문재(文才)를 맘껏 발휘한 언필칭 ‘진보적 지식인들’일
것이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무슨 글을 썼는지, “기획자문단
활동”이라는 제목이 붙은, 6월 27일자 ꡔ한겨레ꡕ
보도를 통해 살짝 엿보자.
ꡔ한겨레ꡕ 월드컵 기획자문위원들에게는 월드컵이
‘축제의 장’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독특한
시각과 생동하는 문체로 눈길을 끌었던 관전기들은 이들
기획위원이 숨막히는 격전의 현장을 직접 누비며 써낸 것이다.
선수들의 거친 숨결과 붉은 악마의 함성을 역사적인 눈으로
재해석하려는 이들에게 마감시간과의 싸움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태극전사의 절묘한 슛에 탄성을 내지르고, 붉은 악마와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도 잠시, 냉정을 찾아 가쁜 호흡으로
써댄 관전기들에는 그러나 여전히 음미해볼 대목이 적지 않다.
한국의 16강이 결정된 포르투갈전 관전기에서 안병욱 위원은
첫머리에 “마침내 세상의 중심에 섰다. 지금 이 순간, 역사가
바뀌고 있다”고 썼다.
정윤수 위원은 폴란드전 관전기에서 ‘월드컵 첫승’의 기쁨을
“나는 방금 무엇을 본 것인가? 감탄사만으로 글을 써도 된다면
나는 느낌표만 수백 개를 찍어 서둘러 저 오르가슴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로 표현했다.
8강행을 확정한 이탈리아전 관전기에서 유홍준 위원은 “아놀드
하우저가 말한 축구의 변증법은 맞았다. 우리는 강팀을 만날수록
더욱 강해지고 멋진 경기를 펼쳤다”고 말했다.
아쉽게 패배한 독일전 관전기에서 김명인 위원은 “한반도
분단고착 원년인 1950년 6월 25일부터 만 52년이 되는 날, 나는
한국팀이 동독선수도, 서독 선수도 아닌, 독일 선수들을 맞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승부를 겨루는 동안 분단 극복과
평화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고 고백했다.
이들 기획위원은 월드컵 시작 전부터 릴레이 기고를 통해 한-일
관계와 노동, 여성, 문화, 환경 등 다양한 관점에서 월드컵을
분석하고 재해석했다. 때로는 기획위원들이 집단으로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나가 붉은 악마들과 함께 외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들끓어 오르는 새로운 문화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6월 한 달은 너무 짧았다.
짧게 인용한 대목들만 보더라도 얼마나 “독특한 시각과
생동하는 문체”의 명문들인가!!!
그런데, 여기에 또 한편의 감동적인 글을 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불공평할 것이다. 바로 위와 같은 날 지면에 곽병찬
문화부장이 쓴 “‘6월세대’로 이름하자”라는 제목의 장문의
고백성사다. 길지만 통째로 옮겨 대접하자.
부끄럽게도 나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2002년 6월의
시청 앞 광장을 1987년 6월의 시청 앞 광장과 비교하는 것이
몹시 언짢았다. 두 장의 사진을 나란히 실은 대다수 언론의
선정적 발상에 분개하기도 했다. 거기엔 가치는 없고 머릿수만
있었다.
대신 나는 그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국가주의의 망령을 지적하고,
맹목적 열정과 흥분상태를 장삿속에 이용하려는 상업주의의
교활함을 지적하는 목소리에 솔깃했다. 붉은 물결로 뒤덮인 시청
앞 광장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기록사진이나 북한의
군중대회와 판박이로 다가왔다. 거대한 ‘대~한민국’ 함성의
저편에선 ‘위대한 게르만 민족’, ‘덴노 반자이’(천왕 만세)
따위의 소리가 음흉하게 미소짓는 듯했다.
이들이 밤이슬 한낮 뙤약볕 속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온몸으로 응원할 때,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자들은 전세 비행기로
날아다니며 경기장 귀빈석에서 경기장 안팎의 이 충성스런
볼거리를 관람하고 있었다. 노예 검투사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로마의 귀족과 다를 게 무언가. 거기엔 ‘국가’를 참칭해
정치권력을 유지확대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자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엘리트주의 혹은
권위주위는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
경험만을 잣대로 삼고 있었다. 달라진 환경과 달라진 감수성
따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또 그들을 맹목적 애국심에
날뛰고,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뜨내기로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도 동원되지 않았다. 누구도 동원할
수 있는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학예회에 나선 학생처럼
티셔츠나 페인팅, 노래, 몸짓 등을 마련했다. 이것을 입고 들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 위에 대여섯 시간씩이나 앉아 전국
규모의 걸판진 잔치를 벌였다.
이들의 몸짓과 소리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생존권 확보를
위한 노동자들의 싸움은 외면당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을 그들
책임이라 할 수 있을까. 장독에 구더기 끼고, 난전엔 각다귀들이
나대고, 명절 땐 빈집털이가 성업하기 마련이다. 사용자와
공권력이 빈틈을 이용한 것이고, 언론이 이를 방조한 것일
뿐이다.
25일 나는 광화문과 시청 앞을 쏘다녔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그들의 감수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과거의 기억 속에
유폐된 변두리 냉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는
간특하게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함성 속에서 길고 긴
한나절을 보낸 뒤에야 나는 알았다. 나의 경험으로 그들의
열정을 이해하려는 것이 뉴턴 물리학으로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다만 그들과 나는 그 순간
‘크게 하나됨’(大同)을 경험하고 있었다.
곡절 많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런 크게 하나됨의 기억이
별나게 많았다. 4․19 혁명과 6․10 항쟁이 그것이다.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도 있었다. IMF
구제금융사태 때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금모으기 운동도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희망찾기를 위한
몸부림이 빚어낸 것이었다.
2002년 6월의 물결은 더 이상 희망찾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앞선
세대를 딛고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앞선 세대와 달리 세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과
세계를 새롭게 꾸미는 상상력, 그리고 함께 맺고 푸는 응집력이
있었다. 세계가 지금 ‘대~한민국’을 주목하는 것은 축구
경기력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이런 열정과 창조적
감수성이다.
그러면 이들의 꿈은 이루어졌는가. 아니다. 그러면 한여름 밤의
잔치로 끝났는가. 아니다. 그들의 꿈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꿈의 날개를 펼치도록 하는 것은 6․10이나
4․19 등 큰 하나됨을 경험한 앞선 세대의 몫이다. 우리는
우선 이들을 6월 세대라 이름하자.
참으로 절절한 반성이요, 간특한 명문이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는” 이들의 글을 대하면서 “일제 말기 친일 지식인들의
글쓰기가 꼭 이랬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곽병찬도
때마침 상기시켜 주었지만 말이다(다만, 한 가지. 전시 검열이
엄했던 일제 말기였다면 곽병찬의 글은 햇볕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감흥, 자기 재주에 취해서 너무나 많은 비밀을
토설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보적 지식인님들’께서는 자신들은 ‘국가주의의
선동’과는 관련이 없다고 발뺌을 하려 들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많은 말을 내뱉었다. 보자.
놀랐다. 직접 참여하면서도 왜 이렇게 많이 몰리는지 놀랐고,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거리응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보다 더욱
근원적인 심리현상이 깔린 것 같다. (ꡔ한겨레ꡕ,
2002.6.27.)
좌담에서의 발언이지만, 필시 누구보다도 언어에 대해서 민감할
문학평론가(김명인)의 발언이니, 그가 “국가주의나
애국주의보다 더욱 근원적인 심리현상이 깔린 것 같다”고 말할
때, 그는 미리부터 국가주의․애국주의를 인식하고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닌가? 더구나, 김명인 등은 월드컵이
개막되기 훨씬 전부터, 따라서 ‘직접 경험’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기’ 훨씬 전부터 월드컵 광기를 부추기면서
대중 동원에 나섰다. 바로 예의 국가주의․애국주의를
부추긴 것 아닌가?
III
우연인지, 아니면 어느 쪽의 누군가에 의해서 기획된 것인지,
‘월드컵’의 폐막을 즈음한 시기부터 상황은 새롭게, 묘하게,
더욱 고약하게 전개되고 있다. 바로 황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의 남북 충돌을 계기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ꡔ조선일보ꡕ를 비롯한 보수․파쇼 언론과
이회창, 김용갑, 강창희 등등을 필두로 한, 김민웅 목사의
표현(ꡔ한겨레ꡕ, 2002.7.10.)을 인용하자면
“식민주의 파시스트 세력”의 광적인 전쟁 선동이 그것이다.
김민웅 목사의 말처럼, “이들은 식민주의 파시즘의 선두에
서서, 미국 안에서도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조지 부시 정권의
제국주의적 전쟁정책의 전위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그리고
이들의 “관심이란 오로지 대북 적대정책과 전쟁론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쟁국가를 향해 치닫고 있는 미국의 독점
대자본과 군사주의 정권의 하수세력으로서 자신의 기득권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과
더불어, 그리고 미국을 등에 업고 “서해교전을 북한의 의도적
도발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그 증거가 있다며 전쟁의
예비단계적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그런데,
ꡔ조선일보ꡕ 등은 북의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적
도발’이라고 강변하면서도, 북의 미사일 레이더 가동 때문에
북의 함정을 격침시키지 못하는 등 해군이 제한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군의 해명에 대해서는, ‘미사일 레이더는
상황이 종료될 무렵에야 가동되기 시작했을 뿐’이라고
다그친다. 과연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적 도발’이라는 주장과
일관되는 다그침일까?)
그들은 사건의 진상과 배경, 원인을 밝히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그리고 남․북간의 평화구도를 모색하려는 일부의
노력을 “반민족적 행위”로 매도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친일 부역 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하기야 “천왕 폐하
만세”를 외쳐대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을 ‘대동아 성전’이라는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식민지 주구 신문이 ‘민족지’를
자임하고, 일제 총독부의 주구, 검찰관리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데야 할말이 없지만 말이다).
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이들의 전쟁 선동을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어딘가
도덕적인 냄새가 난다. 저들은 냉정하게 계산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회창의 예에서 극명한 것처럼, 저들의 자식들은 대개
이리저리 빠지며 군대를 안 간다. 그리고 설령 마지못해 군대를
가더라도 그들의 자식은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의 자식과
달라서 필경 ‘끗발’ 있는 부대의 ‘끗발’ 있는 자리에서
유유자적한다. 누가 그랬던가? “전쟁과 무도회는 함께 가는
것”이라고. 전쟁이 나면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의 전장이 아니라 주지육림의 무도회장이다. 게다가 권력과
군수 보급의 이권을 쥐고 있는 저들에게는 이런 저런 떼돈이
들어 올 것이다. 여차여차 상황이 불리하면, 돈 싸들고 미국이나
기타 어디가로 도망치면 그만이다. 비자․영주권은 물론 집
사두고 ‘원정출산’까지 해두지 않던가?
이것이 저들이 그리는 전쟁이다. 그러니 전쟁을 마다하겠는가?
조금도 거리낄 것 없이 노골적으로 “확전”을 외치던 강창희를
보라.
문제는 노동자․민중의 태도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국가주의․애국주의가 판칠
때, 그들의 감정․정서․판단이 어떻게 돼 갈까? 이
역시 ‘서해교전’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판들이 간접적인 답을 줄 것이다.
계급적 관점에 충실하다는, 노동자․민중운동 내부의
상당수 활동가․이론가들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이른바
‘주사파’의 소부르주아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그들은
주관적으로는 계급적 관점에 충실하다고 자부하지만,
남․북의 분단을 보는 그들의 관점은 영락없는 국가주의
그것이다. 남․북의 분단을 역사적 맥락에서도, ‘계급적
분단의 지리적 외화형태’로도 보지 못하는 그들의 관점이 어찌
국가주의가 아니며, 어찌 계급적 관점에 충실한 것이겠는가?
재승(才勝)한 사이버 논객, 진중권 류의 ‘객관주의’도 그
대표적 예의 하나일 것이다.
평화의 길은 하나다. 저들 전쟁 선동자들로 하여금 전쟁이
자신들의 기회가 아니라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또
만일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그것이 실제로 저들의 도망칠 수
없는 무덤이 되도록 노동자․민중이 미리부터 조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 작업․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최근의 국제적
그리고 국내의 정치․경제상황은 그것을 찾고 실천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상당히 절박한 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로, 노동운동의 일부 활동가들이
소부르주아적․몰계급적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고 필요하지만, 민족문제를 계급문제 속에서, 혹은
계급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소홀히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는
차치하더라도, 비근한 예로 우리가 겪었던 1997~98년의
외환위기나 지금 아르헨티나 등의 노동자․민중이 겪고
있는 외환․금융위기가 어떻게 계급과 민족문제가
착종되면서 발생․전개되고 있는가를 보라.
나는, 96년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당시 ‘기아’ 자본은 되고
‘삼성’ 자본은 안 된다는 식의 노동운동 일부의 태도를
보면서, “자본은 자본일 뿐인데 어느 자본이면 어떻느냐?”라고
말했던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 후 대우 사태, 하이닉스 사태
등등을 거치면서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것이 “자본은
자본일 뿐인데 국내 자본이면 어떻고 외국 자본이면
어떻느냐?”라는 주장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제국주의라는 현실 문제의식을 부당하게 내팽개친 부당하고도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노동자․민중운동 내부의 ‘좌파’가 민족문제에 보다
현실적인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덧붙였다.
IV
오늘날 대중의 머리 위에 쉴새없이 쏟아 부어지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기만적인 국민통합, 대동단결,
‘하나됨’의 이데올로기이다(위에 거명한,
ꡔ한겨레ꡕ ‘월드컵 기획자문위원단’이나 곽병찬
문화부장의 화려한 언설들을 보라). 그리고 그들은 이를 통해서
사회의 계급적․적대적 분열과 착취를 은폐하고, 그 기초
위에서 현상을 유지․강화하면서 자신들의
의제․의지를 관철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대응은 마땅히 객관적인 계급적
분열과 착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서 거기서부터 해결과
현실 타개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당연히 ‘계급’의 문제가
당당하게 그리고 핵심적으로 제기되어야 하고,
사회적․정치적 의제가 이를 중심으로 형성되도록 투쟁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에 실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정세의 주요한 특징으로 되어 있는
‘부르주아적 의제의 일방적 지배’는 물론 국가와 독점
대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엄청난 위력의 대중선전매체 탓도 크고,
기타의 물질적 조건들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상당 부분은
계급문제를 사회적․정치적 의제의 기초로 삼아 가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노동자․민중운동, 특히 노동운동의 정치적
무능력 탓이다.
예를 들면, ‘월드컵’이나 ‘서해교전’과 얽힌 국면에 이어
국가와 자본은 ‘대통령 선거’라는 또 하나의 강력한 자신들의
의제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민중운동의 일대
부분은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확보․확대를 중심으로
그에 대항한 계급적 의제를 설정하고 세우려 노력하는 대신,
‘좌익 소아병’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정당화하면서, 또
한번 ‘대통령 선거’라는 광대극, 독점 부르주아지의 ‘국민
통합 기구’에 자신을 적극 내맡길 준비를 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럼으로써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다시 자신의 정치적 무능력을
과시할 참이다.
이러한 경향의 정치적 무능력은 나이브한 민중주의, 사민주의,
그리고 그 내부의 좌파 일부는 파괴적인 종파주의에서
연유한다.
노동자․민중운동의 정치적 무능력의 또 다른 상당 부분은
실용주의․편의주의․경험주의에 안주하면서 이념과
이론은 관념적 혹은 소부르주아 급진주의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존하는 데에서 연유한다. 그들 ‘진보적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참으로 이상야릇한 청산주의적 ‘맑스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그들의 그러한 이념․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이론적 불철저성
탓인 것이다.
이리하여 노동자․민중운동의 사상적, 이념적, 그리고
조직적 정체가 너무나 오래 지속되면서 부르주아지의 일방통행이
새롭게 구조화돼 가고 있다. 부르주아적 의제의 일방적 지배를
극복하고 노동자․민중이 생존․생활의 의제, 해방의
의제를 사회적․정치적으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운동의 진지한 자기 점검과 재정비가
필요하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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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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