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단계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 정치의 임무
박 영 균/연구원
현 단계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 정치의 임무
1. 들어가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71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궁극적인
‘해방의 주체’로서 남한 노동자계급이 투쟁으로 떨쳐나서는
전주곡이었다. 비록 시작은 ‘분신’이라는 자기 희생적인
‘절규’였지만 그 끝은 ‘해방’을 열어제치는 ‘정치적
주체’이자 ‘역사적인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의 자리 매김을
의미했다.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6.29 선언 이후 집으로 돌아가는 도시의
(시민)쁘띠 부르주아의 등뒤로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투쟁의
전사’로 데뷔하였다. 민주주의의 투쟁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었으며 노동자계급은 자본과 대항하는 그들의 무기로서
노동조합의 합법성과 제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투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거제에서 구로까지’ 민주노조의 깃발이 올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수만의 노동자가 구속, 수배, 해고되면서도
‘민주노조’ 쟁취투쟁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전노협은 이렇게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남한 노동운동의 전투적 역사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투쟁은 남한 노동운동이 역사적으로 자기를
형성해 온 이런 역사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성과였다. 하지만
90년대 초․중반 이후 급속하게 전개되는 지배계급의
대노동 포섭 전략과 개량화, 그리고 노동조합 내의 관료주의의
등장은 ‘현장성’과 ‘투쟁성’, ‘민주성’이라는 전노협의
역사성이 보여주는 남한 민주노조운동의 성격조차 변질시키고
있다. 이것은 연맹이나 노총 수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노협’의 계승을 자임하는 현장 조직에서조차 일어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것이 ‘노동운동의 위기’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될 순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남한에서 최근
진행되어 온 노동계급 투쟁의 발전이 조합 조직을 이미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운동의 ‘발전’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반대투쟁’은 전세계적,
전국가적 차원에서 계급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지역적, 일국가적 차원의 틀을 벗어나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는 과학기술혁명이 가져온 급격한 생산력의 발전을
자본의 이윤추구수단으로 삼음으로써, 산노동을 몰아내려는
자본의 의지를 실현해 가고 있다. 따라서 ‘자본’이 있는 이상,
‘산노동’은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으며
인류공영의 삶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자본’을 폐절하지 않고는 ‘생존의
항상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이런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시키는 ‘학교’이다.
일국의 차원을 넘어서 국제적 차원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지역적 차원을 넘어서 전국가적 차원에서의 투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타계급을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를
자각시키는 ‘자본’의 질곡을 경험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한의 노동계급은 이미 사회화된 생산의 주체로서,
생산수단을 전유하고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실시하는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혁명적 계급’이 되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2.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 정치운동
1) ‘노동운동의 위기’인가,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위기’인가
현재 우리에게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며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위기’일 뿐이다. 민주노조 내에서
노․노 갈등이 일어나고 노사협조주의 이데올로기가
유포되고 관료화가 진행되는 것과 같은 소위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며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위기’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이미 그 역사적 발전의 최대치를 경험하고 있으며 노동조합
조직으로서의 최고의 질을 경험하고 있다. 자생적 노동운동은
노-자간의 시장 질서를 전제로 한 조합주의적 투쟁의 질을
자신의 내적 질서에 따라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치운동’은 이 운동을 발전시켜 내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과잉 축적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노동배제적 재편을 통해서 자본축적 메카니즘을
확립하려는 자본의 ‘공격’이다. 김대중 정권이 IMF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실시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은 한 축으로
‘노․사․정 위원회’라는 ‘사회적 합의체제’
구축을, 다른 한 축으로 남한 자본의 축적 위기를 세계
자본주의의 체제 재편에 맞추어 극복하려는 자본의 의지를
대행할 뿐이다. 따라서 서구에서의 ‘복지’에 대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신자유주의’란 세계 자본주의로의
편입과 그에 따른 ‘경쟁력’ 확보, 그리고 ‘경제위기’에 대한
극복 전략으로서의 노동자․민중 생존권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의미했다.
지난 4년의 고용유연화 정책의 결과 비정규직 비중은
55.6%(정부통계로는 53%)에 달하며 정규직 월평균임금에 비해
비정규직 월평균임금은 53.7%(2000년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부가조사)에 머무르며 이 중 비정규직 여성은
월평균 임금이 66만 5천원으로 정규직 전체 평균의 42.4%에
불과하다. 또한, 실업의 양산과 더불어 노동의 유연화는
노동조건의 악화와 노동강도의 강화, 그리고 불법 노동의 확산
등 전반적인 노동 환경의 급속한 악화를 낳고 있다.
중소영세업체노동자의 노동 조건이 더욱 악화되고 있으며 30만
이상으로 추산되는 이주노동자들 역시 대부분이
‘불법체류자’로서 최소한의 노동기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이 있는 곳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멈추어질 수 없다. 그것은 곧 ‘자본’이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멍에’인 셈이다.
작년에도 ‘대우차투쟁’, ‘한통 계약직노동자투쟁’,
‘의료재정 파탄을 둘러싼 보건․의료투쟁’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노동계급은 선두적 역할을 수행해
왔으며 올 초에도 발전노조파업을 통해서 그 힘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노동운동 그 자체’의 ‘위기’는 역사상 있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투쟁’은 남한의 노동자계급에게 학교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 왔다. 그리고 비록 산발적이고 지역적인 형태를
띄면서 지속적으로 ‘패배’해 오기는 했지만 ‘생존권 사수’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은 그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단련시켜
왔다.
작년에 진행되었던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이 보여주듯이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이해를 둘러싼 계급투쟁이
결국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생존권
사수투쟁에서 노동자․민중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은 자본과 총자본의 대행자로서 국가라는 점을 자각해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뿐이다. 사실, 과잉 자본 해소를 위한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노동자의 고용불안정과 노동강도의
강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층의 양산과
청년실업자의 구조화, 빈부격차의 확대와 민중복지의 파괴 등
전사회의 계급과 계층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전국적인 ‘정치’적 형태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는 그것이 ‘부르주아적 정치’, ‘현
지배체제의 정치질서’를 넘어서는 것인 한에 있어서, 이미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전제로 하는 ‘노조운동’ 그 자체로부터
스스로 발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조운동은 본질적으로
노-자의 계약적 관계를 모델로 하고 있다. 따라서 노조운동은
부르조아적 정치운동의 영역 안에서 ‘정치’를 수행할 수도
있고 이를 매개로 투쟁을 전개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이 질을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노총을 통해서 형성된
민주노동당은 노조운동이 낳은 최상의 부르주아적 ‘정치’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자생적 노동운동의 최고의 질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본질적으로 노-자 계약,
그것이 국가 권력 형태 안에서는 정당의 형태를, 사회적 권력의
형태 안에서는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형태를, 공장 안에서는 노조
형태를 가지는, 부르주아적 관계 안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운동으로부터 이와 같은 요구가 형성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와 전혀 다른 질을 가지는 정치운동이
현장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합의 체제나 계약모델로부터 벗어나
전사회의 생산과 소비를 그 스스로 통제하고 계획하려는 의지를
지닌 ‘계급적 정치’이어야 하며 그런 ‘정치’를 자신의 내적
질로 담보하는 조직운동이어야 한다. 여기에 정치 영역의 의회적
형태, 사회영역에서의 합의구조, 공장의 노조체계는 항상적으로
종속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현 지배권력구조’를
탈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혁명’을
‘사회혁명’으로 발전시키고 ‘현 지배권력’과 전혀 다른
질서의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정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을 가지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다.
2) 노동자계급 정치의 지연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무엇인가?
80년대 이후 남한에서는 끊임없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
지연되어 왔다. 그런데 ‘정치운동’의 지체는 현재 남한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단결을 저해하고
투쟁을 전국적으로 조직하지 못하도록 하고 절대적인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은 산발적으로
전개되면서 패배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노조 활동과 파업을
통해서 배운 ‘학습’은 노동자계급에게 현재의 투쟁이 강제하는
투쟁의 ‘정치적 성격’을 인식하도록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타파해 나갈 수 있는 자기 전망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패배’와 ‘생존의 위협’은 ‘경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 버리도록 하고 있다. 현장에서 나타나는 ‘실리주의와
타협주의’는 바로 이와 같은 빈자리를 대체하고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그들 스스로 신자유주의가 전국적으로 양산해 내는
실업과 비정규직 등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필요로 되는 것이 ‘계급적인 단결’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요원한 것으로 미루어지며 대신에 자신의 생존권을 획득할 수
있는 ‘자기 이해’를 따라 움직인다. 노-노간의 갈등,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간에 대립이
증폭되고 ‘계급적 단결’ 대신에 지배권력의
‘계급분할포섭전략’에 말려들어 ‘계급’이 아니라
‘생존경쟁을 하는 개인’을 선택하고 있다. 따라서 투쟁은
각개격파당한다. ‘정치운동의 지연’은 결과적으로
민주노조운동 자체의 후퇴와 위기로 전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4.2 발전파업의 결말과 ‘현장투쟁력의 약화’는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본질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지체되는 이상, 남한에서의 ‘사회적 조합주의’, ‘노-사
협조주의’는 당분간 지속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단순한 민주노총 지도부와 몇몇 개량화된
지도부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단사와 지역을 벗어나 전국적인
형태의 연맹들과 노총이 형성되고 이를 통해서 조합적 투쟁들이
전개되면서 이미 투쟁은 개별 자본가들이 아니라 총자본의
대행자로서의 국가를 직접 상대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조직되지 못할
때, 그것은 조합주의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며 그 때, 그것의
최대치는 ‘사회적 조합주의’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의 ‘계급’투쟁적 성격을, 총자본에
대한 총노동의 투쟁을, ‘자본의 집행체’로서의 국가 틀 안에
가두어 두려는 음모일 뿐이다. 이들은 노, 사, 정 삼자의 협의
테이블을 중심으로 노동자계급이 협상의 강력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
세력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총자본에 대항하는 무기로서의 ‘산별노조 건설’을 주장하거나
노동자계급의 정치 세력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뿐이다. 여기서의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 그 자신의
‘해방’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축적 메카니즘을
재조정하는 협상 파트너로 필요로 될 뿐이다. 즉,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대화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나타나는 관료화는 개량화와 한 쌍을 이룰 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의회주의적 전망과 양 날개를 구성한다.
결국, 현재 남한의 노동운동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조합주의’는 노동운동의 의회 세력화와 더불어 산별 단위로의
체제개편, 그리고 사회 세력화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사회적
협의주의를 유포함으로써, 국가 전체의 공공성 차원에서
총노동에 대한 관리․통제시스템을 완성하는 방향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국민과 함께
노동운동’으로 표현되는 세력은 이런 움직임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정치 세력화’는 현단계 노동운동의 발전이
예고하고 있는 ‘정치화’를 ‘의회 진출’로 협소화하고
노동계급을 자본가 정부의 파트너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남한의 노동운동은 97년 ‘노동자 대투쟁’과
지속적인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생존권 사수’ 투쟁에서,
‘개량’의 산물로서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진보정당’의
출현이라는 산물을 얻어냈다는 의미에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과 ‘사회적 합의’에 의한 지배 포섭 전략의 산물로서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과 같은 ‘의회주의’와
‘합법주의’, 그리고 노조의 ‘관료화’ 또한 생산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위기’는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 정치’의 지연에 의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과 기층민중운동 세력 내부에서 체제
내로 편입되고 흡수되기 시작한 노동 귀족과 노동 관료, 그리고
이에 기반한 ‘정치 세력화’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사회적 조합주의’, 또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형태를 띄는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을
시민운동과의 결합, 자본가와의 타협 등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대의’를 버리는 운동이다. 최근 ‘차이’를 통한
시민운동과의 ‘연대’를 주장하면서 ‘공공성 이데올로기’를
공통적인 기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노동자계급 정치의 지연’은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의
노동자계급의 패배를 낳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는
시민운동에게 운동의 주도권을 스스로 반납하고 현 지배권력의
권력적 분파로 자기를 해소해 버리는 운동의 궁극적인 기반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왜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 건설이 요구되는가?
최근 보수 정치권의 ‘정치위기’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이 불러온 국민 생존 조건의 악화와 삶의
파괴에 의해 나타난 ‘국민적 이반’으로,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의 필연적 결과이며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간의 모순이
낳은 필연적 결과이다. 그런데도 현재 우리나라의 민중민주운동
진영은 신자유주의 ‘개혁’ 전략에 말려들어 계급적 관점에서
변혁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6.15
공동선언’에 환호하며 김대중 정부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일삼았고 시민운동 세력은 국가 경쟁력, 합리적 개혁 등등을
부르짖으며 노동운동에 대해 ‘급진성’과 ‘합리적 타협’을
주장해 왔다.
게다가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을 따라 민주노동당의
계급연합정당 건설과 의회 세력화의 도우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사회 전체 차원에서 진행된 시장경쟁 중심의
체제개편과 노동유연화에 따른 잠재적․실질적 실업의
증대는 민중 내부에서의 경쟁 이데올로기를 더욱 격화시킴과
동시에 ‘생존권’의 위협에 절박하게 내몰리면서 ‘전망’의
부재를 드러내고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와 정리해고
저지투쟁이 결정적인 역전의 계기를 창출해내지 못하면서
지배권력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항상적으로 일상화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구축함과 동시에 주5일 근무제의
단계적 도입과 같은 노동분할통제전략을 구사함으로써
노동자계급 내부의 갈등과 경쟁을 격화시키고 대노동에 대한
분할포섭을 전개해 가고 있다.
따라서 지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현재적 지점은 자연 발생적인
노동운동과 대중 투쟁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질적으로
전화시키는 ‘전국적인 단일한 정치조직’의 부재로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계급분할포섭전략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의 단일한 계급적 단결과 행동을 이끌어 내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을 요구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근본 변혁의 중심에 서 있는 세력은 바로 사회화된 생산의
담지자인 노동자계급이다. 현재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생산해 내는 과잉 축적-과잉자본의 문제는 곧바로 노동자계급
자신의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산노동’이
거대 자본이라는 ‘죽은 노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여기서
사회화된 생산은 곧 노동자계급 자신의 노동인 셈이다. 그러나
‘사회화된 생산’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대체함으로써, 결국 전민중과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계급은 지배계급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받고
있으며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생산의 주체가 아니라 자본에
종속된 노예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요받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성장하면 할수록 자본의 침탈과 공세는 더욱 거세어진다.
그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분리 타격을 극복하고 하나로
통일된 계급과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여 일관되게 투쟁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이 자기 존재에 걸맞게
자신을 변혁적 계급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대항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 독자적인
정치 프로젝트가 요구된다.
지금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과의 명백한 대립 전선을
긋고, 그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실천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가 되는 ‘노동자 정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노동자 정치는 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실천적 행위의
중심이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발전해
왔다. 인간 사회는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그 사회에 독특한
모순들을 잉태했으며, 인간은 그 모순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
왔다.
인간의 실천행위는 반드시 행위하는 주체를 하나의 조직으로
묶는다. 그런데 이런 조직은 더 이상 노동조합적 조직과 실천
활동으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미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노동 대 자본이라는 계급적 대립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단순히 경제 활동 주체들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교환하는
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전사회적으로 이를 운용하는 ‘정치’의
문제로 발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화된 생산체제에
맞추어 소유를 사회화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정치적으로
노동자계급을 묶어 세우는 조직적 활동과 체계가 요구된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바로 이와 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 활동을
조직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이룩해 내는 ‘정치적인 전국적인
조직’, ‘변혁을 정치적으로 안내하는 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이다.
3.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의 건설을 위하여
1)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생산의 사회화와 사적 소유간의 모순은 경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즉, 사적 자본가들 개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서 전사회의 경제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전국적․전사회적 범위에서 생산량과
소비량, 그리고 경제 순환을 조절해 주는 사적 개인들을 벗어난
공공적인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국가의 ‘공공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
체제처럼 생산이 거대하게 사회화된 국가에서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국가에
의한 경제의 개입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본가의 이윤 증식
토대를 재정비하는 ‘총자본가의 대행자’로 등장한다는데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지난 IMF 이후 금융권의 부실화와
관련하여 공적자금을 150조나 투자했다. 이 모든 자금은 국민
세금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부어 국가 기업을 구제하고
살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 자본가들은 여전히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데에만 자신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은 기업이 망해도 ‘사적 재산권’은
보장받기 때문에 ‘국민의 혈세’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혈세’를 통해서 기업을 살린
이후에는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
노동을 착취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이 사적
소유와 생산의 사회화간의 모순으로부터 발생했듯이 생산의
사회화에 조응하는 소유의 사회화를 이룩하는 길밖에 없다.
‘사회화’란 각 직․공장 단위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공장만을 통제․계획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전체 차원에서, 그리고 전국적 차원에서 전사회의
소비량에 맞추어 각 직․공장 단위의 생산량을 결정하는
‘정치적’ 수준에서 생산 활동을 계획․통제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생산의 사회화란 경제를 정치의 문제로
전화시켜 ‘정치적 차원’에서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확보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각 직․공장 단위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모여 현재 국회와 같은 전국 생산자 대표
회의체계를 구성하고 여기서 각 지역 단위에서 선출된 대표들이
모인 지역 대표자들과 함께 전사회의 소비량에 맞춘 전체
생산량을 결정하고 이후 각 직․공장의 생산능력에 맞추어
생산량을 할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자 대표들과 지역
대표들이 모인 의회에서 실질적으로 전사회의 생산-소비를
계획하고 경제체제를 운영한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생산이 사회화되면 국가의 역할은 사적
자본가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지배하는 억압적 체계에서 전사회의
생산-분배-소비 체계를 원활하게 운용하는 자발적인 개인들의
결사체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때, 의회는 현재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국회와는 다르다. 현행 대의제 체계에서 국회는 입법
기관으로서, 법안을 발의․심의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사회화된 사회에서의 의회는 입법 기관이자
행정 기관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각
직․공장 단위의 대표와 지역대표는 그들 스스로 행정부를
구성하고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입안․결정할 뿐만
아니라 집행하는 의회와 행정의 통일체로서 실질적인 대표자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산의 사회화에 조응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추구하는 변혁은 대안 권력을
노동자․민중 스스로 준비하고 조직하는 ‘대체 권력’의
생산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변혁과정에서 이와 같은 ‘대체 권력’이 조직되지
못한다면 노동자․민중은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실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두 가지의 조건을 요구한다. 첫째,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노동자계급 스스로 기획하고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과 둘째, 기존의 국가 권력을
대체하는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권력체계를 그들 스스로 변혁
과정에서 생성시켜 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코뮌과
소비에트, 그리고 평의회 운동은 이런 ‘대체 권력’의 조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노동자계급
그 자신이 스스로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자계급이 대리적인 누군가를 선출함으로써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경제활동 전반을 통제하고 기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주의에서의 대체 권력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인 행위를 하는 정치권력이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결합되며 경제는 정치적인 것으로, 그리고 정치적인 것은
경제적인 것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경제는 순수한 전문 경영인의
‘경영’ 활동도 아니며 ‘정치가’들의 ‘정치적 술수와
타협’도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그 스스로 정치가로서
전국적인 생산활동을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결국, ‘대체 권력’은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혁명은 생산자들
그 스스로 단지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그 생산 자체를 기획하고
통제하는 자로서 조직된 대체 권력 시스템으로 기존의 국가
장치를 대체한다. 그리고 이 때 노동자계급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극복한 ‘정치적 주체’들이다. 행정은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의 대체권력형태로 조직된 권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통제되고 구체적인 행정실무는 ‘행정 테크노크라트
또는 관료들’을 고용해서 사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어떤 결정권한도 가지지 못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대체
권력은 전국적으로 조직된 현장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생산자
권력이 될 것이며 이것에 의해 모든 행정은 정치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과거 소련에서 보듯이 당이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장악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결정한 다음 소비에트가 이를
집행하기만 한다면 국유화를 통해서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되기는 하지만 노동자가 실질적인 이를 전유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를 장악한 당 관료들의 소유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대체 권력’은 당 자체가 장악한
권력체가 아니다. 당은 국가권력을 접수하는 실질적인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권력을 접수해서는 안 되며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장치는 파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신에 대체 권력이
들어서야 한다. 이 때 ‘대체 권력’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니라 계급투쟁 속에서 형성된 노동자․민중의 현장
권력들이다.
하지만 이 때의 현장 권력은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노조는 자본주의적 계약관계에 메여 있기
때문에 계급 이해에 매몰되어 전국적, 전계급적 관점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대체 권력은 일차적으로 노조 밖에 있으면서도
당과의 관계 속에서 발전되고 형성되는 그런 조직형태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체 권력의 맹아적 핵심은 노조 안에서 활동하면서도
노동조합의 인식과 투쟁을 민주주의 그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
그리고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활동들을 전개하기 위해서
노조 밖에 ‘정치가’들로 조직되어야 한다. 물론 대체 권력에는
노동자들의 조직들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의 경우, 병사,
농민 소비에트가 있었듯이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 구성되고
조직되어야 한다. 다만, 현재 남한에서 그런 조직 형태가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한의 계급투쟁 역사에
의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 정당은 국가
권력의 ‘바깥에 있는 조직’이면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함으로써 ‘대체 권력’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안내하고
조직하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2) 노동자 계급의 정당은 어떤 원칙 속에서 만들어져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이룩하는 변혁과 관련되어
제기되어 온 변혁론은 크게 두 가지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대의제적 의회 민주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노동자․민중
후보가 선거에 나가 다수당을 차지함으로써 독점 자본들을
국유화하고 이런 국유화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전통적인 서구 사민주의 전략이며 다른 하나는 우선
총자본가의 집행체로서의 국가 권력을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이
국가 권력을 접수함으로써 전국적 단위에서 국유화 조치를
시행하고 이를 통해서 사회주의로 이행하자는 정통적인 소련식
마르크스주의 전략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두 입장은 제 2인터내셔널의 쌍생아이다.
베른슈타인류의 서구 사민주의는 소비에트 혁명 이후 스탈린에
의해 변질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표현되어
왔다. 하지만 이 둘은 국가 권력을 접수함으로써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즉,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민주의는 점진적인
국유화 조치로, 소련식 정통은 급진적인 혁명을 통해서 국가
권력을 접수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양
입장은 노동자계급이 직접 대체 권력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서
기존의 국가권력을 대체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노동자계급은 ‘정치적 주체’로 조직된
대체 권력을 통해서 ‘사회화’ 조치를 이룩해 갈 수 없다. 서구
사민주의는 여전히 사회주의로 이행하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의
실질적인 집행 권력으로 전락했으며 전통 스탈린주의는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당 권력이 접수함으로써 국유화를 사회화로
이행시켜 가지 못했다. 서구 사민주의는 여전히 대의제 체계
안에서 의회에 대표자를 선출하는 투표 행위로 노동자계급을
묶어 세운다. 전통 스탈린주의는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노동자계급의 전위체라는 당의 지도적 원칙을 통해서 당권력이
접수하고 소비에트를 결정 단위가 아니라 결정된 것을 집행하는
전달벨트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노동자계급이 실질적으로 생산수단을 접수하고 그들 스스로 이를
계획하고 통제하는 혁명은 본질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변혁의 과정은 또 다시 특정한 대표자들, 혹은 정치가들을
선출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직접
생산활동을 하는 노동자들 스스로 전사회의 생산수단을 전유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화하는 그런 변혁이다. 만일 우리가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하는 활동 대신에 국가권력을
접수한 이후 국유화 조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노동자계급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대한 타격만을 중심으로 ‘당’을
구성한다면 혁명 이후 국유화한 생산수단을 가지고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실시하는 특정한 집단이 필요로 될 것이다.
레닌의 네프가 당면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으며 스탈린주의란
바로 이와 같은 전국적인 회계와 통제를 실시하는 정신노동에
대한 전유를 통해서 형성된 관료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
따라서 변혁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자계급이
주체로 조직되는 당 활동과 조직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원칙에 근거한다. 첫째, 노동자계급 정당은
국가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전국적인 회계와 계획을
직접 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하고 그들
스스로 대체 권력이 될 수 있도록 조직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둘째, 생산자들에 의한 직접 통치가 곧 사회화의 가능조건이라는
점에서 대체 권력은 생산자 스스로 권력을 구성하는
직접민주주의 형태로 조직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첫째, 대체 권력에서도 대표자들이 직․공장 단위로
선출되어 전국 대표자 의회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 체제가 되기 위해서는 각 선출 단위에서 소환권과
발의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직접민주주의의 핵심은
대표자들이 순전히 각 선출단위의 대리자로서 행위하도록
선출단위가 통제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정당도 이와 같은 원칙 하에서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하는 구성 체계를 가져야 한다.
둘째, 대체 권력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만 실질적인 사회적 권력으로 전화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정당 또한 노동자들이 당 활동 속에서, 그리고
현장의 투쟁 속에서 그 스스로 민주적인 정치가로서 훈련되고
조직될 수 있도록 정보가 공유되고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셋째, 대체 권력은 의회와 행정의 분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의회와 행정이 통일된 권력형태이다. 따라서 당 조직 또한,
아래로부터 직접 민주적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말하는
의회’ 형태가 아닌 ‘집행하고 결정하는 의회’ 형태로
조직되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조직운동에서 나타난 기묘한
현상 중에 하나는 이런 조직 형태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스탈린적 당 형태나 서구 사민주의와 유로꼼 정당의
특징은 첫째, 국가권력의 장악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며 둘째,
당적 구성원리가 의회와 행정의 분리 체계라는 점이다. 이것은
당의 목적과 구성 원리에서 볼 때, 부르주아 정당과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또한 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특히, 90년대 이후 전개된 탈맑스주의적 흐름은
스탈린주의의 극복이 아니라 친시장적․친부르조아 정치적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협상과 타협의 모델, 그리고 ‘의회
진출=정치세력화’라는 일면적 관점은 이와 같은 혼란을
부추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 정치를 노동자 자신의
‘정치’가 아니라 그들의 ‘정치’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꼬뮌적 맑스주의’와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정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7. 마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의 발전은 ‘정치조직’
건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민주노총, 현장조직과 의회정당 조직까지를 포함하여 노동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 나온 조직들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는 현 시기
‘노동자계급 정치의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아울러
노동운동 외부까지를 포함하는 민중연대와 전국연합, 그리고
시민운동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시기 주요 논점은 민주노총의 개량화와 관료화, 그리고
시민운동의 탈계급화로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진실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개량화와 관료화를 비판하지만
비판은 그것이 실질적인 물리력으로 전화되지 않는 이상, 현실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비판을 넘어서 실질적인
운동으로 이것을 강제해 가는 운동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여전히 누군가의 책임, 특정 개인들의 부도덕성에 대한
마타도어식 비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반격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과연 현장의 투쟁력은 높은데 민주노총 상층이
교섭주의에 빠져 투쟁을 배신하는가? 시민운동의 영향력이 과연
탈계급적인 그들의 노선에 있는가? 그리고 현장조직의 발전이
난관에 봉착하고 있는 것이 과연 현장조직 자체의 조직적 질과
대기업 중심의 조직력에 있는가? 문제는 보다 근원적으로
물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속에서 근본적인 ‘위기’의 원인을
진단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이 ‘위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상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도 ‘추상’이 아니라 ‘현실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운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대중운동’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도 ‘대중운동’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현실운동’의 진전 속에서 나타난 ‘위기’를 ‘현실의
대중운동’으로만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운동에서 대중적
운동 형태는 반정립과 분파적 정립성만을 낳을 뿐이다. 따라서
전국적인 관점에서 이들 운동의 동력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환류시키고 이로부터 미래의 전망을 열어가는 새로운 질을 가진
조직의 건설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으로서 ‘당
건설’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당’ 자체에 대한 의혹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실현가능성에
대한 의혹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은 ‘당’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조직
건설’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당’을 물신화하기 때문이다.
마치 ‘당’은 출현하는 그 순간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서,
‘강철블럭’으로서, 대적 전선의 ‘지도부’로서 존재한다고
믿는 환상 말이다. 따라서 이들은 ‘당’을 신비화한다. 하지만
‘당’은 그 조직의 출범과 함께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해 가는
조직이다. 이미 ‘당’ 자체가 완성된 것으로 보는 그 순간,
우리는 모르는 사이 ‘스탈린적 당=이성의 화신,
강철블럭으로서의 당’ 관념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주어진 현재의 과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운동
그 자체가 요구하는 것이며 운동의 동력으로부터 강제받는
것이다.
물론 이제 시작되어야 하는 당은 기본적으로 그 전과 다른
형태와 내용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계급운동 그 자체가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은 ‘당 조직’의 건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전국 곳곳에 산재하는 써클적 분파들이 아니라
전국적이고 전세계적인 시대를 함께 나누고 호흡하는 그런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현재의 질곡
상태, ‘노동자 정치운동’의 지연을 극복할 수 있다. ‘노동자
정치운동’의 지연은 사실상 정치조직들의 ‘지역성과
분파성’에 오히려 더 의존한다. 사소한 차이가 행동의 통일을
저해하고 정보의 지역성과 편협성이 상호 소통을 가로막는다.
또한, ‘노동운동’으로부터 단련되고 자각하기 시작한 혁명적인
노동자들까지 이 질곡 상태에 의해 오히려 ‘정치적 발전’에
장애를 겪고 있다.
현장조직운동이 노조선거에 매달리고 지역운동가들이 전망의
부재 안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전국적인 단일
조직으로서 정치조직’의 부재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협소하고 자기 중심적인 세계로부터 벗어나 전국적이고
전계급적인 관점에서 ‘정치운동’의 흐름을 열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중운동 자체의 발전을 통해서 ‘아래로부터
추인되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기반 위에서
‘위로부터 자임하는 의지’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질곡 상태를 타개하고 그 질곡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흐름’을 창출하는 것, 그것은 바로 ‘당 건설’이다.
‘조직적 운동’ 없이 이와 같은 ‘물리력을 가진 운동’,
‘현실을 바꾸고 물리력으로서의 운동’을 창출할 수 있는
‘운동’은 시작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정치운동의 진전은 오직 ‘전국적인 단일 정치조직’ 건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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