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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조직과 관료주의

현장에서 미래를  제80호
신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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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병 현/교육위원장



노동자 조직과 관료주의


최근 들어 노동운동에서 부쩍 자주 듣는 단어 중의 하나가 관료주의라는 단어이다. 96~97총파업 시기나 그 이후 민주노총 상층의 보수적이고 특정 성향의 정치주의적 행태를 보면서 여러 노조 활동가들이나 좌파 블록에 속하는 단체들에서 노조 관료주의에 대한 성토가 거세게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해 혹자는 한국사회 노동조합들에서 관료주의가 무슨 문제가 되냐며, 오히려 관료주의가 부족해서 문제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관료제와 관료주의는 분명 다른 범주이기에 구별되어야 하며, 관료주의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관료제적으로 노조의 조직을 형식적으로 정비하는 일이 더 시급한 실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하튼 관료제와 관료주의 문제가 한국사회 노동조합운동 내부 논쟁의 주요 화두로 대두되고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노동조합 관료제와 관료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다소 모호하고 잘못 이해된 점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러한 노동자 조직에서 나타나는 관료주의의 토대가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 조직들에서 필요한 실천이 무엇인지 검토해 본다.

1. 관료제와 관료주의
노동조합이 관료제적 구조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위의 견해가 근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왜 노동자들의 조직이 관료제적 형식성을 갖추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다. 노동조합은 ‘법적’, 형식적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공식적인 제도로서 승인될 수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집합적 이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다양한 기능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실용주의적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지금과 같은 노조의 형식적 구조는 노동자 운동의 역사적 산물이고, 노동자 투쟁의 성과라고 대중주의적으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하필 그러한 구조를 갖추고 당연하게 그런 구조가 어느 조직에서나 일반화되는 것일까?
사실상 사회주의 운동이나 맑스주의 운동에서는 대중의 조직화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관료제나 관료주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왔고, 노동조합의 관료화에 대해 비판해 오기는 하였지만, 노동자 계급이 어떤 조직적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던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뒤로 돌리고, 먼저 관료제와 관료주의라는 용어와 그 사용법의 문제를 검토하면서, 노동조합의 관료화 현상은 자본주의적 국가장치의 계급적 기능과 긴밀하게 관련된 경향이며, 부르주아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모습이라는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부르주아 사회학의 관료제 논의
흔히 부르주아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 관료제적 현상에 대한 언급을 한 대표적인 인물로 꼽혀 자주 인용되는 사람이 사회경제학자인 막스 베버(Max Weber)이다. 그는 관료제적 현상과 자본주의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런 관계를 합리화의 증대란 측면에서 보았다. 형식적인 합리성이란 통념에 의거하여, 그는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형태와 관료제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면서,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와 관련된 모순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관료제(bureaucracy)를 합리적-법적인 정당성 혹은 지배를 위한 모델로서, 그리고 정치적 행동규범의 주체로서,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서 법 또는 관리 분야의 전문 관료들에 의한 통치의 전형적인 조직모델로 파악한다. 또한 관료주의(bureaucratism)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영역에 걸친 조직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규범적 모델의 총체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조직들에서 일반적으로 관찰 할 수 있는 이념형적인 모델로서 관료제의 ‘합법적’ 귄한 체계의 조직을, 공적 업무의 조직의 법적 기초, 기능적 분화와 제재들, 위계적 배열, 통제권의 위계적 분화, 기술적이거나 법적인 업무, 공사의 분리, 직책 전용의 금지, 문서화된 기록에 의존한 행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관료제적 조직은 비인격적 의무, 직책의 위계구조, 전문화, 계약을 기초로 한 임명, 전문자격에 기초한 선발, 화폐봉급, 유일하고 주된 직업, 경력구조의 존재, 자원을 전용금지, 통제 및 규율 체계에의 복종 등의 특징을 갖는다고 보았다.

2) 맑스주의의 관료제 논의
한편 맑스주의 정치학자 풀란차스(N. Poulantzas)는 맑스와 엥겔스, 레닌, 그리고 베버의 관료주의에 관한 논의를 검토하면서, 관료주의는 국가장치 기능에 특별한 효과를 갖는, 권한의 위임에 의한, 국가장치의 위계적 조직을 표현한다고 보았다. N. Poulantzas, Political Power and Social Classes, London: Verso, 1978, pp.325~359.

국가장치들의 관료주의적 조직화에서 나타나는 특징들로 특히 강조되는 점은, 국가장치들의 기능 집중과 행정적 집권화, 장치의 지식들을 계급들에게 체계적으로 은폐하는, 관료제적 비밀주의, 장치 자체 내에서의 지식 은폐와 고위공직자의 지식 독점, 고위직의 높은 교육수준과 하위층의 문화 결여 등이다. 또 관료주의는 국가 장치 조직화의 규범적 모델로 작용하며, 권력 및 기능의 위임에 의한 엄격한 위계적 기능, 상층으로부터의 정당화, 특수한 내적 권한배분 형식, 상위층에 대한 책임의 조회, 국가장치 기능의 통일성을 관료제로 귀속시키도록 함으로써, 합리적 법적 정당성을 실현하는 중립적 장치로서 보이도록 하며, 이를 통해 그것이 수행하는 계급적 기능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국가구조의 융합을 표현하는 용어이다.
이런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베버의 ‘합리적, 법적 정당성’에 기초한 일반화된 조직모델로서 관료제를 제시하는 것은, 그 구체적인 기능수행에서 국가장치들의 조직방식과 기능수행이 갖는 계급적 성격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법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논의일 뿐이다. 결국, 베버에 의한 관료주의의 일반화된 모델 논의는, 국가가 마치 중립적이고 ‘효율적으로’ ‘공공성’을 대변하는 전문적 관료들에 의해, 업무를 처리하는 ‘조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하며, 자연스럽게 일반화된 조직화의 모델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유도한다.
그람시, 엥겔스, 레닌과 후기의 맑스는 관료제 현상과 자본주의 국가, 사회구성체간 필연적 관계와 이 관계의 모순적 성격에 초점을 두고 논의하였다. 이들은 베버주의자들이 관심과는 달리, 관료제가 자본주의 국가 장치의 병리적이거나 예외적인 작동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따라서 ‘좋은 관료제’와 ‘병리적이고’ 부패한 관료제, ‘역기능적인’ 관료제 논의는 애초부터 국가권력과 국가정치들의 계급성에서 커다란 인식의 오류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관료제와 관료주의 법 이데올로기는, 애초부터 자본주의적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들의 형성에 본질적인, 계급성을 형식화한 것으로서, 그 고유한 표현형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공공부문에 속한 노동조합에서 거론되거나 슬로건화 하는, ‘공공성’과 ‘효율성’ 담론은 관료주의의 중립적 외관 탓에 일정하게 관료제하의 반 경향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쁘띠 부르주아적인 경향에 기초하고 있음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이 조직 장치들에서 기능하는 관료집단들을 지배하는 부르주아 조직합리성 모델, 즉, 관료주의로의 종속은 그들이 마치 계급 중립적인 행정적인 절차와 정책들을 통해, 불편부당한 공공이익에 효율적으로 봉사할 수 있은 행정 담당 주체로 인식하도록 하는, 상상적인 동일화를 야기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기업의 지배구조 및 작업장 체제나 일반적인 대중조직들에서도 일정하게 물질화된 형태로 재생산된다. 노동조합 행정(즉, 통치)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노조 간부들이나 조합원 대중들의 관료주의 역시 동일하게 국가의 계급성을 인식하지 못한 이데올로기적 통념들에 기초하고 있는 의식형태라고 할 수 있다.


2. 국가장치와 노동자 조직의 계급성 문제
관료제를 둘러싼 혼란은 기본적으로 그것이 갖고 있는 계급적 본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관료제에 대한 논의는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그람시의 저작 등 거의 모든 맑스주의 고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권력 및 국가장치들의 관료화와 노동조합의 관료화 현상은 혁명적 계급정치와 잉여가치의 착취와 그 조건으로서의 국가, 그 관계의 전화 혹은 이행의 문제.
밀접하게 관련된 핵심적인 이슈였다. 이들의 국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국가권력은 임노동의 착취를 둘러싼 계급적 이해의 대립에서 비롯되는 계급 간 적대와 투쟁의 역사 속에서 계급독재로서 형성된다. 즉, 생산 및 착취의 제 수단을 계급적으로 독점함으로써 결과한다. 국가는 계급투쟁의 형태의 발전에 따라 변형되는 역사적 세력관계(특히 경제적 세력관계)에 의존하며, 이와 같은 착취 및 적대관계인 계급지배관계의 정치적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제도화된 폭력이며, 계급지배의 도구이다. 그것은 때로는 법적 형태로 때로는 폭력적 형태로 실현된다. 국가권력은 물질적 조건들 속에 원천을 갖는 절대적 권력으로서, 그 헤게모니를 사회관계 영역들에서 재생산한다. 곧, 국가권력은 지배계급에 의한 권력의 유지와 행사의 구체적인 과정 속에 실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속에 사회관계의 영속적인 재생산과 그것의 혁명적 변형을 위한 조건들이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논의는 E. Balibar, On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London: NLB, 1977.

이런 정식화는 국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국가는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들의 복합이고, 정치권력은 지배계급의 한 분파로서 지배계급 대표자의 권력(지배계급의 조직)인 동시에 국가장치를 중심으로 ‘합법적으로 조직된’, 사회에 대한 지배력(사회 전체의 조직: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의미한다. 후자와 같은 법 이데올로기 때문에, 정치적 지배는 국가 장치의 기능 속에서만 실현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계급이나 종속된 계급과는 결코 관계하지 않는, 계급 중립적 외관을 띠는 가운데, 사회에 대한 국가 자체의 권력처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국가 장치에 의해 실현되는 계급 지배 관계는 국가장치의 기능이 실현되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은폐되어 버리고 만다.
국가장치는 구체적인 기능 작용 속에서, 즉,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실천들 속에서, 계급관계를 실현시킨다. 이 때문에 국가의 법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에 결부된 환상들(예컨대, ‘일반화된 조직관’으로서 권한의 위계적 조직화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공공성’의 ‘중립적’ 실현 등의 부르주아 및 쁘띠 부르주아적 의식 형태들)이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이 환상들 자체는 다시금 국가장치들의 기능양식 속에 합체됨으로써, 국가장치가 실현시키는 계급관계에 대해 환상이나 몰이해를 산출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장치는 억압적 장치일 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것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관계는 경제적 구조와 노동자 조직형태들 속에서도 제도와 실천들로 물질화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노동자 조직의 관료제화는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관계 아래 있는 따라서 노동자 대중 운동의 한 경향적 표현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특정한 시기에 전개되는 자본운동은 부르주아의 노동과정에서 취해지는 공세적 계급투쟁으로 인해 야기되는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 과정과 그 귀결로서 계급적대의 다양한 내적 분할을 야기한다. 발리바르 저, 이해민 역, ꡔ역사유물론 연구ꡕ, 푸른산, 1990.
지식/ 육체노동 분할, 민족적, 지역적, 성적인 분할이 이것이다. 이러한 계급적대의 재생산 과정에서 국가장치가 수행하는 역할은, 기본적으로 노동력 재생산 조건의 보장과 노동자 계급조직들에 대한 분열과 종속을 위한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공세이다. 윤소영, ꡔ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경제학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하여ꡕ, 한울, 1987.

우리가 국가 관료제와 관료주의와 같은 국가 장치들의 관료제화 경향을 역사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문제인식에 준거해야 할 것이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 계급의 다양한 조직형태를 검토할 때에도 ‘국가권력과 국가장치의 총체’이며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 노동자 조직의 관료화 문제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이제 앞서 제기했던 두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즉, 노동조합은 계급적 적대관계 속에서 투쟁의 산물로서 노동자 계급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노동자 조직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새로운 노동자 정치 형태의 발전하기보다는, 왜 항상 관료주의적 방식으로 조직되며, 노조와 노조 리더쉽은 조합주의, 개량주의, 보수주의, 사회민주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는가?
노동조합의식을 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혹은 쁘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가에 대해서, 하나의 답변은 “그것이 오래되었고, 보다 체계화되어 있으며, 훨씬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하여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John Kelly, Trade Unions and Socialist Politics, London: Verso, 1988, p.30.
그렇다고 해서 노동조합을 매도하거나 회피하거나해서 해결될 수 있은 문제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상태가 늘 운동의 조건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인식 속에서, 노동조합과 같은 노동자 계급 대중조직의 명확한 한계들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그에 대한 조직적 대안의 모색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단지 좌익 모험주의로 나갈 뿐이라고 비판되어 왔다.
주지하다시피, 노동자 계급 조직의 관료화 현상은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혁명적 이행과 관련한 복잡하고 심각한 논쟁과 문제들을 야기했다. 여기서는 이 논쟁을 상세히 살펴볼 수는 없지만, 앞서서 살펴본 국가권력과 국가장치의 계급성, 관료화 문제가 현실 사회주의 국가 형성기에 실현되었던 모순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나타났던, 생산력주의적 편향(자본주의적 과학적 관리법의 기술주의적인 채택과 자본주의와의 경쟁과 파산)과 국가자본주의적 노동통제정책, 일인관리제, 관료 간부집단의 지배,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 자생적 공장위원회 운동과 그 조직의 파괴 등의 역사적(긍정적, 부정적) 경험들은, 현 시기 한국사회에서의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이나 정치 운동 속에서도 여전히 드러나는, 개별성(자발성, 자율성)과 집단성(규율과 의식화)의 통일이라는, 조직화에서 야기되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해당 자본주의 발전에서 사회구성체가 가지고 있었던 특수성이나, 정치적 정세 등의 요인들의 영향도 무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실존하였던 역사적 경험을 단지 상황적 요인들로 얼버무려 덮으려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경우, 그것은 특정한 사회구성체의 역사, 사회, 문화적 전통과 관행의 산물인 동시에, 자본운동의 역사적 산물로서, 역사적 조건에 따라서 특정한 형태로 조직되어 온 대표적인 대중 조직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규합하는 대중적 조직화 형식으로서의 노동조합과 노동자 대중이 처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변혁시키는데 중요하게 기여하는 노동자 계급조직의 역사적 한 형태로서 노동조합이라는, 그 근원적인 이중성으로 인하여, 노동조합 운동에서는 항상 관료주의(특히 리더쉽의 관료화)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사실 맑스주의 고전들은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자 계급들이 자신들의 노력에 의하여 단지 노동조합 의식(trade union consciousness)만을 발전시켜 왔음을 지적해 왔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의 대부분의 노조들에서 드러나는 정치적 개량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면서 노동조합의 이러한 성향은 예외적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이라는 점이 관찰되었고, 대부분의 나라들의 노동조합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획된 노예상태에 있음이 주목되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조합의식이나 개량주의적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한 지식인들과의 결합을 통한 혁명적 계급의식으로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런 인식은 대체로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운동에 대한 지식인들의 부정, 긍정의 양가적인 태도에 바탕을 둔 이론화와 논쟁, 그리고 독립적이거나 연계된 몇 개의 조직적 관계를 역사적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적 노동자 계급조직과 지식인과의 독특한 역사적 관계는 앞서 지적된 사회주의 이론과 역사적 경험과 관련된 심각한 조직모순들을 야기했다.
혹자는 지식인과 노동운동의 역사적 융합을 말하지만, 그 구체적인 형태는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이나 유기적으로 통일된 조직에 대한 개념화, 볼셰비키의 민주집중제의 구체적 양상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루카치의 대자적 계급의식에 대한 낙관적인 논의, 그리고 구체적인 운동 속에서 그것들이 변질된 모습들(관료제적 지식독점과 비밀주의를 포함한 조직의 지배 장치화와 그것을 정당화하는 관료주의, 권력물신주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리더쉽의 보수주의, 대중추수적 합리화와 실용주의적 의사결정, 그리고 그것의 전제가 되는 헤게모니적 권력 독점 등)으로 분열된 모습들로 점철된 모순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문제가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하에서 그것의 변형을 추구하는, 노동자 계급조직 형태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고, 그것에 프티부르주아 및 노동자 계급의 실천적 이데올로기가 종속되어 있는 비대칭적인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하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의 형태들이며, 그것의 지속적인 실천들의 효과로서 물질화된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다.
‘조직’은 정치,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 즉, 정치, 이데올로기적 투쟁이 실현되고 그것들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물질화된 장소이며, 그러한 관계를 변형시켜내기 위한 실천의 조건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조합이나 당조직을 비롯한 다양한 노동자 조직들 속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통치의 수단으로서, 지배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담론 구성체)에 종속된 다양한 실천 이데올로기들이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 지배적인 지위를 획득하고 실현시키고자 투쟁하며, 다양한 장치들 속에 그러한 성격을 은폐한다. 그러한 조직들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총 과정에서 사회적 생산관계를 모순적으로 재생산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특정한 장소 중 하나이며, 또 혁명적 전화를 위한 투쟁의 조건인 것이다.
또한, 특정한 조직적 형태는 해당시기 특정 사회구성체의 특정한 정치적 국면 하에서 매우 모순적이며 불균등하게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노동자 조직들 사이에 위치하며, 구별되는 특수한 영역적 속성을 가지며, 계급투쟁 상태에 따라 조건지워진,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가 물질화된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의는 신병현, 「조직분석방법론」, ꡔ현상과 인식ꡕ, 1991, pp.9~65.

여기서 문제는 사실상 추구하고자 하는 대중적, 운동 실천적 이상 혹은 그와 관련된 이행 과정에 대한 인식의 차이일 것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사회민주주의에서도 역시 방법은 다르더라도 사회의 점진적 전화를 말한다. 노조 간부의 관료제 옹호도 단계론이나 정세분석 차이에 근거한 전술상의 차이나 의회주의적 방법 등의 방법적인 차이로 환원될 위험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운동이 추구하는, 아니 만들어가는, 궁극적인 상이 무엇인가가 다시금 물어져야 한다.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ꡔ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ꡕ, 이론, 1993, pp.163~190. 「공산주의 이후에 어떤 공산주의가 오는가?」, 윤소영 편저, ꡔ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과 소련사회주의ꡕ, 공감, 2002, pp.59~79.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서 조직적 실천 및 이데올로기적 동요가 현저하게 드러나는 자본과 노동의 위기의 시기인, 현 시기에 역사적 경험들과 현존하는 다양한 조직적 실천의 문제들을 견주어 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이다. 노동자 조직의 관료주의 문제는 현 시기 운동의 문제인 동시에 운동의 미래가 걸린 관건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단순히 방법주의적,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역사적 실패를 반복하는 일 일뿐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한 논의에 기초하면서, 구체적인 예 속에서 관료주의를 넘어설 수 있은 방안을 살펴보기로 하자.
최근 들어서 노동운동계에서 발전노조 ‘직권조인’ 사건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이 사건 자체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입장에 따라서 아주 큰 차이를 보일 것이지만, 이런 일은 수준은 달라도 단위 노조의 단체교섭과 파업타결과정에서 그 동안 자주 있었던 것이다. 대개 논란이 되었던 사건들은 조합원들의 투쟁열기와 간부(일부 활동가 조직)들 간의 상황인식 차이에 기인하거나, 위원장 등 간부들에 대한 회사와 정부측의 뇌물을 통한 회유나 육체적, 심리적 위협이나 가족에 대한 압박, 그리고 사민주의적 노동단체나 정당, 노동브로커들의 매개와 설득 등에 의해서, 결국에는 막후 거래 사실의 은폐와 동시에 대중적 집회를 통한 봉합 등의 형태로 조합원 대중의 기대를 저버리거나 하며, 나아가 직권조인으로 타결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이것은 관료주의, 노조민주주의, 노동자들의 실천이데올로기와 노조운동의 사회민주주의 성향, 엘리트와 대중관계 등 아주 여러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전체적으로는 조합원에 대한 간부 엘리트들 간의 관계문제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매개하는 것이 조직이며, 이것을 관료주의 쁘띠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및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정당화하고 조직운영 실천에 체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조직실천에 대한 반성들에서 다양하게 제기되었듯이, 노동자 대중이 노조조직으로, 그리고 노동자 계급이 당조직으로 환원되는 모순과 근원적으로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조직이 운동을 대체하고, 운동이 계급을 대체하고, 조직적 실천과 계급 및 이론을 단지 상상적으로만 동일화하는 운동의 긍정적/부정적인(유산이면서 장애) 관행과 조직관과 관성적인 운동의 실천들이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논쟁과 이론적 반성이 실천 활동에서 배제되고 소수에게 독점됨으로써 발생하는 조직 실천 운동의 역사에 공통적이었던 조직들의 모순이다.
이런 경향은 여러 가지 다른 것들로도 확인될 수 있다. 예컨대, 노조의 조합주의적 경향과 사민주의적 조합관료와 엘리트들은 조합원들의 자생적 사민주의적 실천이데올로기를 매개한다. 조합원대중들과의 노동조합의 비대칭적인 관계 구조(권력집중, 실질적 비민주성, 현장 혹은 조합원으로부터의 장기간 분리, 지식 및 정보 독점 등)로 인하여, 대체로 파업투쟁 시 대중들의 의식적 투쟁 열기는 고조되는 반면, 간부엘리트들의 관료주의적 관행(위계주의, 비밀주의, 권한위임, 전문가주의 등)은 국가의 회유와 공세 형태 등 여러 가지 외적, 내적인 요인들의 영향아래서, 그러한 투쟁의지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때 회사측이나 노동운동 브로커, 정부측의 회유와 압력이 들어오고 타협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앞서 살펴보았던, 간부나 노조조직 실천에 녹아있는 사민주의 쁘띠 부르주아 정치-이데올로기로서 관료주의에 바탕은 둔 정당화 논리와 부르주아 및 프티 부르주아, 그리고 사민주의적 문화와 실천 이데올로기의 영향아래 있는 노동자 계급의 조직적 실천과 관행들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이러한 질문을 개인적인 윤리나 도덕성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잘못 제기된 것이어서,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전위시킬 위험을 갖는다.
맑스주의 운동의 특정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노동조합을 비롯한 운동조직들에 고유한 조직에 대한 일반화된 통념들 및 구조와 관련되어 있고, 이와 관련된 제대로 된 인식과 이론이 부재(?)한 맑스주의 역사적 모순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르게 보면 맑스주의의 ‘역사적이고 위대한 발명인’ 당적, 조직적 실천에 충실하게 몸을 담을 수 없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당연하게 직면하게 되는 문제이기에, 그들의 철저한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이론적 단절이 부재하기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다르게 보면,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노동운동을 비롯한 맑스주의 운동과 대중적인 경제 이데올로기들(국가주의, 민족주의 등)과의 불완전하고 미봉적인, 대중추수주의적 접합, 혹은 운동과 그들이 디디고 서있는 대중들의 실천이데올로기들 혹은 문화와 이에 대한 이론적 맹목, 그리고 실천적 실용주의, 기회주의와도 연결된 문제일 것이다.
심지어 노조의 일상적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서, 특히 대기업 노조에 의해 운영되는 수익사업이 있고, 각종 납품사업의 경우, 이것들을 담당하거나 책임을 지는 간부들은 항상 회계조작과 리베이트 관행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정부관료나 기업의 담당자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고위 책임자들 사이에 관료제라는 조직적 형식을 매개로 한 부패 사슬이 형성된다. 이것도 늘 새로운 조직적 실천의 모색으로 가기보다는 노조를 규제하는 법적 제도적(형식민주주의, 회계제도, 단기의 임기) 제약과 관료주의적이고 대중에 영합하는, 추수주의적이며 소극적인 사업방식으로 처리된다. 언제나 노조 조직은 기업이나 정부 조직의 관료제를 전형으로써 거의 무의식적으로 모방해 가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노조의 조직구조나 관행에 대해서 조직적으로 다른 대안들이 그리 많이 모색되지도 못했고, 개선책도 제시되지 못한 운동의 문제가 더 큰 문제이다.
새로운 대안과 혁신의 모색은 항상 극소수의 제출된 대안에 대한 토론으로 되어 다른 가능성은 배제되고 단기적인 대중적 검증을 통해 유행처럼 확산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대개 실천적 실용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즉 형식적으로만 보편주의적 외관을 띠지만, 실질적으로 부르주아적 유형의 형식들의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탈각할 수 있는 검토와 조건이 없이 실용적으로 조직구조와 관행, 정책, 기법들을 채용하고 그것을 대중적 검증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조직이 정비가 잘되면 될수록, 안 되면 안 될수록 이런 경향은 관료주의적 정치주의나 헤게모니 장악 논리를 실질적으로 더욱 더 합리화, 강화하고 대중이나 활동가들을 억누르거나 주체성을 억압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관료주의 내부의 반 경향으로서 대중성의 강조는 이런 경향과 궁극적으로 타협하고 그 내부에서 급진적 기회주의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의 좌파 블럭 활동가들에게서 보이는 것이 이런 좌파 기회주의이다.

여기서 그래서 어떻게 라는 질문이 늘 나오지만, 어떻게의 문제는 활동 실천의 몫이다. 사실 수많은 정책적 대안들은 그저 대안들일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조급하지 않고, 그러한 방안들이 지속적인 이론적, 실천적 반성과 논쟁 속에서, 꾸준한 작업을 통한 대중적 발명으로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강조되어야 할 점은, 활동가나 연구자 모두가 같이 대중들의 실천적 이데올로기에 우선 주목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되고 변형되는 노동자계급 문화와 그것의 대중적 운동을 통한 조직적 확산과 교육이 주요한 노동자 계급운동의 정치적 실천으로 자리 잡혀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것이 바탕되지 않은 채, 현실 실천의 긴박성이 운동에서 강조된다면 그것은 아무런 보증 없고 구체적이지 못한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것일 뿐일 것이다. 결국 운동에서 논쟁과 반성, 대중적 계몽이 올바르게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한/노/정/연

2002-10-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3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