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환경
환경문제와 생태적 전환의 요청
홍 성 태/ 상지대 교양과 교수, 사회학
1. 근대화와 환경문제
오늘날 우리는 지독한 환경문제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늘도,
땅도, 물도, 그리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생물들도 환경문제의 영향을 받고 있다. 금수강산은 이미 오래
전에 ‘공해강산’이 되었다고 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사실 환경문제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환경문제는 언제나 나타났던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대문명도 환경문제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이스터섬은 석상을 세우기 위해 삼림자원을 남벌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커다란 석상들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황량한 곳이
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인류 문명의 발상지였으나,
바로 그 문명이 번성하면서 주위의 자연자원을 남용한 결과로
역시 황량한 사막이 되고 말았다. 인류의 문명 자체가
환경문제의 근원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환경문제는 고대문명은
물론이고 훨씬 더 가까운 과거에 우리의 선조들이 경험한
환경문제와는 상당히 다른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환경문제는 요컨대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기술적으로 공업주의,
문화적으로 인간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의 가장 밑바탕에는 물론 공업주의로 대표되는 생산력의
발달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근대화에 따른 환경문제의 영향을
파악할 때도 우리는 우선 공업주의의 영향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공업주의란 공업력의 이용을 중심에 두고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문제는 공업력의 특징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석에너지의 사용에 바탕을 두고 자연의
무차별적인 변형과 개조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힘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환경문제는 무엇보다 이 놀라운 힘의
무분별한 이용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이 힘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은 더 이상 자연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의
본성은 물질과 에너지의 무한한 순환인데, 우리의 공업력은 이
순환을 산산이 깨트려버렸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환경문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것은
공간적 확산성과 시간적 지속성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예컨대 고대의 그것처럼 특정한 지역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제가 발생한 지점을 넘어서 더 넓은
지역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구 전체로 확산되는 경향을
갖는다. 또한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이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우리를 괴롭힌다. 그 영향은 수십 년이나
수백 년의 시간단위가 아니라 수만 년이나 수십만 년이라는
사실상 무한과 같은 시간범위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우리가 역사의 진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근대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청한다. 근대화의
결정적 전제였던 무한한 성장이란 명백히 ‘신화’이며, 따라서
이런 점에서 근대화에 관한 우리의 신념은 완전히 포기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다른 내용과 방식으로 발전과 진보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화의 모든 원리, 요컨대 공업주의는
물론이고 민주주의, 자본주의, 인간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2. 생태위기의 시대
근대화를 통해 인류는 빠른 시간에 엄청난 물질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러나 그와 함께 환경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마침내 위기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명백한
우리의 현실이다. 이와 관련된 가장 두드러진 예는 이른바
‘지구적 환경문제’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그리고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지구온난화는 지구의 기온이 높아져서 지구 전체에 걸쳐
이상현상이 빈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지구의 기온이 높아진
까닭은 물론 근대화 때문이다. 예컨대 화석연료를 사용하게
되면서 그로부터 발생한 기체들이 지구의 대기권에 두텁게
쌓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지구로 들어온 태양열이 다시 외계로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지구 자체가 마치
하나의 온실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산화탄소이다. 이 기체는 화석연료를 가장 많이
쓰는 곳인 공장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는 데,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근대화는 곧 어마어마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대기 중으로
배출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진 결과로 수십억 년에 걸친 ‘공진화’의 산물인
지구생태계 자체가 갑작스런 이상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오존층 파괴는 지구의 성층권을 둘러싸고 있는 오존층이
파괴되어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입히는 자외선을 비롯한
각종 우주선이 지구로 쏟아져 들어오게 된 것을 가리킨다.
지구에 생명체가 번성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층권 오존층이
자외선이며 각종 우주선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지구를 지키는
것은 ‘독수리 5형제’가 아니라 바로 이 성층권 오존층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 오존층이 모두 없어진다면, 지구는 달이나
화성처럼 황량한 별이 되고 말 것이다. 오존층 파괴의 주범은
‘프레온’(Freon)이라는 상표명으로 널리 알려진 CFCs라는
화학물질이다. 미국의 듀퐁사에서 개발한 이 물질은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에어컨의 냉매제, 스티로폼이나 무스 같은 것을
만드는 발포제, 그리고 전자제품을 씻는 세척제로 널리
사용된다. 그런데 이 물질이 성층권으로 올라가서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질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는 역설적 현상을 여기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역설적 현상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주의하지 않은 ‘오만한
문명’의 필연적 결과이다. 공업력이 갖고 있는 무서운 잠재력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오존층 파괴는 잘 보여주는 것이다.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는 지구온난화나 오존층 파괴에 비해
우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별 전체가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는 결국
그런 변화를 초래한 우리 자신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래 전에 한 인디언 추장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은 서로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생명체가 모두 사라지고 우리만이 이 별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얼마나 외롭겠냐고, 우리는 그런 외로움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단순히 ‘감성’적인 차원의 지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생물종의 급격한 감소는 우리에게 대단히
실제적인 문제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구의 생태계는
수십억년에 걸친 ‘공진화’의 산물이다. 생물종의 급속한
감소는 결국 지구생태계의 급격한 교란을 가져온다. 꽃이 펴도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고, 해충이 창궐하며 전염병이 만연하게
되고, 식량이며 의약품의 부족과 같은 심각한 현상을 낳게 된다.
그러므로 시애틀 추장이 말한 ‘외로움’은 단순히 감성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생물종 다양성의 감소는 다른 생물만의 문제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3. 환경에서 생태계로
환경문제가 생태위기로까지 치닫게 되면서, 문제를 보는 우리의
관점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환경문제에서
‘환경’이나, 생태위기에서 ‘생태계’나 모두 ‘자연’을
가리킨다는 점에서는 같다. ‘환경’이나 ‘생태계’나 모두
‘자연’이라는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인 것이다.
그런데 두 용어는 어떤 점에서 다른가?
환경이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둘러싼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이 작용하고 있다. 요컨대 인간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면, 인간을 뺀 다른 자연은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적 존재로서 자연의 한 요소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보자면, 이런 식의 이분법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식의 인간중심주의는 한마디로 오만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은 곧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체이고,
다른 자연은 그 주체의 욕구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에서는 인간이 다른 자연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느냐만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다른 자연을 파괴하고 그로써 자연
속의 존재인 인간 자신의 운명도 걷잡을 수 없는 위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것은 철저히 무시된다. 이런 근대적 인간을
우리는 그 동안 ‘파우스트’ 식으로 찬양해 왔다.
생태계라는 용어는 이런 식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인간을 자연 속의 한 존재로 파악한다.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여러 가지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만이 주체라는 생각은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관점이 생태계라는 용어에는 포함되어 있다. 생태계는
생명체와 비생명체, 다시 말해서 생물과 무생물이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다. 둘은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 본래 모든
것은 비생명체에서 시작되었다. 물질의 운동과정에서 생명체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생명체가 나타나면서 이 세상은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생명체는 비생명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다시 비생명체는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고, 이렇게 해서 생명체와
비생명체는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하는 ‘공진화’의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공진화의 체계 자체가 바로 생태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환경이 아니라 생태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관과 자연관의 심대한 변화를 함축하는 것이다.
환경에서 생태계로 논의의 틀이 옮아가는 과정은 환경문제가
생태위기로 치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것은 자연의 국지적인
이상상태가 자연의 재생산 자체의 이상상태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변화를 올바로 파악하고 대처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우리는 자연을 환경이 아니라 생태계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연의 이상상태를 단순히 환경문제로 보는 관점은
주체인 우리가 마치 자동차를 고치듯이 자연의 이상상태를 고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 자체는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이상상태를 생태위기로
보는 관점은 이와 크게 다르다. 그것은 현재의 이상상태가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재생산 자체의 이상상태이므로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포함한 자연의 재생산 방식 전체를 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으로 본다. 이로부터 자연의 급격한 이상상태를
유발한 근원이 근대화에 있으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우리를 포함한 지구생태계 자체의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생태계라는 용어는 새로운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본래의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의 자리에
차분히 앉아서 문제의 실상을 올바로 인식하고 삶의 방식을
고쳐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미 위기 속에서 살고 있다.
4. 세 가지 길
생태위기에 처해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도 지난 30여 년 사이에 이미 아주 많은 논의들이
제시되었지만, 여기서는 이것을 크게 세 가지로 줄여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현상유지’의 길이다. 이것은 근대화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고 있는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에 완전히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생태위기는 지구적 현상이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지구화된 상태에서 완전한 ‘현상유지’를 주장하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하다. 오늘날은 이미 무역협정에서조차
생태위기에 대한 대응이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현상유지’의 길만이 사실상 유일한 갈 수 있는 길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 전체에서 공업화가 갈수록 진척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생태위기의 정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관계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점에서 보자면, 이른바 선진국의 풍요를 위해 생태위기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사실 지구적
생태위기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미국이 ‘지구의
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미국의 인구는 세계 인구의 4.5%밖에 되지 않지만, 지구온난화에
대한 기여도는 무려 33%에 이른다. 그러므로 미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현상유지’ 국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지구적인 차원의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지구적인
차원의 생태위기를 완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
둘째, ‘근본적 전환’의 길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길이다. 이른바
‘근본생태론’이라고 불리는 생태주의의 한 조류가 이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 길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명한 ꡔ미래소년 코난ꡕ에서도 멋지게
형상화되기도 했다. 이 영화는 핵전쟁으로 파괴된 미래의 어느
때를 배경으로 한다. 핵전쟁이 끝나고 세계는
‘인더스티리아’와 ‘하이하바’라는 두 지역, 아니 두
문명으로 나뉜다. 전자는 공업문명을 고수하는 쪽이고, 후자는
생태문명으로 돌아간 쪽이다. 이 영화는 전자의 몰락과 후자의
부상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전개와 결말은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이 이런 식으로 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는
데에 있다. ‘하이하바’는 햇빛에너지를 포함한 생명에너지를
사용해서 약간의 공업력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농업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는
생태사회이다. 과연 이런 정도의 생산력으로 수십억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셋째, ‘개혁적 전환’의 길이다. 이것은 근본적 전환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의 문제를 고려한 일종의 타협책이고
절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 길은 ‘생태적 현실주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룬 공업문명의 문제와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는
동시에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어도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는 있는 공업문명의 능력을 강조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기술을 총동원해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생태위기를 훨씬 더 완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이미 마련된
기술조차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아니 활용할 수 없는 우리의
사회적 구조에 있다. 다시 말해보자. 우리는 공업문명의 한계를
철저히 인정하되 그것을 급격히 떠날 수도 없다는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모순에 대한 인식이 이 길의 출발점이다. 모순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갖추어져 있다. 문제는 그 능력을 충분히 펼 수 있도록 사회의
권력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적 전환’의
요체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세 가지 길의 예를 모두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이 ‘현상유지’의 길을 대표한다면, 1960년대의
히피운동같은 데서 볼 수 있었듯이 문명으로부터 ‘탈주’해서
나름대로 ‘근본적 전환’을 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국가
권력의 변화를 통해 강력한 환경정책을 실시해서 공업문명의
생태적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상유지’의 길은
사실상 생태위기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안으로
논의될 수 없는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길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여기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의 ‘연대’가 결국 가장 중요한
실천적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판단은 각자의 몫이며,
또한 그 판단에 따른 실천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도 역시
각자의 몫이다. 생태위기에 대해 우리는 모두 큰 책임을 지고
있다.
5. 생태적 전환의 시대로
근본주의와 개혁주의의 차이를 넘어서 적어도 생태위기의 현실을
인정하고 대안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해서 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인류에게 대성공을 가져다준 공업문명의 생태적 전환이 절박한
시점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생태적으로 바꿔가야 한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지만,
생태적 전환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유한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생태운동은 생태위기를 우려하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다.
생태위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생태위기를 피해갈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누구나 관심을 갖고 대응책을 찾아야 하는
문제, 그것이 바로 생태위기이다. 이 점에서 생태운동은 문명의
전환을 추구하는 운동이며, 생태적 전환은 시대적 과제이다.
물론 생태위기의 현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정도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생태위기가 닥쳐왔다고 해서 곧 지구가
생태적 종말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니며, 아직까지 그 영향은
지리적 및 사회적 경계를 따라서 차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생태위기는 그 원인과 영향의 모든 면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두가지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첫째, 사회적 불평등은
생태위기의 보편성에 관한 우려를 흔히 약화시키곤 한다.
생태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기만 하지만 실제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현실에서 생태위기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것은 현실을
호도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썩은 물, 썩은 공기는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둘째, 우리가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생태위기와 함께 사회적 불평등이 생태적 불평등으로 이어져서
불평등의 구조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생태위기의 보편성은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데에 주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생태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과제는
‘민중운동’의 경우에 더욱 더 절박하다.
예컨대 노동운동의 경우를 보자. 많은 경우에 노동운동은 대체로
‘더 많은 임금’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더 많은 성장’을 요구하기가 십상이다. 그 대가로
생태위기는 더욱 더 악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얻은 ‘더
많은 임금’은 생태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어야
한다. 노동운동이 성장주의를 통한 생태적 악순환의 고리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자체가 생태적 전환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의 반목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과 생태운동의 연대가 사회운동의 중대한 과제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런 연대로는 사실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동운동은 스스로 생태운동을 추구해야
한다. 공업문명의 생태적 전환 자체가 노동운동의 핵심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전환은 생태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해
필수적이며, 또한 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돈이 없다면 사람답게 살기 어렵다.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난은 그런 차원을 훨씬
더 넘어서 사람을 비참하게 할 수 있다.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자연이 파괴된 곳에서는 누구도 사람답게
살 수 없다. 우리 자신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의 파괴는 곧
우리 자신의 파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비록 돈은
적더라도 자연이 살아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사람답게 살 수
있다. 자연적 존재로서 우리 자신도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자연의 중요성을 올바로 깨닫는 데에
비로소 근대화의 폐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 길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은 길이 되기 위해서는 평등의 과제를
생태적 차원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 사이의 불평등까지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여겨야 한다. 요컨대 생태사회는 생태적 평등사회를 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과연 우리는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서로 교감하며
공생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튼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므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생태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구적 차원으로
조직된 거대한 생산과 소비의 체계를 바꾸는 것뿐만 그 체계
속에서 구성되고 운영되는 각자의 일상을 바꾸려는 노력도 물론
따라야 한다.
우리는 왜 사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결코 낡아빠진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생태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새롭게 곱씹어야 하는 절박한 화두이다.
한/노/정/연
현대중공업노동자 안윤길의 두 번째 시집
골리앗이 울고 있다
“…일터에서 시위의 현장에서 늘 가슴이 답답했고 먼가
끄적이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주절주절 푸념과
분노를 글로 담아냈더니 사람들은 그것을 시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애초부터 문학 따위를 하는 전문글쟁이와는 거리가 먼
그저 한 노동자일 뿐이다.
하나 느낀 게 있다. 생활이 절박할수록, 투쟁이 치열할수록
가슴에 와 닿는 시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역으로 내 시가 그저
시큰둥하게 읽힐 땐, 내 삶에 절박함과 치열함이 없었다는
말이고 그럴 땐 어김없이 동지들의 질타가 있었다. 글이란
이처럼 거짓이 없는 것이었다.
막상 시집을 내고 보니 참 부끄럽다. 이것은 곧 내 삶이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끊임없이 반성하며 노동자로서 남은 생을 올곧게
살아가리라 다짐한다…”(후기 중에서)
□ 글쓴이: 안윤길
□ 펴낸곳: 도서출판 노동자의 힘
□ 쪽수/가격: 159쪽/5000원
□ 문의/이메일: 02)2068-4405/pwc @
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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