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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전략과 노동체제의 변동

현장에서 미래를  제82호
노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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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정권의 노동통제전략과 노동체제의 변동



노 중 기

연구위원/ 한신대 교수 노동사회학





1. 머리말

임기를 불과 몇 개월 앞 둔 현재 김대중 정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원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지난 3월과 4월 정부는 발전노동자들의 파업과 노조활동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진압하고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 해외매각 일변도의 기존 정책을 고수하였다. 또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을 구속하는 등 경찰력에 의한 억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9월 11일 보건의료노조 장기 파업사업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으로 노정간의 대립은 이제 파국적인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1)

정부가 개혁정책으로 선전했던 주40시간 법정노동시간 단축과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인정 문제도 파행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2년 이상의 기간동안 노사정위원회에서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정부는 개혁적 조치라는 정치적 선전 효과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노동자들의 이해를 철저히 배제하였던 것이다. 실노동시간 단축, 노동조건의 개선이라는 입법취지와 완전히 배치되는 정부의 입법안, 그리고 노조조합 명칭조차 인정하지 않는 공무원노조 합법화방안을 보면서 노동자들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1997년 3월 노동법 개정으로 노동정치의 구조적 환경이 크게 바뀐 시점에서 집권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기대는 사실 특별한 것이었다. 집권 이전부터 스스로를 노동자와 서민의 정부로 규정하는 등 김대중 정권의 초기 정책방향도 그런 기대를 부풀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실현될 수 없었다. 때로 정부가 보여주었던 선한 의도는 내외적 조건들의 복잡한 작용 속에서 쉽게 무산되곤 하였다.

이 글은 김대중 정권 5년의 노동정책을 평가하고자 한다. 우선 참여와 협력, 그리고 노동기본권 보장의 기대로 출발했으나 과거를 능가하는 억압과 노동배제정책으로 귀결하였던 노동정치의 변동과정은 일차적인 연구대상이다. 구조조정과 노동자들의 저항, 그리고 노사정위원회와 신노사문화 등 복잡하고 현란했던 지난 5년간의 노동정치 변동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것이다.

한편 김대중 정권 시기의 노동정치는 1987년 체제의 해체 이후 새로운 노동체제 형성을 위한 과도적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 노동체제는 1997년 초의 겨울총파업과 3월 노동법개정, 그리고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1998년 이후의 노동정치는 이전의 그것과 단절적인 요소들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 정권 시기의 노동정치가 모순적이고 모호한 요소를 많이 안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참여와 협력, 새로운 개혁적 노사관계는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기조와 함께 주창되었으며 공안기구가 주도한 노동탄압은 노동행정의 민주화, 노동기본권의 회복이라는 담론과 공존하였다. 요컨대 김대중 정권 시기의 노동정치는 그 성격이 매우 모호하고 불명료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모호한, 그리고 모순적인 노동정책의 성격을 분석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이 글의 두 번째 과제이다. 통제방식의 측면에서 노동정책의 실행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 결과를 전체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 1987년 체제에서 행해졌던 통제전략과 통제방식은 비교의 준거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를 통해서 우리는 향후 새롭게 구축될 노동체제의 성격에 관해 일정한 정도로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다음 정권 시기의 노동개혁의 과제를 설정해보고자 한다.

이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2절에서는 노동정책의 전개과정을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3절에서는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을 통제전략과 통제방식의 특성이란 측면에서 살펴본다. 1987년 체제의 노동통제와 비교할 때 나타나는 연속성과 단절성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노동정치체제 변동의 방향을 조망하면서 새로운 노동개혁의 과제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2. 김대중 정권 노동정책의 전개과정


1) 전반기 노동정책(1998.2~2000.6)

김대중 정권의 전반기 노동정책은 다시 크게 두 개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시기는 집권 이전이었던 1998년 1월 노사정위원회 구성으로부터 그 해 8월말 현대자동차 쟁의에 대한 노사정합의에 이르는 짧은 기간이었다. 이 시기의 노동정책은 노사정위원회의 구성과 운영, 그리고 몇 차례의 합의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므로 노사정위원회 합의기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9월 초 만도기계파업사업장에 대한 공권력투입으로부터 2000년 6월 말까지의 시기이다. 현대자동차 합의 이후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고 노사정 간에 대립이 심화되었던 이시기는 노정 대치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합의기에 정부의 노동정책은 노사정위원회라는 합의기구를 중심으로 실행되었다.2) 이 기간동안 정부는 노동측과 두 차례의 노사정합의와 두 차례의 노정합의를 이루는 등 합의의 정치가 계속되었다. 노동자와 서민의 정권이라는 수사처럼 노동정책은 이전 정권과 크게 다른 양상을 보였고 그 중심에는 노사정위원회라는 합의기구가 있었다.

1월 초 갑자기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측의 여러 가지 견제에도 불구하고 2월 6일 상대적으로 손쉽게 중요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정부의 주요한 관심사는 IMF가 요구하는 정리해고와 파견노동자제도의 도입을 최 단기간 내에 관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규모의 실업사태가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발전하여 집권 초기에 권력기반이 위협받지 않도록 노동운동을 통제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사정위원회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유력한 정책수단으로 기획되었다.

2․6합의의 기본 구도는 IMF와 자본이 요구하는 노동시장 유연화제도와 노동이 요구하는 노동개혁의제를 교환하는 것이었다. 노동측이 요구한 개혁의제는 공무원․교원의 노동기본권 허용, 노조의 정치활동 허용, 실업자의 초 기업 단위 노동조합 가입, 노동시간 단축, 노동이 참여하는 참여적 구조조정 실행, 부당노동행위의 근절, 노동복지제도와 예산의 대폭적 확대 등 매우 광범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부는 추상적으로나마 이런 의제들 모두를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고 합의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부는 노동측에 약속한 개혁의제들을 실행할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합의 이후 조직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경험한 노동측은 5월 이후 정부에 합의 이행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6월 5일과 7월 25일 노정합의를 통해 다시금 구두선(口頭禪)만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합의 이행을 요구하는 5월 말과 7월 말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대해서 정부는 물리적 위협과 함께 다시금 합의를 앞세워 불만을 무마하기에 급급하였다.

예컨대 6월 중순 금융부문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안을 결정하는 안은 노사정위원회가 아니라 정부의 경제부처에서 일방적으로 발표되었다. 그리고 여타 노동개혁과제들의 이행은 노사정위원회 내부 논의과정에서 무작정 지연되었고 때로 왜곡되었다. 또 만 명 이상의 대규모 전투경찰과 언론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이루어진 8월 24일 합의도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관심사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법제화와 실행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기의 노동정책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포섭전략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개의 합의과정에서 정부는 노동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총력투쟁, 총파업투쟁 등에 대해서도 제한된 억압으로 대응하였고 곧바로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몇 가지 노동개혁의 약속 외에도 노동복지의 예산이 크게 늘어나고 제도가 확대되는 등 정책적 변화의 시도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9월 이후 노정 대치기에 국가의 정책은 보다 강경한 것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2․6 합의와 8․24 현자합의를 거치면서 대규모 정리해고를 위한 제도적 장치와 실행 경험을 확보하자 정부입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노사정위원회 정치의 필요성이 현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노정대치기의 정책적 과제는 5대그룹 빅딜에 따른 대기업 구조조정, 공공부문의 민영화와 해외 매각을 정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었다(김상조, 1999; 조효래, 2001).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노사정위의 기능이 축소됨에 따라 노정간의 대립 가능성은 점차 커지기 시작하였다. 기업구조조정은 노동측이 요구한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재벌구조의 해체나 민주적 지배구조가 아니라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와 노동조건의 후퇴 등 비용절감 중심의 구조조정이었다. 공공부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기획예산위원회를 중심으로 정부는 인력 감축, 예산 삭감의 지침을 획일적으로 하달하였고 경쟁 강화, 복지 축소의 신자유주의 정책 방침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98년 9월 초 만도기계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투입은 그 시발점이었다. 조폐공사의 경우에는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빌미로 하여 국가와 사용자는 노조파괴공작을 불법적으로 벌이기도 하였다. 또 참여적 구조조정과 2․6 합의의 성실 이행을 주장하는 민주노총의 요구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적으로만 반응하였다.3) 핵심 사업장과 구조조정 쟁점에 대해 강경한 방침을 굽히지 않았던 정부의 정책 방침은 대체로 2000년 상반기까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구조조정 반대를 앞세웠던 1999년 4월 서울지하철 쟁의가 있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것이었다. 노동측의 반발과 개혁의제의 소실로 노사정위원회의 기능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그것의 존재가치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현장에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노사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는 노사정위원회의 존재 자체가 조직적 이데올로기적 통제기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었다.

1999년 2월 말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최종적으로 결의하고 이후 노사정위원회가 무력화되자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복구하기 위한 작업을 서둘렀다. 급조된 노사정위원회법이 5월초 국회를 통과하고 3기 노사정위원회가 9월에 출범하였다. 그렇지만 노사간, 노정간 대립이 확대되는 가운데 노사정위원회는 거의 무력한 기구로 전락하였다.4)

또 쟁의에 대한 억압은 확대되었지만 그 정도는 매우 절제되고 제한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구조조정이 직접적인 쟁점이 아닐 경우에는 합의를 유도하거나 지도부에 대한 구속과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제한적인 수준에서 탄압이 진행되었다.5)

노정간의 대립 속에서도 정부는 유화적인 조치를 속속 내놓은 것도 이 시기를 특징짓는 현상이었다. 교원노조의 합법화 조치(1999.7), 민주노총의 합법화(1999.11), 노동시간 단축 방침 발표(2000.5)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들은 2․6 합의사항이었고 노동측의 강력한 요구에 대한 대응이었던 만큼 그 의미가 제한된 것이었으나 일방적 구조조정의 정책과는 구분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또 1999년 8월 15일 대통령은 ‘신노사문화’와 ‘생산적 복지’라는 두 가지 정책구상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 신노사문화는 ‘대립과 갈등의 노사관계를 청산하고 참여와 협력을 실천하는 노사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 한계가 뚜렷하였지만 정부의 공식담론은 합의기의 ‘참여와 협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6)

요약하자면 김대중 정권 전반기 노동정책은 이전 정부의 그것과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주었다. 초유의 공황사태에 직면해서 노동유연화 제도를 도입하고 인력 감축, 비용삭감 위주로 구조조정을 행하는 신자유주의정책을 강하게 실시하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실행이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합의정치, 개혁의 담론으로 은폐되어 있었다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또 노동에 대한 억압은 제한적이었고 절제된 것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노동정책의 성격은 모호하게 나타났으며 그만큼 노동통제의 효력은 배가되었다.


2) 후반기 노동정책(2000.7~2002.9)

집권 중반기에 맞은 총선과 남북정상회담은 노동정책의 흐름이 바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크게 패배하고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직후부터 정부는 노동운동을 강하게 억압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하였다.

2000년 6월 말과 7월 초 롯데호텔노조와 사회보험노조에 대한 공권력 투입은 후반기 노동정치의 출발점이었다. 이 두 사업장에 대한 공권력투입은 전반기의 다른 사례와 달리 백골단부대의 투입, 무차별적 폭력 행사, 음주 폭행과 성희롱 등 매우 잔인한 것이었다. 또 10일 항의집회과정에서 경찰은 의도적으로 민주노총 위원장을 폭행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연말의 시중은행노조 파업에 대해서도 정부는 강경한 진압방침을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7월 당시의 약속과 노사정위원회의 수 차례 합의를 뒤엎고 일방적인 구조조정방안을 고수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공권력으로 진압하였던 것이다.

정부의 정책 변화는 12월 대통령이 주재한 경제정책조정회의와 2001년 초 대통령이 밝힌 ‘강한 정부론’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4대 부문 개혁과제의 하나로 제시된 노동개혁은 ‘생산적 노사협력체제의 구축’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 실제 내용은 ‘불법행위 엄정 대처’, ‘법과 질서 준수 원칙과 노사협력’, 곧 노동통제의 강화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라는 신자유주의 정책목표와 직접 연결되어 있었다.(김태현, 2001: 259~261)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적 의지는 2월 대우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대규모 정리해고와 공권력 투입, 진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4월 10일 이에 항의하는 해고노동자들에 대해 경찰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또 6월 초 정부는 민주노총의 총력투쟁과 조종사노조의 파업에 대해서 범정부적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전면적인 탄압을 가하였다.7) 이런 억압은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고 물리력으로 진압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 특징적인 것은 단위노조가 아니라 민주노총을 주요한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정부는 민주노총을 더 이상 대화의 상대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8)

2002년에 들어와서도 정부의 억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2월 25일 구조조정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파업에 대해서도 정부는 ‘법과 원칙’을 앞세운 억압방침을 한 치도 굽히지 않았다. 38일 간 계속되었던 발전산업노동자들의 파업은 민주노총과의 노정합의로 종결되었으나 실제로는 정부의 파업파괴, 불법파업 엄단 방침이 관철된 것이었다. 파업이 진행된 38일은 물론 파업이 종결된 이후에도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노동조합 활동 자체를 통제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9) 또 9월 11일에는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와 교섭 기피로 장기파업에 돌입한 보건의료노조 산하 파업사업장에 대해서도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정부는 직권중재제도와 이를 앞세운 사용자의 교섭 기피 등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던 반면 노동조합의 불법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을 앞세워 철저하게 대응하였다.

전반기 노동정책이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모호한 것이었다면 후반기에는 억압의 강화라는 분명한 특징을 갖고 있었다. 두 시기 노동정책의 변화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지표는 노사정위원회의 기능 변화였다.

전반기에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위한 제도 도입, 그리고 그 실행과정에서의 정당성 확보라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기제는 양대 노총의 참가와 노사정위 의사과정에서의 분할 지배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참가 거부로 말미암아 후반기에 노사정위원회는 이런 기능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 노사정위는 한국노총만을 상대로 하는 제한적인 이데올로기기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2001년 2월 정부는 전임자임금지급금지 유예와 사업장단위 복수노조 불허라는 수단으로 한국노총과 또 하나의 노사정합의에 이르렀다. 이 두 가지 사항은 한국노총의 존재기반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핵심적 사안이었다. 한국노총을 노사정위에 묶어둘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억압을 가능케 한 또 하나의 배경요인이었던 것이다.10)

전반기와 마찬가지로 후반기에도 중요한 정책적 개혁과제가 노동정치의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주40시간 노동시간단축과 공무원․교수의 노동기본권 보장, 그리고 비정규직 보호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더불어 한동안 무기력했던 노사정위원회는 2000년 하반기부터 다시금 노동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인 민주노조들이 배제된 채 진행되었고 정부는 구체적인 개혁의지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자 대중과 민주노조의 제도 개혁 요구를 무마하고 지연시키며 그 성격을 왜곡하는 기능을 적절하게 수행하였다. 2002년 7월에 오면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의 정책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제도개혁의 실질적 반대 혹은 제도개혁을 명분으로 한 노동조건 저하의 시도였다.11)

표면적으로 전 후반기의 노동개혁은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비슷한 개혁의 의제, 노사정위라는 동일한 기구에서 추진된 점 등 현상적 유사성은 뚜렷하다. 그러나 그 내적 동학은 매우 상이한 것이었다.

전 후반기 노동정책의 변동에는 여러 가지 내외적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먼저 2000년 상반기부터 다시 나빠지기 시작한 경제상황을 지적할 수 있다. ‘경제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정권의 정당성 기반으로 삼았던 김대중 정권로서는 경기의 급속한 악화가 치명적인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수단은 노동 탄압이었다. 그것은 내외 자본의 투자를 자극하고 자본파업을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다음으로 2차 구조조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노동에 대해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정부는 ‘2단계 노동부문개혁’을 통해 2001년 2월까지 기업부문과 공공부문 구조조정을 완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대우자동차와 은행노조, 그리고 한국통신과 발전산업노조 등 노동측의 반발 가능성은 순조로운 구조조정의 최대 걸림돌로 이해되었다.

셋째, 노동진영의 강한 반발도 탄압으로의 선회를 야기한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전반기에 노동자들은 심각한 고용불안과 노사정위의 합의정치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본질이 드러나고 구조조정의 폐해가 본격화되면서 조직노동자들의 도전이 점차 강화되었던 것이다.12)

넷째, 제도정치의 정세 변화도 중요한 변수였다. 총선 패배에 따라 권력 기반이 약화되었고 각 부문에서 연이은 정책적 실패는 정부의 입지를 크게 좁혀놓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의약분업파동과 의료보험재정 파탄, 인사정책의 실패, BK21 등 교육정책의 실패, 새만금개발 등 환경정책의 후퇴 등 통일정책을 제외하면 정부는 전방위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노동억압은 위기 탈출의 유력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대통령의 ‘강한 국가론’은 신자유주의국가의 강한 국가이기도 하지만 정세적 위기 국면을 돌파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결국 여러 가지 내외적 조건 속에서 김대중 정권은 후반기에 노동운동에 대한 강한 억압정책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반기동안 약간 모호했던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은 후반기에 그 억압적 성격과 노동배제의 전략적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억압 강화에 따라 전반기동안 정부 정책을 장식했던 ‘참여와 협력’, ‘노동개혁’, 그리고 ‘신노사문화’의 담론은 그 빛을 잃었고 노사정위원회는 자신의 존재기반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 후반기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 노동통제전략의 본질적 성격은 전 기간에 걸쳐 변함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반기의 합의정치나 노사정위원회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장치나 통제수단에 불과하였다.(노중기, 1999, 2000)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계급 배제라는 노동정책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전략적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 시기와 상황의 제약 속에서 점차 변화하였을 따름이었다.

또 이런 변화는 노사정위원회와 참여, 합의의 이데올로기가 신자유주의의 정책기조와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심각한 실업과 경제공황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용인될 수 있었던 노사정위원회의 합의정치는 상황의 변화와 구조조정의 심화에 따라 점차 기반을 잃어갔다. 신자유주의와 ‘합의의 정치’가 양립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한국의 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13)



3. 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전략: 연속성과 단절성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전면적으로 배제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이전 정권의 노동배제전략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특히 후반기의 노동 억압은 현상적으로 본다면 1989년 노태우정권의 공안탄압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4)

그러나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은 한국의 노동정치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예감하게 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확대와 강화, 고용 실업 비정규직 노동자문제 산별노조 전환문제 등 새로운 노동정치 의제의 출현, 노사정위원회 설치와 합의정치의 실험, 민주노총의 합법화 등 변화의 요소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90년대 말 이후 시작된 노동체제의 구조변동 효과가 노동정책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노중기, 1999, 2000)

이 절에서는 구조 변동에 따른 국가 노동통제전략의 변화와 연속성을 구체적인 수준에서 검토할 것이다. 노동통제전략과 통제방식의 두 가지 차원에서 1987년체제 노동통제와의 연속성과 단절성을 정리하고자 한다.


1) 노동배제전략의 지속: 신자유주의 노동정책과 노동억압

IMF경제관리가 시작된 초기국면에 집권한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은 흔히 영미형 신자유주의정책으로 규정되었다.(김세균, 2000; 손호철, 2000) 영미형 신자유주의사회에서 노동정책은 크게 세 가지의 정책방향을 지향하게 된다. 그 첫째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민영화, 해외매각을 통해 공기업을 시장질서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다. 둘째, 국가는 노동조합의 활동과 노동운동을 강하게 통제하여 이들의 시장개입을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셋째, 사회민주주의체제에서 확대된 복지 공급을 줄이고 이를 다시 상품화하는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시장원리를 노동정책의 핵심원리로 하며, 노동계급의 이해를 체계적으로 배제하고 시장에 종속시키는 것을 지향하는 노동배제전략이었다.

먼저 김대중 정권은 노동시장 유연화, 인력 삭감과 민영화 해외매각 위주의 구조조정, 노동시장정책을 집권 전 기간을 통해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과잉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고용유연성을 강하게 요구하였던 IMF와 내외의 자본의 요구를 충실하게 추종하였다.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 정리해고와 파견노동자제도의 법제화는 그 출발점이었다. 1999년부터 도입이 예정되어 있었던 정리해고를 1년 앞당기기 위해 신 정부는 전력을 기울였다. 또 현대자동차 구조조정에서는 노사정위는 물론 정부의 전부처가 행정력을 집중하여 정리해고를 관철하고자 하였다. 이는 민간의 조직부문에서 자유로운 정리해고의 선례를 남기려는 전략적 목표 위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또 정부는 금융부문과 공공부문에서 대규모 인력감축 위주의 구조조정을 강압적으로 실시하였다. 공공부문의 경우에는 미리 설정된 감축인원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15)

IMF의 요구와 긴급한 경제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이런 정책지향은 일종의 강박증에 가까운 것이었다. 대우자동차의 구조조정, 정리해고 사례는 정부 구조조정 정책의 경직성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정부는 미국 업체로의 해외매각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두지 않고 매각 조건을 불문하면서 매각정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 저항하는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은 가혹하게 탄압 받았으며 시민단체들과 연구자들의 대안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조돈문, 2001) 또 한국전력과 발전산업에 관한 구조조정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발전소 분할 후 해외매각이라는 원칙은 그 실제 효과, 손익, 명분 모든 것을 넘어 하나의 신앙처럼 관철되었다. 이런 정부 정책 앞에서는 반대 여론과 발전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도 무력하기만 하였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정책의 결과는 매우 혹독한 것이었다. 우선 정권 초기에는 대규모 실업사태가 벌어졌다. 경제 공황상태에서 정부가 인원 감축정책을 추진한 결과 실업의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실업률은 1999년 1사분기에 이르러 8.4%까지 치솟았으며 공식실업자 외에 실질적인 실업상태에 빠진 노동자들의 수는 300만 명을 상회하기도 하였다. 1999년 하반기이래 경기가 호전되면서 실업률은 떨어졌으나(2002년 2사분기, 2.9%) 고용의 질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자가 급속히 증가하고 그 추세가 구조화한 것은 가장 중요한 폐해였다. 1999년 2사분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임시일용직은 상용직노동자을 능가해서 52%까지 늘어났고 경기회복 이후에도 그 추세는 변화하지 않았다. 여기에 상용직에 포함된 계약노동자, 단시간노동자, 파견노동자, 용역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가내노동자, 외국인이주노동자 등이 포함되면 전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800만 명, 60%를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김유선, 2002) 비정규, 불안정노동자들은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임금, 노동조건, 사회보장 등 모든 면에서 열악한 노동자집단이다.16) 그러므로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정책의 목표, ‘비용절감’과 ‘경쟁력 확보’는 비정규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노동시장 구조의 전반적 퇴행은 전체 노동계급에게도 영향을 미쳐 임금과 노동조건의 악화, 빈곤의 심화를 불러왔다. 1997년 이후 임금상승률은 매년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의 합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 결과 노동소득분배율은 1996년의 64.2%에서 2000년 58.6%로 크게 하락하였다. 또 노동자 내부의 임금소득불평등 지수인 소득점유율배율이 1997년의 4.49에서 2000년에는 5.32로 크게 악화되었다.(김유선, 2001c) 지속적으로 하락하던 노동시간은 1997년 주당 207.6시간(제조업)에서 1999년 217.3시간, 2000년 214.3시간으로 늘어났다가 2001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209.8시간으로 줄어들었다.(한국노동연구원, 2002)

다음으로 노동조합과 노동기본권에 대한 억압의 강화도 김대중 정권 노동정책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2002년 9월 5일까지 민주노총이 집계한 구속노동자의 숫자는 모두 8백 28명이었다.(민주노총, 「노동과 세계」, 210호, 2002.9.9) 이는 김영삼정권의 5년 간 구속자수 632명보다 30%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다. 또 9월 5일 현재 구속된 노동자의 수는 55명이며 67명이 수배상태에 있다. 55명의 적용법률을 보면 대부분이 ‘불법파업’ 이후의 업무방해와 폭력 등 형법이었다. 김영삼정권 시기의 구속자가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기 이전 1987년체제의 노동기본권 제약 아래서 이루어진 것임을 감안하면 실제 억압의 강도는 훨씬 높았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또 노동관계법 이외 형법이 주요한 억압수단으로 사용된 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노동기본권에 대한 제한과 억압이 체제 변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하게 실행되고 있음을 말한다.

특히 하반기에 들어와서는 노동기본권을 제약하거나 후퇴시키는 제도적 개악이 시도되었다. 2001년 2월 한국노총과의 노사정합의로 법제화된 사업장단위 복수노조금지조항 유지,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유예는 반 개혁적 조치였다. 이 합의의 결과로 많은 비정규노동자들의 단결권이 결정적으로 제약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도 개악의 시도는 2002년 하반기에 나타났다. 경제특구법안(8.19), 법정노동시간 단축법안(9.5)은 노동조건의 대폭적인 개악을 시도한 사례였으며, 선거법 개정안(9.8), 공무원노조법안(9.10)은 노동자의 정치활동을 제약하거나, 노동권 보장의 이름 아래 실제로는 노동권을 제약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셋째로 복지분야에서의 정책적 변동은 보다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국민연금이 전국민으로 그 대상을 확대하였고 의료보험 통합을 시도하였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경우에는 그 적용대상을 크게 확대하고 보장 수준을 높이기도 하였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하여 이전의 공공부조제도인 생활보호대상자의 제도적 틀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커다란 변화였다. 정권 초반기에 집중된 실업정책과 관련해서는 세계은행(world bank)이 요구한 사회안전망 프로그램이 도입되었으나 2000년 이후에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축소, 폐지되었다.

복지정책에서 핵심적인 쟁점은 그것이 IMF방식의 영미식 신자유주의 복지정책인가, 아니면 전통적인 복지국가의 국가복지를 지향하는가 하는 점이다. 또 정부의 공식적 정책 지향인 ‘생산적 복지’의 내용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쟁점이다.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17) 객관적으로 실행된 김대중 정권의 정책적 개혁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고 있다. 즉 사회보험의 전 국민 확대, 의료보험 통합의 시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 등 제도측면의 개혁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전략은 내적인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유연화 정책에 기초한 노동배제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략적 수준에서 김정권의 노동정책은 이전 정권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신노사문화의 주창, 노사정위원회 구성과 정권 초반기의 일부 개혁적 조치, 복지프로그램의 강화 등 새로운 시도들은 노동배제의 전략적 기조 속에서 부차적인 것이거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그 빛을 잃어갔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정권 마지막 해인 2002년 하반기에 시도 중인 3가지 법률 제정, 개정과정이다. 정부의 주5일제 노동시간단축법안, ‘공무원조합법안’, ‘경제특구법안’에서는 ‘개혁을 앞세운 노동배제’라는 김대중 정권 노동정책의 본질이 압축적으로 드러났다.18) 


2) 헤게모니적 노동통제방식의 강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경찰국가

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방식에 관해서는 두 개의 상반되는 해석이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의 공식규정처럼 ‘참여와 협력의 신노사문화’, 또는 ‘노사정위원회의 합의정치’(최영기, 1999; 선한승, 2000; 김호진, 2000; 임혁백, 2000)를 강조하는 입장과 ‘허구적 합의기구를 앞세운 가혹한 노동탄압’(노중기, 2001; 김세균, 2001), ‘경찰국가의 노동통제’라는 입장(이계수, 2001)이 그것이다. 전자가 참여와 협력이라는 새로운 절차를 강조했다면 후자는 법적, 물리적 통제의 연속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노사정위원회의 실체와 본질에 관한 성격 규정은 양자의 차이를 가늠하는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이렇게 외견상 상반되는 두 가지 입장을 고려하면서 1987년 체제의 노동통제방식, 즉 헤게모니 통제방식의 성격 변화를 추적해보고자 한다.(노중기, 1995) 이를 위해 물리적 강제, 법적․행정적 통제, 조직적 통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통제의 네 가지 통제방식으로 구분해서 살펴보고 특징을 추출해볼 것이다.

먼저 물리적 강제수단은 이른바 ‘국민의 정부’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핵심적인 쟁의사업장에는 거의 예외 없이 경찰력이 동원되었으며, 롯데호텔, 사회보험노조, 은행노조 등에서와 같이 때로는 가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다.19) 경찰력의 개입은 흔히 ‘공안대책협의회’나 ‘관계기관장관회의’ 등의 공식적, 비공식적 파업파괴기구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졌다. 또 1999년 6월 조폐공사파업유도 사건은 정부가 범정부적 차원에서 핵심적인 쟁의나 노조를 파괴하는 공작정치를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공작정치는 대우자동차나 발전산업의 파업에 대해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20) 2001년 4월 6일의 화염병종합대책이나 10일의 대우자동차 해고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폭력행사 등 정권 후반기에 들어 물리적 억압은 더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김대중 정권에서 물리적 강제수단의 사용은 상대적으로 매우 제한된 것이었음을 지적해둘 필요가 있다.(노중기, 2001) 경찰력 투입은 상대적으로 신중해졌으며 법적 절차와 여론 상황을 철저히 고려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또 합법집회나 시위를 보호하겠다는 정권 초기의 입장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각종 물리적 통제가 여전히 지속되었으나 집회, 시위 자체가 봉쇄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21)

둘째, 법적․행정적 수단의 상대적 비중은 매우 커졌다. 먼저 인력삭감 위주의 구조조정을 정당화한 정리해고조항은 모든 쟁의사업장에서 일반적인 통제효력을 발휘하였다. 해고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용자들의 절차적 하자나 제반 부당노동행위를 정부가 묵인하면서 정리해고조항은 강력한 통제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통제수단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쟁의행위 과정에서의 업무방해, 폭력행사에 대한 민․형사상 소추였다. 정리해고를 합법화한 이후 정부는 일체의 구조조정 관련 쟁의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부나 중앙노동위원회의 행정적 해석은 법률의 권위로 실행되었다. 그 결과 대개의 쟁의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인신적 구속이나 형사소추 뿐만 아니라 민사상의 가압류나 손해배상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22)

손해배상은 노태우정권에서 시작되었던 노동탄압 수단이었으나 최근 강력한 통제효력을 발휘하였다. 김대중 정권에서 민사소송이 핵심적인 통제수단으로 떠오른 것은 노동체제의 자유화에 따라 법률적 통제의 위상과 통제효과가 크게 배가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1980년대 초반 대처정권에서 노조의 면책특권이 법률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처정권의 노조통제에서도 민사상 책임문제는 핵심적인 통제수단이었고 이는 강한 정부,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정권의 특성 중 하나였다.23)

그밖에도 병원사업장과 발전노조파업에서 나타났던 필수공익사업장에 대한 직권중재, 항공조종사파업 사례에서 나타났던 조정전치주의와 그에 따른 행정통제,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금지조항 등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했던 통제수단들이었다. 그리고 법적 통제수단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새로운 통제수단들을 법제화하려는 정부의 시도도 강하게 나타났다. 경제특구법안, 공무원노조 합법화 법안, 주5일노동제 개정법안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행정적 통제수단 중 대표적인 것은 기획예산처의 구조조정지침,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전치주의에 대한 부당한 해석, 경영인사권 관련 쟁의 불법규정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예산배정권을 근거로 한 구조조정지침은 노태우정권 이래 정부투자기관과 산하 부처의 노조를 통제하는 핵심적 수단이었다.

셋째로, 조직적 수단에서는 노사정위원회의 설치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시기에 따라서 그 비중이 변화하기는 하였지만 노사정위원회는 국가가 노동정책 전반을 관철하는 핵심적인 기제였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노동 사이에서 완충장치로서 충실히 기능하였다. 또 노사정위원회는 여타 통제수단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자체가 통제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통제수단들을 연결하고 정당화하며 지원하는 통제장치였다. 1987년체제에서 일종의 통제수단으로 동원된 한국노총은 이제 노사정위원회를 매개로 한 체계적인 통제과정의 한 고리로 변화하였다.

노동현장의 여러 가지 갈등과 노동운동의 저항은 일차적으로 노사정위원회의 정치과정에서 걸러졌다. 모든 사안들이 노사정위의 최상급 정책결정에 회부되었고 그 과정에서 직접 안건이 되지 않았던 사안들은 정부나 자본의 의사에 맡겨졌다.24) 노동조합의 의견은 정부, 사용자, 공익위원 등 3자가 연합한 의사결정 구도 속에서 항상 소수였다. 노동 측의 개혁적 의제들은 3중, 4중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희석되고 그 결정이 지연되었다. 핵심적 의제에서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간의 왜곡된 경쟁구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 주5일제와 같이 ‘교환구도’에 의해 그 성격이 모호해지거나 개악으로 역전되기 일쑤였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적 수단은 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수단이었다. 여기서도 새로운 요소와 과거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났다. ‘참여와 협력’의 노사정위원회, 국민과의 대화 등에서 ‘참여민주주의’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경제위기이데올로기는 ‘IMF위기, 국난 극복’이라는 구호로 재조정되었으며 낡은 노사협조주의는 갑자기 ‘신노사문화’로 둔갑하였다. ‘생산적 복지’라는 ‘복지이데올로기’가 새로 나타난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이데올로기 선전에서 특징적인 것은 과거의 반공이데올로기가 거의 소멸된 점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던 정권이었으며 전향적 대북 정책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통제효력이 크게 줄어든 것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였다.

이를 대신한 것이 ‘법과 원칙’의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이데올로기였다. 2001년 초 대통령의 ‘강한 정부론’에서 공식적으로 나타난 이 이데올로기는 노사정위의 참여이데올로기가 약화된 후반기에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 작동하였다. 사실상 ‘법과 원칙’ 이데올로기는 가장 일관되게 나타난 중심 이데올로기였다. 그것은 모든 경찰력 투입의 근거였을 뿐만 아니라 합법 집회․시위의 보장, 경찰의 ‘폴리스라인’에서도 나타났다.

한편 범정부 차원의 여론 조작, 언론 공작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발전산업노조 파업과정에서 발견된 산업자원부의 파업 대응과정에서 여론은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이런 여론 통제는 대부분의 핵심적 사안과 쟁의에 대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법과 원칙’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현실에서 갖는 한계를 보완하는 보족적 수단이었다.25)

노사정위원회는 조직적 통제수단이자 이데올로기적 수단에서도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것은 조직적 통제수단이기 이전에 이데올로기적 통제기구였다.

노사정위는 그 존재 자체가 노동운동의 활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여와 협력’, 그리고 ‘국민적 대 타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노동시장에서 진행된 가혹한 인력삭감과 구조조정을 정당화하였다. 또 그것은 ‘법과 원칙’의 이름으로 진행된 제반 법률적․행정적 통제수단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기제였다. 예컨대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쟁의의 경우 법적으로 불법인 동시에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이 참여하여 스스로 결정한’ 사안에 대해 반대하는 ‘무책임한 쟁의’로 규정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불법’ 쟁의에 대한 가혹한 물리적 탄압을 궁극적으로 정당화한 것도 노사정위원회였다. ‘참여와 협력’의 기구가 가혹한 ‘경찰 폭력과 진압’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으나 노동 측이 무리한 불법쟁의를 계속했으므로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된 그 사안은 다시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하자’는 정당화기제가 끊임없이 작동하였다. 폭력에 항의하는 민주노총의 저항은 정부와 노사정위로 분산되었으며 노사정위원장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하는 것이었다.26)

한편, 노동운동 측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불러온 것도 중요한 통제효과였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조직적 균열과 한국노총과의 대립, 경쟁이 심화된 것이었다. 1998년 2월 합의에 이은 민주노총 지도부의 탄핵, 6월과 7월 노정합의 기간의 혼란, 하반기의 노동운동노선논쟁 등 내부 진통, 2002년 발전파업 종결과정의 파행은 노사정위원회나 그 기제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현상적 사건들 이면에서는 전 기간동안 노사정위 참가문제로 노조운동 내부의 이념적, 조직적 균열이 심화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또 김대중 정권은 전반기의 노정대치기 이후 한국노총을 파트너로 삼아 민주노총을 배제하고 손쉽게 여러 가지 중요한 정책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2001년의 작업장의 복수노조금지, 모성보호조항의 완화가 그러했고, 2002년에는 노동측의 공무원 노동기본권, 주5일제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보호 요구를 최대한 완화하고 그 내용을 순치시킬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노동통제방식의 측면에서 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통제장치들을 결합, 배치하는 헤게모니적 통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내적 기제는 각종 이데올로기 수단을 통해 정책의 정당성 기반을 마련한 다음, 법적 행정적 물리적 수단으로 노동계급의 이해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경제위기의 담론, 시장원리와 경제적 합리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참여와 협력 이데올로기는 통제의 핵심 축으로 작용하였다. 이 때 노사정위원회는 전체 과정을 뒷받침하고 결합한 핵심 이데올로기 수단, 조직적 수단이었다.

이런 헤게모니 방식의 통제는 형식적 측면에서는 1987년체제의 국가통제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다. 먼저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수단의 비중과 내용이 크게 변화하였다는 점이다. 과거에 병렬적으로 존재했던 경제위기와 효율성 담론, 사회안정과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들은 이제 시장질서와 법치주의라는 신자유주의이데올로기로 통일적으로 체계화되었다. 특히 ‘참여와 협력’의 담론은 관변 연구자들의 정책안에 머물지 않고 노사정위원회라는 실체적 조직으로 발전하여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장치가 되었다.

또 국가의 물리력 행사가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행해졌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였다. 합법적 집회나 시위를 대체적으로 보장하는 선 위에서 핵심적인 쟁의에 대해서는 가혹한 진압이 이루어졌다. 전체적으로 보아 정책집행의 합법성과 일관성이 신장된 것으로 나타났다. 노사정위원회를 매개로 정책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잘 짜여진 기획 위에서 노동자들의 연대고리를 체계적으로 차단하는 등 변화의 폭은 큰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헤게모니 통제의 효력이 배가되었다는 점이었다. 많은 경우에 경찰력 투입이나 손배소송과 구속 수배는 일방적 탄압으로 현상하기보다는 절차적 정당성을 가진 법과 원칙의 집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노동운동의 반발이나 저항은 민주적 권리나 노동기본권의 확보보다는 무리한 집단적 이해관계의 요구로 나타나게 되었다.

통제 효과의 변화는 일차적으로 정책적 기획력의 제고, 노사정위원회 등 이데올로기기구의 체계적인 운용,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일관된 실행 등 전술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요인은 IMF경제체제라는 상황적 조건과 노동체제의 변동이었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노동정치의 구조적 환경이 정책적 효율성을 크게 높였던 것이다. 여기에 김대중 정권은 실질적인 첫 번째 민간정권이었다는 점도 지적될 필요가 있다. IMF경제위기는 이런 노동체제의 변동의 효과를 한층 상승시켜주었다.



4.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의 형성

이상과 같은 김대중 정권 노동통제전략의 변동이 타당하다면 향후 한국의 노동체제는 ‘종속적 신자유주의 노동체제’로 귀결할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체제의 역동성과 그 내적 모순을 현재의 시점에서 충분히 전망할 수는 없다. 제도정치의 변동, 특히 2002년 대통령선거 결과와 새 정권의 성격, 노동운동의 전략적 대응과 결과 및 경제구조 변동과 경기 상황 등 보다 많은 변인들이 검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강화에 따라 노동시장 구조의 분절화가 심화되고 경찰국가의 성격이 강화되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재 구조화되어 가고 있는 종속적 신자유주의노동체제는 1987년 체제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먼저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의 내용이 상당히 변화하였다. 과거의 노동체제가 노조간의 연대를 배제하고 민주노조운동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새로운 노동체제는 이를 수용하는 기반 위에서 제도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복수노조금지, 제3자개입금지문제가 일정하게 해결되면서 산별노조 결성이나 제반 연대활동은 더 이상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고용위기를 일상화하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해서, 그리고 손해배상청구소송 등 시장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법률적 수단을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전략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체제 전환과 IMF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이전 정권시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신자유주의정책이 보다 강하게 일관되게 실행된 것도 변화를 야기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통제방식의 측면에서도 변화의 양상은 분명하게 나타났다. 불법적인 물리적 수단의 동원, 감시와 사찰 등 공작적 방식의 억압, 권위주의시대의 악법조항을 이용한 통제를 대체한 것은 ‘참여와 합의’의 노사정위원회, 시장원리와 효율성, 법과 원칙의 준수라는 부드러운 이데올로기적 수단이었다. 때때로 폭력적 진압이 이루어지고 경찰력의 투입과 물리적 억압이 필요할 때에도 법적, 절차적 정당성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었다. ‘경제적 효율성’과 ‘법과 원칙’은 ‘작고 강한 정부’라는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현상에서 하나의 일관된 이념으로 현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영미식 신자유주의의 노동통제방식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27)

다음으로 자본의 전략적 태도는 본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노조활동을 기업 내부로 제한하고 수량적 유연성을 확대함으로써 노동의 이해를 배제하거나 일정한 한계 내로 제한하려는 배제전략이었다. 이런 기조는 노사정위원회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미 일관되게 드러났고 주5일제 노동시간 단축, 경제특구법 제정 시도에서 충분하게 나타났다. 국가의 노동배제전략은 자본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작업장 수준에서 본다면 1987년 체제에서 상대적으로 수세적이었던 자본의 입지는 크게 달라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반민주적 노동체제의 모순이 일정하게 해소됨으로써 작업장 내부의 갈등과 각축이 상당한 정도로 완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자본의 작업장에 대한 통제력은 구조적으로 강화되는 효과가 발생하였다. 또 IMF 경제위기와 인력 삭감 위주의 구조조정과정은 작업장에서 자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변형노동시간제와 파견노동자제도, 그리고 정리해고의 실행 가능성은 작업장에서 자본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켰다. 자본은 오랫동안 실패해왔던 신경영전략, 즉 자본주도의 작업장 재조직, 유연성 확대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새 체제에서 노동운동은 전혀 새로운 노동정치의 지형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1987년 체제에서 노동운동의 과제는 민주노조의 확보 및 이를 위한 반민주적 노동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단순화되어 있었다. 이는 노조운동의 활동 폭을 기업노조를 기반으로 한 전투적 행동으로 단순하게 구조화하였다. 여타 노동운동의 과제는 현실적인 과제가 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1997년 3월 법개정과 민주노총의 합법화로 이런 과제들은 대체로 소멸하였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은 갑자기 새로운 정치적, 정책적 과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의 실업사태와 고용불안, 비정규직 노동의 급속한 증가, 기업의 구조조정, 민영화와 해외매각, 노동시간 단축 등의 과제는 실상 민주노조운동에게는 생소한 과제였다. 또 노사정위원회와 국가의 새로운 노동통제 방식에 대해 민주노조는 충분히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이런 새로운 과제들은 과거에 추상적인 장기과제였던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를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과제로 만들었다. 공세기로부터 수세기로의 전환, 새로운 장기적 과제의 현실화를 맞이해서 노동운동이 보여준 내적 혼란은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정치 내부의 역학과 구조적 모순의 측면에서도 두 체제는 구별될 수 있다. 1987년 체제에서 모순의 초점은 노동사회의 반민주성에 있었다.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민주주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사회의 반민주성은 상당 기간 유지되었던 것이다. 국가의 반민주적 노동통제와 노동의 전투적 저항 및 체제 전환요구가 1987년 체제를 유지, 변동시킨 모순의 결절점이었다.

반면에 김대중 정권 시기에 당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체제는 노동정치의 일정한 민주화, 노조운동에 대한 최소한의 형식적 권리 인정을 전제로 한 노동체제이다. 나아가 그것은 시장질서와 경찰국가라는 수단으로 노동운동을 분절화하고 파편화하려는 국가, 자본 주도의 노동정치체제라는 점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이 때 전 세계적 규모의 신자유주의 자본운동의 헤게모니는 신자유주의노동체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구조적 조건일 것이다.28) 요컨대 새 노동체제는 노동조합의 시장 개입을 최소한으로 통제하려는 국가, 자본과 개입의 범위를 유지하거나 확장하고자 하는 노동운동의 요구가 모순적으로 대립하는 노동체제인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신자유주의체제는 영미형의 그것과 달리 ‘종속적’ 신자유주의체제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손호철, 1999) 종속적 신자유주의는 동일한 시장원리에 의한 사회재편전략이라 할지라도 그 사회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물질적 기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주목한 개념이다. 사회민주주의나 복지국가의 경험이 없는 한국사회, 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와 시민권이 여전히 제약된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서구의 그것과 다른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신자유주의는 사민주의 노동체제시기의 노동조합의 시장개입을 제한, 축소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반면에 종속사회에서 그것은 노동계급의 최소한의 권리나 생존을 위협하는, 즉 기본권을 위협하는 자본 공세로 나타나게 된다. 김대중 정권의 노동통제전략의 모호성이 배태된 근본적 요소는 바로 이 종속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서구와 같은 복지국가나 국가의 정당성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의 강화는 다른 함의를 갖는다. 즉 그것은 국가가 아니라 기업복지나 노동시장의 분절구조에 의해 보호되던 조직노동자들이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김정권의 복지개혁은 국가복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정리해고와 실업, 그리고 비정규노동이 일상화되는 최악의 상태를 사전에 막는 선제적 조치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권이 지향하는 ‘생산적 복지’와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 국민 사회보험체제의 도입 그 자체를 신자유주의 제도라 인식하거나 반대로 그 자체가 복지국가의 강화라고 보는 관점은 모두 일면적인 것일 뿐이다.

복지개혁 외에도 노동시간 단축 등의 조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 민주노총의 합법화, 교원과 공무원에 대한 노동기본권 보장 등과 같은 개혁 의제들의 함의도 바로 이 ‘종속성’의 측면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정책의제들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시민권,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보라는 사회민주화 과제들에 속한다. 또 1987년 이후 한국사회 민주화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1987년 체제의 특수성 속에서 남겨진 과제들이었다. 그 과제들은 민주노조운동의 합법화, 그리고 1987년 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개혁이 당위적인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사안은 국제노동기구(ILO)나 유엔사회문화위원회 등 국제기구가 한국정부에 꾸준히 요구해오던 개혁의제들이었다.(금속산업연맹 법률원 편, 2002). 김대중 정권은 기본적으로 과거의 과제인 이런 노동개혁의 의제를 신자유주의 노동배제전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손쉽게 동원한 것이었다.

또 과거의 공안정국에 비견될 만큼 억압성이 강하다는 점도 김대중 정권 노동배제전략의 특성 중 하나였다. 주지하듯이 신자유주의체제에서 국가는 시장에서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개입의 형태와 기능을 전환한다. 또 그것은 ‘작지만 강한 정부’를 지향하며 특히 노동계급이나 여타 민중적 이해를 배제하는 데 있어 강한 면모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국가는 그 억압성이란 측면에서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보던 국가의 억압성을 훨씬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예외국가로서의 한국 국가의 특성이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국가는 지난 15년간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종속성 파시즘체제로부터 정치적 민주주의가 확대되었으나 여전히 ‘제한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국가의 억압성이나 중심성이 약화되었다고 하나 그 면모를 일신한 것은 아니었다. 요컨대 후반기로 갈수록 강화되었던 억압성은 1987년 체제 혹은 이전의 종속적 파시즘국가의 면모가 여전히 제도적으로 관철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9) 그러므로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노동배제전략에는 종속성이라는 다른 차원의 규정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속성’의 요소는 한편에서 국가의 과도한 억압성과 중심성으로 표현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노사정위원회의 설치로 이중적으로 나타났다.

가혹하고 편파적인 노동통제, 노동행정의 공안․경제부처에 대한 종속, 여론조작 사찰 공작적인 지배 개입 등 각종 불법적인 노동억압,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범정부적이고 일관된 노동대책 수립, 대규모의 여론 조작 등 전통적인 국가 중심성은 김대중 정권에서도 여전히 강하게 나타났다.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한국사회는 종속적 파시즘체제의 면모를 일신하였으나 그것은 여전히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민주주의의 제한성은 노동정치와 노동정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남아있었고 그것이 김대중 정권 노동정치의 특수한 요소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노사정위원회는 그 반대 측면의 구성요소였다. 그것은 네덜란드 등 대륙식 신자유주의 노동정치의 요소가 이데올로기 수준에서 도입된 것을 의미한다. 이는 1987년 체제의 해체로 야기된 노동체제의 불안정성, 그 공백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현상이었다. 노사정위원회 현상은 복지국가의 경험이 없는 사회에서 ‘생산적 복지’가 쟁점이 된 정치과정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였다. 즉 사회적 기반이 없는 채로 ‘합의정치’의 담론과 조직만이 통제의 필요로 말미암아 도입된 것이었다. 노사정위원회는 종속성을 갖는 사회에서 미래의 과제가 선취된 ‘비 동시적인 현상의 동시적 발현’을 의미하였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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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기관지, 「노동과세계」, 제211호, 2002년 9월 16일자 참고.


2) 물론 합의기에도 억압적 요소는 광범하게 존재하였다. 이 시기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노중기(1999)를 참고.


3) 민주노총의 요구에 따라 합의 이행의 쟁점은 교원노조의 법제화와 실업자의 초기업 단위 노동조합 가입문제, 그리고 참여적 구조조정문제로 압축되었다. 이 중 교원노조의 법제화만이 1999년 초에 실행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탈퇴를 선언하고 연말에 위원장이 장기간 단식농성을 벌인 끝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4) 노사정위원회, 「1999년 노사정위원회 활동현황」, 2000.1, 143~147쪽 참고.


5) 방송노조들의 방송개혁 관련 연대파업, 택시노동자들의 완전월급제 쟁취투쟁, 한국중공업, 대우조선 등의 쟁의가 여기에 속한다. 자세한 것은 전국민주노종조합총연맹, ꡔ1970-2000 민주노조 투쟁과 탄압의 역사ꡕ, 도서출판 현장에서 미래를, 2001, 238~253쪽 참고.


6) 신노사문화는 그 이름과 달리 매우 낡은 것이었다. 신노사문화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이원보, 「새노동정책의 실상과 허상」,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편, ꡔ노동사회ꡕ, 제36호, 1999년 9월호, 참고.


7) 대통령의 불법 파업 엄단 지시-―관계장관회의와 범정부 대처방안 마련―보수언론의 대대적 여론 공세-공권력 투입과 파업 파괴-구속과 수배, 손해배상청구 등의 일련의 수순은 과거 군사정권들의 탄압 방식과 동일한 것이었다. 또 ‘90년만에 가뭄에 파업은 불가하다’거나, ‘고액소득자인 조종사들의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라는 논리를 정부가 앞서 유포한 것은 정부의 노동정책 변화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8) 민주노총 위원장은 곧바로 수배상태가 되어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부는 8월 민주노총과의 물밑 교섭을 통해 단병호위원장을 선처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자진출두 후 입장을 바꿔 구속시켰고 2002년 9월 현재까지 구금하고 있다.


9)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발전파업 이후 현장탄압 상황」, 2002.5; 권영국, 「발전노조 파업과 관련한 가압류, 서약서 및 개별 감사의 문제점과 대응책」, 발전노조 인권침해 토론회, 2002.7.11 참고.


10)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불참을 수단으로 끊임없이 정부에 반대급부를 요구해왔다. 또 실제로 1999년과 2000년에는 불참과 복귀를 되풀이하기도 했다. 한편 전임자임금지급이나 사업장단위 복수노조문제는 민주노총에 비해 하부 조직이 취약한 한국노총에게 사활적인 사안으로 이해되었다.


11) 주40시간 법정노동시간 단축은 전체 노동자의 60%에 이르는 중소 영세노동자들의 배제, 노동조건의 대폭적 악화, 휴일-휴가의 축소, 실시 시기의 후퇴 등으로 말미암아 노동 개혁이라기 보다 노동개악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또 공무원․교수의 노동기본권문제에서는 노동조합 명칭조차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는 노동측이 수용할 수 없는 안으로 합법화 자체를 무산시키는 조치였다. 정부는 이 두 법안을 2002년 정기국회에 상정할 예정이나 입법화의 가능성은 매우 작다.


12) 2000년 상반기 노동자들의 투쟁은 5월 31일부터 6월 초순까지 계속된 민주노조의 총파업투쟁으로 정점에 달하였다. 민주노총의 주장은 주5일 근무제 실시, IMF피해 원상회복, 비정규직 노동자문제 해결과 조세․사회보장제도 개혁 등 3대 현안으로 집중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앞에서 정부는 주40시간제 노동시간 단축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13) 물론 서구와 다른 제3세계의 경우에도 이런 주장은 일반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다.(노중기, 2002) 신자유주의와 합의정치의 양립을 주장하는 연구는 최영기(1999), 최영기․이장원(1998), 김호진 외(2000) 참고.


14) 임영일(2001), 권두섭(2001) 참고. 당시 여소야대 상황에서 노태우정권은 취약한 권력기반과 지지율의 하락, 경기 악화, 노동 저항의 강화 등 비슷한 조건에 처하였다. 노정권은 노동에 대한 강한 탄압으로 상황을 돌파하는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다. 노동탄압은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과 함께 공안정국을 형성하였고 결국 3당합당이라는 정치변동으로 귀결하였다. 특히 전방위적으로 탄압이 강화된다는 점에서 많은 관찰자들에게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자세한 것은 노중기(1995) 참고.


15) 현대자동차에서 확보된 선례는 모든 민간사업장에서 따라야 할 범형이 되었다. 민간부분에서는 약 5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로 일자리를 잃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1998년에서 2000년까지 공공부문에서는 총 131,082명의 인원 감축이 있었다. 이는 1997년 말 정원 700,428명의 18.7%에 이르는 수치이며 애초의 목표를 804명 초과한 수치였다. 제1금융권에서는 전체 113,994명 중 35.6%에 이르는 40,593명이 단 2년 동안 직장을 잃었다.(윤진호, 2001)


16) 통계청자료(‘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2001. 8)로 본 비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2.6%에 불과한 89만원이며, 시간당 임금은 4,824원으로 정규직의 51.8%이다.(정규직 각기 169만원, 9,315원) 월평균 100만 원 이하의 저임금계층 중 비정규직은 550만 명, 74.7%에 이른다.(정규직, 139만 명, 23.7%) 이들의 사회보험 가입 비율과 노동조건은 국민연금 19.3%(정규직, 92.7%), 건강보험 22.2%(94.8%), 고용보험 20.7%(80.0%), 퇴직금 13.6%(94.3%), 상여금 14.0%(93.1%), 시간외 수당 9.7%(75.6%) 등으로 정규직에 비해 매우 열악한 상태이다. 김유선(2001b) 참고.


17) 평가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정책의 내용으로 봐서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의 제도화, 개혁이라 보는 입장(김연명, 2001)과 개혁적 내용을 부인할 수 없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신자유주의와 조응한다고 보는 입장(정무권, 2000)이 그것이다. 전자가 제도 자체의 성격 규명에 집중했다면 후자는 경제, 노동정책과의 연장선 위에서 장기적인 정책방향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18) 김대중 정권은 노동측의 일관된 개혁요구였던 노동시간 단축과 공무원노동기본권 보장의 취지를 완전히 왜곡하였다. 노동시간 단축의제는 변형노동의 확대, 휴일 휴가의 축소, 모성보호제도의 폐지, 임금 삭감 등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노동기준을 전면적으로 후퇴시키는 수단으로 탈바꿈하였다. 또 공무원조합법은 단결을 보장하기보다는 단결을 막기 위한 통제장치들 일색이었다. 노동조합 명칭 사용 금지, 타 노조와의 연대금지, 기관별 노조설립 등 조직형식의 통제, 직급과 직무 별 노조 가입제한, 단체협약 체결권 부정과 쟁의에 대한 형사처벌조항 등 군사정권 시기의 악법을 무색케 하였다. 또 경제특구법은 특구 지역에서 근로기준 보호를 포기하는 노동착취 보장법안이었다.


19) 1998년에는 만도기계, 부산지하철, 아남반도체, 인천제철, 조폐공사에 경찰력이 투입되었으며 노사정합의가 이루어졌던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도 경찰력 투입의 압박은 합의의 전제조건이었다. 1999년에는 서울지하철에 경찰력이 투입되었으며 한국중공업, 현대정공 울산공장, 대우조선, 대림자동차, 삼환기업에서도 경찰의 개입이 확인되었다. 2000년에는 대우자동차, 롯데호텔, 사회보험노조, 은행노조의 파업에 경찰력이 투입되었으며 2001년에는 대우자동차, 조종사노조, 이랜드노조 등에, 그리고 2002년에는 발전산업노조, 의료보험노조 파업사업장, 공무원노조 대의원대회에 경찰력이 투입되었다.


20) 이 기구의 존재는 1998년 기아자동차에서 발견된 ‘노동부동향보고’, 1999년의 ‘조폐공사파업유도사건’, 그리고 2002년의 ‘발전산업노조 파업’ 과정에서 재차 확인되었다. 민주노총, 「김대중 정권하 검찰에 의한 일방적 노조탄압, 공안탄압에 대한 민주노총의 진상조사 결과보고」, 1999.6.29; 산업자원부, 「발전노조파업 종식 및 후속대책」, 2002.4.15 참고.


21) 1999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전격적으로 개악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것은 불법성의 범주를 확대해 집회, 시위를 제한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 집회장소의 제한과 축소, 경찰에 해산명령권 부여, 질서유지선 이탈 시의 구속과 처벌, 신고의무 등이 신설되었다.


22) 민주노총에 보고된 민․형사상 손해배상규모는 2002년 6월 말 현재 38개 사업장 1,253억 840만 원으로 보고되었다. 특히 발전노조에서는 간부는 물론 파업에 참가한 전 조합원을 대상으로 211억의 손해배상소송, 가압류가 진행 중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신종노동탄압 손배소송, 가압류로 인한 노동기본권 제약의 문제점」, 2002.7.5 참고.


23) 특히 2002년 5월 10일 대통령은 청와대비서관들에게 “구속만이 최선은 아니며 불구속 기소나 민사소송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는 김대중 정권 노동통제에서 이 수단의 비중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영국의 사례에 관해서는 Wedderburn(1983), Marsh(1992) 참고. 또 한편 손배소송은 사업장 점거 등 업무방해를 이유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1997년 3월 법개정 시 도입된 새로운 통제조항들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24) 부당노동행위조사특별위원회의 경우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사되는 부당노동행위는 전체에서 극히 일부였고 여타 부당노동행위는 면죄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조사결과 또한 실제로 부당노동행위를 근절시키기 보다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로 끝나기 쉬웠다. 이른바 선택성의 기제는 체계적으로 비사건(non-events)을 만듦으로써 사건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25) 정부는 ‘민영화의 당위성에 관한 집중 홍보로 언론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으며 그 방식은 ‘언론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경제․사회부장에 대한 지속적 자료 제공’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서한 발송, 홍보책자 1만 부, 홍보 리플렛 15만 부, 광고 18회, 인터넷 홍보’로 요약되었다. 산업자원부, 「발전노조파업 종식 및 향후대책」, 2002.4.11. 또 2001년 항공조종사노조의 파업 당시 ‘90년만의 가뭄’, ‘고액연봉’의 이데올로기 조작은 ‘법과 원칙’으로 통제되지 않는 파업에 대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공세라고 볼 수 있다.


26) 2000년 하반기 롯데호텔과 사회보험노조에 대한 경찰력 진압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당시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민주노총 농성장을 방문해 노사정위에서 논의하자고 회유하였다. 또 그 해 연말 한국노총 산하 은행노조에 대한 경찰력 진압은 한국노총이 노사정위 논의에 다시 참가하면서 전혀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이런 기제는 모든 중요한 쟁의와 물리적 탄압사례에서 작동하였다. 또 2001년 하반기에 공안당국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를 민노총 위원장 석방의 조건으로 요구한 바 있었다.


27) 노동통제의 실행과정이 매우 세련되고 정치한 것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우선 신자유주의 시장원리인 법과 질서를 기축으로 모든 통제수단들이 체계적으로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과거 반공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통제수단들이 편성되었던 것과 비견되는 일이며 새로운 노동체제의 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구조조정과정의 세련된 기획과 쟁의사업장에 대한 분할통치, 절차적 정당성 마련을 위한 체계적 과정, 제한적이고 효과적인 물리적 강제력 동원, 노동개혁 의제와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의제의 절묘한 물타기 등 변화의 조짐은 뚜렷하였다.(노중기, 2001)


28) 오랫동안 세계사적 노동정치의 시간과 멀어져 있었던 한국의 노동정치가 비로소 동시대적 과제를 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1980년대 본격화된 영미 신자유주의와는 20년의 시차가 있다.


29) 손호철(1999: 250~261)은 정치적․형식적 민주주의의 제한성,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 분단국가 내지 결손국가 등 3가지 요인을 들어 김대중 정권의 국가를 종속적 신자유주의국가로 규정하였다.


2002-12-01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