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총파업”(?)과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
원 영 수/ 국제기획실장
* 이 글은 ꡔ노동자의 힘ꡕ22호, 2002년 12월
20일에 실린 필자의 글을 확대-보완한 것이다.
격동하는 12월 “총파업” 정세
반정부세력의 도발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지난 12월 2일, 4월
쿠데타의 주역들이 다시 총파업을 선언했다. 사실상
파업이라기보다는 자본가들에 의한 “사보타지”에 가깝다는
것이 현지 소식통의 증언이다. 그러나 12월 6일 카라카스의
알타미라 광장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시위군중에 대한
의문의 총격으로 사태는 다시 악화되고 있다. 이들 반정부세력은
차베스 대통령을 “암살자”, “사탄”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지난 4월 쿠데타 이후 차베스 정부의 온건한 대화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세력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와 라틴 아메리카 국가기구(OAS) 사무총장
세자르 가리비아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세력은 차베스의
퇴진과 즉각적인 선거를 요구하면서 석유산업을 마비시키는
사보타지를 조직하고 있다. 12월 정세는 4월 정세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12월 8일 라틴 아메리카 국가기구(OAS)는 사상 최초로
베네수엘라의 “합법적 민주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고,
지난 4월 쿠데타 정부를 섣부르게 승인함으로써 국제적 비난을
초래한 미국정부는 입장표명을 유보하고 있다. 4월 정세와는
달리 쿠데타 세력은 자신의 힘으로 차베스 정부를 타도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석유노조의 파업참여 거부에도 불구하고, 반동적 노총 CTV와
자본가단체 페테카라마스(상공회의소)는 완강한 반차베스 투쟁을
고집하고 있다. 국영 석유공사(PdVSA) 경영진의 사보타지는
베네수엘라의 석유공급의 70% 이상을 감소시켰고, 국제유가의
급등을 초래하고 있다.
이에 맞서, 12월 8일 열린 차비스타 집회에서, 차베스는 “이제
석유를 위한 위대한 투쟁의 시간이 도래했다!”고 선언하였다.
“석유는 국민의 것이지, 일부 엘리트들의 것이 아니다”라는
차베스의 호소는 베네수엘라 민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서 빈민지역인 서부는 조용히
일상이 영위되는 반면, 중산층과 부유층 거주지역인 동부에서만
총파업이 강요되고 있다. 특히, 카톨릭교회와 더불어, 반동의
온상인 언론만이 사태를 부풀려 노골적인 계급전쟁을 선동하고
있으며, 이른바 외신들 역시 이들의 장단에 맞추어 “총체적
위기”의 시나리오를 읊어대고 있다.
“총파업”의 진실
그러나 총파업의 진실은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은 반정부 세력의
“총파업”이 사실은 총파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이
파업은 전국적인 파업이 아니며, 수도인 카라카스의 대부분
지역에서 석유공급문제를 제외하면 평온한 일상이 유지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단지 백인 중산층 거주지역인 카라카스
동부지역에서만 상점들이 “철시”한 상태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총파업이 아니라, 석유공사 경영관료들이 주도하는
석유파업이다. 석유산업 이외에 노동자파업은 전무상태이며,
초국적기업인 맥도널드와 페덱스 등 일부 사업장에서 직장폐쇄가
있을 뿐이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번 파업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반동적
자본가단체인 페테카라마스이며, 관료적 노총 CTV가 들러리를
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파업은 자본의 파업,
즉 사보타지에 불과한 것이다. 일부 석유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석유산업 자체를 마비시키고 있는 것은
국영석유 공사의 경영진과 특권적 지위를 누린 유조선 선장을
포함한 중간 관리직들이었다. 이번 사태에서 특이한 점은 이들
중간관리직들의 독자적인 노조가 자본의 편에서 강력한
정치파업을 조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반정부세력들이 차베스 정권의 즉각적인 타도를
선언할 만큼 차베스는 권위주의적 독재자인가? 다음에도
언급하겠지만, 차베스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며, 파업진압을 위해 공권력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4월 쿠데타 이후,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진보적
언론인들은 남미에서 가장 정치탄압을 적게 하는 나라로
베네수엘라를 꼽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차베스의 지지자들은 폭도인가? 베네수엘라의
반동적 민간언론은 반차베스 선전의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이며,
지난 4월의 쿠데타에서 자신의 반동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바 있다. 이번에도 12월 6일의 총격사건을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정부의 소행으로 몰아붙이는 정치선동과 조작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4월이래, 연이은 유혈사태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친차베스 세력의 젊은이들이었다. 실질적으로, 폭력탄압의
주범은 카라카스 경찰이며, 이들은 반차베스 지도자인 카라카스
시장 페냐의 지휘아래 친차베스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탄압하고
있다.
“민주적” 반정부세력은 누구인가?
지난 4월 쿠데타 음모세력들은 자신들을 “시민사회”의
대표라고 자임하였다. “권위주의”에 맞선 “민주세력”으로
자신을 규정한 쿠데타 세력의 중심에는 강력한 자본가단체인
페테카라마스, 반동적 노조 CTV, 카톨릭 교회와 언론이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대중적 불만과 불신으로 무력화된
기성정당(민주행동당AD, 기독사회당COPEI)을 대신하여 반차베스
운동의 구심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의 과두지배체제에서 혜택을 독점했던 세력들은 차베스의
개혁이 합법적 틀 내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점을
악용하여, 강력한 반동세력을 구축하여 차베스의 스타일이나
정권내부의 분열 등을 과대포장하여 반정부공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지난 반세기 동안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수입을 착복하여, 80%이상의 다수 민중을 절대빈곤에
몰아넣은 주범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최근의 반정부투쟁 과정에서 차베스의 퇴진과
신임투표의 실시 등을 요구하면서도, 사실상 투표를 통한
정권교체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정권타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차베스에 대한 반대와 기득권 수호 이외에
어떤 다른 민주적 대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의 암묵적 비호 아래 공공연한 정부전복 기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특히 이중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언론과 방송의
역할이다. 4월 쿠데타 시에 국영방송을 제외한 모든 민간방송은
반정부 집회의 일정을 선전하고, 시위에서 발생한 총격피해를
되풀이하여 방송함으로써 반동세력의 대변자를 자임하였다.
차베스가 대국민연설을 하는 도중에는 심지어 TV화면을
분할하여, 시위장면과 차베스연설을 동시에 내보내는 “기발한
저항”을 조직하여 쿠데타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반면, 1백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한 차베스 복귀투쟁이 벌어질 때에는
토크쇼와 영화를 내보내 노골적인 반민중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들 반정부 동맹은 차베스 축출 이외에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난 4월 쿠데타의 “2일 천하” 동안
카르모나의 초헌법적 조치가 바로 반정부세력의 반민주적
독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들이 대안이라고
제시하는 정책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적인 것들, 베네수엘라
민중에게 처참하게 거부당한 바로 그 정책들이다. 그러면 이
반정부세력들은 내부적 반목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강고한(?)
반차베스 투쟁을 벌이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석유를 둘러싼 계급내전: 소수의 풍요와 다수의 빈곤의
양극화
문제는 석유이다. 지난 25년간 베네수엘라의 석유수출은 꾸준히
증가하여, 연간 500억 달러의 외화수업을 가져다주었으며,
베네수엘라 경제에서 전체 수입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25년간 절대다수의
베네수엘라 민중의 석유의 향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으며,
대중의 빈곤은 극도로 심화되었다.
소수 독점자본과 부패한 정치권의 과두적 지배는 백인
중간계급은 체제내로 포섭하였지만, 다수의 민중을 빈곤과 실업,
무지의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 사회는
계급적-인종적 양극화가 극도로 진행된 상태였다. 이는 친정부
시위대에는 검은 피부빛을 한 빈민과 노동자, 인종적 원주민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반정부 시위대에는 선글라스를 낀
백인 중산층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대조를 보이는 것이다.
물론 2001년을 경계로 국제유가의 하락이 베네수엘라 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쳐, 차베스의 경제노선에 대한 중산층의 불만이
고조된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구지배블록이다. 이들은 차베스의 개혁입법에 항의하여 총파업을
벌였지만, 결정적으로 이들을 자극하여 4월 쿠데타를 촉발한
것은 바로 국영석유공사의 부패한 경영관료에 대한 차베스의
공세였다. 만약 차베스가 국영석유공사를 장악하게 되면, 반동적
과두지배세력의 물질적 기반이 붕괴하게 되는 것이다.
70년대 석유공사는 수입의 80%를 국고로 귀속시켰지만,
1990년대에는 겨우 20%만을 국가재정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자체
내에서 분배하는 부패구조를 정착시켰다. 따라서, 차베스 정권
하에서 시작된 사회개혁의 물적 토대는 석유공사의 국영체제
유지와 그에 따른 잉여분의 사회복지영역으로의 전환에 의해
담보되기 때문에, 부패한 경영관료들의 제거야말로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의 진정한 시작이며, 차베스를 지지하는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민중에게 진정한 생존권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경로였다.
이른바 석유관료주의는 지난 반세기 동안 “양당제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과두지배블록의 존속을 가능하게 했던
베네수엘라 자본주의의 중추였기에, 차베스정권이 비록
집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석유산업을 장악하지 못하는 한에서는
사실상의 “이중권력”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파업”의 결말이 “볼리바르 혁명”과 차비스모(Chavismo)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우고 차베스의 집권: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치적 파산선고
지난 1998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우고 차베스(Hugo Chavez)는
58%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경쟁자는 전통적
기성정당(AD와 COPEI)의 지지를 받은 살라스 로메르로, 39%의
득표에 그쳤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차베스와 그의
제5공화국운동(MVR)은 기존 과두정치체제의 청산과 제헌의회를
통한 새 공화국의 건설을 정치적 기치로 내걸었다.
1992년 4월 하급장교의 지도자 차베스는 군부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충분한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하자 무력충돌의
확대를 피하기 위해 무기를 내려놓았다. 1992년 쿠데타는 AD의
페레스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노선―국영산업의 민영화,
보조금 폐지, 환율재평가―에 대한 대중적 저항과 반발의 정치적
반영이었다. 1989년 베네수엘라 민중은 교통요금과 유가인상에
항의하여 폭동을 일으켜, 수도 카라카스를 5일간 치안부재의
마비사태로 몰아넣었다. 페레스 정권은 카라카스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천여명의 민중을 학살하였지만, 1994년 본인
자신도 부패혐의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국의 마이애미에 살면서, 올해 4월 쿠데타 세력의 정신적
지주로서 여전히 건재하고 있으며, 복귀를 노리고 있다.
1992년의 쿠데타는 차베스가 1982년경부터 조직한 군부내
비밀결사 볼리바르혁명운동200(MBR-200)에 의해 준비된 것으로,
광범한 좌파세력과 연대하여 조직한 투쟁이었다. 쿠데타의
실패로 2년간 감옥에 갇혔던 차베스는 1994년 석방후, 합법적
수단에 의한 정권장악노선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그리하여
1997년 MBR-200을 합법정당 제5공화국운동(MVR)으로 전환시키며
반체제세력을 규합하여, 1998년 대선에 도전하였다.
인구 2,400만에 남미최대의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석유수출로
연간 300억달러의 수입을 올리지만, 인구의 80% 이상의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1970년대 AD(민주행동당)와
Copei(기독사회당)를 중심으로 한 과두지배체제는 안정적
민주주의라는 외피 아래, 국부를 횡령하여 소수 지배계급의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석유가격의 요동은 곧바로
베네수엘라 경제에 직접적 타격을 주었고, 1980년대 IMF의 지시
아래 신자유주의 노선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1989년의 카라카스 봉기(Caracazo)로 폭발했던
것이다.
1990년대의 베네수엘라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었다.
대중적 저항과 투쟁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고, 노동자-민중의
새로운 대안을 갈망했다. 그 결과, 기존 정치체제의 모순을
공격한 차베스의 인기는 기존정당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급상승했으며, 체제 내에 안주하던 좌파정당들도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밀려 차베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5공화국 건설을 위한 차베스의 투쟁
1998년 12월 대선에서 승리한 차베스는 1999년 4월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88%의 지지를 얻었으며, 1999년 7월의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차베스의 정치연합인 애국연합(Patrico
Polo)이 91%의 득표로 131석 가운데 119석을 차지하였다. 총체적
개혁을 논의한 제헌의회의 새 헌법은 1999년 12월 국민투표에서
71%의 지지를 얻었고, 2000년 7월에서 열린 대선에서 차베스는
60%의 득표로 임기 6년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차베스의 개혁은 광범한 빈곤과 실업, 문맹에 맞선 베네수엘라
빈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프로젝트로서 기획되었다. 기존정권의
무차별적 신자유주의수용과는 구별되는 사회보장 중심의 정책은
빈곤과 실업퇴치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혀 다수대중의 인간적 생존과
사회보장을 확보할 정도의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차베스는 선거운동과정에서 반신자유주의 노선의 기치를
들었지만, 집권 이후 다소 유연성을 발휘하여 민영화, 해외자본
유치 등의 면에서 일부 신자유주의 노선을 수용함으로써 내부의
반발을 사고 있다. 하지만 차베스의 경제정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석유산유국 기구인 OPEC을 통한 제3세계 석유정치의 부활이다.
미국자본의 압력아래 유명무실화된 OPEC 내에서 차베스는
1970년대 제3세계 노선의 부활을 통해 자신을 부각시킴으로써
미국 주도의 질서에 맞서는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외교정책의 면에서는 이라크 방문, 카스트로와의 대화,
콜롬비아 반군과의 협상 등을 통해 과감한 반미-반제노선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마약과의 전쟁을 핑계로 한 미군기의
상공통과를 거부함으로써, 미국주도의 일국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중심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차베스의 개혁은 일정한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차베스가 92년 쿠데타 실패의 교훈을 근거로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개혁을 추구함으로써 발생한 한계이다. 그
결과, 기성정당과 구지배계급은 대중적 지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력한 경제력과 언론조작에 기반하여 반정부 공작과
쿠데타를 조직할 수 있을 정도로 건재하다. 또한
정치-경제-사회부문에서 여전히 강력히 존재하는 기존 관료제는
내부의 개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그런데 보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차베스 정권의 조직적-계급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이다. 1998년 선거에서 차베스의 급부상은
충분한 조직화의 과정을 생략한 연합정당의 급조로 만들어졌고,
‘차비스모’의 불명확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원리로 인해, 상당한
내부적 견해차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메카니즘을 결여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에 대한 장악 실패는 차베스 정권에 결정적
취약성을 안겨주었다. 집권이후 부패한 노동조합에 대한
차베스의 개혁공세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관료주의의
제거와 노동운동의 민주성-자주성의 회복으로 귀결되지 못했다.
오히려, 2001년 규약개정과 내부혁신에 따른 총회에서 AD계열의
관료파 카를로스 오르테가의 위원장 당선을 허용함으로써 CTV가
반정부 저항의 중심으로 기능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편, 1998년 7월 결성된 제5공화국운동(MVR)은 기본적으로
군부내 좌파세력과 민간인 좌파세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자에는 제도정치권 내외의 좌파세력인 MAS(사회주의운동),
Causa R(급진적 대의), Movimiento lo de Mayo(5월운동),
PPT(만인의 조국) 등이 주축을 이루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압력에 밀려 차베스의 애국연합에
가담했지만, 군부와 차베스 개인에 대한 기본적 불신 때문에
효과적인 지배블록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베스는 2001년 4월 새로운 돌파구로서
노동자-빈민을 중심으로 “볼리바르주의 서클” 결성을
호소하였다. 이는 반동의 공세가 거세지는 정세 속에서 민중의
자발적 조직화를 통해 조직적 기반의 취약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차베스의 지지기반은 공식부문의 노조가 아닌
비공식부문의 미조직 노동자들과 실업자, 빈민 등에 있는 만큼,
노동자계급 내에서 조직부문과 미조직 부문간의 대립구조가
존재하는 한, 노동자계급의 왜곡된 정치세력화는 볼리바르
혁명의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한 과제는 볼리바르 혁명의 성패를 좌우할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2002년 4월 쿠데타: 라틴 아메리카 계급투쟁의 전환점
2001년 10월 차베스가 토지개혁과 어업개혁을 포함한 49대
개혁입법안을 선포하자, 기득권 상실의 위협을 느낀 반동적
반정부세력의 저항이 촉발되었다. 보수야당과 자본계급은 한
목소리로 저항했으며, 12월 9일 반동적 노총 CTV는 총자본의
정치적 대표인 페데카라마스와 함께 총파업을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CIA 테네트
국장이 연이은 반차베스 발언이 하나의 암시로 받아들여지면서
공공연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2002년 2월 일부 군장교들이
공공연한 항명파동을 주도했고, 베네수엘라 경제의 중추인
석유공사의 경영진은 고의적 사보타지를 통해 차베스정권에
타격을 가하려고 기도하였다.
이에 차베스가 부패한 석유공사 임원진을 해임하자, 반동세력의
도발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4월 9일 노총 CTV는 페데카라마스와
함께 또다시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매일 파업을 연장하다가 4월
10일에는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반정부 세력을 규합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에서 CTV 위원장 카를로스
오르테가는 반정부 시위대를 대통령궁 미네플라스로 진격하도록
선동하여 차베스의 지지자들과 유혈충돌을 유도하였다.
대통령궁으로 행진하던 반정부 시위대가 차베스 시위대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의문의 총격이 발생하면서 사태는 악화일로를
치닫게 된다. 사상자의 다수가 차베스 지지자들임에 불구하고,
반동세력의 중추인 언론은 편향적인 선동-왜곡보도로 일관하면서
모든 책임을 차베스와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돌렸다. 이에 4월
11일 일부 고위 군부세력들이 대통령궁에 진입하여, 차베스에게
사임을 강요하였다. 이들은 4월 12일 새벽 차베스를 카라카스의
군기지인 포트 티우나에 연금한 상태에서 페데카라마스 회장
페드로 카르모나를 대통령직에 임명하였다. 어떤 합법적 근거도,
적법한 절차도 무시한 초헌법적 정권 탈취행위였다.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카르모나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의회해산, 대법관 해임, 개혁입법 백지화, 헌법정지 등의 전횡적
조치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기나 한 듯이, 미국
정부는 새 정부와 민주주의의 회복을 축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편에서 일부 군을 중심으로 카르모나의 집권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차베스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 직무의 일시적 정지를 수용했을 뿐,
사임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군부가
분열한 것이다.
다른 한편, 지도자를 잃은 카라카스의 민중들이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1백만명이 넘는 시위대가 “차베스 복귀!”를
외치면서 카라카스 시내를 휩쓸었고, 대통령 궁을 포위하였다.
카르모나는 시위대 해산을 위해 무력사용을 명령했지만, 군은
이를 거부하였다. 쿠데타 세력의 지지자인 카라카스 시장
알프레도 페냐의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카르모나는 거대한 민중의 압력에 굴복해, 헬리콥터로
대통령궁에서 군기지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4일 새벽
해안기지에 연금되었던 차베스가 대통령궁에 복귀하면서, 반동
쿠데타는 하나의 희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사는 좌우파의 다양한
군부 쿠데타로 점철되었지만, 반동 쿠데타를 민중의 힘으로
뒤집은 사례는 없었다. 이번 4월의 민중혁명은 민중주의나
반동적 파시즘세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 사례로 기록될
것이며, 향후 격동의 남미정세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정치적 각성과 조직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총 CTV: 자본과 함께 반동의 요새로
베네수엘라 노총인 CTV는 단일노총으로서 베네수엘라의 조직된
노동자들을 배타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CTV는
사민주의 계열의 민주행동당(AD)와 긴밀히 결합되어, 베네수엘라
코포라티즘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민주행동당이 집권에
실패하는 경우, 파업을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기도
하였지만, 1990년대 AD정권들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자,
무기력한 파트너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연금개혁, 노동유연화
등의 공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혀 조직하지 못하였다.
또한 압도적 다수의 비공식 부문의 노동자들은 전혀 대변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차베스 정권이 출범하면서, 노동조합은 개혁의 1차적
대상이 되었다. 차베스 체제의 정치적 압박 하에서, 관료적
구지도부들은 전원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차베스
세력은 노조운동 내에서, 상대적으로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2000년 관료적 노조지도부는 오히려 역공세를 펼쳐, 선거를
포함한 “민주적” 절차를 대폭 수용하는 한편, 전격적으로
위원장 선거를 감행하였다. 그 선거를 통해 카를로스 오르테가가
CTV의 신임위원장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집권 MVR의 노조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CTV를 민주화할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 노총을 설립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내부적 이견과 분열로 노조관료주의의 역공세를
허용하고 말았다. 물론 차베스 정권은 선거과정의 부정을 빌미로
오르테가 지도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차베스 세력의 조직적
취약성은 반동적 관료주의에게 새 생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볼리바르 혁명의 정치적 공세를 돌파한 신임 지도부는
2001년 이후의 정치적 과정에서 자본과 함께 반차베스 전선의
핵심중추로, 반동의 선봉에 나섰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은 바로 CTV와 미국
노총AFL-CIO의 관계였다. 미국 노총은 차베스의 공세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여, 반차베스 운동에
동참했던 것이다. 이는 지난 냉전시기 AFL-CIO가 전 세계에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CIA의 파트너로서 노동운동의 분열과
전투적 활동가들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던 아픈 역사를 다시
상기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그런 관행은 1995년 존 스위니 “개혁” 지도부가
출범하면서, 이른바 AFL-CIO의 대외사업을 정리하면서 일단은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사라졌기에 흥미로운 것이다. 물론, 존
스위니는 비록 시애틀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9.11
이후 정치적으로 보수화되어, 미국의 많은 노조활동가들을
실망시켰다. CTV에 대한 노골적 지지는 “노동제국주의”라는
과거의 망령이 부활하는 전조로 이해되기도 했다.
볼리바르 혁명의 전망과 과제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은 과연 좌파 민중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을 것인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차베스 정권은 광범한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조직적 기반의 취약성을 갖고 있다.
민중운동의 중심축인 노동운동은 여전히 차베스보다는
반동세력의 동맹자이며, 쿠데타 세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비록 차베스가 조직적 기반의 결여를 민중주의적 수사에
의거하여 광범한 실업 노동자를 비롯한 비공식부문의 미조직
노동자들의 지지로 극복한다 하더라도, 반혁명적 세력의 정치적,
조직적, 경제적 기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지 못하는 한,
차베스 정권의 미래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반동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차베스가 볼리바르주의
혁명노선을 견지하는 한, 희망은 존재한다. 첫째, 국제적 정세의
유리함이다. 1) 미국 제국주의의 정치적 오류(4월 쿠데타에 대한
섣부른 지지)와 그로 인한 정치적 부담(노골적 개입공세는
불가능함), 2) 남미 전체적으로 브라질의 룰라정권과 에콰도르
쿠티에레스 정권 등 좌파정권의 등장 등의 남미정세의 변화는
차베스 정권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1) 4월 쿠데타로 군부내 반정부세력의 제거,
그로 인한 군부의 지지기반 유지, 2) 반정부세력의 내부적
반목과 분열, 특히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제도정당에 대한 불신이 고조된 상태에서, 자신의 힘만으로
차베스 정권을 타도해야 하는 반정부세력의 한계 등을 고려하면,
외견상 격렬한 석유파업의 장기화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반미 외교노선에 입각한 국제적 지지와 남미대륙
전체의 정세가 유리하게 작동하는 이점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급조된 연합정당을 넘어서는 계급적 조직기반은 차베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부분이다. 이는 현정권이 차베스의 개인적
스타일에 크게 좌우되는 한계를 넘어 미국 제국주의와
매판세력의 지배를 청산하는 남미대륙의 혁명적 민중운동과의
연계와 더불어, 노동자계급과 민중세력의 국제주의에 기반한
계급적 역량의 조직화만이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1973년 칠레 아옌데 정권에 대한 피노체트 반혁명,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에 대한 콘트라 반혁명 등 라틴 아메리카의
현대사가 생생하게 보여주는 교훈이다. 더욱이, 브라질의 룰라
정권과 에쿠아도르 구티에레스 정권의 출범은 미국 제국주의의
앞마당에서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거부하는
노동자-민중투쟁의 정치적 성과이기에,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은 국제적 고립을 넘어, 그리고 차베스의 개인적
정치스타일을 뛰어넘어, 남미 전대륙적 차원에서 새로운
국제질서와 계급적 역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볼리바르주의 혁명이 정치적 수사에 끝나지 않고, 사실상의
계급전쟁에서, 특히 정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지구전적 과정을
통해 혁명의 과업을 완수하는 임무, 즉 전인미답의 새로운
이행기 사회 건설의 정치적 경험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사적-정치적 상상력과 계급적 조직역량의 구축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대한 일국적-국제적 대안을 구체적으로
물질화할 수 있는 국제연대에 대한 모색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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