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짧은 휴식이 안겨준 긴 여운 노동자민중세상: 산행기 |
현장에서 미래를 제11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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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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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지리산: 짧은 휴식이 안겨준 긴 여운
박명선 / 노동자의 힘 편집국장
그냥 내 주변을 떠나 컴퓨터도, 가족도, 친구들도 없는 그러한
곳에서 내 머릿속에 뒤엉켜있는 것들을 잠시나마 잊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지리산. 여름휴가 때도 갔었으나 태풍으로
인해 중간에서 내려왔던 아쉬움도 달랠 겸, 힘들이지 않고,
천천히 자연을 둘러보며 다녀오겠다는 심정으로 4일의 시간을
잡았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짐을 꾸린다. 산에 혼자 간다는
것이 약간 두렵기도 하지만 이내 속으로 내뱉는다. “인생 뭐
있어?”
산행 1일차: 맛난 소주 먹고, 재수 없는 아저씨 만나 기분
나빠지다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맥주를 하나 샀다.
‘나를 위해 건배!’
어느덧 기차는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해는 뉘엿뉘엿 모습을
감추려 한다. 첫날은 산뜻하게 노고단까지만 올라가기로 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지리산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절경을 바라본다. 안개가 살짝 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그 사이로 해가 모습을 감추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노고단 산장에
도착하니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한 무리의 아저씨가 혼자
왔냐며 저녁을 같이 먹잔다. ‘그래요’ 라고는 했으나 ‘오늘
저녁 많이 먹어서 짐 좀 덜려고 했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
아저씨들이 라면을 끓인 뒤 집에서 싸온 찬밥을 라면국물에
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다가 내가 주머니에서
소주를 꺼내 ‘한 잔 드실래요?’ 하고 권하니, 모두들 꺄르르륵
웃는다. 왜 웃냐고 묻자 젊은 여자 혼자 와서 소주까지 싸들고
왔다고 그런단다. 별로 개의치 않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주 한
병을 비웠다. 담배도 필 겸 밖으로 나왔다. 문득 하늘을 보니,
별들이 정신없이 반짝이고 있다. 약간 술에 취한 듯한 한
아저씨가 내 옆으로 다가와 “북두칠성이 어떤거죠?”라고
묻는다. 글쎄, 국자모양으로 생겼다는 것이 북두칠성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저 많은 별들을 연결하다보면 국자모양은 수 없이
만들어진다. 모르겠다고 씩 웃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 아저씨는 아내와 같이 왔는데, 산에 같이 온 것은
처음이란다. 약간 혀가 꼬인 아저씨는 여자랑 같이 오려니까
속도도 느려지고 해서 답답하다고 투덜거린다. “그래도 아내와
같이 다니면 좋잖아요. 자주 다니세요.”라고 했더니, “아유~
여자들이랑 같이 다니면 귀챦어…” 라며 북두칠성을 찾는지
하늘을 살펴본다. 그 아저씨를 보며, ‘결혼은 하지 말아야지.
저런 남자 만나면 고생이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담배한대를
입에 가져간다.
산행 2일차: 여유의 미덕을 알다
일찍 잤던 탓인지 4시 반쯤 눈이 떠졌다. 아무리 더 자보려고
해도 잠이 안온다. ‘에잇! 밥 먹고 천천히 올라가지 뭐~’
어제 저녁을 다른 사람들에게 얻어먹은 관계로, 짐이 줄지
않았기에 아침을 많이 먹었다.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해…. 따뜻한 커피한잔을 마시고, 등산화의 끈을 동여맨다.
작년 여름에 연하천 산장에서 벽소령 산장까지 가는 길에 거의
탈진할 뻔한 적이 있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서두르지
말고, 힘들면 쉬었다가 그렇게 조금씩 가자.’ 역시나
노고단-벽소령 구간은 ‘지리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리지리’하다. 계단도 많고….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오르고
나면 멋진 광경이 펼쳐진다. 그러다가 다시 또 지리한 구간을
지나면 또다시 멋진 광경이 펼쳐지고…. 아마도 이것이 등산의
묘미인 것 같다. 아침이슬이 살짝 얼어서 나무들이
희끗희끗하다. 길이 조금 미끄럽지만 조심스레 천천히 걷는다.
힘이 들어 가방을 내리고, 편해 보이는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아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러자 바람에
나뭇가지들이 부딪혀 만들어내는 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눈을 뜨니 다람쥐가 내 바로 옆에서
도토리를 까먹고 있다. 혹시나 다람쥐가 밥 먹다가 놀라
도망갈까봐 인기척을 내지 않기 위해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다람쥐는 내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나 보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찾아 숲 속으로 달려간다.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연하천 산장이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짐을
푸는데 어제 저녁을 같이 먹었던 아저씨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그 분들은 세석 산장까지 가는 게 오늘의 목적이라 새벽 3시쯤에
출발했다는데, 서두르지 않은 나와 시간차는 그리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그러게…. 뭐가 그렇게 바빠서 앞뒤보지 않고 살아가는지….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바람소리, 새소리를 듣고, 다람쥐를
보았던 것처럼 내 주변이 보였을 텐데 말이야…. 그러면 주변을
돌볼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벽소령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여름에는 힘이 들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형제봉이 보인다. 다시 가방을 내리고 형제봉을
눈에 넣는다.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서있다. 연하천 산장에서 봤던 글귀가 기억난다. “가장 약해
보이는 것이 가장 강하다.”
벽소령 산장에 거의 다 와간다. 그런데 한 아저씨가 귤 먹고
가라며 붙잡는다. 귤을 받아들고 그 아저씨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화엄사에서 올라와서 오늘 천왕봉까지 가야한단다. 그런데
오늘은 왠일인지 발걸음이 무겁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는
4일 동안 종주 하는데 2일 만에 그것도 화엄사부터 올라와서
종주를 한다니 입이 쩍 벌어진다. “우와~ 산을 잘 타시나
봐요.” 라고 했더니, “내가 그래도 백두대간을 다 가봤어.
근데 오늘은 영~아니네.” 라며 담배를 한대 문다. 그리곤 슬슬
같이 가잔다. 나보고 앞장서라는 걸, 나는 걸음이 느리다며
아저씨가 앞으로 가시라고 했다. 아저씨는 “오늘은 나도 걸음이
느린데….” 라며 앞으로 가셨는데, 역시나 아저씨는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벽소령에 너무 일찍 도착했다. 3시 조금
넘어서 도착했다. 풍경사진도 좀 찍고, 바람도 쐬면서 시간을
떼우다가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갔다. 옆에는 3명의
아줌마들이 있다. 가족들과 같이 산에 오려고 했는데, 남편들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그냥 친구들끼리 왔단다. “오히려
친구들끼리 와서 더 재밌겠다.”고 했더니, 정말 그렇다며,
잠시나마 가족을 잊을 수 있어서 좋고, 친구들하고 수다 떠는
것도 재미있다며 어린아이처럼 마냥 웃는다. 산장의 소장이
스트레칭을 가르쳐주겠다며 나오란다. 우루루 아줌마들이
몰려나가고, 옆의 아줌마가 나의 손을 잡고 끌고 가는 바람에,
아줌마들 틈에 끼어서 스트레칭을 같이 했다. 근데 오히려
아줌마들이 더 유연하다. 산을 오를 때 흘렸던 땀보다,
스트레칭하면서 흘린 땀이 더 많은 듯하다. 결국 중간에는
아줌마들이 하는 것만 신기한 듯 바라만 봤다.
산행 3일차 : 속세에서의 인간은 왜 각박할까?
역시나 눈이 또 일찍 떠졌다. 아침을 먹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커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풍경도 구경하다가,
안경을 벗고 콘텍트렌즈로 바꿔 꼈다. 산행을 할 준비가
완료됐다. 날도 점점 환해진다.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발걸음이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그러나 뭐 시간이 많으니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힘들면 쉬면되지….’
중간에 샘물이 있으면 무조건 들려서 마시고, 이를 빌미삼아
조금 쉰다. 아침을 많이 먹었는데도 오늘은 왠지 힘이 빠지고
배가 고프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연양갱을 꺼내, 한입씩 물었다.
그렇게 또 쉬엄쉬엄 가니 어느새 장터목 산장이다. 오후 2시.
천왕봉을 갖다 와도 될 만한 시간이다. 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내일 새벽, 천왕봉 일출의 감동을 만끽하기 위해서 참기로 했다.
산장 앞에 빨간 우체통이 보인다. 이곳에서 편지를 붙일 수
있단다. 시간도 많겠다, 그동안 나에게 신경써줬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부모님께는 ‘부모님이 바라시는 것처럼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조금만 이해해달라고’ 썼다.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신경써줬던 동지들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왠지 닭살스러워 할 것 같아서 딴 내용만 적었는데,
사실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편지를 썼다. ‘명선! 수고했다. 더 열심히 살자’ 이렇게 달랑
세 줄. 좀 유치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 무기력해질 때 내가
나에게 보낸 이 편지가 많은 힘을 줄 것 같다.
편지를 우편함에 넣고, 저녁을 먹으러 나서는데, 한 아저씨가
혹시 안경 잃어버리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가방을 뒤져보니,
안경집만 있을 뿐, 안경이 없다. ‘허걱!’ 아저씨가 안경을
건넨다. 내 것이 맞다. 어디서 주웠냐고, 내 것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 벽소령 산장에서 놓고 가는 걸 봤단다.
아저씨는 남자였으면 발로 밟아서 뽀개 버렸을 텐데, 여자
것이라서 챙겨왔단다. 그 험한 길을 안경에 스크래치 하나
안남기고 가져온 것이다. 내가 너무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으로 답례를 해도 된단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아! 소주!’ 운 좋게도 바로
알아들은 나는 마지막 남은 소주 한 병을 드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지만 그래도 신경 써서 갖다 주셨는데…. 아픈
가슴을 달래며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
세분이 저녁을 같이 먹잔다. 버너 같은 것을 준비를 해오지 않고
찰밥 몇 뭉치를 먹었는데 출출하단다. 흔쾌히 그러시라고 하고
할아버지가 사온 라면을 끓였다. 한참 라면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소주를 한 병 꺼낸다. ‘역시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돼’ 라는 생각을 하며 기쁘게 먹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가 본인들도 서울로 올라가는데 차 갖고
왔으니까 차비도 아낄 겸 같이 가잔다. 너무나 고마웠지만 이번
산행 컨셉은 ‘나홀로 산행’이었기에 정중히 거절을 했다.
할아버지는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전화를 달라며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넨다.
사람들은 산에 오면 모두 착해진다. 모르는 사람한테도 친절하게
말을 걸고, 필요한 것 있으면 빌려주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런데 왜 속세에만 가면 그렇게 각박해 지는 걸까? 나 역시
속세에서는 아무한테나 말을 못 건다. 그러나 이번 산행을
하면서는 아줌마들과 수다도 떨고, 얼굴 철판 깔고 스트레칭도
하고, 낮선 사내들과 밥도 같이 먹었다. 그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내일의 천왕봉 일출 산행을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산행 4일차: 천왕봉 일출, 해가 혀를 낼름 내밀다
새벽 3시 30분, 천왕봉 일출 산행을 위해 짐을 꾸렸다. 세상은
아직도 깜깜하다. 어두움에 묻혀 연양갱 두개를 배속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자! 이제 출발이다!’
달랑 작은 손전등 하나를 가져온 나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가는
사람들의 뒤를 바짝 쫒아 가야만 길이 보여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산 잘 타는 사람 뒤를 쫒아가다 보니,
30분 만에 천왕봉에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찬다. 바람은 거세다.
아직은 깜깜하다. 바람을 막아줄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고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옷깃을 여민다. 한 시간여를 기다리자
날이 점점 밝아 온다. 산등선의 주위에 안개가 껴있고, 그
사이로 해가 혀를 낼름 내민다. 역시 ‘3대가 착한 일을 해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은 보기 어려웠지만, 안개 낀 천왕봉의
모습 또한 멋지다.
이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속세로 떠나야 한다. 아쉬움을 달래려
천천히 걷는다.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을이다. 물 흐르는
소리, 새 소리, 빨갛고 노란 낙엽이 걸을 때 마다 사각사각
밟힌다. 산을 올라올 때는 겨울을 만나고, 내려갈 때는 가을을
만난다. 계곡물에 잠시 발을 담갔다가 다시 산을 내려간다. 이제
시멘트 바닥이다. ‘속세에 도착했군.’ 기념으로 파전에 동동주
하나를 먹어주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이다. 사람이 너무 많다. 짐도 무거운데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땀이 물 흐르듯 흐른다. 산에서 흘린 땀보다 더
많이 흐르는 것 같다. 짜증이 밀려온다. 지리산에서 청정해진
마음이 속세에 오자마자 때가 타는 것을 느끼지만, 어쩌랴? 내가
살아갈 곳은 이곳이고, 내가 싸워나가야 할 곳도 이곳이거늘.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몸 부벼가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세상 속으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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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18: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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