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보고 |
현장에서 미래를 제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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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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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꼬뮤날레 제1차 쟁점토론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를 보고
참˘관˘기
송 석 현
노동자의힘 강령위원
신자유주의 세계화 : 노동자계급은 반제국주의 반세계화 투쟁을
할 수 있다!
맑스 코뮤날레를 이끌어 낸 동력은 다름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었다. 현존
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이후 노동자 민중 운동 진영은 이념적으로
갈래길을 찾지 못한 채 현실에서의 이해 관계에 급급한 투쟁만을
준비하기에 분주했었다. 그 과정에서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매우
중요한 투쟁의 경험을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었다. 직․공장에서 구체적으로 들어온
신자유주의에 대해 노동자들이 ‘아이고, 큰일났네’ 라고
느끼는 순간, 그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이미 ‘계급’을
포기하라는 이야기였다. 다행히도 우리 노동자계급은 싸웠고,
그것은 비록 패배의 연속이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일러주었다. 그것의 시발은 바로 96~97년
총파업이었다. 그 투쟁이 있었기에, 맑스 코뮤날레라는 진보적
학계의 동력이 다시 가동될 수 있었다. 그 성과는 일차적으로
지난 5월 23~25일 사흘간 ‘지구화시대, 맑스의 현재성’을
주제로 한 학술 문화제였다. 이어서 늦여름 8월 25일
‘신자유주의 세계화,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라는 주제로 쟁점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토론회 자체도 매우 중요했고 그것을
전후한 여러 가지 논쟁들이 오고 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우리 노동자계급이 무엇을 할 것인가 이다. 이런 마음을
담아 토론회를 통해 느낀 생각을 이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제국(Empire)인가, 제국주의(Imperialism)인가’, 그리고 이게
왜 중요한가?
토론회의 주제부터 이야기해 보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나타나고 있는 현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제국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가 그것이다. 조정환 선생은 현재 세계
자본주의가 어째서 ‘제국’인가를 제국 주권의 특징을 통해
논증하고자 했다.
제국은 다음과 같은 특성과 주권 합성을 통해서 성립된다. 1)
제국적 질서 아래에서 생산은 공장 기반을 떠나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상품과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제국주의와 달리 제국은 탈영토적 질서를 의미한다. 2)
제국에서는 낡은 생산 기반, 유통 수단, 주권 기관들은 새로운
생산 기반, 유통 수단들, 그리고 주권기관들과 더불어
네트워크를 이루어 헤게모니적 명령 구조에 종속되는 총체적인
질서를 갖는다. 3) 제국은 주권들의 합성체 혹은 혼합체이다.
통합세력으로서 미국G8강대국들―군사, 경제, 정치, 금융,
무역 등에 걸친 이질적 연합체들(WTO, IMF, IBRD 등),
절합세력으로서 초국적 기업들-지역적․영토적
민족국가들의 연합체, 대의세력으로서 개별 민족국가―미디어와
종교NGO들의 주권합성체로 이루어진다. 이것들은 다중의 삶을
억누르고 통제하며, 포획하는 장치이자 ‘마디’이다.
‘제국주의론’ 옹호자들은 ‘미국’만을 중심으로 본다. 이
주권합성체는 정치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 등
전 영역에서 삶의 생산과 재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삶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런데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각 마디들이 항상 순탄한 것은
아니다. 제국 속에서도 ‘경향으로서의 제국주의’는 살아
움직인다. 제국은 그 자체가 위기를 관리하는 시스템이며,
그래서 제국 네트워크의 각 단, 각 층에서 움직이는
마디들(기구들, 국가들, 기업들, 연합체들, 그리고 미국 등)을
절합하고 통합하는 일은, 그 과정 속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불안정성을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국주의와 같은 낡은 경향들이 때로는 제국의 혼합적 총체성의
균형을 뚫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부시의 일방주의적
패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제국적 주권
패러다임을 파괴하거나 대체할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제국론’에 따르면, 부시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나 앞으로나 지배적 경향은 ‘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이다.
정성진 선생은 이론적으로 ‘제국론’은 세계화 담론들을
들뢰즈․가타리의 포스트 구조주의 방식으로 재서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천적으로도 혁명적 사회주의와 동떨어진
개량주의 정치의 헤게모니에 봉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성진 선생은 그 이유로 ‘제국론’이 노동가치론과 공황론을
무시함으로써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부정하고 있으며, 국가간
경쟁이라는 제국주의론의 핵심을 폐기함으로써 맑스주의
제국주의론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국가간 경쟁이
약화된다는 것은 오늘날 세계 현상을 봐서도 맞지 않으며,
이것은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새로운 버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또한, 미국 제국주의 지배 현실의
부정,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진보성의 부정, 세계화 찬양,
노동자운동의 중심성 부정 등을 들어 ‘제국론’을 공격하였다.
손호철 선생은 현실 속에 ‘제국’의 ‘요소’와 ‘계기’가
현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낡은’ 제국주의적 요소와 계기도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으므로 제국이 이미 우리의
현실이며 제국주의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잉일반화 내지
과장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미국의 자본 소유의 규모,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 전쟁,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국가의 위상, 그리고 보다 주요하게는 부시의 일방주의와
“중상주의적 제국주의”를 들었다. 또, “하트는 세계가
‘제국’이 아니라 낡은 미국의 제국주의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세계를 자신들이 주장해온 ‘제국’으로 이끌어 가지
않는 ‘전세계 지배자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현재 세계가 제국이라는 주장에 강한 의문을 던졌다.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나는 ‘제국론’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설명하기도, 실천적으로 대항하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성진 선생의 지적대로 ‘제국론’은 ‘제국주의’
국가 간, 그리고 독점자본 간의 경쟁과 갈등을 고려하지 않는
‘초제국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서 드러난 국민국가 간의 대립은 미국의 ‘어리석은
지도자’의 쿠데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독점 자본의
이해와 이해 관철을 위한 경쟁의 표현이라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분열과 대립의 구도는 중부유럽, 동유럽,
발트해 지역, 카스피해카프카즈 지역, 중앙아시아, 중동을
잇는 지역의 자원과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둘러싼 제국주의간의
쟁투를 의미하며 이것은 군사적 쟁투, 군수독점자본간,
석유독점자본간, 기축통화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번 칸쿤에서의 사례를 보면, ‘주권합성체’의 한 영역인
WTO에서도 이들 국민국가(선진국 대 개도국) 간의 이해 대립이
완강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지배’ 속에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제국인가, 제국주의인가’ 라는 질문이 왜 중요한가?
혹자는 아카데미즘에 물든 불필요한 논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토론회가 매우 현학적으로 흘렀다는 평가도 같은
맥락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실천적인
관점에서 이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서
무엇을 상대로 투쟁해야 하는가, 투쟁의 전망과 대안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투쟁의 주체는 누구인가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인가, 다중(Multitudes)인가 / 혁명인가, 개량인가
제국론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투쟁의 중심 주체가 못된다.
서구의 경험으로 보자면, 이미 노동자계급은 지배 블록의 한
세력을 형성한 낡은 존재이다. 네그리와 하트 또한 “서울에서의
총파업은 우리를 대공장 노동자 시대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같다. 이는 죽어 가는 노동자계급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
같은 형국이다. 이들 투쟁은 처음부터 이미 늙었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표현으로 노동자계급을 낡은
세력으로 치부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주체로 ‘다중’을
제시하는데, 조정환 선생에 따르면 다중이란, 민중과 대중과의
구분 속에서 말할 수 있지만 범주 구분적 장치는 아니며,
주권적인 힘으로 복속되지 않는 의지를 가지고서 다양한 힘들의
연합으로 싸움에 나서는 사람들을 일컫는 개념이다. 즉, 다중은
국민국가의 주권에 복속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국민국가의 주권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수준에서 제국의
주권합성을 공격하면서 삶정치적 투쟁, 삶의 형식을 둘러싼
투쟁, 새로운 공적 공간, 새로운 공통체의 형식을 창초하기 위한
구성의 투쟁을 전개하는 주체이다.
반면 정성진 선생은 ‘다중’이야말로 제국론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네그리=하트가
맑스주의 정치의 핵심인 노동자운동의 중심성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정성진 선생에 따르면, 다중에는 긍정적
요소가 없으며, 오히려 네그리와 하트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심성도 없고, 불균등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무차별적이고 무정형적인 것이 다중이다. 시애틀에서의 분출이
다중의 행동이라고 한다면 혁명적 정세에서는 항상 그렇게
해왔다. 혁명적 정세에서는 항상 대중들의 자생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와 같은 자생성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대중
자생성 그 자체에서 혁명으로 이어진 적은 없기 때문이다. 가치
생산현장에서 조직 노동자들의 중심성을 인정해야 한다. 다중
개념을 절대화할 경우, 조직 노동자의 연대와 운동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 이상이 정성진 선생의 다중 비판의 요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성진 선생은 ‘제국론’이 말하는 세 가지
요구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즉 1) 지구적 시민권, 2) 사회적
임금권, 3) 재전유권을 위한 투쟁은 개량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거 70년대 아우토미아의 ‘노동거부’ 투쟁에는 혁명적
경향성이 있었는데, 지금 ꡔ제국ꡕ에서는 이마저
상실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제국론’이 ‘제3의 길’과 뭐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또, 개량이라는 것은
‘국가’를 전제한 것인데, ‘국가주의’에 반대하면서 국가를
전제로 하는 주장을 한다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도 모순임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지구적 시민권, 사회적 임금권,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개량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혁명적인 요구임을
강조했다. 지구적 시민권은 이민 이동 분산들 속에서 국가적
경계선을 철거하기 위해서 나온 개념인데, 시민권을 획득한다면
노동자 또는 다중 차원에서 단결하게 됨을 말했다. 자본에
의해서 분할 통치되는 상황에서 이것은 분명 혁명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임금권은 자율주의 운동 이전 60년대에 나온
임금 형태로서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삶에 적정한 수준의 임금을
받아내자는 것인데,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안임을
역설했다. 끝으로, 정보적 힘의 재전유는 생산수단을 재장악하는
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성진 선생은 이 세 가지 요구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제국론’에서 국가를 매개로 한 주장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되물었다. 허공에 대고서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즉, 세 가지 요구 중에서 세 번째
‘재전유’ 부분은 추상적이라서 그렇고, 시민권과 임금권은
국가 매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현실은 국민국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이행기 강령의 설정 속에서
그와 같은 요구를 제기한다면 부정할 이유가 없으며, 이런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개량적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 문제, 즉
국가분쇄와 소멸의 문제 설정을 회피한다면, 또한
‘개량주의’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선생은 국가를 매개로 한 문제가 아니며 어떤
국가가 이것을 보장해 주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전지구적 다중의
연합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운동 주체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또한 제국 속에서 국민국가가 제국주의보다
쇠퇴한 것은 사실이며, 그렇다고 국민국가가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제국의 ‘명령’을 받아서 국민국가가 다중을
분할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또, 시애틀 투쟁 등이 미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WTO 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이
‘제국’의 실재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제국’에서는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양극화가 아니라 계급적
양극화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항하는
국가의 자립성과 자립적 국가들의 연대’를 대안으로 사고하면서
그것을 노동계급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에서 찾는 것은 이제
명령관계로 전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착취관계의 폐절이라는
당면 과제를 미래로 유보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노동자계급이 중심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기본 모순은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다. 양자의 질곡과 불일치는
어느 하나를 조응시킴으로써 가능한데, 그것은 사회적 생산에
걸맞게 사회적 소유를 확립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기획되고 운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산자인 노동자들은 생산 전반을 통제하고
분배하는 정치가로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작업의 시작은 개별
국가에서 완전히 질적으로 새로운 국가권력을 창출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국가권력, 즉 주권은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그대로 접수 또는 장악함으로써 가능한 것(국가에
대한 도구론적 관점)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히 분쇄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 점에서 제국론과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국민국가내에서 주권 형성 자체를 반대하는
제국론은 국가에 대한 도구론적 관점―조정환 선생은 이것을
국가에 대한 선망(권력장악)이라고 했다―을 비판한다. 하지만,
도구론적 관점을 넘어서는 대체권력의 형성이 갖는 의미와 그
속에서 주체 형성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일체의
주권 형성 시도를 권력 장악의 문제로만 보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제국론이 말하는 3가지 요구가 혁명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혁명적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자계급은 반세계화 투쟁을 할 수 있다.
이제 끝으로 토론회에서 가장 우선적이면서 도발적으로 떠오른
쟁점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반세계화
운동은 과연 반동(적)인가?’ 이다.
토론회 첫 발제자 손호철 선생은 “제국과 지구화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며 필연이다(가설1). 제국과 지구화는 역사적
진보이다(가설2). 따라서 반세계화(반신자유주의적 지구화)
투쟁은 역사적 반동이다(가설3). 우리의 대안은 (반지구화
투쟁이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하는 것, 이를 통해
대항지구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지구적 시민권,
2)사회적 임금권, 3)재전유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가설4).”는
네그리․하트의 저작 ꡔ제국Empireꡕ의 핵심
가설을 제시하였다. 만약 이것이 맞다면, 손호철 선생이 지난
수년 간 몸바쳤던 ‘반세계화’ 투쟁은 반동적이며, 그는
반동행위를 한 것이 된다. 과연 네그리와 하트의 말대로 WTO
반대, 자유무역협정․투자협정 반대 투쟁 등이 ‘자본의
지구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장애가 되는’ 반동적이며 해로운
것인가?
조정환 선생은 반세계화 투쟁을 두 가지 층위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지성과 민족국가에 기초한 반세계화 투쟁과
다중(Multitudes)의 역능에 기초한 전지구적 반세계화 투쟁을
혼동하지 말 것을 주문하면서 반세계화 투쟁을 문제제기 차원과
문제해결(대안적) 차원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문제제기의 차원은 다중의 현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정치 경제 문화적 어려움을 호소함으로써 공동의 경험과 행동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다. 여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미국과
이태리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에 자율주의 활동가들이 동참하고
있다. 문제해결의 차원에서 보자면, 민족국가적 또는 국지적
차원에서 풀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반동적, 반작용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만약 이와 같은
방향으로 간다면 동의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손호철 선생의 반론은 한층 더 단호했다. 그는
농민들의 WTO 반대 투쟁은 농민의 기본 생존권을 지키는 것이
우선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비록 국지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지만 반대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즉,
“민족주의와 국지적 정체성이 억압성을 내재하고 있고
국제주의와 대항지구화라는 지구적 연대에 장애가 될 수 있지만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여 국지적 것을 방어하는
반지구화투쟁은 그 나름의 진보성을 갖고 있으며 진보진영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시애틀
항쟁을 들었다. 시애틀 항쟁은 “ꡔ제국ꡕ이 바라는
대로 대항지구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자본의 전지구화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부터
‘국지적인 것을 방어하려 하고 자본의 가속화하는 흐름에
장애물을 건설’하려는 반지구화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손호철 선생은 이와 같은 반지구화투쟁과 보다
적극적으로 민중적인 대항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는
대항지구화투쟁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쟁점토론을 지켜보면서 나는 ‘제국론’에서 말하는
‘대항지구화투쟁’이 ‘제국’이라는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투쟁의 요소가 있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투쟁을 전세계적인 관점이 아니라
민족국가 단위나 국지적 관점에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하거나
외면한다면 그 투쟁의 주체로부터 투쟁의 의지를 박탈하는
비실천적 결론에 이르게 됨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이
세계화되는 것은 필연이므로 그것을 막으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노동 또한 세계화 흐름에 걸맞게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는 입장은
논리적으로 보자면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물론
‘제국론’에서도 계급 적대와 자본의 착취를 폐절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고리로 어떻게 그것을 조직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그 속에서 쉽게 찾기 힘들다. ‘제국론’이
말하듯이 다중의 네트워크적 힘의 역능성을 통해서
실현된다기보다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대안 사회의 정치적 전망을 갖고서 반세계화 투쟁이 전면적으로
벌어져야 함이 타당하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망을
구축하고 그것을 기초로 단결하고 국제주의적 실천을 벌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 모든 논쟁을 단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길은 있다. 그것은
바로 ‘낡은 세력’으로 버림받은 노동자계급이 반제국주의
반세계화 투쟁의 선봉에 서서 투쟁하는 길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모든 소외된 제계급 세력의 전위투사로서 지도력을 인정받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할 수 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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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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