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활동가들의 전투적 행동만이 침체된 현장을 되살릴 수 있다 |
현장에서 미래를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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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노동자 임시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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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하반기 투쟁정국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옹호하고 더 나아가기 위한 각자의 태도와
입장을 표명한 선전물들이 배포되었습니다.
현장활동과 관련하여 제기된 글 중에서 몇 입장을 볼 수 있는
글을 중심으로 싣습니다.
현장활동가들의 전투적 행동만이
침체된 현장을 되살릴 수 있다
현장노동자 임시 제11호 [ 2003-11-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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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활동에 대한 제입장 관련
자 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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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현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열사를 낳고 있다. 동지들의
잇따른 분신과 자살은 비단 노동 탄압이나 손배·가압류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상에서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는
노동자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삶의 고통이 가장 응어리져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현장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매일매일 자본가와 관리자들에게
시달리고, 눈칫밥을 먹고 있다. 게다가 언제 잘릴지 모르고, 말
그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현실 앞에서도 찍소리 못하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박박 기어야 하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따지기 이전에 자본가들이 휘두르는
‘현장의 권력’이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정말 답답한 일은, 우리 동지들이 제 한 몸 아낌없이 버려 이
자본가 세상을 불사르고 엎어버리려 함에도 정작 현장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절대 권력이 보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선언하고, 수천·수만의 노동자들이 연일 전국의
거리를 메우고 있음에도 여전히 대다수 현장은 태풍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민주노조로 조직된 사업장, 투쟁 역사가 있는 사업장, 거대
사업장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노동자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차 없는 조합원들은 오늘도 생계가 강요하는
잔업과 특근을 위해 열사의 죽음을 외면해야만 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져 있다. 왜 이런 지옥과도 같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가? 왜 우리의 현장은 열사투쟁의 무풍지대로 남아있는
것인가?
‘교섭과 협상’의 관성 속에 소외되어 가는 조합원
민주노조운동의 초창기에만 해도 ‘교섭과 협상’이라는 말
자체를 꺼려하고, 더욱이 대중적 현장파업 없이 지도부가
교섭장에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당장 끌려 내려오는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기풍이었다. 또한 교섭장에서의 대화내용은
조합원들이 참관해 듣거나 적어도 세세한 사후 보고가
필수적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교섭은 투쟁의 연장선이자
파업의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교섭은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의
힘에 못 이겨 자본과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요구해 왔고,
교섭위원들 만이 아니라 파업에 동참한 모든 노동자 대중이
교섭의 주체들이었다. 그래서 교섭은 민주노조의 힘을
재확인하는 하나의 절차 정도로, 파업이 얼마나 자본가들을
압박했는지를 가늠하는 척도 정도로만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교섭으로 따낸 성과는 노동자 대중 모두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민주노조’에서 보여지는 교섭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교섭은 현장파업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완전히 타락했다.
파업은 매번 엄포성으로 그치고, 그나마 생산에 전혀 타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진행된다. 자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교섭이 교란 받지 않기 위해 ‘정상조업’ 한다는 지침이
소위 민주노조 지도부의 입을 통해 뻔뻔스럽게 내뱉어지고 있다.
이미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임단협을 현장파업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실종되어 버렸다. 임단협은 철저히
지도부들의, 교섭위원들의 잔치로 굳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조합원들이 할 일은 없어진다. 교섭위원들의 ‘실력’을
믿고 자신의 운명을 위임하는 수밖에 없다. 민주노조의 주인은
더 이상 조합원들이 아니다. 지도부와 교섭위원들이 주인이
되었다. 자본과 야합한 노조관료들이 민주노조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
노조관료들의 거수기가 될 것을 강요받는 조합원
이 속에서 관료들이 조합원 대중에게 “투쟁하라, 파업하라”고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속이 빤히 보이는 짓거리인가? 자본가들이
노동자에게 “한 가족” 운운하는 것만큼이나 기만적인 일이다.
민주노조의 유일한 힘인 파업권을 조합원들에게서 빼앗아놓고
투쟁을 명령하다니 이 얼마나 뻔뻔한가. 교섭일정에 맞춰
지도부가 시키는 대로 태엽 감은 인형들처럼 오늘은 두 시간,
내일은 네 시간 그나마 재고가 없으면 모레는 다시 잔업에
특근..... 조합원은 자본의 기계만이 아니라, 노조관료들의
기계로까지 전락을 강요당하고 있다. 원만하고 순탄한 교섭을
위한 부품들. 단 하나의 불량품도 용납되지 않는다. 돌출행동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박수치라면 박수치고, 노래
부르라면 노래 부르고, 찬성 찍으라면 찬성 찍는 기계들, 이것이
오늘날 ‘민주노조’의 조합원들이 지도부로부터 강요당하고
있는 운명이다.
관료들과의 전투를 우회하거나 회피하는 실천으로는 조합원들을
나서게 할 수 없다
민주노조의 관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태를 점점 더
악화시켜 가는 주체 중 하나는 다름 아닌 현장활동가들이다.
현장활동가들은 대부분 조합원들의 요구와 불만을 직접 받아
안는 현장투쟁과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헌신성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아 활동가라는 지위를 얻게 된 인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민주노조운동 및 조합원 대중과 운명을 같이하는 인자들이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파괴되고 조합원 대중이 점점
운동으로부터 멀어져감에도 현장활동가들은 여전히 무기력에
빠져있다. 어쩌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조차 체념하는 듯 하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속에서 현장활동가들 스스로의 오류는
무엇이었는지를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때다.
최근 들어 현장활동가들이 노조 지도부의 관료적·반동적 행위에
대해 정면으로 저항하는 사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중노조에서 무쟁의 9년에 노사화합 맥주파티를 하고,
기아노조에서 단협개악을 동반한 잠정합의안을 내오고,
소환자들에게 자진출두를 강요하고, 현자노조에서 비정규직 노조
건설에 대해 “재고할 것을 강력 요청”하고, 아산지부 비공인
파업 해고자를 엄호는커녕 방치하고, KT 노조에서 임금동결과
무분규 임단협을 통과시키고, 사회보험노조에서 작년 부결된
단협안을 더 개악된 형태로 올해 통과시키는 와중에도
현장활동가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든지 생색내기 비판 성명
정도로 때웠다. 예전처럼 누구도 노조사무실을 점거하거나
대대적인 부결투쟁, 지도부 불신임 운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조합원들이 변했다”, “수동화 되었다”고 한탄만
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수동화를 가속화시킨 원인 중에는 바로
“당신과 나” 우리 현장활동가들의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대응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우리 현장활동가들이 왜 점점 이런 모습으로 젖어들고 있는가?
왜 자본에 대한 계급적 분노를 여과 없이 표출하고, 타협적인
노조관료를 그 자리에서 타격하던 그 단호함과 자신감을 잃게
되었는가? 조합원을 탓하지 말자. 현장활동가들이 비빌 언덕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이 과연 노조관료에 직접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가? 자본의 지원을 받는 거대한
관료주의 벽 앞에서 흠모해 마지않던 현장활동가들이 나가
자빠져 있는 현실을 보면서 조합원들은 더욱 위축되고 소심해질
뿐이다. 그렇다. 결국 우리 자신의 문제다.
현장활동가들이 점점 더 유약해 지는 원인은 자본과의 투쟁과
동시에 반드시 치러야 할 관료들과의 직접적인 투쟁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과의 투쟁은 해보지도 못하고 현장에서
무장해제 되는 것이다. 노사협조주의, 어용노조를 정면에서 눈
똑바로 뜨고 맞받아 치지 않고―분명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슬슬 뒤로 물러서서 반격의 기회나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멱살잡고 싸워 관료들을 폭로하고 적어도
조합원 대중의 울분이라도 풀어줄 현장활동가는 점점 사라지고,
뒤에 숨어서 작전 짜고 모의하는 기풍이 현장활동가들 사이에
자꾸 만연해 가고 있다. 대중에게 “내가 앞장 서겠다”는
호소가 아니라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릴 시점만 짱 보고 있는
현장활동가들을 믿고 어떤 조합원이 자본과 관료의 통제를 뚫고
투쟁에 나서겠는가? 관료들의 반동적 행위가 극명해진
자리에서조차 투쟁하지 않고, 적금 붓듯 차곡차곡 비리를 쌓아둔
채 차기 선거에서 모든 것을 심판하겠다고 벼르는
현장활동가들을 보고 과연 어느 조합원이 희망을 갖겠는가?
관료적 합리주의에 포섭되는 경향
현장활동가들이 관료와의 직접적인 투쟁을 회피하는 동안 조합원
대중은 점점 수동화되고 현장활동가로부터 멀어진다. 그런데
악순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현장활동가들
스스로 관료적 기풍에 익숙해져 간다는 점이다. 스스로 관료로
군림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관료들이 펼쳐 놓은 그물망
안에서 놀아나는 포로가 된다.
노조관료의 민주적 배려(?)에 의해 현장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교섭위원으로 선임된다. 노사협조적 집행부, 심지어 어용
집행부와 나란히 교섭장에 들어가는가 하면 자본과의 타협이
강요되는 시점에서도 교섭장을 박차고 나오는 현장활동가들은
이제 잘 볼 수가 없다. 자신들도 합의한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부결선동이나 불신임투쟁조차 전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총회 민주주의는 점점 더 관료적 배신을 합리화라는 절차로
전락하고 있다. 서울지하철 배일도 집행부가 종종 구사한
총회전술―반동적 배신을 조합원 총투표로 승인케 하여
활동가들의 반발을 무산시키는 책략―이 이번에 기아차 노조에서
재현되었다. 이미 현장조합원을 조직할 능력을 상실한
현장활동가들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총회는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는 동시에 힘을 결집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민주노조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말아야 할
반동적인 ‘잠정합의안’이 총회에 붙여지는가 하면, 조합원에
대한 교육과 홍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치러지는 총투표가
횡행하고 있다.
비록 부결되긴 했지만 이랜드 노조가 노사화합선언을 총회에
붙인 것은 그 자체로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모독이다. 위원장
직권의 파업철회를 총투표에 붙인 순간 철도노조의 파업은 깨진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자 민주주의 정신을 왜곡하고 총회를
형식적·관료적 절차로 타락시키려는 음모에 대해
현장활동가들의 적극적인 저지투쟁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것을 관료들이 마련해 놓은 틀 내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경향이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점점 불어나고
있다.
뒷걸음질치는 현장조직운동
현장활동가들이 빠져들고 있는 합리주의는 현장조직들 간의 상층
합의로 현장운동을 대신해 가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잘
알다시피, 노조운동이 안착해 있는 대사업장에는 이미 몇 개
이상의 현장조직들이 존재한다. 현장조직들은 애초 어용노조에
대항한 ‘민주파’로 출발했지만, 관료적 운동가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대의원 한 번 나가려면 세력을 등에 업어야 하고 또
조직의 ‘공천’을 받아야 하는 관료적 운동 현실이 정착하면서
집권을 놓고 경쟁하는 여러 개의 현장조직들로 갈라졌다. 이들
중에는 말로는 민주노조를 표방하지만 노골적인 노사협조주의
조직도 있고, 현장투쟁은 ‘보여주는’ 정도만 하고 오로지 노조
집권이나 정치권 ‘진출’에 중심이 가 있는 조직, 심지어
자본의 물적 지원도 마다하지 않는 조직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현장의 구체적 현안 앞에서는 모두가 ‘민주파
현장조직’으로 조합원에게 다가서며, 모두가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것처럼 한 목소리로 선명함을 내세운다. 여기에
조합원들은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다 똑 같은 놈’인 것이다.
실천으로도 차이가 안 나지만, 이제는 아예 말로도 차이가 안
난다.
선거 때나 조직분리 선언할 때를 제외하고 현장조직이 모든 것을
내걸고 집행부나 기회주의적 현장조직과 투쟁한 사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구체적인 현안투쟁에서 현장조직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현장조직 상층인자들에 의해
현장활동가들이 파벌적인 질서에 따라 관리되고 줄 세워지고
있다. 대공장 현장조직운동이 점점 더 부르주아 정치권을
닮아가는 것에 비례하여 현장은 그만큼 피폐해지고 있다.
현장권력 쟁취는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의 ‘행동’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암담한 현실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은 후퇴를 거듭하고 있고,
우리 동지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수백일 동안 고립상태에서 싸우던 사업장에서 열사가
나고 죽음을 각오한 투쟁이 전개되자 기존에 민주노조운동의
관성과 관료적 통제권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투쟁조차 관료들이 다시 접수하여 합리적 교섭으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노동자계급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겐 열사의 죽음을 놓고 왈가왈부할 자격도 여유도 없다.
이 땅을 살아가는 노동자라면 모두가 열사가 될 수 있고,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매일매일 내동댕이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은 단 하나 이런 지긋지긋한 현실을 빨리 엎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다른 어느 곳도 아니다. 현장에서부터 자본의 통제권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노동자가 틀어쥐는
작업장을 만들어내는 방법밖에 없다. 이 길에 누가
앞장서겠는가?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조합원을
총알받이로 내세울 것인가? 관료들에게 또 한번 의탁할 것인가?
자기 자신, 자기 조직은 뒤로 숨은 채 실체도 없는 ‘민주파’의
외피로 또 한번 자신과 대중을 기만할 것인가?
전투적인 현장활동가들이 나서야 한다. 자본에게 공격받고,
관료들에게 통제 당하면서도, 민주파라는 허깨비와 타협하지
않는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이 나서야 한다. 현장조직이 있든
없든, 활동가들 간의 합의가 되든 안 되든, 관료적 운동질서를
교란시켰다고 손가락질을 받든 말든, 조합원의 생사와 현장의
운명이 걸린 문제라면 주저 없이 행동에 떨쳐나서는 전투적인
현장활동가들이 너무나 절실한 때이다.
이미 현장은 조합원을 말과 글로 설득하던 시기를 보내버렸다.
아니 대다수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은 해고, 수배 상태에서
조합원을 접촉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다. 현장 안에서도
이중, 삼중의 감시와 조합원 가족까지 통제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유인물 몇 장이 조합원의 잠든 계급성을 깨우고
행동으로 나서게 할 수 있을까? 진지한 현장활동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적어도 조합원들한테만큼은 현장활동가의 전투적
행동과 결부되지 않은 유인물이 선명성 과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행동해야 한다. 아주 작고 사소한 투쟁이라도 매일매일
현장에서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조합원의
상태를 감안할 때, 일시적인 패배는 당연하다는 사실을 감내해야
한다. 관료들의 악선동과 소위 민주파 활동가들의 냉소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고립을 감수하지 않고 어떻게 이 거대한
자본의 벽, 관료주의의 벽, 수동화된 조합원의 벽, 형식적
민주주의 벽을 깨겠는가?
부서별, 지부별 투쟁부터 시작하자
당장에 전공장, 전조합적 투쟁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부서별·지부별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 심지어 현장활동가
개개인의 투쟁으로 출발할 수도 있다. 해고자, 징계자,
수배자들의 전투적인 실천행동이 다시 부활해야 한다. 현중
해고자 투쟁, 철도 징계자 수색지구 천막투쟁, 기아 소환자 천막
투쟁, 사회보험 해복투 투쟁과 같은 비록 소수지만 비타협적인
투쟁이 조합원 대중에게 미친 영향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지금 당장 조합원들이 이를 지지하고 동참하지 못하더라도
이들 사업장에서 유일한 희망은 바로 이런 투쟁이라는 점을
조합원들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화려했던 옛 시절만을 떠올리며 담소나 나누고 거드름 피우며
노조 간부 또는 대의원 자리나 꿰차고 앉아 있는 현장조직의
명망가들에 비해 힘겨운 조건 속에서도 굽힘없이 낙관적으로
투쟁하는 이들 현장활동가를 보며 조합원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다.
대중은 비록 일시 숨죽이고 있더라도 결코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조합원들은 이 엄혹한 현실 속에서 누가 진짜
투사인지, 누구를 믿고 싸움을 나설 것인지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음을 현장활동가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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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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