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쏘련―영웅적 투쟁과 쓰라린 패배 :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7)
제4부 사회주의의 쇄신으로부터 해체로
바만 아자드/ 사회주의 이론연구가
1. 변혁의 초기 단계
위기의 요인은 장기에 걸쳐서 서서히 형성되었고, 1970년대에는 이미 분명히 눈에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들어와 쏘비에트의 지도부는 마침내 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하여 그것을 현실적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한 문제와의 대결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사후 1982년 11월 12일에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유리 안드로포프를 당의 서기장으로 선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10일 후인 11월 22일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안드로포프는, “일련의 중요한 숫자와 관련하여 [제11차] 5개년 계획의 처음 2년간의 계획상 과제가 수행되지 못했고” “경제 효율의 주요한 지표인 노동생산성은 우리가 만족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드로포프는 나아가 “경제는 경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명언을 즐겨 인용하면서도 이 과제의 해결을 위해서 거의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경영지도부가 아직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안드로포프는 쏘련의 경제조직을 전반적으로 점검하도록 하였다. 안드로포프의 주요 제안은 다음과 같다.
◆ 질이 높은 생산적 노동, 이니셔티브, 기업심을 자극하도록 하는 조건 ― 경제적 조직적 조건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반대로 나쁜 방식의 작업, 완만함, 무책임성은 근무자의 물질적 보수와 근무상의 지위, 그리고 도덕적 권위에도 가장 직접적이고 불가피하게 반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전국가적이고 전국민적인 이익의 옹호에 대한 책임감을 강화하고, 관료 근성이나 지방주의를 결정적으로 근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 규율, 국가 규율, 그리고 노동 규율의 어떠한 위반에 대해서도 더욱 단호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
◆ 우리는 국민경제에 커다란 여력을 가지고 있다. … 이 여력은 과학기술의 진보를 촉진하고 과학기술이나 선진적 경험의 성과를 광범하고 급속한 생산에 도입하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 계획의 방법과 물질적 자극 제도는 과학과 생산의 결합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 단순히 생산을 확대할 뿐만이 아니라 대중 소비재의 품질을 크게 끌어올리는 것이 과제이다. 이는 경공업이나 지역적 산업만이 아니라 중공업․방위산업에도 해당된다.
◆ 우리는 창조적 활동의 예나 국민적 부(富)를 진실로 주인으로서의 태도로 대하고 있는 예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경험은 충분히 확대되고 있지 않다. … 다른 것 ― 독창성이 부족하고, 나쁜 경영 관리나 낭비적 경영 관리에 대한 투쟁이 부족하다.
◆ 기본 건설1)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국민경제의 중심적 과제의 하나이다. … 경제의 안정적 발전, 국민 복지의 향상 ― 그것이 쏘비에트 국민에 대한 우리의 책무이고, 또한 우리의 국제주의적 책무이다. 당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준거하고 있는 것은 우리는 주로 경제정책에 의해서 세계의 혁명적 움직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통찰력이 풍부한 레닌의 지적이다.
◆ 현재의 국제정세를 특징짓고 있는 곤란과 긴장은 극복될 수 있고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만일 자신의 미래를 걸고 도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군비확장 경쟁과 전쟁을 무한히 참을 수는 없다. 쏘련 공산당은 사상 논쟁이 국가 간, 국민 간의 대립으로 바뀌는 것을 반대하고, 무기나 그에 호소할 준비가 사회주의 체제의 역량의 척도가 되는 것에 반대한다. … 군사적 경쟁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무기가 없는 세계 ― 그것이 사회주의의 이상이다.
◆ 이들 문제가 가장 주요한 문제이고 국가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들을 해결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경제는 다시 성장하고 국민의 복지도 향상될 것이다.
◆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과제는 우리나라의 기업, 우리나라의 콜호즈나 소프호즈의 각 노동자들, 일하는 사람들 각자가 참가하여야 비로소 해결할 수 있다. 그들이 이 과제를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2)
안드로포프는 사회주의 체제를 갉아먹어 약체화시키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노동에 대한 물질적인 동기 부여를 없애버린 소득의 ‘균일화’에 있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안드로포프는 임금의 균일화가 “사회주의라는 인간적 조직”에 “기생적 현상”을 발생시켰다고 경고하고 있다.
안드로포프는 그 후, 1983년 3월 칼 맑스 사후 100주년을 맞아 행한 유명한 연설3) 속에서, 공산주의의 초기단계에서의 분배에 관한 맑스의 이론에 언급하면서 “노동 ― 그리고 노동만이, 누군가의 주관적 소망이나 선의가 아니라 노동의 현실적 결과가 한 사람 한사람 시민의 복리 수준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각자의 노동에 의한 공헌을 정확히 고려하지 않고 너무 성급히 달리려고 하는 ― 공산주의적 분배형태를 향해서 나아가려고 하는” 어떠한 시도도 필연적으로 “불로소득자나 이른바 떠돌이, 상습적으로 교활한 자, 게으름뱅이, 불량품만 만드는 노동자 등, 사실상 사회의 식객으로서, 양심적으로 일하는 다수 사람들의 부담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낳게 된다”4)고 강조했다. 안드로포프는 연설 속에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객관적인 경제적 요구에 배치(背馳)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안드로포프는 “이 결정적인 요인과의 밀접한 관련 없이는 임금의 인상은 결국 필연적으로 경제활동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예컨대 그것은 그때의 생산 수준에서는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수요를 낳고, 당연히 근로자로부터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비정상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물품 부족5)을 해소하는 것을 방해한다”6)고 말하고 있다. 나아가, 생산과정에서 최신기술을 응용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낮은 수준의 노동생산성을 비난하는 한편, “공업에서만도 40%에 이르는, 기계화되어 있지 않은 수작업 비율을 계속 남기는 것은 경제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7)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거 하에 안드로포프는,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의 최고단계에 접근한 정도를 이해하는 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과장”을 경고했다. 그리고 강조했다. “우리는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냉정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 성급히 달린다고 하는 것은 실행 불가능한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달성된 곳에 머물러 서 있기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를 현실적인 움직임 속에서 그 모든 가능성과 부족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 ― 그것이 지금 필요하다.”8)
장기간 무시되어온 몇 가지 중요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문제를 안드로포프는 지적했다. “전체 인민의 국가”라고 하는 개념을 시인하면서도, 사회주의의 확립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맑스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바로 이 권력에 의해서 최종적으로는 공산주의적인 사회적 자치로 가는 정치적 발전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9)라고 강조했다. 안드로포프는 “제국주의가 도발한 ‘심리전쟁’”를 필두로 하는 많은 요인의 결과 “쏘비에트 민주주의에는 … 성장의 곤란이 있었고, 있으며, 나아가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라고 솔직히 말하면서, 그 개선을 위해서는 “관료적인 ‘조직 과잉’이나 형식주의 ― 대중의 자주성을 억압하여 없애버리고, 근로자의 창조적인 사고나 약동적인 행동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일소하는 것이 필요하다”10)고 역설했다. 안드로포프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사회주의 사회의 생활 전체에서 시도된 조직 원칙은 … 과학적 지도, 계획, 단일한 운영 씨스템이라는 장점을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하는 민주집중제이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을 사회나 사회의 다른 성원에게 대립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아직 만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교육, 때로는 개개의 인간의 재교육, 사회주의적 법질서나 우리의 집단주의적 공동생활의 규범에 대한 침해와 투쟁하는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리고 이는 … ‘인권 유린’이 아니라 다수의 의지에 의한, 전체 근로자의 이익을 위한 운영을 의미하는 가장 현실적인 휴머니즘이고 민주주의이다.11)
안드로포프는 사회주의가 “모든 모순이나 뒤틀림으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사고(思考)를 “단순하고 정치적으로 순진한 이해”라고 특징짓고, 쏘비에트 사회에는 “모순도 곤란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사회주의에는 적대적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비적대적 모순을 경시하고 정치 속에서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부주의한 태도로는 본래 적대적이지 않은 모순도 중대한 알력을 낳을 염려가 있다는 것을 현실은 가르쳐주고 있다.” 안드로포프는 “여당인 공산당의 정책이 강고한 과학적 기반에 의거하고 있어야만 사회주의 건설이 성공할 수 있다. … 맑스․레닌주의의 과학이나 그 창조적 발전의 역할에 대한 어떠한 과소평가나, 이 과학의 임무에 대한 실용주의적 해석, 이론상의 기본적 문제의 경시, 기회주의의 지배, 혹은 이론에 대한 스콜라적인 구속도 중대한 정치적․이론적 결과를 낳을 염려가 있다”12)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회주의 경제학 분야에서 더욱 더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 맑스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행동을 향한 … 살아 있는 지침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는 현실로부터 뒤떨어지지 않도록 모든 방면에서 맑스의 학설을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하고 … 그가 완성한 유물변증법의 방법을 실천에 창조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 맑스․레닌의 학설을 좀먹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 순수함을 위해서 투쟁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 그것이 새로운 문제의 인식과 해결에의 길이다”13)라고 결론짓고 있다.
유리 안드로포프가 제기한 견해는 1986년의 쏘련 공산당 대회 후에 ‘페레스트로이카’(재편성)로 알려지게 된 정책들의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견해의 많은 부분은 확실히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전부터 널리 인식되고 있던 것이었지만 이때에야 비로소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취해졌던 것이다. 아무튼 안드로포프가 제기한 개혁들은 그 뿌리를 보자면 제20회 당 대회(1956년)에서 제기되었던 것들로서 이 대회의 의사일정에 올려야 할 것이었지만 다루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당 대회가 개최되었지만 불행히도 이들 문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25년 후에야 겨우 오랜 현안이었던 사회주의의 경제적․정치적 구조개혁이 일정에 올랐다. 안드로포프의 단기간의 지도 하에 그때까지 방치되어 당의 위신을 손상시켜 왔던 관료주의, 부패, 경제적 기생과의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노동 규율이나 능률의 재확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또한, 느슨한 규율이나 태만을 일소하기 위해서 총력을 다하는 한편, 물질적인 동기 부여가 강화되고, 소득의 균등화 전략은 대부분 폐지되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발전과 정치과정에 대한 대중의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 조직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또한 간부 교육에 관한 당의 방침 등에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사회주의의 ‘교정’(矯正)과 비능률의 제거를 결합시킨 이들 방책은, 쏘비에트 인민에게 장기간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낙관주의의 기초가 되어 위기를 확대시키고 있던 조건들을 근절한다고 하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당이 다시 그 모든 힘을 다하고 나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5년에 걸친 개혁의 지연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상황이 심각히 왜곡되어 당은 새롭게 발생한 많은 해결 곤란한 문제들에 직면했다.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에서의 기술, 특히 컴퓨터 기술이나 전자(electronics) 분야에서의 기술의 비약적인 진보였다. 그것은 군사 기술 분야에서는 거대한 ‘스타워즈’(별들의 전쟁) 계획을 탄생시켰다.
방대한 군사지출은 그에 선행한 경제정책의 오류와 함께 성장률을 더욱 둔화시켰다. 서방측의 반공 선전의 영향과 맞물리면서 대중 속에 불만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현상과 국가 지도부에 대한 환멸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게 되었다. 게다가, 30년에 걸쳐서 당과 국가의 내부에 성장한 테크노크라트․관료층의 문제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당에 최고도의 경계와 주의를 요구했다. 유리 안드로포프가 강조한 것처럼, 당에 요구되고 있던 것은 대중의 이익을 기초에 둔 방침을 확고한 과학적 근거와 대중의 참여에 기초하여 작성하는 것이었다. 당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정보 활동에 의한 직접적․간접적인 선전 공세, 파괴 활동, 왜곡이 이루어져 있던 상황에 대항하여 이를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제27회 당 대회 ― 사회주의의 발전 가능성의 확대
안드로포프 사후 2년 후인 1986년에 소집된 쏘련 공산당 제27회 대회는 경제적․정치적 기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승인했다. 대회의 주요 슬로건은 ‘가속’이었고, 이른바 ‘공개성’(글라스노스치)이 아니었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제12차 5개년 계획(1986~1990년)의 세 개의 주제는 경제계획의 분권화 및 생산의 현대화, 물질적 동기부여의 철저한 확립,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확대였다.
대회는 또한 15개년 계획(1986~2000년)의 대강을 작성하고, 이 속에서 제12차 5개년 계획 달성 후 20세기 말에 있어서의 성장률의 가속을 위한 조항들이 결정되었다. 철저한 사회적 개혁을 수행하려고 한 이 계획의 특징을 보여주는 몇 가지 조항은 다음과 같다.
∙ 사회적․경제적 발전의 가속
∙ 과학적․기술적 진보의 대폭적인 가속
∙ 전체 주민의 모든 부분의 복리의 가일층의 향상과 생활조건의 현저한 개선의 보증
∙ 1인당 실질 소득의 60~80%의 인상
∙ 성실하고 질 높은 노동과 전문적인 숙련에 대한 사회적 권위의 인정
∙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수반하는 임금의 증액과 지불 형태의 개선, 노동집단이나 개인에 대한 보다 큰 도덕적 장려의 제공
∙ 노동조건의 개선, 생산에서의 근육노동의 부담의(약 45%로부터의) 15~20%로의 저감
∙ 고품질․다품종의 재화에 대한 소비자 수요의 보다 충분한 충족
∙ 합리적 소비를 위해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기준 수준으로의 식품 공급의 개선
∙ 소매업의 80%의 증가
∙ 고능률 써비스 산업의 발전, 가사 노동의 부담 경감
∙ 모든 가정에 대한 아파트 또는 주거의 제공
∙ 사회보장, 휴가, 교육 및 보건 써비스용 자금의 배증(倍增)
∙ 스포츠 기타 형태의 레크리에이션의 장려
∙ 환경보전 사업의 지속적인 실시
∙ 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달성을 목표로 하고, 노동생산성의 130~150% 증대에 의한 국민소득의 배증
∙ 원료 및 연료의 절약, 그에 의해서 증가한 필수물자의 70~80%의 충족
∙ 자본투자 효율의 향상, 새로운 기업의 건설보다는 오히려 재장비나 재건설에 대한 강조
∙ 과학적․기술적 진보의 전면적인 가속 및 그 성과의 산업이나 관리(管理), 써비스 영역이나 일상생활에의 일반적 응용의 보증
∙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에서의 인민대표자회의 ― 인민의 사회주의적 통치의 가장 중요한 형태 ― 의 역할의 강조, 행정에 대한 근로인민의 참가의 확대14)
경제의 지나친 중앙집권화를 고친다고 하는 목표를 추구하여 정부의 많은 기능이 경제기업체로 인계되고, 경제기업체에는 생산물의 종류와 양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 권한에는 자신들이 선택한 구매처로부터 원재료를 구입하는 결정권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제기업체에는 피고용자의 임금 수준 및 생산물의 가격을 결정하는 일정한 자주권도 주어졌다. 이러한 움직임과 함께 경제기업체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경제기업체는 그 지불 능력을 유지하고 월간 계획 할당량을 결정하여 그것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다음으로 물질적인 동기 부여의 영역에서는 소득 수준의 균등화 방침이 포기되고 사실상 역전되었다. 훈련이나 기술적인 지식이나 고등교육을 요하는 직업의 비정상적으로 낮은 소득 수준이 엄중하게 비판되었다. 그들 직업에는 의사, 교사, 기술자, 과학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확대․심화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가 제정되었다. 예컨대, 생산된 가치에 기초하여 임금을 결정할 때 기업체와 노동자 집단은 보다 큰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1986~1987년에는 수만 명의 공장․기업체 관리자가 다양한 기회에 노동자의 직접투표에 의해서 선출․승진․해고되었다. 노동자의 규율 문제도 마찬가지로 직장대표에게 위임되었다. 그들은 게으른 사람이나 방종한 사람의 임금이나 수당을 삭감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이어서 1987년 1월의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는 관료주의, 특히 당 자신의 내부의 관료주의를 엄하게 비판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관료주의의 만연을 방지할 사회적 환경이 정비되었다.
곧이어 생산영역 전체에 걸쳐 새로운 변화의 징후가 보이게 되었다. 제12차 5개년 계획 개시 후 2년간에 많은 부문에서 생산 수준이 상승하고, 계획된 목표치는 초과 달성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현저한 성과를 거둔 것은 주택 부문인데 1987년의 성과는 230만 단위로서 계획 수량을 15%나 초과했다!15)
1987년 6월 25일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가 이루어졌다.
최근 2년간의 [노동생산성의] 평균상승률을 제11차 5개년 계획 기간의 연평균 지표와 비교해 보면 공업과 건설에서 1.3배, 농업에서 2배, 철도운수에서 3배로 되어 있다. 1985~1986년 공업 생산의 연평균 생산률은 4.4%, 농업에서는 3%였다. … 금년의 사회적 영역의 발전을 위한 투자의 증가율은 국민경제 전체에 대한 투자 증가율의 3배이다.16)
사회주의적 생산에 재차 과학적인 기준을 도입하여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실행하면 당은 단기간에 역사상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이들 모두가 증명했다. 맑스․레닌주의로 무장하고 근로인민의 창조적 에네르기에 의해서 힘을 얻은 당은 모든 장애를 해소하고 사회주의의 쇄신으로 전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공산주의자만이 아니었다. 긴급히 수행되어야 할 사회주의 체제의 변혁이 25년간이나 지연됨으로써 자신의 이해에 지극히 민감한 관료층 ― 이 계층은 사회주의를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말살하는 것에서 이익을 발견하고 있었다 ― 을 악성종양처럼 비대화시켰다. 이 계층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인 계급적 적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받고, 최종적으로는 쇄신 과정을 사회주의의 파괴․해체로 전화시킨 것이다.
3. 수정으로부터 전면적인 파괴로 ― 고르바초프의 ‘인간적 사회주의’ 모델
제27회 대회는 당과 노동자계급을 위한 새로운 경제․정치 방침을 작성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회가 선출한 새 지도부의 구성은 커다란 역사적인 후퇴였다. 왜냐하면, 국가기구 내부에서 세력을 신장시키고 있던 관료․테크노크라트 층이 당 지도부의 중심적․전략적 지위를 점하고 당 기구에서 조직적인 지배권을 장악한 것이 이 대회였기 때문이다. 제22회 대회와 그 후 수년 동안은 관료․테크노크라트 층이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 기구와 기관을 지배하게 되는 전환점이었는데, 제27회 대회는 그들 계층과 그 정치적 대리인 ―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그 동반자 집단 ― 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권력의 최고사령부, 즉 공산당 지도부에 침입하여 그 실권을 장악하고, 이를 사회주의를 파괴하고 그들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한 유효한 무기로 전화시키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제국주의는 이용 가능한 모든 물질적 수단과 선전 수단을 총동원하여 쏘련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당의 전면적 지배를 꾀하는 이 신당파를 지원했다.
30여 년 동안 수면 하에서 양성되고 있던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이렇게 해서 객관적인 요인 및 당의 주체적인 오류의 결과로 이제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의 오류를 시정하고 사회주의를 쇄신하기 위한 투쟁은 그 이후 차츰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존속을 결정하는 투쟁으로 전화되어 갔다. 사회주의의 생존을 보증한다고 하는 문제는 혁명 정권이 성립됐던 때부터 레닌을 위시한 혁명 지도자들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문제였는데, 그것이 다시 무대의 중앙으로 뛰어나왔다. 수십 년 동안 경시되어 왔던 바의, 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현실이 지금 공산당원에게 유래 없는 엄혹함으로 돌진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제27회 대회 후에 두 개의 상이한 조류가 나타났다. 한쪽은 대회의 결정들을 기본으로 하여 노동자 인민과 공산당원의 지지 하에 사회주의의 비효율적 경향을 시정하여 성장을 가속화시킬 것을 지향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사회주의의 파괴를 지향하여 제27회 대회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주의로부터 무조건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관료․테크노크라트 층의 이익을 위한 방향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원들은 경제의 사회주의적 원칙과 법률의 강화, 그리고 사회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장했다. 한편 고르바초프와 그 동반자들은 이른바 ‘신사고’(新思考)라고 하는 겉치레 하에서 사회주의의 정치기구 개편을 조속히 실시하고 쏘비에트 사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강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고 가려고 하였다.
제27회 대회 직후 수년 동안 이 당파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직 약했던 시기에는 그들의 움직임은 아주 신중했다. 이 당파는 사회주의 발전을 ‘가속’시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하면서 상층 당 지도부 내에 착착 발판을 굳히고, 충실한 지지자를 중요한 지위에 등용하고 있었다. 1987~89년에 이 당파는 당 지도부 내의 공산당원을 계략에 빠뜨리고, 사태의 방향을 전환시키기 위해서 모든 조직적 수단을 전개했다. 제27회 대회 후에 차례로 개최된 중앙위원회 총회는 당 대회만이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항들을 결정했다. ‘보수파’, 즉 이 당파가 의도하는 개혁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는 당원들은 대부분 허위와 중상모략으로 당의 지도 조직으로부터 차츰 배제되고, 그 규모는 갈수록 확대되어 갔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선전기관은 당 지도부로부터의 공산당원의 불법적인 추방 하나하나에 요란한 지지․갈채를 보내고, 공산당 내에서 새로 힘을 획득한 ‘민주주의자’에게는 특별한 승인과 ‘정통성’을 부여했다.
이와 더불어, 국민 전체의 운명에 관해서 중요한 결정을 할 권한은 중앙위원회로부터 미리 박탈되어 많은 부분이 새로 설치된 관료조직에 넘겨지고, 국가 업무에 대한 당의 감독은 조금씩 감축되었다. 당의 역할의 감축과 동시에 중앙계획기구도 또한 급속히 해체되었다. 경제 관리에 관한 정부 직원의 수는 1987년에는 20만 명이었는데 1989년에는 5만9천 명으로 삭감되었다.17) 비교를 위해서 말하자면, 당시 미국의 재무성, 상무성 및 농무성의 직원 수는 30만 명이다. 이들이 미국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쏘련의 기관이 경제계획에서 수행하고 있는 역할보다도 훨씬 적다.18)
이들 당파의 조직적 영향력이 증대함에 따라서 이들의 본래의 정치노선도 명확해지고, 그것이 차츰 사회주의에 강요되어 갔다. 이 당파가 권력을 강화함에 따라서 이른바 ‘바라크(barrack) 사회주의’1]나 계획경제, 그리고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격이 더욱 격렬해져갔다. ‘스탈린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명분 하에 이 당파의 대표자들은 매스컴을 이용하여 사회주의의 모든 역사와 그 성과에, 쏘련과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에, 나아가 민주집중제 ―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민주주의의 결여’를 의미했다 ― 등 중요한 원칙들에 대해서 정면으로 공격을 가했다.
고르바초프 자신도 차츰 사회주의의 과거의 성과를 조준해 갔다. 그는 중앙계획과 사회주의 체제가 경제정체의 주원인이라고 반복하여 비난함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한층 북돋았다. 이러한 악선전은, 서방측의 전문가나 기자들조차 쏘비에트 인민의 실질소득이 경제활동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1960~1984년 사이에 3.47%의 평균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에 생활 수준이 3배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던 때에 이루어졌다.19) 고르바초프의 동반자의 한 사람인 니코라이 루이시코프에 의하면, 1987년 이전 35년 동안에 쏘련의 국민소득은 6.5배, 평균 연간성장률은 5.5%로 성장했다. (같은 기간에 미국의 국민소득은 2.8배 상승했고, 평균 연간성장률은 3%였는데, 이를 감히 경제정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20)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위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이 당파는, 신경제정책(NEP)의 포기는 사회주의의 원칙에 대한 역사상 최초의 위반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중앙계획경제를 NEP로 대치시켰다. ‘위로부터의’ 정치개혁과 서유럽형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시 요구가 서서히 근로인민을 위한 경제개혁 정책을 대체했다. 위로부터의 그러한 정치개혁이 없이는 아래로부터의 경제개혁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주장이 차차로 높아져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시점까지는 이 당파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현행 제도의 사회주의적 본질을 옹호하는 조치라며, 모든 노력을 다해서 그 본질을 은폐했다. ‘시장경제’라고 하는 개념은 언제나 유익하고 무해한 것으로서 제기되었다. 이 당파 가운데 가장 충실한 자본주의 옹호자나 반공주의 지지자들조차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말을 발설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말로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처럼 노력했다. 그러나 이 당파가 1988년 6월 30일에 쏘련 공산당 제19회 전국협의회에서 그 정책인 ‘신사고’, ‘공개성’, ‘민주주의’를 당 지도부에 강요하는 데에 성공한 후 수개월 동안에 상황은 일변했다. 그 이후 쏘련 공산당 제27회 대회의 주요 슬로건, 즉 사회주의 발전의 ‘가속’은 그들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 완전히 포기되었다.
권력을 그 수중에 장악하고 자신들의 강령을 당 전체에 강요하자 이 당파는 공공연히 사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경제적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애초에는 기만적으로 ‘사회주의의 확대’로서 선전된 ‘신사고’는 바야흐로 쏘련에 자본주의적 관계를 부활시키기 위한 부적으로서 공공연히 이용되게 되었다. 이 당파와 가까운 몇몇 세력은 사회주의나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적 원칙에 반대하는 악랄한 선전활동을 했다. 외무장관 에드바르드 세바르드나제 등 이 당파의 저명한 지도자들이나 스타니스라프 멘시코프 등의 지식인들은 ‘신사고’라고 하는 개념을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고 공공연히 장려함과 함께 제국주의의 대외정책을 변호하기 위한 무화과나무 잎2]으로 이용했다. 1989~90년에 이 당파에 의해서 쏘련 공산당 기관지21) ꡔ경제의 제문제ꡕ의 편집장에 임명된 가브릴 포포프는 맑스의 잉여가치설을 공격하기 위한 연단으로서 그 지면을 이용하고,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의 착취에 의해서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두뇌노동에 의해서 획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논문 속에서도 그들은 자본주의 열강에게 다른 나라들을 수탈한 책임이 없다는 등으로 주장하여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격했다! 계급투쟁 및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라고 하는 현실은 점점 묵살되어 가는 한편, 사회주의 국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의 관계의 ‘탈이데올로기화’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매스컴에는 저명한 서방측 자본가에 의한 사회주의의 경제적․정치적 구조 ‘개혁’ 처방전이 범람했다. 쏘비에트의 지식인들에게 ‘현대경제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버드 대학의 쏘비에트 연구학과에 소속된 ‘전문가’나 ‘경제학자’ 등 다수의 바람직스럽지 않은 인물들이 널리 초빙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러한 반공선전 활동이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이다!
미국 공산당 의장 거스 홀은 당시에 행해진 반사회주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데올로기 교육의 불충분성, 과거 5년 동안에 사회주의 방위 투쟁이 전개되지 않은 점, 이 두 가지를 보면, 이데올로기 투쟁이 얼마나 치우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를 창도(唱導)하고 있던 신문은 7개 모두 침묵하고 있다. 대중 매체는 모두 세계적인 반사회주의 단체에 개방되어 있다. ‘라디오 자유 유럽’도 ‘라디오 자유’도 모든 대도시에 지국을 개설하고 매일매일 방송을 하고 있다. 우익 텔레비전 진행자들이 누구나 쏘련의 모든 도시에서 방송하고 있다. 극우인 헤리티지 재단을 필두로 CIA가 지원하고 있는 조직이 쏘련 전역에 방송되는 채널을 소유하고 있다. 존 스누느, FBI 국장, ‘청년공화당원회’의 간부들이 중앙위원회나 콤소몰(청년공산동맹)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미군은 ‘군의 민주화’라는 주제의 강연회를 열기 위해서 쏘련 각지에 강사를 파견하고 있다. 미국의 정부 고문, 경제학자, 이데올로그, 대학교수들은 전원이 연구소나 정부조직들에서 열심히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설교하고 있다. 학생 교화계획이 더욱 늘어나 쏘련의 남녀가 ‘창업자’가 되기 위해 하버드나 예일에서 수년간에 걸쳐서 공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
쏘련은 포르노, 선정적인 책을 포함한 외국의 모든 잡지와 신문에 대한 수입금지를 해제하는 한편, 해외 공산주의자의 신문 구독을 모두 해약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홍수처럼 흘러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고르바초프와 그의 무리들은 이를 허용해 왔다.22)
사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전면적인 공격은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서서히 그러나 의식적으로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관계로 전환하며, 국내에 새로운 자본가계급을 창출하는 시도와 결부되어 있었다.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스스로 사회주의의 기본적 원칙들, 즉 생산수단의 공적소유와 계획경제, 기타 쏘련 헌법상의 사회주의적인 규정의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서 우리 당에 강요되어 온 과거의 사회주의의 이론적․실천적 모델은 지지하기 어려운 것임이 증명되었다. … 우리의 목표는 대다수의 근로인민에게 소유자가 될 기회를 주기 위해서 … 모든 소유 형태를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다양한 형태의 혼합경제의 창출이다…”23)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로 이는 무화과나무 잎이었다. 변화는 단순한 ‘소유 형태의 다양성’을 훨씬 넘어 있었다. 실제로 사적소유와 국영기업 사유화를 촉진하는 것은 이 당파의 최우선 사항이었다. 이 방침은 1990년 2월의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문서 속에 “또 하나의 중요 과제는 국유재산을 이러한 사적소유라는 ‘현대적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다”24)라는 표현으로 명확히 되어 있다. 고르바초프는 정부 방침의 급격한 전환을 “이 초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와 고정관념과 결별하고 우리의 세계관과 정책을 일치시키는 노력이다”25)라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생산수단의 공적소유는 “시대에 뒤떨어진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이고, 사적소유는 쏘련에서의 소유의 하나의 ‘현대적인 형태’로 선언되었다.
사유화 방침의 이러한 공식적인 선언은 다름 아니라 위로부터의 친자본주의적 쿠데타의 승리 선언이었는데, 그것은 당원증을 가진 1,900만 명의 당원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보수파’ 공산당원을 추방한 중앙위원회 ‘다수’ 파의 요구였다. 나아가 이 결정은 쏘련 헌법을 명백히 위반하고 있었다. 헌법은 명확히 “국가 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인민적인 토의를 거쳐 전인민의 투표(referendum)에 부쳐야 한다”26)고 규정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쏘비에트 인민의 동의 없이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합법적으로 이행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친자본주의적 쿠데타를 준비한 자들이 인민의 의지를 염두에 둘 리도 없었다. 그들은 쏘비에트 인민의 76%가 쏘련의 존속에 찬성표를 던진 1990년의 국민투표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토지의 사적소유에 관한 제2차 국민투표는 실시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국민투표에서도 완전히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말에 고르바초프와 그 공모자들은 수백만 명의 공산당원과 근로인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영기업의 사유화와 주식거래소 설립을 위한 법률들을 정식으로 제정했다. 그들은 서둘러 이들 기업의 소유권을 그것을 경영하고 있던 관료층에게 양도했다. 인민의 국부(國富)가 이 계층에 매도되면서 어제의 경영자는 급조된 자본가로 변신하고, 자본주의 쿠데타는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공유재산의 횡령과 국가 관료층에 의한 사적 처분은 경제에서 통상적인 일이 되었다. 마피아적인 신흥 자본가계급이 버섯처럼 성장하고, 근로인민의 등 뒤에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메릴 린치와 같은 제국주의 금융기관이 국영기업의 사유화 과정을 감독․지도하기 위해서 고르바초프나 그의 동반자들에게 협력을 구하고, 쏘비에트 경제의 제국주의적 후견인이 되었다.
쿠데타 지도자들이 취한 또 다른 조치는 소비물자의 분배에 자본주의적 관계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물자 및 써비스의 질과 양을 개선한다”는 미명 하에 그들은, 쏘비에트의 법률에 반해서 조합원의 노동에만 의거하지 않는 이른바 ‘생산자협동조합’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많은 주요 도시나 공화국에서 이 당파에 속하는 정부는 법률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이 사이비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이들 이른바 ‘생산자협동조합’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89년 말에 이미 5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한편, 본래의 협동조합은 서서히 그 기반을 잠식당해 1991년에는 그 수가 전국의 협동조합 총수의 20%로 떨어졌다.27) 이러한 제 정책의 결과, 근로인민의 생활필수품의 공급은 본래의 협동조합이나 공영점포로부터 새로 형성된 자본주의적 ‘협동조합’ ― 거기에서는 가격은 터무니없이 높았고, 게다가 많은 경우 판매는 외화로 이루어졌다 ― 으로 이전되었다. 이러한 것은 모두 고르바초프가 노동자들에게 기만적으로, 협동조합이나 사기업에 의한 ‘집단적 소유’는 “사회의 민주주의적인 주축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만들어 ― 고르바초프에 의하면 ― “착취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 길로 이끈다고 보증하고 있던 때에 진행되었다.28)
이러한 배반자적인 정책들이 거듭된 결과, 생산 수준이 급격히 떨어져 근로인민의 생활필수품의 심각한 부족이 초래되었다. 생산의 위기의 심화와 함께 고르바초프와 그 정부는 경제의 과학적․기술적 발전이라고 하는 초기의 공약을 어겼다. 자본재에 대한 생산투자 기금은 대폭적으로 삭감되고, 경제의 민간수요 부문의 연구개발 예산은 40억 루블이나 감액되었다.29) 그에 대신해서, 암시장과 자본가들의 노골적인 생산 방해행위에 의해서 야기된 애로를 메우기 위해서 소비재 부문에 대한 투자에 집중하는 대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예기된 것처럼 이들 투자 역시 민간부문의 밑바닥 없는 호주머니로 사라졌다.
생활필수품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쿠데타 지도자들은 소비물자의 수입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결과 경제의 문호가 넓게 개방되어 서방 국가들의 물자가 쇄도했다. 문호 개방적인 수입정책이 야기한 것은 경이적인 수준의 대외채무와 자본주의의 국제은행․금융기관에 대한 가일층의 종속의 심화였다. 서방측의 추정에 의하면, 쏘비에트 역사에서 일관해서 계획적으로 낮게 억제되어 있던 대외채무가 1990년에는 순식간에 580억~690억 달러라고 하는 천문학적인 숫자에 달했다.30) 그리하여 국가의 금융 신용도는 급락했다.
쏘비에트 역사상 처음으로 1990년에는 국민총생산(GNP)․국민소득․노동생산성이 하강하고, 1991년 중엽에는 이 하강 경향이 파국적인 규모에 달했다. 쏘련 국가통계국에 의하면, “1990년과 비교하여 1991년 상반기의 GNP는 10%, 국민소득은 12%, 사회적 노동생산성은 11% 하락했다. 공업 생산고의 하락이 모든 생산부문에서 계속되고, 지난해에 비해 6% 감소되었다. … 화학 및 목재 산업은 반감(半減)했고, 야금은 46%, 에네르기 생산은 34%, 기계산업은 37% 하락했다. 석탄 생산은 4,100만 톤 감소하고, 석유 생산은 6% 감소했다.”31) 한편, 같은 해에 인플레이션률은 100%에 달해서, 다양한 정보원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쏘련 노동자의 6할이 빈곤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인민을 더욱 곤경에 빠뜨려, 이미 불안정했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인민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가 증대하고 생활 수준이 저하하면서, 쏘비에트의 제 성과에 의해서 과거 70년 동안 성공적으로 극복되어 있던 민족적 적대감정이 다시 그 추악한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민족 간의 다양한 분쟁과 군사적 충돌 ― 그 가운데 몇몇은 쿠데타 지도자들 및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서 의식적으로 선동된 것이었다 ― 이 일어나면서, 정부의 정책에 의해서 야기된 상황에 대한 인민의 불만과 항의가 높아져 국내의 정치 위기를 악화시켰다. 그 결과,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에 의해서 이미 야기되어 있던 문제들에 쏘련방(聯邦) 해체의 위기가 추가되었다.
친자본주의적 쿠데타의 지도자들은 대중의 불만이 높아지는 것을 이용했다. 그것이 사회주의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양성․조장되었던 것이다. 당내의 조직적 쿠데타에 성공한 그들은 사회 수준에서의 경제적 쿠데타에 이어 쏘비에트 국가 분단계획에 기초한 정부 수준에서의 정치적 쿠데타에 착수했다. 처음에 발트 국가들을 쏘련으로부터 분리하는 데에 성공한 후 1990년 9월에는 옐친이 쏘련방으로부터의 러시아 공화국의 이탈을 표명했다. 러시아에 이어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카자흐스탄이 쏘련방으로부터 이탈한다는 결정을 선언했다. 그리고 실패로 끝난 1991년 8월 사건 후에 옐친에 의해서 쏘련 공산당 자체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당의 자산은 모두 몰수되고, 전국에서 당원에 대한 박해와 체포가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1992년의 쏘련방의 불법적인 해체로써 쿠데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궁극적으로 달성했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 발전의 가속을 목표로 하여 시작되었던 과정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의 해체, 그리고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파괴 과정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거스 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가 개시되고 나서 2년 후쯤부터 과정의 개개의 현상이 아니라 그것이 전체적으로 향하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염려하기 시작했다. … 낡은 것이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없는 채로 파괴되었다. 지방에 대한 권한 위임이 과도하게 이루어졌다. 공장이나 콤비나트가 무계획하게 방치되었다. 그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그것들이 서로 어떤 연계도 없이 방치된 것이었다.
첫 해에 수천 개의 공장이 폐쇄되었다. 낡은 공장, 그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쏘련이 매년 생산을 상승시킨 기초였다. 이 구조가 해체된 것이다. 게다가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통제․조정해 온 운송 체제도, 농업과 공업의 연대도 함께 해체되었다. … 현존하는 제도의 해체는 경제적으로 대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페레스트로이카가 탈선하고 나서 생산액은 매년 계속 감소했다. … 고르바초프 지도부 하에서 실행되고 있던 정책은 쏘련 경제에 대황폐를 야기했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길을 이탈했다. 우익 세력에 의한 친자본주의적․반사회주의적 정치와 선전은 중대한 이데올로기상의 파괴를 야기했다. 이데올로기 역시 공산주의자의, 또한 맑스․레닌주의자의 길을 이탈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오․오산․실패는 인위적인 오류에 의해서 야기되었다.
쏘련에서는 오류를 수정한다든가, 이론적인 논쟁을 한다든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반사회주의적인 분자가 우위에 섰다. 5년 동안 쭉 누구도 사회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주의의 역사도, 성과도 옹호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누구도 자신을 방어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할 권리를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도, 공산당도 비방․중상을 받도록 내버려둔 채 반론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대중 속에 혼란을 야기했다. 부패분자, 반공주의자, 범죄자가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 그들은 대중매체를 장악했다. 쏘련 공산당은 혼란에 빠졌다. 당은 아직 그 궁지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32)
그리고 모든 것은 당내의 관료․테크노크라트 층에 의한 당 장악의 직접적 귀결이다라고 하는 것을 여기에 부가할 수 있을 것이다.
* * *
<<미 주>>
1] [역자 주] ‘병영 사회주의’라는 의미.
2] [역자 주] 여기서 ‘무화과나무 잎’이란 ‘아담과 이브’의 신화에 비유한 것으로서 ‘은폐 도구’를 가리킨다.
1) [일본어 역주] 일본어 번역판 ꡔ안드로포프 논문집ꡕ(다음 주2 참조)의 주에는 “기본 건설 ― 기본 재원(내구재)의 건설”이라는 서술이 있다.
2) ꡔアンドロポフ論文集ꡕ, カトー․シンクタンク, pp. 49~58.
3) “칼 맑스의 학설과 쏘련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의 약간의 문제”, ꡔコムニストꡕ 1983년 2월 (제3호). 주2의 ꡔ안드로포프 논문집ꡕ 수록.
4) 같은 책, pp. 92~94.
5) [일본어 역자 주] ꡔ안드로포프 논문집ꡕ의 일본어 판은 ‘적자’로 되어 있지만, 문맥으로 판단하여 ‘물품 부족’으로 번역한다.
6) 같은 책, p. 93.
7) 같은 책, p. 96.
8) 같은 책, p. 104.
9) 같은 책, p. 97.
10) 같은 책, p. 99.
11) 같은 책, pp. 101~102.
12) 같은 책, p. 107.
13) 같은 책, pp. 108~110.
14) ビクター․パーロ、 ꡔ超過利潤と危機 ― 現代アメリカ資本主義ꡕ, 昭和堂, p. 450.
15) “Along the Road of Radical Reform”, Statement by the State Committee of the USSR for Statistics on the Results of the Fulfillment of the USSR State Plan for Economic and Social Development in 1987, Reprints from the Soviet Press, March 1988, p. 44.
16) 고르바초프, “1987년 6월 25일 중앙위원회 총회 보고”, ꡔ革命 ― ペレストロイカꡕ, 人間社, p. 7.
17) Victor Perlo, "The Economic and Political Crisis in the USSR", Political Affairs, August 1991, p. 14.
18) 같은 곳.
19) 같은 책, p. 12.
20) 같은 곳.
21) [일본어 역주] 정확히는 쏘련과학아카데미의 기관지이다.
22) 거스 홀, “쏘련의 위기”(1991년 9월 8일 미국 공산당 전국 위원회 특별회의에서의 보고), ꡔ社會評論ꡕ 85호, pp. 4~5.
23) 같은 책, pp. 9~10.
24) Victor Perlo, 같은 글, p. 13.
25) 거스 홀, 같은 글, p. 10.
26) 쏘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헌법(기본법, 1977년 10월 7일 제9기 쏘련 최고회의 임시 제7회기에서 채택) 제5조 [전인민적 토의, 인민투표], 노보스티통신사 편, ꡔ新ソ連憲法․資料集ꡕ, ありえす書房, p. 117.
27) Victor Perlo, 같은 글, p. 14.
28) 같은 곳.
29) 같은 글, p. 16.
30) 같은 곳.
31) Nameh Mardom (이란 공산당 기관지) No. 357, September 3, 1991, p. 4.
32) 거스 홀, 같은 책, pp. 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