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
현장에서 미래를 제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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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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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이 동 우
임노동노자관계세미나팀, 비정규직활동가
연대투쟁기 :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투쟁을 돌아보며
죽어서도 차별받는 비정규직
비정규직 노동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누구나 그들의 아니
우리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가슴 아픈 사연들을 몇 가지씩은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경험으로 때로는 다른 경로로.
수많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사연들을 뒤로 하고 나는 제일 먼저
지난 2월 18일 대구지하철에서의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유가족들에게 몰매 맞을지도
모르겠지만―400여명이라는 희생자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최저임금을 겨우 받으며 온갖 허드렛일을 하시다가 희생되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세 명의 청소용역 아줌마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견딜 수 없는
화염과 유독가스에 숨이 멎어 죽는 순간까지 손에 꽉 쥐고
있었다던 ‘바닥 껌 떼는 연장’이 생각난다. 그리고
대구지하철공사의 직원이 아니라서 조문 한 번 가지 않았던
공사의 높으신 양반들과, 마찬가지로 정규직 조합원이 아니라서
외면했던 정규직 노동조합이 생각난다.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죽어서도 차별받는 비정규직의
현실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동조합의 이용석 동지의 장례와
명예회복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되풀이되었다. “이용석 열사의
죽음은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노동유연화의
결과인 비정규직의 철폐를 위해서였다. 또한 열사의 죽음은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주체인 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 내에서의
비정규직의 양산과 차별의 확대에 그 책임이 있으므로 그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표명과 6급 정규직으로 추서하라”는 노동조합
측의 요구에 대해서 공단 측은 정규직이 아님을 그리고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음을 들어 거부하며 교섭을 지지부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죽어서도 비정규직이라서 차별받은 사례는 최근에 또 있었다.
지난 12월 7일 한국해양연구원에서 근무하다 남극에서 사망한
“계약직 연구원 고 전재규씨”의 국립묘지 안장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은 단순히 해프닝으로 끝나기에는
계약직이라는 신분이 죽어서도 굴레가 되는 이 땅의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40여일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투쟁을 함께 하면서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에 대해 느꼈던 점도 안타깝지만 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11월 14일 대공장 한진중공업의 협상타결을
기점으로 많은 열사들의 목숨을 내걸은 투쟁으로 형성된 분노와
투쟁전선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상황들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한진중공업과 세원자본이라는 단사 차원의
손해배상․가압류를 비롯한 노동탄압국면이 아닌, 그리고
이용석 열사의 분신으로 대중적으로 외쳐졌던 “비정규직
철폐”가 단지 근로복지공단만의 문제가 아님을 민주노총은
투쟁계획 제출과 실천투쟁 속에서 강조하지 않았던가!!
그토록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민주노조운동의 사활을 걸고
대응해야만 하는 과제였다면 소중한 열사들의 죽음으로 일순간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던 정세를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의
조속한 마련을 위해, 그리고 비정규직 보호방안 입법화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투쟁으로 만들어 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정부와 자본은 조직된 노동자를 죽이는
노사관계선진화방안, 비정규직을 죽이는 비정규직 보호방안,
투기자본을 마련하려는 국민연금법 개악,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합의주의 구축, 테러방지법 제정과 집시법 개악 등
그들의 계획대로 착착 수순을 밟아 가고 있는데.
전조합원 무기한 집단단식투쟁으로 마무리된 44일간의
파업투쟁
투쟁을 준비했고 진행했던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동조합과
공공연맹 차원의 공식적인 평가가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글을 쓰는 현재 확인해 본 바로는 내부적으로는 진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공개적인 평가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물론 타결
직후의 수련회에서 지도부와 조합원들이 함께 했던 평가를
제외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 특히
파업투쟁에 대한 경험은 일천하지만 투쟁과정 속에서 느꼈던
아쉬웠던 점―평가랄 것 까지는 아니다―몇 가지만 감히
적어보고자 한다.
파업 초창기인 10월 31일은 투쟁과정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는
날이다. 먼저 이용석 동지가 6일 동안의 투병생활을 끝으로
운명하신 날이기도 하지만, 조합원 총회를 거쳐 “비정규직
철폐”라는 열사의 뜻을 파업투쟁의 요구사항으로 결의한
날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차별해소를 넘어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사항으로 내건 그 순간부터 투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언제쯤
마무리될지, 정규직화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어떠한
투쟁계획들이 제출되어야 하고 실천투쟁을 위한 어느 수위의
결의를 요하는지 대략이나마 제시할 수 있는 지도부는 아무도
없었다. 정부를 상대하는 대규모 정규직 사업장의 투쟁과 교섭의
매뉴얼(?)이 어느 정도 갖춰진 공공부문에서는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의 517일간의 투쟁이 거의 유일한
비정규직 투쟁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합원 총회를 통해서
“비정규직 철폐와 정규직화”라는 강경한(?) 요구조건에 걸맞은
투쟁계획과 결의수준을 조합원들에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충분한 사전공유와 토론이 얼마나 내실있게 진행되었는지
아쉽다. 인력개편과 예산배정을 쥐고 있는 노동부나
기획예산처를 비롯한 정부와의 싸움이 될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아쉬움은 당장 당일 저녁 추모집회 도중
경찰병력의 침탈에 충격과 두려움을 느낀 많은 수의 조합원들이
파업대오를 이탈하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파업대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행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연대대오들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고 부상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당시 열사들의 목숨을 건 항거를 통해 전국적인 투쟁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산, 대구, 서울로 분산된 투쟁들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전국동시다발투쟁으로 대응했던
민주노총은 서울을 거점으로 한 전국적인 비정규직 투쟁을
상승시켜 낼 수 없었고, 결국은 공공연맹차원의 연대대오의 엄호
속에서만 투쟁이 이루어졌다. 물론 방송사비정규직노동조합을
비롯한 수많은 연대대오가 있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나마
사회보험노조와 한국노총 산하의 직업상담원노조를 제외하면
목적의식적인 연대도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대규모 사업장의
연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조합원은
물론 지도부조차도 공단 측과의 교섭에 많은 기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교섭에의 의존이나 환상은 지도부의
발언과 소극적인 실천투쟁으로 인해 조합원들 사이에 더욱
확산되었고, 교섭차수를 늘려감에 따라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속에서 조합원들은 기대했던 만큼 비례해서 얻게 되는
패배감과 무력감 속에서 파업대오를 이탈해 간 것이 아닐까.
조합원들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연대해준 수많은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에게 많은 것들을 배웠고, 파업이 끝나고 현장으로
복귀했을 때에도 연대투쟁의 정신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다. 파업기간 동안 우리는 셀 수도 없는 많은
동지들의 엄호 속에서 파업투쟁을 사수해 왔고,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의 투쟁지원기금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렇게 도움만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전국에는 수많은 투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언뜻 생각해 보아도 삼성해복투 동지들의 단식투쟁, 이주
노동자들의 농성투쟁, 부산 한진중공업의 투쟁과 대구에서
세원자본과의 투쟁,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수많은
장기투쟁사업장들. 매일 저녁에 있었던 추모집회와 장례식장까지
행진했던 촛불행진도 중요했지만, 추모와 눈물을 넘어 이들
투쟁하는 동지들과 좀 더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분노할 수
있었다면 파업투쟁이 끝난 지금 이후의 지역에서의 연대투쟁을
실천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도 우리에겐 소중한 성과들. 그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투쟁의 예비를.
애초에 요구했던 “비정규직 철폐와 7급 정규직화 쟁취”는
아쉽게도 다음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죽음으로써
외쳤던 이용석 열사를 생각하면 투쟁주체들 어느 누구도
파업투쟁 승리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국에 흩어진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해
낸 것, 그리고 파업은커녕 투쟁경험이 전무한 신생노조로서
40일이 넘도록 천막농성을 하며 파업투쟁을 사수해 낸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성과는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파업대오를 사수하고 열사정신을 계승하겠다며 마지막까지
남았던 백여 명의 동지들이다. 40여일 동안 이들은 파업대오가
경험할 수 있는 별의별 상황들과 맞닥뜨려 왔고 또 버텨 왔다.
동료 노동자의 분신, 천막노숙투쟁, 지도부에 대한 불신,
동료들의 파업대오 이탈, 공단 측의 회유와 협박, 토론과 교육,
공단 진입투쟁의 실패, 추모집회 도중의 경찰병력의 침탈,
거리선전전, 이사장과 총무이사 자택항의투쟁, 공단지사
타격투쟁, 노동청 항의방문, 위원장의 삭발과 단식, 그리고
결국에는 전조합원 무기한 집단단식투쟁까지!!
젊기에, 노동조합과 파업투쟁을 처음 경험해 봤기에, 수많은
연대대오들의 분노와 환한 웃음을 보았기에 그리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파업투쟁을 사수해 왔기에
이들 백여 명의 동지들은 지나간 투쟁의 성과이자 향후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희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조합원들의 의식은 성숙할 데로 성숙해 있다. 전국적으로
제기되는 현안문제들이 결국은 자신의 문제일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으며, 함께 싸우지 않고서는 노동자민중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해결될 수 없음도 알고 있다.
남아 있는 과제는 이들을 비정규직 철폐투쟁의 선봉대이자
현장활동가로서 의식화․조직화시켜 낼 수 있는 지속적인
상호토론과 교육 그리고 실천투쟁들을 담보해 낼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해 내는 것일 것이다. 먼저 파업동지회를 통해
내부 조직력을 강화하고 각 지역차원의 투쟁사업장에의 연대와
공공부문의 예컨대 직업상담원이나 상시위탁집배원 등과의
지역별 모임을 조직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그러나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용석 열사의 장례식이 있던 날 서울에는 첫눈 치고는 제법 큰
눈이 내렸고, 49제를 마친 밤 광주에서도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천안에서 이해남 지회장과 이현중
열사를 보낼 때도 아주 조금 눈발이 날렸다. 어느 조합원은
열사가 우리에게 인사하는 의미로 보낸 것이라고 했다.
순간 나는 즐겨 부르던 노래 “못생긴 얼굴”의 3절 가사가
생각났다.
“너희는 큰 집에서 네 명이 살지~ 우리는 작은 집에 일곱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너희는 집 많아서
좋겠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우리 집도 하얗지~♪”
열사들을 보내던 날 흩날리던 눈발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열사들이 외쳤던 구호는 다르지만 진정으로 원했던 바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눈 덮인
세상처럼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평등한 세상이 아닐런지.
파업투쟁을 통해 노동자대중의 투쟁구호 속에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어느덧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어느
이주노동자의 일기 속에서도 “단속추방분쇄”나
“노동탄압분쇄”보다도 “비정규직철폐”가 앞머리에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 이번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철폐투쟁”은 또 한발 전진한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열사들이 만들어 놓은 한진․세원․근로복지공단
3사의 투쟁은 타결되었지만,
손해배상․가압류․노동탄압의 문제도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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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2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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