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차별에서 계급차별로 |
현장에서 미래를 제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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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출판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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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인종차별에서 계급차별로
자유를 획득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절의 10년
편집자주 : 이 글은 먼스리 리뷰(Monthly Review) 2004년
3월호에 실린 글을 번역 한 것이다.
1994년 남아공은 백인들의 인종차별주의에 기반한 지배를
물리치고 흑인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자유의 10년은
신자유주의의 10년이었고 인민의 좌절의 10년 이었다.
경제는 더욱 불안정해지고 실업률은 증가하고 인민의 수입은
줄어들고 사회보장은 축소되었다. 광범한 빈곤층이 단전 단수로
고통을 받을 정도로 절대빈곤이 증가했다. 환경이 파괴되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의 세금은 인하되고, 사유화정책이 추진되면서
기업의 이윤은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인종차별정책을 진정으로 타파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해방 10주년 기념식을 축하할 이유가
없어졌다.” 계급 해방 없는 인종 해방은 의미가 없다. 인종적
해방의 내용은 계급적 해방이어야 한다.
한국의 정세도 이와 동일하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만17년이
되었다. 염원하던 “민주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민중들의 고통과 절망은 오히려 더해만 간다. 타도되었던
군부독재는 자본의 독재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독재로 겉모습만을 바꾸었을 뿐이다. 우리에게도 “군부독재를
진정으로 타파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6월항쟁 기념식을 축하할
이유가 없어졌다.” 군부독재타도의 목표는 인민의 해방이고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민주화”의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노무현 정권과의 투쟁이고,
자본과의 투쟁이어야 한다.
인종차별에서 계급차별로
자유를 획득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좌절의 10년
PATRICK BOND /요한네스부르그에 있는 위트워터스랜드 대학
교수
인종차별적인 체제가 끝난 것은 인권이라는 가치로 볼 때 커다란
성과였다. 반면에 아프리카민족회의가 다수파가 되고
넬슨만델라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던, 1994년 선거는 대다수
흑인들과 소수의 백인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극심한
빈부격차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실로 신자유주의 정책은 계급,
인종, 성적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평화적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
인종주의적인 백인정부와 아프리카민족회의에 의해서 체결된
협정은 백인들이 가장 좋은 토지, 광산, 공장, 그리고
금융기구들을 보유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선택할 수 있었던 노선은 기본적으로 오직 두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인민의 열광과 에너지와 근면을 동원하고 활용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직접 투자하고 여기에 높은 세금을 부과하여
커다란 경제적 잉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해외로의
자본유출 -인종차별주의 시대에 불법적으로 형성된 부채에 대한
지불을 포함하여- 을 막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여기저기 사소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마치 민주주의가 출현하는
것처럼 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노선을 추진하는 것
이었다.
1994년 4월 27일 민주주의적인 선거가 있기 몇 개월 전에
남아프리카에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이 정부는
아프리카민족회의와 국민당 -백인들만이 투표했었기 때문에 45년
동안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 이 공동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인종차별적인 법이 폐지되고 있었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의 존엄함이 솟구치고 있었을 바로 그 때, 1993년 12월
1일은 남아프리카의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투쟁이 결정적으로,
최소한 부분적으로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임시정부의 첫 번째
행동은 다름 아닌 8억5천만불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대부하는
것이었다. 18개월 전에 가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를 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 가뭄을 해결하기 위한 것 이었다. 대부에
대한 비밀스러운 조건은 -1994년 3월에 주요경제신문에
누설되었다-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구조조정이라는 메뉴를
추진하는 것 이었다: 수입관세인하, 국가지출축소, 공공부문의
임금 대폭삭감. 여기에 더하여, 당시 IMF 관리감독관이었던
마이클 캄데수스는 당시 만델라 대통령 예정자에게,
인종차별정책 시대에 신자유주의에 충실했던 두 사람을-모두
국민당출신이다-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에 재임명하라고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강력하게 압력을 넣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이정표가 1966년 6월에 세워졌다.
아프리카민족회의 최고정책결정자가 “타협할 수 없는”광범위한
영역에 걸친 경제 전략을 - 노동조합운동에 있는 연대세력과
남아프리카공산당과 자신의 정부 내에 있는 구성원들과도 협의
없이 - 강요한 것이다. 세계은행은 두명의 경제학자를 보냈고,
"성장, 고용, 그리고 재분배(GEAR)"라고 알려진 경제모델을
제시했다. 통화가치의 붕괴에 대한 대응조치로 투자자의
자신감을 촉진하기 위해 도입된 GEAR은, 보다
케인주주의적이었던 정책인 “재건 그리고 개발 프로그램”에서
정부를 멀어지게 했다. 그런데 “재건 그리고 개발 프로그램”은
1994년에 아프리카민족회의의 선거운동시기의 강령이었다.
세계은행의 경제모델이 제시하는 약속은 실로 거창했다. 2000년
까지, 남아프리카의 경제는 매년 6%씩 성장하고 매년 40만개의
일자리가 새로 생길 것이라고 했다.
인종차별정책 이후의 기록
아프리카민족회의 몇몇 지지자들은 과도기의 결점들을, 대체적인
진보적 흐름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아프리카에서
특수하게 발생하는 문제점 정도로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십년을 회고하며”라는 최근의 문서는- 정부 웹 사이트에
있다-그러한 해석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 과장된 주장을
한다. 2003년 11월 7일자 ‘아프리카민족회의 투데이’-여당의
웹 사이트에 있다-라는 신문은 인종차별정책시대 이후의 경제를
과대포장하기 위해 그 회고문을 인용 한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1994년 집권한 이래, 남아프리카는 지난
4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거시 경제적 안정성을 달성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는 투자가 대규모적으로 해외로
유출되었지만, 최근 10년 동안에는 외국인 직접투자로 유입되는
금액이 유출되는 것보다 더 크다…. 1995년과 2002년 사이에
고용된 사람의 숫자는 160만명 증가했다”
그러한 대부분의 주장은 왜곡된 것이고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자랑하는 40년동안 볼 수 없었던 수준의
거시 경제적 안정은 안정성을 측정하기 가장 쉬운 척도를
무시하는 것이다. :환율변동. 사실은 세 번의 통화가치붕괴가
있었다. 1966년 2월 3월 사이, 1998년 6월과 7월 사이, 그리고
2001년 12월에 30%~50%에 이르는 평가절하가 있었고, 매번
이자율은 폭등하였고 성장은 축소되었으며 투기꾼은 배를
불렸다. 이러한 시기에 초래된 거시 경제적 불안정성은 이전
두세기 동안에 발생했던 사건과 동일하게 극적이었다. 1985년
9월 발생했던 금융공황시기 -이로 인해 거대기업과
인종차별정부의 사이가 틀어지고,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집권으로
가게 되는 길이 열린다- 에 발생했던 사건들도 위의 세시기에
역시 나타났다.
국내투자는 미약했다(GEAR시대에 연간 7%의 성장을
계획하였지만, 실제는 2%이하였다).그리고 전화회사가
부분적으로 민영화되지 않았다면, 외국인투자는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국내의 사적부문에 대한 투자는, 자본이
효과적으로 스트라이크를 진행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원은
재빨리 해외로 빼돌렸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반면에 GEAR의 목표 중에 오직 달성한 것은 대기업에
결정적인 것 뿐 이었다. :인플레이션(GEAR은 7-8%를
계획하였으나, 9%에서 5%로 떨어졌다); 당좌계정(적자로
계획되었으나, 잉여가 발생); 그리고 재정적자(3%로
계획되었으나, GDP의 2%이하).
현실은 다음과 같다: 남아프리카에서 인종차별정책이
계급차별정책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대치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계급차별정책은 구조화된 경제적, 정치적, 법적, 문화적
관행에 의해 억압된 대중을 체계적인 저개발을 통해 분리하여
이루어진다. 비록 약간 팽창된 재정정책이 2000년 이후
채택되었지만, 프리토리아(남아공 수도명칭. 이 글에서는
남아공정부를 의미한다. -역자)의 신자유주의적 지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 대통령 음베키는 1999년 5월에 만델라의
후임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과도기 이래로 정부의 주요한
정책을 설계했고 관리해 왔다. 그는 또한 아프리카민족회의
내부에서 지속되는 피비린내 나는 갈등을 조정하는
핵심인물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초래한 가장
파괴적인 측면이다. GEAR 제안자들이 약속한 매년 3-4%의
고용성장 대신, 연간 1-4%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현상은 1990년대
후반의 특징이다. 남아프리카의 공식적인 실업률은 1995년
16%에서 2002년에는 30%로 올라갔다. 일자리를 찾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까지 합하면 실업률은 43%까지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성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파업으로 인한
노동일 손실은 감소했다. 그리고 후자는 부분적으로
아프리카민족회의가 노조를 해체한 것과, 2001년과 200년의
사유화에 저항한 민족행동과 같이 정치적 목적으로 수행되는
파업에 대해 적대한 것에 기인한다.
백인자본가들은 과잉축적위기에서 초래되는 경기침체와
이윤감소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그들은
국제적인 제재와 노동현장과 지역에서 점증하는 흑인들의 투지에
포위된 것처럼 느꼈다. 바로 여기서 이행협정을 추진하며
아프리카민족회의가 핵심적인 양보를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간단히 말해 그 협정은 다음과 같다 : 흑인 민족주의자들은
국가기구를 넘겨받고, 반면에 백인과 기업은 그들의 자본을
국외로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자유화를 통해 더 큰
특권을 즐기며 남아프리카에 계속 남았다. 국가잉여의 분할과
관련하여서 보면, 세전 이윤 몫은 1990년대 후반에-
인종차별주의 정부시대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의 수준으로 까지-
폭증했다. 프리토리아는 또한 기업이 내는 세금을 극적으로
인하하였고(1994년 48%에서 1999년 30%로), 실업이 폭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지출을 억제하여 재정적자를 3%이하로
유지하였다.
결국, 정부통계로 보더라도 흑인가구의 평균수입은 1995-2000년
동안 19%감소했다(1년마다 3,714불씩 감소), 반면에
백인가구수입은 15%증가했다(1년마다 22,600불씩 증가). 상대적
빈곤만이 아니라 절대적 빈곤도 증가했다. 실제수입이 90불
이하인 가구의 비율이 1995년 20%에서 2000년에는 28%로
증가했다. 인종적 구분을 무시하고 보면, 모든 남아프리카인구의
가장 가난한 절반의 수입은 2000년의 국민전체 수입 중에서 겨우
9.7%를 차지한다. 1995년에는 11.4%를 차지했었다. 가장 부유한
25%가 모든 수입의 65%를 벌었다. 그리고 2000년 이후에도
이러한 불평등은 계속 악화되어왔다.
빈곤문제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수도요금과 전기요금을
극적으로 인상하였다. 2002년에 한달에 70불 이하를 버는 가구의
경우 수입의 30%를 지불해야 할 정도이다. 중앙정부조사에
의하면, 약 1000만명의 인민들에게 수도공급이 중단되었으며,
역시 1000만명의 인민들에게 전기공급이 중단되었다. 지방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전기공급이 중단된 가구의 60%는 6주 이내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것은 단전 단수 문제가 빈곤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인종차별정책에 투쟁하던 시기의
유물인“지불하지 않는 문화”가 원인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더구나 1994년의 해방이래로 200만의 인민은 자신의
집과 토지로부터 쫓겨났다. 처음 유선전화가 공급되었던
1300만명중에서, 사유화의 과정에서 보조금이 축소되자마자
1000만명이 요금을 지불하지 못하여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성과 관련한 문제에서는 약간의 개선이 보여 진다. 극심한
불평등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특히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권리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는 잉여착취를 위해
사용되었던 인종차별정책시대의 가부장적 모델이 여전히
존속되고 있다. 이것은 아직 남아있는 성적차별과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는 노동력 이동체계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는 이전의 반투족의 땅에 붙박혀 있는 여성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들 여성들은 사회적 재생산에서 자신들의
기여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정상적 노동시장
하에서라면 국가에 의한 교육, 의료보장, 연금 등의 지원이
이들에게 제공될 것이다. 이러한 구조화된 초과착취는, 남성들의
실업률이 증가하는 것에 기인한 성적인 폭력의 뚜렷한 증가에
의해서 그리고 빈곤의 여성화에 의해서, 더욱 악화되고 있다.
여성들은 집에서도 역시 대부분의 가사를 돌보고 있고, 이러한
무거운 부담은 그들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있다.
예산이 줄어들고, 영리를 노리는 제공자들이 침투하여
공중보건서비스가 축소되어, 결핵 콜레라 말라리아 에이즈 같은
전염병들이, 인종차별정책시기 동안보다 훨씬 더 창궐하고 있다.
깨끗한 물이 제공되지 못하여, 설사로 매년 43,000명의 어린이가
죽는다. 대부분의 에이즈환자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항바이러스 약품들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현재 50만의
환자들이 응급으로 약물투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는
음베키와 그의 보건장관의 “부정주의자”적인 정책 때문인데,
저명한 보건전문가들과 연구자들은 이 정책을 민족말살이라고
규정한다. 마침내 2003년 9월에 내각은 약품의 제공을
약속하였지만, 음베키는 즉각적으로 상처에 소금을 쏟아 부었다.
그는 뉴욕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자국에서-역자) 에이즈로 죽은
어떠한 사람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HIV양성인 사람도 알고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음바키는 인권을 주장하는 지방의 반대파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고, 유럽기업으로부터 재래식 무기 6억불어치를
구매하자는 군부의 반대파들을 또한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프리토리아의 아제국주의적인 간섭에
예민하다. 중부아프리카와 리베리아에서의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중재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종족간의 갈등과 국가의 실패라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이유로
인해 언제 통제력을 잃게 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폭력배의 술수 같은 예의 하나가, 1988년
프리토리아가 대중적 인기가 없는 이웃 레소도의 정부를 지키기
위해 군사적으로 침략한 것이다. 게다가 무기구매와 관련한
광범한 스캔들-2003년 후반에 부통령 야콥 주마(그는 들리는
바에 의하면 법무장관이 “명백한 부패”라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를 위협하였고,
유럽무기기업들과의 모의가 발각되어 아프리카민족회의 여러
지도적 정치가들과 관료들을 사임하게 했다-은 당시의 대통령
만델라가 이것이 아프리카민족회의 정부의 암적인 존재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 맞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문제를 보면, 남아프리카의 생태계는 여러 결정적인
측면-물, 토양, 자원에 대한 관리부재, 지구온난화에 대한
남아프리카의 책임, 수산업, 산업에서 발생되는 독성물질,
유전자변형-에서 인종분리정책시기보다 더욱 악화되고 있다.
<레소도 하이랜드 물 프로젝트>는 제3세계의 개발과정에서
생기는 부패의 최악의 예가 되고 있다. 레소도 산맥의 물은
아프리카 최대의 댐을 통해 요한네스부르그에 공급되고 있다.
그리고 정부관계자가 불필요하다고 시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환경에 대한 파괴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댐이 건설되고
있다. 물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물을 개발하는 계획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물을 끌어오는 비용이 매우 높아
가난한 사람은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유한
도시가구(주로 백인이다)는 영국식 정원에 수영장까지 갖추며
살고 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호화로운 교외주택지역에
사는 사람의 일인당 물소비량은 가난한 지역 사람들의 30배가
된다. 이들 가난한 사람들은 백인들의 집에서 가사일과 정원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말라붙은 예전 반투족의 거주지역에서는
시골의(흑인)여자들이 공공수도꼭지 앞에서 몇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인종차별정책시기에 토지가 강탈당했기
때문에 백인 농부들이 미개간지와 지하수가 있는 지역의 토지를
차지하고 있다. 경작지의 2%만이 재분배되었기 때문에,
프리토리아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러한 문제를 교정하는데
결정적으로 실패하였다.
미개간지(토착민이 계속 변화하고 있다)의 보존에 대해서 수많은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고, 생물학적 다양성에 대한 산업화의
파괴적 작용, 멸종위기에 처한 종에 대한 불충한 보호, 상업적
농업에서 진행되는 유전자변형에 대한 국가의 관대한 정책 등을
포함하여 많은 예들이 제시될 수 있다. 해양통제체계는 중급
규모를 가진 지역의 상업적인 수산회사들뿐만 아니라 유럽과
동아시아의 저인망 어선들에 의해 과도한 압박을 받고 있고,
이들과 극심한 분쟁을 치루고 있다. 주로 동아시아로 목재를
수출하기 위해 운영되는 고무와 소나무 삼림 농원이 확장되어,
초원과 숲이 심각할 정도로 파괴되고 토양을 오염시키고
2000-2001년의 모잠비크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홍수로 인한
피해를 훨씬 악화시킨다. 뿐만 아니라 외래 식물이 침투하여
담수지역을 파괴시킨다. 이를 재건하기 위한 정부의 프로그램은
너무 느려서 이런 외래식물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규제가 느슨한 정부의 정책 때문에, 남아공의 상업농업은
화학비료와 살충제에 극도로 의존하고 있고, 유기농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다. 독성물질이 함부로 버려지고 소각되는 것을
정부가 막지 못했기 때문에 불법행위에 대한 대중적인 소송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소송규모는 독성물질로 인한 오염이 심각한
몇몇 지역에서는 진폐증 발생자들에 의한 소송규모를 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환경정의운동은 거의 예외 없이 기업과
프리토리아 모두를 상대로 투쟁한다.
사유화정책의 실패
사회적 환경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국가는 능력이
불충분하다”라는 정부의 거짓선전 때문에 자원들이
사유부문으로 돌려졌다는 것을 부언하는 것은 중요하다. 만약
아프리카에서 외주화, 법인화, 사유화가 잘 운영될 수 있는
국가가 있다면, 그 곳은 바로 남아프리카일 것이다.
남아프리카는 커다랗고 부유한 시장, 비교적 유능한 기업과
발전된 하부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서비스를
상품화했던 네가지 주요한 예-전화통신, 운송, 전기, 그리고
수도-에서 상반되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첫째, 돈벌이가 잘되는 전화통신부문을 보자. 국가가 소유했던
텔콤의 지분중 30%가 하우스톤-쿠아라 룸푸 연합에 팔렸다.
지방의 전화료는 폭증하였고, 광대한 지역에서 전화서비스가
중단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0명의
노동자가 해고 되었다. 유선전화의 독점가격에 상한선을
정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텍사스-말레이지아 연합 투자회사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2002년에 그들은 소송을 걸고, 텔콤의
주식을 팔아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결과적으로, 2003년 텔콤을
뉴욕주식시장에 처음 상장했을 때 그 가치는 겨우 5억달러에
불과하였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에 텔콤의 자본 확대를 위해
프리토리아가 투자했던 5억달러로 추정되는 기금은 증발하고
말았다. 두 주요 민간휴대폰기업사이의 가격과 서비스에 대한
조약, 그리고 계속되는 부패는 새로운 유무선통신회사가
진입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둘째, 운송 분야에서는 부분적인 사유화와 관련된 많은 난관이
있다. 상품화된 유로도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가 없다.
항공업의 사유화로 인해 지방정부가 소유한 최대의 항공회사가
문을 닫았다. 남아프리카 항공사는 비참하게 몰락하고 있다.
거대한 환차손을 입기도 했고, 2천만불이라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돈을 단기간 재임했던 미국관리자에게 지불하기도
했다. 항공사의 사유화는 안전상의 결함과 노동계와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남아프리카민족회의와 제휴한 노동조합과의
지속적인 분쟁은 항만의 사유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철도서비스의 법인화가 진행되어 이윤이 없는 철도지선이
폐쇄되어, 지방경제에 커다란 해악이 되고 있다.
셋째, 전기 분야의 사유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준
국영회사인 에스콤(세계4위의 전기 생산회사)의 30%의 지분이
2004년에 팔렸고, 이는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1990년대 동안 3만명의 전기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불필요한 새로운 전기생산시설이 민간기업에 의해 건설되고
있다. 재생가능에너지(태양열, 수력, 풍력 등 -역자)에 대한
투자는 극도로 적은 반면, 국가는 미국과 영국의 기업들과
협력하여 핵에너지에 투자를 확대할 것 같다. 1990년대 후반에
정부의 보조금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가정용전기요금이 훨씬 많이
인상되었다. 요금을 부담할 수 없는 가구가 늘어나서, 에스콤은
농촌지역에 전기 공급망을 확장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반면에
폭등한 요금을 연체한 수백만의 인민들은 전기공급을 중단
당했다. 그리고 이는 불법적으로 전기를 다시 연결하는 것과
같은 당당한 저항(종종 성공한다)을 야기하고 있다. 유행하는
수준에 이른 결핵과 여타의 호흡기 질환의 하나의 원인으로,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옛날처럼 파라핀이나
석탄을 연로로 요리를 하는 것이 지목되고 있다.
넷째로, 1990년대 후반동안 중앙정부와 세계은행의 강요에
의해서, 사실상 모든 지방정부는 비용의 100%를 인민들에게
부담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정책은 주로 상하수도를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실행되었다. 가난한 지역의 인민들에게
원가를 모두 부담시키려는 시도는,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특히 여성과 가족 중에 HIV양성인 사람이 있어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고 수인성질환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에게 고난을
초래했다. 상수도와 하수설비의 사유화는 전국 지방자치체 중의
오직 5%에서만 진행되었지만, 세계최대의 상수도회사들(Biwater,
Suez, and Saur)에 의해 운영되는 <남아프리카 수로(水路)
계획>은 상수도 요금을 너무 비싸게 했고, 상수도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윤이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요금을 인상하기 위한 계약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서비스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저소득 가구들에게 단수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선불된 만큼만
물을 공급하는 기계가 광범위하게 설치되고 있다. 하수설비는
기준이하이다. 비용의 100%를 인민들에게 부담시키는 정책이라는
도그마는,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대륙최악의 콜레라 발생-2000년
8월 농촌가구에 대한 대규모 단수조치에 의해 촉발되었다- 을
초래하였다.
계속되는 이러한 실패의 결과로, 갈등과 불만이 명백하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2002년도에 남아공에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협회>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인종차별주의 정부
하에서 살기가 더 좋았다고 믿는 흑인들이 늘고 있다.
비극적으로, 조사대상 남아프리카인의 60%이상이 소수백인에
의한 통치하에서 국가가 더 잘 운영되었다고 말했다. 오직 열명
중에 1명만이 자신들이 선출한 대통령이 자신들의 요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세명 중에 1명 이하의 사람만이
현재의 정부가 인종차별주의 정부보다 더 믿을 만하다고 느꼈다.
백인이나 혼혈인들에 비하여 흑인들은 오직 미세한 만큼만
정부에 대해 더욱 긍정적이었다. 흑인들의 경우 38%가 현재의
정부가 과거 정부보다 더 믿을만하다고 여기고 있다. 흑인들의
오직 24%만이, 현재의 정부가 인종차별주의 정부보다 덜
부패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였다.
10%의 사람들 혹은 매우 부유한 백인들, 그리고 산재해 있는
부유한 흑인들은 대중들로부터의 분리와 격리를 즐긴다. 그들의
생활은 세계최고의 수준이다. 이것은 남아공의 도시의 근교를
돌아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인종적
차별정책은 거주지역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항상 명백히
표현되었다. 그리고 1994년의 해방이후에, 프리토리아는
세계은행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세계은행의 제안은
공공주택정책을 기피하는 정책(사실상 지자체소유나 심지어
조합주택도 새롭게 건설되지 않았다), 필요한 것 보다 더 적게
주택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그리고 국가나 지역사회에 의해
추진되는 개발 대신에 은행과 상업적인 개발자에게 훨씬 더
의존하게 하는 정책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주택의 사유화는
실로 인종차별정책이후의 남아공에서 가장 경악할만한 역설들
중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세계은행의 충고를 받아들인 죠
스로보는 남아공 공산당의 당수였기 때문이다.
9년 후에, 커다란 요한네스부르그을 책임지고 있는
지방주택장관은 주요 신문사에, 남아공에서 초래된 주택과
관련된 계급적 차별정책은 곤혹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시인하였다: “만약 우리가 지역사회를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통합하려 한다면, 그러면 주택보급정책에 관련된 지금의
개념-영업용 땅, 모든 것이 완비된 주택, 예산지출에 의해
결정되는 정책-들과 결별하여야한다.” 그의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첨언하였다. “문제는 항상 다음과 같다. 즉 우리가 값싼
주택을 건설하려 할 때, 그것들은 항상 사람들이 사는 지역과
떨어져서 건설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산가치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요한네스부르그에서 최대의 부동산판매회사 중의 하나인 루
게펜(Lew Geffen) 부동산회장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값싼
주택은 외곽지역에 개발되어야 한다. 그런 지역에서는 토지가 더
싸서 더욱 양질의 주택이 건설될 수 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상업 은행가이고 건설회사와 제휴하고 있어서
여전히 주택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게펜의 취향이다. 그래서
요한네스부르그의 풍경이 -‘양질의 주택’이 아니라
흑인거주자들이 “개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훼손되지 않고-
변화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인종차별정책
이후에 국가보조금에 의한 초기의 수십만 호의 주택은 종종
인종차별정책 시기동안 건설된 40제곱미터의 “성냥갑”의
절반의 크기였다. 그리고 종종 직장과 지역사회에 필요한
편의시설들과 떨어져 있었다. 계속되는 단수와 단전에 더하여,
새로운 빈민가는 낮은 질의 국가서비스-쓰레기를 방치하고,
더러운 도로와 폭우를 배출하기에 불충분한 하수도 등-로 고통을
받는다.
세계화가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였다.
한때 자랑스러웠던 해방운동이 어떻게 그렇게 결정적으로,
그리고 그렇게 빨리 퇴행하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는
GEAR(성장, 고용, 그리고 재분배)이 조직되기 전인 1993년
12월에 IMF에 의해서 강제로 시행되었다는 것을 다시 지적하고
싶다. 그러나 사전의 세가지 결정도 역시 결정적이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가 “국유화”를 정식으로 폐기하는 것(1992년
8월); 민족차별정책시기의 부채 25억달러에 대해 지불책임을
지는 것(1993년 10월); 중앙은행이 과도정부로부터 독립하는
것(1993년 11월).
여러 가지 다른 국제적인 경제적인 사건들이 언급되어야만 한다.
1994년 5월 해방이후 수주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불리한 조건으로 가입했을 때, 남아공은 비 공업국가로
승인받았다. 1995년 1월에, 사유화가 진지하게 시작되었다.
1995년 3월 환율통제정책이 폐지되면서 금융자유화가
진행되었다. 멕시코에서 자본이 이탈하여 페소화가치가 폭락하던
바로 그 시기에 역설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남아공의 대응은
금리를 기록적인 수준(인플레이션이 무시된 이후 종종
두자리수까지)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도의 높은 금리는
일찍이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1998-2001년부터
남아공민족회의 정부는 남아공 최대의 기업이 그들의 금융본부를
해외로 이전하고 런던을 일차적인 주식시장으로 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GEAR(성장, 고용, 그리고 재분배)은 환상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거시경제정책의 실패는 심지어
프리토리아내에서도 가끔 시인된다. “경기침체에 대한 특별우대
속으로 세계은행의 위대한 도약”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2002년 4월 한 기사에서, 불룸버그 뉴스서비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재무장관 트레보 마뉴엘은 “지난 6년 동안
국가지출을 줄이고, 무역장벽을 제거하고, 인플레이션과 싸웠고,
이 모든 것은 세계은행의 경제전문가의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그는 여전히 봉급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마뉴엘과 심지어 어떤
세계은행관리는 아프리카 최대의 경제가 대부자의 조언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성과를 아직 얻지 못하고 있다.”라고
충성스럽게 변호하였다. 마뉴엘-그는 IMF와 세계은행의
관리위원회 회장이었고, 지금은 두 기구가 협력해서 만든
개발위원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다- 은 불룸버그에 다음과 같이
시인하였다.“우리는 매우 실제적인 거시 경제적 개혁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성과는 거의 없다.” 더욱 일반적으로,
그는 “개발도상국은 많은 개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익은
사실상 극히 미미하다.”라고 시인하였다.
마뉴엘은 그러한 실제적인 “개혁”으로 떠밀려 들어갔을까?
아니면 그가 스스로 뛰어든 것일까? 노련한 아프리카 관찰자인
사울은 다음과 같이 시사했다: 모든 다양한 고려는 무시되고
”세계화가 나를 그렇게 하도록 강제한다!“ 라는 외침만이 힘을
얻었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신자유주의-역자)을 낳았다. 2003년
5월의 어느 정도 자기비판적인 연설에서, 마뉴엘은 다음과 같이
시인하였다. ”경제적 통합은 관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국가가 가지고 있는 정책을 선택하는 폭을 심각하게 제한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제한되는 정도와 그 국가의 자본에 대한 접근도는
직접적으로 비례한다는 것은 상기할 가치가 있다. 결정적 변수는
첫째, 재정적자분에 대해 재원을 조달하는 것, 둘째, 경제
확장에 쓰이는 자금조달을 위해 외부자본에 대해 의존하는
정도이다.“
정책의 무기력함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세계화된 금융시대에
피상적으로는 타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마뉴엘은 힘의 불균형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통화가치 변동을 통해
일정정도의 “비공식적인” 규제가 가능하다. 마뉴엘이 언급하는
것과 같이, “핵심적 문제는 자본의 유동성의 정도와, 약간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국가의 요구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흐름을 조절할 결정적인 수단은 강력하게 환율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뉴엘은 국제금융관리 정책에서 계속
갈팡질팡하면서, 2003년 초 부터는 통제를 느슨하게 했다.
“우리가 산드톤(부르주아지 거주지역 - 역자)를
접수하겠다!”
남아공에서의 어법은 매우 혼란스럽다. 2003년 9월의 칸쿤
WTO정상회의 전야에 음베키가 말레이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제3세계의 정부는 반자본 사회운동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당신과 내가 싫어하는 방식-거리에서
유리창을 깨뜨리는 등등 -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우리와 관련되어 있다.” 사실, 연합하고
협동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간단하게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프리토리아가 정치적 명령을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사회에
강요하면서, 그러한 가능성은 적극적으로 파괴당했다.
아프리카민족회의 통치의 억압적 측면은,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UN세계회의에 반대하는 2002년 8월의 항의로 인해 세계에
폭로되었다. 세 종류의 운동단체의 수백명의 활동가들을
선제공격하고, 평화적인 집회를 금지시키고, 요한네스부르그의
주요대학의 토론회에서 시작된 800명의 촛불행진대열에 최루탄을
사용하였다. 그 때 독립적인 좌파그룹은, 20,000이상의 시위대를
구성하여 알렉산드리아의 빈곤지역에서부터 회의가 열리는
부르주아지의 산드톤지역으로 행진할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시위대의 물리력과-“우리가 산드톤을
접수하겠다”는 광범위한 구호가 이를 말해준다-과 국제언론의
주목 때문에 프리토리아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권기금>의 야스민 수카라는 사람에 따르면,
“인종차별정책시기의 군인출신의 퇴역 경찰들 다수가 다시
소집되어 보안작전에 투입되었다. 중무장한 군과 경찰이 1인치의
간격으로 도로에 늘어서서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광경을 보는 것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두 시간 후에
아프리카민족회의 연합에서는 UN회의를 지지하기 위한 행진을
하였으나, 그 수는 항의시위대의 10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프리토리아의 억압적인 경향은 2003년 동안 지속되었다.
요한네스부르그와 케이프타운의 흑인거주지역에서 활동가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경찰에 의해 공격당했고 감금-주로
불법적으로(고압적인 자세로 무죄로 석방시켰다)-당했다. 이들은
퇴거와 단전 단수조치, 그리고 서비스 선불기록계(선불한 만큼만
전기 등을 공급하게 해주는 기계-역자)를 부착하는 것에
저항하였다. 에이즈환자들이 약품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세계적인 운동이 진행되자, 프리토리아는 활동가들에 대해
격노하여, 임신여성에 쓸 수 있는 주요 약품인 네비라핀을
빼앗아 버렸다(수년전에 우간다에서 불법적으로 시험되었다는
이유로). 이는 음베키의 말레이지아 발언이 있기 수일 전에
발생했다. 2003년 중반에 미국법정에서 남아공활동가들이
인종차별정책시대의 이윤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을때,
음베키와 법무장관 페누엘 마두나는 소송을 기각해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리고 이는 콜린 파월의 압력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법무장관이 누설하였다.
그러한 사건들은 진보적인 운동과 저소득 대중들을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독립적인 좌파의 주요한 아래로부터의 운동들은,
에이즈환자들이 항바이러스 약품을 공급받게 하고,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식수와 (1일 1인당 50리터) 전기의 (1일 1인당
1킬로와트)무상공급, 토지개혁, 주택에서 쫓겨나는 것을 막고,
기본적인 수입을 보장받고, 부채지불을 거부하고,
인종차별정책시대에 국내와 외국자본이 거두어들인 이윤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고, 국내의 폭력으로부터 안전을 요구하는 것을
위한 투쟁 등이 있다. 항의는 세계경제포럼과 같은 신자유주의
행사들에 반대하여 주기적으로 폭발했다. 때때로 압력은
프리토리아가 2003년 11월에 항바이러스약품을 제공하는 계획을
지연시켰다는 것을 시인하게 만들만큼 강력했다. 그리고 이는
음베키와 보건장관과 무역장관에 반대하는 시민불복종운동,
제약회사에 대한 주기적 항의, 그리고 법정투쟁을 불러왔다.
2000년 초에 불법적으로 전기를 다시 연결했던 소웨탄지역의
사람들은 -사유화에 대해 책임있는 장관이 그 지역의 강력한
투쟁에 패배했기 때문에- 2003년 4월에 그들의 누적된 부채를
탕감받는 것으로 보상받았다. 더욱 최근에, 정부는 사법부를
동원하여 공격하고 심지어 초법적으로 경찰력을 통해 억압하는
등 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체계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독립적인 좌파와 아프리카민족회의 연합사이의 협력의 부재를
반영하여, 좌파는 2003년의 부시방문에 강력한 저항을 조직했다.
독립적인 좌파진영의 300명으로 구성된 반전연합은
요한네스부르그, 케이프타운, 둘반, 그리고 프리토리아에서
있었던 주요시위에 수천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
숫자는
남아프리카민족회의-COSATU(노조총연맹-역자)-남아프리카공산당-
교회가 공동으로 동원한 항의인원을 훨씬 넘어서는 정도였다.
반제국주의자라는 삐걱거리는 수사학에 그치는 것이
남아프리카민족회의가 전쟁에 반대하는 태도인 반면에,
반전연합은 다음과 같은 위선들을 지적한다: 무기업체인 데닐은
2억 5천만불 어치의 첨단무기를 부시와 불레어에게 팔았다.
걸프지역에 파견되는 전함이 중간경유지로 둘반에 정박했다;
2003년 7월에, 보다 밀접한 군사적 경제적 협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방문한 부시를 음베키는 따듯하게 맞이했다. 부시는
음베케를 짐바브웨이에서 발생한 위기에 대응하는 자신의
“정찰대의 선두에서는 첨병(point man)"이라고 부르며 친절하게
답례했다. 부시의 아프리카의 심복, 왈터 칸스테이너는 (미국과
남아공과의 관계를-역자)”철학적으로 꼭 맞는“ 아프리카개발을
위한 새로운 동반자관계라고 이름 붙였다. 동시에
짐바브웨이인의 진보 단체와 그들의 국제인 연대체(미국에 있는
아프리카행동연대운동을 포함하여)는, 로버트 무가베의 포악한
지배를 원조한 것에 대해 음베키가 계속 변명하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남아프리카의 독립적인 좌파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아프리카민족회의와 자본에 계속 도전하고 있는 조직은
사회운동과 지역사회활동가연합이 있다. 민족사회운동 인다바,
요한네스부르그 반사유화 포럼, 에데크위니(둘반)사회 포럼,
서부 케이프 반-주거박탈 운동 등이 있다. 동시에 다양한
부문에서의 특화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도 있다 ; 교육권
프로젝트, 환경정의 네트워킹 포럼, 축제 SA, Keep-Left,
쿠루마니(인종차별정책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단체), 토지 없는
인민들의 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위원회, 소웨토 전기위기
위원회, 치료를 위한 행동 운동, 노동을 위한 청년, NGO연합
등등. 그들의 투쟁에 관한 소식은 정기적으로 주요한 뉴스
보도(주요 신문, 방송 등-역자)에서 보여 진다. 그러나 지방의
독립적인 좌파들은 웹 사이트나 잡지-Debate : Voices from
South African Left, Khanya Journal-와 같은 매체를 이용한다.
또 다른 좌파의 하부구조로는 싱크탱크와 교육협회 - 대안정보와
개발 센터, 근본원리, 국제 노동 연구와 정보 그룹, 카냐 대학,
시민사회를 위한 대학 - 가 있고, 이들 대부분은 웹 사이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코사투내에는 전투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고,
특히 지방자치체 노동자들에게 많다.
그러나 분열을 초래하는 갈등이 독립적인 좌파운동 내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공산당과 코사투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나타나고 있다. 아프리카민족회의를 어느 정도로
타격할 것인지, 좌파정당을 만들 것인지 말 것인지 그리고 언제
만들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2004년
선거에 보이코트를 요구할 것인지 혹은 방해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의견이 대단히 다양하다. 여기에 더하여, 작은 정당들과
소수 분파들 사이에 파벌이 심한 남아프리카의 전통적인 문제가
있다. 또 다른 주요한 분리선이, 짐바브웨이 토지문제와
짐바브웨이 야당 중에 제국주의자들과 연합한 부분에 대해
남아프리카의 태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두고,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극과 갈등의 많은 부분이 향후 10년
안에 - 폭넓은 지지기반을 가진 노동자당의 우산 아래서 좌파의
재편이 폭넓게 이루어질 수 있을 때- 해결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종류의 언급이 남아프리카의 정세를 요약한다. 첫째,
“정부는 전적으로 대기업의 사주를 받는다. 그래서 기업의
직접적 이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둘째, 국내외의
분파적인 좌파파벌들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고
이식하고 있다고 말하며, 노동하는 인민들을 포기하는 우리의
운동에 죄를 뒤집어씌운다. 이들 분파들은 사회주의자의 의제를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우리가(남아프리카의 현 정부-역자) 노동하는 인민들의 이해에
적대하면서, 국내와 국제적 자본가계급의 대리인으로서, 그리고
세계은행과 IMF와 같은 여러 나라로 구성된 조직체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이러한 인용문들- 각각 2003년
6월 비즈니스 데이라는 신문의 (신자유주의) 편집장과 2002년
9월 남아프리카민족회의 정책토론회에서 행한 음베키의 연설에서
인용-은 남아공 지배 엘리트들이 다음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 인종차별정책을 진정으로 타파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해방 10주년 기념식을 축하할
이유가 없다. 아마도 20주년 기념식을 할 때에는 독자들을 더욱
힘나게 하는 보고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 생략/번역 -
편집출판위원회)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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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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