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중 노동운동의 미래는? |
현장에서 미래를 제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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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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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 노동운동의 미래는?
안윤길 / 현대중공업 노동자
들어가며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한때는 한국노동조합운동의 주체로
노동운동의 성지라 일컫던 현중 노동운동은, 올해로 17년이
흐르면서 이제 한 매듭을 짓는 시점에 서 있다. 노동조합운동의
주체였던 만큼, 상대적으로 자본의 폭압적인 탄압 속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우리 역시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러서
현장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대로 방관만 할 순
없지 않은가. 무너진 현중 노조운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등 많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역사란 누가 어떻게 평가하든
왜곡하든, 묵묵히 진실을 담고 흐르기 마련이다. 이제 현중의
정규직 노동운동의 한 시대를 접고 비정규직 운동이 일어서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노동운동의 미래를 위해 지난날을 철저히
뒤돌아보아야 한다.(이 글은 본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서술하였으므로, 현중노조 역사과정에서 약간의 구체적 사실을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기에 양해를 바람)
시행착오
지난 현중 노조운동을 큰 틀로 짚어보면, 우선 크게 나누어
87년부터 128일 투쟁, 골리앗투쟁 그리고 94년 선상점거투쟁을
마지막으로 94년(7년)까지가 파업기라면, 무쟁의 원년인
9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무쟁의기(10년)라 볼 수 있겠다.
이미 파업기보다 무쟁의 기간이 3년이나 더 길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파업이 전투적
계급적 의식을 향상시킨다고 볼 때, 10년간의 무쟁의는 그만큼
자본에 흡수 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우리에겐 관료화, 무기력화 될 수 있는 기간이
그만큼 충분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자본의 탄압을 탓하기 전에 치욕의 무쟁의 10년
세월 기간 중 우리의 시행착오를 내 잣대로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파업기 동안 그렇게 전투적이었던 현중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요인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자본의 신 경영전략에 따른 줄기찬 회유와 탄압 등, 많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있겠지만, 어쨌든 우선 겉으로 나타나기는
94년 선상점거파업이 끝난 직후부터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저지른 첫째 시행착오는 94년
선상파업이다.
그해 64일간 파업 기간에는 기계를 완전히 멈추고 조합원이 매일
평균 70%가 파업에 동참한 요즘에는 보기 드문 파업이었다. 헌데
그 해 협상이 이상하게 끝났다. 확실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시
파업을 끝내면서 노사간에 합의서가 확실치 않은 구두합의
상태로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테면, 해마다 파업 후
정리하는 노사화합비(파업임금), 연말 성과급, 개선된 단체협약
따위를 합의서에 기제하고 노사 쌍방 서명을 하는 합의서를
확실히 정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이갑용 위원장은 단식을 하고 현장에서는 재파업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있었으나 결국 흐지부지 되고 이갑용위원장은
깜방으로 가고 말았다. 한마디로 파업은 훌륭했으나 성과물을
챙기지 못했던 것이다. 결과는 연말 성과급 68%로 나타났다.
이것이 현장과 노조, 활동가와 조합원이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고 현장이 무너지는 전주곡이었고 이것은 곧 이듬해 윤재건
보궐집행부의 무쟁의 원년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94년은 현중
노조운동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해로 역사적인 한 해였다.
둘째, 무쟁의 3년째인 97년 노동법개악 총파업이다. 그 해,
자본정권의 방침으로 노동법개악이 떠돌자 민주노총차원에서
총파업을 위한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그때 현중노조는
78%(확실치 않음)라는 높은 수치로 쟁의행위에 찬성했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치며 97년 말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4대
개악안이 거수기,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전국이 총파업에
돌입했고 현중노조도 조합원 3천~4천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태화강 둔치로 나갔다. 노동법 개악반대투쟁은 당시 전국적으로
대단히 뜨겁게 타올랐으나 약 2주일을 넘기면서 흐지부지 되고
당시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이던 권영길은 노사정 협상에서
개악법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다.
판단하건대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의 총파업은 전술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97년 그 당시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무려
78%의 찬성표가 나왔다는 것은 현장이 살아있었다는 증거였다.
그때, 만약 파업에 동참했던 3~4천명의 무리들이 태화강으로
나가지 않고 현장을 돌면서 기계를 멈추게 하는 전술을
택했더라면? 지금도 생각하면 그 때가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고
우리의 대단히 큰 시행착오였다고 생각한다. 어디 현중노조
뿐인가. 현자, 대우, 기아를 비롯한 전국의 대공장 노조들이
기계를 멈추었더라면! 그렇게 완전히 공장을 장악하고 난 뒤,
전국노동자대회 등으로 자본정권에 압력을 가했더라면 오늘의
역사는 달라졌을 거라고 본다. 어쨌든 나는 그때 현장을 돌면서
기계를 멈추는 파업을 못 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렇게 볼
때, 97년~98년에 걸친 파업은 현중 노조운동역사라는 큰 틀에서
두 번째 시행착오로 본다.
셋째, 98년 말, 대의원 선거다. 그때 현중노조 규약에는 대의원
후보등록에 조합원 20명 이상이 서명하도록 되어있었다. 당시
윤재건집행부의 노사화합 정책에 기인한 측면도 있었지만,
현중자본의 탄압이 극심해서 민주파 활동가들이 거의 조합원
서명을 받지 못해 대의원 등록을 못할 정도였다. 그러자
현장조직 ‘전노회’는 각 개인 활동가의 탄압사례를 자료로
제출 받아 자본에 항의를 하며 대의원 선거에 참여 않겠다고
공식적 표명을 했다. 당시 20여명의 활동가들이 완전히 서명을
받았지만 조직의 지침(?)에 따라 후보등록을 포기했다.
착취구조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의 노동운동탄압은
기본이다. 그런데 거기에 맞서 싸움을 포기하고 어리광을
부리는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관리자들의 그 숱한
탄압을 감내하면서 민주활동가라는 신뢰로 서명을 해준
조합원들을 생각해보라. 이보다 더한 배신이 어디 있겠는가. 이
사건은 활동가와 조합원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또한 앞의 첫 번째, 두 번째가 노조집행과정에서의
시행착오였다면 이것은 현장조직이 비 전투적인 즉 관료화로
가는 시행착오였다.
넷째, 12대 김종철집행부의 2000단, 임협투쟁이다. 현중자본의
치열한 방해공작에 맞서 해를 넘겼던 쟁의행의 찬반투표는
투표에 참여한 3천여명의 투표용지를 불태우며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끝까지 싸우려 했으나 자본의 탄압이 극심했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로 합리화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사측에
항복한 것이다. 2000년 투쟁은 이미 집행부나 활동가들이
관료화되어 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다섯째, 2002년 강호동비리 사건이다. 13대 김덕규집행부는
집행시작 반년 만에 강호동의 창립기념품비 횡령이 들통나
일년을 못 채우고 무너지고 말았다. 여기에는 사측의 탄압, 그로
말미암은 활동가들의 관료화 등 많은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어쨌든 이 사건이야 말로 현중 민주노조운동을 말아먹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결국 이 비리사건으로 말미암아 년 말에는 어용노조에 의해
조합원총회를 거쳐 노동자의 손에 해고자가 청산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 여력에 의해 연달아 14대 15대
집행부까지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섯째, 박일수열사투쟁에서 현중 분과동지회의 중식선동투쟁
중단이다. 지난 2월 4일 하청노동자 고 박일수동지 분신 이후,
그리고 현중 사내하청노조의 크레인 점거 후, 현장에서의 투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그렇게 볼 때, 박일수 동지
분신했을 때 현장이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최악의
투쟁조건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하청노조와
하청활동가들이 쫓겨난 상태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투쟁조건을
갖춘 조직은 현장통합조직인 ‘분과동지회’ 밖에 없다.
박일수열사투쟁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라는 것은 분과동지회의
운동 아니, 현중 노조운동으로 볼 때, 가장 최악의 조건이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기로이기도 했다.
3월 8일 총무부 앞 집회가 있던 날, 이날따라 사측에서는 활동가
한명 당 관리자 서너 명씩 달라붙어 집회 참여를 못하도록
말렸다. 그날 총무부 앞에는 30명 정도 모여 침묵시위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점심집회는 없었고 사측으로부터 경고장이
활동가들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이다.
때문에 여기서 점심선동투쟁을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이는
활동가가 20명이면 어떻고 30명이면 어떤가. 경고장, 소환장
등을 빨리 회수해서 홍보하고 집회를 계속했어야하는 것이다.
여기서 시사하는 바는 크다. 관리자들이 말린다고 집회참석 않는
것은 개별 활동가의 굴복이고 경고장 따위 때문에 조직적으로
투쟁을 접은 것은 조직자체가 사측에 굴복한 것이다. 이 후에
어떤 사안에서 어떤 명분을 가지고 싸울 것인가. 이렇게 볼 때,
분과동지회의 중식투쟁 중단이야말로 사측에 완전히 백기를 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신경영전략
87년 대투쟁 이후 현중노조가 한국 노동운동의 선봉 역할을 했던
만큼 상대적으로 한국의 자본도 거기에 맞춰 대응했다. 아니, 그
대응적인 탄압은 치밀했고, 집요했다. 그것을 우리는 대표적인
용어로 신경영전략이라고 한다. 신경영전략! 너무나 많이
들어오고 해왔던 말이고 잘 알던 말이므로 여기서는 시 한편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아! 신경영전략
노예의 굴레에서 노동자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87년 대투쟁 이후 수없이 빛나는 우리들의 파업투쟁들!
그 때 우린 노동자란 자부심하나로 얼마나 당당했던가
그러나 현중자본은 악랄했다
밟아도 아무리 짓밟아도 우리의 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르자
놈들은 우회전술을 펴기 시작했다 마치
섬은 그냥 두고 섬으로 들어가는 모든 뱃길을 차단하듯
조합원과 노조 그리고 활동가들을 격리시키기 시작했다
놈들은 치밀했다
무자비한 탄압에 두려움을 느낀 활동가들을 회유하고
한편으론 끊임없이 현장조직 분열공작을 펼쳤다
현장관리자 중심의 ‘다물단’과 ‘한마음교육’이란
이데올로기공세는
그동안 파업으로 다져진 전투적 계급적인 조합원들 정신을
철저히 허물어뜨리는 마약으로 작용했다
놈들은 집요했다
해마다 쟁의행위 찬반투표 때면
관리자들을 동원해 조합원 아내들에게 전화질 따위
각종연회를 통한 회유작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그동안 한솥밥을 먹었다는 인간의 가장 나약한 품성인
‘안면’을 철저히 이용했다
공포와 회유, 놈들은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하며
노조활동으로부터 야금야금 조합원들을 뺏어갔다
정규직은 채용부터 보증인으로 옭아 메고 비정규직은 늘여만
갔다
현장은 급격히 죽어가고 부당노동행위, 산재은폐가 판을 치고
짓누르는 노동강도에 과로사가 늘어가고 산재로 죽음이
잇따르더니
이젠 노조집행부와 야합하여 해고자를 정리해고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렵다 신경영전략 정말 치가 떨린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저 더러운 자본에 대한 적개심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아! 또다시 지옥 같은 어둠의 굴레
기인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정녕 우리에게 희망이란 없는 것일까! (2002년, 10월)
안윤길.
맺으면서
박일수 열사를 영안실에 눕혀놓고 우리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게다가 총선정국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태까지 현장에서 활동가란 노사간에 보이지 않는 선상에서
인정해주는 어느 정도 기득권과 활동범위와 활동영역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중식선동투쟁을 접고 나서 이젠 그러한 것들은
옛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거의 손을 놓고 있다. 이제 현중에서 활동가란 용어는
조합원들에겐 ‘왕따’나 ‘돈키호테’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관리자들은 홍어좆으로 여길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현장에서
조직적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장 뭔가
하려면, 조합원과 대화를 해도 금방 표면으로 드러나
조합원들에게 달달 볶이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답답하게
조급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밖에서 비밀조직으로
인자들을 하나 둘 포섭하는 등 학습모임으로 다시 출발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나는 그동안 활동을 해오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다. 17년 지난
노조운동역사에서 우리의 경제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기계를 멈추는 마지막 파업투쟁이었던 94년
선상점거파업이 증명한다. 자본측에서 보면 ‘무노동 무임금’
이데올로기가 철저히 먹혀들어갔고 주효했던 것이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그해 연말의 68%성과급은 노조와 조합원을 등
돌리게 했던 계기였고 이것이 곧 경제투쟁의 한계가
아니겠는가.
17년이나 되는 기나긴 노조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사상,
이념적으로 철저히 무장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조합원들을
계급적으로 단련시켜 내지 못했다. 사상과 이념에 관계없이
절박하면 누구나 전투적이 된다. 그러나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사상, 이념적으로 단련시켜 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노동해방은 무엇인가? 노동자 정치는 무엇인가 따위, 우리
활동가들 끼리조차도 언제 심각하게 토론하고, 논쟁하고 사투
한번 제대로 벌인 적이 있던가. 나는 여기에 우리가 철저히
반성해야할 점이 있다고 본다. 현장 활동에 사상, 이념을
접목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비정규직운동과의 조화,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본다. 아무리 시대의 조건이 어렵더라도
누가 해주지 않는다. 역사는 우리가 써나가는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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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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