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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영어상용화 정책을 보며

현장에서 미래를  제99호
전성식

이렇게본다

서울시의 영어상용화 정책을 보며


전성식
평등사회를위한민중의료연합회원






일부 지자체들이 ‘영어공용화’ 혹은 ‘영어상용화’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후자를 주장하는 자들은 ‘공용화’와 ‘상용화’는 다른 것이라 강변한다. 그러나 ‘영어공용화’라는 솔직하고 노골적인 주장이나, 아니면 ‘공용화’라는 주장에 대한 반감과 과거의 비판을 의식한 것이 분명한 ‘영어상용화’라는 기만적인 주장은 그 추진 주체의 음흉스러움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떻게 불려지든지 그러한 정책을 실행하려는 목적은 내용적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이다.
‘영어공(상)용화’와 관련된 논란은 지금이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에도 ‘영어공용화’와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한 자유주의적 지식인에 의해 주장되었고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당시의 논란은 지금과는 달랐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지만 어느 정도 커다란 사회적 쟁점을 형성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논의에 참가했었다. 왜냐하면 그때에 제기된 ‘영어공용화(영어 공용어)’의 주장은 지금처럼 하나의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변화된 세계사적 상황 하에서 한국사회의 개혁이라는 거대담론과의 연관 속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즉 여기에는 소위 ‘IMF 경제위기’라는 상황 속에서 ‘세계화’에 대한 판단과 태도의 문제가 결부되었으며 또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매개로 작용하여 논쟁이 이루어졌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나름대로 치열하고 자못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이후 물밑으로 가라앉았던 이 문제는 최근 제주도의 영어공용화 추진, 경기도의 영어마을 건립, 서울시의 영어체험마을 및 ‘영어상용화 정책’ 추진 등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당시의 ‘영어공용화’를 주장했던 근거는 언뜻 보기에도 지금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고 그에 대한 쟁점과 비판의 초점도 지금의 그것과는 다르다. 또한 상황도 엄청나게 달라졌다. 또한 현재 제기되는 주장들은 그 제안자들의 수준 때문에 과거의 주관적 진지함이나 나름대로의 치열함은 사라지고 그저 천박함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근본에 같은 뿌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국사회내의 다른 문제들도 유사하게 갖고 있는 한국사회의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와 관련된 문제이다. 여기서는 ‘영어공용화’와 관련하여 그 연관성을 고민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은 ‘영어공용화’를 찬성 하는가 반대하는가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영어공용화’의 문제를 찬성 혹은 반대의 문제로만 다루는 것은 문제를 협소화하는 것이고,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본질에 대한 인식이 찬성과 반대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찬성과 반대의 문제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지금 당시의 논란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당시의 문제의식은 지금보다 좀 더 진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당시의 문제의식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보다 진지하고 근본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다시금 제기되는 ‘영어상용화’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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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일보는 ‘영어공용화’ 논쟁을 “세기말, 세계화 열풍 속에서 민족주의의 유효성에 대한 회의가 지식인 사회일각에서 싹트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공용화”의 주장이 제기되자 “인문과학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 조짐이” 보였고, 곧 “지식사회를 강타한 ‘민족주의 논쟁’”으로 벌어진 것이라 보도하며 논쟁을 유발시켰다.
‘영어공용화’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최초로 제기한 복거일 교수의 논리를 정리․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세계는 단순한 민족국가들의 조합은 아니며 주권국가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초국가적 질서가 자리 잡았고”, 이렇게 형성되어 실제로 존재하는 ‘지구제국’이 “우리 삶의 모든 부면들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우리의 판단과 행동이 새 환경에 맞게 조절돼야”하며 “실질적인 국제어로 자리 잡은” “영어를 우리말과 함께 공용어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이 주장에 말 그대로 다양한 반대와 찬성의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신라 지식인의 환생, 대한제국의 멸망의 예, 친일파들의 당시 주장들 등의 비유를 들며 반대의 근거를 과거 역사에서 찾았다. 일부는 영어를 공용어로 삼았거나 영어를 잘하지만은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수하지도 생활이 국제적이지도, 국민생활이 행복하지도 않”은 나라들의 예를 들어가며 그 허구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또 어떤 작가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국지성이며 국지적 관계라는 주장과 다른 사람들의 글과 자식들을 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면서 얻은 경험을 인용하면서 영어 조기교육의 강화에는 찬성 그러나 민족어 교육에 지장이 될 정도로 강화하는 것에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는다는 다소 혼란스러운 반대의견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영어공용화’ 이후 대한민국은 쉽게 미국의 자치주가 될 것이기에 반대를 한다는 다소 억지스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와 반대로 ‘영어공용화’를 찬성하는 사람들 역시 다양한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며, 이것은 생존조건이고, 이에 대한 적응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며 후대에 대한 의무라는 사실이다. 또한 ‘세계화’가 미국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영어공용화’는 그중 가장 기본적이다 라는 점과 중요한 것은 ‘내것화’ 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민족주의 대 세계주의의 논쟁”으로 규정되었던 이 논쟁의 대립구도는 일면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찬반을 일단 도외시하고 극소수의 의견과 사소한 이견을 제외하면 양자의 기본적 관점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부정적 민족주의”, “감정적 민족주의”, “맹목적 민족주의”, “닫힌 민족주의”, “공허한 민족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거친 민족주의”에 대해 그들은 함께 비판한다. 그들은 상호간에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지만 같은 것을 비판한다. 그들은 정도를 달리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화를 대세로서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린 민족주의’를 함께 주장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것을 옹호한다. 그래서 ‘영어공용화’를 옹호하는 한 교수는 논쟁을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고 “원리민족주의와 실용적 민족주의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까지 주장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이 있기 전에 ‘영어공용화’ 논쟁을 유발한 교수님께서는 자신의 글에서 “민족주의적 열정을 잘 다스려서 ‘열린 민족주의’로 다듬어내”자는 것이고 “거친 민족주의적 행동을 삼가고 실질적 국제어인 영어를 호의적으로 대해야한다”는 것이 자신의 본뜻이었다고 이미 고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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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대세로서 인정하는 ‘세계화’는 당시에도 지금도 대세다. 그들이 파악한 ‘세계화’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여기서 길게 논하거나 세계화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지금 여기서 자세히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눈이 있고 생각이 있다면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한 번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비록 “이상적 사회”는 아니지만 “강대국만이”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은 약소국들이 상대적으로 더 큰 이득을 본다. 국제적 질서는 비록 공평한 것이 아닐지라도 약소국에 이롭다”던 그의 ‘지구제국’은 전쟁과 침략으로 얼룩진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변한지 오래고, 그가 그제서야 겨우 파악하고 놀라워했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약소국들”의 인민들뿐만 아니라 “강대국”의 인민들의 삶까지도 파괴하였고 지금도 파괴하고 있다.(“약소국들이 상대적으로 더 큰 이득을” 본다는 그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강대국’의 인민들이 ‘약소국’의 인민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우위를 누렸던 여러 권리들을 빼앗기고 있을 때, ‘약소국’의 인민들은 ‘강대국’의 민중들에 비해 빼앗길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더 적게 빼앗겼다는 의미에서는 말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두 가지의 역사적 경향이 발생한다. 그 하나는 민족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자각, 모든 민족적 억압에 대한 투쟁, 민족국가의 창출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형태의 국제적 교류의 발전과 성장, 민족적 장벽의 분쇄, 자본, 경제생활 일반, 정치, 과학 등등의 국제적 통일의 창조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모두 자본주의의 보편적 법칙이다. 전자는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 우세하고, 후자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의미를 포함하며 자본주의가 성장해가면서 점차 우세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후자는 앞서의 표현처럼 그렇게 낭만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압도적 힘에 의한 국제주의적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오염되어 이것을 기초로 하여 제국주의로 식민지로 표현되게 된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보아온 사실이다. ‘세계화’를 대세로 필연으로 파악한 것은 그리고 미래의 준비의 한 과정으로 본 것은 올바른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봉건제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가 이루어지던 시기 부르주아지는 국내시장을 획득해야 했으며, 단일한 언어를 발전시키고 정치적으로 통일된 영토가 필요하였다. 여기서 민족주의는 봉건적 최면상태로부터 대중을 각성시키고 민족적 억압에 대항하여 민중과 민족의 주권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었다. 한마디로 민족주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다. 결국 민족의 성립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의 강화의 과정이었고 민족국가의 성립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지배의 도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승리의 과정에서 민족운동의 경제적 기초가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당시의 민족문제는 계급문제의 일부로 혹은 계급문제의 구체적 발현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제국주의시대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문제가 민족문제의 중요한 문제로 된다.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식민지 인민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진보적이다. 그리고 이 투쟁의 동력에는 부르주아지도 포함된다. 그러나 민족해방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책은 결코 부르주아지의 정책과 일치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은 계급투쟁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특정 조건에서만 부르주아지를 지지한다. 이미 부르주아 민족주의는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원칙은 기본적으로 민족체 일반의 발전이다. 여기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배타성이 발생하고 부단한 민족적 분쟁이 일어난다. 전 지구적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한 지금, 부르주아지의 일방적 우위가 관철되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민족분쟁에서 우리는 이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화’한 현재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반동적이다.
앞서 본대로 ‘영어공용화’를 둘러싸고 논쟁한 당시의 지식인들은 다양한 이름의 민족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은 또 다시 민족주의로 수렴한다. 물론 그들이 비판하는 민족주의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도 반동적인 민족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초점을 두어 비판하는 것은 ‘세계화’를 반대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노력하고자 하는 노동자․민중의 태도이다. 또한 그들은 “과잉 세계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들이 비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아니다. 그들의 비판은 민족주의를 넘어 국제주의로 나아가려는 노동자․민중의 노력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철저하지 못한 자유주의적이고 소부르주아적 지식인이고 민족문제에 있어 부르주아적이거나 몰 계급적이어서 결국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 후 ‘민족주의의 옹호’를 주장하여 노동자․민중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계급문제와 민족문제의 과학적이고 통일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것, 그래서 올바른 실천을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그것들 모두는 그들 자유주의적 혹은 부르주아적 지식인들에게 자본이 맡긴 역할임을 과거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만의 문제가 아님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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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의 두 개의 커다란 두 계급진영과 일치하는 또 민족문제에 대한 서로 화해 불가능한 적대적인 두 개의 세계관을 표현한다. 전자가 민족체의 발전을 제1원칙으로 삼고 이에 의해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이 발생하고 부단한 민족적 분쟁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모든 민족의 민족적 발전을 찬성하기는커녕 다른 민족에게 적대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며(국익을 위해 이라크에 파병하겠다는 주장을 보라!) 그들이 유포하는 환상에 대해 대중들을 경계시킨다. 그리고 강제나 특권에 기초한 것이 아닌 모든 민족 동화를 원칙적으로 환영한다. 또한 민족적 차이를 없애고 민족적 장벽을 제거하는데 기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고 민족체간의 유대를 더욱더 긴밀하게 하거나 민족들을 융합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을 지지한다. 전자가 민족과 민족국가 내의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지의 공동운명과 단일한 이해를 선동할 때 후자는 여러 나라 프롤레타리아의 전국적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는 국적과 관계없이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공통된 이익을 지적하고 전면에 내세운다.
언어와 문화에 있어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전자는 민족 언어와 민족문화의 배타성을 주장하고 가능한 경우 특권을 주장하고 강제할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어떤 한 언어의 특권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서로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다면 스스로 다수가 이해하는 언어를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도 ‘민주주의와 세계노동자계급운동의 국제문화’를 주장할 것이다.
문제가 이러할 때 그들 자유주의적 혹은 부르주아적 지식인이 무엇보다도 민족(국가)의 공통된 이익을 최선에 두는 것은 당연하며, 민족문제에 계급적 관점을 첨가해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계급간의 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의 일부가 우리 민족(국가)이 잘살려면 ‘영어공용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나 또 다른 일부가 필리핀, 인도가 영어는 잘하지만 일본이나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우수하지도 생활이 국제적이지도 국민생활이 행복하지도 않다고 하는 것을 통해 ‘영어공용화’를 반대하는 것은 본질에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코드의 문제이고 취향의 다양성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들 모두 눈감고 있는 것은 전자의 두 나라나 후자의 두 나라에서 모든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지배세력은 노동자계급과 피지배세력에 비해 엄청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세력들 혹은 그들의 자식들 중 영어를 잘하는 자들이 피지배 세력과 그들의 자식들에 비해 훨씬 많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전자는 제국주의 세력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부르주아 국제주의’에 대한 세계적 감각을 갖고 있다는 점과 자신들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또 다시 자신을 위해 사용하려는 부르주아적 감각과 영특한 머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후자보다 우월할 뿐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그들이 영어를 더 잘하는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절대 아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들이 지배계급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또한 그 결과로 유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교습, 연수, 조기유학 혹은 원정출산을 통해 영어를 잘할 수 있는 기회를 피지배계급 보다 엄청나게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치부하고 능력을 키우고 또 그것을 이용하여 남의 것을 더 뺏는 재주가 그들의 본성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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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이번에 슬쩍 내놓은 ‘영어상용화’ 정책은 “동북아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외국인 투자를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 필요하고 또ꡒ주한 외국기업 임직원의 56.7%가 한국인의 영어소통 능력에 불만이 있”고, 그저 “영어를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없도록 상용화하자는 것일 뿐, 공식 언어로 삼는 공용화 정책은 아니”고 “외국어를 잘하는 공무원에게 인사 가산점을 줄”것이고 “직원들의 영어실력을 길러 2006년 이후 간부회의를 영어로 진행할 수 있도록”할 것이라는 것이 요점이다. 이러한 내용이 알려지자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전처럼 찬반으로 나뉘어져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고 있으며 논의의 근거도 예전의 것들과 유사하다. 물론 서울시의 정책에는 과거 ‘영어공용화’ 논란에서 볼 수 있었던 나름대로는 진지했던 그 어떤 문제의식도 담겨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앞서 ‘영어공용화’ 논란에서 보았던 모든 문제점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따라서 당시 쏟아졌던 다양한 비판들은 지금도 자신의 위치에 맞게 유효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배외주의로 귀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의 통일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영어상용화’ 정책의 일부는 이미 집행되고 있다. 또 이것이 전면화 되는 것은 이후 정책을 둘러싼 여러 힘 관계와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만일 정책이 집행되고 이에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그를 시장으로 뽑아준 서울시민이 감수해야할 업보이다. 아무튼 이 정책은 집행되더라도 실패가 명확히 예견되는 정책이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에서 영어교육은 서울시가 시행하려는 것 이상으로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으며, 영어를 잘했을 때 받는 특혜 또한 서울시가 소수에게 제공하려는 ‘인사 가산점’ 이상이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지금 그가 개선하려는 그 상황이다. 언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명박 시장은 2006년 간부회의를 영어로 진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한다. 또 그는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영어를 간부회의에서 구사하게 될지 아니면 관광지에서 사용하게 될지는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만일 그가 자신의 재선을 확신하고 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라면 그는 꿈이 야무진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게 해로운 정책을 추진함으로서 재선을 꿈꾸기 때문이다.(한국에서 반미는 이제 상식이다.) 또한 그가 자신의 재선과 무관하게 소신으로 이 정책을 실천하는 것이라면 그는 자신이 오늘날의 친일파, 즉 친미사대주의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그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아 보인다. 한/노/정/연

2004-05-27 00:00:00

☞ 원문 : [ http://kilsp.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2&item=&no=1735 ]